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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21:53:12

오맹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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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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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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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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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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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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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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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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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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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吳猛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세운(世雲). 강주(江州) 예장군(豫章郡) 분녕현(分寧縣) 출신.

2. 생애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여름철에도 모기를 손으로 쫓지 않았는데, 이는 모기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부모님을 물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오맹이 마흔 살이 되던 해, 다른 마을 사람인 정의(丁義)로부터 신비한 방술을 전수받았다. 이후 예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물이 매우 거세었으나, 오맹은 배나 뗏목을 이용하지 않고 흰 깃털 부채로 물을 그어 건너갔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워하였다.

유량(庾亮)이 강주자사를 지낼 때 갑자기 병에 걸리자, 오맹과 관련된 신비한 일화를 듣고, 그를 불러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오맹은 오히려 자신의 수명이 이미 다했음을 눈치채고, 미리 관을 준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오맹이 먼저 사망하였는데, 시신은 생전과 다름없이 온전하였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는데도 그 시신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유량에게 불길한 징조로 여겼고, 실제로 유량의 병은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