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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5:14:57

예수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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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유럽3. 동아시아
3.1. 중국3.2. 일본3.3. 베트남3.4. 한국
4. 아메리카
4.1. 북아메리카4.2. 남아메리카
5.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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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수회의 선교 활동을 다룬 문서.

예수회의 선교 판도에는 스페인에 의해 점령된 멕시코 페루, 그리고 대항해시대에 발 맞춰 무역이 흥성하게 된 인도 중국, 일본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수회의 선교는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그 활동 반경이 매우 넓었다.

2. 동유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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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가 직접 우니아트 교회(오늘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등의 기원)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후 해당 교파들의 운영 및 교육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3. 동아시아

포르투갈 아시아 지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예수회의 아시아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예수회는 비록 엄격한 조직이기는 했지만 현지 사람들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사원의 파괴·이단심문 등의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16세기 살라망카 대학에서 비교적 유화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교도 대전'을 해석했던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에 맞춰 예수회는 현지 적응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신자의 자격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이 사도신경을 믿는 사람들이면 신자라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무작정 현지의 신앙을 탄압하기보다는 현지인들의 사상을 ' 그리스도교적으로' 만드는 것이 나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덕분에 당대 동아시아 선교활동 세력 중 예수회가 가장 많은 신자들을 만드는 공적을 세웠다.

3.1. 중국

이러한 사고는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 못지 않게(어쩌면 그 이상으로) 고도의 체계를 갖추고 있던 중국의 정치와 학문 세계를 접한 예수회는, 단순한 ‘그저 천주교가 유교보다 좋으니 천주교 믿어야 된다’ 식의 그리스도교 우위의 전도만으로는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특히 중국인들은 고도로 전문화된 유교를 중심으로 한 중화사상이 매우 굳건했기 때문에 유럽의 문명을 설파한다 한들 씨알도 안 먹혔다.

먼저 선교의 거점이 된 곳은 인도였는데, 포르투갈이 1513년 고아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선교사들이 원활히 활동할 수 있었다. 하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나서 크게 성공했고, 중국 진입을 노리기도 했으나 당시 명나라 정부의 해금령으로 실패했다.

이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통해 진입한 마테오 리치와 미켈레 루지에리 등의 신부들에 의해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미켈레 루지에리는 불교 천주교를 비견하여 선교를 시도한 '천주실록'을 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마테오 리치가 유교적 관념을 천주교와 접목시켜 선교에 나서면서 천주실의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지에도 전래되어 동아시아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아담 샬이 명청 교체기에, 조아킴 부베와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등이 청나라 시대에 활동하면서 교세를 펼쳐나가게 된다.

명나라 때 처음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용어 문제 관련해서는 적당히 넘어갔고,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 문화로 규정해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단순한 종교를 넘어 정치, 사회적 철학으로써의 위상을 누리고 있는 유교의 가르침을 배워 그에 맞추어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고 납득하게 하는 '현지화' 방식을 택했는데[1]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방침은 예수회의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마테오 리치 사후 예수회 중국지구 회장 직무를 계승한 롱고바르도(N. Longobardo)가 조상제사 허용 여부와 ‘Deus’에 대한 중국어 용어 사용 여부에 대해 수도회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1628년 1월 가정(嘉定) 회의를 개최했고,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Deus’에 대한 용어로 ‘천’(天), ‘상제’(上帝), ‘두사’(斗斯)[2]를 금지시키고,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통일할 것, 다른 하나는 부모와 조상, 위대한 스승에 대한 효도와 공경의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조상 제사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3]

예수회 선교사들은 황제의 관료로서 활동하며 황제의 시강을 맡는 한편, 중국의 지식인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중국어 유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익혔다. 그들은 상류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발달된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한편, 중국 전통 사상과 가톨릭의 공통점에 착안해 중국의 가톨릭화를 모색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련의 성과는 천주교의 전통이 유교를 비롯한 중화권 전통과 상당 부분 동치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학술적 교류를 통해 종교적 교류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다. 유교 자체가 주나라 시절부터 있던 중화권 전통을 이리저리 융합해 하나의 사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었으므로, 예수회의 노력은 유학자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것이다.

물론 교세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의 가톨릭은 그다지 번성하지 않았다. 서광계, 이지조 등의 유학자들이 가톨릭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중국의 1억 인구 중에 마테오 리치 당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23만 명이었고, 명 왕조가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자가 된 청(淸) 왕조 강희(康熙) 원년( 1662년) 시점에서 중국 안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11만 명 수준이었다. 이는 센고쿠 시대 일본만큼의 수준도 아니었다. 명 왕조의 위기 시대에 적대감이 폭발한 남경교안, 아담 샬 때문에 천문 기관에서 밀린 양광선의 박해 시도 등이 외래 종교에 대한 거부감[4]도 터져 나왔다. 높으신 분들이 유교 전통과 천주교 전통이 닮았다고 하거나 말거나 평민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고, 중국 정부에서도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용한 기술자'로서 천문 관측, 기계 기술 등의 측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 폐하의 넓고도 크신 아량'으로 '이국에서 온 뭣도 모르는 야만스런 것들의 별 것 아닌 잡소리'까지도 통 크게 허용해 준다는 개념이었지 종교적으로 이들을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언제까지나 '유교적' 관점으로 천주교 전통을 수용하며, 겸사겸사 서구권 기술을 흡수하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5]

하지만 그들이 목표로 했던 '중국 복음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해도,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에 예수회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인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바깥의 지식들과 사상들을 습득했고, 거꾸로 공자, 맹자의 이름을 라틴어화하여 서양에 전할 수도 있었으며, 중국 유교의 가르침이 볼테르[6] 라이프니츠, 몽테스키외, 잠바티스타 비코 등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의 철학에 영향을 주게 된 것도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번역되어 전해진 중국의 유교 경전들에 힘입은 것이었다. 청 왕조와 제정 러시아 사이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과정에서 라틴어 통역을 담당하는[7] 등의 많은 업적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있었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8]의 경우 궁정 화가로서 중국의 화풍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시기를 받아 고발당했다. 논점이 된 것은 기독교의 유일신인 야훼(Deus)에 대한 마테오 리치의 유명한 한자 번역어 '천주(天主)' 그리고 '상제(上帝)'라는 용어의 적법성에 대한 것, 그리고 제사 허용 문제였다. 예수회와 예수회를 제외한 여러 수도회 간에 1634년부터 1742년까지 있었던 ‘Deus’의 용어 사용, 조상 제사 및 공자에 대한 석전례와 관련한 교리상 현지 적응주의 적용 여부와 기독교 신학적 차원에서의 논쟁을 중국의례논쟁(中國儀禮論爭, Controversia de ritibus)이라 한다.

현지 적응 중심의 예수회의 뒤를 이어 중국 선교에 동참한 원칙적[9]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가 예수회와 전례 문제로 대립한 것은 17세기 초반부터였다. 주로 도시의 상류층, 지식인과 접선하면서 '유교화'된 제사의 종교성보다는 문화성을 더 접한 예수회와 달리 시골 지역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유학'으로써의 제사의 면모보다는, 미신적인 요소가 더 강한, 기복적 조상 숭배로써의 제사들을 자주 목격했기에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10]

문제의 촉발은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모랄레스(Juan Batista de Morales, 1597-1664)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633년부터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하다 6년만인 1639년에 추방되는데, 복건성 복안에서 전교 선생이었던 중국인 왕다두(王達竇)를 통해 중국의 조상 제사라는 것을 접하고, 마테오 리치와는 달리 "이런 건 모두 미신적인 종교 의례"라 단정해 17개 조항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했다. 이어 1643년 모랄레스 본인이 직접 로마로 건너가 당시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전교 방법의 가부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우르바노 8세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급서했고, 후임이 된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9월 12일 종교재판소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 안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중국식 의례를 금지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예수회에서는 1651년 마르티니(Martino Martini, 1614~1661)를 로마로 보내서 중국에서의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공경의 표현이고 문화, 정치적 의례일 뿐이지 종교적 의미가 결코 없음을 강조했고, 이걸 금지시키게 되면 중국에서의 전도도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훈령을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16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다시 “중국의 신자들은 공자와 조상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다. 3년 뒤인 1659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폴랑코(J. Polanco)가 다시 인노첸시오 10세의 훈령과 알렉산데르 7세의 훈령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를 교황청에 질의, 10년 뒤인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모두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 구체적 환경에 따라 적용돼야 한다”는 절충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도미니코회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모랄레스의 후임으로 도미니코회 중국 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었던 나바레테(Domingo Fernandez de Navarrete, 1610~1689)가 1674년 로마로 돌아가 정식으로 "예수회 저것들이 중국에서 전도하는 것에 대해 교황청에서 나서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다시금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어서 1676년에는 예수회의 노선을 비판하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예수회에 불만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의례 논쟁의 무대를 중국 내부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이러는 사이에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뀌었고, 기존 명 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명한 판단력을 발휘해 왕조교체기 중국에서 살아남아서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가 된 만주족 왕조의 신임을 얻는데도 성공한다.[11]

서양에서도 포르투갈이 쇠퇴하면서 이전까지 주로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남유럽 출신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동방으로의 기독교 전도의 판이 새롭게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로 넘어갔다. 강희제의 치세에 해당하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침 기존에 바티칸 교황으로부터 선교관할권을 인정받아 활동하던 포르투갈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루이 14세 1685년 중국으로 파견한 장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1643~1710), 죠아생 부베(Joachim Bouvet), 장-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1654~1707) 등 다섯 명의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는 중국에서 ‘궁정 수학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몽골 원정 중에 학질에 걸려 고생하던 강희제에게 약재를 구해 주어 강희제를 치료해 주고 그 신임을 얻어 황제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며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펴나갔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의 쇠퇴로 기존에 포르투갈이 교황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던 중국에서의 선교관할권을 차지해 동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전도의 '판'을 주도하고자 했던 프랑스 왕정의 의도도 담겨 있었다.[12] 어떻게 생각하면 프랑스 절대왕정과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대립이 중국에서 전례논쟁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전례 논쟁은 이후의 강희제[13] 시대 선교의 자유가 허가되면서 정점을 맞는가 했던 예수회의 선교는 이후 커진 전례 문제로 인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다.

강희제 자신이 몸소 북경의 천주교당에 '경천(敬天)'[14]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는데, 이는 가톨릭의 천주(여호와)를 중국의 전통적인 천(天)과 동치시켜 판단하였으며[15] 또한 기독교의 전통이 동아시아권 전통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동치되는 개념이니만큼 당연히 동아시아권의 전통인 조상 제사도 가톨릭의 예배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 할 의식이며 어느 한쪽을 버리거나 어느 한쪽만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할 수 있고 교류가 가능한 의례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다시금 전례 논쟁의 불이 붙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684년 복건의 종좌대목(주교)에 임명된 샤를 매그로(Charles Maigrot, 1652~1730)로부터였다.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꽉 막힌 꼴통이었던 메그로 주교는 1693년 3월 20일 그는 자신이 관장하는 교구 안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자를 표현하는 용어인 ‘데우스’를 지칭하는 용어로 ‘천’이나 ‘상제’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또한 조상 제사나 공자에 대한 석전례에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예전 도미니코회가 주장한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에 북경에 거주하던 예수회 소속 그리말디(P. Grimaldi), 토마스(A. Thomas), 페레이라(T. Pereira), 제르비용 등의 선교사들이 1700년 11월 30일, 직접 황제인 강희제에게 직소해 중국에서의 의례 문제에 대해 본인들이 잘못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해 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강희제의 대답은 “니들 고쳐야 할 거 아무 것도 없는데?”라는, 사실상 예수회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문제는 본격적으로 바티칸의 교황과 중국의 황제, 양자간의 정치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예수회가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강희제에게 청원한 것에 대해 교황은 교황대로 "니들 입장 지지를 왜 교회가 아니라 중국 황제한테 구하고 앉았냐? 니들이 예수님 따르는 성직자지, 황제 모시는 환관이야?"라고 불쾌해했고, 황제는 또 황제대로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비방하고 부정하는 교황이나 선교사들을 두고 "종교 단체가 지금 어디서 자꾸 우리 전통 문화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시비를 걸어? 그리고 이미 얘기 다 끝난 걸 저것들은 왜 자꾸 들고 나오는 거야?"고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강희 43년인 1704년 11월 20일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기존 회칙에서 한 술 더 떠서 예수회의 중국에서의 Deus에 대한 번역어로 오직 ‘천주’만을 허락하고, 기존 중국의 전통인 공자에 대한 석전 및 조상 제사를 모조리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중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에 참석, 집전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아울러 조상 제사에 사용되는 신주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할 것을 회칙으로 선포하면서, 추기경이었던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1668년 12월 21일 ~ 1710년 6월 10일)이라는 인물을 특사로 파견하여 "교황청의 관행에 정통하며 교황에게 신임 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내의 수도자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희제에게 요청했다. 문제는 그게 가톨릭 신자들에게나 당연한 말이었지 강희제나 다른 중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강희제는 자신을 찾아온 교황의 특사 투르농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 집단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교왕[16]에게 신임받는 사람'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대청(大淸)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 데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있는 용상과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중간쯤에 있고, 어떤 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으며 만일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느님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쉽게 얘기하자면 “어차피 똑같이 천주 믿는 사람들끼리 누구는 신임하고 누구는 신임 못하고가 어디 있냐. 누구는 교왕이 신임하니까 믿어도 되고 누구는 교왕이 신임 안 하니까 믿으면 안 된다니, 그럼 교왕이 신임 안 하면 그 사람은 천주 믿는 사람 아니냐? 그러면 니네들은 여태껏 니들끼리도 서로 신임을 못할 사람(예수회)을 우리한테 보내서 천주 믿으라고 전도한 거네?”고 교황을 비난한 거다.

또한 특사가 말한 '교황에게 신임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안의 수도자와 신자를 관리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강희제는 “중국에 10년 이상 거주한 자로서 짐이 보기에 중국인의 생활과 언어, 풍습을 익히 아는 자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17] 중국 내의 기독교 신자들을 감독할 인물이라면 교황이 아니라 황제 자신이 임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사 허용 문제에 대해서도 강희제의 뜻은 강고했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위대한 스승이기에 존경받는 것이지, 행복이나 벼슬, 재물을 얻으려고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지 않는다. 조상 숭배는 사랑과 추모의 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조상의 은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낱 미물조차도 죽은 어미를 위해 여러 날을 슬퍼하는데,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해 무관심한 서양인들은 금수만도 못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중국인에 견줄 만 하겠는가? 우리가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그 안에 조상의 영혼이 거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공자를 존경하는 이유는 덕을 숭앙한 그의 원칙과 교육 체계, '윗사람과 조상을 공경하라' 하신 가르침 때문이다. 너희가 너희의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도 그들의 고귀한 행위 때문이 아니더냐?

그런 와중에 교황이 파견한 특사 투르농마저 결정적으로 무사히 해결될 수 있었던 "오해"를 더 꼬아 놓고 말았다. 마테오 리치에 비하면 중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전략적인 외교술로 협상을 해낼 판단력도 모자랐던 투르농은 1705년 12월 4일 북경에 도착해서 보니 분위기도 그렇고 강희제를 설득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어 이듬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문제는 그러면서 앞서 교구 내의 중국식 제사 의례를 금지해 중국에서 전례 문제를 재촉발시킨 당사자이기도 했던 메그로를 '중국통'이랍시고 강희제에게 추천했다.

강희제는 교황의 특사가 '중국통'이랍시고 추천한 메그로에게 한자 몇 글자를 골라 짚어 주면서 읽어 보게 했고, '전임자'이자 같은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저술한 기독교 교리 개설서 천주실의를 읽어 보게 했지만, 메그로는 어느 것도 읽지 못했다. 강희제는 이런 한심한 꼴에 격노했다.
중국의 글자도 하나 읽을 줄 모르고, 중국어도 한 마디 하지 못해 대화할 때는 반드시 통역이 붙어 있어야만 하는, 이런 자들이 감히 중국 경서의 도리를 운운하다니, 마치 문밖에 서서 집에 들어와 본 적도 없는 놈이 그 집안의 일을 논하는 것마냥 그 하는 말이 조금도 근거가 없도다![18][19]

결국 투르농은 중국을 벗어나기도 전인 12월 17일 남경에서 강희제가 메그로를 쫓아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1707년 1월 25일 ‘남경 명령’을 공포했다. 그 내용은 중국 의례 금지 명령과 황제가 기독교에 대해 묻는 것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강희제는 투르농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함과 동시에 중국에서 전도 사역 활동을 희망하는 선교사들은 '영구히 서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기재된 인표(印票)를 소지할 것, 인표를 발급받으려면 마테오 리치가 정한 규율을 따를 것을 선서하도록 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기존 훈령보다도 더 강경한 어조로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 조치를 담은 칙서 '그날들(Ex illa die)'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중국 의례에 대한 7개 조항’으로, ‘천주’ 이외의 용어 사용 금지, 중국 전통 조상 제사 및 공자에 대한 석전 금지[20]였다. 강희제 역시 한문으로 번역된 이 칙서를 접하고 "이것들이 한자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건방지게 중국의 도덕 체계가 잘못됐네 어쩌네 시비를 거네?"라며 제대로 격노해 1717년 4월 16일 금교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황제의 분노가 담긴 금교 조치로 각지에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기독교 신자에 대한 체포 조치 등 탄압을 시작한 지방관들도 생겨났다.

유교식 제사에 대한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우상숭배 규정 및 금지 회칙이나 이를 따라서 중국식 전통을 거부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강희제는 “앞으로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중국에 살 사람에게만 체류를 허가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21] 물론 베이징 안의 천주당도 강희제 치세에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서양인 선교사들도 그곳에 상주할 수 있었다.

클레멘스 11세의 훈령을 가지고 두 번째 교황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카를로 암브로조 메차바르바(C. A. Mezzabarba, 1685~1741)[22]는 1720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해, 강희제를 알현하고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도 허용 및 중국 전통 의례 관련 금지령을 실시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강희제는 “내가 중국에서 기독교 전도를 금지한 것은 너희 법왕이 낸 「그날들」(Ex illa die)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메차바르바는 고육지책으로 교황의 칙서를 변형시켜서라도[23] 강희제와 타협하려 했는데, 1721년 1월 14일 이른바 ‘준행8조’(准行八條)를 강희제에게 제시했지만 강희제는 자신의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메차바르바는 강희제의 생각을 더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중국을 떠났고, 이듬해 강희제는 붕어했다.

옹정제 건륭제에 의해 이 조치는 고수 혹은 강화되어,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에는 그리스도교가 쉽게 발을 붙이지 못했다.[24]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는 강희제보다 더욱 기독교에 대해 가혹한 인물이었는데[25] 1724년 흠천감에서 천문 분야에 종사하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중국 바깥으로 추방시키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 자체를 전부 막아버렸으며,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믿는 것도 금했다.

건륭제 때에 '대교안'이라고 해서 선교사들이 조정의 금령을 어기고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전도하다 발각되어, 11개 성(省)에서 천주교도 400여 명, 선교사 18명이 체포돼 심문을 받았다. 다만 이들 가운데 옥중에서 병사한 사람을 빼면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26] 중국인 신자들은 장형 및 변방 유배라는 꽤 가혹한 처벌을 받은 반면 선교사들은 종신금고형에 처했다가 1년도 안 되어 사면하고 풀어 주는데[27] 표면적으로는 ‘법외시은(法外施恩)’ 내지 ‘법외지인(法外之仁)’이라고 해서 중국 사정을 잘 모르고 국법에 어두운 외국인들(법외)이니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풀어 준다는 것이 이유였고, 가톨릭이 기존 청 왕조의 지배 체제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은데다 천문, 역법 관장이나 의료 같은 서양 기물로 황제가 '봉사'를 받은 게 있다 보니 그런 천주교에 대해서 갑자기 "너네 앞으로 믿지 마라"라고 해 버리면 그동안 황제가 해 온 행위, 도덕적 정당성에 손상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 #

이후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칙서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ri)를 선포해 1715년의 칙서 준수[28]와 함께 더 이상 의례에 대한 논란을 금지시킴으로써 의례논쟁을 종식시켰고, 1773년 7월 21일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예수회 수도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만주국(滿洲國)의 공자 숭배에 대해 교황 비오 11세 1935년에 천주교인의 공자공경 예식 참여를 허용했고,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허용했으며, 193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가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선포해 공자에 대한 석전례, 조상에 대한 제사 거행 및 참여가 허용되게 되었다. #

3.2. 일본

일본 센코쿠 시대 유력 다이묘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는 등 교세가 크게 흥성했다. 유교보다 불교, 특히 타력구원 성향의 정토종 계열이 흥성했던 일본에서는 내세관을 갖춘 그리스도교에 훨씬 개방적이었고, 예수회도 극단적인 선악관을 가진 신란의 정토진종에 대해 ' 마르틴 루터의 무리가 이미 일본에 있다'고 발언하는 등의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유사점은 천주교 전도에 큰 도움이 되어, 중국과는 달리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민간종교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남만사(南蠻寺)[29]와 선교사 양성지, 그리고 화승총과 직물을 비롯한 활발한 무역으로 흥성하던 천주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권 말기부터 서서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 노예가 판매되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의 반감, 엔랴쿠지 등 불교 세력을 압도하면서 견제구로서의 의미가 줄어든 천주교의 전파, 그리고 화승총 무역 등으로 지방 정권의 군사력이 뒷받침되던 점 등이 통일 정권을 향해가던 일본 집권자의 압력을 부르게 된 것이다. 예수회가 후원해 교황까지 만나고 온 일본인 덴쇼 소년사절단도 유명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를 거쳐, 에도 막부로 진입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쇄국 단계에 들어서고 선교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선교 없는 교역만을 조건으로 네덜란드만이 흔적을 남긴 채 서양 세력은 완전히 추방되어 예수회 선교도 사실상 종결되고, 시마바라의 난으로 남은 그리스도교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진다.

3.3. 베트남

이후 예수회 등의 선교 세력이 향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프란체스코 부소미 등의 신부는 당시 남북[30]이 갈려 격하게 대립 중이던 베트남에 진입해 집권자들과 교역을 트고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두 정권이 전쟁보다 내부 안정을 우선시하면서 교역을 통한 무기 확보에 열의가 줄어들고,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통 관습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예수회 선교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베트남에는 예수회 대신에 조선에도 선교사를 파견했던 파리 외방전교회가 선교를 담당하게 된다.

3.4. 한국

서양 과학기술 및 천주교 관련 책들이 조선의 연행사(사신)들에 의하여 국내에 소개되어 실학 사상이 싹트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국내의 의견은 18세기 이전까지 대개 비판적이었다. 한때 서광계가 조선 사신으로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천주교 선교를 노리기도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소현세자 아담 샬 신부와 교류했다는 아담 샬의 일방적인 주장만이[31] 조선 내 예수회 선교의 흔적으로 남았다. 즉 천주실의 몇 권과 연행사가 선교사들과 만난 게 다였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 선교에 가장 힘을 쓰지 않았음에도, 아니 아예 신경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근현대에 천주교를 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교회조직을 만들고 사제를 요청하며 결국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게 된 곳은 한반도였다. 만약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아예 자리잡고 중국에서처럼 활동했다면, 한국은 구한말 이전 본격적으로 서구와 교류했을지도 모른다. 이양선을 대한 것과는 다르게 했을 테니까. 물론 이는 다소 낭만적인 추측이기는 하다.

한국 천주교 교구들이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에 의해 창설되어 파리외방전교회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 예수회 스스로가 교구의 교육 과정과 사상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제 양성을 고수한다는 점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예수회는 무엇보다도 한국에 늦게 진출하였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교구와의 관계가 어려운 점도 있었다고 한다.

이미 파리 외방전교회가 교황의 명에 의해 박해시대의 한국에 파견되어 한국 선교를 위해 큰 공을 들이며 순교자들이 생겼다. [32][33] 이렇듯 파리 외방전교회는 회원대비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에 교계제도의 기틀을 잡고, 방인 사제를 육성하고, 교세를 확장하는 등 한국 교회를 사실상 만들다시피 했다.

박해시대가 끝나고 베네딕토회와 메리놀 외방 전교회 등이 한국에 진출하고, 그에 앞서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34]가 한국으로 진출하여 전교와 교육을 담당하였다. 예수회는 해방 후에야 미국의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에서[35]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엔 한국 천주교 파리외방전교회와 매우 가깝고,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활성화된 수도회 베네딕토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등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회가 동아시아 선교에서 중국과 일본 선교에는 긴 세월 동안 큰 공을 들였지만 한국 진출에는 상당히 늦었기 때문에, 현대 한국 가톨릭에서 타 수도회와 선교회들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약간 겉도는 신세가 되었었지만 현재 한국에서 수도사제를 가장 많이 배출한 수도회는 바로 예수회다. 참고로 2위는 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3위는 살레시오 수도회이다.

4. 아메리카

4.1. 북아메리카

예수회는 17세기 초 현재의 미국 동부 및 캐나다 퀘벡주에 해당하는 누벨프랑스와 미국 서부 및 멕시코에 해당하는 누에바에스파냐로 넘어가 선교 활동을 했다. 이들의 활동은 1760년대 교황청의 예수회 탄압으로 활동이 끊겼다가 1830년대 수도회 재건이 이루어진 후 북아메리카 선교 활동을 재개했다.

누벨프랑스에는 1609년부터 1767년까지 이로쿼이, 알곤킨 등 현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했고, 누에바에스파냐에는 1687년부터 1767년까지는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에, 1687년부터 1704년까지는 현재의 멕시코 북서부 및 애리조나 일대에 걸쳐 있는 소노라 사막에 진행했다.

4.2. 남아메리카

예수회는 1767년 카를로스 3세의 칙령으로 추방되기 직전까지[36]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고 파라과이 등등 식민지 각지에서 방대한 양의 영지를 보유하였다.

페루에서는 잉카의 11대 왕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의 궁전을 파괴하고 그 위에 예수회 성당인 <라 콤파냐 데 헤수스 성당(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을 짓기도 하였다. 1668년에 완공된 이 성당에서는 성 이냐시오의 조카 마르틴 가르시아 오네즈 데 로욜라(Martín García Óñez de Loyola)와 잉카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투팍 아마루의 조카 베아트릭스 클라라 코야(Beatriz Clara Coya)의 결혼식이 열렸다.

5.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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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다르게 아프리카에서의 선교는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프리카 일대에서 이들의 선교 기반을 마련해 주었던 포르투갈 왕국의 식민지 경영 방침이 지나치게 가혹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 측에서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신도들을 강제로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다가 엄청난 반발을 초래하고 포르투갈 제국주의 세력이 축출되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1636년부로 가톨릭 선교사들이 모조리 추방되는 과정에서 예수회 역시 철수해야 했다.


[1] 당장 마테오 리치 본인도 선교사로써의 사제복이 아니라 중국의 유학자들이 입는 유건에 도포를 입고 스스로를 유학자라고 자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 Deus의 중국어 음역이다. [3] 아이러니하게도, 예수회 이전 동방 가톨릭 교회 등장은 아무도 딴지걸지 않았다. 물론 그때에는 이미 동방 가톨릭 교회, 당대에 '경교'라는 이름으로 전래된 기독교는 가톨릭에서 보면 '이단'이고 또 천 년도 전의 일이었으니. [4] 사실 '외래 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꼭 기독교에 대해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불교도 후한 명제 때에 처음 전래되고 천 년 동안 삼무일종법난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종교 탄압을 겪어 침체한 시절도 있었다. [5] 만주족 왕조인 청에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철저히 중국화를 추진하면서도 선교사들을 남겨두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6] 여담으로 볼테르는 중국에서 전례 문제 즉 제사 허용이나 '천주' 칭호를 두고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에 치고 받던 모습, 나아가 교황의 해당 문제에 대한 금령이나 이로 인해 중국에서 황제의 격노를 사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추방된 것을 두고 자신의 저서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년)> 제19장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에 대한 보고(Relation d'une dispute de controverse à la Chine)」에서 "예수회나 도미니코회나, 꼴 같지도 않은 것들이 신 팔아서 아주 놀고 앉았네. 자업자득이지"라고 비웃었으며, 이들을 비꼬는 작품도 몇 편 썼다. 볼테르의 <관용론> 집필 동기부터가 ‘ 장 칼라스 사건(L'affaire Jean Calas)’이라는 가톨릭에 의해 자행된 개신교 탄압 사건을 비판하려 한 것으로, 실제로 볼테르는 이 저서의 집필을 통해 해당 사건의 부당함을 사회에 고발,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이끌어 내기에 이른다. 강희제가 중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관용 칙령을 반포( 1692년)하기 7년 전에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 1685년)하고 가톨릭 세력에 의한 위그노 박해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고, 프로이센에서는 1721년 할레 대학 부총장이었던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가 퇴임 기념 강연에서 공자와 유교의 가르침을 들며 "신에 대한 개념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윤리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니까요?"라는 내용의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을 행했다가 소위 '경건주의' 신학자들에게 무신론자로 고발당하고 1723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명으로 프러시아에서 추방되는 등, '중국인들이 가톨릭을 탄압하고 박해한다'고 징징거리기에는 당장 유럽 안에서 가톨릭-개신교 간에 자기네들 종교 교파가 아니라고 서로 욕하고 박해하고 탄압하고 있으니, 그걸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지켜 보는 볼테르 입장에서는 "지금 누가 누구더러 뭐라는 거야?"라고 기가 찼던 것이다. 볼테르의 관용론이나 볼프의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은 모두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7] 네르친스크 조약의 원문은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8] 중국 이름은 낭세녕(郎世寧)이다. [9]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이고, 나쁘게 말하면 근본주의다. [10] 냉소적으로 보면 예수회나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나 모두 자신들이 접한 일면을 가지고 그게 전부이자 본질이라고 믿고 내세운 셈이었다. [11] 청 왕조에 의해 북경을 잃고 남쪽으로 밀려난 남명 정권의 경우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가 청 왕조의 지속된 공세로 궁지 끝에 몰린 가운데 앞서 가톨릭에 귀의한 태후 왕씨(세례명 안나)의 청을 받아들여 '명나라 재건을 도와 준다면 황제인 내가 책임지고 솔선해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퍼뜨리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며 바티칸의 로마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7세부터 미온적인 반응이었고, 그때 바티칸의 로마 교회라고 지구 반대편인 중국에 뭘 지원해 주고 말고 할 여력도 없었다. 청 왕조의 순치제의 경우에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아담 샬에게 만일 자신이 살아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약속할 정도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살아나지 못했다. 바티칸이 영력제의 요청을 수락해 중국을 지원하여 반청복명에 일조했다면, 그리고 순치제가 아담 샬에게 했던 말마따나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면 중국의 역사,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소리일 뿐이다. 애초에 급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면 뭐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고. [12] 프랑스 국적의 선교사들은 포르투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바티칸에 대해 독립적인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중국에서 의례논쟁이 심화해 가면서 기존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방침이 유럽에서 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조차도 프랑스 국적의 선교사들은 오히려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한학(漢學)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유가 사상과 크리스트교 사이의 접점을 강조하는 노선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도 노선을 ‘색은주의(Figurism)’라고 해서, 기존 마테오 리치가 세웠던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한 층 더 심화시킨 것이었다. [13] 입관 전부터 불교를 믿었고 입관한 뒤에는 중국식 선불교에 더해 티베트 불교도 수용했던 만주족 왕조에서, 강희제는 가톨릭의 교리에 관심도 없었고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종교를 탄압하지도 않아서 가톨릭 전도를 허락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조정의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한다. [14] 따져 보면 기독교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문구인 게 잠언에서는 "지혜의 근본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고, 과거 제사장들은 "야훼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하였다. [15] 이는 어느 정도 마테오 리치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16] 강희제는 교황을 교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사실 교황을 법왕 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 조너선 스펜서 ‘강희제’ [18] 쑹녠선 저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 역사비평사, 2020년. [19] 강희제 본인은 다른 선교사들조차도 "이제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철인군주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서양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갖고 라틴어까지 공부할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교황의 특사라고 찾아온 인간이 이런 인간을 '중국통'이랍시고 자신에게 내세우니 강희제로써는 "이것들이 지금 날 뭘로 보는 거야?" 식으로 더욱 빡칠 수밖에. 현대 기준에서 보아도 명백하게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존중, 예의 하나 없는 결례였다. 덧붙여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에 대해서도 강희제는 자신이 옆에 두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에게 "서양인들은 예수가 전한 애제 시기에 태어났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노예와 주인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여 신성한 물질을 마신다고 하는데, 어째서 신은 꼭 자기 아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아들과 인류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냐?"라고 물었는데, 페르비스트는 이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20] 다만 망자의 이름 위에 반드시 ‘천주교효경부모지도리’(天主敎孝敬父母之道理)라고 쓰면 위패 사용이 허락됐다. [21] 강희제의 이러한 태도는 현대 중국이 바티칸 교황의 특권 가운데 하나인 주교 서임권을 부정하고 중국 정부가 주교 서임권을 행사하는 현재의 중국 정책과도 비슷하다. [22] 교황에 의해 명목상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서품되었다. [23] 소 요시토시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내고 조선-일본간 국교를 재개시키려고 하면서 벌인 국서 위조와 비슷했다. [24] 이 와중에 다소 엉뚱하게도 누르하치의 숙청당한 큰아들 추옝의 장자의 장손의 장손으로 이어지는 누르하치 종갓집(!)이 일가족째로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가 옹정제 즉위 후 황8자당 숙청작업에서 잘못 찍히고 이 신앙까지 문제시되어 일가가 내몽골로 유배되는 난리가 벌어져 수많은 일가족이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쟁이라 한들 누르하치의 종가로서 존중받아야할 이들을 몰살하는건 황실의 체면에도 안 좋다 여겼는지 옹정제가 결국 적당한 선에서 못 이긴 척 천자에 대한 충성과 양립하는 신앙의 자유를 눈감아주며 이들을 유배에서 풀어줬다. [25] 기독교를 전도하는 선교사들에게 "나도 그럼 티베트 불교 스님들 몇 명 너네 나라에 보내서 불교 전도하게 해 볼까? 니들 그 사람들한테 무슨 말 하고 어떻게 접대할래?"라고 따져 물었다. 볼테르의 「중국인과의 회담(Entretiens chinois)」에도 해당 발언이 등장한다. [26] 대교안과 관련해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없다는 거지 건륭제 시절에 처형당한 사람도 분명 있었다. 조선처럼 대대적으로 박해를 안 했을 뿐. [27] 쉽게 말해 ‘선교사 니들 각자의 종교의 자유는 허용할 거고 중국에 오는 것도 막지 않겠지만 (우리가 허가한 사람이 아닌 한) 다른 사람한테 전도하는 건 절대 안 된다’ 비슷한 처분이었다. 현재 중국 당국이 가톨릭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28]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은 중국 전통 의례 금지 사안을 숙지하고 준수하겠다고 서약해야만 전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29] 당시 천주교 교회(= 성당)을 일컫던 일본의 용어. [30] 북쪽의 찐氏, 남쪽의 응우옌氏 [31] 아담 샬 소현세자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하고 주고받았다는 서신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짓이 아니라도 서신 교환 정도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32] 파리 외방전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소속 주교와 신부의 숫자가 매우 적다. 이 때문에 선교지에 주교를 파견하여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전략으로 선교를 해온 것.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원 숫자(13명)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규모를 감안하면 매우 큰 피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처음 교황청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위탁했을 때,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회원이 불과 10명이었다! [33]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살해당한 파리외방전교회원 숫자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24명의 파리외방전교회원들이 살해되었다. [34]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 [35] 유럽의 예수회 관구가 아닌 미국의 예수회 관구가 해방 이후에 한국에 지부를 설치했다는 것에 주목할 것. [36] 참고로 브라질에서는 1759년부로 추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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