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 이탈리아어: Giuseppe Castiglione)[1]는 밀라노 공국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화가로 청나라에서 활동하였다. 역사상으로는 화가로 더 유명하다.2. 생애
중국식 이름은 랑스닝(郎世寧: 한국 한자음 낭세녕)으로, 1688년 7월 19일 밀라노 공국의 밀라노에서 태어났으며 1766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19세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본래는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의 분쟁으로 유럽의 기독교가 갈라진 즈음에 동아시아에 선교하고자 청나라에 예수회의 화원 신분으로 1715년에 파견되었다. 이후 마카오에서 중국어를 학습한 그는 중국어를 잘하여 중국인들과 친해졌고 나중에는 청나라의 고위 인사들과도 친해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와 교류했다.
상술했듯이, 청나라에서는 선교보다는 서양식 투시법과 안료를 이용한 궁정화가로 약 50년간 활약하였다. 그 중에는 청나라 황실 사람들을 그린 그림도 있으며, 그 중에는 황제의 어진을 그린 그림도 있다. 주로 화조, 길짐승, 산수, 초상화를 대량으로 창작했다. 건륭제는 카스틸리오네를 각별히 아껴 일찍이 그에게 정3품의 내무부 봉신원경을 수여했다. 특히 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며 다른 그림들도 그리도록 허락해주었다. 다른 유럽인들과 함께 원명원 내의 서양풍 건물 설계를 담당했다고도 전해진다. 건륭제는 그가 작품을 그릴 건물을 원명원 내에 내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원명원 내의 여의관(如意館)이다. 카스틸리오네와 같은 시대의 화가들은 누구도 그와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다. 미술사적으로 가장 걸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기풍이 청조 전성기 황제들의 품위와 기풍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평가한다.
1757년 카스틸리오네가 70세 생일을 맞자 건륭제는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다. 그가 1766년 77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사망하자 건륭제는 그의 묘지 조성을 위해 300냥을 하사했다. 이후 정3품 벼슬을 추증했고, 현재도 북경에 그의 묘지가 남아 있다.
3. 예수회의 회원으로서
예수회 회원이고, 중국에 오기전 선교사로서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중국에서 선교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카스틸리오네는 위계가 낮은 평수사였고, 정식 선교를 할 수 있는 수도사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카스틸리오네가 관직을 수여받았을 때, 많은 동료들은 이를 두고 천주교를 선전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으나 카스틸리오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예수회 내에서 자신의 임무가 단지 화원일 뿐 선교의 직무는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기 때문이다.중국에 뿌리내린 예수회 선교사에 대해 말할 때, 일반적으론 그들의 주요 임무는 선교이며 중국을 천주교 국가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가 비슷한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예수회는 장기적으로 평신도 수사들의 기술과 예술을 매개로 중국 황제가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으나, 그 염원은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 등으로 청조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19세기 후반에나 이뤄질 수 있었고, 그 때까지 수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이 추방되거나 순교해야만 했다. 카스틸리오네는 선교보다는 황제의 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우선시 했다.
강건성세 청나라에서는 전례 문제[2]가 대두되어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는데[3], 카스틸리오네는 서품을 받은 수도사제도 아니었던데다 황제의 총애를 받은 덕에 마카오로 추방되지 않고 북경에 잔류할 수 있었다. 반세기를 청나라에서 활동하다보니 그 화풍도 명확한 변화과정을 겪었다. 그의 그림은 오랫동안 후대 중국의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1766년 사망한 후 건륭제로부터 시랑[4] 벼슬을 추증받았다.
그러나 카스틸리오네를 비롯한 예수회 수사들의 활동 덕분에 강건성세 청조는 천주교 포교를 금지하면서도 서양의 문화와 기술을 흡수할 수 있었다. 강건성세를 배경으로 한 여러 중국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서양식 시계나 천문 및 역법, 악기, 안경, 망원경, 머스킷 같은 놀라운(!) 과학기술 및 서양식 문화예술은 이들 예수회 수사들이 없었으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포교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없다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화원이나 음악가 등의 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건축, 과학기술[5] 및 통번역 업무[6]에서도 서양과 중국의 소통창구 노릇을 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중국의 문화와 예술에 큰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연구와 분석을 거듭한 서양과 달리 청조는 이들을 똑똑한 재주꾼들로만 여기며 필요한 업무에만 써먹을 뿐 서양과의 광범위한 교류에 있어서는 분명한 선을 그었고, 중국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시작해 한세기 넘는 세월 동안 수모와 치욕의 역사를 겪게 된다.
4. 화법
르네상스 시대에 발달한 원근법과 명암법을 중국화에 도입한 것으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5. 부동산 투자
수사이자 화가라는 순박할 것만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카스틸리오네는 불법 부동산 투기를 하다 적발된 적이 있다.[7] 예로부터 북경에 체류하던 예수회 선교사들[8]은 고향에서 받은 헌금이나 유럽 군주들에게 하사받은 자금에다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등의 기술자들이 궁정에서 일하며 받은 급여까지 밑천 삼아 부동산을 매입하고 농민이나 상공업자 신자들에게 농지, 상가, 주택 등을 임대하고 임대료를 징수함으로써 일종의 신앙협동조합(?)을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고 황족을 비롯한 귀족들에게까지 선교사업을 벌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는데[9][10], 이런 관행을 따르다가 카스틸리오네가 팔기군의 토지를 전세로 빌렸다가[11] 관료들에게 들켜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문제는 여기서 걸린 토지가 팔기군의 토지라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던 점, 그리고 이 전세라는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성행하는 길어야 2~3년 이하의 단기 전세가 아니라 반백 년(...) 안팎의 초장기 전세여서 사실상의 편법 매매나 다름없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사실 북경에 거주하는 기인들이 관청에 들키지 않은채 탈세 등의 목적으로 알음알음 써먹던
문제는 이 부동산 투기의 불순한(?) 목적이 집권세력에게까지 들통나서 반체제 반국가행위라는 프레이밍을 당해버릴 수 있었다는 점인데, 차라리 선교사들만 추방당하면 다행이고 이들이 양성한 중국인 신부 및 신자들은 순교도 각오해야 했다. 실제로 북경의 동서남북 천주교당은 황제의 비호와 묵인, 그리고 로비를 통해 작은 사회의 진상이 공론화되지 않은채 중국 선교에 있어 하나의 거점이 되곤 했지만, 타지의 선교사들은 그런 묵인 따위 없이 지방관에게 적발[13]되면 마카오로 강제추방당하고 적발되는 신자들은 배교, 유형, 교수형 등의 박해를 못 면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카스틸리오네는 건륭제가 매우 총애하는 인물이었기에 이 계약은 하해와 같은 은혜로 예외적 적법성을 보장받았다. 건륭제는 이를 그냥 구두로만 보장해준 것도 아니고, 카스틸리오네가 돈을 빌려주며 담보로 잡은 토지와 인접한 노구교에다 황명을 새긴 비석까지 세워주며 "먼 곳에서 와서 생계에 허덕이는데 법도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14], "다음에도 똑같이 걸리면 법대로 처리한다", "관리들에게도 이 건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지는 않겠다", "조기 상환 금지" 등의 일방적인 판결을 내려 카스틸리오네의 편을 들었다. 선교사들로서는 실로 황은이 망극할 따름.
그리고 이 비문이 일종의 비공식적 조례로 기능하여 선교사와 신자들이 추방, 유형, 순교에 이르던 타지와 달리 북경에서는 건륭 연간은 물론 가경 16년[15]까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천주교 선교사들의 부동산 사업이 암암리에 세를 키워나가며 포교에도 크게 기여하여 건륭제의 황8자 의신친왕 영선을 비롯한 많은 팔기군과 귀족 가문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6. 대표 작품
나무위키의 건륭제 항목에 있는 무장한 모습과 청년기의 건륭제의 모습들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흔히 동양화를 볼 때 옛 동양사람들의 글읽는 생활 방식에 맞추어 오른쪽 위부터 왼쪽 아래로 보아야 그림의 흐름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있지만, 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은 서양의 사고방식 역시 영향받았기에 현대인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보아도 그림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경우가 있다.
백준도(百駿圖: 준마 무리)
가로로 큰 그림으로 이 이외의 부분까지 합하면 세로 102cm, 가로 813cm 크기이다. 글과 그림 여러 장으로 이어져 있다. 현재 타이페이의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중이다. 초목 표현과 색감, 원근법등이 서양풍이면서도 공기원근이나 산의 표현이 동양적이며, 그의 말을 그린 작품 중 가장 명화로 꼽힌다. 서양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말의 동세가 역동적이다.
아옥석지모탕구도(阿玉錫持矛蕩寇圖: 아유시가 창을 들고 적을 소탕하다)
커다란 창을 들고 뛰어가는 청나라 군인 아유시(한자 음역:아옥석)의 모습. 직선적인 창의 모습이 날렵한 인상을 주며, 말의 움직임 역시 그렇다.
아유시는 준가르부 출신으로, 청나라에 항복하여 청나라군에서 복무했다. 특히 창술과 기마술에 능해서 건륭제가 총애했다고 한다. 기마 자세가 무척 안정적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특히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듯이 보아야 흐름이 느껴진다.
취서도(聚瑞圖:상서로움을 모으는 그림)
무채색 위주의 다른 동양화와는 다른 화려한 색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서양 정물화의 느낌이 풍긴다. 섬세한 꽃의 표현이 그의 대표작중 하나로 꼽힌다. 1723년 작.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1725년에 그린 다른 한 점은 상하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선명한 색채로 붕어, 흰 사슴, 꿩 등을 그린 그림이 유명하다.
[1]
다른
이탈리아의 예술가인 "지오반니 베네데토 카스틸리오네"와 혼동하지 말자. 이 사람은 판화기법으로 유명한 바로크시대 사람이며, 17세기 사람으로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외에 "카스틸리오네"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에 동명이인이 많으니 참고할 것.
[2]
2019년 7월 현재 전례 문제에 대한 문서가 없어 설명하자면, 기독교가
중국(
청나라)에서 선교할 때 중국 전통과 기독교 교리의 충돌이 벌어지자(예:중국의
유교 전통과 조상 숭배 vs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 선교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를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고, 어느 정도를 허용할 것인지 벌어졌던 논쟁. 이후 기존 질서에 위협을 느낀 청나라 조정에 의해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고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3]
게다가 일부 수사들이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선 것도 있었다.
강희제의 황8자 윤사와 황9자 윤당은
황4자 윤진과 대립하는 차기 대권경쟁자였는데, 윤진이 제위를 이어받은 후 이들은 참혹히 숙청당했다. 이 과정에서 윤당이 천주교에 입교하고 라틴 문자로 전사한
만주어로 윤사와 몰래 연통했음이 들통나자 윤당과 교류하던 예수회 수사들에게도 불벼락이 떨어졌다.
[4]
조선의 좌랑에 해당하는 관위이다.
[5]
흠천감에서 천문 역법을 담당하던 한족 관료들을 못 믿은 청나라 황제들은 그냥 서양인 선교사들을 기용했는데 이 관례가 훗날까지 이어졌다.
[6]
일례로 네르친스크 및 캬흐타 조약에서 러시아와의 라틴어 통역을 담당한 이들이 바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북경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러시아 외교관들도 이들로부터 많은 덕을 보았다.
[7]
자세한 자초지종은 인하대 사학과 이준갑 교수의 저서 <건륭제와 천주교>를 참조할 것. 이 단락의 많은 내용도 이 책을 참조했다. 다만 저자가 중국사 전공이기는 하나 개신교 신자여서인지 한국 천주교에서 따르는 공식적인 번역어(예를 들면 '프란치스코회')를 따르지 않고 직접 번역(예를 들면 '프랜시스회')하느라 천주교 용어에 있어 약간의 오류가 있는 점은 감안할 것.
[8]
예수회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베네딕토회,
파리 외방전교회 등의 후발주자들이 모두 명나라 시절부터
마카오를 발판삼아 선교 루트를 따랐는데, 이 곳에서 중국어 관화와 각지의 다양한 방언을 익히며 광동, 광서, 귀주, 복건, 절강, 호광 등 가까운 강남 지역은 물론 운남, 사천, 섬서, 산서 등의 깊숙한 내지와 험지에도 진출했다. 그 과정에서 도미니코회 등의 일부 풀뿌리 선교에 집중하던 수도회에서는 예수회가 보고 전해오던 황실과 귀족 집안의 정통 유교 예법에서 심하게 변질되어 조상숭배의 기복신앙이나 다름없어진 3대 독자 우리 아들이 진사가 되면 은자 천냥을 바치겠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민초들의 제사를 미신과 다름없는 행위라 판단하고 교황청에 예수회가 올린 것과는 다른 보고를 올려서 강희 연간에 본격적인 전례 문제가 불거졌다.
[9]
이 시절 중국은 은본위 화폐경제가 잘 굴러갔고 상업 역시 활발히 이뤄졌기 때문에 아메리카에서 은을 긁어모으던 스페인 식민제국 및 포르투갈, 프랑스 등의 서양 절대왕정 군주들이 하사한 은자를 중국의 천주교도 상공업자들을 통해 운송할 수 있었고 일부 선교사들은 특기를 잘 살려 황제들의 눈에 들어 높은 급여나 선물을 하사받기도 했는데, 이런 자본금은 고스란히 부동산으로 녹아들었고 이를 발판삼아 교인들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는
루이 14세와
강희제 등 세속군주로부터 받은 돈으로 마련한 자산이었기에 예수회 일시 해산 같은 돌발상황이 터져 교황청에서 압류를 시도했을 때에도 재산권을 보장받았던 중국 천주교회의 확고한 자산이었다.
[10]
이러한 부동산 사업은 중국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및 세계 여러 나라의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에도 대부분 성당, 성지, 학교 등의 부동산으로 자산 포트폴리오가 채워져 있으며, 그래서 회계장부상 현금흐름과 유동성이 떨어져 만성적인 '돈'맥경화를 겪고 있다. 가끔 아무개 주교가 성령의 계시로 주식을 하다 말아먹었다는 바티칸 소식이 들려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1]
전세라는 관념이 있던건 아니지만, 목돈이 필요한 이에게 부동산을 담보로 목돈을 대출해주고 토지를 굴려 수익을 창출하였다는 점에서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전세 제도와 다를 바 없다.
[12]
이는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가 전국적으로 행해지면서도 강희, 옹정, 건륭 세 황제들이 천주교 선교사들이 소개하던 서양 문화예술이나 과학기술에 흥미를 보이던 중국사에서 보기드문 취향을 가졌던 덕에 북경에서만큼은 상시 거주가 허락되고 법의 눈을 피해 알음알음 벌이는 선교사업도 묵인 내지 방조로 지속할 수 있었던 미묘한 처지에 기인한다. 당연히 북경이 아닌 타지에서는 서양인은 추방당하고 중국인 신부와 신자들은 순교하거나 사막 오지로 유형을 당하거나 중동 노예로 팔려가는 등의 수난이 반복되었으니, 북경에서도 외부와 굴비처럼 줄줄 엮이는 경우 많은 신자가 그 꼴로 전락할 수 있어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13]
지방관들도 이에 대해 딱히 일관적이지 않아서 그냥 덮어주는 예도 많았다. 가끔 관리의 식솔이 세례를 받아서 지방관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적극 보호하거나 직접 세례를 받기도 하고, 지방관이 서양인 신부를 추방하는 선을 넘어 아예 처형해버리기도 했다. 만주 귀족들이 입교하는 예도 많았고, 반대로 서양인
백련교 역적(...)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검거했더니 천주교인이어서 일이 크게 번져 성 전체로 교안이 확대되기도 했다.
[14]
실제로는 예수회 선교사들은 명나라 시절부터 꾸준히 주택, 상가, 농지를 사들여왔고 카스틸리오네 역시 중년의 나이였기 때문에 청률에 무지하다는 핑계를 댈 입장이 아니었다. 부동산도 오랜 노하우로 쌓아올린 쏠쏠한 선교실적을 보고한 덕에
루이 14세나 합스부르크 왕가한테 거금을 받아 매입하기도 하고, 돈 많은 거상 또는 팔기군 귀족 출신 신자가 전세 형태로 헌납하기도 하고, 그렇게 매입한 건물에서 문만 걸어잠근 채 천주님께 미사도 드리고 세례도 주고 유럽으로 보내는 보고서도 쓰고 심지어 신부까지 양성하면서 할 짓 다 했다.(...) 조선에서 자생한 천주교 신자들이 역관이나 상인들을 통해
천주실의나 복음서 등의 천주교 서적을 들여오던 거점도 이런 곳이었다. 전세계에 퍼진 부동산과 문화유산이 천주교의 기반임을 생각하면 이런 부동산 자산을 잃은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중국 선교에 있어 최대의 피해일지도 모른다.
???: 지주 노릇을 하며 농민을 착취하다니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15]
선황들과 달리 가경제는 유럽에서 들어온 신기한 과학기술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백련교도의 난에서 관찰되었듯 민심을 어지럽히는 마교(?)가 성행하니 천주교 역시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만주족 명문가에서도 천주교 입교 사실이 까발려지는등 백련교 못지 않은 반정부세력으로 조직화할 염려까지 생기자 가경제는 결국 북경교구의 유럽 출신 천주교 선교사들에게도 흠천감 재직자나 통번역 전문가 등 필수 기술인력이나 연로한 수사들을 제외하고는 추방령을 내렸고, 계속 잠입하는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처벌 수위도 점점 가혹해지며 아편전쟁 전후로는 참수형까지 내려질 정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