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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3:58:03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동방 가톨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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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ська Греко-Католицька Церква (УГКЦ)
라틴어 Ecclesia Graeco-Catholica Ucrainae
영어 Ukrainian Greek Catholic Church (UGCC)

1. 개요2. 역사3.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4. 같이 보기

1. 개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 동방 가톨릭 교회 중 가장 많은 신자들이 믿는 교파이다. 신도 수는 530만으로 추산한다. 상급대주교좌(키이우-할리치) 보유. 현 상급대주교는 스뱌토슬라우(Святослав) 상급대주교.

중심지는 르비우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서부( 할리치나 지방)이다. 우크라이나 전체를 놓고 보면 이 종교 신자는 8% 정도지만, 2015년 조사에 따르면 갈리치아 3주( 르비우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테르노필주)에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 교회 신자이다.[1]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주에서는 과거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이라는 비슷한 교파가 존재했지만 현재 우크라이나 내에서는 교세를 거의 상실했다.

2. 역사

1596년 브레스트 연합으로 분리된 교회이다. 당시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정교회 신자였으나 영토 대부분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정교회 인사권을 거의 장악하고, 가장 높은 액수의 상납금을 내는 사람에게 고위 성직을 수여하는 상황이 되면서 정교회 성직자들이 가톨릭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르부프[2] 정교회 루테니아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르비우 형제단이라는 단체가 우크라이나어로 된 정교회 인쇄물을 발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르부프의 폴란드인들은 이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왕 지그문트 3세는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 목적으로, 르비우 형제단에게 '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르비우 형제단 전원을 르부프에서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새로 동방 가톨릭 교회 하나를 만들어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의 의도대로 그리스 가톨릭교회가 성립된 이후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전역에서 서로 대판 싸움을 벌였다. 그리스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은 배신자라고 비난을 듣는 와중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의 힘을 빌어서 정교회를 믿는 동포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 등 처음 시작은 대략 좋지 않았다. 폴란드 정부는 처음에는 정책적으로 그리스 가톨릭 교회를 적극 밀어주다가 나중에 반발이 너무 심해지고, 결정적으로 보흐단 흐멜니츠키 반란으로 나라가 통째로 뒤숭숭해진 터라 결국 그리스 가톨릭 강요 정책을 완화하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루테니아인들에게 기여하게 되는 바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육 시설들이 종교 기관에 종속되어 있었던 당시,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중세 시대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던 데 비해, 가톨릭 계열 학교들은 이탈리아 반도 르네상스 문화 및 프랑스의 최신 학문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 원래의 나쁜 의도와는 다르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우크라이나에 서유럽의 학문이 좀 더 원활하게 유입되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성경을 보급하고 문해율을 신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현재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가 세력을 떨치는 곳은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이 지배했던 갈리치아(우크라이나의 르비우 주변 지역) 지역이다. 브레스트 연합으로 분리된 나머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은 나중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이 지역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하고 러시아 제국이 들어옴으로써 또다시 정교회 영향권에 놓였다. 당연히 분리를 결정한 이 지역 교회들은 다시 돌아온 정교회 신자들의 박해를 받았고(...), 할리치를 뺀 나머지 지역에서는 반강제로 다시 정교회로 돌아가야 한 경우가 많았다. 친척뻘이던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폴란드 분할 이후 교세를 거의 상실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에서는 가톨릭임에도 여느 동방 교회와 같이 기혼자도 사제로 서품받을 수 있어서,[3] 18세기 후반부터 소련 통치 직전까지 일종의 세습적 성직계층을 이루는 등 족내혼적 경향이 강했다.

할리치 지역이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이은 폴란드 제2공화국에 의해 통치되면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폴란드 당국으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이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이 할리치를 차지하면서 큰 탄압을 받았다. 이오시프 스탈린 러시아 정교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풀어줬지만, 개신교 동방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는 그런 거 없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과 역사와 배경이 비슷하되 규모는 더 작았던 루테니아 가톨릭교회[4]는 소련의 탄압 때문에 본거지의 세력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미국의 교세가 더 클 지경이 되었다. 모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재산들이 러시아 정교회로 몰수되었고, 다른 나라로 이민가거나 아니면 비밀리에 지하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다. 그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말기인 1989년 12월에서야 그 존재가 승인되면서 다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특히 러시아 정교회는 우크라이나 가톨릭교회의 존재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가톨릭교회가 법적 지위를 회복한 후에는 "정교회의 고유 영토를 잠식하려 한다."면서 배척했다. 러시아 정교회 외무담당 힐라리온 대주교도 "우리는 여전히 동방 가톨릭교회를 관계 정상화의 최대 장애물로 보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우크라이나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러시아와의 전쟁 상태가 되자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과 러시아 정교회 사이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 정교회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종교인들이 러시아군 점령지에서 체포되거나 위해를 입고 있다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 교단 측의 폭로가 뉴스위크 지에서 보도됬다.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 대변인은 이를 스탈린 정권 시기 종교 탄압 정책에 빗댈 정도. #

3.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라틴어: Ecclesiae Graecae Catholico Belarusica
벨라루스어: Беларуская грэка-каталіцкая царква (БГКЦ)
영어: Belarusian Greek Catholic Church

브레스트 연합 당시 1595-96년 당시는 아직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민족 정체성이 생긴 것도 아니고 해당 지역의 정교회 주민들은 루테니아인으로 정의되던 상황이었다. 즉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가 신설될 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따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정교회는 같은 전례를 공유했기 때문에 양 교파는 교리와 전례상으로는 차이가 없으며 오늘날 기준으로 예배 언어가 서로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로 갈라진다 뿐이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이 벨라루스를 완전히 장악할 당시 벨라루스 전체 인구의 80%는 동방 가톨릭을 14%는 로마 가톨릭을 8%는 정교회를 믿었다. 물론 식자율이 높지 않던 당시 농민층이 이런 교파 상의 상세한 차이를 구분해서 고른 것은 아니었고, 러시아 제국에서 동방 가톨릭을 탄압하자마자 벨라루스의 루테니아인 상당수가 별 다른 저항 없이 정교회로 원복했다. 물론 처음부터 다짜고짜 탄압한 것은 아니었고, 먼저 예카테리나 2세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에게 "당근"으로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대교구"를 설립시켜 준 대신에, "채찍"으로 로마 교황청과의 연락을 상당부분 제한시켜버렸다.[5]

결정적으로 1830~31년 폴란드 11월 봉기가 러시아 제국 정부에게 진압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에서 폴란드인 귀족 1만여 명을 귀족 계급을 박탈/강등시키고 봉기에 적극 가담했던 귀족 상당수를 시베리아로 유배보내거나 25년 기한으로 징집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정교회 개종 정책에 반대할 세력들이 증발해버렸다. 1839년 러시아 제국 정부는 폴로츠크에 정교회 공의회를 설립하여, 1596년의 교회 연합을 무효화하고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을 정교회와 다시 통합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내려진 이후 벨라루스에서 2세기 이상 교회 의식에 사용되던 교황의 이름 대신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이름이 불려졌다. 상술한 이유로 그리스 가톨릭의 정교회로의 통합은 농민층 사이에서 아무 저항 없이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1839년 이전 아직 벨라루스 인구의 70%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신도였으며 로마 가톨릭이 약 17%, 정교회가 6%, 유대교가 7%, 개신교와 이슬람교 등이 2% 정도였으나, 통합 선언 이후 정교회는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으로부터 150만여 명의 신도와 1607개의 교구를 흡수하며 벨라루스 내 최대 종파가 되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 과정에서도 역시 일부러 벨라루스인 농노들을 부리는 폴란드인/친폴란드파 귀족들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벨라루스 지역에만 특별히 지주들에게 불리하고 농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토지 상환금이 책정되었는데,[6]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가톨릭을 고수하던 귀족들은 아예 다른 폴란드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으로 종파를 갈아타고, 농민들은 러시아 정교회로 갈라서버리면서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완전히 몰락했다.

20세기 초반에는 벨라루스인 민족주의자들이 근세 벨라루스 문화 르네상스에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이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점을 기억하고 교회를 복구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으로 벨라루스 지식 계층이 거의 전멸하면서 교세를 복구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에서는 동방 가톨릭을 폴란드 지주들의 압제의 유산이라고 탄압하면서 교세는 계속 축소되었고, 한때 2백만 신도를 자랑하던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은 오늘날 신도가 전세계에 7천여 명만 남을 정도로 교세가 축소되었다.

4. 같이 보기


[1] 이에 비해 우크라이나 중동부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주로 믿는다. [2] 르비우 폴란드어 발음. [3] 이 부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사제직이 그 본질 자체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사제생활교령 16)"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4] 카르파티아 산맥 그러니까 오늘날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주 루마니아 국경 지대, 이 외에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에 등 지역에 살던 고립된 루신인 공동체들이 주로 믿던 동방 가톨릭 교회이다. [5]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자국 내 정교회 주교를 선출할 때 연방 정부에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성직자에게 주교 자리를 허락한 것과 흡사한 맥락이다. [6] 반대로 같은 농노 해방 시기에 꿀땅이 많았던(다시 말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기득권 귀족층의 소득과 직접 연계되어 있던) 우크라이나의 경우 최대한 농노에게 불리하고 지주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토지 상환금이 책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