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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말청초에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가 중국에 지은 동서남북 천주당( 성당). 베이징을 중심으로 지어졌으며, 특히 조선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2. 4대 천주당
2.1. 동당
왕부정의 천주당
동당 천주당에 관한 기록은 홍대용의 <연기>에 소상하다. 동당은 몽고관에서 북옥하교를 지나 자금성을 따라 가다가 보이는 기이한 기와 지붕을 인 서양식 집이다. 지금의 왕부정 대가 74호에 있다. 베이징 4대 천주교당 가운데 하나인 동당은 명말 2명의 선교사가 세웠으며, 청조가 베이징에 들어올 때 훼손됐다가 순치제 12년에 이 땅을 하사했다. 이때 남당과 같이 건립됐지만 가경 12년에 화재로 폐허가 됐는데, 1884년에 로마식으로 다시 건립됐다. 의화단의 난 때 다시 불에 탔으나, 1904년 배상 형식으로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공동으로 중건하였다.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들은 원근법을 이용한 서양 그림의 사실적인 화법에 감탄하곤 한다. 홍대용은 "북쪽 벽에 그려진 천주의 화상이 모발이 무성하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여, 원근법을 사용한 서양 그림의 입체감에 탄복하였다. 동당 서쪽에는 자명종루가 있고, 누각 아래에는 해시계 일귀석 1쌍이 있다. 서쪽으로 난 문밖으로 두어 길 되는 대가 있었는데, 이를 관성대라 하였다. 대 위에는 집 셋을 세워 놓았고, 가운데 집에 혼의·망원경 등 여러 가지 의기들을 저장하여 두었다.
대 아래 넓이가 수십 묘되는 뜰에는 벽돌을 쌓아 길이가 1장쯤 되는 기둥을 만들어 두었는데, 위에는 열십자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런 것이 무려 수백 개가 뜰에 널려 있었으니, 대개 봄·여름에는 위로 포도 덩굴이 올라가도록 횃대를 놓아 둔 것이다. 기둥 옆에 군데군데 무덤처럼 흙을 모아 둔 것은 포도를 저장하는 곳이다.
뜰 동쪽에 집이 두어 칸 서 있고 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위에 두레박틀을 만들어 두었고, 옆에는 치목을 가로질러서 톱니 바퀴가 맷돌처럼 고르게 돌아가게 하였다. 벽에는 버드나무 물통이 수십 개나 매달려 있었다. 또한 봄 여름에 물을 길어 포도에 대는데, 기계 바퀴가 한 번 돌면 수십 개의 두레박이 차례차례로 물을 끌어 올리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물은 도랑에 고루 퍼져 뜰에 가득 차게 된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포도를 힘들여 가꾸는 것은 술( 미사에 사용할 포도주)을 빚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2.2. 서당
서직문의 천주당
서당 천주당은 라자리스트희의 페드리니 신부가 옹정제 때인 1725년에 서직문 대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건립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 속편>에서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적었다.
서양화가 동양으로 처음 전해진 것은 중국 명나라 말에 예수회 신부가 베이징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선교하며 예수의 기적도와 성모 마리아 성화를 내보인데서 비롯하였다. 조선인이 서양의 화풍을 알게 된 것도 그로 인해서다. 기록을 빌리면, 병자호란 직후 인질로 청국에 연행되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 아담 샬과 친밀히 접촉하다가 1645년 초에 귀국하게 될 적에 그 신부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포함한 서학 서적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폭을 얻어 갖고 왔는데 아마 그것이 서양화가 조선에 들어온 처음일 듯하다.
또 당시 베이징의 동서남북 4곳에 세워져 있던 천주당 중의 서당은 특히 조선의 사신 일행이 즐겨 찾아가 서양식 창벽화 등의 신기함에 놀라곤 하였다. 그러한 그림은 진작부터 여러 관람자의 기행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다가 1780년에 베이징에 다녀온 연암 박지원의 < 열하일기> 중에 양화 항목으로 그 천주당에서 본 희한한 실상이 소상히 기술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양화를 관심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베이징에서 전래된 양화의 실물을 보는 일도 있게 되어, 이규경의 <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양화의 유채 재료와 사실적 색상을 설명한 항목까지 보게 되었다.
2.3. 남당
선무문의 천주당
남당 천주당은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 신부가 명 만력제 33년 선무문 안에 건립한 성당이다.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연행록에는 이들이 방문한 곳이 서당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남당이다. 남당은 곧 서양인의 관소로, 남서쪽에 위치한 선무문 내에 있다. 건륭제 때 통미가경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남당은 현존 건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청 건륭제 40년에 불탔으나 다음해 중건됐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활동했던 곳이며, 소현세자와 교류하였던 아담 샬 신부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옥하관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 사신들은 예수회 소속 서양 신부들과 접촉하기에 용이하였다. 이들 천주당 신부들과의 만남은 조선에 서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당은 김창업의 <연행일기> 이후 연경을 방문하는 사신들이 반드시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1766년 1월 9일 남당을 방문하여 당시 남당의 선교사였던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을 만났다. 그는 모두 4차례 천주당을 방문하였는데, 천주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생전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의 제도를 살피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연행에 오른 연암 박지원 역시 천주당을 찾은 감격을 < 열하일기>에서 술회하고 있다. 천주당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을 듯 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고 하여 서양의 화법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실학자들은 남당을 찾아 서학을 접하면서 그 사유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남당은 중국식 불교 사찰과 유럽식의 건축 양식이 융합되어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 아치형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암회색의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4. 북당
서십고의 천주당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 드 퐁타네 신부가 키니네를 사용하여 성조 강희제의 학질을 고쳐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문 밖의 부지에서 17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 12월에 축성하였다.
북해공원에서 시쓰로 가다보면 서십고라는 곳이 있다. 이름에서 보다시피 '10군데 여러 창고'라는 의미인데, 이런 지명이 붙은 연유가 명대 궁정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이곳에 저장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실제로 10군데의 창고가 있었는데 각각 곡류·무기류·천·모피·실크 등등이 전국에서 공수되어 올라오면 이곳에 저장되어 졌다고 한다. 청대에 들어와서 이런 기능이 사라지고 각각의 창고는 민간주택이나 기타 용도로 변경되어, 현재는 단 한곳도 제 기능을 하는 곳이 없이 지명만 남았다.
서성구 서안문 대가에 있는 북당은 원래는 중남해 근처에 있었는데, 천주교를 별로 안 좋아한 서태후가 이전을 명해서 19세기 후반 이곳으로 이전하여 여러차례 중축되었다. 프랑스 예수회의 중국 선교 본부로 사용하다 1773년 7월 예수회가 해산할 때까지 동당·남당·서당 등 베이징의 다른 예수회 소속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1785년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프랑스 라자리스트회 로 신부 일행이 북당에 거처하면서 선교에 힘쓰던 중 흠천감의 실권과 산둥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는 남당·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로 인해 서당의 이탈리아와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 간에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1819년에는 극심한 박해로 인해 프랑스 라자리스트 라미오 신부가 마카오로 추방되고, 1826년 세라 신부마저 마카오로 떠나면서 폐쇄되었던 북당은, 1844년 황포조약의 종결과 동시에 재건되었다가 1951년 중국 공산화 이후 다시 폐쇄되었다. 명말 청초 베이징에 건립된 4개의 성당 가운데 현재까지도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유일한 가톨릭 교회당으로서, 한국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 베드로가 예수회의 그랑몽 신부를 만나 세례성사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시스쿠 성당은 일요일 아침과 저녁 4차례에 걸쳐 미사가 봉헌되고, 신자 외에 외국인들에게도 개방이 된다. 역사가 오래되어서 고색창연하고 건평 면적은 좁지만 성당 전면의 고딕 양식이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