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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9:02:54

심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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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심권호
沈權虎|Sim Kwonho
파일:하계올림픽심권호2.png
출생 1972년 10월 12일 ([age(1972-10-12)]세)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수진리
(現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수진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거주지 경기도 성남시
학력 성남수정초등학교 (졸업)
성남문원중학교 (졸업)
서울체육고등학교 (졸업)
한국체육대학교 ( 체육학 / 학사)
종목 레슬링
체급 그레코로만형 -48kg → -54kg
신체 선수프로필 157cm (방송용 160cm), 48kg
종교 불교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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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레슬링 선수이자 現 17세 이하 레슬링 국가대표팀 감독.

현역 시절 그레코로만형 라이트 플라이급(48kg)과 플라이급(52-54kg) 두 체급에서 4개의 대회를 우승했다.[1] 또한 그레코로만형 라이트 플라이급 플라이급의 마지막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2] 은퇴 이후로는 코치 및 레슬링 해설가로 활동하며 방송에도 자주 나오기도 했으며, 현재 17세 이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소년체전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관왕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서울체육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체육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자유형 선수였지만, 자유형이 자기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레코로만형으로 전향했다.[3]

2.2. 1992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자신의 체급인 -48kg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국제대회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1991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권덕용에게 밀려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3. 1993년~ 1995년

하지만 권덕용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여 예선에서 탈락한 후, 그의 자리를 밀어내고 1993년부터 국가대표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93년 세계선수권 동메달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린 후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5 세계 선수권 금메달, 1995년과 1996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며 일찌감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거론되었다.

2.4.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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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금메달 확정 순간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대진이 최악으로 걸렸는데, 2회전에서 라이벌인 러시아 선수를 만났다. 이 경기에서 연장 접전 끝에 2:1로 승리한 후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위기 없이 결승까지 순항했고, 결승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4:0으로 승리하면서 마침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따낸 100번째 메달의 주인공이자, 애틀랜타 올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워낙 압도적인 기술과 경기 운영을 보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순항할 줄 알았는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48kg급이 애틀랜타 올림픽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다만 알아둬야 될 것이 이것이 결코 심권호 때문에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체급을 줄여가는 과정에 심권호가 걸린 것일 뿐이다.[4]

2.5. 1997년~ 1999년

졸지에 레슬링 최경량급이 -54kg이 되면서 체중을 한 번에 6kg을 불려야 했고, 그 결과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5] 그러나 체급에 적응한 후 다시 이 체급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후배인 하태연과의[6][7]치열한 승부를 거치면서 국가대표팀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심권호는 -48kg에서 그랬듯이 또 다시 -54kg에서도 같은 코스를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1998 세계선수권 우승,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9 아시아선수권 우승, 그리고 치열한 대표 선발전 끝에 2000 시드니 올림픽 출전 선수에 선발되었다.

2.6. 2000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4년 전에 비해 원숙해졌으며, 8강전에서 한 번 고비를 맞아 독일 선수와의 경기에서 5:4 역전승을 따냈다. 4강전에서 북한의 강영균을 10-0 테크니컬 폴로 눌러버렸고 결승에서는 당시 -54kg 세계 최강으로 여겨지던 쿠바의 '라자로 리바스'[8]를 맞아 초반 상대의 방심을 틈타 8-0을 만들고 남은 4분 동안 끈질기게 버티며 우승을 차지했다.[9] 훗날 IOC 인터뷰에서 이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를 10:0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8:0이라서 남은 4분을 필사적으로 버텼다고 밝혔다. 이로써 서로 다른 2개의 경량급 체급에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뤘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도 있는데, 심권호가 1996년 LF급 금메달-00년 F급 금메달을 목에 걸 때 불가리아 출신의 아르만 나자라얀[10]1996년도 F급 금메달-2000년도 B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11]

2.7. 2004년

올림픽 이후 모든 것을 다 이뤘다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잠시 코치로 생활했다가, 본인의 실력이라면 아직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하에 전격 복귀를 선언했다. 새롭게 목표로 설정한 건 2004 아테네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전무후무한 올림픽 레슬링 경량급 3연패를 이뤄내는 것이었다.[12]

2004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는 후배에게 졌지만, 2차 선발전에서는 결승까지 오르면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과시했다. 그런데 결승전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을 겪었고[13] 결국 패해서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으며 당시에는 예비 멤버도 이미 정해진 상황이라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올림픽 3연패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한채 진짜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선발전 상황에 대한 언급 영상에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았지만, 체육계의 병폐가 작용했음을 부정하긴 어려운 듯 하다. 할 말이 많지만 현재는 모든 걸 다 넘어서서 담담하게 다 받아들였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고. 협회와 한국 레슬링계 내부에서 "그 정도나 했으면 이제 후배에게 좀 양보하지?"라는 심리가 영향을 미쳤다는 썰이 당시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런저런 정황상 이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14][15]

3. 은퇴 이후

3.1. 2004년

은퇴 선언 직후 레전드인 그를 해설자로 섭외하려는 방송사들의 러브콜이 쇄도했고, 이 중에서 SBS를 선택해 2004 아테네 올림픽 레슬링 중계 해설자로 데뷔했다. 경기를 분석하고 전달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같이 흥분하며 코치마냥 선수에게 지시를 내리는 듯한 해설을 했는데, 시청자들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다.[16] 전체적으론 재미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친한 후배인 정지현이 금메달을 따면서 분위기가 좋았던 것도 있었기에 그럭저럭 무난하게 넘어갔다.

3.2. 2008년

그러나,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그의 해설 방식은 결국 다시 한 번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야이씨 바보야!"를 비롯한 정제되지 않은 멘트들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이로 인해 공개적으로 사과 방송도 해야 했다. 그 때만 생각하면 말도 못할 정도로 창피하다고 밝혔다. 사실, 심권호는 입담도 좋고 예능감도 있는데다 해설도 잘하는 편이지만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멘트를 사용하는 바람에 망가진 케이스로 봐야 한다.

그래도 말주변도 좋고 한국 레슬링계의 전설이기 때문에 해설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도 반 고정으로 나왔다. 특히 몸을 쓰는 예능에서는 거의 100% 단골이다. 한 번은 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일하게 몸을 쓰는 코너에서 쇠봉으로 만든 훌라후프를 돌렸다.

3.3. 2012년

코치로도 활동했지만 방송에도 많이 출연했다. 이 시기 출발 드림팀 채널A 불멸의 국가대표 출연했다.

이후 코치 대신에 일반 직장인이 되어[17],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신도시 보상팀 팀장을 맡았다. 유명한 레슬러가 보상을 담당해서 그런지 험한 보상팀 임무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고 한다. 보상 논의를 위해 험악하게 기다리고 있던 입주자들도 심권호가 나타나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술 한잔을 하며 좋게 마무리되었다.

3.4. 2017년

한국토지주택공사 인천본부 사회공헌팀에서 근무했으며, 사회공헌 업무로 타 기관과 협의가거나 임대주택 단지에 나타나면 바로 아이돌 수준의 환호가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남남북녀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알코올 의존증 수준이고 뇌와 간이 많이 망가졌다는 충격적인 모습이 나왔다.

3.5. 2019년

뭉쳐야 찬다에 '작은 거인'이라는 닉네임으로 잠시 출연했다. 그러나 직장 생활 병행이 어려워 하차했다.

3.6. 2020년

E채널 사랑의 재개발에 출연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LH에서 퇴사했다고 한다. 이후 종합격투기 선수 및 방송인 김동현의 유튜브 채널 매미킴 TV에 출연해 그가 운영중인 MMA 도장 '팀 스턴건' 관원들에게 레슬링 실전강의를 했으며, 다른 격투기 관련 채널에서도 종종 모습을 비췄다.

3.7. 2021년

종합격투기 관련 유튜브 채널인 무채색필름에서 그의 일대기를 시리즈화해서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런저런 근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었다. 현재 조기축구 등 개인 활동을 하면서 자유롭고 편하게 지내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관장이 경영하는 아마추어 레슬링 도장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관원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10월 28일 스타멘터리 특종세상에 최근 행적이 공개되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체육관 운영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하필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렇게 할 일을 찾지 못하고 혼자서 외로운 나날을 술로 달래며 살다가 저질 체력이 되어버렸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술을 끊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3.8.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을 지지했으며, 4월 17일 스타 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했다.

5월 7일과 14일에 방영된 국대는 국대다에 출연하여, 절친한 후배인 정지현과 대결했다. 은퇴한 이후 거의 20년 만에 빡센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하며 몸을 만듬과 동시에 투지를 불태웠는데, 체급 및 나이 차이가 있어[18] 일방적으로 밀릴거란 예상과 달리 상당히 선방하며 9:16 스코어로 패했다. 경기가 끝난 후 정지현에게 리스펙트를 보냄과 동시에 "너도 후배한테 한 번 당해봐~"라는 장난스러운 농담을 건내는 입담까지 과시했다.

3.9. 2023년

2023년 5월부터 17세 이하 유소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공개되었다. # 심권호는 "미래의 유망주들을 기초부터 철저히 단련 시켜야 한다. 내가 감독을 맡은 이상, 반드시 후배들이 메달을 따낼 정도로 끝을 봐야 한다" 라는 소감을 밝히면서 본인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심정으로 감독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본인의 은퇴 이후 후배들이 메달을 많이 따내지 못하다가 최근 들어선 침체기에 빠진[19] 한국 레슬링을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기로 한 듯.

감독 선임 직후 열린 U23&U17 비슈체크 아시아선수권에서는 2명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3.10. 유튜브 활동

자신이 가지고 있는 레슬링 기술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수 + 이런저런 일상을 팬들에게 알리며 소통하고 싶다며 2021년 4월에 유튜버로 데뷔했다. 영상 업로드는 비주기적으로, 보통 1달에 1편 정도 올라온다. 알음알음 소문이 돌았는지 구독자 1만명을 넘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부활동이 힘들지만 전국 레슬링 도장이나 아마추어 대회에 틈틈히 참여해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한국 레슬링 꿈나무들을 위해선 어디던 찾아가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또한 위에 언급된대로 건강문제 때문에 술을 끊고 운동하는 영상도 자주 올라온다.

참고로 외국인들이 영상을 보고 기술이나 테크닉을 베끼면 어쩌냐고 말하는 팬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관심이 있으면 한국어를 배워서 할 테니 딱히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한편 다른 유튜버들의 채널에도 간간히 게스트로 나오고 있는데, 주로 종합격투기 도장에 찾아가 레슬링 노하우를 전수하는 빈도가 높다.

4. 평가

굉장히 영리하고 기술에 능했다. 상대에게 방심한 척 틈을 보여주고 미끼를 물면 바로 공세에 돌입해서 가볍게 제압했고, 기술 또한 다양해서 상대와 상황에 맞춰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20] 특히 대부분의 레슬러들은 1~2가지 기 술을 주무기로 삼아 경기를 풀어가고, 상대가 이에 대비한 전술을 들고 나오면 막혀서 고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심권호는 기술 레파토리가 5~6가지 이상이라 상대하는 입장에선 대처 및 전략을 짜는게 굉장히 어려웠다.

유일하게 두 개의 다른 체급에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모두 우승한 선수지만 아쉽게도 외신들의 이목을 끌진 못하고 있다. 그레코로만형 라이트 플라이급과 플라이급의 레전드로는 각각 빈센조 마엔차, 페타르 키로프가 꼽힌다. 마엔차는 척추측만증을 극복하고 올림픽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차지한 이탈리아 레슬링의 상징적인 선수며, 키로프는 플라이급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2개, 세계선수권 우승을 3회 달성했다.[21] 이 두 선수도 레슬링계의 레전드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체급 변화를 극복하면서 마찬가지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두 차례 우승한 심권호가 저평가를 받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박장순과 함께 세계 레슬링 연맹 명예의 전당 150인에 헌액된 한국인 선수이기도 하다.

한국이 독보적으로 강한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양궁을 제외하면 올림픽에서 두 개 이상의 금메달을 딴 선수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22] 그만큼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역대 최고의 한국인 운동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96 애틀랜타 -48kg
금메달 2000 시드니 -54kg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 프라하 -48kg
금메달 1998 예블레 -54kg
동메달 1993 스톡홀름 -48kg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48kg
금메달 1998 방콕 -54kg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5 마닐라 -48kg
금메달 1996 샤오산 -48kg
금메달 1999 타슈켄트 -54kg
은메달 1993 히로시마 -48kg

6. 기타


[1]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 게임, 아시아선수권 네 개의 다른 대회에서 두 체급의 타이틀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그랜드슬램이라 표현하고 있다. [2] 라이트 플라이급은 1996년, 플라이급은 2000년을 마지막으로 올림픽 레슬링에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심권호는 각 시기에 금메달을 차지했다. [3] 인터뷰에 의하면 자유형 출신이다 보니 자유형의 기술과 그레코로만형의 기술을 다 할 줄 안다고 한다. [4] 게다가 해당 체급의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권호의 체급이던 그레코로만 최경량급 라이트플라이급뿐만이 아닌 라이트헤비급과 프리스타일 라이트플라이급-라이트헤비급도 1996년 이후 폐지되었다. 사실 라이트플라이급은 1976년에 개설되어서 단 7번밖에 안 한 짧은 역사를 가진 체급이다. [5] 레슬링이나 유도처럼 힘 7+기술 3이라 불리는 투기 종목에서 1체급 차이는 엄청난 차이다. 더군다나 최경량급인만큼 같은 6kg 차이라고 해도 상위 체급보다 힘의 차이가 크다. 100kg와 106kg의 차이와 44kg와 50kg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6] 하태연은 레슬링을 접고 무속인이 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7] 1997, 1999 세계선수권 대회는 하태연이 승리해 출전했고 1998 세계선수권 대회와 2000년 올림픽은 심권호가 출전했다. 하태연은 1999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8] 1999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심권호의 라이벌 하태연을 꺾고 우승한 선수이다. 2013년 12월 22일 https://en.m.wikipedia.org/wiki/L%C3%A1zaro_Rivas현지 밴드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등과 목에 11차례 칼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 [9] 리바스가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넘겨뜨리는 게 능했던 선수인데 심권호는 애초에 리바스에 여지를 주지 않고 겨드랑이 방어에 신경을 썼고 기술이 안 들어가자 리바스는 경기 내내 평정심을 잃고 짜증을 보이기도 할 정도로 리바스라는 최강자를 상대로 엄청난 방어를 선보였다. [10]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에서 김인섭을 이기고 금메달을 딴 선수다. 아테네 올림픽에도 출전했는데, 4강에서는 후술할 정지현과의 대결에서 졌다. 이때 심권호는 '나자라얀, 너는 이제 은퇴죠.'라며 지상파 방송에서 대놓고 갈구는 위엄을 과시했다. [11] 다만 나자라얀은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것은 맞지만, 두체급 그랜드 슬래머는 아니다. [12] 올림픽 1회 대회부터 있었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레슬링 종목에서 3회 우승을 이룬 남자 선수는 전설 of 전설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카렐린을 포함해 딱 5명 뿐이다. 게다가 이 5인방은 중량급 2명/최중량급이 3명 구성으로, 경량급 선수는 현재도 없다. [13] 분명히 상대에게 폴을 따냈는데도 심판이 이를 모른척 했다고 한다. '폴'이란 상대 선수의 두 어깨를 바닥에 눌러 약 1~2초간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 기술로, 이게 선언되면 폴을 따낸 선수가 즉시 승리하며 경기가 끝난다. [14] 실제로 해당 영상에서 심권호는 당시의 상황을 " 안현수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15] 노장 선배가 후배에게 양보하는 관례는 한국 스포츠계의 대표적인 악습이자 병크 중 하나로, 심권호도 협회와 척을 지는게 싫어서 꾹 참고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아래에 언급되듯 소속팀인 주택공사(現 LH공사)의 배려로 높은 자리를 보장받은 상태라 은퇴 후 삶이 보장되어 있었으니 은퇴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했다. [16] 심지어 한국 방송사 중계진들의 자리가 붙어있었고 심권호의 목소리가 워낙 컸다보니, 듣기 싫어서 다른 채널로 돌려도 심권호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레슬링 선수들도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말하길 경기 중에 중계석에서 외치는 심권호의 지시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17] 공기업이나 회사 소속 실업팀의 경우 소속 선수가 은퇴하면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것을 제안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18] 정지현은 그레코로만형 -60kg에서 활약했으며, 나이도 10살 연하다. 참고로 진지한 대결이란 컨셉이였기에 정지현도 약 50일 동안 현역 시절 수준의 감량을 실시해 약 10kg 정도를 감량, 약속한 63.45kg를 정확히 맞춰왔다. [19] 2023 세계선수권에서 단 한 명도 메달은 고사하고 2024 파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다. [20] 대표적 케이스가 위에 언급된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인데, 옆굴리기로 2점을 선취하고 상대 선수가 옆굴리기 방어자세를 취하자 목감아돌리기로 전환해서 6점을 연이어 따냈다. [21] 기타 자세한 내용은 역대 그레코로만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 세계선수권 우승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22] 이 두 종목을 제외하고 올림픽에서 2개 이상의 금메달을 따낸 대한민국 선수는 심권호를 비롯해서 구본길( 펜싱), 김정환( 펜싱), 이상화( 스피드 스케이팅), 진종오( 사격), 황경선( 태권도) 정도다. [23] 하지만 그나마도 진종오에게 경매를 패하면서 55번을 달았다. [24] 대표적인 예로 두번의 세계선수권 대회(1997, 1999)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하태연에게 패배했다. [25] 다만 94년부터 세계대회에선 패배한적 없기 때문에, 무패 신화로 와전된듯 보인다. [26] 2008 베이징 올림픽 그레코로만형 -55kg 동메달리스트다. [27] 네티즌들은 이만기를 탓했는데, 네티즌들의 주장은 '자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계속 뭐라고 해 결국 영향을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심권호는 직장인이며, 원래 출연하던 것도 주말에 찍어서 나온 것이지 뭉쳐야 찬다가 4주 기획에서 장기로 바뀌며 찍는 날짜가 평일로 바뀐 탓에 참여가 어려워진 것이다. 또한 인터뷰에 의하면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고 불화설은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28] 이 당시는 이재영-이다영 학교폭력 논란으로 인해 운동부 내 학교폭력 문제로 온 나라가 한창 시끄럽던 시기다. [29] 배우 이덕화가 구단주 겸 명예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