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유도 남자 -60kg 금메달 | ||||
호소가와 신지 (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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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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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짐 휘세이노프 ( 1992) |
어쩌다 FC 선수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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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소속 선수 | |||
종목 | 이름 | 역할 | 등번호 | |
축구 | 안정환 | 감독 | - | |
씨름 | 이만기 | 선수 | 49 | |
농구 | 허재 | 선수 | 90 | |
야구 | 양준혁 | 선수 | 10 | |
육상 | 이봉주 | 선수 | 41 | |
체조 | 여홍철 | 선수 | 7 | |
레슬링 | 심권호 | 선수 | 55 | |
사격 | 진종오 | 선수 | 5 | |
격투기 | 김동현 | 부주장/선수(GK) | 8 | |
테니스 | 이형택 | 주장/선수 | 3 | |
배구 | 김요한 | 선수 | 25 | |
빙상 | 모태범 | 선수 | 89 | |
수영 | 박태환 | 선수 | 11 | |
야구 | 김병현 | 선수 | 18 | |
유도 | 김재엽 | 선수 | 88 | |
태권도 | 이대훈 | 선수 | 77 | |
배드민턴 | 하태권 | 선수 | 2 | |
배드민턴 | 이용대 | 선수 | 45 | |
펜싱 | 최병철 | 선수 | 9 | |
연예 | 김용만 | 선수 | 19 | |
연예 | 김성주 | 중계/선수 | 28 | |
연예 | 정형돈 | 해설/선수 | 99 |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김재엽 金載燁 | Kim Jae-y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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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63년[1] 5월 17일 ([age(1963-05-17)]세) |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명동 (現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김경윤(金慶潤)[2] 前 배우자 김경순(1965년생)[3] 아들 김관우(1992년생), 딸 김지민(1993년생)[4] |
학력 |
대구남산초등학교 (졸업) 대구중앙중학교 (졸업) 계성고등학교 (졸업) 계명대학교 사범대학 (상업교육학 83 / 학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5] 경기대학교 대학원 (경호안전학 / 박사)[6] |
소속 |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과 교수[7] |
종목 | 유도 |
체급 | -60kg |
신체 | 165cm, 60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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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유도 선수이자, 現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과 교수이다.2. 선수 경력
2.1. 1982년
청소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유도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이 시절 100연승의 대기록을 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2.2. 1983년
계명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그러나 이 해 열린 모스크바 세계선수권 직전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터지자 대한민국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2.3. 1984년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승전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8]에게 누르기 한판 패를 당하면서 은메달을 받았다.[9]2.4. 1986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2.5. 1987년
서독 에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호소가와 신지와 또 다시 결승전에서 맞붙어 통쾌한 허벅다리 걸기로 한판승을 거두면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2.6.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 출전하지 못할 뻔했으나 후배 윤현[10]의 눈물겨운 양보로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예선 첫경기부터 결승까지 전 경기에서 상대 선수에게 한 점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여유있게 금메달을 받았다. 경기를 앞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1987 세계선수권 우승자 김재엽과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호소가와 신지가 결승전에서 맞붙을 것이다'라고 예상을 했으나, 호소가와가 준결승에서 미국의 무명 선수 케빈 아사노[11]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면서 금메달의 주인공이 손쉽게 판가름이 났다.
결승전 당일이었던 9월 25일이 마침 추석이어서, 시상대에 한복을 입고서 올라가 금메달을 받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12]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설날에 금메달을 획득한 윤성빈이 큰절을 올렸다.
3. 수상 기록
올림픽 | ||
금메달 | 1988 서울 | -60kg |
은메달 | 1984 로스앤젤레스 | -60kg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87 에센 | -60kg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986 서울 | -60kg |
4. 논란
1988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였으며 지도자[13]의 길을 걸었으나 제자[14] 의 판정 시비로 인한 항의, 유도 파벌에 대한 폭로로 결국 유도계에서 퇴출되었다.이후 본인에 해명에 의하면 대한유도회 회장을 1995년부터 2013년까지 18년 간 역임하며 대한체육회 회장, 용인대 총장을 역임한 유도계의 권력자 김정행에게 불만을 표출했던 것을 빌미로 유도계에서 퇴출당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5. 기타
- 서울올림픽을 불과 수개월 앞둔 1987년 12월 14일 본인과 하형주를 포함한 유도 선수 22명이 자신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와 코칭스태프의 개편을 요구하면서 훈련 참가를 거부한 적이 있다.
- 유도계에서 퇴출당한 후에 유도계를 장악해야겠다는 목적으로 사업자의 길로 들어섰으나 수십 억을 사기당하고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가 자살 시도까지 하는 등 암울한 생활을 겪기도 하였다.[15] 이후 마음을 잡고 공부해서 동서울대학교 스포츠학부 교수가 되었다.
- 1990년 5월 20일 열전! 달리는 일요일 첫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으며, 영상도 남아있다.
- JTBC의 예능 프로그램인 뭉쳐야 찬다의 축구팀 어쩌다 FC에 입단을 신청하였으며, 조기축구 30년 경력자 답게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 그리고 53화에 정식으로 입단해 등번호 88번을 받았다.[16]
- 이만기보다 1살 어린데도 편하게 친구처럼 반말을 터놓고 지낸다. 프로필에는 1964년생으로 표시되어 있다. 게다가 2살 많은 영화 배우 차룡과도 친구로 지내는데 예전에는 사회에서 만나서 1~2살 차이는 친구로 지내는 경우도 많았기에 나이를 떠나서 맺어진 친구일 수도 있다.
- 뭉쳐야 찬다에서 환갑이 다된 나이에 수많은 스포츠 강자들을 철봉 씨름으로 전부 이기는 운동 능력을 과시했다.[17] 게다가 같은 날 치러진 관세청 팀과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넣기까지 했다.
- 2021년 8월 8일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 '판정단 여러분 저 안 뽑으면 오늘부터 가위눌립니다! 가위'로 출연했다.
- 선수 시절 농구선수 박찬숙을 짝사랑했었다고 한다.
[1]
주민등록상 생일은
1964년생이지만, 호적은
1963년생이다. 심지어
뭉쳐야 찬다에서
이만기와 친구라고 밝혔다.
[2]
1936년생. 전직
복싱 선수 출신이다.
[3]
전직
핸드볼 선수로
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과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다. 본인이 유도계에서 제명을 당한 이후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수십억을 사기를 당했다. 이 때문에 빚이 쌓여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이혼했다.
[4]
아들은 과거 청소년 대표
축구 선수였고 딸은
뭉쳐야 찬다 경기에 응원을 왔었다.
[5]
석사 학위 논문:
88 올림픽 유도 경기 내용 분석 : 남자 선수를 중심으로(1988)
[6]
박사 학위 논문:
민간경비원의 역할 스트레스가 직무태도 및 이직의도에 미치는 영향(2010. 2)
[7]
2006년 ~
[8]
당시 세계랭킹 1위였다.
[9]
은메달을 따게 된 이유가 웃픈데 결승전 시작 2시간을 앞두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근처 한인 타운 곰탕집에서 곰탕을 먹었다고 한다. 먹고 나니 식곤증이 와서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뼈 마디마디에 힘이 없어지고 급하게 결승전을 치르다보니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10]
훗날 윤현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으나 다른 후배의 양보로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다.
[11]
원래 일본 국적의 선수였으나 미국으로 귀화했다.
[12]
이후 세바퀴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사전에 협의가 없었던 탓에 협찬사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3]
마사회 감독
[14]
그의 코치를 받았던 선수가
윤동식과
추성훈이었다. 이들도 역시 그와 같은 유도 파벌 피해자들이었다. 이후 추성훈이 뭉쳐야 찬다에 용병으로 출연하면서 다시 만났다. 추성훈은 귀화하기 전까지 경쟁 상대들의 실력도 무시할 수 없어 일부 반론이라도 존재하지만, 윤동식은 현역 당시 동체급 세계 최강으로 불렸는데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15]
옛날에도 그렇고 요즘 운동선수들은 너무 운동에만 매진한 나머지 사회물정을 보는 눈이 어두워 귀가 얇아 보증을 서주고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16]
1988 서울 올림픽의 정신으로 뛰겠다는 각오를 담았다고 한다.
[17]
유도 선수 훈련 중에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훈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