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10:51:57

신공정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辛恭靖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양주 농서군(隴西郡) 적도현(狄道縣) 출신.

2. 생애

젊어서부터 재기와 도량이 남들보다 뛰어나, 융안 연간(397년 ~ 401년)에 하남태수에 임명되어 낙양을 지켰다.

융안 3년(399년) 7월, 일찍이 낙양 경략을 꿈꾸던 후진의 문환제 요흥이 동생인 제공(齊公) 요숭, 진동장군 양불숭(楊佛嵩)을 파견해 낙양을 공격해오자, 신공정은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하였다. 옹주자사 양전기는 후진의 침공 사실을 보고받고 북위에게 원군을 보내줄 것을 청하며, 강족이 낙양을 얻느니 차라리 북위가 낙양을 가져갈 것을 권했다.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태위 목숭에게 60,000 기병을 주어 후진군을 몰아내게 했다.

융안 3년(399년) 10월, 신공정은 100여 일 동안 버텼으나, 북위의 구원군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패하고 낙양성은 후진군에게 넘어갔다. 문환제 요흥이 붙잡혀온 신공정을 향해 물었다.
"짐은 장차 그대에게 동남(東南)의 일을 맡기고자 한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에 신공정이 얼굴에 노기를 가득 띄우고 답했다.
"나는 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강적(羌賊)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
요흥은 분노하여 그를 별실에 유폐시켰다.

원흥 원년(402년), 환현이 후진에 사자를 보내 포로로 잡힌 신공정과 하담지(何澹之)의 신변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요흥은 하담지를 보내는 것만 승낙하고 신공정은 후진에 그대로 남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공정이 감시자를 속이고 담을 넘어서 하담지와 동진의 사자를 따라 강동으로 도망쳐 오니, 안제 사마덕종이 이를 경사스럽게 여겼다. 환현은 표를 올려 신공정을 자의참군으로 삼고, 조정의 수장이 되어 국정을 이끌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