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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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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Coat_of_Arms_of_Comunidad_Andalucía.svg.png 안달루시아의 주
(아래에 있는 괄호 안은 중심도시)
알메리아 주
( 알메리아)
카디스 주
( 카디스)
코르도바 주
( 코르도바)
그라나다 주
( 그라나다)
우엘바 주
( 우엘바)
하엔 주
(하엔)
말라가 주
( 말라가)
세비야 주
( 세비야)
세비야
Sevilla
파일:external/www.telegraph.co.uk/seville-cityscape-2-xlarge.jpg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종탑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파일:Flag_of_Sevilla,_Spain.svg.png 파일:800px-Escudo_de_Sevilla.svg.png
시기 휘장
<colbgcolor=#ad1519> 국가 <colbgcolor=#ffffff,#191919>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지역 세비야 주
행정구역 안달루시아 지방
면적 140㎢
인구 690,000명
광역인구 1,508,605명
시간대 UTC+1 ( 서머타임: UTC+2)
시장/시의회 호세 루이스 샌즈





14석


12석


3석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
2.2.1. 세비야 타이파국 (압바드 왕조)2.2.2. 무라비트 왕조2.2.3. 무와히드 왕조2.2.4. 세비야 함락 (1248년)
2.3. 중근세
2.3.1. 대항해시대의 대표 도시
2.4. 근대2.5. 근현대2.6. 현대
3. 인구4. 기후5. 교통6. 관광지 및 명승지
6.1.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 탑6.2. 레알 알카사르6.3. 에스파냐 광장
7. 생활·문화
7.1. 스포츠
8. 대중문화에서9. 여담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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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htprivatetravel.com/seville.jpg
1929년 세비야 엑스포가 열린 도심부의 에스파냐 광장[1]
Sevilla.[2]

세비야는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대도시다. 영어로 세빌리아라고도 불리고 ( 세빌리아의 이발사 등)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 발렌시아 다음으로 큰 도시다. 서울과 동일 위도(북위 37도)에 있다.

스페인 자체의 수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11세기 세비야 타이파국의 수도에 이어 무라비트 왕조부터 안달루스 총독부가 되는 등 번영하였다. 특히 12-13세기 무와히드 왕조 시기에는 칼리파가 잠시 수도로 삼기도 하는 등 중시되었다. 히랄다 탑이 세워진 것도 그때. 그러다 1248년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했고, 대항해시대 시기 번영했기에 대항해시대 시리즈 게임 후 스페인의 수도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2. 역사

고대 페니키아 바에티스(과달키비르) 강 하류에 사람들이 세운 식민 도시였다. 당시 이름은 '스팔'이었는데 페니키아어로 저지대를 뜻한다.[3] 이 스팔이 고대 로마의 산하에서[4] 라틴어로 히스팔리스(Hispalis)가 되고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에는 히스팔리스가 다시 아랍어로 이슈빌리야(أشبيليّة / ishbiliyah)가 되었다. 이를 다시 스페인어로 치환한 것이 세비야(Sevilla)이다.

2.1. 고대

파일:1280px-Caños_de_Carmona_en_calle_Luis_Montoto_(2).jpg
기원전 1세기 로마 수도교로 세워져 무와히드 왕조 시기 보수한 후 1912년까지 기능한 카뇨스 데 카르모나의 잔존부

파일:Alameda_de_Hércules.jpg
로마 시기 헤라클레스 신전 기둥을 재활용한 16세기 말의 정원 알라메다 데 에르쿨레스.[5]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로 호환되는 페니키아의 신 멜카르트가 세운 도시라 한다. 기원전 8세기부터 존재가 확인되며, 당시에 시가지 일대는 과달키비르 강으로 둘러쌓인 하증도 일대였다. 스팔이라 불리던 도시는 카르타고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3세기 로마에 점령된 후 히스팔로 불렸고, 제국기에는 히스팔리스로 불렸다. 트라야누스의 고향으로 유명한 이탈리카의 인근 도시로서 히스팔리스는 상공업이 발달하며 번영했다. 비록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두른 성벽은 남아있지 않지만 수도교와 신전 일부가 잔존한다. 다만 5세기 들어 일대는 반달족, 수에비족, 서고트 등이 연이어 정복했다.

2.2. 중세

712년 8월경 히스팔리스는 메리다로 진격하던 무사 빈 누사이르에게 점령되었다. 비록 베자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무사가 떠난 후 돌아와 자치를 회복했으나, 713년 7월 무사의 아들 압둘아지즈가 완전히 정복했다. 5세기간의 이슬람 지배기 동안 이슈빌리야로 불리게 된 도시는 안달루스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844년 9월, 과달키비르 강을 거슬러 온 바이킹 군대가 7일간의 공성전 끝에 이슈빌리야를 점령했지만 40일 후 철수했다. 후우마이야 왕조 하의 안정기 하에서 주민들은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물라디가 되었고, 1063년에는 성 이시도르 성유물 레온으로 옮겨질 정도로 기독교세가 약화되었다. 한편 11세기 초엽 후우마이야 왕조가 붕괴되고 1차 타이파 시대가 개막하자 세비야에는 주요 세력 중 하나인 세비야 타이파국(압바드 왕조)이 세워졌다.

2.2.1. 세비야 타이파국 (압바드 왕조)

파일:Reino_de_Sevilla_s._XI.png
세비야 왕국의 최대 영토

1023년부터 세비야의 카디(법관)이던 아불 카심이 1031년, 마지막 코르도바 칼리파가 폐위되자 독립을 선포하고 압바드 1세가 되었다. 그 초창기 영토는 세비야와 카디스로 구성되었다. 그러다 1042년, 압바드의 사후 그를 계승한 아들 알 무타디드(압바드 2세)는 인근 도시 국가들에 대한 정복 전쟁에 나섰다. 우선 1044년 메르톨라, 1051년 알가르베 및 우엘바, 1053년 니에블라 등 서부를 정복했다. 그러다 1055년 남쪽의 알헤시라스 지브롤터를 점령하고 1063년 실베스 정복을 마지막으로 대서양에 접하며 서쪽으로의 팽창을 마무리하였다. 다만 1063년,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기 군대를 이끌고 세비야 근교에 당도하자 알 무타디드는 그에게 연공을 약속하며 복속했다. 1066년에는 그의 아들 알 무타미드가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령 말라가를 공격해 점령했지만, 방심하다 역습을 당하고 대패하여 질책을 받기도 했다. 이때의 점령지 중에는 마르베야 정도만 보전되었다.

한편 그와 별개로 1065년 론다, 1066년 모론, 1067년 카르모나, 1069년 아르코스가 점령되었다. 그리고 1069년, 알 무타디드가 사망한 후 계승한 알 무타디드 역시 톨레도 타이파국과 10년 가까이 대립한 끝에 1078년 안달루스 최대 도시인 코르도바를 정복하여 타이파 국가들 중 선두 주자 자리를 굳혔다. 이어서 재상 아부 바크르 빈 암마르가 안달루스 남부의 최대 경쟁국인 그라나다 토후국의 북부인 하엔과 바에사를 정복했고, 바사 ~ 무르시아 카르타헤나를 점령하여 티레니아해에 이르며 남부 안달루스를 가로지르는 영토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세비야 왕국은 카스티야에 바치는 조공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1085년경 알 무타미드가 연공을 중단하자 이미 톨레도를 정복한 알폰소 6세가 세비야를 포위했다. 이에 알 무타미드 등 타이파국들은 전쟁을 멈추고 바다 건너 무라비트 왕조의 아미르 유수프 빈 타슈핀에게 도움을 청했다. 1086년, 무라비트-안달루스 연합군은 잘라카 전투에서 레온-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을 격파했다.
승전 후 세비야에서 환대를 받고 돌아간 유수프는 안달루스의 풍요로움에 반해 점차 욕심이 생겼다. 이후 유수프는 재차 안달루스에 파병을 왔으나 일부 왕공들의 비협조로 주둔군을 두고 회군했다. 그러던 1090년, 무라비트 군은 안달루스 울라마 및 주민들의 지지 하에 무력으로 그라나다를 점령했다. 놀란 알 무타미드는 사절을 보냈지만 유수프는 응답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안달루스 정복에 나섰다. 1091년 세우타에 진영을 세운 유수프는 원정군을 4개 부대로 나뉘어 각각 세비야, 코르도바, 론다, 알메리아 방면으로 파견했다. 여러 도시들은 곧바로 태수들을 죽이거나 축출하며 항복했고, 얼마 안 가 알 무타미드에게는 수도 세비야만이 남았다. 곧 무라비트 군이 세비야를 포위하자 알 무타미드는 알폰소 6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하지만 그의 점성술 예측과 달리 카스티야 군은 코르도바 부근에서 격퇴되었고, 놀란 알 무타미드는 아들 알 라시드에게 정무를 맡긴 후 궁중에 칩거했다.

결국 반기를 든 주민들이 성벽에 균열을 내어 무라비트 군의 입성을 도왔다. 그러자 알 무타미드가 직접 반격에 나서 무라비트 군을 성 밖으로 몰아냈으나, 2차 공세는 막지 못하여 시가전 끝에 세비야는 함락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창문과 옥상을 뛰어다니며 강변으로 대피하는 등 혼란이 일었고 알 무타미드의 네 아들이 전사했다. 남은 가족들과 함께 생포된 알 무타미드는 일정 수준의 재산을 챙겨 탕헤르, 메크네스를 거쳐 모로코 남부의 아그마트에 유배되었다가 1095년 사망했다. 한편 유수프는 당대 안달루스에서 가장 발달한 세비야를 안달루스의 총독부로 삼았다.

2.2.2. 무라비트 왕조

반세기간 이어진 무라비트 시기 세비야는 코르도바를 대신하여 안달루스 총독부가 되었고, 정치적 & 문화적으로 중시되었다. 무라비트 조가 쇠퇴하던 1143년에 카디스 후국이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개막한 2차 타이파 시기에도 세비야는 총독 이븐 가니야의 통치 하에 무라비트 령으로 남았다. 1145-46년 그는 서로 대립하던 그라나다의 자파돌라와 코르도바의 이븐 함딘 모두를 축출하고 안달루스 남부를 장악했다. 이에 둘은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곧바로 개입한 카스티야에 맞선 이븐 가니야는 1146년 봄에 무와히드 왕조가 메르톨라 ~ 바다호스 등 안달루스 서부 전체를 석권하자 연공 납부 및 우베다 및 바에자의 할양을 조건으로 알폰소 7세의 봉신이 되었다. 다만 1147년 1월, 알폰소 7세가 회군하자 곧바로 무와히드 군대가 세비야에 상주했다. 더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이븐 가니야는 그라나다로 은퇴하여 이듬해 사망하였다.

2.2.3. 무와히드 왕조

파일:slide-spain-sevilla-alcazar.jpg
파일:1280px-Patio_del_Yeso_(Pórtico)._Reales_Alcázares_de_Sevilla.jpg
'세비야의 알함브라'로 불리는 알 무바라크 궁전 (알카사르)

정확히 한 세기 가량 이어진 무와히드 시기에 세비야는 중요도가 상승하며 더욱 이슬람적으로 변모했다. 특히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은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세력을 축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세비야의 기독교 역시 박해하여 이슬람 정복 후에도 4세기 넘게 남아있던 세비야의 가톨릭 대주교구를 (일시적으로) 소멸시켰다. 1162년 그는 갑자기 세비야 대신 더 전통적인 코르도바로 안달루스 총독부를 이전했는데, 이때 주민들도 다수 강제로 옮기며 혼란과 기근을 초래하기도 했다. 다만 이듬해 즉위한 유수프 1세에 의해 세비야는 마라케쉬와 함께 무와히드 조의 양대 수도가 되었고, 여러 인프라 구축 및 알카사르 등의 건축 사업이 있었다. 1177년 포르투갈 군이 세비야를 습격, 강에 정박 중인 함대를 불살랐다.

이후 포르투갈과 싸우던 유수프 1세는 1184년 세비야에서 눈을 감았다. 뒤를 이은 아들 야쿱 알 만수르는 세비야를 노리던 알폰소 8세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대파하였고 부친이 시작한 대사원 건설을 완성시켰다. 1200년 기준 세비야의 인구는 8만이 넘었다. 야쿱의 후계자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즉위 후에도 10여 년간 모로코에만 머물다가 1211년에 안달루스로 출정했으나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대패했다. 이로써 레콩키스타가 본격화되고 세비야는 다시 기독교 왕국들의 위협이 노출되었다. 그 와중에 무와히드 왕조는 안달루스와 모로코 파벌 간에 각자 군주를 옹립하여 내전에 돌입하며 약화되었고, 세비야에서 집권한 칼리파들은 마라케쉬까지 장악하기 위해 안달루스 주둔군을 빼가거나 심한 경우 카스티야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
파일:Sevilla_Cathedral_-_Giralda.jpg 파일:la-giralda-seville-andalucia-spain-tony-crehan.jpg
무와히드 왕조기 대사원 & 첨탑으로 세워진 세비야 대성당 및 히랄다

1224년, 칼리파 유수프 2세가 요절한 후 마라케쉬에서는 그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야쿱의 동생 압둘와히드 1세가 칼리파로 추대되었다. 이에 안달루스에 있던 야쿱의 아들들이 반발했고, 그중 압둘라가 세비야에서 칼리파를 칭하며 왕호로 알 아딜을 택했다. 이후 압둘라는 마라케쉬 점령을 위해 안달루스의 병력을 모로코로 보냈고, 내전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세비야가 상위 수도가 되는 등 안달루스 파벌의 득세에 반발한 모로코 부족들이 유수프 2세의 동생 야흐야를 칼리파 알 무타심으로 추대했다. 이에 압둘라는 재차 안달루스 병력을 대거 모로코로 보냈고, 이로써 안달루스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그 틈에 압둘라와 적대하던 바에사의 압둘라 알 바야시가 카스티야와 연합해 1225년 코르도바를 점령했고, 레온과 포르투갈 군도 남하했다.

그해 말엽, 포르투갈 군이 세비야 외곽에 나타나자 군대가 부족했던 재상 아부 자이드 이즌 얏잔 등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포르투갈 기병대는 근교 지역을 마음껏 약탈했다. 지도부의 무능에 분노한 주민들은 세금을 거두고는 장정 수만 명을 모아 성밖으로 나갔으나, 포르투갈 기병대에게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며 최대 2만여 명이 죽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카스티야에 영토를 떼어주고[6] 보급까지 해준 알 바야시가 민중 봉기로 살해되었다. 또한 마라케시 역시 점령되며 압둘라는 한숨을 돌렸지만, 1227년 10월에 목욕 중 익사했다. 그후 야흐야가 단독 칼리파가 되었으나, 압둘라의 동생 이드리스가 세비야에서 칼리파 알 마문을 칭하며 무와히드 조는 재차 안달루스와 모로코로 분열되었다.

이드리스는 카스티야에 10개 성을 양도하며[7] 얻어낸 병력과 함께 1229년 마라케쉬를 점령하고 단독 칼리파가 되었다. 다만 이때 안달루스 주둔군을 대부분 차출한 결과, 무주공산이 된 안달루스는 사라고사 토후국을 지배하던 후드 왕가 출신의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빈 유수프 알 주다미 (이븐 후드)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븐 후드는 바그다드 칼리파를 인정하며 1231년까지 발렌시아를 제외한 안달루스를 석권했으나, 같은 해 헤레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에게 패배하며 약화되었다. 1232년 그라나다 지역에서 나스르 왕조 무함마드 1세가 자립했고, 그는 1234년에 잠깐 세비야까지 점령했으나 곧 이븐 후드가 수복했다. 이렇게 3차 타이파 시기가 이어지던 1236년, 코르도바가 카스티야에 함락되며 이슬람권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던 1238년 1월, 이븐 후드가 암살되자 세비야는 10년 만에 재차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했다.

2.2.4. 세비야 함락 (1248년)

파일:Capture_de_Séville_par_Ferdinand_III.jpg
1625년에 묘사된 세비야 함락도

파일:토레델오로.jpg
황금의 탑(토레 델 오로)

비록 무와히드 조는 모로코 일대는 유지했지만, 알제리의 자얀 왕조와 대립하느라 안달루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1246년, 그라나다령 하엔을 점령한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는 이듬해 여름 들어 세비야 근처 지역들을 장악하며 도시를 고립시켰다. 1248년 봄, 비스케이 만에서 발진한 라몬 데 보니파스가 이끄는 20여 척의 해군은 과달키비르강 하구에서 40여 척의 세비야-탕헤르-세우타 함대를 격파하고 북상했다. 그해 5월, 라몬의 함대는 세비야의 유일한 보급로이던 강 건너편의 트리아나와 연결된 쇠사슬 및 부교를 준비해 둔 돌격선으로 끊어버렸다.

인접한 그라나다의 무함마드 1세는 오히려 카스티야를 도우며 동족들을 외면했고, 유일한 희망인 무와히드 조는 칼리파 앗 사이드 알 무타디드는 6월에 전사한 후 급속히 마린 왕조에게 모로코 북부를 뺏기며 무너져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세비야 수비대는 돌 대포로 저항했으나, 완전히 고립된 지 6개월 만인 11월 23일에 식량 부족으로 인해 항복했다. 협정대로 한달의 유예 기간 끝에 12월 22일에 카스티야 군이 입성했고, 무슬림 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를 떠났다. 이후 이쉬빌리야는 에스파냐어로 세비야라고 불리게 되었다.

2.3. 중근세

카스티야 왕국 하에서도 세비야는 번영했고, 1360년대부터 카스티야의 배도(부수도)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1391년 시내의 모든 시나고그(유대회당)가 성당으로 개조되고 다수의 유대인들이 학살 혹은 강제 개종된 후 유대 구역은 교회에 할당되는 등 강력한 기독교화 정책이 이어졌다. 1478년에는 '진짜 기독교도'를 감별하기 위한 스페인의 첫 종교재판소가 세비야에 설립되었고 종종 이단으로 낙인찍힌 이들에 대한 공개 화형이 있었다.

2.3.1. 대항해시대의 대표 도시

파일:1280px-La_sevilla_del_sigloXVI.jpg
16세기 말의 세비야

파일:que-ver-en-sevilla-archivo-de-indias_0.jpg
옛 교역소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인 인디아스 고문서관

한편 대항해시대 때 세비야는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며, 콜럼버스의 묘도 이곳에 있다. 신대륙 물산의 교역을 담당한 교역소(Casa de Contratación)가 세비야에 설치된 이유는 당시 카디스, 지브롤터 등 남부 해안이 카스티야 왕가로부터 반독립적인 메디나 시도니아 가문이 통치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왕실 독점 교역이 이루어진 세비야는 신대륙의 금은보화가 밀려드는 황금기를 맞아 번영했고, 유럽 각국의 상인들이 방문했다. 16세기 중엽, 세비야의 인구는 10만을 넘겼다.

당시에는 배들도 작았고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 강이 수심이 깊고 유량도 많아 항구로서 기능해서 스페인 제국의 대표적인 무역 도시이자 신대륙 교역의 첫 관문으로서 영화를 누렸다. 다만 수위가 낮아지고 배는 커진 지금은 내륙 도시에 가까워졌다. 지금은 대서양과의 거리가 60km나 된다. 이렇게 세비야의 무역항 기능이 자연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사라지면서 대신 카디스 말라가 같은 바다에 면한 도시들이 새로운 항구로 부상했다. 과거 번성하는 항구였으나 영산강의 퇴적으로 쇠퇴했던 나주시와 비슷한 운명이다.

세비야의 황금기는 1620년대 들어 과달키비르 강의 퇴적으로 항구 기능이 하구의 카디스로 옮겨지며 점차 끝나갔다. 1649년에는 강이 범람한 대홍수를 동반한 역병으로 인구가 반이 줄었고, 이는 19세기 초에야 회복된다. 1720년대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당시 보르본 왕조를 후원한 카디스에 대해 새 왕실이 신대륙 독점 교역권을 정식으로 카디스에 인도했고, 이와 함께 교역소(카사 데 콘트라타시온) 및 상인 길드들 역시 카디스로 이전했다. 세비야에 남은 교역소는 임대 주택이 되었으나, 길드 건물들은 공실로 방치됐다가 카를로스 3세가 인디아스 고문서관을 두었다.

2.4. 근대

파일:Palacio_de_San_Telmo_(Sevilla).jpg
1682년 항해사 학교로 세워져 1849년 궁전으로 개조되고, 현재는 안달루시아 자치 정부 청사인 산 텔모 궁전

파일:Muelle_y_Torre_del_Oro_Sevilla,_RP-F-F01139-CY.jpg
19세기의 세비야 전경

세비야에는 1728년 왕립 담배 공장(Real Fábrica de Tabacos)이 세워졌는데, 이는 스페인에서 엘에스코리얄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8] 1758년 세비야에는 마드리드에 이은 스페인의 2번째 신문이 창간되었다. 또한 18-19세기 세비야에는 여러 오페라 극장들이 세워졌고 모차르트, 베토벤, 조아키노 로시니, 조르주 비제 등이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냈다. 1825-33년간 세비야에는 근대적인 구조의 시가지가 형성되었고, 1841년 도자기 공장이 세워졌다.[9] 19세기 중반에는 자본가 계층의 주도 하에 이사벨 2세 (트리아나) 다리 등 여러 건축 사업이 있었고, 신작로 및 가로등이 조성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철도 교통과 함께 시가지가 성벽 외로 확장되었다. 1894년에는 세비아 전력 회사가 설립되었고, 1901년에는 플라자 데 아르마스 기차역이 세워졌으며 1904년에 순수 예술 박물관이 지어졌다.

2.5. 근현대

파일:Plaza_de_América_(Séville).jpg
1914년 마리아 루이사 공원의 무데하르 누각으로 세워진 현 세비야 예술 & 풍속 박물관

1929년, 세비야는 이베로-아메리카 엑스포를 개최하며 에스파냐 광장 (Plaza de España) 등 시가지가 남쪽으로 더 확장되었다. 또한 이때 호텔이 여럿 지어지고 구도심의 도로가 차가 다니도록 확장되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세비야는 데 야노 장군의 정변으로 도심부가 장악되며 초창기에 점령되었다. 이에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게릴라 전을 벌이는 등 저항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1953년 세비야에 조선소가 세워져 2천여 명이 고용되었다. 1961년 11월에는 홍수로 시가지가 침수되자 습지 규제안이 통과되었다. 1960년대에는 공장 노동자 조합들이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가 1973년 11월에 그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1979년에야 첫 민주적 지방 선거가 치러졌고, 1982년 11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인도하자 5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다. 그는 총회 참석차 1993년에 재방문했다.

2.6.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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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 1992 세비야 엑스포가 열렸고[10] 박람회장 출입을 위한[11] 바르케타 다리가 가설되었다. 1999년 이곳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에서 북한의 정성옥이 남북한 통틀어 세계육상선수권 첫 메달을 금메달로 장식한 곳이기도 하다.

3.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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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후

스페인 내에서 가장 덥고 건조한 도시다.[12] 7월~9월에 최고 기온이 40도를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역대 최고 기온은 1881년에 기록된 50℃인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이 기록을 제외해도 2003년 여름에 47.2℃를 기록한 적이 있다. 다만 지중해권답게 습도는 10~20%대에 불과하므로 밤에는 비교적 쌀쌀하다 느낄 정도로 일교차가 큰 편이며, 대낮에도 그늘진 곳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다. 한편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습하고 가랑비도 오지만 기본적으로 맑고 선선한 날씨가 흔하다. 1월 평균 일조량이 183시간이다. 아주 가끔씩 열대성 저기압인 허리케인이 올라올 때도 있는데[13], 이러한 기후 특성에다가 열대성 저기압이 거의 올라오지 않는 지역 특성상 대비를 잘 안하는 까닭에 한번 열대성 저기압이 올라왔다 하면 쑥대밭이 되기도 한다. 2005년에 상륙한 빈스(Vince)가 대표적인데, 포르투갈 남부를 통해 상륙한 뒤 세비야 인근에서 소멸된 적이 있다.

5. 교통

세비야는 기차편(세비야 산타 후스타[14])과 버스편(플라자 데 아르마스[15]/프라도 데 산 세바스티안[16])의 정류장이 다르다. 다만 버스 정류장들이 구 시가지에 더 가까운 편이고 인근 안달루시아 도시[17] 포르투갈 리스본, 파루는 물론 바다 건너 아프리카 모로코 북부의 탕헤르(탠지어), 쉐프샤우엔으로 가기에도 더 편하다.

마드리드에서 고속철도 AVE를 이용하면 2시간 30분 내외가 소요, 그라나다에서는 일반철도(MD)나 버스를 이용하면 3시간에서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그라나다로 가는 AVANT는 2시간 반 소요) 코르도바에서는 약 1시간 10분(MD), 45분(AVE) 정도 걸린다.

외곽에 세비야 국제공항이( IATA: SVQ, ICAO: LEZL) 위치해 있어 나름 항공편으로의 접근성도 보장되어 있다. 라이언에어 부엘링이라는 두 걸출한 저비용 항공사의 포커스 시티이므로 스페인 전역 및 유럽 전역으로 오가는 항공편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세비야를 찍고 다른 유럽이나 스페인 등지의 도시로 향하는 등의 이유로 은근히 한국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편. 공항과 시내 사이는 커퓨 타임을 제외하고 버스가 운행 중이므로 시내와의 접근성 또한 나름 나쁘진 않다.

한편 세비야 공항에선 A400M을 엄청나게 많이 목격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에어버스 디펜스 앤 스페이스의 세비야 공장이 세비야 공항과 활주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비야 공장은 A400M이 최종 조립을 마치는 곳으로서 에어버스사에겐 다른 의미로 중요한 공항이다.

유럽 도시에선 드물게 도시철도의 전 역사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시내에서는 노면전차도 운영한다. 주 경유지는 세비아 시청과 세비아 대성당이다.[18]

6. 관광지 및 명승지

안달루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David Peña Dorantes가 작곡한 Orobroy 연주와 함께 세비야의 경이로운 풍경을 소개하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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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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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에 지어진 모스크를 개조한 대성당. 스페인에 현존하는 가톨릭 성당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100m에 이르는 히랄다 탑도 유명하며, 성당 지하에는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안장되어 있다.

6.2. 레알 알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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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사르의 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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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정원

913-914년에 기존 서고트 시기 바실리카를 재활용하여 각 변이 100m인 정사각꼴 요새가 세워졌다. 11세기 후반 세비야 타이파국의 알 무타미드가 남쪽과 동쪽으로 각각 70×80m 정도씩 확장했고, 알 무바라크 (المبارك) 궁전이라 명명했다. 그러다 11세기 후반 들어 무와히드 칼리파들이 서쪽으로 대폭 확장하여 면적이 거의 2배가 되었고, 총 21개의 안뜰이 조성되었다. 이때 기존 궁전은 벽 외에는 허물어져 현재의 무데하르 건축은 후대에 일부 더해진 것 외에는 무와히드 시기의 것이다. 1184년에는 인근에 조선소가, 1196년에는 직물 시장이 세워졌다. 한편 알카사르 북쪽에 더해진 모스크가 현재의 세비야 대성당이다.

1248년 카스티야의 정복 후, 1360년대에 페드로 1세가 왕궁으로 지정한 후 현재까지 상층부는 스페인 왕가의 공식 왕궁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다.

6.3. 에스파냐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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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에스파냐 광장(스페인 광장)은 1928년에, 이듬해의 엑스포를 앞두고 세워졌다. 바닥은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울타리는 다 도자기로 이루어져 사치스러운 느낌이 난다. 점심 시간 후 쯤에는 플라멩코를 볼 수 있고 음악가들도 많이 찾는다. 해질녘 경치가 좋다.

영화 촬영지로도 쓰이며, 이곳에서 스타워즈 시리즈 중 클론의 습격 나부씬이 촬영되었다.[21] 그 외 배우 김태희가 LG 싸이언 광고에서 플라멩코 춤을 추는 컨셉으로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포켓몬 GO의 포켓스탑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다.

7. 생활·문화

세비야와 그 주변의 가로수는 오렌지나무다. 나름 도시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한데[22] 오렌지가 익어갈 때 쯤이면 거리 곳곳에서 나무에 달린 노란 오렌지로 미관도 좋아진다. 오렌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2~3월경 세비야에서 스냅사진을 찍는 경우 오렌지나무를 배경 삼아 찍는 컷이 꽤 많다.

가로수에 달린 오렌지 열매는 행인들이 따먹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이유는 먹지 못할 정도로 맛이 없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은 오렌지를 따서 먹으려는 외국인들을 보고 "아니 저 맛없는 걸 왜 따먹어?"라고 보는 셈이다. 안달루시아 지역 농장에서 식용으로 별도 생산되는 오렌지에 비해 가로수의 오렌지 열매는 맛과 품질이 떨어진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맛이 매우 시다. 설령 식용으로 쓰더라도 착즙주스로는 먹을 수 없고 와인이나 을 만들 때 첨가하는 부재료 등으로 용도가 한정된다. 더구나 시내에서 발생한 온갖 먼지와 매연이 가로수 오렌지에도 묻은 만큼 꽤나 더럽다. 절대 먹지 말자.

이 때문에 현지인들은 가로수의 오렌지를 절대 건드리지 않으며 땅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쓸모없는 과일로 취급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을철 도로와 인도에 떨어진 은행 열매를 쓰레기 취급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길가에 떨어진 오렌지는 시내에서 마차를 끄는[23] 이 알아서 먹어주니 걱정하지 말자.

스페인의 명물인 플라멩코 투우 하면 떠오르게 되는 도시기도 하고 레콘키스타 이후 이슬람 모스크를 개조해 만든 세비야 대성당, 그리고 과거 이슬람 왕조 시절의 정원 문화를 맛볼 수 있는 알카사르 궁전, 김태희 플라멩코를 춘 스페인 광장 등이 유명하다.

그 외에 성지 주일~부활 주일 사이의 기간인[24] 세마나 산타 기간이 되면 스페인 각지에서 열리는 행렬 의식이 그중에서도 매우 유명하다. 덕분에 해당 기간이 되면 온 유럽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 행렬에 따른 교통 통제, 궂은 날씨까지[25] 겹쳐지면서 온 도시가 혼잡해진다.

세마나 산타에 비하면 덜 유명하지만 페리아라고 하는 먹고 마시고 춤추고 여자 꼬시는 축제가 세마나 산타 기간 1주~2주 후에 열린다. 사진 이 페리아 기간에 부르는 노래와 추는 춤은 세비야나스라고 하는 세비야 지역의 전통 음악 장르다. 카세타(Caseta)라고 불리는 노상 클럽 같은 곳들이 페리아 기간에 1000여 개 운영되는데 이 중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카세타 푸블리가(Caseta pública)는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다 카세타 프리바다(Caseta privada, 사설 카세타)인데 입장 티켓을 구매하려면 그 까쎄따를 운영하는 단체에 가입해서 티켓 비용으로 20유로~80유로 정도 지불해야 한다. 페리아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

마카레나로 유명한 로스 델 리오가 세비야시 외곽에 있는 마을 도스에르마나스에서 결성되었다. 멤버 둘은 도스에르마나스에서 살고 있으며, 마을 야외 공연장이 이들에게 헌정되었다.

7.1. 스포츠

이 도시를 연고로 하는 스페인 프로 축구 클럽으로 세비야 FC 레알 베티스가 있고 이 두 팀 간의 더비를 안달루시아 더비라고 한다. 스페인에서 가장 열광적이고 폭력적인 더비로 잘 알려져 있다. 세비야 FC 홈 구장이 위치한 지역인 네르비온이나 레알 베티스 홈 구장이 위치한 지역인 엘리오폴리스에 라이벌 팀 저지 입고 배회하다가는 동네 양아치의 표적이 되기 쉬우니 조심할 것. 더비가 있을 때는 상대 팀 서포터 입장은 제한되고[26] 그 서포터의 행진과 입장까지 세비야 시 경찰이 경호한다.

8. 대중문화에서

세비야 주정부가 밀고 있는 도시 브랜드 표어 중 하나가 " 오페라의 도시, 세비야"일 정도로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작품이 많다. 피델리오, 피가로의 결혼, 세빌리아의 이발사, 카르멘이 세비야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대표적 오페라 작품이다. 이들 대표작을 포함해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 작품 수는 무려 120개에 달할 정도로 많다.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세비야의 모습은 당대 유럽인들에게도 굉장히 이국적으로 보였던 모양. 거기다 성(性)을 부각시키는 내용의 오페라는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하기를 꺼렸는데 스페인은 적당히 이국적이면서도 유럽이라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27][28]

9. 여담

10. 관련 문서



[1] 바닥은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울타리는 다 도자기로 이루어져 사치스러운 느낌이 난다. 해질녘 경치가 좋다. 여담으로, 이곳에서 클론의 습격 나부씬이 촬영되었다. [2] 스페인어로 ll은 y 음가기 때문에 세비야다. 영어로는 Seville. [3] 아랍어로 낮다는 뜻인 أسفل (아스팔)과 연관되어 있다. [4] 카이사르가 집권하기도 한참 전인 한니발 스키피오의 시대에 공화정 로마에 귀속되었다. [5] 조각상은 각각 헤라클레스와 카이사르. [6] 이때 할양 대상이던 3개의 성채 중 하나인 카피야가 반발하고 오랫동안 저항했다. [7] 또 마라케쉬 점령시 교회 건설 허가 + 기독교도의 이슬람 개종 금지 [8] 현재는 세비야 대학교 건물이다. [9] 현 안달루스 현대 미술관 (El Centro Andaluz de Arte Contemporáneo (CAAC)) [10] 같은 해 제노바에서도 엑스포가 개최되었지만 둘의 성격이 달라 공동개최는 아니다. 세비야는 등록박람회, 제노바는 인정박람회로 정리되었다. [11] # [12] 위도는 대한민국의 경기도 안양시, 성남시와 비슷하다. [13]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등지를 통해 상륙하는 것은 사이클론으로, 지중해에서 발생하여 이쪽으로 상륙한다. 그런데 그 사이클론도 지중해 특성상 발생 확률이 낮고, 발생한다 해도 잘 상륙하지 않는다. [14] 산 베르나도 역의 경우는 구 시가지와 더 가깝지만 운행 편수 자체가 별로 없다. [15] 대부분의 버스 이용 터미널. [16] 안달루시아 남부로 오가는 버스 터미널. 론다 가는 버스를 여기서 탄다. [17] 헤레스, 카디스, 우엘바, 론다, 말라가, 네르하, 하엔, 지브롤터 [18] 일부구간은 주행 중에, 일부구간은 정차 중에 급전을 받는 다소 특이한 형태이다. [19] 투우 경기는 지정된 날에만 열리고 평소에는 박물관 투어를 한다. [20] 현지인들에게 '버섯(las setas)'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언뜻 보기와는 다르게 목조 건축물이다. [21] 1편 보이지 않는 위협 편의 나부는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카세르타 궁전에서 촬영되었다. [22] 정작 세비야 주변 도시에는 많지만 시내에는 많지 않은 걸 느낄 수 있다. [23] 세비야 시내에서 시티투어버스와 비슷한 용도로 쓰이는 마차 수십 대가 있다. [24] 가톨릭 전례력상으로 ' 성주간'이라고 부르는 기간이다. [25] 이 동네의 일종의 징크스로 세마나 산타 기간만 되었다 하면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변해서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는 설이 있다. [26] 아예 지정 구역이 있다. 최대 500석 남짓. [27] 한국의 고전 소설들이 책잡히지 않기 위해 중국 명나라를 배경으로 삼은 게 적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28] 카르멘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세미녀 주인공 카르멘이 군인이었던 돈 호세를 꼬시는 것이 주된 내용 중 하나다. 돈 호세는 약혼녀가 있었던 남자였는데 카르멘이 뺏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