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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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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 서울 전차
서울 電車
Seoul Tram
}}}
파일:서울전차_Top.jpg

서울역사박물관의 381호 전차
노선도
[ 펼치기 · 접기 ]
파일:경성전차노선도1930.png
노선 정보
분류 노면전차
기점
종점
역 수 72개
구성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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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차 본선
서대문·마포선
을지로선
효자동선
왕십리선
신용산·구용산선
노량진 ~ 영등포선
의주로선
창경원·돈암동선
종로4가 ~ 을지로4가 구간
동대문 ~ 을지로6가 구간
세종로 ~ 남대문 구간
개업일 1899년 5월 20일
폐업일 1968년 11월 30일
소유자 서울특별시[26]
운영자
사용차량 서울 전차
차량기지 마포 차고지
동대문 차고지
삼각지 차고지
영등포 차고지
노선 제원
노선연장 40.6㎞
궤간 1067㎜ 협궤
선로구성 복선
급전방식 가공전차선
신호방식 미상
표정속도 미상
통행방향 우측통행

1. 개요2. 역사
2.1. 대한제국기 1899년 ~ 1909년2.2. 일제강점기 1909년 ~ 1945년2.3. 해방 이후와 폐선까지 1945년 ~ 1968년2.4. 선로 발굴과 공개
3. 연표
3.1. 대한제국3.2. 일제강점기3.3. 해방 이후
4. 노선5. 이설 계획6. 차량
6.1. 대한제국기6.2. 일제강점기6.3. 해방 이후6.4. 도색6.5. 보존 차량
6.5.1. 복제 차량
7. 매체8. 기타

[clearfix]

1. 개요

서울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에서 운행하던 노면전차로, 한국 최초의 철도 노선이자 도시철도 노선이다. 한국에서 대중교통이라는것을 처음 운영하는 시점을 보았을 때 처음 버스를 도입했을 때보다 철도의 도입이 훨씬 빠르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성부 경성부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므로, 경성전차라고도 불렸다. 1945년에 해방한 이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여, 경전(京電)이라고도 불렸다.

1968년 11월 30일에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당시 쓰였던 2량의 차량이 국립서울과학관(반강제보기차 363호)과 서울역사박물관(반강제4륜보기차 381호)에 남아있다. 문서 하단의 보존차량 항목을 참고.

2. 역사

초창기인 대한제국기 1899년 ~ 1909년, 일본 회사가 인수한 후부터 일제강점기였던 1909년 ~ 1945년, 해방 이후와 폐선까지의 1945년 ~ 1968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2.1. 대한제국기 1899년 ~ 1909년

파일:8G4mOUGKSQ1ERjmexYrd.jpg
1899년에 한국 최초로 서울에서 개통된
노면전차의 모습이다. 출처[27]

대한제국이 전기를 도입하기 위한 사업의 부대 사업으로 이루어진 게 서울전차였다. 한성전기회사를 개업한 한성판윤 이채연과[28] H.Collbran(콜브란), H.R. Bostwick(보스트위크)가 전차 부설 등을 검토하여, 고종의 홍릉 행차 시에 신하를 동행함으로서, 많은 시간과 재정 낭비로 인한 불편함을 전차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허가 후에는 황실의 투자까지 받았다.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1898년 9월 15일 오후 4시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앞에서 개설 예식을 거행하고,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들여,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899년 5월 3일 오후 3시에 첫 시험 운행을 하고, 1899년 5월 20일에 개통식을 가지고, 정식 운행을 시작하였다. 최초 개통 구간은 경교[29]( 돈의문) ~ 종로 ~ 흥인지문 ~ 보제원[30] ~ 청량리(홍릉)이며, 약 8km, 전구간 단선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개통과 함께 황성신문 등에 광고를 냈는데, 경교, 종로, 동대문, 보제원, 청량리역 간의 전차 요금표 #가 나와있다. 전차 운영을 위한 75kW급 직류 600V 발전기와 100마력 증기기관은 흥인지문 안쪽에 설치되었다. 당초 서울 전차의 기점은 서대문이 아니라 남대문이었는데 종로~남대문 구간 주택 철거에 따른 보상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서대문으로 변경된 것이라고 한다. #

서울전차의 개통은 아시아에서는 도시별로 태국 방콕[31], 일본 교토[32], 인도 제국 마드라스[33], 일본 나고야[34], 네덜란드령 동인도 바타비아[35]에 이어 여섯 번째이며, 수도에 부설된 건 세 번째, 독립국 수도만 따졌을 때는 두 번째다. 서울이 도쿄보다도 이른데, 19세기 후반에 도쿄에 마차철도가 부설되어서 활발하게 운영되었기는 했지만, 이걸 노면전차로 바꾼 것이 1903년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병사들이 전차를 신기해 해서 멋대로 뺏어 타는 풍경도 빚어졌다. #

개통 당시 전차는 40인승 개방형 8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통 당시에는 전차가 신기해서 하루종일 타고 다니거나, 시골에서 한성(서울)으로 상경해서 타러 온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 헬게이트까지 열렸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운전수는 교토 시에서 전차를 운전해 본 일본인 경력자 중에서 선발했으며, 차장은 한국인을 채용했다고. 승차권은 상등(우등석), 하등(일반석) 등으로 취급했고, 당시 정류장은 따로 없었고, 승객이 요구하면, 차를 세우고 여객을 취급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집전장치와 전선 사이에 이는 스파크를 보고 불꽃괴물이라 겁을 냈으며, 신기해서 하루종일 전차만 타고 뺑뺑이를 돌았으며, 여름만 되면 막차가 지나가고 나면 다들 돗자리를 깔고 철재 선로를 베개삼아 잤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전차 개통 후, 고종이 신하들에게 "전차가 더 빠르냐? 기차가 더 빠르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에 한 신하가 "전차가 더 빠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그 이유를 말하기를 "전차는 전기, 그러니까 번개로 달리지만, 기차는 수증기의 힘으로 달립니다. 뭉게뭉게 퍼지는 수증기보다 번개가 더 빠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이치이니 전차가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36] 이유랍시고 한 말이 굉장히 직관적이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에도 전차보다 기차가 더 빨랐다. 그 시절 경인선에 최초로 들어가는 모가형 증기기관차의 속도가 약 55km/h였던 반면, 비슷한 시기 지멘스가 최초로 개통한 전기 트램은 약 30km/h 정도의 속도였다.[37] 물론 고성능 전동차 고속열차가 발명된 현대에는 전기동력으로 가는 열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빠르다.

그런데 개통 후, 10일 째 되는 날인 5월 29일에 종로2가 부근에서 5살 정도 되는 아이가 전차에 치어 죽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사고를 낸 일본인 운전사는 어린이를 방치한 채 도망가버렸다.[38] 이에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분노하여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자, 이를 본 시민들이 같이 차량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 탓에 뒤이어 오던 전차 한 대까지 같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차장과 운전수는 빠져나왔지만, 40인승 개방형 1대가 파괴되어 전소되었고, 다른 전차도 이와 비슷한 수모를 겪고, 발전소까지 위협당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여 일이 커져버렸다. 거기다 일본인 운전수가 신변위협으로 도망쳐 일본으로 귀국까지 하자 반일감정까지 기름에 부어 외교문제까지 커질 수 있었다. 이에 고종이 조령[39]을 내려 소동이 진정되자마자,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상자에 대한 배상을 실시했다. 그렇게 조선 사람들은 이 사고를 통해 편리한 신문물이 흉기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출처 실록의 기사.

하지만 일본인 직원들은 운행을 거부하고, 호신용 권총 소지, 경찰 1인의 첨승, 유족 보호를 위한 공탁금 제도 실시 등을 내걸고, 협상을 요구했다[40]. 하지만 협상은 난항을 겪다가 결렬되어, 결국 일본인 종업원은 모두 철수했고, 이후 5개월 동안 운휴하다가 한성전기회사 측에서 미국인 운전수 8명과 기계공 2명을 모집하여, 9월 말에 운행을 다시 재개했다.

차량이 개방형이었기 때문에 추위와 비바람을 막아주지 못한 것과 의자가 나무의자였다는 것이 단점이었으나 빠르고 편리했던 장점 때문에 연장이 요구되었고, 개통년도였던 1899년에는 남대문까지 연장, 이듬해인 1900년에는 남대문에서 옛 용산까지 연장하는 것이 결정되어, 1901년에 개통을 하게 되었다고. 옛 용산까지 연장 개통한 이후에는 용산 포구에서 성내까지 화물 수송도 했었다고 한다. 또한, 서대문까지 연장되기도 했고, 같은 해에는 서대문~남대문~(의주로)~서소문 구간도 개통되었으나, 수요 부족으로 얼마 못 가 폐선되었다고 한다. 서대문 연장 당시에는 경인선 평면교차 문제가 발생하여, 일본 측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1901년, 서울전차에서 또 사고가 발생했다. 선로에 누워 잠을 자던 두 남자가 전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또 발생했고[41] 분노한 군중들이 전차를 또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전차의 운행 일정을 일부 변경했지만[42] 이후에도 전차에 대한 테러와 소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파일:2009101316143907496_4.jpg
1904년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이 전차를 탄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자리를 빼앗는 장면을 그린 그림
미국 사진잡지 '블랙 앤드 화이트' 1904년 2월 13일자) 출처

심지어 1904년에는 일본군들이 서울의 전차를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고 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대다수 일본인들이 노면전차를 타본적이 없어서 서울에 있던 노면전차를 신기해해서 일어난 일이였다지만, 매우 무례한 행위임은 틀림이 없었다. #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적자로 인한 자금난에 빠져 미국의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합자되어, 1904년에 명칭을 한미전기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본점도 미국 코네티컷 주의 세이브루크 시에 두게 되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수익원을 개척하는 긴급 대책으로 1901년 1월까지 전차 노선을 종로에서 남대문을 거쳐, 용산에 이르기까지 확장했다. 이처럼 사업규모가 확대됨에 따라서 외자를 도입하는 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코네티컷 주에 있는 미들섹스(Middlesex) 지방의 세이브루크(Saybrook) 시에 있는 엠파이어 트러스트라는 금융회사에서 30만 달러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 차관의 도입은 고종의 내략을 얻고자 한 처사이었으나, 한성전기회사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3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미국 회사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04년에 한성전기회사라는 상호는 사라져 버리고, 한미전기주식회사(American Korean Electric Co.)가 탄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종과 한미전기주식회사> 中 - 고승제 저

이렇게 함에도 경영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당시 여러 조약을 배경으로 한국에 진출하여, 일한가스주식회사를 설립한 일본의 재벌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매각 교섭을 벌였고, 특별한 이견 없이 의결되어, 1909년 6월 23일에 일한가스주식회사에 매각되었다.

2.2. 일제강점기 1909년 ~ 1945년

그런데 이 매각절차는 서울이 아닌 일본의 국제항인 요코하마에 있는 인터내셔널 은행에서 이루어졌다. 매도 금액은 70만원이였고, 일본은 한미전기주식회사를 매수하는 미끼로 한일가스주식회사를 이용했는데, 이게 사실 실체조차 갖추지 않은 페이퍼 컴퍼니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한미전기주식회사를 요코하마에 팔아넘기는 와중에도 콜브란은 고종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한미전기주식회사를 매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고종이 궁내 부차관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를 불러서 "콜브란은 한미전기주식회사를 한일가스주식회사에 양도 매도 했다고 하는데 짐은 교섭을 받은 일도 없었으며, 보고를 받은 일도 없었다. 콜브란에게 나의 주식을 모조리 맡겨두었는데, 어찌된 일이냐, 즉각으로 조사해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코미야가 팔방으로 전보를 치고, 공문서를 발송했지만, 콜브란은 이미 미국으로 거쳐 런던으로 튀어버렸다.

매각 당시의 한미전기회사는 귀빈차를 포함한 객차 37량과 화차 13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일 승객수는 370명 정도였다고 한다.
파일:경성전차노선도1930.png
1930년의 경성전차 노선망. 전후 연장된 영등포~노량진~한강인도교 구간과 돈암동네거리, 뚝섬, 영천 방향이 아직 지어지기 이전이다

그리고,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마자, 대대적인 투자를 벌여, 기존의 종로 ~ 남대문 ~ 동자동 구간과 종로 ~ 동대문 구간을 복선화 했고, 차량 역시 밀폐형 차량을 대거 도입하였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363호, 381호가 이 시기에 도입된 것. 1915년에는 상호를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그 뒤에도 개통 구간이 늘어나면서, 노선이 커지게 되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인이 밀집 거주하는 서대문과 마포 계통은 운임을 비싸게 부르거나, 일본인이 밀집한 곳, 특히 모토마치로 불리던 용산 계통은 운임을 낮게 부르는 짓을 하자, 참다 못한 한국인들이 운임인하 운동과 부영(시영) 운동 등이 벌이게 되며, 공영화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었다.

또한, 1920년대에 들어, 정체기를 겪던 서울이 급격히 인구가 늘고, 주택이 없어 움막을 짓고 사는 토막민이 발생하는 등 서울의 과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자, 전차는 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교통난이 발생했다. 그리고, 버스 운행 또한 실시되면서 경쟁도 발생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반강제(半鋼製) 보기 대차를 적용한 차량의 도입과 시내 정거장의 무정차 통과 등으로 경쟁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 했고, 무정차 통과의 경우는 교통난을 그나마 완화시키는 정도였다.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하여 개최했던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 1928년의 조선박람회의 관람객을 수송하거나, 교외 방향으로의 수요 대응을 위해 1930년 개통한 경성궤도와 왕십리역에서 상호 직결운행을 하는 등, 1930년대 후반까지는 승합자동차(버스)와 더불어 경성부내 교통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43]
파일:경성교통계획도.jpg
1942년 경성교통계획도[44]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쇼와 17년) 10월에 작성된 '경성교통계획도'[45]에 따르면, 경성부대확장 이후 시가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전차 노선이 계획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현재 수도권 전철과 유사한 노선들이 많다. 그 당시 개발 계획이 없었던 여의도 강남을 제외하면 꽤 유사하다.

영등포 일대에 8자의 순환선[46], 현재 도림초등학교~신길광장[47], 현재 양화대교가 있는 자리에 교량을 가설해 한강을 두 번째로 횡단하는 노선-양화로-신촌로-서소문로-경성부청 앞의 소공로-을지로1가(황금정1정목)[48], 청파로-만리재로[49], 마포~청수정(구용산) 직통선, 독막로[50], 서강로[51], 대흥로, 이태원로-한남대로-다산로-지봉로[52], 현 안국역~이화사거리~혜화문 구간을 신설하고[53], 돈암동네거리에서 동소문로~정릉로~종암로~안암로~보문로~난계로[54], 제기정에서 고산자로~왕십리로[55], 천호대로( 신설동역~ 답십리역사거리), 사가정로(현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답역사거리~전농사거리), 청량리역앞에서 왕산로~회기로~망우로21길을 경유해 중랑교입구에 이르는 노선이 계획되었다. 모든 노선이 현실화되었다면 전차 운행거리가 배 이상으로 증가했을 것이다.

이후,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이 악화되자, 앞서 언급했던 원대한 연장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전차 사업이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전시 동원기 때에는 아예 검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량의 개량 또는 노후화된 차량에 대한 교체도 거의 없었다고. 선로와 전기시설은 거의 보수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람이 운전하는데 도로에 있는 특성상 미숙한 기관사가 사람을 치는 사건이 여전히 많았고 한때 '81호 전차'가 희한하게 사고가 잦아 저주받은 전차로 유명했다. @

2.3. 해방 이후와 폐선까지 1945년 ~ 1968년

파일:서울시내전차.jpg
해방과 동시에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운영권이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정비를 맡던 일본인 기술자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관리 상태가 나빠져 해방 후, 보름 동안은 아예 101대에서 59대까지 반 이상 떨어졌고, 또한 서울시는 인구밀도가 크게 증가함과 동시에 노조 파업, 태업, 사보타지 등이 속출하는 등의 시대적인 혼란이 계속됨에 따라, 1947년에는 아예 하루에 27대만 운행할 정도였다. 이후, 단체 협약 등에 의해, 상황이 호전되면서, 다시 회복되어, 1948년에는 133대가 운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터지고 난 후, 완전히 처참한 상태로 변해버렸다. 일단 궤도의 경우, 총 연장 46.204km 중에서, 5.128km가 손실되었고, 차량은 227대 중 104대가 소실되었다. 전차선은 파괴되지는 않았는데 절도를 당해 사라져 버렸다. 없어진 이유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철도경찰 소속 서울철도경찰대장이 전선을 걷어다가 고철로 팔아먹었다. 상세한 내용은 이 쪽 참조. 게다가 형벌까지 고작 징역 6년으로 끝났다.

이후, 복구에 착수하여, 1952년 6월 2일에 67대를 투입하여, 한강대교 구간을 제외한 전 구간의 운행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응급 복구에 가까운 상황이라, 각종 부품과 자재가 부족하여, 노후화에 따른 손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전쟁 복구 과정에서 미국은 6월 19일 미국 전차 스캔들로 폐선되고 남은 전차 40량을 넘기게 된다. 이 중 20량은 부산전차에 배치되고, 다른 20량은 서울시가 인수하여, 각 노선에 배치하였다. 1953년에는 부속품 구매 자금을 부산전차와 함께 지원 받아 1957년까지 31대를 추가 복구하여 투입하였다. 1956년에는 추가로 53대의 전차를 미국에서 지원 받았고, 이 중 36대를 경성전기에서 인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차량의 노후화가 점차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전차 요금이 동결되었고, 전차 사업의 적자가 엄청났다. 시설 또한 응급 복구와 수리에만 치중한 데다, 신차 도입이 거의 없던 수준이었다. 차량의 경우, 213대 중 196대가 내구연한인 20년을 초과한 상태였다. 선로의 내구연한 또한 20년이었으나, 평균 사용연수가 38년이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381호도 196대 중 하나였다. 여기다가 인건비와 도로점용료의 증가로 인해, 적자는 더욱 커졌고, 자동차 등의 승용차가 보급률이 큰 폭으로 증가되면서, 노면전차는 느린 속도와 잦은 고장을 유발해, 도로 헬게이트를 유발한다고 까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적자를 견디다 못한, 경성전기는 전차 사업의 서울시 인수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민간 매각을 추진했으나, 역시 매수할 사람이 없어서 실패했으며 1961년에는 경성전기 등 3사가 합병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력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다시 말해, 경성전기 등의 3사가 한전의 전신이 되는 셈이다.
파일:Seoul Tram 1966.jpg
1966년작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유튜브영상) 11분 12초 부근부터 서울시청 앞 거리 장면에서 등장하는 운행중인 서울전차. 서울전차가 운행하는 모습이 담긴 몇 안되는 컬러영상이며 자동차와 노면전차가 뒤엉켜 거의 포화상태가 된 당시 서울시 교통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아직은 자동차가 소수의 부유층들만이 가질수있었던 시절이었고 버스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의 인구가 매년 폭증하여 증설한다해도 출퇴근시간때마다 지옥도를 거뜬히 찍었던 상황인지라[56] 별다른 대체교통수단이 없어서 시민의 이동권 문제가 번번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점점 전차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자 철거 방안이 가시화되어, 결국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 지하철 건설을 통한 교통난 해소 방안을 내놓으면서 전차 철거를 못박아버렸다. 불도저 시장, 돌격 시장으로 불리며 서울시 전체를 공사판으로 헤집어놓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말만 해놓고, 언제 할지 실질적 준비는 전혀 없어서 전차 노조와 시민들에게 신나게 까였다(...)[57].어쨌든 1966년 6월 1일부로 전차 사업이 한국전력에서 서울시로 이관되었고, 9월 30일에는 세종로에 지하도를 착공함과 동시에 남대문 ~ 효자동, 서대문 ~ 종로네거리 간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공사가 끝난 뒤 남대문 ~ 효자동 구간은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문을 위한 도로 정비로 인해, 콘크리트를 궤도에 덧씌워버리는 바람에 이 구간이 폐선된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58]

1967년 9월에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서 각 노선을 외곽으로 이설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1967년 10월 5일에는 전차 요금을 100% 인상을 단행하였고, 나머지 구간은 계속 운행되었다. 그런데, 1968년 4월 16일에 발표되었을 땐, 외곽 이설에 대한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 관해선 대충 얼버무리고, 철거 계획 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사실상 계획을 엎어버린 셈. 시영화와 폐지 추진 과정에서 전차 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또는 서울시 산하의 각 사업소 등지로 옮겨갔으며, 그 외에는 택시 회사 등으로 재취업이 이루어져 고용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고 말이 일단락이지, 해고나 가깝다.

그리고, 1968년 11월 30일 자정을 기하여 서울시에는 더 이상 전차가 달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할 때까지 6년 동안 서울시의 대중교통은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광역철도 같은 것이 존재했을 리가 없던 시절이었고, 그 기간 동안 서울의 교통은 지옥을 맛봐야했다. 더욱이 지하철 공사로 서울의 주요 도로는 차선의 절반을 통제했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의 서울은 끔찍한 교통지옥이 펼쳐지게 된다. 이런 미친 짓들이 곁들여져 터진 사건 중 하나가 바로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1963년 서울 전차의 모습
국토부 블로그 소개글

이후 노선 문단 각주에 나오듯 대부분 구간이 지하철 1~5호선으로 계승되어 지금도 당시와 비슷한 경로를 오가고 있다.

2.4. 선로 발굴과 공개

2023년 3월 6일, 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월대 복원 과정에서 발굴된 서울전차 선로 발굴현장을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총 270명에 한해 선착순으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 이후 2024년 기준 철도박물관으로 옮겨 전시 중이다.
파일:서울전차 효자동선 발굴.jpg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r0t1jpTPq1tz17l3o1_1280.jpg
월대 복원 현장에서 발굴된 서울전차 궤도 1953년 8월 15일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 사진
좌측 사진과 동일한 노면전차 궤도와 승강장이 보인다.

이 노선은 '효자동선'이라는 지선으로 경전이 부설할 당시에는 '고궁지선'이라 부르던 노선이었다. 이름 그대로 경복궁 관광을 위해 부설된 노선이었으나 조선총독부 근무자의 출퇴근 및 서촌 지역에서 종로와 남대문을 오가는 수요도 담당했다.

이 노선이 철거되지 않고 그냥 매몰처리되어버린 것은 운행 중지 당시의 뒷사정이 있다. 1966년 서울전차 영업중지 이후 얼마 안 되어 10월 31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이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하였는데, 정부 차원에서 엄청난 환대를 했고 이 과정에서 서울 거리 미화도 도마에 올랐으며 일부 철거중이던 서울전차 궤도도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철거하자니 돈도 없고 존슨 대통령 방한까지 일정은 촉박하고 하니 그냥 궤도 째로 묻어버리고 그 위에 도로포장을 새로 다진 것이다.[59] 전술되었듯 당시 서울시는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서울시내 다수 토건공사(지하철 건설, 여의도 개발, 3.1고가도로와 시민아파트 건설 등)로 서울을 뒤엎어놓은 바람에 시 재정이 공무원 급여마저 밀리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고갈된 상태였다. 이는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김현옥 시장이 해임되고 후임 양택식 시장이 여의도 땅, 명동공원 부지, 동부이촌동 모래사장 등 부지들을 팔아서 겨우 메우게 된다.[60]

3. 연표


노선 변천사.

3.1. 대한제국

3.2. 일제강점기

3.3. 해방 이후

4. 노선

파일:keijodensha.jpg
1941년 완성된 서울전차 노선도[63]

주요 간선교통망인만큼 해당 위치에는 현재도 지하철 또는 버스중앙차로가 다니는 경우가 많다.

5. 이설 계획

1967년 9월 20일에 발표된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서 발표된 이설 계획이다.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 했지만, 교통난이 심각한 외곽 지역에 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전차 폐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라며 까였고, 건설비 또한 과다하여 실현 가능성도 높지 않았다고 한다.

6. 차량

운전석 및 내부 구조.

6.1. 대한제국기

초기에는 일반용 개방형 차량 8량, 귀빈용 차량 1량이 있었고, 이후에도 개방형 차량이 추가로 도입되었다. 차량 중앙에 칸막이가 쳐져 있는 곳이 상등실(특실), 선두부와 후미부는 외벽 등이 일체 없는 곳으로 하등실(일반실)이였다고 한다. 상등실의 경우, 여성이 이용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귀빈용 차량 1량은 고종의 홍릉 행차 시 쓰이던 차량으로, 모양이 상여 같다고 하여, 그리 쓰이지는 않고, 거의 차고에 방치된 모양이다. 사진이나 실물에 대한 자료가 전무하며, 화차도 있었는데, 역시 자료가 전무하다(...)

일반용 개방형 차량은 사진을 토대로 복원품을 제작하여 경복궁 내의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전시했었는데, 2017년부터는 서울 노원구의 경춘선 철도공원으로 옮겨졌는데 '황실전차'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전시중이다.

6.2. 일제강점기

이 시기에 도입된 차량은 전차 하면 흔히 떠올리는 상자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보존된 363호, 381호 등이 이 때 도입된 차량이다. 초기에는 2축차가 사용 되었다가, 이후 혼잡 등을 개선함과 동시에 버스 등의 경쟁을 위해, 반강제 보기차가 도입되었다. 381호의 경우는 니혼샤료에서 1930년에 도입되었고, 폐지 직전까지 운행되었다.

6.3. 해방 이후

이 때 도입된 차량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애틀란타 시에서 중고 차량을 양수 받아서 사용했으며, 말기에는 일본 후지샤료 사로부터 신차 도입을 하였고, 여러 차량이 운영되었다. 차량의 구분은 소형, 중형, 대형으로 차량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일차적으로 구분했고, 해방 이후에 새로 도입한 차종은 도입처, 특징에 따라 구분하였다고 한다. 차 번호는 세자리 숫자를 바탕으로 부여했다.

1950년대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애틀란타 시에서 사용되던 전차가 투입되었는데, 노선 폐지나 신형 전차 도입에 따라, 남게된 차량을 원조 형식으로 양수 받았다. 이와 함께 다수의 부품도 도입되었고, 차량 운영을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애틀란타 시에서 양수 받은 차량은 405~424호, 로스엔젤레스에서 양수 받은 차량은 425~464호의 차호를 배정받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 후지샤료 사와 차량 도입 계약을 체결하여, 도입했는데, 1963년 5월 30일에는 신차 10대를 도입하여, 부산전차에는 2대를 배정하고, 8대를 배정 받아 노후차를 교체하게 되었다. 1965년에는 80대 도입 계획을 수립하고, 이 중 35대를 도입하여, 소형차와 교체 운행하였다. 하지만, 1968년에 서울전차가 폐지되면서, 이들 차량은 쓸모가 없어져버렸다. 또한 나머지 수량인 45대는 중지된 듯.

1962년 기준으로 살수차 2량이 있었고, 화차도 1량이 있었다. 가끔 이벤트날에는 꽃전차라는 이름으로 꽃을 달거나(...) 단장을 하여, 운행하기도 했다[79].

6.4. 도색

도색의 경우에는 노란색-청색, 흰색-청록색, 흰색-청색 도색을 한 차량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특이 도색을 한 차량이 있었다고 한다. 꽃전차라던가

6.5. 보존 차량

6.5.1. 복제 차량

7. 매체

파일:external/kim2.panstone.biz/mapo-07.jpg
밤깊은 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비에젖어 너도섰고 갈곳없는 나도 섰다
강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밤
하나둘씩 불을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 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8. 기타



[전차본선] 서울전차 본선의 시종착역. [서대문마포선] 서대문·마포선의 시종착역. [을지로선] 을지로선의 시종착역. [왕십리선] 왕십리선의 시종착역. [효자동선] 효자동선의 시종착역. [신용산구용산선] 신용산·구용산선의 시종착역. [노량진영등포선] 노량진 ~ 영등포선의 시종착역. [의주로선] 의주로선의 시종착역. [창경원돈암동선] 창경원·돈암동선의 시종착역. [종4을4구간] 종로4가 ~ 을지로4가 구간의 시종착역. [동대문을6구간] 동대문 ~ 을지로6가 구간의 시종착역. [세종로남대문구간] 세종로 ~ 남대문 구간의 시종착역. [전차본선] [효자동선] [서대문마포선] [을지로선] [세종로남대문구간] [왕십리선] [신용산구용산선] [신용산구용산선] [노량진영등포선] [의주로선] [창경원돈암동선] [종4을4구간] [동대문을6구간] [26] 원래는 한국전력공사 소유였다가 소유권이 서울시로 이전되었다. [27] 자세히 보면 ELECTRIC DE SEOUL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898년 창설된 한성전기회사의 프랑스어 명칭으로 추정된다. 마치 오늘날 한국전력공사 영어로 줄여서 KEPCO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당시에는 프랑스어가 영어보다 영향력 있었기 때문이다. [28] 주미 대한제국공사 출신 친미 개화파로, 한성부 도로망를 정비하고 전기·수도·철도시설 도입, 탑골공원과 경운궁퍼브릭파크를 건립하였다. [29] 서울적십자병원 인근. 경교장 명칭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30] 현재의 안암역 제기동역 사이로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제기동 서울약령시앞에 '보제원 유허비'와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 인근에 '보제원 터' 비석이 존재한다. [31] 자료에 따라 1893년 또는 1894년 전차 운행 시작 [32] 1895년 1월 31일 전차 운행 시작 [33] 1895년 5월 7일 전차 운행 시작 [34] 1898년 5월 6일 전차 운행 시작 [35] 바타비아 전차 회사(BETM, Batavia Elektrische Tram Maatschappij)의 전차가 1899년 4월 10일에 운행을 시작했다. 마력 트램은 1869년부터, 증기 동력 트램은 1883년부터 운행하고 있었다. [36] 윤승운 화백의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는 고종이 이것을 물은 것이 어느 날 열린 연회장에서였고, 이 자리에서 김홍륙 독다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37] 가끔 일본 쪽 사철 중에 '지하고속철도'라고 이름붙여진 것들이 있는데, 이 시절의 흔적이다. 노면전차보다 빠른 지하철도라는 뜻. [38] 물론 달리는 열차 앞에서 논 아이가 먼저 잘못했지만 승무원은 부상을 당한 승객을 구호할 의무가 있다. 당시 운전사는 승무원의 의무는 져버린 채 도망간 것. 현대 철도에도 열차에 사람이 치이면 승무원들이 우선 구호한다. [39] 조령은 황제가 내리는 긴급조치를 말한다. [40]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여지는 대목이다. 1910년 이전부터 이런 일이 비일비재 했다. [41] 이게 좀 안타까운 사연인 것이, 왜 하필 선로에 누워 잤냐면 무더운 한여름 열대야에 쇠로 된 레일은 밤이 되면 좀 빠르게 식어서 목침 대신 베고 자기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제시간에 도착했어야 할 전차가 기술적인 사유로 출발이 지연되었는데 막차가 지연되었다는 걸 알지 못한 두 남자는 자다가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42] 출발이 지연되거나 전차가 고장났을 경우, 다음 아침까지 운행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43] 당시에는 전차가 지금의 지하철에 해당하는 주간선 도시철도였기에, 보조 간선은 승합자동차(버스)로 처리하였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미사카도리(삼판통, 지금의 후암동)~혼마치도리(본정통, 지금의 마른내길. 퇴계로는 해방 후, 2차대전 당시 폭격에 대비한 공터(소개공지)를 도로로 만든 것이다.) 일대를 운행한 사례이다. [44]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45] 지하철도고속도철도, 교외철도라는 철덕의 가슴을 뛰게 하는 여러가지 구상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획된 일제강점기의 지하철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성동역 문서를 참고. [46] 시계방향으로 선유로, 도림로, 도신로, 영등포로, 경인로, 영중로를 경유하는 노선이었다. 경인로 구간은 문래동사거리~영등포역 사이 구간에 전차선로를 가설하여 8자 형태가 완성될 계획이었다. [47] 서울교통공사 신풍승무사업소가 근처에 있다. [48]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역~ 을지로입구역 구간과 일치한다. [49] 서울 지하철 10호선을 계승한 수도권 전철 신안산선 공덕역- 서울역 구간과 일치한다. [50] 서울 지하철 6호선 합정역~ 광흥창역 구간과 일치하며, 6호선은 대흥역부터 공덕역까지 백범로를 경유한다. [51] 서울 경전철 서부선 광흥창역~ 신촌역 구간과 일치한다. [52] 서울 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동묘앞역 구간에 완벽하게 일치한다. [53] 이 때 중복되는 기존의 원남정~혜화문 구간은 폐지하여 이설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54] 성신여대입구역부터 고려대역까지 서울 지하철 4호선~ 서울 경전철 동북선~ 서울 지하철 6호선을 합치면 일부 유사하며, 고려대역~ 신설동역~성동고교 사거리까지 하나로 이으면 유사하다. [55] 서울 지하철 12호선을 계승한 서울 경전철 동북선 왕십리역~ 제기동역 구간과 일치한다. [56] 실제로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것은 1980년대 중후반에 들어가서였다. 이때의 자동차는 서울 기준으로 자동차와 승합차 수를 합쳐서 3만대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어마어마한 사치품이었다. [57] 참고로 1961년부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질때까지 서울시장을 비롯한 지방단체장은 민선에 의한 선출직이 아니고, 관선에 의한 임명직( 대한민국 대통령이 임명)이었기 때문에 서울시가 까이는 것은 정부가 까이는 것과 비슷했다. [58] 광화문 광장 조성중에 전차 궤도가 발굴된 적이 있다. [59]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이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 가는 도로에다가 아스팔트를 새로 깔아버린 것과 비슷하다. [60] 하지만 양택식 시장도 종로선 개통 당일 육영수 피살 사건이 일어나 책임을 지기 위해 얼마 뒤에 시장직을 사퇴했고, 후임 구자춘 시장은 지금의 2호선 순환선 계획을 최초 수립한다. [61] 여기서 말하는 구용산은 현재의 원효로일대 지역을 말한다. 반대 개념인 신용산은 지금의 용산역 앞 한강로동 일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62] 이후, 얼마 못 가, 폐지 되었다. 일자는 불명이나, 수요 부족으로 인해, 2 ~ 3년 뒤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63] 시청앞 아래의 동대문은 남대문의 오기이며, 교남동과 서소문 사이의 큰 점은 서대문이다. 또한 일부 지명은 1941년 당시가 아닌데, 예를 들어 중앙청이나 서울고등학교, 용산고등학교 등이 그렇다. [64] 현재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종각역 구간 및 종로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유사하다. [65] 현재의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마포역 구간 및 마포대로 충정로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유사하다. [66] 현재의 서울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을지로입구역 구간 및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회현역 구간과 유사하다. [67] 현재의 서울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뚝섬역 구간과 유사하다. 실제로는 왕십리역 타절이 아니라 현재의 한양대역 앞을 지나 다리를 건너 뚝섬에 종점이 있었는데, 뚝섬유원지 승객을 위한 대책이었다. 이 시기를 촬영한 사진자료가 드물게 남아있다. [68] 신용산선의 경우 현재의 수도권 전철 1호선( 경부선) 서울역~ 용산역 구간 및 서울 지하철 4호선 서울역~ 신용산역 구간, 한강대로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유사하고, 구용산선의 경우 현재의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용산선) 효창공원앞역~ 용산역 구간과 유사하다. [69] 현재의 수도권 전철 1호선( 경부선) 용산역~ 영등포역 구간과 유사하다. [70] 1기 지하철 계획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역~ 독립문역 구간과 유사하다. [71] 혜화동로터리부터 돈암동 구간은 현재의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성신여대입구역 구간과 유사하다. [72] 현재의 서울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 을지로4가역 구간과 유사하다. [73] 현재의 서울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구간과 유사하다. [74] 현재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 ~ 종각역 구간과 유사하다. [75] 현재의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연신내역 구간과 유사하다. [76] 당시 폐지 직후인 경성궤도 노선과 비슷하며, 실현되었다면 현재의 서울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 건대입구역 구간과 비슷한 선형이었을 것이다. [77] 현재 추진중인 서울 경전철 면목선 청량리역~ 면목역 구간과 유사하다. [78] 현재 서울 지하철 5호선 신길역~ 화곡역 구간과 유사하다. [79] 일본에도 있다. 도덴 아라카와선의 花100형이라던가... 단, 이쪽은 여객은 못 태우고 그냥 장식용이다(...). 이쪽도 가끔 꽃을 달거나 그런 경우도 있다. [80] 사례로 대구 지하철 참사 방화범 김대한에게 적용된 전차방화치사죄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여객열차 운행방해 사태에 적용된 전차교통방해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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