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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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范弘之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장문(長文). 형주 남양군(南陽郡) 순양현(順陽縣) 출신. 안북장군 범왕의 손자로, 아버지 범강(范康)이 요절한 후에 할아버지의 무흥현후 작위를 습작했다.
2. 생애
고아하고 올바른 성정을 지녔고,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의 뜻을 풀이하는 데 능해 태학박사로 임관하였다. 위장군 사석이 사망하자, 효무제 사마요는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모아 사석의 시호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이때 범홍지는 사석의 잘잘못을 열거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운 것은 "양(襄)", 탐욕으로 관직을 잃은 것은 "묵(墨)"이니, 시호를 "양묵(襄墨)"이라 정해야 한다 주장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악시인 "묵(墨)"을 빼고 "양(襄)"만을 시호로 삼기로 결의하였다.얼마 뒤, 조정에서 이번에는 역신 환온에 의해 억울하게 폐출당한 은호를 복권시키고, 그의 시호에 대해 논의하였다. 당시 일찍이 환온 밑에서 총애를 받으며 관직 생활을 했던 상서좌복야 왕순(王珣)은 환온의 행적을 어떻게든 두둔하고자 하였는데, 범홍지가 환온의 악행을 들추는 것을 미워해 중앙에서 내쫓을 생각을 품었다. 여기에 초국 환씨와 일전에 사석에게 악시를 권유한 일로 토라져 있던 진군 사씨 가문까지 가세하니, 범홍지는 여항(餘杭)의 현령에 임명되어 조정에서 쫓겨났다.
장차 여항으로 부임하기 전, 범홍지는 당시 보정을 맡고 있던 회계왕 사마도자에게 서신으로 자신이 사석, 은호를 평할 때 결코 사심을 넣지 않았다 변호하고, 왕순에게도 글을 보내 사적인 감정으로 환온을 두둔하는 그의 행보는 수 대에 걸쳐 동진을 섬긴 낭야 왕씨 가문에 먹칠 하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범홍지의 말은 비록 모두 충직하고 옳았지만 환씨와 사씨 가문의 위세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범홍지는 다시 중앙에 진출하지 못 한 채 47세의 나이로 여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