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9-09 01:11:13

범견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范堅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자상(子常). 형주 남양군(南陽郡) 순양현(順陽縣) 출신. 친척으로는 범왕이 있으나 서로 왕래한 기록은 없다. 박학하고 문장 짓기에 능했다고 한다. 《 수서》 「경적지(經籍志)」에 따르면 《춘추석난(春秋釋難)》 3권을 편찬했다고 하나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2. 생애

영가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피난 간 범견은 동진 정권에 임관해 좌저작랑, 무군참군을 지냈다.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공을 세워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누차 승진하여 상서우승에 임명되었다.

성제가 재위하던 시기, 소광(邵廣)이라는 궁중의 장리(帳吏)가 국고에서 관포(官布) 30여 필을 횡령한 일이 발각되었다. 당해 사건을 담당한 정위가 법대로 소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그의 두 아들인 13세의 소종(邵宗), 10세의 소운(邵雲)은 등문고(登聞鼓)[1]를 두드리며, 스스로 관노가 될 테니 아버지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빌었다. 조정에서 이 사안을 의논할 때, 대신들 대부분이 두 아들의 효심에 감복하여 상서랑 주영(朱暎)을 필두로 소광의 형을 감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그때 범견이 나서서 정에 따라 형벌을 마음대로 바꿔서는 안 된다며 감형하자는 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니, 성제는 하는 수 없이 소광을 사형시켰다. 이후 범견은 호군장사로 옮겨졌고, 재직 중 사망했다.

아들로는 범계(范啟)가 있었는데, 비록 아버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문장 짓는 솜씨가 뛰어났고 하며, 관직은 황문시랑에 이르렀다.


[1] 진나라 시기 때 시행되던 신문고 제도라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