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19화 냉전3.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4.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5. 51화
그리스 vs 페르시아6. 56화 기축통화
달러7. 72화
엘리자베스 2세 편8. 78화
이란 역사 편9. 80화 여왕 마고 편10. 106화
영락제와
자금성 편11. 108화
합스부르크 가문12.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13. 116화
오펜하이머14. 121화 프랑스
와인15. 123화
교황의 탐욕16. 128회
야쿠자17. 129화
이스라엘 vs
이슬람 근본주의18. 130화
크리스마스 특집 1탄19. 131화
크리스마스 특집 2탄20. 138화
마거릿 대처21. 141화
바이킹22. 142화
초콜릿의 역사23. 144화
프랑스 침공24. 156화
이스라엘 vs
이란25. 162화 알프레드 노벨26. 163화 명나라의 폭군들27. 164화
소련의 스파이28. 170화
플라스틱29. 171화 로마 제국 쇠망사30. 172화 시베리아31. 173화 바다를 닫아 몰락한 중국
1. 개요
tvN 역사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 3의 나오는 문제점과 비판을 정리한 문서. 비교적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된 시즌 1,2와 다르게, 시즌 3는 순항에 성공하면서 장기 컨텐츠로 자리잡았고, 그 결과 이런저런 오류가 꽤 많이 나오고 있다.다만, 가르치는 교수가 오류를 저지른 부분과 제작진들이 잘못된 증거자료나 편집방향 등으로 오류를 낸 사례가 혼용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2. 19화 냉전
냉전의 3번 문항인 '대리전쟁'에서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고 소개했으나, 이후 대리전의 예시에서 국공내전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국공내전은 냉전보다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전쟁이었다. 중간에 일본군의 대대적 침공에 의한 중일전쟁의 발발로 공산당과 국민당이 일시적으로 연합해 일본군에 대항했을 뿐, 본질적으로는 1927년에 일어난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둘은 앙숙이었고, 일본이 패퇴하자마자 다시 제2차 국공내전을 치른게 우연히 냉전과 시기가 겹쳐있었을 뿐이었다. 제2차 국공내전마저도 1949년에 국민당이 국부천대를 단행하며 사실상의 종전을 맺은,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보다도 먼저 끝난 전쟁이었다.[1] 물론 제2차 국공내전의 결과가 냉전에 미친 영향은 컸지만[2], 대체로 냉전의 최초 대리전으로 평가하는 전쟁은 6.25 전쟁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공내전 자체는 냉전과는 무관한 중국 군벌의 세력 싸움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3] 실제 강의자는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 칭했으니, 제작진이 '공산권과 비공산권이 싸워 공산권이 승리한 전쟁'이라는 결과만 가지고, 무리하게 예시로 넣어 발생한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3.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전체적으로 가공의 소설인 《초한지》를 중심으로 해석한 결과로 빚어진 문제가 많다. 특히 강의 내용을 보면 거진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를 보고 강의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당 작품에서 설명하는 인물상과 거의 일치하는 방향으로 인물들을 설명하고 있다.[4][5]-
초한쟁패기의 분량을 생각해 보면 이 주제는 사실 최소 2부작으로 해야 했으나, 1부작으로 빠르게 하려다 보니 전후 사정을 전부 스킵하고 진행되어 문제가 많은 편이다.
후초의 의제가 항우에게는 그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니 송의를 상장으로 삼고, 항우를 차장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고 관중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명령하며, 유방은 포용성이 있고 관중을 지배하기 좋은 인재이니 일방적으로 유방을 관중왕으로 밀어줬다는 듯이 이야기했는데 이는 전후 사정이 완전히 생략된 것이다.
애초에 현대 항우의 이미지는 패왕별희와 같은 미디어 작품으로 크게 순화돼서 그렇지, 이전에도 양성 학살을 주도하는 등 포악한 성격이 있으며, 이후에도 대놓고 성격이 좋지 못하다고 까일 정도로 항우의 성품은 그닥 좋지 못하다. 반면, 송의는 엄연히 항씨 가문과 함께 의제를 옹립한 개국공신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항량이 죽은 이후 사실상 2인자는 송의나 다름없었고, 그러니 자연스레 송의가 상장군의 자리에 오르기 부합했던 것이다.[6] 이는 바꿔 말하면 이후 의중 자체가 어느정도 송의의 의중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즉, 송의와 초군의 최정예가 장한의 정예군을 조나라 인근에 묶어두는 동안, 별동대가 관중까지 쾌속으로 진격해 주인이 없는 관중 땅을 점령하여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고 군웅할거 시대를 마무리하자는 의도를 내비쳤을 가능성이 큰 셈이며, 이런 상황에서 중립 제후들이 그닥 반기지 않는 항우와, 성품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중립 제후들의 마음을 당길만한 여력이 있는 유방 중 누굴 선택할지는 안봐도 비디오이다.
즉, 대놓고 유방을 밀어줄 의도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 가장 부합한 인재를 적절한 자리에 배치했던 셈이다. 다만, 여기서 송의의 실책이라면 이러한 계책을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대책없이 눌러앉아 개인의 사리사욕에 집중하여 병사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다는 것 정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항우 입장에선 항량의 복수를 해야할 상황에서 하릴없이 주저앉은 송의가 아니꼬웠을 것이 뻔했음에도 별 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았으니 이 부분에선 송의가 무능했던 셈이다.
- 항우가 함양 입성 이후 단행한 행위 중 진시황릉을 파헤치고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진시황릉 병마용의 일부가 불탄 사진을 보여주며 정설처럼 이야기했는데 이는 아직 학계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은 부분이며, 진시황릉을 전부 발굴해야만 밝혀지는 부분이다. <고제본기>(高帝本紀)에서 항우의 죄목을 나열하여 명분 얻기로 쓰였으나 정작 진나라 멸망까지 적은 <진시황본기>에서는 일언반구가 없으며, 사마천의 《사기》 <항우본기>에도 이러한 내용은 적혀져 있지 않다. 진나라는 진시황릉을 만든 뒤 이에 연관된 인부와 관계자를 전부 죽여 무덤의 위치를 숨겼는데 초한쟁패기를 각색한 소설에서는 항우의 장수였던 경포( 영포)가 진시황릉 건설에 복역한 죄수 출신이라는 성분을 넣어 도굴을 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
설명에서 전체적으로 유방에 대한 평가에 구멍이 많다. 특히 유방의 장기인 용병술과 전략적인 대담성은 죄다 언급하지 않거나 줄여서 말하고, 참패는 크게 부풀렸다. 가령 유방의 가장 큰 공적인 한신의 등용 역시 일면식도 없던 한신을 대뜸 대원수로 기용했던 용인술은 싹 지운 덕분에 한신은 배수진을 언급할 때 쯤에야 겨우 언급되며,
팽성 전투에서 한군이 패배한 원인[7]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항우가 30,000명의 정병을 이끌고 560,000명을 깨부쉈다는 결과만 말했다.
결과적으로 개국공신 숙청 역시 처형당한 공신들의 과오는 덮고, 이성왕이었단 이유로 처형했다는 듯이 말하여 패널들에게 한고조 유방이 무능한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문제는 한나라가 이제 막 패권을 쥔 신생 국가였고, 당시 중국 대륙은 통일보다 분할된 시절이 더 길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좋든 싫든, 통치 기반의 확립을 위해서라도 이성왕들을 견제해야하는 입장이었으며, 오히려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공신 9족 멸살' 등을 생각하면 유방은 되려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고 봐도 무방하다.[8] 또한, 이성왕 출신들은 유방의 수하로 있었던 시절부터 반기의 조짐을 보이거나, 대가가 없으면 쌩까거나 밍기적대는 태도를 자주 보였던 만큼 어찌보면 이성왕들의 숙청은 그들의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지만[9][10], 이러한 요소를 하나도 말해주지 않아 패널들이 제대로 혼동을 일으켰다.
- 한신의 북방 정벌에서 배수진을 훌륭히 선보인 정형 전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배수진을 본 조나라 왕이 비웃는 발언을 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데 애초에 어느 문헌에도 이런 발언은 없으며, 진여가 한신을 깔봤다는 내용은 여러 문헌에 있다. 이는 당시 조나라 왕 조헐이 진여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겉으로 보이는 관계만 군신관계일 뿐 조나라는 진여가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후에도 유방이 한신을 위험분자로 보게 되는 제나라 정벌과 그로 인한 참모 역이기의 죽음 및 제나라 왕으로 봉해달라는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진행했다.
-
가장 큰 문제로, 한신의 실책을 전부 덮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그 고우영 화백조차도 최소한 한신의 행적을 언급은 해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한신과 유방 중 누가 더 잘잘못이 있는지 따질 기회라도 줬는데, 이쪽은 아예 한신의 실책을 모조리 덮은 결과, 최종적으로 한신이 무고하게 처형당한 충신으로 미화되어 버렸다. 《초한지》를 조금이라도 읽으면 알겠지만, 유방이 처형시킨 공신들은 대체로 그만한 야욕을 드러내어 견제당한 인물들이었다.[11]
당사자인 한신만 해도 자신의 야욕에 눈이 멀어 괴철의 말을 믿고, 기껏 역이기가 포섭했던 제나라를 공격해 초한쟁패기를 1~2년 더 늦춤은 물론 공신이었던 역이기조차 사망하게 만들었고[12], 이후로도 왕위 등을 요구하며 한시가 급한 유방에게 반항하며 밍기적대고, 초왕 시절에는 항우의 측근인 종리말을 거두어 보호하는 등 유방에게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유방은 그를 회음'후'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그쳤으며, 실제 처형은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태후가 손을 쓴 것이었다. 즉, 한신의 처형은 어디까지나 그의 오만함이 원인이었던 것인데, 이를 말하지 않고 넘긴 결과, 패널들조차 혼동할 정도의 큰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실제로 한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초대형 공신이었던 소하는 후대인 혜제때까지 천수를 누리고 갔고, 마찬가지로 핵심 공신이었던 장량 역시 야사와 달리 끝까지 유방의 책사로써 곁을 지켰었다. 소하, 장량, 번쾌는 유방의 대표적인 3대 공신들이며, 특히 소하는 아예 논공행상에서 1등으로 앉은 인물일 정도였다. 즉, 진짜 공신 견제가 목표였다면 이 셋부터 죽여야 마땅했음에도 이들은 관직을 받고 천수를 누렸으며, 유일하게 번쾌가 사형당할 뻔 했으나, 이것도 공신 견제가 아니라 여후를 위시한 여씨 일가 견제가 더 주된 목적이었다. 야사나 소설에서는 이성왕 견제로 가닥을 잡아놓은 반향인지 소하는 권좌의 욕심이 없음을 내비쳐 목숨을 얻었고, 장량은 아예 신선으로 귀화하겠다고 말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나오는데, 이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숙청당한 이성왕들은 권좌를 노리는 행동을 보여서 처형당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이란 단어 자체가 한신의 개소리나 다름없는 셈이다. 즉, 한고조 유방의 숙청은 대체로 이성왕 견제와 더불어,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을 심판한 것에 가까웠는데, 이성왕 견제 쪽만 크게 부각되어 전해진 것이 그대로 강의로 전달된 셈이다.
4.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자세한 내용은 벌거벗은 세계사/문제점 및 비판/시즌 3/44회 문서 참고하십시오.5. 51화 그리스 vs 페르시아
- 설명 중 잘못한 남성 혹은 소년들을 여성들 앞에 세워 놀림감으로 삼게 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예시로 든 삽화가 이와 전혀 관련이 없는 < 운동하는 스파르타 젊은이들>(Young Spartans Exercising)이라는 근대 화가인 에드가 드가가 그린 그림이다.
- 오류라기보단 다소 아쉬운 설명으로, 최후에 남은 군대의 숫자를 줄여서 말했다. 실제 강의 중에는 스파르타인 300명만 남은 듯이 말했으나, 실제론 700명의 테스피아인과 400명의 테베인도 같이 남아, 실질적인 숫자는 약 1,500명이 남았다.[13]
- 또한, 스파르타군이 남은 이유를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스파르타 정신'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대를 이을 자녀가 있는 군인'이라면 왕을 포함해 300명이 전부 지휘관급 인사들일텐데, 항복한 완전 시민 200명을 지키기 위해 해군도 포기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스파르타를 생각하면 왕과 지휘관급 근위대 300명을 고작 정신 하나로 꼬라박한다는건 말이 안된다.[14] 현재 학자들이 저 1,500명이 결사대로 남은 이유를 추정하길, 레오니다스가 보고를 받았을땐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페르시아군이 육박한 상황이라 그리스군이 후퇴하는 동안 전방에서 페르시아 본대를 막아 시간을 벌기 위해서로 추측하고 있다. 즉, 후자보단 전자의 이유가 더 강한 셈인데, 편집상의 실수인지 후자의 이유가 더 부각되는 듯한 편집이 되었다.[15]
6. 56화 기축통화 달러
금 1 온스를 설명하면서 1 온스가 28.35g이라고 표시했다. 그러나, 이는 상용 온스(avoirdupois ounce)와 트로이 온스(troy ounce)를 구별하지 못한 오류이다. 일반적인 물체의 무게를 재는 단위로는 '상용 온스'(OZ)가 사용되지만, 황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무게에는 '트로이 온스'(OZ.T)가 사용된다. 흔히 금 1 온스라고 말하더라도 이는 금 1 트로이 온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1 상용 온스는 약 28.35g[16]이고, 1 트로이 온스는 약 31.1g[17]이다.7. 72화 엘리자베스 2세 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가계도에서 오류가 있었는데, 셋째이자, 차남 앤드루 왕자의 전 배우자인 사라 퍼거슨의 출생연도가 1959년이 아닌 1969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8. 78화 이란 역사 편
팔레비 왕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원인이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과 1970년대에 밝혀진 팔레비 왕가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53년에 이란 민족주의자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를 CIA가 몰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팔레비 왕조의 백색혁명이라는 것도 도시의 상•중산층에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류층은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설명은 대안 우파 및 신우파 진영이 " 이란인들이 미개한 신념에 빠져 팔레비 왕가의 은혜를 모르고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독재자를 선택했다."라는 인종주의적 수사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되고 있다.[18]게다가 모하메드 모사데크를 몰아낸 CIA가 1979년에 반서방을 내세우는 루홀라 호메이니에게는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혹이 나돌고 있는데 이에 로버트 드레이퍼스는 영국과 미국 정부가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앙아시아에서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그랬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을 정도이다.
9. 80화 여왕 마고 편
결말부에서 위그노 전쟁으로 수많은 피를 본 결과 프랑스에 톨레랑스가 뿌리를 내렸다고 언급했는데, 애초에 프랑스=톨레랑스라는 공식 자체가 허구적인 면이 많을 뿐더러 당시 낭트 칙령 이후 위그노들이 누렸던 자유는 지속적으로 제약이 확대되다가 100년도 못 가 루이 14세의 손에 롤백됐다. 프랑스에서 가톨릭 외 종교가 안정적인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프랑스 혁명 이후다.10. 106화 영락제와 자금성 편
- 홍무제가 지금의 베이징인 대도를 함락했을 때 이곳을 수도로 하다가 자신의 근거지인 남경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하는데 홍무제는 서달이 대도를 점령했을 당시 북평부로 개칭하여 삼았을 뿐, 대도를 수도로 삼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연왕 주체가 황제가 된 이후 19년이 지난 1421년에 자금성이 완공되면서 수도로 삼고, 옮긴 것이 맞는 내용이다.
- 연왕 주체는 정난의 변 발발 이후 3년 동안 수십 차례 중앙군과 전투를 치르는 악전고투 끝에 막바지에 수도 남경를 직접 공격하는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점령하면서 황제가 되었다. 겨우 800명 따위가 지금의 베이징인 북평부에서 지금의 난징인 남경까지 이동하여 점령했다는 것 자체가 건문제의 조정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말이 안되는 내용이다. 더군다나 주체는 정난의 변 당시 여러번 전투를 거치며 도합 100만 명이 넘는 중앙군을 상대했는데, 주체의 정예병이라 해도 최소 10만 명에서 12만 명은 동원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거기다 남경을 점령했을 때도 자신의 힘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당시 건문제가 자신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 각 지역의 번왕들을 제거한 삭번정책으로 인하여 인질로 잡혀 있었던 곡왕 주혜와 중앙군 장수 이경륭이 내통할 의사를 밝혀 금천문을 열어서 점령한 것이었다.[19]
- 방효유 10족 멸족설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일뿐 사실 여부가 불명확하다. 이러한 내용은 《명사》는 물론이고 《작중지》, <방효유전> 등 명나라와 관련된 역사서 어디에도 없는 내용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영락제의 아들인 인종 홍희제가 방효유의 사촌동생이었던 방효복을 사면한 기록이 있다. 방효복은 임오순난 당시 남쪽의 변방인 경원위(慶遠衛, 現 광시성 허츠시 이저우구)에서 군역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외의 친구, 친족들 중에서도 10족 멸족 언급 이후 멀쩡하게 활동한 기록이 있는 이들이 꽤 있기에 애초에 이 발언은 진심이 아닌 경고성 언플일 뿐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구성상으로 보면 대체로 홍무제든, 영락제든 정화의 대원정 정도만 빼면 업적[20]은 축소하거나 거의 다루지 않고, 일방적으로 호람의 옥이나 임오순난, 어여의 난 같은 폭정만 부각시켰다. 물론 명나라와 자금성의 역사 전반을 다루다 보니 분량상 생략한 게 크겠지만, 그래도 영국 해군의 아버지로서의 업적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헨리 8세 편이나 무주의 치를 대대적으로 묘사한 측천무후 편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다.[21]
11. 108화 합스부르크 가문
주제와 밀접한 권위있는 전문가들을 꾸준히 섭외하며, 사실관계 오류가 거의 사라진 시즌 2~3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편 다음으로 가장 오류가 많은 에피소드로 꼽힌다. 다만 러우전쟁 편에 비해 욕은 거의 안 먹었는데, 가장 예민한 주제에서 중심 내용인 양국 간 갈등의 맥락 부분이 획일화되고, 왜곡된 러우전쟁 편과 달리 이번엔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적은 주제에다가 오류들도 수만 많지, 거의 다 강의 내에서는 지엽적인 부분이었고, 오류가 발생한 원인 역시도 상당수 납득되기 때문이다.[22] 시청률도 밤 10시 편성으로 변경된 이후, 가장 잘 나온 축에 들어간다.- 첫 번째로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프리드리히 2세에 관련된 그림이 화면에 나와야 되는데 호엔촐레른 왕조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왕 프리드리히 1세와 대왕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화가 화면에 나오는 이상한 실수를 저질렀다. 중세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근대 초기의 호엔촐레른 왕조는 연대 차이가 무려 600년에 이른다는 점에서 제작진의 서양사에 대한 무지함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한국사로 치면 신라의 태종 무열왕을 설명하면서, 조선의 태종 어진을 띄우는 꼴이다. 아마 구글링 후 검토도 없이 사진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 두 번째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제2대 왕 펠리페 2세의 가족관계가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펠리페 2세의 두 번째 왕비인 메리 1세는 부왕 카를 5세의 이종사촌인데다가 펠리페 2세와는 5촌 관계였고, 세 번째 왕비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의 사이에서 생존한 두 딸인 이사벨과 카탈리나가 있었다. 게다가 네 번째 왕비였던 오스트리아의 안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23]와 그의 황후인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였다. 어머니 마리아는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이었고,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는 펠리페 2세와 사촌지간이었다. 또한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부부 역시 모계 한정으로 5촌 관계였다.
- 세 번째로 펠리페 4세의 가족관계를 설명한 부분에서 틀린 내용이 있었다. 펠리페 4세는 23살 때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 출신의 공주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틀렸다. 실제로 펠리페 4세는 10살짜리 어린 나이로 3살 연상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게다가 계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자녀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틀린 내용이 있었는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인데다가, 막내동생인 카를로스 2세를 제외한 남동생 2명과 여동생 1명이 먼저 요절했다. 또한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레오폴트 1세의 결혼식을 설명할 때, 레오폴트 1세가 44세로 표시되어 있어서 오류가 있었는데, 실제로 레오폴트 1세와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1살이나 차이가 났다.
- 마지막으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의 계비 마리아 아나가 오스트리아 귀족의 딸이라고 했는데, 이는 틀린 사실이다. 마리아 아나의 아버지인 필리프 2세 빌헬름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했던 비텔스바흐 가문 노이부르크 분가의 첫 번째 팔츠 선제후로서 오스트리아 귀족이 아니었다. 팔츠는 독일 서부로써 오스트리아와 멀다.
12.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
고대 로마 학자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를 잘 쓰지 않는 영거 플리니우스라고 번역했고, 영어 철자도 Pliny the Youger라고 잘못 썼다.13. 116화 오펜하이머
- 고품질 우라늄 생산지인 요아힘스탈 광산이 독일이 합병한 오스트리아에 있다고 했으나 당시 체코슬로바키아[24]에 있었다. 또한 방송에서는 요아힘슈탈로 표기했으나 요아힘스탈(Joachimsthal)이 맞다. 영상에 나온 지도는 더욱 문제인데, 프랑스 영토에 독일이라고 표기했고, 뜬금없이 스위스에 요아힘스탈 광산이 위치한 것으로 표시했다. 현재의 체코 북서부에 표시해야 맞다.
- 1941년 12월 7일에 일어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1942년 12월 7일에 일어났다고 잘못 말했으며, 자막도 그대로 답습했다. 이어지는 화면에서는 1941. 12. 07로 올바르게 표기했다.
14. 121화 프랑스 와인
고대 로마에서의 로마군에 의한 와인 보급을 설명할 때 석회질의 물 대신 와인을 사실상 식수로 썼다는 언급을 했는데, 포도주/역사에서 보듯 이는 오랜 기간 정설로 인정받긴 했으나 최근으로 올수록 반례가 제기되면서 부정되는 학설이다. 실제 로마군이 식수로 사용했던 건 포도주 식초를 물에 섞어서 마시는 포스카(Posca)다.15. 123화 교황의 탐욕
- 테베레 강인데 지도의 자막은 '테레베 강'으로 표시되었다.
- 카노사의 굴욕을 설명하는 부분에 오류가 있다. 강의에서는 사건의 발단이 된 주교 서임권 문제를 단순히 황제 vs 교황의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로만 설명했으나, 실제로는 당시 하인리히 4세의 선제 하인리히 3세가 생전 교황을 3번 갈아치웠고, 하인리히 4세 본인도 파문이 취소되자마자 친교황파 세력을 손쉽게 전원 숙청했을 정도로 이미 세속 권력의 입지가 훨씬 올라온 상태였다. 그럼에도 카노사의 굴욕이 가능했던 건 과도한 황권을 견제한 제후들이 교황 편에 붙었기 때문이었다.[25]
16. 128회 야쿠자
- 야쿠자의 기원을 설명할 때 893 어원설을 언급하지만,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893 어원설을 부정하고 있다.
- <전후 일본의 주요 암시장> 지도에서 시코쿠(四国)를 시고쿠로 오기했다.
17. 129화 이스라엘 vs 이슬람 근본주의
헤즈볼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오류가 심하다. 설명에선 마치 헤즈볼라가 하마스 수준의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로 묘사되나, 실제 헤즈볼라는 오히려 파타나 사우디아라비아와 흡사하게 현실과 타협한 이슬람주의 정당에 더 가깝다.비록 헤즈볼라의 주요 동맹 세력들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긴 하지만, 헤즈볼라는 비이슬람권에도 유하게 대처하고 있다. 애당초 그들이 집권하고 있는 레바논은 기독교계도 40%가 넘는데다가, 현재 헤즈볼라가 참여 중인 연정은 제1당이 마론파 기독교 정당인 자유애국운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이유는 애당초 헤즈볼라의 창립부터가 PLO를 쫓아내겠다고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탄생한 시아파 유격대에서 출발한 집단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는 친하게 지낼 건덕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즉, 창립 이념부터 반 이스라엘•반 유대주의가 잡혀있는 집단일 뿐, 이념 자체는 이슬람 원리주의 계열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종파나 종교도 수용하고 문화 개방에도 적극적인 세속주의에 가까운 집단이기에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하마스와는 거리가 꽤 있는 집단이다.
똑같이 박현도 교수가 진행했으며 이란-이스라엘 관계에 집중한 156화에서는 헤즈볼라에 대해 '이슬람 강경파'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해석이 갈릴 수는 있으나 일단 129화의 ' 이슬람 국가 건설론'이나 하마스에 대해 사용하는 수사인 이슬람 근본주의(원리주의)보다는 온건한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26] 거기다 이후에도 헤즈볼라의 비판점은 무장투쟁 과정에서의 문제점으로 국한하고, 현 헤즈볼라 자체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다는 점 등을 부각하며 과거에 비해 훨씬 중립적으로 묘사했다.
18. 130화 크리스마스 특집 1탄
- 동지(冬至)의 양력 날짜를 12월 22~23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평년에는 12월 22일, 윤년에는 21일이고, 간혹 23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즉 12월 21~23일이라고 해야 맞다.
- 율리우스력을 설명하면서 율리우스 시저가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이름은 없다. 고대 로마 제국의 라틴어로 율리우스 카이사르(IVLIVS CAESAR)이며 영어식으로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이다. 율리우스 시저는 라틴어+영어의 혼합인 셈이다.
-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캠페인 문구인
KEEP THE POT BOILING, Help us bring Christmas Cheer to the needy
를 읽을 때 needy를 ready로 잘못 읽었다.
19. 131화 크리스마스 특집 2탄
132화 예고편에서 조조에게 촉나라 깃발을, 유비에게 위나라 깃발을 연결하는 오류를 범했다.20. 138화 마거릿 대처
다트포드를 그레이터런던(大런던)의 그리니치 자치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표시했다. 다트포드는 그레이터런던 동부에 인접한 켄트주의 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21. 141화 바이킹
알프레드 대왕의 화면에 아무런 설명 없이 (871년~988년)이라고만 표기했다. 이럴 경우 보통 생몰년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제작진은 재위기간을 의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경우로 보든 오기이다. 알프레드 대왕의 생몰년은 849년~899년이고, 재위기간은 871년~899년이다.22. 142화 초콜릿의 역사
자막에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인 엘 카스티요(El Castillo)가 9~13세기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놓고는 이어진 자막에 수천 년 전에 만든 건축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야 문명이 시작된 것이 약 4000년 전[27]으로 수천 년 전인 것이지, 엘 카스티요 자체는 700~1200년 전의 건축물이다.23. 144화 프랑스 침공
레지스탕스의 역할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과장해서 설명했다. 안톤 작전과 비시 프랑스의 해체 이후 나치가 망할 것 같은 시점에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증가한 기회주의적인 면모가 작지 않으며, 요시프 브로즈 티토 휘하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명색이 빨치산이면서 항공기에 전차까지 운용하고, 독일군 70,000명을 묶어둔 것에 비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매우 초라하다. 전선에 유의미한 도움을 제대로 주지도 못한 레지스탕스에 비해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조직적인 철도 파괴와 기습으로 독일군의 동부전선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었고, 심지어 명장 발터 모델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그리고 비시 프랑스를 괴뢰국으로만 설명하고, 자유 프랑스가 처음부터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묘사했지만, 프랑스의 식민지 대부분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고, 자유 프랑스는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본토를 통제하고 있었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지 관료 중에는 파시즘 사상에 호의적인 인물도 적지 않았고, 다당제 폐지·노동 3권 부정·엄벌주의 등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력하고 억압적인 사회 통제 정책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이 현지 식민지 관료에게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1940년 8월 차드 총독 펠릭스 에부에가 자유 프랑스 지지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까지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일부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 측으로 넘어왔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1942년 연합군이 알제리를 탈환하고, 알제가 자유 프랑스의 수도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비시 프랑스를 공격한 안톤 작전의 배경인 횃불 작전이나, 그 배경인 캐터펄트 작전으로 발생한 반영 감정도 넣지 않았으며, 단순히 나치가 통수를 친 것처럼 묘사했다. 마찬가지로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도 넣지 않았다. 도대체 왜 나치 독일이 괴뢰국이라는 비시 프랑스를 공격하는지, 충실한 나치 괴뢰라던 비시 프랑스가 함대를 자침시키는지 그들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니 대충 독일이 비겁해서라는 이유로 넘겼다.
1945년 이후 전범 척결도 개판으로 묘사했다. 68운동 이전까지 비시 프랑스의 고위급 관료들 상당수가 샤를 드골에게 붙어먹어 승승장구했으며, 살기 위해 독일군에게 부역한 이들이 많았는데도 화풀이성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하켄크로이츠를 새기는 등 전범 척결의 과정도 개판으로 이루어졌다.
독일인과 관계를 맺었다며 삭발당하는 프랑스 여자 |
반면 고위층에서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에 부역한 자들은 여전히 정치, 경제 부문의 요직에 앉아 부와 권력을 누렸다. 대표적인 예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전 서독 총리, 테오도르 오버랜더 전쟁 피해자-추방자 연방 장관, 한스 글롭케 연방 총리청장, 라인하르트 겔렌 연방 정보국장, 헤르만 요제프 압스 당시 도이체방크 총재,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독일 경제인 연합회장, 에른스트 폰 지멘스 지멘스감독위원회 의장, 1950년대 서독 최고의 갑부들 중 한 명이었던 프리드리히 플리크 등이 있다. 이들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는 홀로코스트 등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범죄에 대해 없었던 일로 취급하며 사회적인 망각을 강요했다. 이는 68 운동이 발생한 이유들 중 하나가 되었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최근의 연구 성과보다는 레지스탕스와 제4공화국의 과거사 청산을 무조건적으로 띄워주는, 68운동 이후 주류 학계에서 사장된 전통적 레지스탕시알리즘 사관 위주로 설명했다고 볼 수 있다. 정작 이날 강사였던 이용우 교수의 저서나 논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이러한 레지스탕시얼리즘 사관에 대해 사실상 신화에 가깝다며 선을 긋고 있는데 #[28] #, 프랑스의 대 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국의 항일 독립운동에 투영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 사회 특성상 현실적인 묘사 쪽이 오히려 리스크가 높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4. 156화 이스라엘 vs 이란
진실의 약속 작전 당시 양국이 치른 비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방어 비용은 한화 기준 2조 원, 이란의 공격 비용은 330억 원 정도로 추산했는데 이는 군사 전문가들의 추산 중 가장 크게 잡은 편인 자료들을 가져온 것이긴 해도 오류라고 할 수는 없으나, 바로 뒤에 두 비용의 비율이 분명 60:1 정도임에도 120:1로 계산하는 문과스러운 실수를 범했다.25. 162화 알프레드 노벨
일설에는 1888년 알프레드 노벨의 형인 루드비그 노벨(Ludvig Emmanuel Nobel)이 사망했을 때 한 신문에서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서 노벨을 '죽음의 상인'으로 지칭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노벨이 자신의 사후 이미지를 걱정해 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해당 오보의 원본이 발견된 바 없으며, 심지어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등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언급하거나, 인용한 바 없어서 잘못 알려진 풍문일 가능성이 높다.26. 163화 명나라의 폭군들
- 정덕제에 대한 평가가 전체적으로 박한 편이다. 현대로 올수록 정덕제는 기행과 별개로 황제로서 할 일은 제대로 했다고 평가받는 편인데, 본 강의에서는 근대 이전의 사관대로 그 기행만 집중적으로 부각해 일방적으로 폭군 취급했다.
- 도교식 제사를 지낸 흠안전(欽安殿)이 자금성의 이화원 중심에 있다고 자막을 달았는데, 자막이 틀렸다. 이화원이 아니라 어화원(御花園)이다. 어화원은 자금성 중심축선에 위치한 후원으로, 곤녕궁 뒷쪽에 있어서 명나라 때는 '궁후원'(宮後園)이라고 했다가 청나라 제5대 세종 옹정제의 치세때 '어화원'으로 개칭했다. 동•서 135 m, 남•북 89 m, 면적 12,015 m²이며, 흠안전(欽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어경정(御景亭)·이조당(璃藻堂)·부벽정(浮碧亭)·만춘정(萬春亭)·강설헌(絳雪軒)이, 서쪽에는 연휘각(延輝閣)·위육재(位育齋)·징서정(澄瑞亭)·천추정(千秋亭)·양성재(養性齋)·사신사(四神祠)·정정(井亭)·녹대(鹿臺) 등의 정자·대·누각이 소나무·측백나무·대나무 숲과 괴석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황제와 후비들이 휴식을 취하고 경치를 감상하던 곳이었다.
27. 164화 소련의 스파이
- 소련이 잡은 군인 포로수가 450,000명이라고 했으나 실제 포로수는 250,000명 정도였다.
-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막은 것이 CIA에 포섭된 펜콥스키의 결정적인 첩보라는 내용을 실었는데, 이미 미국에서도 핵전쟁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소련의 미사일 전력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소련을 견제해서 핵전쟁이 터졌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소리를 했다. 당장 맥나마라 국방장관도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라고 말할 정도로 양측 수뇌부가 공포에 질려 있었고, 먼저 미사일 철수를 제시한 것도 소련이었다.
28. 170화 플라스틱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에 대한 설명에서 그 넓이를 '대한민국 영토 면적[29]의 16배인 160만 ㎢'라고 언급해야 함에도 강사의 언급과 자막 모두 '대한민국 영토 면적의 16배인 160㎢'로 언급하는 바보짓을 저질렀다. 실제 160㎢라면 서울특별시 면적에도 못 미친다.29. 171화 로마 제국 쇠망사
- 콤모두스 황제가 검투사와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애첩 마르키아가 지극히 상식적인 만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는 화가 나서 오히려 근위대장과 애첩을 처형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이를 알게 된 근위대장과 마르키아는 결국 살기 위해서 레슬링 교관 나르키수스와 짜고 목숨을 건 콤모두스 암살을 시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근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는 데다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장한 채 지내는 인간병기 황제를 죽일 방법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음식에 독을 탔으며, 콤모두스가 독 때문에 욕실에서 토하고 괴로워하는 틈을 타서 나르키수스를 보내 목을 졸라 죽였다.
- 강의할 때 서기 3세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위협을 받게 된다고 했는데, 아니다.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붕어 이후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상속된 서로마 제국의 쇠락과 멸망에 영향을 준 것은 서기 4세기 후반에 일어난 제1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훈족의 동진에 의해 촉발되어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야기하고, 서유럽 문화권의 형성에 기여했다.
소위 '3세기의 위기'때, 고트족 같은 대규모 부족이 로마 제국의 영역 내로 침공해 들어와
데키우스 황제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지만 왕국을 세워 정착하지도 않았고, 한때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갈리아 제국, 로마 제국,
팔미라 제국의 삼국으로 분열되는 혼란의 시기도 있었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통일되고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략도 전부 격퇴했다.
30. 172화 시베리아
에드워드 1세를 잉글랜드 왕국 제5대 국왕이라고 자막 표시했는데, 에드워드 1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제5대 국왕이었므로, 플랜태저넷 왕조까지 자막 표시했어야 했다.31. 173화 바다를 닫아 몰락한 중국
정화의 원정때 사용된 함선의 규모에 대해서는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계획적인 소각과 대규모의 전란으로 인해 남겨진 기록이 희귀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는 이 점을 예기하지 않았다. 참고로 《 명사》는 정화의 원정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청나라때 편찬되었으며, 따라서 함선의 규모에 대해 기록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1]
애초에 6.25 당시 북한군에 지원을 보낸 중국공산당군 대다수가 이 국공내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고, 공식 지원 이전에 자발적으로 북한에 지원을 간 조선족 부대 등도 전부 이 국공내전에서 공적을 쌓았던 군인들이다.
[2]
중국공산당 정권의 승리로 아시아 일대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고,
6.25 전쟁의 발발 원인에도 지분이 있을 정도였다. 이 탓에 유럽 전선에선 다소 신승한 자유주의 정권이 아시아권에선 사실상 패배 판정을 받고, 사회주의 정권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해안 국가들을 포섭하는 단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3]
다만, 승리자측이 사회주의 정권 세력이라 결과적으로 냉전에서 사회주의쪽 세력에 힘이 크게 실렸을 뿐이다.
[4]
오히려 고우영 화백은 대놓고 한고조 유방을 찌질이 취급했고, 한신은 미화했으나, 역으로 한신이 저지른 과오도 모두 넣었기에 미화와는 별개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한신의 잘못도 어느정도 존재하는걸 볼 수 있었으나, 이 강의에선 한신의 과오가 전혀 담겨있지 않다.
[5]
똑같이 이성원 교수가 진행한 3편의 삼국지 강의들은
정사 《삼국지》 위주로 진행하며 《삼국지연의》의 각색된 부분들을 조목조목 지적한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후술하는 대로 시간적인 문제로 제대로 내용을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교수 본인의 시기별 전문성에 차이가 나는 듯 보인다.
[6]
특히 송의는 항량이 저러다 크게 패할 것이란 예측을 의제에게 들려주고 이를 맞췄기에 더더욱 의제의 신임이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7]
56만 명은 머릿수만 많지, 전혀 통솔되지 않은 군벌들의 연합체라는 점이나, 승리에 도취해 방만해진 점 등.
[8]
이성왕이 아니라 동성왕이라고 해도 중앙정부에서 제대로 견제하지 않으면 오초 7국의 난이나 서진시대 팔왕의 난같은 꼬라지가 나게 된다.
[9]
대표인
한신도 후술하겠지만 소하, 장량급 공신인
역이기를 죽게 만든 원흉인데다가 그렇게 유방의 공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얻은 제나라에서는 '왕으로 임명을 안해주면 안가겠다'고 밍기적대는 등, 제대로 눈 밖에 날 짓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나라의 통일 이후에도 과거 유방의 숙적인 항우의 수하 종리말을 거두는 등 어그로를 있는대로 끌었음에도, 유방은 끝내 회음후 강등 이후로는 한신을 견제하지 않았으나, 여후가 손을 써 한신을 제거한 것이었다.
[10]
그나마 가장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팽월도 여러 번 중앙에 바쳐야 할 공물을 쌩까는 등 중앙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
[11]
거의 유일한 예외가
번쾌로, 이쪽은 외척인 여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임의로 처형하려 했던 인물이었으나, 고조 유방이 붕어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2]
참고로 역이기는 그
소하와
장량에 버금가는 초창기 개국공신급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는데, 유방이 관중으로 향할 때 남부 영토 대다수를 역이기 덕분에 넘을 수 있었다. 즉, 유방이 관중에 최초로 입성할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공신들 중 한 명이었던 셈이다.
[13]
다만, 이는 조금 이해해야 할 것이 패널들이 하도 영화
300을 언급해댔기 때문에 강사 본인이 혼동이 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송을 보면 강사는 꾸준히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강의를 했다.
[14]
실제 이 전투의 여파인지 스파르타는 테르모필레 이후 1년 가까이 제대로 군을 꾸리지 못하다가, 최후의 전투인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가서야 제대로 활약하게 된다.
[15]
정작 웃긴건 강사는 되려 후방에 군이 있어 시간을 끌어야했기에 남았을 것이다라는 추론을 그대로 말했었다. 즉, 강의 문제가 아닌 순수하게 편집에서 오류가 난 것이다.
[16]
1 상용 온스(OZ)=28.349523125g
[17]
1 트로이 온스(OZ.T)=31.1034768g
[18]
이 부분은 역시
박현도 교수가 진행한 156화 이란-이스라엘 관계 편에서 훑고 지나가는 수준이긴 했으나, 백색혁명 이후 심각했던 빈부격차 문제가 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며 어느 정도는 정정되었다.
[19]
173화 중국의 해양정책 편에서는 800명이라는 숫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20]
농업 생산량의 증대, 중앙집권체제 강화, 성공적인 정복 활동 등. 두 사람의 치세 모두 숙청은 잔인했어도 대체로 중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한족 왕조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데, 강의에서는 마치 이러한 치세가 운 좋게 얻어낸 결과물인 것마냥 다뤄진다.
[21]
단 영락제의 경우 173화 중국의 해양정책 편에서는 숙청 문제는 굳이 다룰 필요가 없다 보니 대부분 생략됐고, 반대로 최대 업적인 정화의 대원정은 초반 20~30분을 통째로 잡아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중을 가지다 보니 같은 황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취급이 파격적으로 개선됐다.
경항대운하 완성 부분도 중국의 해양 진출 포기 원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언급되긴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어쨌든 실책보다는 업적이었기도 했고. 이후 다뤄지는 후대 황제들이
정통제,
경태제(
토목의 변으로 인한 명의 북방 집중 및 해양 포기 부분),
가정제(
해금령 관련 부분) 등 평균 이하 내지 폐급에 가까운 이들이라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는 것도 있다.
[22]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서양사 전체를 주름잡은 가문이라 그 역사의 스케일이 무지막지한데, 서양사 전공자도 아닌 독일어 전공자인 라영균 교수에게 그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설명하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설령 오류를 지적하더라도 비판받아야 하는 건 강사 본인보다는 100분 분량으로 무리해서 방대한 내용을 담아내려 하고, 오락적인 면모에만 집중한 제작진일 것이다.
[23]
카를 5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었다. 즉 펠리페 2세의 친사촌으로 둘은 동갑내기였다.
[24]
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어짐.
[25]
물론 이 부분은 세계사 중등 교육과정부터 분량 문제로 대놓고 해당 이분법을 쓰고 있는지라 직접 반박하기는 애매하긴 했다.
[26]
실제로 헤즈볼라는 이슬람 근본주의는 아니지만, 반서방주의-반이스라엘주의로 서방계열에선 강경파로 볼법한 정당은 맞고, 한국도 엄연히 서방세계의 일원인지라 이런 시각으로 가르친게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27]
방송에서는 마야 문명이 BC 15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28]
서평 부분을 보자.
[29]
사실 헌법상으로는 북한 영토도 대한민국 영토에 포함되므로 20만 ㎢로 잡는 게 맞으나, 실효지배 중인 10만 ㎢로 잡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