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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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건안열후(建安烈侯) 毛穆之 | 모목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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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열(烈) |
작위 | 주릉현후(州陵縣侯) → 건안현후(建安縣侯) |
성 | 모(毛) |
휘 | 목지(穆之) |
자 | 헌조(憲祖) |
아명 | 호생(虎生) |
생몰 | 불명 |
출신 | 형양군(滎陽郡) 양무현(陽武縣) |
부친 | 모보(毛寶) |
형제자매 | 2남 중 장남 |
자녀 | 6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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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정로장군 모보의 장남. 모진(毛珍), 모거, 모구(毛球), 모번(毛璠), 모근(毛瑾), 모원(毛瑗)의 아버지.2. 생애
모목지는 과감하고 의연하여 아버지 모보의 기풍이 있었다. 처음에는 안서장군 유익(庾翼)의 참군으로 임관했고, 아버지가 후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주릉현후(州陵縣侯) 작위 이었다.건원 2년(344년) 11월, 거기장군, 강주자사 유빙(庾冰)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유익은 나랏일과 더불어 형의 장례식을 동시에 처리해야만 했다. 유익은 형이 사망한 장소인 무창(武昌)으로 향하면서 장남 유방지(庾方之)를 건무장군으로 삼아 양양(襄陽)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유방지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린 것을 걱정하여, 휘하 장수 중 제일 믿음직스러운 모목지를 건무사마로 옮기고 유방지를 보필하게 했다.
영화 원년(345년) 7월, 유익이 등창으로 병사하자, 유익의 장수인 간찬(乾瓚), 대희(戴羲)가 관군장군 조거(曹据)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모목지는 안서장사 강반, 사마 주도(朱燾) 등과 함께 간찬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후 환온이 형주자사,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유익을 대신해 형주로 부임하니, 모목지는 그의 밑에서 다시 참군을 지냈다.
영화 3년(347년) 3월, 환온의 성한 토벌에 종군해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그의 차남이 도향후(都鄉侯)에 봉해졌다. 이후 양무장군, 영천태수를 역임했다.
영화 12년(356년) 2월, 환온이 낙양의 강족 요양을 정벌할 때도 종군하여 관중으로 들어갔다. 환온은 요양을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한 뒤, 조정에 상표해 진서장군 사상으로 하여금 낙양을 수비하게 할 것을 청했다. 환온은 조정의 명을 받고 귀환하면서 군사 2,000명과 모목지, 독호 진오(陳午), 하남태수 대시(戴施)를 남겨, 사상이 도착할 때까지 낙양에서 진나라 황릉을 보위하게 했다.
승평 원년(357년), 도독영주제군사(都督寧州諸軍事), 양위장군, 영주자사로 승진하였다.
승평 4년(360년) 11월, 환온이 남군공(南郡公)에 봉해질 때, 모목지는 건안현후(建安縣侯)로 개봉되고, 태위참군, 관군장군을 겸하였다.
태화 4년(369년) 4월, 환온은 세번째 북벌에 나서면서 수로를 이용해 전쟁 준비를 했는데, 하필 가뭄으로 인해 강물이 메말라 함선을 띄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환온은 모목지에게 수로를 파서 거야택(巨野澤)과 문수(汶水)의 물을 청수(淸水)까지 끌어오도록 명했다. 모목지는 병사들을 동원해 2개월 가까이 대규모 공사를 벌인 끝에 100리 가량의 수로를 뚫고, 거야택과 문수의 물을 청수로 끌어왔다. 환온의 함대는 청수에서 황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전연 정벌을 개시하였다.
태화 4년(369년) 9월, 전연의 명장 모용수의 활약으로 동진군은 대패하고, 배와 병장기를 모두 불태운 뒤에 육로로 퇴각했다. 환온은 퇴각하면서 모목지를 동연(東燕)에 남게 하고, 도독동연4군제군사(都督東燕四郡諸軍事), 영동연태수(領東燕太守)로 삼았다.
태화 4년(369년) 11월, 예주자사 원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환온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떠나면서 모목지를 영회남태수(領淮南太守)로 삼고 역양(歷陽)을 진수하게 했다.
태화 6년(371년) 정월, 원진, 원근이 모두 토벌된 후에는 도독양주지강서제군사(都督揚州之江西諸軍事), 영동군태수(領陳郡太守)로 옮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독양주지의성형주5군옹주지경조제군사(都督揚州之義成荊州五郡雍州之京兆諸軍事), 양양, 의성, 하남 3군태수로 옮겨졌고, 관군장군 직책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 이후 영양주자사(領梁州刺史)도 겸했다가 병에 걸려 해직되었으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금방 관군장군으로 복권되었다.
태원 3년(378년) 8월, 전진의 장수 팽초(彭超)가 팽성(彭城)을 공격하니, 모목지는 가절, 감강북제군사(監江北諸軍事)에 임명되어 광릉(廣陵)을 진수했다. 이후 우장군, 선성내사, 가절이 되어, 50,000 군대를 이끌고 고숙(姑孰)에 주둔해 전진군을 막았다.
태원 4년(379년) 2월, 양양 내성에서 전진군의 공세를 버티고 있던 주서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으나, 모목지가 도착하기 전에 양양이 함락되자 군을 물렸다.
태원 4년(379년) 3월, 거기장군 환충은 모목지를 도독양주지3군제군사(都督梁州之3郡諸軍事), 서만교위, 익주자사, 건평태수로 삼아 파군(巴郡)을 지키게 했다. 또, 모목지의 아들인 모구(毛球)를 재동태수로 임명했다. 모목지와 모구는 전진에게 빼앗긴 익주를 되찾고자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파서(巴西)로 향했는데, 선봉군을 이끌던 전봉독호 조복(趙福)이 전진의 장수 장소(張卲)에게 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량도 다 떨어지자, 모목지와 모구는 어쩔 수 없이 파동(巴東)으로 물러났다. 오래지 않아 모목지는 그곳에서 병을 얻고 사망했다.
사후 조정에서 그를 중군장군으로 추증하였다. 시호는 '열(烈)'. 아들 모진(毛珍)이 작위를 이었고, 관직은 천문태수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총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모거(毛據)가 명성이 제일 높았다고 한다.
3. 기타
- 사서에 나오는 모헌조, 모호생이라는 인물도 모두 모목지와 동일 인물이라 보면 된다. 생전에 애정황후 왕목지(王穆之)와 같은 휘를 가지고 있어 자(字)인 "헌조(憲祖)"로 불리다가, 환현이 잠시 황위를 찬탈했을 때는 환현의 할머니 공헌(孔憲)의 '헌(憲)'자 때문에 그 뒤로 아명인 "호생(虎生)"으로 불렸기 때문. 여담으로 사후에는 아명마저 당태조 이호(李虎)의 '호(虎)'자가 같아서 "무생(武生)" 고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