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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0:16:40

제17계획

1. 개요2. 배경3. 작성4. 실행5. 장점6. 한계점7. 요새 옹호론8. 예비군9. 같이 보기

1. 개요

제17계획(Plan XVII)은 1913년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채택된 동원계획이다.

동원계획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과 흔히 비교되는 계획이다.

2. 배경

조제프 조프르는 빅토르 콩스탕 미셸 장군이 예비군 문제로 상임전쟁심의회에서 고립당해 메시미에게 해임된 후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되었다. 참모총장이자 전시 총사령관으로서 그의 첫 업무는 현 동원계획인 제16계획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1908년으로 돌아가 여러 동원계획을 보면 프랑스군의 무게중심이 누가 봐도 벨기에 국경쪽으로 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북단에 배치되는 부대는 롱위와 메지에르 북부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병력의 숫자엔 변화가 없기에 프랑스군의 종심이 짧아짐을 의미했다. 또한 북해와 아르덴 사이 벨기에 국경을 감시할 어떤 부대도 없었다. 이러한 동원계획을 실시하면 침략에 무방비한 300km 폭의 거대한 회랑이 생겨난다. 이 노출된 회랑이 이전의 모든 계획에서 발견된다. 유일한 예외는 미셸 장군의 1911년 계획 뿐이나, 그의 동원계획을 실행하려면 예비군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상식에 반기를 들고 개혁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가 참모총장직을 잃는 결과로 끝났다.[1]

프랑스군 총참모부가 독일군이 벨기에 중부를 통과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이유는 다양하다. 물론 독일군이 병참을 위해 벨기에 최남단 주인 뤽상부르를 침범하리란 생각 정도는 했다.[2] 하지만 독일군이 상브르-뫼즈 선 북쪽으로 전선을 확장하리라고 결론내린 분석가는 거의 없었다. 상브르-뫼즈 선에 있는 나뮈르 요새와 리에주 요새, 벨기에군의 저항, 벨기에를 전면 침공하면 영국이 참전하리란 명백한 사실이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겐 벨기에를 침공함과 동시에 프랑스-독일 국경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병력이 없다고 착각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이 모든 추론이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다시 전쟁이 터지면 전투가 벨기에와 스위스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며, 전선이 북쪽으로 확장될 수는 있겠으나 북해까지 이어지진 않으리라는 결론이다.

1904년에 복수자라는 정체불명의 정보원이 프랑스 침공 계획을 프랑스군에게 넘겼다. 그의 정보에 따르면 독일군의 진격축선이 뫼즈와 상브르 계곡을 따라 통과하여 리에주, 나뮈르, 모뵈주를 지향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동의 규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그래서 소르브 대위는 1907년에 '독일군은 전역 초기에 뫼즈와 안트베르프의 방어를 뜷느라 시간 지연과 상당한 사상자를 초래함으로써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지에 대한 의견도 분열되었다. 벨기에를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한 논쟁자들조차 그러한 기동이 얼마나 대규모로, 즉 얼마나 북쪽으로 신장하여 이루어질 지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했다. 벨기에 내부에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뒤카른 대령은 독일군이 뫼즈 강 북쪽으로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뒤자르당 장군은 뫼즈 강 좌안이 주요 작전에 적합한 유일한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며, 메스트로 장군은 뫼즈 강 좌안, 즉 브뤼셀을 통과하는 대규모 기동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독일군의 우익이 북쪽으로 얼마나 펼쳐질지에 대해 명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직관은 조프르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14년에 프랑스는 러시아와 영국을 삼국 협상을 통해 동맹으로 두었다.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는 1892년에 군사협정을 맺은 이래 양호하게 발전해나갔고, 양쪽의 총참모부가 정기적인 회의를 가졌다. 조프르는 1913년에 러시아군의 기동훈련을 참관한 후 질린스키 및 니콜라이와 논의했다. 러시아측은 독일과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군이 동원 2주 후에 작전 실행이 가능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셋은 그리하면 독일군 전력의 20%를 붙잡아 서부전선에 대한 압력을 줄일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영국 측과의 논의는 일급기밀이었다. 영국 대륙 개입의 성격과 규모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조프르는 1912년 1월 9일에 최고국방협의회에서 동원이 시작되고 약 2주 후 6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이 도착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영국원정군의 위치에 대한 협의와 참모부의 연구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협정을 맺은 것은 없었기에 참전은 의회 투표에 달려있었다. 이것은 조프르가 영국군의 개입에 덜 의존해야만 했다는 뜻이다.

조프르는 1912년 2월 21일에 외무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 전쟁장관 밀르랑, 해군장관 들카세, 정치재정관 팔레올로게, 해군참모총장 오베르 앞에서 벨기에 선제공격을 제시했다. 조프르는 긴 연설 도중 이렇게 발언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 야전군이 나뮈르와 리에주 사이 남쪽을 향해 벨기에로 진입해야 가장 유리합니다.

조프르가 영국의 지원이 취소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이긴 했으나 그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푸앵카레가 이런 계획이 영국이 지원을 취소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프랑스군은 벨기에로 우회해 공격할 수 없게 되었고, 병력 집중이 벨기에를 위협하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게 되었다.

따라서 제17계획이 만들어질 당시 1912년의 상황은 이렇다. 조프르는 벨기에를 공격하고 싶어했으나, 영국이 중립을 지키거나 독일 편으로 참전할 가능성 때문에 포기했으며, 벨기에를 위협해서도 안 되었다.

3. 작성

조프르의 의도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공격 자체는 목적도 목표도 아니었다. 프랑스 참모대학에선 목적 혹은 목표를 탄착점으로 정의내렸다. 달리 말해, 프랑스군에서 목표란 왜 공격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이 독일군의 물리적 섬멸이었을 수도 있고, 베를린 점령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거나.[3]

조프르는 대답이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제17계획이 완료되면 실행할 작전계획은 뭐냐는 의문이다. 조프르는 어떤 작전계획도 만들지 않았다. 달리 말해 프랑스군에겐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에 해당하는 작전계획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조프르는 일단 공격해놓고 결과에 따라 결정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프르는 작전계획이 작전 진행 중 발생한 사태와 도착한 정보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며 작전계획을 수립하길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군이 추후에 어떤 작전계획이라도 실행가능하도록 만드는 초기 배치가 제17계획이었다. 그는 브리에 위원회에서도 이러한 맥락에서 계획이 머릿속에만 있었고 문서화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물론 전간기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조프르의 말을 믿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작전계획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기록을 찾지 못하자 모든 증거가 기록보관소에서 조직적으로 파기되었다고 판단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음모론이다. 제17계획 하나만 해도 뱅센에 문서가 17상자나 있고, 다른 문서에서의 언급까지 합치면 셀 수도 없다. 작전계획과 관련된 문서와 언급하는 수많은 문서까지 파기하는 대규모 증거조작이 일어나면 당연히 흔적이 남고, 당시 조프르가 샌드백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증인이 안나타났을 리도 없다.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정황증거만 있을 뿐이다. 당대 참모대학, CHEM, 군사언론에서 동원계획이 이루어진 후 실행될 작전계획이 존재해야 하느냐를 주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조프르는 이렇게 말했다. '요약하자면 나는 전쟁 첫날의 결과가 명백해지면 사태를 이용할 기회주의적 접근법을 취했다.' 그에겐 어떤 지리적인 목표가 없었으며, 일단 공격하고 첫 전투가 발생한 이후 계획을 수립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게 조프르가 밑그림도 없이 머리를 비워두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제17계획이 어떤 작전계획이라도 실행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성되었다면, 염두에 둔 바가 있었다는 뜻이며, 그가 증언했듯이 머릿속에 존재했다. 그가 공격방향은 미리 정해두었다는 의미이다. 사실 공격방향이야말로 제17계획에 관한 여러 문서화된 지침의 주제였다. 따라서 전쟁 발발 당시 GQG 장교들은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선 윤곽을 공유하고 있었다. [4] 이에 대한 증거는 갈리에니가 1913년 7월 8일에 조프르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는 당시 5군 사령관이었는데, 제17계획이 완료된 후 공격작전 계획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5] 이는 상임전쟁심의회 장교들은 프랑스군이 제17계획 이후 공격할 것임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격전을 추구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이러한 전투를 가용한 최대한의 전력으로, 혹은 조프르가 말했듯이 '집결된 모든 병력으로 공세를 취한다는 결심 외 어떤 선입견도 없이'수행하고자 했다. 선입견이라는 말은 사전 작전계획이라는 의미고, 집결된 모든 병력이라는 말은 예비대 없이라는 의미다.[6]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전력에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독일군의 규모를 늘릴 징병법의 통과를 지켜보았고, 수비대 주둔 도시를 전부 파악했고, 부대 조직과 그 구성부대도 대체로 알고 있었다. 중대, 대대, 연대, 사단, 군단 인원이 프랑스군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도 말이다. 상비군, 예비군, 보충군, 향토군, 향토예비군 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조프르는 이에 기반한 계산에서 양쪽이 30개 군단을 배치할 수 있으니 서부전선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두 군대에겐 중대한 구조적 차이가 있었다. 독일 군단 중 10개 이상이 예비군단이었다. 프랑스군은 위에서 말했듯이 사단집단 하나 뿐이었다. 조프르의 계산은 지휘통제 측면에서 보면 심각한 오산이었다. 게다가 조프르는 제2 서부군사행진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슐리펜 계획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총참모부는 미래에 대규모 분쟁이 발발할 시 동원엄호부대의 척후전과 야전군의 교전을 통한 정보수집 계획을 마련했으나, 꽤나 완벽한 계획이었음에도 프랑스군의 심각한 질적 문제로 인해 실패해버렸다.

총참모부는 질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도박을 벌였으나 국경 전투 중 심각한 오산이 밝혀졌다. 참모들은 독일군이 예비군을 일선에 두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군에서나 의회에서나 예비군은 낮은 전투력 때문에 일선에서 전투를 치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7] 좌파 정치인만이 예비군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8] 사실 독일군도 오랫동안 프랑스군과 같은 관점을 지녔다. 슐리펜 계획을 만든 알프레트 폰 슐리펜 본인부터가 1909년에 향토군과 향토예비군이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군사력의 일부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는 기사를 기고했다. 프랑스군은 이 기사를 번역해서 읽어보았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후임 참모총장인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슐리펜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 몰트케의 혁신적인 사고방식은 프랑스군이 전역 초기에 당한 두번째로 놀라운 기습이었으며[9], 프랑스군이 초기 4주 동안 패배한 이유 중 하나다. [10]

조프르가 오산을 했을 지언정, 독일군 우익의 길이가 뤽상부르에 닿을 정도밖에 안된다는 옛 분석가들의 오산은 하지 않았다. CHEM에서 1912년 2월 13일에서 29일 사이에 열린 도상연습은 2개 프랑스 야전군이 뤽상부르 북쪽에서 서진하여 나뮈르, 디낭, 로슈포르 사이에 도착한 적 주력을 상대하는 내용이었다. 미슐레의 회고에 따르면 CHEM이 1912년에 벨기에 침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갈리에니가 이에 따라 파리 근처의 야전군을 모뵈주 지역으로 수송하는 훈련을 실행했다. 또한 조프르는 생껑땅과 기스 근처에서 독일군이 뫼즈 강 좌안 혹은 북쪽에서 진격했다는 전제하에 현지도보답사식 전술훈련을 지시했다. 1911년 10월에 총참모부 3부는 최고국방협의회 회의에서 독일군이 작전지대를 상당한 넓이의 벨기에 영토로 확장하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적어도 조프르가 참모총장이었을 적엔 총참모부의 모두가 뫼즈 강 좌안 기동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동의 규모는 여전히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제17계획이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긴 했으나 리에주, 나뮈르, 모뵈주보다 훨씬 위에 진격축선이 있어도 제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11]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조프르가 작전계획을 만들진 않았으나 개개인의 구상까지 막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드망주 대령은 '북동 야전군 작전계획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업했다. 이 문서는 1912년 봄에 드망주가 제17계획이 실행된 후의 전개를 예상하며 개인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같은 주제의 문서가 수없이 많다.

모든 구상을 끝마친 조프르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동원계획을 완성했다. 제17계획은 적과의 시작 거리를 줄이는 일, 첫 대규모 전투가 최대한 빠르게 일어나도록 하는 일, 첫 전투에 적용될 배치의 첫 단추로서 병력이 집중되는 일을 계획이 풀어야 할 문제로 두고 작성되었다. 1913년 4월 18일에 전쟁장관 에티엔이 주재한 상임전쟁심의회 회의에서 제17계획이 발표되었다. 조프르는 회의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심의회는 새로운 계획이 보고서[12]에 나온 정보에 기반해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런 질문 없이 만장일치로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13] 배치는 이러했다. 4개 야전군 (1,2,3 5군)이 스위스부터 벨기에 국경의 이르송까지 분배되었다. 4군은 그 뒤에 배치되어 상황에 따라 3군이나 5군을 지원할 수 있게끔 되었다. 각 군단은 하루 행군거리인 20 - 30km 간격으로 떨어진 2개 선을 따라 배치되었다. 군단이 1번 문제를 고려하여 국경에 최대한 가까이 배치되었다. 계획이 완성된 후 몇달 동안 준비되었다. 모든 제대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야할지가 매우 상세하게 나와있는 동원일지를 받았다. 열차 하역이 매우 엄격한 일정을 따랐고 특수 플랫폼이 동원되었다. 조프르는 1912년 이후로 철도망이 전보다 유연해졌으므로 동원과 배치 완료 직전까지도 수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프르가 독일군이 리에주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4야전군을 3군과 5군 사이에 삽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원 과정의 정확성과 유연성은 조프르가 공병으로서 가진 유능함의 증명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제17계획의 의도는 '공격하기'였다. 이는 1914년 2월에 발표된 지침에 분명히 드러나있다.
프랑스 야전군이 실행할 2개 주작전의 형태가 이렇게 전개될 것이다.
하나는 우익 보주 산맥의 숲으로 뒤덮인 단층 지괴와 툴의 하류로 흐르는 모젤 강 사이 지형에서
하나는 좌익 베르됭-메츠 선 북쪽에서
이러한 두가지 작전이 오트 드 뫼즈와 외브르에서 작전을 실시하는 부대에 의해 면밀히 연결된다.

이에 따라 야전군마다 임무가 설정되었다. 1, 2군은 라인 강과 모젤 강 사이에서 작전을 실시하고, 5군은 베르됭-메츠 선 북쪽에서 실시하고, 한편 4군은 후방에서 대기하다 상황에 따라 북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하고, 3군은 5군과 1, 2군을 연결하게 된 것이다. 각 야전군이 목표가 무엇인지는 모른 채(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무엇을 해야할지 윤곽을 받았다. 야전군이 마을, 숲, 강 등 특징적인 지형에 따라 하나 이상의 방향으로 공격해야만 했다. 명확한 임무는 없었지만, 조프르는 배치가 완료되면 정보수집계획 덕분에 필요한 정보가 모일 것이라 예상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4. 실행

이쯤에서 전쟁사의 미스테리를 이야기해야 한다. 1912년에 조프르가 벨기에 선제공격을 요청하던 중 그래야할 이유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메츠와 스트라스부르의 요새, 아르덴의 숲, 디외즈 지역의 호수, 알자스-로렌의 험한 지형 때문에 벨기에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프르의 설명을 읽어보면 벨기에 말곤 어디에서도 공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프르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알자스에서든 로렌에서든 결정적 전투에 적합한 지형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프르는 도대체 왜 2년도 지나지 않아 불리한 지형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던 장소에 야전군을 보냈을까? 어쩌면 속으론 공격이 쉽다고 생각했으면서 블러핑을 쳤던 걸지도 모른다. 벨기에 공격을 승인 받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알자스-로렌이 공격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하는 분석가가 프랑스군에 다수 존재했고, 조프르가 그들의 설명을 못들어봤을리가 없기에 별로 납득되지 않는다. 조프르는 알자스-로렌을 왜 공격했는지 해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니 앙리 베르틀로의 회고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14]
조프르는 군사적 이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이유로도 병력을 전진시켰다. 그는 끔찍한 1870년 패배의 기억이 우리 군인들을 심하게 짓누르고 있을까봐, 장성진 보다는 병사들이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을까봐 두려워했다. 이 환상, 즉 독일군의 우월성이라는 미신을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이 증언은 배치 도중에 알자스를 공격한 이유도 설명해준다. 생각해보면 조프르가 알자스-로렌에서 지형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결정적 전투지 전투가 아니다. 베르틀로의 말을 믿자면 조프르는 결정적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기증진을 위해 공격한 것이고, 지형이라는 물질적 요인보다 사기라는 정신적 요인을 중요시한 것이다. 조프르가 의도, 계획, 목적 등을 의미하는 이러한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조프르는 전쟁이 시작된 후 제17계획 실행 중 새롭게 들어오는 정보에 기반하여 작전계획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 내용을 포함해서 말이다.
전쟁을 국경선을 넘어서 수행한다.
룩셈부르크와 뤽상부르를 통과하는 주공을 제3,4 야전군에 지시하여 뫼즈 강, 나뮈르, 네덜란드 국경 사이를 통과하는 독일 야전군의 병참선을 위협한다.
제1,2 야전군으로 메츠와 보주 사이에서 부차적인 공격을 실행하여 적이 제3,4 야전군의 측방을 공격하지 못하게 방지한다.
마지막으로, W야전군(영국원정군을 의미한다)·벨기에군·제5 야전군이 뫼즈 강과 상브르 강 사이에서 나뮈르·안트베르프·모뵈주의 요새를 이용해, 서진하는 독일군의 측방에 자리잡아 지연시키고 저지한다.

앙리 베르틀로가 말한 군사적 이유는 여기에 담긴 것이다.

제17계획이 완료되자 프랑스군은 전부 현역 부대인 21개 군단에 덧붙여 15개 군단 병력에 해당하는 10개 예비사단, 몇개 독립사단과 10개 기병사단을 배치했다. 독일군은 제2 서부군사행진계획이 완료되자 36개 군단을 배치했는데, 이 중 13개가 예비군단이었다. 독일군의 병력이 더 많았으나 프랑스군이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숫적으로 우세해지기 어려울 정도의 물량 차이는 아니었다. 독일군의 숫적 우세는 여러번 말했듯이 예비역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발생했다.

이후의 전개는 제17계획이 끝난 이후의 일이므로 국경 전투로 이어진다.

5. 장점

제17계획의 장점은 아래와 같다. 국경 전투에서 협상국이 우세했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할 정도로 훌륭했다.

6. 한계점

제17계획이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아래에서 언급한 것 외에 전장의 정보 습득에 실패하거나 예비군을 제대로 된 전력으로 신용하지 못했다거나 예비대가 극히 부족했거나 하는 문제가 있으나 그건 조프르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프랑스군 및 프랑스 제3공화국 전체의 문제점이므로 제17계획의 단점만으로 언급하기는 문제가 있다.

7. 요새 옹호론

국경 전투와 그 이후의 참호전이 벌어진 이후 어째서 제17계획의 의도를 방어에 두지 않았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들이 제17계획에 북해부터 스위스까지 600km 길이에 걸치는 참호를 판다는 내용을 넣어야 했다는 우스운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리비에르 요새 체계에 의존해야만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큰 문제점이 있으나 프랑스 침공때까지 프랑스 육군의 방어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문제점도 많지만 장점도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점을 살펴보면 전간기 프랑스인들은 요새가 공성포에 어떻게 파괴되는지 목격했으면서 여전히 요새를 신뢰했다. 심지어 현대에도 베르됭 전투가 프랑스군이 춘계 공세 전에 국경 전투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보병이 기동전 경험을 쌓을 기회였음을 모르고 요새를 둘러싼 채 근세식 공성전이라도 한 것 마냥 망상하며 중요성을 과장하는 시선이 남아있다. 정치인과 학자를 포함해 전간기 요새 옹호론자들은 어째서 조프르가 영구적 축성물에 기반한 개념을 채택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의문은 곧 정치적이면서 단순하고도 이념적인 생각으로 이어졌다. 공격전을 추구해 승리하여 정치적으로 야심찬 목표를 노리는 게 정당한 일인가? 요새 옹호론자들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공격이 정당한지 아닌지 문제를 두고 그들은 독일은 공격 말곤 아무 생각도 없는 무조건적인 침략자로, 프랑스는 방어만 해야 하는 희생자로 상정한다. 프랑수아 오스카 드 네그리에 장군 등 많은 프랑스인이 공화국 군대는 공격의 도구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공화국 군대는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공격의 도구라고 수정하는 게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다는 건 제쳐두고, 이건 방어를 공화주의 이념과 엮어서 반공화주의자가 많았던 프랑스 군부를 저격하며 공방의 문제를 좌우 정치 문제로 가져가는 발언에 불과하다. 즉 이들에게 방어주의는 프랑스 공화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의 행위고 공세주의는 공화국을 쿠데타로 전복시키려는 반동주의자들의 행위였다. 이들은 공화국이 대체 어떤 전쟁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적국이 동맹국을 멸망시키는 꼴을 구경만 하기? 아니면 수도를 내주고 항복하기? 정상적인 공화국은 이런 목표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제쳐두고, 그럼 위협을 어떻게 제거하라는 걸까? 방어의 문제점은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고착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나기 전, 페르낭 앙주랑이 어떤 공격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꾸짖는 책을 하나 출판했다. 그 책의 이름은 국경의 비밀이다. 놀랍지도 않게 리비에르 요새 체계를 찬양하는 책이다. 책 내용 중 1871년 국경과 공세정신은 아주 흥미롭다. 앙주랑이 이 장에서 펼친 주장을 요약하자면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 군대의 유일한 역할이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므로 다른 모든 것을 (공격이라던가) 제쳐두어야 한다. 앙주랑의 또다른 주장을 보자면, 1815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로 프랑크푸르트 조약 이후 독일이 프랑스를 전략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으며 공격 배치에 유리한 지형이 사라졌다. 1871년 이후엔 기동전을 국내에서만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적을 대기동을 벌이기 위해 자국 영토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기동전보다 전례없는 악수이자 전략적 아마추어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앙주랑에 따르면 프랑스는 1815년 이후로 영구적인 군사적 열등함에 놓이게 되었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스스로를 요새로 둘러싸 틀어박히는 것 뿐이었다. 마치 수십년이 지나도 동맹 구도든 기술력이든 정권이든 여론이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앙주랑은, 이폴리트 랑글루아 장군의 말을 인용하자면, 프랑스가 매 맞은 개처럼 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새 옹호론자들의 주장에는 장점도 있었다. 그들도 구식 요새가 공성포에 취약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최신식 요새로 메꾸자는 결론을 곧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노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전전기에 만들어져서 1차대전에서 공격을 받은 요새의 상당수가 현대전에는 써먹기 곤란하여 곡사포의 포격을 받으면 순식간에 개박살이 나는 구식 요새였으며 벨기에의 신형 요새라고 하는 것들도 철근도 제대로 넣지 않고 두께도 얇은 그냥 콘크리트 상자에 불과하여 독일 제국군이 공격해오자 조금만 전투를 진행해도 요새 내부에 소음이 작렬하고 화기 발사시 나오는 유독가스가 실내를 꽉 채우며 장시간 전투시 필요한 의식주를 해결할 시설도 존재하지 않아서 요새 수비군이 버틸 수 없었기에 쉽게 함락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는 애초에 4만명이 필요한 요새이지만 개전 당시 2만5천명만이 수비하는 상황에서 병력부족문제만 따져봐도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구식 방식인 도시를 원형으로 둘러싸서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방식으로 방어하는 요새 배치 때문에 침공군이 쉽게 요새지대를 서로 분단시켜서 고립시킨 후에 요새 외곽 방어선부터 공성포와 습격대를 사용해서 하나씩 공략하는 방식을 사용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간기의 기술력 발전을 사용해서 요새를 방어선 형태의 일렬로 만들어놓는 요새 방어선을 설립하고 요새 내부 시설을 확충해서 장시간 전투시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고 요새를 서로 연계하도록 구성해놓아서 요새들이 서로 지원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참호, 철조망, 대전차 장애물과 연계해놓고 요새포를 확충하고 요새선 후방에 열차포를 비롯한 거포를 배치하면 공성포의 타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마지노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도 마지노선은 최서단 1개소만 제외하면 함락되지 않았고 낫질 작전으로 우회당한 후에 후방을 공격당해서 항복했다. 1차대전과는 달리 요새선이 정면공격으로 돌파당하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강화하고 요새선을 설치하는 것은 프랑스만의 특별한 특징도 아니었다. 벨기에도 에반-에마엘 요새를 준비했고 기존의 버려진 요새를 다시 수복 및 강화했으며 소련도 스탈린 선 몰로토프 선을 만들었으며 핀란드도 만네르헤임선을 만들고 그리스도 메탁사스선을 만들었다. 심지어 미국도 필리핀 자치령 드럼 요새를 비롯한 요새 시설물을 만들어놓았고 영국도 싱가포르와 지브롤터에 강력한 요새를 만들어놓았다. 심지어 나치 독일 지크프리트 선을 만들 정도였다.

이러한 요새와 요새선들은 공격군에게 구스타프 열차포같은 만들기 힘들고 매우 비싸며 운용이 매우 어려운 특수무기를 제작 및 투입하게 만들고 목표가 된 요새를 공략하는 작전에 맞춘 특수부대와 강력한 화기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함락당했으나 공격군에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히거나 공략전에 시간을 오래 소모하고 병력을 한 곳에 묶어놓았으며 식량, 탄약, 무기등의 각종 자원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드럼 요새나 동물원 대공포탑처럼 직접적인 공격은 막강한 방어력과 강력한 화력으로 계속 버티다가 상부의 명령으로 항복하거나 현지 협상으로 항복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각국이 요새를 강화하고 요새선을 설치한 이유는 총동원령 선전포고로 즉시 인정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총동원령을 섣불리 내릴 수 없으니 개전 극초반에 요새선과 현역 병력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총동원령을 내려서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필요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국경이나 요충지역에 요새선이 없던 폴란드 제2공화국 연합국의 압박으로 인해 총동원령을 발령했다가 취소하는 사태까지 겹쳐서 폴란드 침공에서 나치 독일군이 전쟁을 개시하자마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밀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요새선을 활용해서 영토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도 충분했다. 병력을 몰빵해서 단기전식 국지전을 일으켜서 자국에게 필요한 타국의 영토 일부분을 빼앗은 후 버티기를 해서 해당 영토를 뜯어가겠다는 생각을 가진 국가들이 워낙 많았기에 애초에 그런 시도를 못하게 하거나 구원군이 최전선에 충분하게 배치될 시간까지 버틸 수준의 요새화가 필요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프랑스군의 답없는 수준의 심각한 상황은 요새 옹호론자들도 1차대전의 경험으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상태가 심각하게 안좋은 프랑스군으로 기동전을 벌이다가 독일군에게 한방에 털리느니 일단 요새선에서 방어전을 하며 독일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후에 상황을 판단하고 전황에 맞추어서 영국과 같은 동맹국과 같이 반격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렇게 요새 옹호론자의 주장에는 장단점이 존재하므로 요새 옹호론자의 주장에서 장점을 추려내서 공격과 방어를 균형있게 추구했다면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 육군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제프 조프르의 1차대전 극초기 실책이 워낙 큰지라 요새 옹호론자들의 주장에 매우 큰 힘이 실리고 말았다.

결국 역사적 흥망성쇠에 순응하고 적과 운명이 무슨 짓을 하든 결단력을 가지고 체념해야 한다는 앙주랑의 주장에 전간기 프랑스인들이 열광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앙주랑의 저서가 전간기 프랑스에서 얼마나 자주 인용되었는지는 셀 수도 없다. 프랑스인들은 기동전을 조롱하는 국경의 비밀을 성서처럼 여기며 논의를 편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제17계획이 '공격' 작전계획이라는 정치적 선동을 일으켰고, 영어권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방어주의로 이어지는 조프르와 조프르의 제17계획에 대한 공격은 전술과 작전에서 매우 무능했던 총사령관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로 인해 불이 붙은 면이 있다. 여기에는 조프르가 고위 장성에게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인 정치나 사교 측면의 능력이 매우 많이 부족하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람을 상대할 때 자신이 판단하기에 별로다 싶으면 매우 무뚝뚝하게 대응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도 매우 심각했다.[15]

그리고 이들은 조프르가 수많은 요새를 건설하거나 개선한 공병장교이자 퐁텐블로 공병학교의 강사이며 프랑스의 영구적 축성물을 책임지던 공병감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조프르는 요새 옹호론자들과 달리 프랑스에 건설된 요새 중 매우 소수만 철근 콘크리트와 개폐식 강철포탑으로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따라서 동원계획을 요새 기반 방어에 의도를 두고 만드는 것이 미친짓임을 알고 있었다. 1910년 5월 2일 상임전쟁심의회 회의에서, 심의회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됐고 참모총장도 아니었기에 발언력이 약했던 조프르가 요새 해체에 관한 주제가 나오자 적극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장기간 실제 방어가 가능한 요새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롱위, 몽메디, 그리고 특히 랭스, 라옹, 라 페르의 요새처럼 작고 오래된 요새를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총사령관의 관할에 놓아 총사령관이 요새가 유지하기에 적합한지, 아니면 버려야 하는지 결정하고 또한 요새가 야전부대를 지원하는 용도로 이용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저렇게 허약한 요새를 요새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총사령관이 요새를 어느 수준까지 방어할지 결정하도록 권한을 줘야 하지 않을지, 필요하다면 요새총독에게 요새를 포기하라고 명령할 권한을 줘야 하지 않을지도 의문입니다.

조프르는 자기가 이 때 제안했던 개념을 잊지 않고있다가 1915년에 교리의 요새와 관련된 조항 몇가지를 수정하여 베르됭에 적용했고, 1916년에 베르됭의 위기를 스스로 초래하면서도 작년에 도입했던 선진적인 요새 개념으로 만회에 성공했다. 이건 프랑스군이 요새를 필요할 때만 필요한 만큼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합리적인 접근법이었다. 그래서 조프르가 제17계획을 요새 기반 방어에 의도를 두고 만들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조프르가 참모총장이 되었을 쯤엔 요새를 강화할 돈도 시간도 없었다. 조프르가 요새에게 기대한 역할은 전쟁이 발발하면 동원엄호부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프르는 구식 요새를 방어선에 통합하는 새로운 개념에 따라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 개념은 요새화지대라는 개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조프르는 참호, 철조망, 기관총의 조합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요새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사실 정반대다. 프랑스군이 러일전쟁을 관찰하고 야전축성에 관한 교리를 제작했기 때문에 참고할 수도 있었다. 조프르는 1913년 4월 18일에 리비에르가 요새화하지 않은 그랑 쿠론네 언덕을 훗날 참호망 건설이 가능하도록 미리 측량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반영구적 축성물이 적에게 저항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프르는 제17계획의 뼈대 내에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낭시의 우선순위가 가장 높았고, 갈리에니의 요청으로 오트 드 뫼즈가 추가되었다. 벨기에 국경의 몽메디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대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실제 작업이 진행된 건 거의 없었다. 낭시에서의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고 몽메디에서의 작업은 아예 시작되지도 않았다. 20군단은 페르디낭 포슈가 군단장으로 앉고 나서야 무거운 궁둥이를 움직여 삽질을 개시했다.[16] 이건 프랑스군에 자기네 교리가 뭔지도 모르는[17] 사람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지만, 이 사실은 오랫동안 묻혀버렸다. 왜냐하면 조프르가 국경 전투 중 프랑스 장교단의 상태를 파악하고 대숙청을 일으키기 전까지 프랑스 장교단의 상태가 극도로 심각했음을 군부가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제프 조프르가 제17계획에서 임기응변을 잘못 사용해서 알자스-로렌을 공격함으로서 국경 전투를 말아먹지만 않았어도 프랑스 육군이 요새 옹호론자들의 주장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에 아쉬움이 크다.

8. 예비군

예비군 문제는 제17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징병제 군대는 매년 복무에 적합한 성인을 같은 기수로 대규모 징병한다. 동시에 현역병 복무기간을 채운 기수가 대량으로 전역한다. 예비역은 훈련받고 현역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국방의 의무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다. 프랑스군은 징병군이었으므로 현역군[18]과 예비군으로 이루어졌다. 현역군은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으로 조직된다. 하지만 예비역은 민간으로 돌아가 자기 직업에 종사하므로 평시에는 현역 핵을 제외하곤 예비역을 위한 조직적 뼈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이 선포되고 동원령이 내려오면 예비역이 보통 2가지 방법으로 활용된다. 첫번째로 예비역이 현역 부대를 완편하는데 쓰이고, 두번째로는 부대의 핵이 되는 현역 간부를 제외하면 예비역만 있는 부대를 편성하는데 쓰인다.

프랑스에선 옛날부터 현역군이 예비군보다 훨씬 능률적이라고 여겨졌다. 이유는 그냥 체력과 훈련 면에서 예비군이 현역군보다 능률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같이 보기


[1] 미셸이 제시한 현역과 예비역의 혼합 편성을 채택하면 프랑스군이 북해까지 병력을 배치할 수 있게 된다. [2] 뤽상부르로 진입하려면 룩셈부르크를 통과해야 하는데, 룩셈부르크도 영국에게 독립보장을 받긴 했으나 프랑스, 독일은 물론 영국 본인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3] 1913년에 조프르의 지시로 갱신된 프랑스군의 교리인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 중 전자의 4조는 결정적 전투로 적 주력을 물리적으로 섬멸해야 한다는 내용이며, 그 뒤에 영토 일부와 요새 점령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문장이 덧붙는다. 독일군을 섬멸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수도쯤 되어야 점령이 거기에 미치는 중요성을 갖는다는 의미다. [4] 정치인들은 조프르가 공격할 생각이라는 것 외엔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프랑스 군부와 정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며, 쿠데타 위험이 없는 공화파라는 이유로 참모총장이 된 조프르조차 이런 문제에 대해선 왕당파 군인들과 같은 견해였다. 실제로 그는 사라예보 위기 당시 전쟁장관에게 전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형편없는 지도 한장만 들고와선 독일군의 우익을 뫼즈 강 중류에서 잘라낸다는 간단한 설명만 하고 가버렸고, 국경 전투 중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정부에 알려주고 싶은 정보만 알려줬다. [5] 이것은 프랑스군에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다. [6] 그래서 국경 전투 당시 프랑스군에겐 예비대가 사단집단이라는 군단 규모의 부대 하나밖에 없었다. 사실 조프르한텐 프랑스의 장교와 부사관 부족 때문에 예비군단을 편성할 방법도 없었다. 동원령이 내려지면 예비군이 일단 현역 부대를 채운 후 예비군으로만 이루어진 예비역 부대를 만드는데 쓰였는데, 이 부대에서 현역 간부가 핵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7] 일선이니 이선이니 하는 표현은 당대에 전투의 강도를 나타내는 데 썼던 표현이다. [8] 그리하여 예비군 문제는 좌우 정치대립 문제로 번졌다. [9] 첫번째는 당연히 독일군의 거대한 우익이다. 1914년 기동전 중에 중포 부족 문제는 예비군 문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0] 특기할만한 사실로,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자기네와 달리 예비군을 주작전에서 1선에 배치할 것이라는 정보는 얻었었다. 조프르는 이 정보를 무시했을 뿐더러 1914년 8월 25일까지도 독일군이 현역 군단으로만 공격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왜 그랬는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예비군의 전투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지휘관으로서의 조프르는 베르됭에서도 이런 종류의 무능함을 보였다. 예비역 부대의 낮은 전투력과 부족한 장비가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으로 꼽히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본말전도다. 독일군은 다수의 에비군단 덕분에 통계 숫자로 보이는 것과 달리 양적으로 압도적이었고, 전역 초기의 성공 원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11] 그럼 조프르가 배치를 더욱 북쪽으로 신장할 순 없었을까? 그가 예비군에 믿음이 없었고, 독일보다 먼저 벨기에에 침입해선 안됐고, 당대 프랑스군의 교리가 기동전이었으므로 절대 없다. 프랑스가 인구가 많아서 600km 길이에 전부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조프르가 무리해서 더욱 북쪽으로 배치하면 국경이 무방비로 노출되는데, 벨기에에 바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결정적 전투를 추구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조프르는 남에게 대단한 영감을 줄 생각 없이 가장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을 뿐이다. [12] 분량이 68p다 [13] 덕분에 조프르는 몇년 후 제17계획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왜 그 땐 반대 안했냐고 대답할 수 있었다. [14] 앙리 베르틀로는 프랑스군의 교리를 제작한 7인 중 한명이다. 나머지는 폴 포, 엘리 두아셀, 프랑수아 앙투안, 샤를 브레캬르, 알루앵, 오귀스트 브로세다. 이들을 조프르가 계급에 상관없이 교리 제작에 적합하다 생각하여 직접 지명했다. 교리 승인은 밀르랑이 했고, 최종 결재는 푸앵카레가 했다. 보면 알겠지만 루이 그랑메종과 페르디낭 포슈는 교리 제작에 (둘의 이론이 7인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참고되었는지와는 별개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15] 조프르가 공화주의자라는 이유로 참모총장이 되었음에도 전간기엔 좌파 진영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우파보다 격렬한 모습을 보였다. 극좌파는 처음부터 조프르가 충분히 공화주의적이지 않다며(조프르가 문민통제를 싫어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지지하지 않았으니 그렇다 치고, 좌파가 보인 증오의 핵심적인 이유는 사실 대전쟁의 사상자가 아니라 실망과 배신감이었다. 그들은 조프르가 피슈 사건을 일으켰던 제2의 앙드레 장군이 되길 원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경험한 건 제2의 카스텔노였다. 특히 민간에서는 조프르가 특정 정당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을 고까워했고, 조프르가 친한 친구 몇명을 제외하고 모든 정치인들에게 거리를 두자 가식적인 얼간이라고 경멸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기로 유명한 조프르는 그들에게 반응도 안해주며 살다 떠났다. [16] 카스텔노는 포슈가 그랑 쿠론네에 작업해놓은 참호 덕분에 낭시를 지켜낼 수 있었다. [17] 흔히 엘랑 비탈이라는 존재한 적도 없는 가상의 교리의 상상속 내용 때문에 프랑스군이 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프랑스군의 실제 교리에 딱히 칭찬할 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2000년대 기준으로 봐도 나쁜 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나쁜 점을 따지자면 1장 일반론에서의 절제없는 표현을 고를 수 있겠지만, 당대 사람들은 원래 말을 그런 식으로 했다. 프랑스군의 문제는 대다수의 장교가 교리를 익힐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국경 전투만 봐도 프랑스 지휘관들이 교리에서 꽤나 중요하게 다루는 아방가르드를 편성해 제대로 운용하기만 했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참사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국경 전투의 참사는 공세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공세주의 관념과 교리를 모르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몰라 발생한 소심하고 느려터진 비공세주의적 실천이 위험하게 결합한 결과였다. [18] 장 조레스의 경멸적인 표현에 따르면 병영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