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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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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킨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선덜랜드 AFC 로고.svg

33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주장
에릭 칸토나
(1996~1997)
로이 킨
(1997~2005)
게리 네빌
(2005~2010)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앤디 타운센드
(1994~1997)
로이 킨
(1997~2002)
스티브 스턴튼
(2002)
}}} ||
로이 킨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1998-99 · 1999-00
파일:PFA_UK_logo.png
파일:FWAlogo.png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92-93 · 1996-97 · 1999-00 · 2000-01 · 2001-02
파일:European_Sports_Media_logo.png
}}} ||
로이 킨의 기타 정보
[ 펼치기 · 접기 ]
파일:EPL_명예의전당.png
<rowcolor=#a08d6f> 순서 연도 이름 포지션 구단 비고
<colbgcolor=#fff,#191919> 1 <colbgcolor=#fff,#191919> 2021 <colbgcolor=#fff,#191919> 앨런 시어러
(Alan Shearer)
<colbgcolor=#fff,#191919> 공격수 <colbgcolor=#fff,#191919> 블랙번 로버스
뉴캐슬 유나이티드
<colbgcolor=#fff,#191919> PL 통산 최다 득점(260골)
PFA 올해의 선수 최다 수상(2회)
2 티에리 앙리
(Thierry Henry)
공격수 아스날 PL 통산 최다 득점왕(4회)
PFA, FWA, PL 올해의 선수 최다 수상[1]
3 에릭 칸토나
(Eric Cantona)
공격수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4 로이 킨
(Roy Keane)
미드필더 노팅엄 포레스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 프랭크 램파드
(Frank Lampard)
미드필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첼시
맨체스터 시티
PL 미드필더 통산 최다 득점(177골)
6 데니스 베르캄프
(Dennis Bergkamp)
공격수 아스날
7 스티븐 제라드
(Steven Gerrard)
미드필더 리버풀 PL 통산 PFA 올해의 팀 최다 선정(8회)
8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미드필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 2022 웨인 루니
(Wayne Rooney)
공격수 에버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0 파트리크 비에라
(Patrick Vieira)
미드필더 아스날
맨체스터 시티
11 세르히오 아구에로
(Sergio Agüero)
공격수 맨체스터 시티 PL 외국인 통산 최다 득점(183골)
PL 최다 해트트릭(12회)
PL 이달의 선수 최다 수상(7회)
12 디디에 드록바
(Didier Drogba)
공격수 첼시
13 뱅상 콤파니
(Vincent Kompany)
수비수 맨체스터 시티 수비수 최초 헌액
14 페테르 슈마이켈
(Peter Schmeichel)
골키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톤 빌라
맨체스터 시티
골키퍼 최초 헌액
15 폴 스콜스
(Paul Scholes)
미드필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6 이안 라이트
(Ian Wright)
공격수 아스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17 2023 알렉스 퍼거슨
(Alex Ferguson)
감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최초 헌액
18 아르센 벵거
(Arsene Wenger)
감독 아스날
19 리오 퍼디난드
(Rio Ferdinand)
수비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퀸즈 파크 레인저스
20 페트르 체흐
(Petr Čech)
골키퍼 첼시
아스날
PL 통산 최다 클린시트(202경기)
21 토니 아담스
(Tony Adams)
수비수 아스날
22 2024 애슐리 콜
(Ashley Cole)
수비수 아스날
첼시
23 존 테리
(John Terry)
수비수 첼시
23 앤디 콜
(Andy Cole)
공격수 아스날
뉴캐슬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풀럼
맨체스터 시티
노팅엄 포레스트

[1] PFA 올해의 선수 2회, FWA, PL 올해의 선수 3회.
아일랜드의 축구인
파일:로이 킨.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로이 킨
Roy Keane
본명 로이 모리스 킨
Roy Maurice Keane
출생 1971년 8월 10일 ([age(1971-08-10)]세)
아일랜드 먼스터 지방 코크
국적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 체중 78kg
종교 가톨릭 ( 세례명: 마우리시오)[1]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2] / 은퇴)
축구 감독
해설가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코브 램블러스 FC (1989~1990)
노팅엄 포레스트 FC (1990~199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3~2005)
셀틱 FC (2005~2006)
감독 선덜랜드 AFC (2006~2008)
입스위치 타운 FC (2009~2011)[3]
아일랜드 대표팀 (2013~2018 / 수석 코치)
아스톤 빌라 FC (2014 / 수석 코치)
노팅엄 포레스트 FC (2019 / 수석 코치)
국가대표 67경기 9골 ( 아일랜드 / 1991~2005)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7. 킨에 대한 말, 말, 말8. 여담

[clearfix]

1. 개요

아일랜드의 전 축구 선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애칭은 '키노'다.

현역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1998-99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UCL 1회 우승, PL 7회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고, PFA 올해의 팀에 5회 선정되었다. 그리고 맨유 시절 주장직을 8년이나 맡았을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고,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거친 플레이로도 유명했다.

2. 클럽 경력

2.1. 코브 램블러스

축구 선수로서의 출발은 초라해서 아일랜드 정부가 실시한 공공근로사업 중 축구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다.

2.2. 노팅엄 포레스트 FC

어쨌든 코브 램블러스에 재적 중에 한 스카우터의 눈에 띄여서 그의 도움으로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선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역시 엄청난 성질머리로 유명한 명장 브라이언 클러프[4]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5]

점차 실력을 키우며 상위권 클럽들의 관심을 받던 킨은 본래 케니 달글리시가 지휘하던 블랙번으로의 이적에 합의했었지만, 이적 서류에 실수가 발견되어 이적이 지연되는 사이 알렉스 퍼거슨의 전화를 받고 맨유로의 이적을 결정했다. 사실 블랙번도 이 실수를 발견했는데, 실수를 발견한 게 금요일 오후인 데다 주말에 사무실이 닫는 관계로 월요일에 이적을 확정짓기로 구두합의를 한 상태였지만 퍼거슨은 킨을 잡기 위해 토요일에 모든 서류를 완비해 킨에게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적료는 영국 기록인 375만 파운드였다.

2.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3년 여름에 킨이 유나이티드에 입성했을 당시 유나이티드의 중원을 구축한 핵심 멤버는 브라이언 롭슨 폴 인스의 듀오였는데, 이 듀오는 리그 우승의 주축이 되었던 터라 킨이 주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팀의 레전드인 롭슨은 당시 이미 36세의 노장인 데다 부상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던 덕분에 킨은 점차 출장 기회를 늘려가며 선발 멤버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은 킨은 프리미어리그 타이틀과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하게 된다.

1993-94 시즌: 50경기(선발 47경기) 8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7 34 3 5 6
챔피언스 리그 3 3 0 2 1
FA컵 6 6 0 1 0
EFL컵 3 3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50 47 3 8 7

94-95 시즌은 맨유와 킨 모두에게 아쉬운 시즌이었다. 일찌감치 챔스는 조별리그 탈락하고 리그 타이틀은 블랙번 로버스에게 승점 1점차로 내준 데 이어, FA컵에서는 준결승 크리스탈 팰리스 전에서 맨유에서의 첫 퇴장을 당하며 결승 출전이 불가했고, 결국 결승에서 에버튼에게 1-0으로 패배하며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고 만 것이다.

1994-95 시즌: 35경기(선발 33경기) 3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5 23 2 2 4
챔피언스 리그 4 4 0 1 1
FA컵 6 6 0 0 0
합계 35 33 2 3 5

95-96 시즌에는 폴 인스 브라이언 롭슨 등이 팀을 떠나고,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등 퍼거슨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맨유에서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팀 내 미드필더 중에서 그나마 경험이 많은 킨은 팀의 허리에서 중추 역할을 했고, 맨유 데뷔 시즌에 이어 프리미어리그와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했다.

1995-96 시즌: 37경기(선발 37경기) 6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9 29 0 6 0
UEFA컵 2 2 0 0 0
FA컵 6 6 0 0 0
합계 37 37 0 6 0

96-97 시즌에도 굳건한 주전이었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장한 경기가 꽤 많았다. 그리고 특유의 성질 머리로 인해 출전 징계도 많았던지라 중요한 경기에서 출전이 불가했던 경우가 많았던지라 킨의 빈 자리가 컸던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그래도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며 결과적으로 괜찮은 시즌을 보냈다.

1996-97 시즌: 33경기(선발 33경기) 3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1 21 0 2 2
챔피언스 리그 6 6 0 0 0
FA컵 3 3 0 0 0
EFL컵 2 2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1 0
합계 33 33 0 3 2

97-98 시즌은 맨유 입단 후 가장 불운했던 시즌이었다. 에릭 칸토나의 은퇴로, 주장 완장을 물러받은 시즌이었으나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알프잉에 홀란드[6]와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십자인대 부상을 입은 것이다.[7]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잔여 경기를 모두 날리게 된다. 맨유는 킨의 부재로 인해 후반기에 아스날에게 선두자리를 내줬고, 결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내줘야했다.

1997-98 시즌: 11경기(선발 11경기) 2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9 9 0 2 0
챔피언스 리그 1 1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11 11 0 2 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을 이룩한 98-99 시즌에서의 활약상은 엄청났다. 직전 시즌에서 십자인대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날린 아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시즌 총 55경기에 나서는 어마어마한 체력을 보인 것이다. 또한 중요한 상황에서의 활약도 뛰어났다. 특히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는 전반전 초반부터 2-0으로 뒤지면서 팀 분위기가 침체될 상황에서 24분에 코너킥 찬스 때 헤더로 만회골을 넣으며 재빨리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국 맨유는 킨의 골을 시작으로, 34분에 드와이트 요크가 동점골을 기록하며 합산점수에서 원정다득점으로 우세를 잡게 되었고, 84분에는 앤디 콜이 쐐기골을 박으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파일:로이킨 경고 누적.jpg
경고를 받는 로이 킨
그러나 킨은 이 경기에서 전반 33분에 지네딘 지단에게 강한 태클을 날려 넘어뜨리면서 옐로 카드를 받고 경고 누적으로 인해 결승에 출전이 불가했다.[8][9] FA컵 결승에서는 전반 9분만에 부상으로 아웃되었지만 팀은 2-0 승리를 따냈으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는 킨과 스콜스의 부재로 팀이 어려운 경기를 펼쳤지만 후반 추가시간에 2골이 나오면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극적인 2-1 승리를 거둬 트레블을 이뤄냈다. 대회의 피날레에서는 각각 부상으로 인한 교체와 카드 트러블로 인한 결장으로 아쉽게 마무리했지만, 팀이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트레블을 달성한 최고의 시즌이 되었다.

1998-99 시즌: 55경기(선발 53경기) 5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5 33 2 2 0
챔피언스 리그 10 10 0 3 0
FA컵 7 7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55 53 2 5 0

99-00 시즌에는 맨유와 재계약을 체결하였으며, 포지션이 중앙 미드필더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45경기에서 12골을 넣는 등 엄청난 활약상을 보이며 2년 연속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동시에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지난 시즌에 이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99-00 시즌: 45경기(선발 44경기) 12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9 28 1 5 1
챔피언스 리그 12 12 0 6 1
클럽 월드컵 2 2 0 0 1
슈퍼컵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1 0
합계 45 44 1 12 3

00-01 시즌에는 2001년 4월 21일, 맨체스터 더비에서 알프잉에 홀란드에게 가한 태클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문단 참고. 이 사건과는 별개로 활약은 여전했고, 3년 연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2000-01 시즌: 44경기(선발 44경기) 3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8 0 2 7
챔피언스 리그 13 13 0 1 0
FA컵 2 2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4 44 0 3 7

2001년 9월 15일,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팀이 3:4로 지고 있던 후반 막판 앨런 시어러의 도발에 넘어가 퇴장을 당하게 된다. 시즌 시작 전부터 퍼거슨의 은퇴 이야기가 떠도는 등 시끌벅적하게 시즌을 맞이했던 맨유에게 찬물을 끼얹고 만것이다. 이렇게 시작 초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리그 3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2001-02 시즌: 43경기(선발 42경기) 4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8 0 3 5
챔피언스 리그 12 11 1 1 0
FA컵 2 2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3 42 1 4 5

로이 킨은 변함 없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해당 시즌 3월 초까지만 해도 선두 아스날과 승점이 8점차로 벌어져 있어서 리그 우승은 이번에도 물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스날의 부진 + 주장 로이 킨을 필두로 한 맨유의 상승세가 합쳐져 결국 리그 1경기를 남겨 놓고 리그 우승을 확정 짓게 된다.

2002-03 시즌: 32경기(선발 30경기)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1 19 2 0 1
챔피언스 리그 4 4 0 0 0
FA컵 3 3 0 0 0
EFL컵 2 2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32 30 2 0 1

여담으로 2004년 1월 17일, 울버햄튼과의 경기에서는 경기 시작을 앞두고 터널에서 대기타고 있었는데 상대 선수가 유니폼 관련 문제로 터널에 모이지 않아서 경기가 지연 되자 맨유 선수들을 이끌고 터널을 빠져나가 경기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로이 킨을 비롯한 맨유 선수들이 빠져나가자 당황해하는 울버햄튼 선수들과 말리는 심판들의 모습이 압권이었다. 허나 이 경기에서 0:1로 패배했다.

2003-04 시즌: 38경기(선발 34경기) 3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5 3 3 3
챔피언스 리그 4 4 0 0 1
FA컵 5 4 1 0 1
커뮤니티 실드 1 1 0 0 1
합계 38 34 2 3 6

2005년 2월 5일에는 버밍엄 시티 전에서 맨유 소속으로 50번째 골을 기록했다.

2004-05 시즌: 43경기(선발 40경기) 2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8 3 1 2
챔피언스 리그 5 5 0 0 0
FA컵 4 4 0 1 0
EFL컵 1 1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0 0
합계 43 40 3 2 2

로이 킨 특유의 성격이 제대로 터져나오게 된 대표적인 사건이 2005-06 시즌 맨유가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1-4로 대패하자[10][11] 킨은 맨유TV와의 인터뷰[12]에서 미들즈브러전 패배의 원인이 된 5명의 선수[13]들을 직접 겨냥하여 능력이 없으면 팀을 떠나라는 식으로 독설을 퍼부었고, 추가로 리오 퍼디난드에게는 12만 파운드의 높은 주급[14]을 받는데 스타도 아닌 놈이 거드름이나 피운다며 맹비난까지 했다. 이 영상을 본 퍼거슨 감독과 데이비드 길 단장은 인터뷰의 내용이 팀 매니지먼트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고 판단하여 맨유TV 편성에서 곧바로 제외하고 킨의 발언이 외부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맨유가 프랑스의 릴에게 0-1로 패배하여 조별리그 꼴지로 탈락하자 데일리 미러는 이 인터뷰를 공개했고, 일명 '키노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은 영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퍼거슨 감독은 로이 킨이 주장에 걸맞지 않게 팀 내 기강을 해치고 선수단의 갈등을 일으킨다고 판단[15][16],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결정하여 결국 2005년 11월 18일 상호 계약 해지로 맨유에서 방출되었다. 그러나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맨유 이외의 팀에서는 뛰지 않겠다며 2006년 1월, 스코틀랜드의 셀틱에 입단하여 시즌을 마무리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17]

2005-06 시즌(총): 16경기(선발 15경기) 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5 4 1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0 0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10 10 0 1 1
합계 16 15 1 1 1

로이 킨의 맨유 시절은, 실력 뿐만 아니라 불굴의 정신과 성공에 대한 열망,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알렉스 퍼거슨 경은 그를 함께 했던 선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과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과격한 언행 때문에 충돌을 여럿 빚기도 했다.[18][19]
파일:RoyKeane_Retire.jpg
로이 킨의 은퇴식
그래도 팀에 큰 공헌을 한 레전드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셀틱은 맨유를 킨의 은퇴 경기 상대팀으로 잡았고 2006년 5월 10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은퇴 경기에서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맨유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캡틴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해주었다.[20]

로이 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번의 PL 우승과 4번의 FA컵 우승, 1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4번의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등을 경험했다.

참고로 35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젊을때, 지속적인 고관절 부상이 선수 생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런 부상만 없었더라면 37~38살까지 뛰었을 것이라고 한다.

1993~2005: 통산 482경기(선발 463경기) 52골 39도움

3. 국가대표 경력

1991년에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 활약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본선 진출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본선을 앞두고 실시한 전지 훈련에서 당시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믹 매카시의 훈련 방법에 불만이 있었고, 훈련 내내 말싸움을 하며 불화가 이어지게 된다. 결국 매카시 감독이 킨을 돌려보내면서, 킨은 대표팀을 떠나 홀로 귀국하면서 2002 월드컵 본선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이후 국가대표에 소집하고 있었는데, 2004년 5월에 맥카시가 사임하고 브라이언 커가 새로 부임하였다. 그렇게 브라이언 커가 이끄는 대표팀에 다시 복귀하였으나,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이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되자 2005년 10월 15일,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일단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경기장 전체를 종횡무진 누볐다. 90분 내내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돌아다니며 맨유에 있던 시간 동안 팀의 중심으로 있었다. 전술 이해도가 매우 높아서 항상 적재적소의 위치에 있었으며,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휘어잡았다.

리더십, 활동량과 함께 킨의 장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수비 능력이다.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서 요구되는 모든 수비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갖췄다. 태클 능력 또한 기가 막혔다. 상대 선수의 드리블 상황을 효율적으로 끊어냈고, 공중볼 경합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가담해 대부분 우위를 가졌으며, 파트리크 비에라 같은 피지컬이 훌륭한 선수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쳤다. 이 수비력 덕분에 퍼거슨 감독은 03-04 시즌 리오 퍼디난드의 도핑 문제로 인한 장기결장으로 인해 중앙 수비수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킨을 중앙 수비수로 활용하기도 했고 꽤 역할을 잘 수행해냈다. 이러한 점은 항상 당당하고 근성 있게, 때로는 거칠게 플레이해서라도 언제나 이기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덕분에 그가 주장으로 있을 때, 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로이 킨의 수비력, 터프함 등을 보고 그가 그쪽 롤에 특화된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 킨은 다재다능하고 무엇보다 흔히 말하는 공을 잘 차는 선수였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는 공수 양면에서 기여 안하는 곳이 없는 만능형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에 가까웠다. 실제로 킨은 드리블과 패스 연계를 통해 페널티 박스까지 공을 운반해서 넣은 골이 많았을 정도로 후방에 머물면서 공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이 좋았다. 물론 이런 플레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터치, 패스, 드리블 등 공을 다루는 기술들이 그의 거친 성격처럼 투박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꽤나 유려했기 때문이다. 맨유 입단 초창기에는 후방에서의 플레이보다 에너제틱하게 필드 전역을 누비고 지속적으로 전진하여 공격에 가담하는 플레이를 선호했다고 본인이 직접 얘기하기도 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수비적인 기여도와 중원 장악력이 돋보이는 선수였던 것은 맞고 4-4-2 포메이션에서 그의 미드필드 파트너였던 폴 스콜스가 조금 더 앞쪽에서 공격에 가담하고 킨은 그보다 살짝 내려와 팀을 받혀주는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로이 킨이 전진해있는 상황에서는 폴 스콜스가 뒤를 봐주고 킨은 파이널 서드에서 공격을 지휘하고 공간 침투하는 역할을 매끄럽게 소화했을 정도로 두 미드필더는 호흡적인 측면에서 매우 유연하게 서로를 커버해줬다. 커리어 후반부에 맨유가 3미들 포메이션을 사용하고 킨도 나이가 듦에 따라 나중에는 확실한 홀딩 미드필더 역할에 집중하기도 했다.

스콜스와 같은 파트너 미드필더가 공격적으로 침투하면 로이 킨 본인은 후방 빌드업을 전담할 정도로 시야도 넓고 패싱력과 개인 기술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갖췄다. 열심히 뛰면서 전진하기를 좋아하고 후방에서 경기를 조립하는 플레이를 주도하기에는 자신 없었던 맨유 초창기 시절과는 달리 로이 킨의 빌드업 능력도 스콜스가 주전으로 도약하기 시작했을 즈음 이후부터는 오히려 그의 강점이 되어 후방에서 경기를 풀어주는 능력도 탁월했다.[21] 국내 축구 전문가 한준희 해설위원도 4-4-2 포메이션에서 가장 이상적인 중앙 미드필더로 로이 킨을 항상 첫손에 꼽았다. 맨유에서 스콜스와 함께 합을 맞출때에는 스콜스가 공격적으로 올라가면 아래로 내려와 다이아 4-4-2를 이루기도 했다. 스콜스도 킨도 체구가 작은 미드필더들이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로빙스루패스를 가진 스콜스와 작은 체구를 커버하고도 남는 엄청난 수비력과 활동력을 가진 킨의 조합은 맨유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조합으로 손꼽힌다.

눈에 띄는 약점이랄 것은 없지만, 체구가 크지 않다는 것이 약점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굳이 꼽자면 본인의 단점으로 로이 킨 스스로가 훗날 인정한 바 있다.[22][23] 엄청난 스태미너를 제외하면 킨은 주력, 점프력, 가속을 붙이는 능력 등 신체적인 능력이 평범한 수준이었으며, PL의 특성상 이것을 킨의 약점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24] 하지만 비교적 평범한 신체 조건에 비해 굉장히 몸싸움을 잘 했으며, 소위 말하는 단단한 타입의 선수[25]였다. 선술했듯이 승부욕이 매우 강해 항상 적극적으로 플레이했기에 플레이가 거칠기도 했다. 성격은 딱 PL 최적화. 사실 선수로서 축구 자체만 따졌을 때는 딱히 약점이 없었고 가장 큰 약점은 그놈의 성질머리이다. 이성의 끈을 놓고 달려들다가 퇴장을 당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팀 입장에서 당연히 엄청난 손해이고 경기 도중에도 상대팀의 타겟이 되기 쉬운 요소이다. 실제로 2001년 9월 15일, 맨유와 뉴캐슬의 경기에서 앨런 시어러는 경기 내내 씩씩거리는 킨을 보고 일부러 슬쩍 한 번 도발해봤는데 킨이 그 어그로에 홀라당 넘어가 공을 시어러의 머리에 던져 맞춰버렸고 퇴장을 당한 적도 있다.[26] 커리어 통산 레드카드를 무려 13번이나 받았다.

동시대에 활약한 비에라와 비교했을 때, 빌드업 상황에서 패스 전개 능력이나 팀 내 플레이메이커로서의 다재다능함 면에서는 비에라보다 킨을 한 수 위로 평가하는 경향이 높고, 중원 장악 능력과 수비력에서는 일반적으로 피지컬이 더 좋은 비에라가 우위로 평가받는다. 전체적으로 보면[27] 압도적인 수비력, 준수한 볼 컨트롤 및 패싱 능력, 악바리 근성과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리더십까지 지닌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이자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맨유가 킨과 함께한 시간 동안 얻어낸 수많은 우승 트로피들이 이를 입증한다.[28]

5.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이후 06-07 시즌에 잉글리시 챔피언십 리그(2부)의 선덜랜드의 감독을 맡아 프리미어 리그로 팀을 승격시켰다. 재미있는게 이 때 선더랜드의 구단주 컨소시엄의 대표가 니얼 퀸[29]이었다. 07-08 시즌은 다소 고전했으나 그럼에도 인상적인 경기력을 몇 번 선보여 팀을 프리미어 리그에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08-09 시즌 중반, 성적부진으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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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면서도 성격은 못 버렸는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주변 집기들을 부쉈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들도 문제가 있었던 게 경기에서 졌는데도 라커룸에서 ABBA의 Dancing Queen을 틀어놓고 춤을 췄다고 한다. 물론 감독에게 들켜서 얻어 터졌다. 심지어 리저브 팀이 경기를 할 때 라커룸으로 찾아가 "1군에 올릴 선수가 있나해서 왔는데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리저브 팀 선수들의 사기마저도 꺾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임하자 선수단은 환영의 의사를 밝혔고 심지어 축하파티를 벌였다는 루머까지 흘러나온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열심히 파티를 했다.

2부 리그 구단인 입스위치에 부임했을때 선수들이 군기가 빠졌다면서 선수들을 군대캠프에 보내서 굴렸으나한국형 지도자 성적은 더 하락하고 본인은 잘렸다. 선수로서는 일류였지만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좀 없는 듯. 동료 선수도 그가 감독직에 대한 이해나 준비가 없는 거 같다고 평했다. 로이 킨 본인도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자 인생의 저점으로 입스위치 감독 재직을 꼽았다.

2013년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런데 감독이 마틴 오닐이었다.

2014년 아스톤 빌라의 수석 코치로 임명. 국가대표 수석코치와 겸직인듯. 아일랜드 대표팀에 집중하기 위해 2014년 11월 28일 아스톤 빌라의 코치직에서 사임하였다.

2018년 11월, 아일랜드 대표팀 수석 코치에서 물러났다.

이후 아일랜드 수석코치 시절의 감독인 마틴 오닐 사단에 들어가서 2019년 1월 31일 노팅엄 포레스트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마틴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면서 같이 사임하였다.

2022년 2월, 선덜랜드의 감독 후보군에 이름을 올린 상태이다. 만약 선덜랜드로 돌아간다면 13년만에 돌아가는 셈. 그러나 최종적으로 알렉스 닐이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킨의 복귀는 없던 일이 되었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7. 킨에 대한 말, 말, 말

지금까지 함께 한 선수 중 로이 킨이 단연 최고이며, 그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경기하는 모든 곳에서 축구 선수와 맨유에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다.
알렉스 퍼거슨
모두가 킨을 진정한 리더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믿을 수 없는 기량을 갖춘 선수기도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오늘날 어느 팀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
조니 에반스
나는 로이 킨을 보고 배웠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그가 그냥 좋았다. 지금도 좋아한다. 정말 훌륭한 리더이자, 환상적인 선수였다. 퍼스트 터치는 다른 그 누구보다 훌륭했다. 킨과 함께 피치로 걸아갈 때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리더십이다. 그게 내가 이 클럽에 있는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대런 플레처
로이 킨은 이 라인업[30]에 들 자격이 있다. 나는 그의 광팬이었다. 그의 박스 투 박스 플레이를 공부했고 그라운드에서 많은 싸움을 즐겼다. 그는 최고의 선수이다.
로이 킨이 첫번째다. 나머지? 램파드는 최고의 골 넣는 미드필더였고, 스콜스는 최고의 축구 선수였고, 비에라는 최고로 힘든 상대였다. 하지만 PL 역사상 가장 위대한(Greatest) 미드필더는 로이 킨이다.
스티븐 제라드, PL 최고의 미드필더를 뽑아달라는 질문에.[31]
주장 로이 킨은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리오 퍼디난드
난 로이 킨을 상대로 뛰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같은 경기에서 열정을 공유했고, 그는 맨유의 좋은 주장이자 리더였다. 그를 상대할 때는 항상 어려운 것을 알았다. 그는 위너다.
파트리크 비에라
내가 어렸을 때 로이 킨은 내가 사랑했던 선수였다.
에릭 다이어

8. 여담

8.1. 알프잉에 홀란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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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잉에 홀란드[56]와의 백태클 복수극 일화로 유명하다. 알프잉에 '알피' 홀란드가 로이 킨을 부상입힌 뒤 "별 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라고 외쳤고, 이를 기억하고 있던 로이 킨이 5년 후 알피 홀란을 부상입히고, 홀란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일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첫째, 로이 킨은 홀란드에게 백태클을 시도하다 부상당한 것이다. 둘째, 홀란드가 로이 킨에게 말했다는 "별 것도 아닌게 까불고 있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로이 킨이 백태클에 실패하고 필드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홀란드가 "다친 척 하지 말고 일어나."고 말한 것이 왜곡된 것이다. 셋째, 알피 홀란드가 로이 킨의 태클로 당한 부상은 경미한 타박상이었다. 홀란드는 끝까지 경기를 소화했고, 며칠 뒤엔 국가대표 경기에도 출전했다. 넷째, 알피 홀란드는 로이 킨을 고소하려 했으나 실제로 하지는 않았다. 로이 킨과 알피 홀란드는 그 이후에도 3~4번이나 만난 적이 있다.

로이 킨의 자서전에는 "공 가져가는 건 좋은데, 다신 나한테 엄살 피우지 말라고 하지 마라", "알피 홀란드는 정당한 대가를 치른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언급한 '정당한 대가'라는 게 엄살피우지 말라는 홀란드의 말에 대한 것인지, 홀란드가 입은 부상 자체를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로이 킨은 인터뷰에서 부상을 입힐 의도로 홀란드에게 백태클을 한 건 아니지만 홀란드를 아프게 할 의도는 있었다고 말했다.

부풀려진 복수극 자체는 사실이 아니지만, 로이 킨이 알피 홀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련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로이 킨은 홀란드를 여러번 비난했다. 킨이 홀란드를 걷어찼을 때 다른 시티 선수들이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았는데, 그건 홀란드가 머저리이기 때문이며, 홀란드가 머저리라는 건 시티 선수들도 전부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식의 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알프잉에 홀란드는 시간이 흘러서 로이 킨에 대한 악감정은 이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다 잊었다고 한다.

8.2. 크리스 이글스 폭행

리오 퍼디난드의 회고에 따르면 로이 킨이 복귀 전 2군에서 뛸 때 당시 신인이었던 크리스 이글스가 자신에게 태클하자 돌아서서 주먹으로 턱을 가격했다고 한다.
기사


[1] 싸움닭인 대외적 이미지와 별개로 상당히 독실한 신앙인이다. # [2]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3] 09/10 시즌 중 부임, 10/11 시즌 중 경질. [4] 중소 구단인 포레스트의 역대급 최전성기를 이끈 감독. 기존 선수단의 역량을 한계치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전술로 융합해 유러피언컵 2회 우승을 이끌었으나 이 후 포레스트는 자금난과 전력 약화로 하부리그로 강등되었다가 2022년에서야 프리미어 리그로 돌아왔다. [5] 여담이지만 킨은 FA컵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해 골을 헌납하고 팀이 탈락하는 빌미가 됐었는데, 라커룸으로 돌아온 킨에게 클러프가 주먹을 날려 그대로 뻗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 [6] 엘링 브라우트 홀란의 아버지이다. [7] 1997년 9월 27일 리즈와 맨유의 경기였다. [8] 베컴에 의하면 킨은 경기 끝나고 결승전에 뛰지 못한다는 사실에 낙담했다고 한다. 다른 선수였으면 경기 도중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는 점 때문에 이 경기를 로이 킨 커리어 최고의 경기로 뽑는 사람이 많다. 물론 킨 본인은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팀 전체의 업적이라며 겸손하게 반응한다. [9] 로이 킨의 부재로 당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팀의 가장 연장자이자 오랜 기간동안 몸 담고 있던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이 주장 완장을 대신 차게 되었다. [10] 당시 퇴물대접을 받던 스페인 전 국가대표 가이스카 멘디에타가 맹활약을 펼친 경기로도 유명하다. [11] 사실 이 경기를 망치게 된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는 그 경기가 맨유 통산 1000번째 골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의 언론은 1000호골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기사가 연일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한 맥주회사에서 1000호골의 주인공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외부적인 상황으로 맨유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골을 넣기 위해 경기 본연에 집중하지 못해 더 큰 참사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많다. 참고로 이날 넣은 1골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000호골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경기내외적으로 완패를 당했기 때문에 이 1000골에 대한 화제는 곧 사그러들었다. 게다가 이 골도 0:4로 끌려가다가 겨우 넣은 만회골이었다. [12] 사실 원래 이 인터뷰는 게리 네빌이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킨의 부상 때문에 서로 스케쥴을 조정하게 되면서 킨이 맡게 된 것이다. [13] 일명 로이 킨의 '맨유오적'으로 불렸는데, 리암 밀러, 키어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존 오셔, 대런 플레처가 집중 포화 대상이었다. [14] 사실 킨은 퍼디난드의 주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선수 개개인의 급여에 관심도 없다고 한다. 12만 파운드는 그저 그를 비난하기 위한 랜덤한 액수였을 뿐이었다. [15] 그런데 킨의 주장에 의하면 정작 맨유에서 그와 같이 뛰었던 선수들은 그 문제의 인터뷰를 크게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구단은 킨에게 5,000파운드 벌금을 내라고 했는데, 그동안 이것보다 더한 벌금도 문제 없이 내던 킨은 무슨 이런 문제로 벌금을 내야하냐며 벌금 내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킨은 이 벌금 납부 거부가 그가 맨유에서 내쳐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16] 퍼거슨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후 킨과 면담을 하였는데 이때 킨이 비디오를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결정하게 하자고 제안했고 퍼거슨이 동의했다. 비디오가 끝나고 킨이 할 말있냐고 선수들에게 물어보자 이때 반 데사르가 동료에게 할 수 있는 비판의 선을 넘었다고 했다. 이에 격분한 로이 킨은 이후 반데사르, 반니스텔루이, 카를루스 코치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퍼거슨과도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때 쯤엔 선수들이 방을 나갔고 이후로도 한참을 설전을 벌인 이후 퍼거슨은 그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17] 원래 로이 킨은 05-06 시즌이 끝나고 맨유를 떠나기로 했었다. 단지 키노게이트로 그 시기가 앞당겨 졌을뿐이다. [18] 맨유 시절 동료로 인간성 좋고 선량하기로 정평이 난 솔샤르도 훗날의 인터뷰에서 로이 킨은 선수와 감독 양쪽 다 깠다. 좀 돌려말하긴 했지만 이름을 지목해서 유독 로이 킨한테만 그런 걸 보면 일화가 많기도 한 모양. 또한 마인드가 군인 마인드인데 과거 감독 시절 선수들을 경기력 향상과는 상관없는 병영캠프에 보내기도 했다. [19] 프로 선수로서 축구를 대하는 마인드가 굉장히 빡세다. 18-19 시즌 맨유와 리버풀의 더비 경기 시작전에 양팀 선수들이 터널에서 서로 포옹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전쟁에 나가는데 포옹이 웬말이냐. 상대를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한다"며 대차게 깠다. [20] 경기 끝나고 관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별로 할 말 없습니다. 경기 보러와주신 맨유, 셀틱 팬들 감사합니다. 한 시즌동안 맨유, 셀틱 선수들 고생하셨습니다. 딱히 더 말할거 없습니다. 오늘 즐거우셨으면 좋겠고요. 제 남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 행운을 빕니다"라며 정말 쿨하고 짧게 마무리했다. [21] 로이 킨이 맨유에 입단한지 얼마 안 됐을 시절에 당시 맨유의 주장이었던 브라이언 롭슨이 그에게 더 높은 수준의 미드필더가 되기 위해서는 빌드업에 좀 더 관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22] 외모의 한 부분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냐는 게리 네빌의 질문에 키가 좀 더 컸으면 좋을 것 같다고 답하였다. [23] 다만 이 작은 체구라는 약점은 로이 킨이 이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력을 얻었기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그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고도 볼 수 있다. [24] 피지컬의 어느 부분에서도 킨에게 밀리지 않는 파트리크 비에라만큼은 아니지만 최상급의 피지컬을 가진 스티븐 제라드, 그들보다 느리지만 그것을 빼면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피지컬을 가진 프랭크 램파드가 PL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지금까지 불리는 것에서 과거 PL의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다. 신체적인 점에서 타 선수들에 비해 불리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영국 팀에서의 실패를 의미했다. 어느 리그라도 피지컬이 우수하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유리하다. [25] 현역 선수로 예를 들면 황희찬, 은골로 캉테, 제르단 샤키리 같이 다부진 체형을 가진 선수. [26] 이 일 때문에 아직도 둘의 관계는 껄끄럽다고 한다. [27] 국내에서는 킨의 전성기 시절 영상을 라이브로 본 세대가 극히 적고 해외축구의 본격적인 태동기인 2000년대 초반이 비에라의 전성기였기에 그 당시 30대 초반에 접어들어 하락세로 넘어가는 킨이 저평가를 많이 받는다. 또 국가대표 활약상에서 비에라는 월드컵 우승 및 준우승과 유로 우승의 커리어를 가졌고, 킨은 1994 미국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이외에는 아일랜드의 전력상 한계가 있기에 대표팀 커리어로 들어가면 킨이 많이 불리해진다. 다만, 해외에서는 국대 활약상을 제외하면 오히려 킨을 더 쳐주는 경향이 있다. [28] 다만 알렉스 퍼거슨은 자서전에 본인이 생각하는 월드클래스 선수에 로이 킨을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정말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피터 슈마이켈, 데이비드 베컴과 함께 퍼거슨이 월드클래스라고 평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가장 논란이 되었던 선수였다. [29] 둘의 악연은 2002 월드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0] 제라드가 선정한 역대 유럽 축구선수 베스트 11. [31] 자서전 출간 당시의 인터뷰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로이 킨>램파드>비에라>스콜스라고 순위를 매겼다. [32] 로이 킨이 스카이스포츠에서 "경기 끝나고 상대 선수와 친근하게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건 안된다. 경쟁자끼리 뭐하는 거냐"라고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인터넷의 반응은 '아저씨, 이건 축구예요. 전쟁이 아니라'였다. [33] 파일:킨 사우스게이트.webp [34] 이런 행동의 업보가 터지면서 결승까지 갔지만 에버튼 FC에게 1대0으로 석패하며 준우승에 머물었다. [35] 식단에 패스트푸드가 나왔으니 말 다했다. [36] 훈련시설이 전혀 준비가 안되어있는 사이판에서 훈련을 했다. 훈련용 공, 콘, 골키퍼 장갑조차 없었고 운동장은 떡잔디여서 부상위험이 컸다. [37] 정작 불화가 있었던 니얼 퀸은 훗날 선덜랜드에서 감독과 구단 수뇌부로 다시 재회하게 된다. 게다가 아일랜드는 킨 없이도 16강에 올라갔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6강 스페인전에서도 1:1로 비겼으나 승부차기로 패해 아쉽게 탈락. 이겼다면 한국의 8강전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 [38] 다만 축구선수로서는 자기가 더 나은 선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39] 로이 킨, 파트리크 비에라, 게리 네빌. 참고로 네빌은 비에라가 자길 위협했다며 비에라를 탓하고 비에라는 화를 참지 못한 로이 킨을 탓하며 킨은 자기 선에서 문제를 해결짓지 못한 네빌을 탓한다. [40] 사실 사건 이전에 관계가 괜찮았을때도 서로 직업적으로 존중했을 뿐, 사적으로는 가깝지 않았다고 한다. [41] 게리 네빌은 둘 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절대 지기를 싫어한다는 점에서 둘을 서로의 거울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둘의 사이가 좋게 끝나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둘의 비슷한 성향 때문에 키노게이트 이전부터 미묘한 긴장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키노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그걸로 인한 팀 미팅(참고로 이 미팅은 정말 끔찍했다고 한다)까지 열리는 순간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거라 직감했다고 한다. [42] 이 과정에서 당시 맨유의 단장이었던 데이비드 길은 로이 킨에게 주는 구단 성명서에 11년 반 동안의 헌신에 고맙다고 하는 오류도 범했다. 로이 킨은 맨유에서 12년 반을 뛰었다. [43] 마틴 퍼거슨 [44] 퍼거슨이 영국 축구계, 그리고 세계 축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대차게 까는 인물은 정말 드물다. [45] 퍼거슨과는 달리 베컴과 킨의 사이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46] 평소 로이 킨이 하는 발언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별말 없이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스타일을 선호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든 점을 어필하는 스타일은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47] 출처 [48] # # [49] 다만 포그바의 재능에 대해서는 항상 높게 평가한다. 단지 그에게 부족한 축구적인 규율을 늘 아쉬워한다. 또한 램파드도 포그바에게 재능은 훌륭한데 겉멋이 너무 많이 들어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했다고 평가받았다. [50] 그래서 그런지 축구 외적인 것에 잡음이 없고 헌신적인 선수인 조던 헨더슨을 좋아한다. 선덜랜드 감독 시절에 헨더슨을 지도했던 로이 킨은 헨더슨이 리버풀로 이적한 뒤로 방송에서 캐러거에게 헨더슨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시 헨더슨은 리버풀에서 좋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51] 아일랜드인은 술을 좋아한다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아일랜드는 술 문화가 발달되어있는 나라다. [52] 은퇴한지 한참 지난 지금도 술을 안마신다. [53] 체지방률이 4%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는 필드 위에서 부딪히고 힘을 내면서 뛰어야하는 축구선수에게 과도하게 낮은 체지방률이다. 몸에 지방이 너무 적어서 경기중에 추운 적도 많았다고 한다. [54]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의료진이 코로나 백신을 만들어도 킨은 걔네들은 그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할 것이라는 등으로 써먹는다. [55] 퍼디난드가 맨유에 오기 전에 뛰었었던 클럽들을 말한다. [56] 엘링 홀란드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