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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8:18:43

랜디 바스

랜디 바스의 수상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85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야수 트리플 크라운
오치아이 히로미츠
( 한큐 브레이브스)
1984년
랜디 바스
( 한신 타이거스)

오치아이 히로미츠
( 롯데 오리온즈)
1985년, 1986년
마쓰나카 노부히코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004년

나가시마 키요유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랜디 바스
( 한신 타이거스)
쿠도 키미야스
(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기누가사 사치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랜디 바스
( 한신 타이거스)
키타벳푸 마나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NPB 보유 기록
단일 시즌 최고 타율 .389
최다 연속 경기 타점 13경기
최다 연속 경기 홈런 7경기[1]

}}} ||
파일:Randy_Bass.png
랜디 윌리엄 배스
Randy William Bass/ランディ・バース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54년 3월 13일 ([age(1954-03-13)]세)
오클라호마 주 로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4cm, 95kg
포지션 1루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 입단 1972년 드래프트 7라운드
소속 팀 미네소타 트윈스(1977)
캔자스시티 로열스(1978)
몬트리올 엑스포스(1979)
샌디에이고 파드리스(1980~1982)
텍사스 레인저스(1982)
한신 타이거스(1983~1988)
소속 정당

1. 개요2. 선수 경력3. 연도별 성적4. 여담
4.1. 바스의 재래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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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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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부처님, 바스님.(神様, 仏様, バース様)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으며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서 활약한 前 프로 야구 선수, 前 미국 오클라호마주 주 의회 상원의원.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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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3경기 연속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바스.[2]
미국 야구계에서 그는 전형적인 AAAA리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2년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에 7라운드 전체 152번째 지명을 받았고 마이너리그에서 뛰어난 파워와 출루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다리 부상 때문에 민첩성이 너무 떨어졌고 빠른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등의 약점으로 인해 메이저리그에서는 영 자리잡지 못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9홈런에 불과한 타자이지만 마이너리그 통산 238홈런을 때려냈다는 것으로 바스의 미국 시절 커리어를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메이저에서 자리잡지 못하던 그에게 한신 타이거스의 오퍼[3]가 들어왔고 1983년 드디어 일본 무대에 선을 보이게 되었는데, 전설의 막이 올랐다.

일본프로야구 최강의 외국인 타자로 이름을 날린 건 두 말할 것 없이 역대 최고 수준의 타격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랜디 바스의 통산 기록 아들의 병 때문에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난 1988년을 제외한 풀타임 5시즌 중 가장 못한 시즌의 OPS가 첫 해인 1983년의 0.971이고, 홈런은 다섯 시즌 뛰고서 통산 202홈런에 1986년도 기록은 거의 배리 본즈 테드 윌리엄스가 일본에 강림한 수준의 임팩트였다.

다만 한신 초창기에는 순조로운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데뷔 시즌인 1983년에는 초반의 부상과 리그 적응 문제로 고전하기도 하면서 113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1984년에는 아버지의 병환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미국에 귀국하는 바람에 4주 정도를 결장해 104경기 출장에 그쳤다.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여주며 한신 타선의 중추로 자리잡기는 했지만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매스컴 사이에서 교체설이 돌기도 했으나, 1984년 시즌 이후 감독으로 복귀한 요시다 요시오가 바스의 잔류를 강력하게 구단에 요청하면서 어찌저찌 한신에서의 재계약에 성공하며 1985년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1985년 시즌에, 바스는 단숨에 일본 야구 최강급 선수로 각성하며 그해에 174안타, 54홈런, 134타점, 타율 .350으로 센트럴 리그 용병 최초로 타격 3관왕에 올랐고, 여기에 최고 출루율(.428)과 최다 승리 타점(22승타) 부문까지 석권하면서 타격 5관왕을 석권했다. 도루왕을 제외한 타격 타이틀을 전부 다 수상한 것.[4], 카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 등과 함께 전설의 슬러거 클린업 트리오를 구축하면서 한신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해 4월 17일 남긴 백스크린 3연발은 지금까지도 한신의 영원한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해에 기록한 54홈런은 2001년 터피 로즈가 타이 기록을 세울 때까지 오 사다하루가 1964년 55홈런으로 당시 일본 기록을 세우고 난 뒤에 기록된 최다 홈런 기록이었으며, 센트럴리그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 홈런왕이기도 했다.

상술했듯이 이해의 불같은 기세로 오 사다하루의 시즌 홈런 기록 갱신도 충분히 노릴 수 있었으나, 당시 신격화되어 있다시피 한 오 사다하루의 시즌 홈런 기록을 외국인 선수가 경신하게 할 수 없다는 일본 야구계의 집요한 견제로 타이 기록에서 단 1개가 모자란 54개로 시즌을 끝마쳐야 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한신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오 사다하루가 지휘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2연전이었는데, 이 2연전에서 에이스 에가와 스구루를 제외한 요미우리 투수진들이 치졸할 정도로 승부를 피하면서[5] 결국 시즌 홈런 갱신을 막았다. 오 사다하루는 훗날 "나는 고의사구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라고 하였고 실제로 당시에 승부를 피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당시 투수 코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였기에 오의 증언 자체는 거짓이 아니나, 이미 시즌 순위가 결정지어진 뒤 치르는 소화 시합에서 투수들이 랜디 바스와 의도적으로 승부를 피하는 것을 보고 묵인했다는 점에서 변명에 가깝다. 후에 호크스 감독을 맡았을 적의 터피 로즈 때도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더더욱.[6]

요미우리 투수진은 감독의 홈런 기록을 지켜내긴 하였으나, 볼넷 남발로 인해 결과적으로 바스의 출루율이 올라가게 되어,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선사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얄궂게도 이 때문에 출루율 1위 타이틀을 놓친 선수가 다름 아닌 요미우리의 요시무라 사다아키였다. 요시무라 본인이 막판의 2연전에서 부진했던 점도 있지만 투수진들이 노골적으로 바스와의 승부를 피함으로 인해 바스가 계속해서 볼넷으로 출루하게 되면서 결국 5모(0.0005) 차이로 요시무라를 제치고 출루율 타이틀을 가져가 버렸다.[7]

이듬해인 1986년에는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고 타율 기록인 0.389의 대기록을 수립한다.[8] 비율 스탯은 .389 .481 .777 OPS 1.258로, OPS는 1974년 오 사다하루의 1.293에 이은 일본프로야구 단일 시즌 2위 기록이며 장타율은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779로 갱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단일 시즌 1위 기록이었다. 이외에도 176안타, 47홈런, 109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으로 타격 3관왕을 기록하는 등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센트럴리그 MVP는 히로시마의 에이스 키타벳푸 마나부에게 돌아갔다. 키타벳푸도 18승 4패 평균자책점 2.43으로 투수 2관왕을 차지한 훌륭한 투수였고 소속 팀인 히로시마의 우승을 이끈 주역이긴 했지만, 바스만큼 압도적인 성적은 아니었다. 일본프로야구의 MVP라는 게 원체 리그 우승팀 선수에게 주는 경향이 강한 타이틀이긴 하지만, 일본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당시 투표인단 중에서 외국인에게 2년 연속 MVP를 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9]

어쨌든 한신 팬들은 바스가 앞으로도 계속 한신의 타선을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바스는 1988년 아들의 지병인 수두증 문제로 인해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해고당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이후 은퇴한다. 계약상 "가족의 병원 치료가 필요할 경우, 구단이 이를 부담한다"라는 내용이 있었으나, 한신은 거액의 병원비 지불을 꺼려 바스를 해고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내 리그의 다른 팀에게도 계약을 제의했지만 한신 측에서 주도한 신사협정으로 인하여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한신 구단 대표 후루야 신고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스와의 재계약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듯 바스가 떠난 이후, 구단 내외의 분위기는 매우 흉흉해졌으며. 이는 밑의 성적이 증명한다.

한신 타이거즈는 1987~2002년까지 롯데 자이언츠 8888577, 난카이 호크스의 20년 연속 B 클래스와 맞먹는 초유의 암흑기를 지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한신은 리그 우승은커녕 A 클래스도 1992년 딱 한 번, 그것도 교진군과 공동 2위로 했다. 그 시즌마저도 실제 승률은 5할+4.

일본프로야구 통산 기록은 614시합 출전, 통산 타율 .337, 통산 출루율 .418, 743안타, 202홈런이다.

3. 연도별 성적

빨강색은 NPB 역대 1위.
파일:NPB 로고.svg 랜디 바스의 역대 NPB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10]
1983 한신 113 420 107 15 0 35 69 83 0 39 57 .288 .360 .612 .971 3.9
1984 104 407 116 16 0 27 57 73 1 38 64 .326 .400 .598 .999 3.6
1985 126 570 174 21 0 54 100 134 1 67 61 .350 .428 .718 1.146 6.9
1986 126 541 176 31 2 47 92 109 2 82 70 .389 .481 .777 1.258 10.5
1987 123 518 145 15 2 37 60 79 0 60 70 .321 .403 .607 1.011 6.3
1988 22 94 25 2 0 2 8 0 1 13 15 .320 .404 .423 .827 0.8
NPB 통산
(6시즌)
614 2550 743 100 4 202 387 486 5 299 337 .337 .418 .660 1.078 32.0

랜디 바스는 1985년의 엄청난 활약을 펼쳐 한신의 우승을 이끌었는데, 팬들의 기억에 남는 모습도 이 85년이다. 영상 자료에서도 대부분 이때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득점 생산의 관점에서 그의 공헌은 1986년이 훨씬 컸다고 한다.

랜디 바스가 1986년 시즌에 기록한 wRAA[11]는 85.8이다. 이 기록은 NPB 역대 최고의 타자 오 사다하루의 기록을 제외할 경우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 wRAA 기록이다. 【커리어 하이편】세이버 메트릭스의 시점에서 본 NPB 역대 최강 타자 랭킹 톱 30

4. 여담

파일:attachment/Randy_Bass.jpg }}} ||
左: 현재 右: 리즈 시절

4.1. 바스의 재래

랜디 바스가 이렇게 엄청난 활약을 한 선수였기 때문에 간사이 지방 언론은 한신 타이거스에 새로운 외국인 선수가 입단할 때마다, 바스처럼 활약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바스의 재래(バースの再来)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말을 들은 선수들만 지금까지 수십 명 이상. # 그런데 이 바스의 재래라는 말을 들은 선수마다 하나같이 먹튀가 되거나 유리몸이거나 한 시즌 만에 쫓겨났기 때문에 일본 팬들 사이에서는 바스의 재래 혹은 바스 2세라는 말은 '바스처럼 불운하게 퇴단한다' 또는 '(안 좋은 의미로) 바스처럼 전설이 되었다'를 뜻하게 돼버렸다.. 해당되는 외국인 선수는 아래와 같다.
  1. 마이크 그린웰: 거액 계약을 맺어놓고 시즌 전 퇴단.
  2. 이반 크루즈: 메이저 경험은 적었지만 시범 경기에서 14경기 7홈런 19타점을 기록하면서 바스의 재래 소리를 들었다. 현실은 부상으로 반 시즌 뛰고 나가리. 뛰는 동안에는 그래도 70경기 14홈런 34타점으로 괜찮았지만 타율이 .234로 멘도사 라인에 볼삼비도 25볼넷 62삼진으로 처참했다. 시즌 후 방출. 2년 후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하면서 일본에 돌아왔는데 여기서도 71경기 11홈런 34타점 타율 .222로 공갈포짓만 하다가 재계약에 실패했다. 일본 통산 25홈런을 쳤는데 통산 타율이 .228로 절망적에 선구안까지 안 좋아서 통산 OPS가 7할을 간신히 넘겼다.
  3. 케빈 멘치: 이 선수는 2009년에 한신에 입단했는데, 메이저 시절에 2년 연속 25홈런을 달성했고 선구안도 괜찮아서 공갈포 성향도 아니었으며 주력도 괜찮았고 어깨까지 강했기 때문에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근데 현실은 140km/h짜리 직구도 못 칠 정도로 패스트볼에 약했고 결국 15경기에서 타율 .148에 0홈런을 기록한 후 대체 용병 타자 크레이그 브라젤에게 밀려 2군에 박혀 있다가 7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근데 웃긴 건 이래놓고 다음 시즌에 메이저 복귀. 물론 백업으로 27경기에 출장해서 OPS 2할이라는 처참한 성적울 찍고 완전히 은퇴하긴 했다. 참고로 시범 경기에서 홈런을 딱 1개 쳤는데 그 홈런을 허용한 선수는 그 시즌이 끝나자마자 한국나이 30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방출. 여담으로 대체 용병 크레이그 브라젤은 볼넷이 거의 없고 삼진은 100개를 넘는 완벽한 공갈포였지만 그해에 82경기에서 16홈런을 쳤고, 그 다음 해인 2010년에는 풀 시즌을 완주하면서 47홈런을 치면서 그나마 바스급 활약을 해줬다. 공인구가 교체된 바로 다음 시즌부터 홈런 개수가 급감하면서 그 후로 4년 동안 43홈런 치고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은퇴했다.
  4. 윌린 로사리오

바스의 재래의 재래(バースの再来の再来)는 이 선수도 앞서 바스의 재래라는 말을 들었던 선수처럼 또다시 먹튀 용병이 되었다는 팬들의 자조적인 비아냥이다.[14] 두 표현 다 일본의 야구 팬들에게는 상당히 유명한 말이다.

2016년 일본시리즈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소속 투수 앤서니 바스 선수가 구원 등판으로 3승을 기록하고 6차전에서 적시타를 때려내며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자 바스의 재래, 사실상 한신 우승 드립이 흥하기도 했다.[15]

여담으로 니코니코 대백과의 바스의 재래 항목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선수와 구단 역사에 남을 명선수 항목이 있다. 여담으로 아롬 발디리스도 그렇지 않았던 선수 항목에 있다.[16] 명 선수 항목에는 세실 필더, 맷 머튼, 크레이그 브라젤[17], 마우로 고메즈 등이 있다.

이후 2023년 일본시리즈에서 38년만의 우승을 해낸 2023년의 외인타자들도 영 잘하지 못해서 명 선수라기보다는 바스의 재래의 재래에 가까운 느낌이다. 일단 둘 중 요한 미에세스의 경우는 시즌 성적은 좋지 못했어도 장타력이 좋아서 1년 더 함께한다고 발표가 나왔다. 또한 시즌 내내 나오고 규정타석을 채웠으나 9홈런에 6할대 OPS로 왜 나오냐고 욕을 많이 먹은 쉘든 노이지의 경우 7차전에서 결승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벼랑 끝의 상황에서 팀을 구해내는 활약을 해주며 원래 퇴출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재계약을 하는 것으로 프런트에서 방침을 바꿔 잔류하게 되었다. 결국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용병타자 둘 다 우승반지도 얻고 재계약도 했으니 나름 해피엔딩.그리고 다음해 둘 다 잘렸다

5. 관련 문서


[1] 오 사다하루와 타이 기록. [2] 뒤에 있는 세이부 선수는 아키야마 코지. [3] 한신은 외국인 타자 최종 후보로 바스와 부머 웰즈를 저울질했으나 최종적으로 왼손 타자인 바스를 택했다. 부머도 하술하겠지만 일본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4] 퍼시픽리그 용병 최초의 삼관왕은 같은 니시노미야에 있던 한큐 브레이브스 부머 웰즈가 1984년 수상한 바 있다. 참고로 이해 한큐도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시리즈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패배) 이것이 한큐 시대의 마지막 우승이 되었다. [5] 기록상으로는 고의사구에 해당하지 않았다. 고의사구가 성립되려면 마지막 4번째 볼을 포수가 일어선 상태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 실제로 이해에 바스가 얻어낸 기록상의 고의사구는 불과 5개였으며, 오히려 타율 3할 8푼 9리를 기록한 그 다음해의 고의사구가 18개였다. 다만 기록상 고의사구가 아니었을 뿐이지 포수를 앉혀놓고 도저히 칠 수 없는 볼을 던져댔다. [6] 마찬가지로 이때도 배터리 코치인 와카나 요시하루 등이 알아서 지시를 내렸고 호크스 투수들이 기록상 고의사구가 아닌 바깥쪽 한참 빠지는 볼, 바운드 볼 등 도저히 칠 수 없는 공만 던졌다. 아이러니한 건 경기 직전 오가 터피에게 사인 볼까지 주며 홈런 기록을 경신하라는 덕담을 남긴 이후에 벌어진 상황이 바로 저것. 이 일로 격분한 로즈는 경기 종료 후 호크스 선수단과 기자들에게 "당신들 일본인에게 난 그저 외국인 선수일 뿐이지"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이후 요미우리에 가서 초대형사고를 친건 덤 [7] 하지만 사사구 개수 또한 3할 8푼 9리를 친 그 다음해가 훨씬 많았다. 아무래도 그 다음해의 바스가 완전체에 가까왔기 때문. [8] 기록 수립 당시까지의 일본프로야구 시즌 최고 타율은 장훈이 1970년에 기록한 0.383이었다. 16년 만의 기록 경신. [9] 얄궂게도 같은 해 2년 연속 퍼시픽 리그 타격 3관왕을 수성한 오치아이 히로미츠도 우승팀 세이부 라이온즈 이시게 히로미치에게 밀려 MVP를 수상하지 못했다. [10] 출처 [11] 선수 개인이 리그 평균에 비하여 얼마나 득점에 기여 하였는지를 나타내는 지표 [12] 연방 단위의 미국 상원이 아니라 오클라호마 주 의회의 하원과 상원 중 상원이다. 주 의회부터가 양원제이기에 가능한 일. [13] 팀은 오사카 로망즈. [14] 90년대 한신에서 4년 연속으로 4번 타자를 맡았던 외국인이 시즌 도중에 쫓겨났다. [15] 앤서니 바스는 선발 요원으로 데려왔으나 부진하여 시즌 중 불펜으로 전향했던 선수로 37경기 14선발 8승 8패 6홀드에 평균자책점 3.65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6 시즌 이후 재계약에 실패하여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복귀 이후 트리플 A에서 주로 뛰면서 땜빵으로 메이저에 올라와 2년 동안 18경기에 등판했다. 2019년에는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지명 할당되었다가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옮기는 등의 과정을 겪으며 44경기에 출장했고 시즌 후 1년 150만 달러에 연장 계약을 맺으며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16] 발디리스는 한신에서는 망했지만 어차피 육성 선수 입단이라 기대치가 없었고, 다른 구단으로 옮긴 후에는 준수한 중장거리포이자 주전 3루수로 6년간 뛰면서 나름 롱런한 용병 타자로 역사에 남았다. [17] 2010년에 47홈런 117타점에 OPS 9할대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