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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6:26:52

이가와 게이

파일:NPB 로고.svg 2003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우에하라 고지
(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가와 케이
( 한신 타이거스)
사이토 가즈미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카와카미 겐신
(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마쓰이 히데키
(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가와 게이
( 한신 타이거스)
카와카미 겐신
(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external/www3.pictures.gi.zimbio.com/New+York+Yankees+v+Boston+Red+Sox+RCgdn_yB0v7l.jpg
이가와 게이
井川慶 / Kei Igawa
생년월일 1979년 7월 13일 ([age(1979-07-13)]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이바라키현 히가시이바라키군 오아라이마치
출신고교 미토 상고 (이바라키)
신체 186cm | 93kg | O형[1]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팀 한신 타이거즈 (1998~2006)
뉴욕 양키스 (2007~2011)[2]
오릭스 버팔로즈 (2012~2015)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
2.1. 과대 평가와 류현진과의 비교
3. 선수 경력
3.1. 학창시절3.2. 일본프로야구 시절(1998~2006)3.3. 미국프로야구 시절(2007~2011)
3.3.1. 왜 망했는가?
3.4. 일본으로의 복귀(2012~2015)3.5. 그 이후
4. 여담
4.1. 기행 목록
5. 연도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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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2000년대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신의 중흥기를 이끌고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으나 첫 2년사실상 1.5년이긴하다.을 제외하곤 양키스의 마이너팀인 스크랜턴 양키스에서만 활약하는 등 처절한 실패만 맛보고 2012년에 다시 일본으로 복귀했다가 노쇠화로 은퇴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파일:이가와포심.gif
149km/h 포심 패스트볼
파일:이가와체인지업.gif
127km/h 체인지업
파일:이가와슬라이더.gif
129km/h 슬라이더

최고구속 149km/h[3] 평균 143km/h을 찍는 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그리고 슬라이더를 주로 쓰는 좌완 투수다.

다만 제구가 일본 시절부터 썩 좋은 편이 아니었고 피홈런도 자주 허용하는 편이었는데 이러한 투수가 일본 최고의 투수까지 오르게 될 수 있던 원인은 다름아닌 패스트볼의 수직 무브먼트[4]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패스트볼과 비슷한 궤도로 들어오다가 홈플레이트 앞에서 가라앉는, 약 20km/h 가량의 속도 차이가 나는 체인지업, 이 체인지업과 거의 똑같은 구속을 지녔으나 변화 방향이 정 반대인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와무라 상을 수상할수 있었다.

당연히 저 이유로 인해 메이저리그 진출 시즌인 2007시즌 전까진 리그 탈삼진왕을 3번이나 기록할 정도였다. 다만 이승엽에게 자주 홈런을 헌납하고[5], 커리어 내내 외국인 강타자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MLB 진출이후 상기에 언급된 썩 좋지 못한 제구가 크게 발목을 잡으면서 MLB에서 실패한 원인이 되기도한다.

2.1. 과대 평가와 류현진과의 비교

이가와의 실패와 류현진의 성공의 원인을 분석한 2019년 mlb파크의 글

패스트볼,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가지고있는 구질을 보면 알겠지만 어찌보면 MLB 진출이전 류현진과 비슷한 덕분에 MLB 진출 이전의 류현진과 비교되기도 했다. 류현진의 MLB 진출 떡밥을 논했던 이들은 천웨이인부터 다르빗슈 유까지 갖가지 비교대상을 들먹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이가와와의 비교만은 꺼렸을 정도.

하지만 MLB 진출 후의 모습을 보면 류현진과 이가와의 선수로써의 역량은 아예 급이 달랐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 패스트볼의 최대구속도 달랐고 변화구 무브번트도 달랐지만 가장 컸던 차이점은 제구력이다. 그나마 패스트볼의 수직 무브먼트만은 류현진이 MLB 진출이후 제구력을 얻으려고 수직 무브먼트를 포기하면서 이가와가 좋긴했다. 수평 무브먼트는 메이저 타자들에게 커터를 던진다는 말이 나오는 류현진 쪽이 훨씬 좋았다.

가뜩이나 패스트볼의 구속도 높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좋은 수직 무브번트 하나로 MLB에서 호성적을 거두기엔 MLB가 그렇게 만만한 리그가 아니다. 당연히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가 아래의 결과다.

3. 선수 경력

3.1. 학창시절

고시엔 출장기록은 없지만 소속 지역인 이바라키현에서 뛰어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줘 돗토리 조호쿠고에 다니던 노미 아츠시,류코쿠대학부속 헤이안고교에 다니던 카와구치 토모야[6]와함께 고교생 좌완 삼총사라 불리며[7] 기대를 받았다. 다만 4구단 지명을 받은 카와구치와는 다르게 현 예선에서 디친 허리의 영향으로 인해 한신 타이거즈에서 2순위로 지명을 한다.

여기서 그의 비범함이 드러나는데, 원래는 프로에 갈 생각이 없고 대학 진학이 목표여서 고 3 여름에서야 프로에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3.2. 일본프로야구 시절(1998~2006)

본격적으로 이가와가 1군 로테이션을 돌기시작한 시기는 3년차인 2001년시즌인데 이때 당시 센트럴리그 방어율 2등인 2.67을 기록했다. 다만 당시 한신 상태가 상태였다보니[8]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10승을 거두지 못한 9승 13패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3패는 참고로 리그 최다패배 기록. 물론 이 시즌 리그 최다볼넷인 89개를 기록하는등 제구면에서는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2001년 시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2002년부터 맹활약하기 시작하는데 팀 12년만의 개막전 승리를 필두로 209⅔이닝을 던지면서 삼진 206개를 거두고 14승 9패, 방어율 2.49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센트럴리그 최다 투수 득표로 올스타에 뽑혔고[9] 2003년에는 20승[10] 5패, 평균자책점 2.80으로 일본의 사이영상인 사와무라상[11]을 받았다. 당연히 올스타도 승선[12]

2004년 200⅓이닝을 던져 탈삼진 228개, 14승 11패, 방어율 3.73을 기록했다. 10월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선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정도 당연히 센트럴 리그 탈삼진왕도 먹었다. 2004 시즌후에는 포스팅 시스템으로 MLB 진출을 희망했지만 구단의 반대로 진출에는 실패했다.

2005년에는 13승 9패, 방어율 3.86로 묘하게 부진했지만 팀의 리그우승에 기여했고, 2006년은 14승 9패 방어율 2.97을 기록하고 센트럴리그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2006 시즌 종료후 2004년에 허가하지않았던 포스팅을 한신구단이 허락했고 2600만달러에 뉴욕 양키스가 입찰하면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였다.[13]

3.3. 미국프로야구 시절(2007~2011)

MLB에 등판한 기록은 2007년 14경기(12선발) 2승 3패 6.25 2008년 2경기(1선발) 1패 13.50이 끝이다.

2009년부턴 아예 메이저리그 기록이 없다. 2007년 시즌후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가 아예 관심을 가지면서 트레이드가 성사될뻔하기도했지만 딜이 파토되었었는데[14] 2008년 이후에는 그런썰도 돌지 않았다. 일본구단이 계속 접촉했다는 썰만 돌았을 뿐.

어쨌든 2008년에는 AAA다승왕을 하기도 했고 2009년에는 AAA에서 AAA 올스타에 들어갈만큼 그럭저럭 잘 던지긴 했는데 2007시즌 부진의 영향인지 MLB 등판은 2008년 이후로 전무[15], 2010년에는 스프링캠프에 등판하기도 했지만 난타당하면서 그대로 로스터 진입 실패, 아예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일본을 갔다온 영향인지 AA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그이후 AAA로 복귀.

그리고 2012년 3월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이 이끌고있던 오릭스 버팔로스의 복귀를 홈페이지로 알리면서 미국프로야구 커리어는 2011년에서 끝이 났다.

너무 크게 망했다보니 커리어 내내 양키스 팬들의 비웃음 거리로 전락했는데[16] 아니, 어쩌면 차라리 비웃음당하던 때가 나을 수도 있다. 후에는 오프시즌에 페이롤 체크하다 어라? 왜 이만큼이 차 있지?' 의아해하다 아, 이가와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전락했다. 당시 조 토리감독도 자서전에서 그를 엄청나게 혹평했다. 심지어 양키스가 당시 부족했던 좌완 불펜[17]으로 쓰기 위해 좌완 사이드암으로 투구폼을 바꾸려고까지 했지만 선수가 거절했다.

일본내에서도 나름 MLB에 진출한 투수가 저렇게 망하자 비판여론이 극에 달했다. 상술되었지만 투수라면 어느정도 성적을 낼수있었던 펫코파크를 홈으로 한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의 트레이드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돌면서 욕을 엄청나게 먹은 수준. 심지어 일본내에선 당시 양키스의 스카우트팀이었던 빌리 에플러[18] 앞에서 이가와가 투구를 했는데 에플러가 양키스의 불펜포수한테 이가와의 느낌에 대해 물어보자 그 불펜포수가 MLB급 투수 맞아?라고[19] 반문했다라는 썰까지 돌 정도였다.

3.3.1. 왜 망했는가?

2011년 당시 이가와 케이 관련 뉴욕타임스 기사 이가와 게이는 물론이고 당시 뉴욕 양키스 단장인 캐시먼, 상술되었지만 이가와 케이를 노렸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2007년 단장 케빈 타워스 등 관련인물들의 인터뷰가 있다.

2021년 4월 우에하라 고지의 유튜브에서 나온 이가와 케이의 양키스 시절이야기

사실 이가와의 MLB 실패는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역량 부족이다. 사실 일본에서의 통산 성적도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 같은 NPB를 지배한 투수들과 비교하면 명백히 몇 수 아래이다. 인기팀인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였던 점과 후술할 기행으로 인해 인터넷 상에서는 실력 이상의 주목을 받은 것. 야구선수로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실력은 나름대로 인정받은 것인데, 여기서 실패했다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 필요는 없다. 프로선수로서 실력이 부족하진 않지만, 프로선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활약할만큼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런데 다카하시 히사노리[20], 다카하시 겐[21] 같이 확실히 NPB에서 이가와보다 성적이 안 좋았는데 MLB에 진출했지만 이가와보다 MLB에서 좋은 성적을 낸걸 감안하면 이가와의 실패는 특이 케이스이기도 하다.

물론 고바야시 마사히데[22]나 야부타 야스히코[23]처럼 불펜으로 진출해서 난타당한 뒤 짧은 시간 안에 리턴한 케이스도 있고 와다 츠요시 나카무라 노리히로 처럼 부상때문에 저조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뒤 리턴한 케이스도 있지만 저렇게 선발투수가 건강한 채로 가서 극단적으로 망한 사례는 이가와 게이가 독보적인 수준이다.

이에 대해 일단 대표적으로 뽑히는 원인은 플레이 스타일이 주로 뽑히고 있다. 특히 제구력.

제구가 좋은 편이 아니다 보니, 뛰어난 수직 무브먼트를 가진 패스트볼을 존에 때려박으면서 삼진을 잡는 유형의 스타일이었고 그로 인해 일본내에서도 피홈런을 생각보다 많이 맞는 스타일이었는데, 당연히 그러한 제구 안되는 공을 MLB급 타자들이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구의 제구도 썩 좋지 않았던 편. 이가와 본인도 MLB에서 실패하고 복귀한뒤 인터뷰에서 실투성 체인지업을 MLB 타자들은 거침없이 쳤다면서 자신의 실패이유에 대해 진단하기도 했다.

세간에서는 워낙 희한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인간이라, 구위가 안 통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쫄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하였으며, 실제로도 쫄지 않았다. 다만 공이 맞아나갔을 뿐이다.

이런 선수를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반값에 잡았다고 양키스는 좋아했으니 물론 MLB 마쓰자카도 돈값은 못 했지만 46m을 먹고 고작 16경기 등판한 이가와하곤 비교가 안된다.

저러한 실패로 인해 이가와를 AAAA급 선수라고 평하기도 한다. 혹자는 그의 양키스 이적을 마쓰자카 다이스케 보스턴 레드삭스 이적에 편승한 효과라고 하기도.

어쨌든 요미우리와 함께 일본 인기팀인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였다보니 어떻게든 변호를 해 주고 싶은 모양인지 위키피디아나 일본인들은 그에 대해 생각보다 후하게 평가를 해 주고 지나치게 그의 역량을 포장하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 그리고 몇몇 한국의 일본 야구에 흥미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문제. 당장 이가와의 한국 위키피디아 내용은 일본 위키피디아의 복붙 수준인데, 지나치게 이가와에게만 좋은 말이 많다.

3.4. 일본으로의 복귀(2012~2015)

상기에 언급된대로 2012년 3월에 한신시절 은사인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하고있던 오릭스 버팔로스에 입단하면서 일본무대로 돌아왔다. 등번호는 똑같이 29번 하지만 잦은 부상과 하락한 패스트볼 구속이 발목을 잡으면서 2012년 최종 성적은 2승 7패 4.65로 마무리했다.

2013년에는 방어율 2.59를 기록했지만 부상과 팀사정을 이유로 고작 9경기 48.2이닝에 머물렀다 승패는 3승 3패

2014년, 스프링캠프에서 호투한 영향인지 시즌 초반 선발 로테이션은 돌았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결국 로테이션에서 밀리면서 2군으로 강등되었다. 다만 2군 경기가 끝난 뒤에도 마지막까지 경기장에 남아서 연습을 하고있는걸 봤다는 목격정보가 속출하는걸로 봐선 노력하는 걸 포기하진 않은듯.

2015년에 1군에 콜업되지 못했고 2군리그인 웨스턴리그에서 0승 4패 ERA 14.40이라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15년 10월 2일 전력 외 통보를 받아 방출된 상태. 몸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연습 또한 열심히 임했는데도 30대 초중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쇠화가 찾아와 기량이 급락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가와 본인은 현역 연장을 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해외 리그 진출도 불사하겠다는 입장. 근 몇 년간 성적을 볼 때 해외라도 KBO 리그는 힘들고, 간다면 대만프로야구 호주야구리그가 되지 않겠냐는 예측이 많다.

3.5. 그 이후

결국 해외리그 진출은 이뤄지지 않았고 2016 시즌이 시작되고도 소속팀을 구하지 못해 일본 국내에 남아 개인훈련을 하고 있는 상태로 사실상 은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9월 15일 자신의 블로그에 고베현 효고 블루 썬더스라는 독립리그 팀에서 몸을 꾸준히 만들고 있다고 근황을 알렸고 노력끝에 12월 15일 정식으로 입단계약을 체결하였다.

2017년은 효고 블루썬더스에서 뛰면서 14시합에 등판, 11승 무패 방어율 1.10의 양민학살스런 성적을 기록했다. 10월 5일에는 친정팀 한신 2군과의 연습시합에 등판, 3이닝 1실점을 기록한 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던졌다'며 현역생활 마감을 시사하는 발언을 남겼으나, 이는 효고 블루썬더스에서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시즌후 합의하에 효고 블루썬더스를 퇴단하였고, NPB구단의 입단제의를 기다린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이제 2018년엔 40세가 되고 이가와보다 훨씬 커리어가 훌륭하고 젊은 마쓰자카조차도[24] 이 구단 저 구단에 어필해서 겨우겨우 입단 테스트 기회를 얻는 게 현실인지라 현실적으로 NPB 복귀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나, 여론은 이가와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왕년의 에이스로 저 정도 커리어면 그냥 편하게 어디서 투수 코치 한 자리를 얻어도 될 것인데, 나이 40이 되도록 현역으로 뛰고자 독립리그도 불사하는 모습에 실력은 둘째치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의견이 일본 내에서도 주를 이루는 선수. 이가와의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짜로 그냥 오타쿠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았다는 의견이 많다.

결국 불러주는 팀이 없어서, 2018년엔 무직. 퇴단은 했으나 여전히 효고 블루썬더스로 출근하여 훈련하는 중이다. 봄에는 프로야구 OB 올스타에 출전하였으며, 여름엔 오랜만에 방송에 나와서 근황을 전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프로 재입단을 목표로 성실히 훈련하고 있으며, 독립구단에서는 정식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돈을 한 푼도 받고 있지 않다고 한다.

물론 이미지와 다르게 선수 본인이 구단에서도 에이스급 연봉을 받고 메이저 이적비도 꽤나 많이받아 여유가 있다. 때문에 돈 한푼 받지 않아도 되냐는 인터뷰에서 "이미 저금이 300억원 정도 있기 때문에 낭비만 안 하면 돈 같은 거 안 받아도 먹고 살 만 하다"는 감동적인지 어쩐지 알 수 없는 여전히 그다운 인터뷰를 남겼다. 사실,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야구인은 드물기 때문에 언제까지 백수로 남을지는 미지수다.

은퇴 후에는 일본 웹 상에서 야구 유튜브 채널에도 종종 모습을 비추고 있으며 2023년부턴 데일리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를 맡기 시작했다. 은퇴 이후에 오히려 야구가 즐거워졌다고 하며, 2023년에는 후루타 아츠야 채널에 나와서 좌완투수 바이블 강의를 했다.

4. 여담

4.1. 기행 목록

파일:external/2chart.fc2web.com/igawa.jpg
취미 : 리모콘 헬기, 축구 비디오 1000여개, 이누야샤, 명탐정코난, 컴퓨터게임, 영화 감상(DVD), 청소

놀랍겠지만,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파일:external/2chart.fc2web.com/meitanteikonan.jpg
2020년 은퇴 후 아사히 방송의 '토라반' 유튜브 채널에서 이 전설에 대해 검증 및 해명 시간을 가졌다. 너무 많아서 다 검증은 못 하고 초밥 루머와 기숙사에 거액의 현금을 두고 다녔다는 부분만 이야기했다. # 결국 진짜긴 진짜라는 것이다 이런 기행만 보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레전드 나가시마 시게오와도 비슷하지만, 나가시마와 달리 건망증 에피소드는 거의 없다.

사실 이가와 게이는 오타쿠 기질과 사차원스러운 모습 때문에 엄청난 기인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기행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구설수에 오르는 사고를 친 경우는 딱히 없다. 오히려 300억이라는 거액의 자산이 있는데도 도박이나 유흥도 안 즐기고 건전한 취미를 즐기면서 야구선수로서 성공했고, 근검절약을 하면서 재산까지 남부럽지 않게 많이 모았으니 어찌보면 본받을 만한 자세라고 할 수도 있겠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NPB/MLB)
년도 소속팀 경기수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1999 한신 타이거즈 7 1 1 0 0 6.46 24 14 14 15⅓
2000 9 1 3 0 0 4.35 36 20 37 39⅓
2001 29 9 13 0 0 2.67 174 98 171 192
2002 31 14 9 0 0 2.49 163 61 206 209⅔
2003 29 20 5 0 0 2.80 184 64 179 206
2004 29 14 11 0 0 3.73 190 60 228 200⅓
2005 27 13 9 0 0 3.86 199 61 145 172⅓
2006 29 14 9 0 0 2.97 180 42 194 209
2007 뉴욕 양키스 14 2 3 0 0 6.25 76 42 53 67⅔
2008 2 0 1 0 0 13.50 13 0 0 4
2012 오릭스 버팔로즈 12 2 7 0 0 4.65 64 33 36 62
2013 9 3 3 0 0 2.59 48 17 41 48⅔
2014 8 2 2 0 0 3.82 37 12 28 33
역대기록(MiLB)
년도 소속팀 경기수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07 탬파 양키스(싱글 A) 2 1 1 0 0 2.00 7 3 6 9
2007 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 11 5 4 0 0 3.69 17 17 71 68⅓
2008 26 14 6 0 0 3.45 141 49 117 156⅓
2009 26 10 8 0 0 4.15 165 47 105 145⅓
2010 22 3 4 0 0 4.32 81 24 68 77
2011 트렌턴 썬더(더블 A) 16 2 2 0 0 4.31 52 27 40 54⅓
2011 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 4 1 0 0 0 2.78 18 15 12 22⅔


[1] 2012년 당시 국내 스포츠 선수들의 혈액형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유명 스포츠 선수들의 혈액형을 언급하는데 이때 언급되었다. 당시 스포츠 뉴스기사 [2] 말이 11년까지지 계약 기간의 70%동안 마이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사실 151km/h라고 알려져있지만 실제 경기에서 찍힌건 149km 정도였다. [4] 역회전이 강한 속구는 양력으로 원래 공이 지나가야 할 궤도보다 더 높은 궤도를 지나가게 되고 이 차이를 수직 무브먼트로 본다. 절대 공이 떠오르는 게 아니다. [5] 2006시즌에 5번이나 맞았다. [6] 3인방중 유일하게 3학년당시 고시엔에 참가해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고 그 영향인지 드래프트 당시 오릭스,긴테츠,야쿠르트,요코하마 이 4구단이 경쟁할정도로 3인방중에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투수였다. 이후 오릭스가 지명에 성공 아이러니하게도 고시엔에서 던진 820구의 혹사와 잦은 투구폼의 변경으로 인해 제구가 망가지면서 1군에서 총 9경기등판이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이후에는 여자야구 쪽을 돌다가 2022년부터 모교인 헤이안고교의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7] 원문은 高校生左腕三羽烏 [8] 한신 타이거즈 최악의 비밀번호인 4466566664를 찍던 시기였다. [9] 당시 투수투표 2등에는 주니치의 카와카미 켄신,3등에는 요미우리의 우에하라 고지가 뽑혔다. [10] 2020년 기준 센트럴 리그 최후의 20승 투수이다. [11] 사이토 가즈미와 공동수상. [12] 다만 2002년보다 퍼포먼스가 좋았음에도 팬투표는 2등을 기록한 상황에서 1등의 사퇴로 인해 승선한 상황이었는데 이에 대해선 카와사키 축제항목 참조 [13] 5년 총 2,000만 달러 계약, 포스팅 2,600만 달러를 합쳐 총합 4,600만 달러 [14] 양키스가 파드레스에게 포스팅 비용의 분담을 요구해서 파토되었다는 썰이 있었으나 하단에 후술될 유튜브 영상에 의하면 당시에 신혼인 아내가 같이 뉴욕에 넘어왔고 그로인해 샌디에이고로 넘어가면 아내 혼자 맨해튼에 남을까봐였다. [15] 하지만 아래에 언급된 뉴욕타임스와의 기사에서 캐시먼은 2008년 AAA다승왕에 방어율로 보면 3.45인데 QERA로 보면 4.52[40]로 '그가 플라이볼 투수라는 증거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가 좋은 메이저리그 투수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는 말을 남겼다. [16] 심지어 양키스 마이너리그 소식을 전해주는 해외 사이트에서는 이가와가 등판할 경우 이가와 케이라는 표기 대신 The Ghost of Kei Igawa라 표기할 정도였다. [17] 2010년에 분 로건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좌완 불펜으로 당시 노장이었던 다마소 마트레밖에 없을 뻔 했다. [18] 후에 뉴욕양키스 부단장,LA 에인절스,뉴욕메츠의 GM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19] 원문은 故障をしているならわかるがとてもメジャーのレベルじゃない。制球は最悪だ。- 부상을 당했다면 모르겠지만 메이저 레벨이 아니다, 제구가 최악이다 [20] 요미우리 자이언츠 출신의 좌완투수 2010년 뉴욕메츠와의 마이너계약으로 MLB에 진출했는데 진출 첫해 시범경기에서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선발 구원 전천후로 뛰면서 10승을 거뒀다. [2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출신의 전천후 좌완 투수 2009년 39세라는 노장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스프링캠프에서 부진한 후 뉴욕 메츠와 다시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AAA에서 나름 호성적을 낸것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 승격되었다. 시즌성적은 28경기 27.1이닝 2.96 [22] 지바 롯데 출신의 우완투수 주로 불펜투수 특히 마무리 투수로 나왔으며 2007시즌 후 클리블랜드와 2년 계약으로 MLB에 진출했지만 난타를 당하면서 그대로 NPB에 복귀 이후 요미우리와 계약을 맺는다. [23] 지바 롯데 출신의 우완투수 고바야시의 존재로 인해 주로 셋업맨으로 나왔으며 2007시즌 후 캔자스시티와 2년 계약으로 MLB에 진출했지만 같은팀 출신 고바야시와 마찬가지로 난타를 당하면서 NPB에 복귀 이후 지바 롯데로 복귀한다. [24] 이가와보다 1살 연하다. [25] 은퇴 후에는 살이 좀 쪘다. 대만의 야구선수인 장타이산에게 홈런을 맞았는데 그 때부터 약간 살짝 몸을 불린듯. [26] 그의 노력에 보답했는지 그의 전성기 시절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는 최강급 투수 중 하나로 나온다. 실존 선수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7레벨(만렙) 변화구(체인지업)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 다만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 자체가 한신에게 능력치를 좀 더 높게 주는 경향이 있는 걸 감안해야 한다. [27] 노무라의 현역 시절은 포수 누적 기록 역대 1위를 다수 보유한 점에서 이미 말할 것도 없고 한신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도 지도자 경력만 30년이 되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사람 앞에서 신인 선수가 느긋하게 밥을 먹은 것. 진짜 상상이 안 간다면 군대에서 갓 전입온 이등병이 사단장 앞에서 밥을 천천히 먹는 것과 비스무리하게 생각하면 된다. [28] 좌완투수였는데 커리어 초창기에는 불펜으로 나와 불펜으로만 100이닝을 넘게 던진 시즌이 2년이나 있을 만큼 미친듯이 굴렀다. 그런데도 안 퍼지고 나이를 좀 먹은 후에는 선발로 전향해 선발로도 나름 잘 던지며 2005년에 다승왕까지 차지하고 무려 22년이나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했던 무쇠팔의 선수. 비록 4팀을 떠돈 저니맨이었으나 통산 100승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다. [29] 도쿄돔은 한신 팬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다. 다만 선수들은 당연히 경기 전에는 해당 구장의 구내식당에서 밥 먹는다. 물론 밖에 나가서 먹어도 되긴 하는데, 경기 전엔 경기장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밥집에 빈 자리도 별로 없고 알아보는 눈도 많으며 사람이 많으니 밥 다 먹고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등 여러 가지로 귀찮다 보니 경기 전에는 거의 홈구장 케이터링 업체에서 마련해 준 구내식당에서 먹고 경기가 끝난 후에 나가서 먹는다. 물론 남의 팀 홈구장 구내식당에 자기 전용 메뉴를 만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30] 참고로 손님들이 이용하는 푸드코트와 선수들이 이용하는 식당은 전혀 다른 업체가 운영하고 있어서 돔시티 내 푸드코트 식당이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선수들, 특히 선발 투수는 시합 당일만큼은 힘을 얻기 위해 경기전에 라멘 같은 고지방, 고탄수화물 식사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경기에 임하는 게 보통이다. 헬스장 가서 운동하기 전에 바나나를 먹는 것과 비슷한 원리. [31] 한신 타이거스는 구단 클럽하우스 한신 고시엔 구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쉽게 말해 숙소 바로 옆에다 텐트 설치해서 살겠다고 주장한 것. 비슷한 사례로 장원삼이 한때 우리 히어로즈, 삼성 라이온즈에 선수생활 당시 기숙사 생활을 좀 오래 했었다가 결국 구단의 지시로 퇴소하게 되었는데, 이쪽도 경산 볼파크 주차장에 텐트를 치게 해달라고 했다가 당연히 거부당했다. 기숙사가 청소나 빨래는 가사도우미들이 해주고, 전기나 수도, 가스는 구단에서 대납해 주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가서 몸만 눕히면 되는 곳이라 이가와나 장원삼 외에도 가끔 생활력 떨어지는 선수들이 이렇게 퇴소 지시에 툴툴대는 경우가 있다. [32] 우메다에서 코시엔 구장이 있는 코시엔역까지는 한신 본선 산노미야 방향 열차를 타면 된다. [33] 사실 다른 야구선수들도 야구에서 성공하지 못했을 때 다른 생업을 찾기 위해 자격증 등을 따놓는 경우는 흔하다. [34] 스포츠 선수들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목에 관심이 많은 경우는 많다. 다만 서로 프로인 만큼 단순히 서로를 향한 응원이나 덕담 정도에서 그치지, 남의 밥줄까지 깊이 파고드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반면 이가와는 2004년에는 '전술을 이렇게 하면 메달을 딸 수 있다!'라든가, 2008년에는 '매년 축구 대표팀이 수준이 떨어져서 아쉽다'같은 발언을 했던 게 특이한 점이다. [35] 다만, 이런 경우는 의외로 많다. 이종범의 경우 축구부였으나 축구부가 해체하는 바람에 동네 형 김기태를 따라 야구를 선택한 케이스고, 최동원도 초등학교때까지는 축구부로 활약했다가 야구로 전환한 케이스다. 그리고, 박지성의 경우에는 리틀야구부에서 "너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못한다. 더 크면 와라."라고 퇴짜를 먹고 4학년때 전학간 학교에선 야구부가 없던 바람에 야구 대신 축구에 집중한 케이스. [36] 보지 못한 스페셜은 괴도 키드 경이의 공중보행편으로 추정된다. [37] 보통 사인은 사인용 색지에 받으며 야구선수에게 부탁할 땐 야구공이나 유니폼 등 여튼 해당 사인을 해 주는 사람과 관련된 물건에 요구하는 것이 예의이고 즉석에서 찢은 공책 등은 일반적으로 매우 무례한 행위다. 하물며 게임보이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요구인데, 그걸 들어주는 것도 물론이고 넉살좋게 저런 말을 건넸다는 것은 굉장한 기행. 사실 이가와의 겜덕 성향을 감안하면 오히려 더욱더 안성맞춤인 요구일수도 있다. [38] 당연하지만 직장 송년회이므로 대부분의 선수들은 참석을 한다. 당장 TV 보겠다고 회사 회식 빼먹겠다고 하면 무슨 말이 나올지 생각해보자. 단, 가족 여행이 있을 경우는 제외지만 워낙 중요한 행사이기에 보통 가족 여행을 다른 날 잡는다. [39] 참고로 타카야마의 결혼상대는 다름아닌 명탐정 코난의 작가 아오야마 고쇼. 다만 서로의 일이 워낙 바빴던 탓에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이 둘은 얼마 안 가 이혼했다.


[40] 2006년에 발표한 ERA 스케일링 지표로 투수의 K% BB% GB%를 바탕으로 계산하는 방어율이다. 후에 이 지표를 개선한 스텟이 바로 세이버매트릭스의 대표적인 투수스텟인 SIERA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