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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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鄧粲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형주 회계군(長沙郡) 출신. 대사농 등건의 아들.
2. 생애
젊었을 적에 고결하기로 명성이 높아, 남양 사람 유린지, 남군 사람 유상(劉尚)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며 친분을 다졌다. 여러 주와 군에서 등찬의 명성을 흠모해 등용하려 했지만, 등찬은 매번 이를 사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태원 2년(377년), 형주자사 환충이 스스로를 낮추고 예로써 등건을 초빙하자, 등건은 비로소 출사를 결심하고 그의 부름에 응해 형주별가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은거하던 두 친구 유린지와 유상이 그를 비판하며 말했다.
"도리가 넓고 학식이 깊어 뭇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그대가 갑자기 이렇게 배반하다니 진실로 실망스럽소."
이에 등찬이 웃으며 말하길"그대들은 은둔에 뜻을 두었으나 아직 은둔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 하였소. 대장부에게 있어서 은둔의 도리란 조정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시장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오. 숨는 것은 나 자신에게 있을 뿐,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오."
하지만 유린지와 유상은 등찬의 말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등찬의 명성은 이것으로 인해 반감되었다.등찬은 관직을 지내면서 환충의 신임을 받았다. 후에 발에 병이 들어 출근이 어렵게 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환충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누워서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환이 점점 악화되자, 등찬은 노환을 이유로 다시 사직을 청했고 마침내 은퇴를 허락받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여생을 문집 저술에 매진하여, ≪원명기≫(元明紀) 10편[1]을 집필하고 ≪노자≫(老子)에 주석을 달았다.
[1]
≪진기≫(晉紀)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