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베르캄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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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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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1 · 1991-92 · 1992-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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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프리미어 리그 도움왕(1990년대)| 1998-99 PL 도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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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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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Ballond'or | ||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
3위 데니스 베르캄프 |
1993 Ballond'or | ||
수상 로베르토 바조 |
2위 데니스 베르캄프 |
3위 에릭 칸토나 |
1993 FIFA 올해의 선수 | ||
수상 로베르토 바조 |
2위 호마리우 |
3위 데니스 베르캄프 |
1997 FIFA 올해의 선수 | ||
수상 호나우두 |
2위 호베르투 카를루스 |
3위 데니스 베르캄프 지네딘 지단 |
Player of the Year 1992 | ||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
2위 데니스 베르캄프 |
3위 페테르 슈마이켈 |
Player of the Year 1993 | ||
수상 로베르토 바조 |
2위 데니스 베르캄프 |
3위 루드 굴리트 |
Player of the Year 1997 | ||
수상 호나우두 |
2위 데니스 베르캄프 |
3위 지안프랑코 졸라 |
데니스 베르캄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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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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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데니스 베르캄프 Dennis Bergkam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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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데니스 니콜라스 마리아 베르흐캄프 Dennis Nicolaas Maria Bergkam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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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9년 5월 10일 ([age(1969-05-10)]세) | |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 ||
국적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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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3cm[1] / 체중 83kg | |
직업 |
축구 선수 (
세컨드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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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AFC 아약스 (1981~1986 / 유스) AFC 아약스 (1986~1993) 인테르나치오날레 (1993~1995) 아스날 FC (1995~2006) |
지도자 |
네덜란드 대표팀 B (2008 / 수석 코치) AFC 아약스 (2008~2017 / 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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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79경기 37골[2] ( 네덜란드 / 1990~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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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前 축구 선수이자 코치.2. 유년기
베르캄프의 집은 전체적으로 맨유의 팬이었기 때문에 맨유의 선수 데니스 로[3][4]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베르캄프의 이름은 Dennis로 데니스 로의 이름에 n이 하나 더 붙었다. 데니스 로의 이름인 Denis가 네덜란드쪽에서는 여성의 이름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베르캄프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던 선수는 토트넘의 레전드이자 잉글랜드의 테크니션 글렌 호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라이벌인 아스날의 레전드가 되었으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후에 베르캄프는 축구잡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가족들이 좋아하는 팀과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소속팀을 놔두고 왜 아스날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자신의 아버지는 데니스 로의 팬이지, 맨유의 팬이 아니었고 본인 역시 글렌 호들의 팬이긴 했지만 토트넘 구단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아스날에 입단했다고 밝혔다.
3. 클럽 경력
3.1. AFC 아약스
아약스 시절, 처음 요한 크루이프 감독 시절에는 오른쪽 윙어로 활약했다. 이후 루이 반 할 감독이 부임하고 반할은 그의 창의성을 알아봐 10번자리,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시킨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성하게 되고, 무려 세 시즌 연속으로 에레디비지 득점왕을 차지할 정도로 미친 득점력을 선보였다. 실제로 1992년에 베르캄프는 그 해 득점왕이였다. 91-92 시즌 UEFA컵 결승 1차전에서 풀타임 출장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5] 아약스 시절 총 7시즌 동안 리그에서 185경기 103골, 컵대회까지 합치면 총 237경기에서 122골을 기록하고 이탈리아로 향한다. 물론 본인은 1992년에 발롱도르 3위에 선정되고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로 2년 연속 (1991 & 1992) 선정될 만큼 엄청난 활약을 보였지만 아약스에서 에레디비시 우승 1회, KNVB 베이커 우승 2회,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회, UEFA컵 우승 1회를 달성했다.[6]3.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인터 밀란 시절에는 아약스에서의 보여주던 활약을 이어가지 못한 과도기로, 세리에 A 특유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며 전체적으로 부진했다. 리그에서는 부침이 심했으나, 93-94 시즌 UEFA컵에서는 SV 아우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의 결승전 1, 2차전 모두 선발 출장하여 두 경기 모두 89분을 뛰는 등 활약하였고, 팀도 1, 2차전 모두 1 대 0으로 승리하며 생애 마지막 유럽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베르캄프는 이때 UEFA컵 득점왕이었다.이때 함께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루벤 소사 역시 베르캄프와 마찬가지로 세컨드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더 어울리는 선수였기 때문에 두 선수 모두 빈 공간을 이용하는 데는 능했어도 최전방 스트라이커 역할을 맡아 그 공간을 만들어주는 데까지 능한 타입은 아닌 조합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이때 인테르 지휘봉을 맡았던 감독들이 모두 전술적 역량이 뛰어난 수준은 아니어서 3-5-2 포메이션에서 두 선수를 성공적으로 조화시키지 못했다.
결국 인테르에서의 행보를 성공적이라 보기는 어려웠고, 팀 개혁을 준비하던 아스날로 이적하게 되면서 이탈리아를 떠나 잉글랜드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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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르에서의 2시즌 동안 리그에서 52경기 11골을 기록했고 컵대회 포함하여 총 74경기 22골을 기록했다. 사실 UEFA컵 우승 시즌 때 득점왕을 했기에 망정이지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탈리아에서 보냈다고 할 수 없다. 아약스에서 3시즌 연속 리그에서만 24골 이상을 기록한 것과는 대비되는 실망스런 개인 성적. 그나마 상기한 바와 같이 93-94 시즌에 UEFA컵에서 11경기 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기록한 것이 특기할만한 점.
3.3. 아스날 FC
1995-96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1995년 6월 20일, 당시 조지 그래엄 감독 사퇴 이후 대대적인 팀 개혁이 필요했던 아스날은 거액의 이적료로 베르캄프를 데려온다.[7][8] 그리고 베르캄프가 아스날에 온 지 1년 후 나고야 그램퍼스를 떠난 아르센 벵거 감독이 아스날에 부임했고, 그의 지휘 아래에서 아스날의 성적과 베르캄프의 기량이 만개한다. 벵거는 후에 인터뷰에서 베르캄프가 자신보다 아스날에 먼저 와 있던 것이 자신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밝혔다.아스날 이적 후에는 PL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 11시즌 동안 리그에서 315경기 87골 94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컵 대회까지 합하면 423경기 120골 12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동 시대의 클럽 레전드인 앙리가 228골을 넣어서 상대적으로 적어보일 뿐, 베르캄프의 득점 역시 아스날 클럽 사상 11위의 기록이다. 또한 1997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에서 지네딘 지단과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한다.
득점력만 아니라 뛰어난 공격 조율 능력 또한 갖추었던 선수이다. 티에리 앙리와 보여주었던 환상적인 호흡은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천재 콤비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베르캄프 본인도 포포투 인터뷰에서 마르코 반 바스텐, 이안 라이트,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니콜라 아넬카 등 함께 뛰었던 수많은 레전드 공격수들을 제치고 티에리 앙리를 최고의 공격 파트너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인터뷰에선 앙리보다는 아넬카와 호흡이 더 잘 맞았다는 발언을 했으며, 아넬카가 조금 더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라 자신과 스타일이 잘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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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2일 리그 뉴캐슬 원정경기에서의 니코스 다비자스를 제치고 넣은 골 장면.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노리지는 않고 그냥 본능에 몸을 맡겼을 뿐이라고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 이런 유언비어가 퍼졌는지 알 수 없고 오히려 베르캄프는 실제로 노린 플레이라고 답하며 매우 구체적으로 그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상황에서는 그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고 나의 의도가 성공할지는 몰랐지만 일부러 노린 플레이는 맞다" 이후 수비수를 밀쳐버리고 돌파한 건 일단 파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골은 루니의 맨시티전 오버헤드킥 골을 제치고 BBC에서 선정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의 골로 선정됐다.[9]
97-98 시즌 더블, 01-02 시즌 더블, 03-04 시즌 리그 무패 우승 등 아스날의 전성기에는 항상 그가 있었으며, 파트리크 비에라와 함께 4-4-2 전술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참고로 97-98 시즌의 더블 때는 무패 우승 시즌 멤버인 앙리나 융베리, 피레스, 캠벨 등은 없던 시절. 03-04 무패 우승 시즌 때는 티에리 앙리가 아스날을 이끌었다면 97-98 시즌 때 아스날을 이끌었던 에이스는 데니스 베르캄프였다. 베르캄프는 이 시즌 BBC sport에서 정리한 스탯에 의하면 무려 22골 20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리그에서는 16골을 기록하였다. 막판 부상 때문에 뉴캐슬과의 FA컵 결승전은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즌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골 & PFA 올해의 선수 & FW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석권하며 가히 베르캄프의 시즌으로 만들었다. 01-02 시즌 때는 2002년 3월에 이달의 선수로 선정됐다. 03-04 시즌에는 당시 팀 동료인 에두와 함께 2월에 이달의 선수로 선정됐다.[10]
04-05 시즌이 끝나가던 즈음에 36세가 된 베르캄프는 아스날과 계약연장 없이 아약스에서 은퇴할 거라는 루머가 돌았으나 리그 37라운드에서 리그 4위였던 에버튼을 상대로 회춘한 경기력을 보이며 7-0 승리를 이끌었다. 04-05 시즌에 리그 어시스트 3위를 기록했다. 베르캄프보다 어시스트를 많이 기록했던 선수들은 1위의 프랭크 램파드와 2위의 티에리 앙리 뿐. 그리고 계약을 1년 연장하며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은퇴. 05-06 시즌은 베르캄프가 아스날에서 주전이 아닌 후보로 뛰었던 유일한 시즌이다.[11]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며칠 후인 2006년 7월 22일, 아스날의 새 홈구장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의 개장경기에서 친정팀이자 고향팀인 AFC 아약스와의 경기로 은퇴 경기를 가졌다. 이 때 아스날과 아약스 그리고 네덜란드 국대의 전•현직 선수들이 총출동해서 그의 은퇴경기를 함께 했다. 오베르마스, 시먼, 비에라, 프티, 윈터번, 반 데 사르, 스탐, 레이카르트, 반 바스텐, 더부르 등. 게다가 무려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던 요한 크루이프도 후반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날 통산 423경기 120골 124도움[12]
4. 국가대표 경력
1990년 9월 29일에 열린 이탈리아와의 친선경기가 베르캄프의 국가대표 데뷔 경기였다.[13] 첫 메이저 대회 출전은 유로 1992였는데, 이 대회에서 맹활약으로 베스트 11에 선정되고 이를 바탕으로 1992년 발롱도르 3위를 기록한다.1994 미국 월드컵에서 모로코, 아일랜드, 브라질을 상대로 각각 1골씩을 득점하면서 맹활약하였으나 8강에서 브라질에게 2-3으로 아깝게 패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호사가들의 화제인 '세계 4대 공격수' 중 가장 유력한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함께 언급되던 동시대 공격수들은 호나우두,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앨런 시어러 등.[14]
이 대회에서 베르캄프는 한국 수비진을 그야말로 유린하며 5-0의 참패를 안겨줘 한국 축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을 남겼다. 부상을 입은 채 출전해서 꽤 많은 1대1 찬스를 날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특히 한국 수비수들을 바보로 만드는 드리블 후 필립 코쿠에게 어시스트한 장면, 아크 정면에서 간결한 터치만으로 김태영을 농락하고 가볍게 툭 차넣는 득점 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같은 대회 16강전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사실 베르캄프는 이 때 퇴장당했어야 마땅한 반칙을 저지른다. 유고슬라비아의 미하일로비치의 무릎을 일부러 밟는 비신사적인 반칙을 저질렀지만 심판은 이를 보지 못했다. 제대로 된 판정이였다면 베르캄프는 이 때 퇴장당하고 8강전은 물론 4강전에도 못 나왔어야 했다.[15] 만약 이 때 출전하지 못했다면 네덜란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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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2000에서 네덜란드 대표팀 최초로 A매치 40골에 도전했으나 1골도 넣지 못했고 네덜란드도 4강에서 이탈리아에게 탈락해서 4강에서 멈추고 만다. 그리고 이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가대표 은퇴 당시에는 네덜란드 대표팀 최다 득점자였으나 2004년 10월 클루이베르트에 의해 깨진다.
이후 베르캄프가 없는 네덜란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
정리해보면 국가대표로서 79경기 출장, 37득점을 기록하였다. 현재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역대 득점 랭킹 4위.[18] 하지만 자신은 I`m assistant 라고 하며 '스코어러'보다는 '어시스턴트'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커리어 후반기로 갈수록 베르캄프는 국가대표와 클럽 모두에서 골보다는 어시스트를 더 많이 기록했다.
5. 플레이 스타일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개념을 완성시킨 선수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19] 초창기 벵거볼의 절대적 핵심이었던 선수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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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준수한 피지컬의 소유자였으면서도 몸싸움을 상당히 꺼리는 스타일이었다. 몸싸움에서 쉽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세컨드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서게 된 것도 상대 수비와 직접 몸으로 부대껴야 하는 최전방 공격수 역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성기에는 신체 능력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도 꽤 빨랐을 뿐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민첩하고 터닝 동작이 빨랐다. 위에도 숱하게 언급한 퍼스트 터치 능력에 빠른 터닝 동작과 뛰어난 탈압박 능력이 더해지다보니 더욱 수비수가 막기 까다로운 선수였다.
그리고 양발을 모두 상당히 잘 쓰는 편이었음에도, 아스날에서 같이 뛰던 앙리와 비슷하게 오른발을 사용하는 걸 더욱 선호했다. 그래서 베르캄프의 슈팅을 보면 왼발로 찰 각이 나오는데도 오른발 인사이드로 감아차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티에리 앙리 특유의 오른발 감아차기와 비슷한 폼으로 슈팅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1999년 4월 14일, 1998-99 시즌 잉글랜드 FA컵 맨유와의 준결승전에서 필 네빌의 반칙으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맨유의 전설적인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의 선방에 막혀 실축한 이후, 페널티킥 공포증도 생겼다. 이 경기 이후 그는 은퇴할 때까지 페널티킥을 한 번도 차지 않았다.[21] 그래서 아스날에서는 앙리가 주로 PK를 담당했고 앙리가 PK를 얻을 시에는 본인이 얻은 PK는 차지 않는 징크스가 있어서 보통 로렌이나 피레스가 찼다.
베르캄프의 천재적인 축구 지능과 수려한 플레이스타일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과 아스날의 전술에 매우 큰 영향력을 끼쳤고 팀과 상관 없이 그는 주변 동료들의 기량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특화된 선수였다.[22] 특히, 국가대표에서 베르캄프의 영향력은 당시 독보적이었는데 실제로 베르캄프가 유로 2000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 후 바로 치러진 국가대표팀 대회인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본선에 오르지 못하고 귀신같이 유럽 예선에서 탈락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AFC 아약스 (1986~1993)
- 에레디비시: 1989-90
- KNVB 베이커: 1986-87, 1992-93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86-87
- UEFA컵: 1991-92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3~1995)
- UEFA컵: 1993-94
- 아스날 FC (1995~2006)
- 프리미어 리그: 1997-98, 2001-02, 2003-04
- FA컵: 1997-98, 2001-02, 2002-03, 2004-05
- FA 커뮤니티 실드: 1998, 2002, 2004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93; 3위: 1992
- FIFA 올해의 선수 3위: 1993, 1997
- FIFA 100: 2004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8
- FIFA 월드컵 도움왕: 1998
- UEFA 유로 득점왕: 199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92
- UEFA컵 득점왕: 1993-94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91, 1992
- 네덜란드 올해의 재능: 1990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90-91, 1991-92, 1992-93
- PFA 올해의 선수: 1997-98
- PFA 올해의 팀: 1997-98
- FWA 올해의 선수: 1997-98
-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 1998-99
-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 2021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7년 8월 · 9월, 2002년 3월, 2004년 2월
- 아약스 올해의 선수: 1992-93
- 아스날 올해의 선수: 1996-97
- BBC 올해의 골: 1997-98, 2001-02
- IFFHS 세계 최고 득점자: 1992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7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CF 8위)
7. 베르캄프에 대한 말, 말, 말
만약에 누군가 나에게 '
기타리스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키스 리처즈가 떠오른다고 할 것이다. 또
화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요하네스 베르메르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
축구 선수 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데니스 베르캄프를 떠올릴 것이다.
- 요한 크루이프
- 요한 크루이프
나는 항상 내가 함께했던 선수들 중에 그가 최고의 파트너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뛰는 것은 스트라이커로서 꿈같은 일이다.
때때로 당신이 말할 필요가 없는 선수들이 있고, 당신은 그 선수들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데니스가 바로 그와 같은 경우의 선수이다. 경기장에서, 또는 TV로 시청 중이라면 데니스 베르캄프가 한 번의 패스로 상대 팀을 무너뜨릴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을 가진 선수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갑자기 그런 일들을 해낸다.
- 티에리 앙리
때때로 당신이 말할 필요가 없는 선수들이 있고, 당신은 그 선수들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데니스가 바로 그와 같은 경우의 선수이다. 경기장에서, 또는 TV로 시청 중이라면 데니스 베르캄프가 한 번의 패스로 상대 팀을 무너뜨릴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을 가진 선수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갑자기 그런 일들을 해낸다.
- 티에리 앙리
그를 지도하게 된 것은 정말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감독으로서 그런 선수가 있을 때에는 축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지시하지 않고 그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를 팀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는 항상 스트라이커였지만 스트라이커는 아니었다. 미드필더이지만 미드필더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컨드 스트라이커 포지션이 그의 자연스러운 포지션이라고 느꼈다. 그는 그곳에서 편안했으며 언제 내려와야 하는지 알았고,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재능뿐만 아니라 매우 뛰어난 지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 아르센 벵거
그는 항상 스트라이커였지만 스트라이커는 아니었다. 미드필더이지만 미드필더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컨드 스트라이커 포지션이 그의 자연스러운 포지션이라고 느꼈다. 그는 그곳에서 편안했으며 언제 내려와야 하는지 알았고,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재능뿐만 아니라 매우 뛰어난 지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 아르센 벵거
아스날을 유럽 무대로 이끈 '메시아'와 같았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아스날에 합류함으로서 우리는 유럽 탑 클럽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는 필드 전체를 지휘하는 놀라운 선수였다. 나로서도 그와 함께 뛰었을 때가 가장 득점하기 수월했다. 그는 훌륭한 골들을 넣을 뿐만 아니라 주변 동료들이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 이안 라이트
- 이안 라이트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공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건 베르캄프가 누구보다도 가장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세계 최고의 선수인 이유다.
- 엠마뉘엘 프티
- 엠마뉘엘 프티
그는 네덜란드 선수들 중에 가장 세련된 테크닉을 지닌 선수였다. 만약 프랑스가 아닌 네덜란드가 월드컵 우승을 해냈다면 베르캄프는 지네딘 지단 이상의 선수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 거스 히딩크
- 거스 히딩크
함께 뛰어본 최고의 동료가 누구냐고?
티에리 앙리는 최고의 공격수였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최고였던 선수는 베르캄프였다. 내 커리어를 통틀어 그처렴 기술적으로 최고인 선수를 본 적이 없었다.
- 로베르 피레스
- 로베르 피레스
함께 뛰어본 최고의 동료? 아마 대부분
티에리 앙리라고 답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아니다. 데니스 베르캄프가 가장 최고였다. 지금까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나이가 들었을때
거너스의 조직력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우린 무패우승과 더블을 해냈지만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하지 못했다. 만약 베르캄프의 전성기때 무패우승 멤버들이 함께 했다면 우린 모든 대회를 우승했을 것이다.
- 프레디 융베리
- 프레디 융베리
내가 신인이던 시절, 그를 상대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었다. 베르캄프는 가장 지능적이고 창조적인 공격수였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서 공을 뺏으려고 하면 그는 어느샌가 치명적인 킬러패스로 우리팀의 수비라인을 무너뜨리는 암살자와도 같았다.
- 리오 퍼디난드
- 리오 퍼디난드
'아이스맨'은 엄청난 선수였다. 데니스는 강하고 빠르며 신사적이고 우아한 필드 위의 마법사였다. 그는 예술적인 터치로 선수들에게 정확히 볼을 연결했고 직접 골도 넣을 수 있는 능력까지 갖췄다. 그는 최고의 전문가이며 선수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 솔 캠벨
- 솔 캠벨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축구를 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며 공을 가지고 있을 때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파악하는 능력을 갖췄다.
- 페리 그로브스
- 페리 그로브스
그는 내가 오랫동안 함께했던 선수들 가운데 최고의 선수이다. 그는 절대적이며 경이로웠다. 당신은
티에리 앙리나 이안 라이트가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베르캄프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 폴 머슨
- 폴 머슨
베르캄프는 마법사였다. 그의 플레이 중에 일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플레이였다. 그가 공을 터치할때면 마치 중력이 사라진 것 같았다.
- 페테르 슈마이켈
- 페테르 슈마이켈
8. 별명
별명은 Non- Flying Dutchman(날지 못하는 네덜란드인). 비행 공포증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한 저널리스트가 농담으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이 탈 비행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주장해 비행이 취소된 사건 때문에 비행 공포증이 생겼다고 한다. 94년 월드컵 당시에는 자신에게 공포증이 생긴 줄 몰랐었고 월드컵이 끝나고 인테르 시절에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를 아예 못 타는 것은 아니고 비행기만 타면 상당히 긴장을 해서 경기장에서 자신의 퍼포먼스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타는 것을 꺼렸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코치 생활을 하는 현재는 비행기를 타기는 한다고 한다.플라잉 더치맨에서 플라잉은 헤맨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므로 그 이름으로 인해 뛰어난 네덜란드 출신 운동선수에게 곧잘 붙는 별명이다. 예를 들어, 호너스 와그너나 요한 크루이프, 마르크 오버르마르스등. 독일계인 호너스 와그너가 왜 더치맨인지는 항목 참조.
베르캄프는 장거리 원정시에도 반드시 육로로 이동하기로 유명했다. 아스날의 유럽대회에서 베르캄프는 혼자 육로로 이동했다. 동유럽처럼 먼 곳은 아예 참여하지 않았고 프랑스나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북부등 원정경기는 참여했다. 마지막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는 꽤 중요한 경기였기 때문에 스페인 원정경기에서 벤치에 앉긴 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도 엔트리엔 들었는데 골키퍼가 퇴장당하면서 교체카드 1장을 썼고 팀이 베르캄프를 투입할 여건이 안되어 출전은 못했다. 그의 비행 공포증은 유로 2000 이후 비교적 빠른 국대 은퇴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국대은퇴 후 베르캄프-세컨탑 체제에서 클루이베르트-세컨탑 체제로 변환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2002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같은 조의 포르투갈과 아일랜드를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시망.[23]
그 밖에도 '아이스맨'[24] 등의 별명도 있으며, 애칭은 '베르기'.
9. 큰 대회에서의 불운
'큰 대회에서의 불운'이라는 제목이 시사할 수도 있는 바와 달리 베르캄프가 큰 대회나 경기에서 약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월드컵을 단 2회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6골 4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조별 리그보다 토너먼트에서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녹아웃 스테이지에서 기록한 득점이 대부분 선제골, 역전골, 동점골이었기 때문에 순도 역시 매우 높았다.오히려 조별 리그에는 몸이 덜 풀린 모습을 보여줬고 녹아웃 스테이지에서부터 본인의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편. 1994년 월드컵에서는 3골 1어시스트를 기록해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고 1998년 월드컵에서는 더 좋은 경기력과 더불어 3골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스타 팀에 선정됐다. 1994년 월드컵 때 조별 리그에서 모로코를 상대로 1골 1어시스트, 그리고 토너먼트인 16강전 아일랜드 상대로 1골을 기록했다. 8강전에서는 결국 해당 대회 우승팀이었던 브라질을 상대로 동점골을 득점했다. 1998년 월드컵 때 조별 리그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1골 1어시스트, 멕시코를 상대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토너먼트인 16강전 유고슬라비아전에서는 1골 그리고 8강 아르헨티나전에서는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비행 공포증이라는 뚜렷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넘어 스포츠 대회 통틀어서 가장 위상이 높은 월드컵에서 베르캄프는 맹활약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테크니션인 그였지만 정작 월드컵과 같은 굵직한 대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굳이 찾자면 UEFA컵 우승 2회가 전부. 동시대의 테크니션인 지네딘 지단이 FIFA 월드컵과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등을 전부 우승한 것과 대조되는 부분.
- FIFA 월드컵 - 처음 참가했던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오렌지 군단을 8강에 올려놓았지만 호마리우의 브라질에게 접전 끝에 3-2로 석패했다. 4년 뒤 그의 전성기이자 네덜란드 대표팀도 가장 전력이 강했다고 평가받던 1998 프랑스 월드컵 8강에서 그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지능적인 헤더 어시스트와 말도 안 되는 골을 기록하여 팀을 4강 진출로 이끌었으나 또다시 호나우두의 브라질을 만나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탈락했다. 1998년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을 인정받아 월드컵 올스타팀에 선정됐다.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 유로 1992에서 득점왕과 해당 대회 베스트 11안에 들었지만 팀은 덴마크에게 준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했다. 유로 1996에서는 스위스를 상대로 1골, 잉글랜드를 상대로는 1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8강전 프랑스를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패배했다. 유로 2000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일 것이다. 자신의 고향이자 친정팀인 아약스의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과하고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다. 개최국인 네덜란드는 유로 2000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였으며 죽음의 조를 통과하고 유고슬라비아를 6-1로 이기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4강전에서는 잔루카 잠브로타가 전반 34분 퇴장당하며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 이탈리아 특유의 빗장수비에 막혀 연장전까지 간 끝에 승부차기로 이탈리아에 패하고 만다. 베르캄프는 후반 15분에 클라렌스 세도르프와 교체되어 나갔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컵은 아약스 시절과 인테르 시절 각각 1번씩 우승했지만 챔피언스리그와는 인연이 없었다. 2000년대 초중반 아스날이 잘나가던 시절에도 유독 챔스에서 고전하던 이유 중 하나가 유럽 원정경기에서의 그의 부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 그에게도 베르캄프에게도 기회가 왔다. 조별 리그 툰과의 홈경기 1-1 상황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집념의 결승골을 넣을 정도로 챔스 우승의 열망을 나타냈다. 사실 마지막 시즌 그의 나이는 37세였고 주로 후반에 교체 출전했는데 챔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스날이 결승에 진출하자, 그도 파리까지 육로로 이동하며 결승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출전하지는 않았고, 아스날도 바르셀로나에 아쉽게 패하고 만다. 이 날의 결장으로, 공식적인 그의 마지막 아스날 소속 경기는 하이버리 고별전인 위건전이다. 참고로 아스날은 99-00 시즌에 UEFA컵을 준우승했는데 만약 이때 우승했더라면 베르캄프는 서로 다른 3개의 클럽에서 우승하는 기록을 세울수도 있었다.
10. 여담
-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에 테크니션이라는 특성에, 언론과의 접촉이 적어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25] 사실 트래시 토크와 교묘한 반칙성 플레이를 곁들인 몸싸움에 매우 능했다.[26] 대표적인 예로는 비신사적인 파울로 안드레 오이여르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힌 적이 있었다. 중요한 점은 언제나 그런 일을 절대로 심판에게 찍히지 않는 범위에서만 행했으며, 그를 통해 결정적인 순간에 심판에게서 좋은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나름의 노하우라면 노하우고 능력이라면 능력. 극상의 터치와 발재간, 센스에다가 이런 어둠의 기술(?)이 있었기에 수비수들에게는 더욱 공포와 짜증, 분노를 유발했다.[27]
- 이안 라이트와 룸메이트였다는데 정작 성격은 정반대였다고 한다. 이안 라이트는 활달하고 쇼맨쉽도 있는 성격인데 반해 데니스 베르캄프는 위에 적혀있듯 차갑고 차분한 편이었다. 아르센 벵거 감독의 타이트한 식단 관리도 베르캄프는 군말없이 따르고 거뜬하게 적응해냈지만 라이트는 좀 시무룩했다고 한다.[28] 한번은 벵거의 식단에 지친 라이트가 몰래 티백을 숨겨들어와 방에서 마시려고 하자 베르캄프는 간만에 티를 마실 생각에 신난 라이트에게 감독님은 우리가 티 마시는걸 싫어한다, 우리 모두 감독님을 따르고 있는데 넌 우리를 실망시킨다며 타일렀고 라이트는 결국 내적 갈등 끝에 티를 마시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
인테르 시절은 보통 흑역사 취급되며,
아약스와
아스날의
레전드로 대우받고 있다. 베르캄프의 은퇴경기도 에미레이츠 개장경기로 치러진 아약스 대 아스날전. 참고로 아스날의 홈구장인
에미레이트 구장에는 그의
동상도 있으며, 동상의 모습은
퍼스트 터치의 대가답게 그의 환상적인
트래핑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상단에 첨부된
뉴캐슬전에 나온 경이적인 볼 터치 모습을 표현했다.[29]
- 비행기 공포증 탓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접근하는 팀이 극히 적었다고 한다. 아스날과는 적절한 주급에 계약을 해나갔는데 은퇴할 때까지 1년씩 단기계약을 했다.
- 은퇴 후 AFC 아약스의 코치로 활동하면서 또 다른 네덜란드의 레전드인 프랑크 더부르 감독을 보좌했다. 위의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 동영상에서 끝내주는 롱패스를 날리는 바로 그 선수.
- 챔피언쉽 리그의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에서 뛰었던 로날드 베르캄프는 그의 조카라 한다. 현재는 네덜란드 2부 리그 팀에서도 후보에 그치는 중이다.
- 아스날에서의 활약 때문에 아약스에서의 활약이 묻히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베르캄프의 순수기량만 보면 발롱도르 2,3위를 차지한 아약스와 인테르 초창기 시절이 전성기라 볼 수 있다. 참고로 베르캄프는 반바스텐보다 겨우 4살 어리고 앙리보다 8살이나 많다. 다만 1997년 아스널에서 활약할 때는 발롱도르 다음으로 가장 권위가 높은 FIFA 올해의 선수상에서 3위를 기록하며 브론즈 트로피를 수상했다. 이때 발롱도르는 아쉽게도 4위로 포디움에 들지 못했다.
- 본인은 향후 감독보다는 개인 시간이 보장되는 코치로 축구계에서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 1993년 결혼해서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장녀 에스텔이 도니 판더베이크와 교제중이며 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30] 배르캄프에게는 손녀. 1998년 생 아들 미첼 베르캄프도 축구선수이다.
- 꽤 높은 공대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훌륭한 투자자이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로 벌었으며, 네덜란드 부자 500위 안에 들어간다.
-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을 5:0으로 깨부수었던 네덜란드의 핵심 선수 중 한명이였다. 그렇다 보니 한국 국대 축구를 보려고 TV를 보았다가 이 당시 베르캄프의 플레이에 충격을 받고 그의 팬이 된, 더 나아가서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아스날 FC의 팬이 된, 박지성보다 이전의 0세대 해외축구 팬들이 제법 된다.[31]
- 국가대표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승부차기와는 지지리도 인연이 없다. UEFA 유로 1992에서는 덴마크에게 4강전에서 승부차기로 탈락, UEFA 유로 1996에서는 프랑스에게 8강전에서 승부차기로 탈락, UEFA 유로 2000에서는 이탈리아에게 4강전에서 승부차기로 탈락, 그리고 본인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던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도 브라질에게 4강전에서 승부차기로 탈락했다. 정작 베르캄프 본인은 페널티킥을 모두 성공시켰기 때문에 더 억울할 수도 있다.
-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인스타에 가 보면 아내와 함께 찍은 꿀떨어지는 사진들이 꽤 있다, 애처가에 모범적인 아버지인 듯 하다. 또한 수많은 수비수들을 미친 듯한 퍼스트터치와 개인기로 귀신같이 피해다닌 그였으나, 안타깝게도 탈모는 피하지 못하여 현역 시절보다 머리숱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본판은 어디 안 가는지 간지나는 미중년이다.
- 포포투가 선정한 역대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축구 선수 순위에서 5위를 차지했다. 1위는 당연히 요한 크루이프 #
11. 같이 보기
1
반 데 사르 · 2
레이저허르 · 3
스탐 · 4
F. 더 부르 ⓒ · 5
누만 · 6
용크 · 7
R. 더 부르 · 8
베르캄프 · 9
클라위버르트 10 세도르프 · 11 코쿠 · 12 젠던 · 13 오이여르 · 14 오버르마르스 · 15 보하르더 · 16 다비즈 · 17 V. 호이동크 18 더 후이 · 19 V. 브롱크호르스트 · 20 빈터르 · 21 하셀바잉크 · 22 헤스프 |
거스 히딩크 |
1
반 데 사르 · 2
레이저허르 · 3
스탐 · 4
F. 더 부르 ⓒ · 5
젠던 · 6
세도르프 · 7
코쿠 · 8
다비즈 · 9
클라위버르트 10 베르캄프 · 11 오버르마르스 · 12 V. 브롱크호르스트 · 13 콘터르만 · 14 V. 포센 · 15 파울 보스펠트 · 16 R. 더 부르 · 17 V. 호이동크 18 더 후이 · 19 누만 · 20 빈터르 · 21 마카이 · 22 베스터르펠트 |
프랑크 레이카르트 |
[1]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장신 국가인 네덜란드의 남성 평균 신장과 거의 같다.
[2]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5위
[3]
Denis Law.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트라이커로 1964년
발롱도르 수상자.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등과 더불어 맨유의
1960년대 초기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경신하기 전까지 맨유의 한 시즌 리그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다.
[4]
여담으로 데니스 베르캄프가
태어난 해
데니스 로는
유러피언컵에서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5]
2차전은 결장했다.
[6]
베르캄프는 1993년까지 아약스에 있었지만 1993년 발롱도르 2위, 1993년 FIFA 올해의 선수상 3위를 기록한 것은 인터 밀란 소속이였을 때다.
[7]
베르캄프는 계약 당시 자신이 최고로 좋아하는 위치였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의 출전 보장과 자신의 절친한 친구
오베르마스의 이적을 단서로 달았고, 아스날이 이를 흔쾌히 수락하며 아스날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아스날은 2년 후에 아약스로부터 오베르마스를 데려옴으로서 단서조항을 지켰다. 또 오베르마스도 아스날에서의 활약이 엄청났기 때문에 양쪽 다 윈-윈이었다. 이적료도 750만 파운드로 당시로써는 꽤 쳐준 편. 베르캄프의 영입 하나만으로 클럽 과도기에 스쳐간 감독 중 한 사람 정도인 브루스 리오치 감독은 아스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8]
이안 라이트는 아스날이 베르캄프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학교 첫 날을 기대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훈련하는 게 너무나 기다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고.
[9]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에서 주최한 20 SEASON AWARDS 이벤트에서는 베르캄프의 골이 2위로 선정됐다. 여기서 1위는 루니의 오버헤드킥 골.
[10]
프리미어 리그에서 이달의 선수상을 4번 받았다. 1997년 7월, 1997년 8월, 2002년 3월, 2004년 2월
[11]
공격수일수록 벵거는 노장에 대한 신뢰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캄프만큼은 마지막까지 주전으로 기용했다.
[12]
원래는 166도움이었는데 프리미어리그에서 어시스트 집계 방식을 대폭 변경하고 해당 기준이 소급적용돼 베르캄프의 어시스트 기록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
[13]
당시 0-1로 패배.
[14]
한국 vs 네덜란드 전에서 신문선이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
[15]
당시는 퇴장당하면 2경기 징계였다. 당시 같은 공격수였던 클루이베르트도 조별리그 1차전인 벨기에전에서 퇴장당하며 한국과 치른 2차전은 물론이고 멕시코와 치른 3차전도 나오지 못했다.
[16]
21세기 초반에 발렌시아에서 짠물 수비를 이끌며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과 리그 2번 우승, UEFA컵 우승을 이룬 명 수비수. 국대에서도 아르헨티나의 센추리 클럽 멤버이자 당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 단신 센터백으로
파비오 칸나바로와도 흔히 비교되곤 했다.
[17]
베르캄프의 언급에 따르면, 아약스 시절 동료였을 때부터 둘 사이에 간간이 하던 콤비 플레이였다고 한다.
[18]
1위는
반 페르시, 2위는
훈텔라르. 3위는
클루이베르트.
[19]
나머지는
라울 곤살레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20]
지금의 성격이 조금 달랐던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의 벵거볼은 '두두다다'로 대변되는, 지공보다 속공이 중시되는 빠른 템포와 패스로 상대방을 공략하는 스타일이었고 그 핵심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 베르캄프가 있었다. 하지만 베르캄프의 은퇴와
비에라 &
앙리 등 주축 선수들의 이적으로 벵거볼은
세스크 파브레가스 &
토마시 로시츠키 등을 통해 지공으로 변화하게 된다.
[21]
이 경기에서
라이언 긱스의 그 유명한 매직 드리블이 나왔고 이 경기를 승리한 맨유는 FA컵 우승은 물론, 리그와 챔스까지 석권하면서 컨티넨탈
트레블을 달성했다.
[22]
그와 발이 맞지 않았던 선수는 인테르에서 같이 뛰었던
루벤 소사 정도, 심지어 아스날에서 역대급으로 망한
프란시스 제퍼스조차 베르캄프와 함께 출전할 때는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23]
국가대표 감독
루이 판할의 삽질도 큰 몫했지만...이 당시 클루이베르트가 뛰던 바르샤에서도 클루이베르트는 세컨탑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는데, 국대와 클럽 모두 하락세를 보이고 말았다. 이후 커리어는 정말 별 볼 일 없다.
[24]
냉정침착한 성격과 골 결정력에, 영화 '탑건'의 발 킬머와 닮아서.
[25]
이 때문에 인터 밀란 시절 언론과 꽤나 불편한 관계였다. 베르캄프는 자신이 정한 날에만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길 원했지만 이탈리아 파파라치들은 그걸 원하지 않았고 베르캄프에게 상당한 조롱과 압박을 가했다. 2시즌만에 인터 밀란을 떠나게 된 이유 중 하나.
[26]
대표팀 후배이자 라이벌 팀 주전 스트라이커도 비슷한 장점(?)이 있었다.
[27]
사실 이런 음습한 기술은
VAR이 없던 시절에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을 이겨내야 했던 공격수들에게는 일종의 생존요령이기도 했다.
필리포 인자기의 오버액션과 심판에게 징징대기,
위르겐 클린스만의 다이빙 같은 것도 같은 맥락.
[28]
사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닌게 술, 초콜릿 등을 금지한건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하지만 소금간을 비롯한 시즈닝도 안돼있는 삶은 닭가슴살을 그냥 생수와 먹게 했고 무엇보다 영국인들의 생필품이라 할 수 있는 티까지 금지시켰으니 선수 입장에서는 답답할만 하긴 하다.
[29]
여담으로 위의 해당 사진은 02-03시즌 프리미어 리그 27라운드(2003년 2월 9일) 일정에 치러졌던 경기이다. 그리고 장소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였으며, 베르캄프를 상대하는 선수는
아일랜드 국적의
앤디 오브라이언(Andy O'Brien)이다.
[30]
판더베이크의 우상이 베르캄프이다. 성공한 덕후인 셈.
[31]
대표적으로
박종윤 캐스터가 있다.
분류
- 1969년 출생
- 암스테르담 출신 인물
- 네덜란드의 남자 축구 선수
- 공격수
- 세컨드 스트라이커
- AFC 아약스/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아스날 FC/은퇴, 이적
- 네덜란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네덜란드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6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986년 데뷔
- 2006년 은퇴
- P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FW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