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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대한민국 제43대 국방부장관 | |||
<colbgcolor=#00205c>
대한민국 제2대 국가안보실장 김관진 金寬鎭 | Kim Kwan-jin |
|||
출생 | 1949년 10월 18일[1] ([age(1949-10-18)]세) | ||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2] | |||
거주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3] | ||
본관 | 경주 김씨 | ||
현직 |
재단법인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이사장 국방혁신위원회 민간위원[4] |
||
재임기간 | 제20대 제3야전군사령관 | ||
2005년 4월 4일 ~ 2006년 11월 17일 | |||
제33대 합동참모의장 | |||
2006년 11월 17일 ~ 2008년 3월 25일 | |||
제43대 국방부장관 | |||
2010년 12월 4일 ~ 2014년 6월 29일 | |||
제2대 국가안보실장 | |||
2014년 6월 1일 ~ 2017년 5월 2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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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05c><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김영문 | |
배우자 | 김연수 | ||
자녀 | 슬하 3녀 | ||
학력 |
전주중앙국민학교 (
졸업) 전주북중학교 (졸업) 서울고등학교 (20회 / 졸업) 육군사관학교 (28기 / 학사) |
||
종교 | 천주교 (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 ||
경력 |
제43대
국방부장관 (
이명박 정부) 제2대 국가안보실장 ( 박근혜 정부) |
||
군사 경력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72년 ~ 2008년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28기)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합동참모의장 | ||
주요 보직 |
제3야전군사령관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제2군단장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제35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전략기획처장 육군본부 비서실장 육군교육사령부 전투개발차장 제7보병사단 부사단장 합동참모본부 군사전략과장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여단장 제15보병사단 작전참모 제15보병사단 제50보병연대 2대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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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이자 정무직 공무원.1949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태어나 전주북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2년 육군사관학교 제28기로 소위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을 지냈다. 2008년에 예편했으며, 최종 군 계급은 대한민국 육군 대장이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으로 전임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사임하자, 후임으로 제43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 2014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재임 당시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을 저질렀다. 퇴임 이후 군형법상 정치관여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을 받았으나[5] 곧바로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되었다.
2023년 윤석열 정부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원회의 부위원장급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
2. 생애
2.1. 육사 생도 시절
[월간조선] 김관진과 독일 육사 출신들학업 우수자로 육사 기수 중 단 2명[6]만 선발되던 서독 육군 파견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 육사 1학년 수료 후인 1969년에 서독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독 군사유학생들은 도착 후 우선 서독 국방부 산하 군사언어학교에서 6개월간 독일어 연수를 받고, 2개월간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병과를 결정한 뒤 사관학교 교육을 받았다. 김관진은 같이 유학을 떠난 동기 박흥환[7]과 함께 보병 병과를 선택하여 뮌헨에 있었던 독일 제3 육군사관학교(Heersoffizierschule III)[8]에 배치되었다.[9] 김관진이 수학하던 제3 육군사관학교에는 한국과 비슷한 처지의 후진국 출신 생도가 여럿 유학 중이었고, 그들 중 한 달 60달러로 생활해야 했던 김관진도 졸업할 때까지 그럴듯한 식당에서의 식사 한 번 못 해봤다고 한다. 그리고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1,000마르크를 모아 중고 폴크스바겐 승용차를 사서 파리 등 유럽 여행을 해보았다고 한다.
이 당시의 서독 육군사관학교는 순수한 장교 양성기관으로, 과정을 모두 마치면 장교로 임관은 하되 학사 학위는 주지 않았다.[10] 이 때문에 독일 군사유학생들은 동기 육사 생도들과 달리 자동으로 학사 학위를 받지 못했다. 대신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김관진에게 서울대학교 위탁 교육[11]으로 학위를 딸 것을 제안했으나, 김관진은 자신이 "군인이 되기 위해 육사에 갔지, 서울대 가려고 육사를 간 게 아니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당 기간 최종 학력이 '고졸'이었으나, 한참 뒤에야 정부에 문제를 제기해 대학 졸업 학력을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2.2. 육군 장교 시절
2.2.1. 주요 경력
군 내에서 상당한 엘리트로 통했다. 독일 유학파, 수기사나 서울대 학군단, 대통령경호처/비서실 근무 경력, 고위직 진급 후 거친 참모 경력 등이 모두 군에서 인정받은 엘리트의 상징과도 같은 직책이다. 사실 김관진 외에도 독사파(독일육사파)는 대개 엘리트였다.[17] 류제승, 김태영, 박찬주 등. 이들은 생도 시절 3년간 국외에 있었고 이후로도 독일 병과학교를 다녀오고 독일에 파견되기도 하는 등 국제감각이 있던 터라 군내 정책/전략 전문가가 많았고 김관진도 그런 경우다. 김태영은 합참 전쟁기획과장, 류제승과 박찬주는 김관진과 같이 합참 군사전략과장 출신이다.
2.2.1.1. 합동참모의장
2006년 11월 17일, 군의 최고 선임자인 합참의장이 되었다. 이후 1년 4개월 만에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교체 이후 이루어진 군 인사에서 김태영 제1야전군사령관에게 직을 이임하였다.2.3. 국방부장관
2010년 12월 4일, 연평도 포격전 이후 김태영 장관의 후임 국방장관이 되었다. 인사청문회에서 증여세나 건보료 탈루 등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큰 문제 없이 통과되었다.취임 초기부터 퇴임할 때까지 북의 도발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지시하고, 전군에 선조치 후보고를 강조했다. #
2010년 12월 4일, 취임식 이후 북한의 포격도발 현장인 연평도를 방문했다. #
국장장관 재임시절 국군 사이버사령부를 통해 자신을 영웅화하는 합성사진들을 몰래 만들어 뿌렸다.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V>,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의 포스터를 이용한 포스터가 공개되었다. #
2011년 5월 27일, 축사를 통해 청해부대 6진 최영함의 귀항 #을 축하했다. #
2011년 7월 1일, 제5보병사단 최전방의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방문하였다. # #
2012년 3월 15일 핵안보정상회의를 준비중인 코엑스를 방문해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관계관들을 격려했다. #
2012년 10월 15일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
2013년 3월 22일 후임 국방장관 후보자인 예비역 육군대장 김병관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나 자진 사퇴함으로써, 김관진 장관이 유임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국방부 장관이자 박근혜 정부의 첫 국방장관으로서 국방업무를 계속 총괄하게 되었다.
2013년 4월 19일 TV조선은 북한에서 김관진 실장을 '김관진놈'이라고 부르며, 훈련 때 목표물에 사진이나 그림을 붙여놓고 훈련한다고 보도했다. #
2013년 4월 2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교전 중 사망한 김오랑 중령에 대한 무공훈장 수여에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18]
2013년 11월 1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유승민 국방위원장의 질문에 북한이 대규모로 장사정포 공격에 나설 징후가 있을 경우 선제 타격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 #
2013년 11월 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정책질의에 출석해 "우리가 단독으로 전쟁을 하면 북한을 충분히 응징할 수 있느냐"는 새누리당 이장우 의원의 질문에 "전쟁 나면 북한은 멸망"한다고 답했다. # #
2014년 4월 6일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군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로 뒤늦게 논란이 되자, 8월 14일 국방부는 당시 김관진 장관이 관련 내용을 보고받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
2014년 6월 10일 국방부장관 주관 국방 방산발전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
2014년 6월 21일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이후 김관진 장관은 집단 따돌림 현상이 군에 존재한다고 발언했다. # 관심병사가 늘어난 이유가 컴퓨터 때문이라고 답하기도 했다.[19] #
이 시기 김관진 장관은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관여 활동에 개입했다.
2.4. 국가안보실장
2014년 6월 1일 세월호 참사 수습 실패로 인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 사퇴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후임 장관 인선이 늦어져 한민구 전 합참의장이 신임 장관에 임명될 때까지 한동안 장관직과 안보실장직을 겸임하였다. 2015년 8월 22일 판문점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바 있다.2016년, 국회운영위원회 회의에서 THAAD 배치를 발표했다. #
2.5. 국방혁신위원회 민간위원
2023년 5월 10일, 윤석열 정부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급 민간위원으로 내정되었다. # 명목상 윤석열 대통령이 위원장을 겸직하지만, 전임 국방장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관진이 실질적인 위원장 역할을 할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군형법 및 형법에서 처벌하고 있는 정치관여 등 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사실상 유죄가 확정된 상태로 여전히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형사재판이 진행 중인데[20] 위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아직 유죄의 확정판결이 나지 않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2023년 5월 11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은 국방혁신위원회 1차 회의를 주재하고 김관진 등 민간위원으로 위촉된 8명의 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했다. # 벌금형 확정 즉시 대통령 권한으로 사면해 버린 김태효와 달리, 김관진은 실형 선고의 가능성이 높은 만큼(2심에서 징역 2년 4월을 선고했다) 계속 위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참고로 국방혁신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정( 대통령령)에 따르면, 위원의 임기는 2년이며, 유죄의 확정판결이 나올 경우 위원직에서 당연히 해촉되는가의 여부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최종적으로 실형이 확정되는 경우는 위원직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논의의 여지가 없겠지만, 징역형의 선고유예,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이 확정되는 경우에는 극단적으로는 그냥 위원직을 유지할 수도 있다.
2023년 8월 18일,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댓글 공작' 등 정치관여 혐의와 대선 개입 수사를 무마하려 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 방어권 보장 및 도주우려 없음을 이유로 법정구속은 되지 않았지만 김관진의 공직 생활에 빨간불이 켜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김관진 전 장관이 국방혁신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재상고를 포기함으로써 징역 2년의 형이 확정됐다. #
2024년 2월 6일, 판결이 확정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됐다. 수감 0일…김관진·김기춘, 사면 닷새 전 수상한 ‘상고 포기’ 아이러니하게도 사면을 결정한 윤석열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시절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을 맡아 당사자를 감옥으로 보냈던 사람이다.
3. 논란 및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김관진/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4. 경력
- 1972. 4.~1973. 2. 32사단 수색중대 소대장
- 1973. 2.~1973. 6. 육군보병학교(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구. 초등군사반)) 교육
- 1973. 6.~1974. 3. 12사단 52연대본부 전투지원중대 소대장
- 1974. 3.~1976. 1. 육군종합행정학교 101학군단 교관
- 1976. 2.~1977. 4. 서독 전투병과학교(대위 지휘참모과정(구. 고등군사반)) 교육
- 1977. 5.~1978.11. 수경사 203 차량화보병대대 3중대장
- 1978.11.~1981. 3. 보병학교 전술학처 전술교관
- 1981. 3.~1982. 2.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
- 1982. 2.~1983.10. 대통령경호실 경호실요원(파견)
- 1983.10.~1985.12. 15사단 50연대 2대대장
- 1985.12.~1988. 1. 15사단 작전처 작전참모
- 1988. 1.~1989. 2.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대책계획 총괄장교
- 1989. 2.~1989.12.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교육
- 1990. 1.~1990. 9. 국방부 818기획단 법규과장
- 1990. 9.~1992. 3.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여단장
- 1992. 3.~1993.12. 합참 전략기획본부 군사전략과장
- 1993.12.~1996. 1. 대통령 비서실 파견
- 1996. 1.~1996. 1. 7사단 부사단장
- 1996. 1.~1996.11. 교육사령부 전투개발부 차장
- 1996.11.~1998. 4. 육군본부 비서실장
- 1998. 4.~1998.11. 육군본부 전력기획참모부 전략기획처장
- 1998.12.~1999. 4.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 전략기획처장
- 1999. 4.~2000.10. 35사단장
- 2000.10.~2002.10.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 2002.10.~2004. 5. 2군단장
- 2004. 5.~2005. 4.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 2005. 4.~2006.11. 3군사령관
- 2006.11.~2008. 3. 합동참모의장
- 2008. 4.~2010. 7.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자문위원(비상근)
- 2010. 12. ~2014. 6. 국방부 장관
- 2014. 6. ~ 2017. 5. 국가안보실장
- 2023. 5. ~ 국방혁신위원회 위원(부위원장급)
5. 상훈
- 1983. 10. 보국훈장 삼일장
- 1989. 4. 대통령 표창
- 1997. 10. 보국훈장 천수장
- 2003. 10. 보국훈장 국선장
- 2008. 4. 보국훈장 통일장
- 2008. 미국 정부 공로훈장
6. 여담
- 2011년 5월 2일 트위터 계정을 만들고 공식적으로 트위터 활동을 시작했다. 민감한 정보와 현안을 제외한 다양한 국방정책에 대해 장관 본인이 직접 국민과 소통의 장으로써 트위터를 활용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2012년 1월 2일 국방장관의 트위터로 7사단의 한 병장이 직접 소원수리 멘션을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취임한 원홍규 사단장이 전방 격오지 사단의 휴가에 1일씩 붙여주던 '1야전군 위로 포상'과 함께 잡다한 포상 휴가들을 일거에 폐지했기 때문이었다.[21]
- 김 장관의 집무실 의자 뒤편 벽에는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사진과 함께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군사보좌관 김격식 등 북한군 수뇌부의 사진이 A4용지 크기로 걸려있었다고 한다.[22] 이러한 적들의 사진이 장관의 집무실에 걸려있다는 것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적이 장관의 등을 노려보고 있는 만큼 한시도 적을 잊어선 안 된다는 마음가짐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 2012년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과 관련해 "국민의 이해와 필요성이 있다면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 2013년에 그랜저 HG로 차를 바꿨는데, 그전에 타던 95년식 기아 크레도스를 중고로 내놓으려다 폐차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차량 감정가가 고작 50만 원이었기 때문. 1기수 선배인 김장수는 국방부 장관 청문회때 자가용이 크레도스의 전신인 기아 콩코드로 밝혀지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김장수 취임시점에 후신격인 로체조차 끝물이었고 곧 K5가 로체 후속으로 출시되었다.[23] 한편 새로 산 그랜저는 고작 1년만에 다시 되팔았다.
- 참여정부 시절 장성으로서 10년이 넘도록 중용된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서 참여정부에서 국방개혁과 전작권 반환을 적극 찬동하다가 기조가 바뀐 보수정부에서는 180도 바뀐 모습을 보여주는 줏대없는 인물이라는 공격이 있었다. 하지만 문민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제복군인이 정부 방침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정권이 바뀌었다고 직을 던지고 정계에 들어오는 식으로 정치 성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쪽이 군인의 본분을 저버린 채 자연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 2017년 5월 29일 주진우,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 안민석 의원이 출연한 SBS 라디오 방송 중, 노승일 전 부장이 “내가 ‘박원오 원장님이 너( 정유라)네 아버지( 정윤회)랑 형님 동생 한다는데?’ 그러자 유라가 ‘웃기지 말아요. 우리 아빠는 김관진 아저씨하고만 형님동생이에요’라고 말해서 저는 ‘김관진? 국방부장관?’ 이렇게만 생각하고 그다음부터는 질문 안 던졌다”는 주장을 꺼냈다. # 이어서, 노승일 전 부장은 당시 정유라의 남편( 신주평)의 대한 병역비리에도 관련되었다는 주장을 했지만, 이미 신주평의 병역 비리 의혹은 안민석 의원의 실수임이 밝혀졌다. 신주평 본인은 2016년 12월 5일 채널A 단독인터뷰에서 이를 부인하면서 본인은 처음부터 현역입영 대상 판정을 받았으며, 1회 연기했으며 2017년에 입대할 예정이라고 현역병 입영장까지 공개하며 밝혔다. #
- 윤석열 대통령의 청와대 용산 이전을 적극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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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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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장관 | 김도연 → 안병만 → 이주호 | |
외교통상부장관 | 유명환 → 김성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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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장관 | 원세훈 → 이달곤 → 맹형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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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수산식품부장관 | 정운천 → 장태평 → 유정복 → 서규용 | |
지식경제부장관 | 이윤호 → 최경환 → 최중경 → 홍석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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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장관 | 이만의 → 유영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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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임장관 | 주호영 → 이재오 → 고흥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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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4><colcolor=#C9252B> 현오석 → 최경환 → 유일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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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숙 → 이주영 → 유기준 → 김영석 | ||
국민안전처장관 | 박인용 |
}}} }}}}}}}}} |
8. 관련 문서
[1]
음력
8월 27일.
[2]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3]
국가안보실장 퇴임 이후에도 이 곳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4]
부위원장급
[5]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2심에선 징역 2년 4개월을 선고받았으며, 최종적으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재상고를 포기함으로써 그대로 형이 확정됐다.
[6]
1965년부터
서독 군사유학이 시작되었는데, 1965년(24기)~1969년(28기)에는 기수당 2명씩이 선발되었고, 1970년(29기)부터 기수당 1명으로 줄었다. 28기에서는 김관진과 박홍환이 선발되었고, 29기에서는
김태영이 선발되었다. 당시 후진국이던 한국의 육군사관학교와 비교가 안 되는 군사강국인 독일 육사에 생도를 보낼 귀한 기회였기에 여기 선발되는 생도는 정말 아주 우수하다고 판단된 인재였고, 초기에는 군번 1번을 부여했을 정도이니 사실상 육사 수석 졸업자보다 뛰어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도 독일 육사 출신은 능력을 인정받은 엘리트가 많아 대부분이 장군으로 진급했다.
[7]
소장으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사단장 역임 후 예편
[8]
대한민국의 경우
육군사관학교와
3사관학교가 선발, 교육과정 등에서 차이가 있으나, 독일의 제1(
하노버), 제2(
함부르크), 제3(뮌헨) 육군사관학교는 위치만 달랐지 대등한 교육기관이었다. 이들 세 사관학교는 1974년에 통합되어
하노버(1998년에
드레스덴으로 이전)의 'Offizierschule des Heeres'가 된다.
[9]
다음 29기로 유학을 간
김태영은 일부러 두 선배가 없는
함부르크의 제2 육군사관학교로 자원해 갔다고 한다.
[10]
원래 장교 양성과정과 학위 과정이 분리되어 있던 독일군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이후 1974년에
미국이나
대한민국처럼 장교 양성 + 학위 과정이 결합된 교육기관으로 기존 제2, 제3 육군사관학교를 연방군대학(Universität der Bundeswehr)으로 개편하였다.
[11]
역시 우수한 군인에게 제공되는 코스다.
[12]
당시 학군 13기를 지도했는데, 해당 기수 중
정몽준이 있었다.
[13]
이 시기 수기사의 차상급부대인
제7기동군단장
이현부
중장(육사 20기)이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순직했다.
[14]
후임자가
김태영 전 국방장관이다. 김태영은 김관진과 똑같은 독일 육사 출신, 즉 독사파이며 군내 기획통으로 꼽혔다. 김관진에게는 합참의장 직의 후임자이자 국방장관 직의 전임자이다.
[15]
당시
이라크 파병의 총괄자였던 터라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지며 꽤 주목받았다. 2004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김선일 피랍 사건 당시 이라크 파병과 부대 경계 회의 등에 참여했었다. 10월 14일에는 국회 국방위원회에 가서 동해안에서
잠수함 추정 물체 출현 첩보에 대해 보고했다.
[16]
2005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자이툰 부대 방문을 다룬 '대통령님, 한번 안아보고 싶습니다'에 저자로 참여했다.
[17]
독일 유학 선발자는 정말 우수한 자원이었기에 육사 수석 졸업자와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봤다고 한다.
[18]
김관진 장관은 김오랑 중령의 행위가 "법 해석 자체가 무공훈장 요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는데, 12.12 군사반란이 전시에 준하는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고, 당시 총격 상황에서 지휘관 경호가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전문가들 의견을 들어 봐야 할 성격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2014년 김오랑 중령은 무공훈장이 아닌 보국훈장에 추서되었다.
[19]
"요즘에 주로 과거에 비해서 컴퓨터를 친구삼아 가지고 또 일부 고립된 상태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관리대상인 이런 병사들이 과거보다 많습니다."
[20]
대법원에서 일부 무죄취지 파기환송했다. 즉 나머지 부분은 대법원이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21]
당시 위로포상의 삭감 때문에 그 병사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의 분노도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이 포상휴가 삭감은 7사단이 소속된
제2군단 내의 전 부대에 전파되기까지 했다. 이에 김 장관은 알았다며 사실 확인 후 시정할 것이라는 답을 보냈다. 해당 병사는 상급 지휘관들에게 분노를 샀다.
[22]
우리나라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북한의 인민무력부장 김영춘은 2000년대 중반 후계자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2004년 사망)의 군내 우상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또한 김격식은 2005년 김 장관이 합참 작전본부장을 마치고 서울과 수도권 방어를 주 임무로 하는
제3야전군사령관을 맡았을 때 반대편에서 서울과 경기 북부를 공격대상으로 하는 2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군 관계자는 "당시 두 사람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김 장관이 2006년 11월 ~ 2008년 3월 합참의장이었을 때 김격식은 김영춘에 이어 군 총참모장(2007년 4월 ~ 2009년 2월)을 맡았다. 김격식은 이어 황해도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관할하는 4군단장으로 내려왔는데, '강등'이라기보다는 전권을 갖고 NLL을 무력화하라는 임무를 띠고 왔다는 게 우리 군의 분석이다. 2009년 11월
대청해전, 지난해 11월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김격식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2010년 3월의
천안함 폭침은 그가 김영철
정찰총국장과 함께 일으킨 도발이라고 한다. 이렇듯 대남도발에 많은 전과를 올려 김정일에게 상당한 총애를 받아왔고 일찌감치 후계자인 김정은의 측근으로 분류돼 2011년 9월 그의 군사보좌관으로 승격되었다.
[23]
다만 김관진이나 김장수 둘 다 생각보다는 자차를 안 탔을 가능성이 크다. 대체로 장성들은 평일에 업무 때문에 관용차를 타지 자차는 주말 빼면 거의 안 탄다. 그래서 개인 차를 영관급 때 사 뒀다가 장관이 될 때까지 안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