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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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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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愉
(268 ~ 342)
1. 개요
동진의 인물. 자는 경강(敬康). 회계군 산음현 사람. 공축(孔竺)의 손자, 공념(孔恬)의 아들.2. 생애
조상은 대대로 양나라에 살았다가 증조부 대부터 회계군으로 피난을 가 정착했으며, 조부부터 아버지까지 오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280년에 아버지 공념을 잃었고 조모를 봉양하는 효도로 유명해 같은 군 사람인 장무, 정담과 함께 명성을 떨쳐 회계삼강으로 불렸는데, 이는 세 사람 모두 자가 강(康)으로 끝나기 때문이다.오나라가 망하자 낙양으로 이주했다가 혜제 말기에 회계로 돌아가다가 강회 지역에서 석빙의 난에 휘말려 봉운이 세력에 들이려고 강요하자 순종하지 않아 죽이려 않으며, 장통영이 구해주자 면하게 되었다. 회계의 신안산에 은거해 성을 손(孫)으로 바꾸고 농사를 하면서 공부를 해서 향에서 평판이 좋았으며, 갑자기 떠나자 사람들이 그를 신인이라 여겨 사당을 세웠다.
영가 연간에는 사마예가 그를 들이라 했지만, 공유의 고향 친족들은 그를 찾지 못했고, 건흥 원년에 이르러 부름에 응해 승상연을 지냈으며, 이어서 부마도위, 참승상군사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가 50세였다.
낙양이 함락되어 강남(중국)에 사마예가 새 정권을 세웠지만, 강주자사 화일은 낙양 조정의 명을 듣겠다며 사마예를 따르지 않았고, 화일을 토벌한 공로로 여불정후에 봉해졌다. 317년에는 중서랑을 겸임했다.
당시 조협과 유외가 권력을 잡고 사마예의 중용을 받으면서 사마예가 왕도를 멀리했는데, 공유는 왕도의 충성과 현명함으로 중흥시켜 보좌한 공훈이 있으니 중책을 맡겨야 한다고 했지만, 사마예의 뜻과 맞지 않아 사도좌장사로 옮겨졌다가 오흥태수가 되어 지방으로 나갔다. 왕돈의 난이 일어나면서 심충이 왕돈과 함께 하자 벼슬을 버리고 경사로 돌아갔으며,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가 시중, 태상으로 옮겼다.
328년에 소준의 군사가 건강을 공격하자 공유는 조복을 입고 종묘를 지켰는데, 공유가 사도좌장사로 있을 때 온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북방의 난으로 인해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소준의 난이 평정되자 온교는 난을 평정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되었으며, 공유는 석성으로 가서 온교를 만났다. 온교가 공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오늘 상란이 일어나니 충효의 길이 쇠약해졌다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공경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유의 바른 덕목을 추앙해야 한다고 칭찬했고, 얼마 후 대상서가 되었다가 안남장군, 강주자사로 옮겼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상서우복야로 옮기고 동해왕의 스승을 겸했으며, 상서좌복야로 옮겼다.
333년에 성제가 조서를 내려 공유와 상서령 육완을 포상했는데, 공유에게는 측근 20명을 하사했고 공유는 사양했다. 왕도가 측근인 조윤을 호군으로 삼으려 하자 중흥 이래 이 벼슬을 맡은 사람은 주의, 응첨 등의 사망으로 인재가 부족해도 조윤을 그 자리에 앉힐 수 있겠냐고 했지만 왕도는 듣지 않았으며, 정도를 지켰기에 왕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정에서 좌우복야를 폐지하자 공유는 상서복야가 되었고, 당시 70세가 넘어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으며, 호군장군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산기상시를 더했다. 영군장군에 임명되고 금자광록대부를 더했다가 국자좨주를 겸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군장군, 회계내사에 임명되고 산시상시를 더했으며, 재임 3년 째에 회계군 산음 감호의 남후산 아래에 땅을 사셔 몇 묘의 집을 지어 초가집이 몇 채 있는데 관직을 버리고 거주하러 갔으며, 수백만 전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병으로 위독하자 유언은 평복으로 입관하고 향에서 주는 조상하는 물품을 받지 말라고 했으며, 342년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거기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정(貞)이라 했다. 기록이 남아있는 그의 아들은 공은(孔誾), 공왕, 공안국 총 3명으로, 그 중 가장 형인 공은이 작위를 이었으며, 관직은 건안태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