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22:15:59

공손영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公孫永
생몰연도 미상

전진의 은사. 자는 자양(子陽). 유주 양평군(襄平郡) 출신.

2. 생애

공손영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마음이 평온하여 욕심이 없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하지 않은 채, 곽평(平郭)의 남산(南山)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밭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하였고, 바위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부를 읊조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의 나이는 90여 세에 이르렀음에도 성품과 행동은 젊었을 적과 변함이 없었다.

또다른 은사인 공손봉과 더불어 전연의 황제 모용위의 초청을 받아 업(鄴)으로 갔다. 공손영은 모용위를 알현하고도 절을 하지 않았고, 왕공 이하의 귀족들이 그를 찾아와도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공손영은 1년 동안 업에 거주하면서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한파를 몸소 경험했음에도, 그의 바르고 정돈된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이후 미친 척을 하고 모용위의 눈을 속여 다시 곽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선소제 부견이 예를 갖추어 공손영을 초빙하려 하였다. 부견은 정식으로 초빙하기 전에 공손영이 노쇠한 것을 고려하여 일단 사신을 보내 그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공손영이 먼저 사망하였고, 부견은 이를 심히 안타깝게 여겨, 공손영에게 "숭허선생(崇虛先生)"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