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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7-03-25 20:38:08

8월 18일의 정변

1.개요
8월 18일의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은 에도시대 말기 1863년(분큐 3년) 8월 18일에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이 사쓰마 번 및 막부 측의 아이즈 번을 등에 업고 산조 사네토미 등 존왕양이파 귀족들과 조슈 번사들을 교토에서 쫓아낸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본 연호를 본따 분큐의 정변또는 堺町門の変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경위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에도 막부의 일본은 서양 각국과 불평등 조약을 연이어 맺었다. 외세의 진출에 대해 무력했던 막부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당시 일본 국민들은 물론 정치 권력에서 소외됐던 교토 황궁이나 도자마 다이묘 등이 큰 불만을 표출했다. 전국적으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 외세를 격퇴하고 천황제 아래 모든 국민이 단결하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에도 막부 260년 간 일본의신분 질서는 사농공상의 그것이었는데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일군만민론(一君萬民)을 시작으로 중세적 신분제까지 동요하고 있었다.
1863년(분큐 3년) 죠슈 번의 구사카 겐즈이, 도사 번의 다케치 즈이잔 등 존왕양이파 사무라이들은 산조 사네토미 등 존양파 귀족들과 짜고 에도의 세이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상경시켰다. 당시 일황은 고메이 천황이었는데 장차 막부를 없애고 왕정복고를 노렸던 존양파 귀족들의 부추김을 받고 '짐은 오랑캐가 싫다(攘夷)'며 도쿠가와에게 서양인들을 쫓아내라 명한다. 언제 결행할 것이냐는 다그침에 차일피일 답을 미루던 막부측은 결국 음력 5월 10일 기한을 약속한다.
그러나 막부는 오히려 뒤에서 서양 세력과 손잡는 한 편, 각 번을 단속해 세를 키웠다. 일제히 외세를 공격하기로 했던 5월 10일, 존양파가 득세했던 조슈 번만이 바칸 해협에서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고 막부를 비롯한 각 번은 결국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조슈 번만 프랑스를 비롯해 서양 각국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시모노세키 전쟁), 교토 조정 역시 거꾸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교토 황실은 존양파 귀족들을 실각시키고, 대신 그 자리에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막부에 협조해 황실 존속을 주장한 소위 공무합체 파들을 앉혔다.


존왕급진파는 금족령과 배알금지, 국사참정과 국사기인 관직의 폐지라는 소식을 들어야했는데, 8시가 지나자 군사를거느린 각 번주들이 참석하면서 쿄토와 천황의 거처를 단단히 수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정회의가 열려, 천황의 야마토국 참배연기와 존양파 및 초슈 번주인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 및 사가히로 부자에 대한 처벌 등이 결의되었다.
초슈번은 사카이마치(堺町) 경비임무에서 제외되어 쿄토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19일에 초슈번 병사 천여명은 실각한 산조 사네토미 등 공가 (公家)7명과 함께 초슈로 낙향했다. 정변 후 고메이 천황은 18일 이전의 칙령은 모두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발표하여 이전의 칙령을 모두 부정했다.


3.진행과정
정변 전날, 도사(土佐)의 낭사였던 요시무라 토라타로 등이 야마토 봉행에 앞서 거병하였지만 정변에 의한 정세변화로 9월에 파멸했다. (텐츄구미의 변)
또 10월에는 히라노 쿠니토미 등이 다지마국 이쿠노에서 거병했지만 각 번에 포위되어 도망 중 살해당하면서 존양파의 궐기는 실패했다.

정변에 의해 급진적인 존황양이 운동은 퇴조하여 10월에 시마즈 히사미츠가 대군을 거느리고 쿄토에 입경해 공무합체파의 회의를 조직했다. 한편 정변에서 패한 초슈번은 쿄토에서 회복을 노리다가 6월에 막부직할의 신센구미(新選組)에 의해 번사들이 살해, 투옥된 이케다야 사건을 계기로 쿄토에 출병하여 7월에 금문(禁門)의 변을 일으켜 아이즈, 사츠마 등과 싸움을 주고받게 된다.

1863년 음력 9월 30일 공무합체파 귀족들은 막부 측의 아이즈 번, 그리고 죠슈 번의 라이벌 사쓰마 번 등 6천의 병사에게 황궁 경호를 맡겼다. 공무합체파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섭정 관백인 고노에 다다히로, 고노에 다다후사 부자들이 입궐해 산조 사네토미 등 존양파 귀족들과 조슈 번주 모리 다카치카, 모리 모토노리 부자를 탄핵하는 한편, 조슈 번사들을 황궁의 사카이마치 후문 경비에서 직위 해제시켜 교토에서 쫓아냈다. 산조 사네토미, 사와 노부요시등 실각한 존양파 귀족 7명이 이 때 죠슈 번으로 낙향해야 했다.


4.사건의 결과
교토 황실에서 존양파는 일소됐다. 고메이 천황은 공무합체파의 진언을 받아들여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을 세이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이 정변으로 죠슈 번과 사쓰마 번은 원수가 돼 후일이케다야 사건이나 금문의 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으며, 사건을 기획한 다케치 즈이잔은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에게 체포돼 그의 부하들인 도사근왕당 동지들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한편 4년 정도 후인 게이오 3년(慶應3年, 1868년)에 다시 사츠마번을 중심으로 하는조정 쿠데타가 일어나는데(왕정복고), 그 수속 등은
이 8월 18일 정변을 모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