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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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江統(? ~ 310)
서진의 인물. 자는 응원(應元). 연주 진류군[1] 어현(圉縣) 사람. 할아버지 강유(江蕤)는 삼국시대 조위 시기 초군태수를 지내다가, 서진이 들어서고 오등작이 다시 세워질 때 항보남(亢父男)에 봉해지고 습작(襲爵)하며 제양강씨는 서진에서 번창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강조(江祚)는 서진 시기 남안태수를 지냈다.
제양강씨(濟陽江氏)를 다루는 『강씨가전(江氏家傳)』이라는 서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산일(散逸)되었는지 『 태평어람』에서 따온 글만 있다.
2. 생애
과묵하지만 원대한 뜻이 있어, 사람들은 강통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강응원은 말수가 적지만 높은 뜻이 있다."
동향 사람 채극(蔡克)과 함께 지역에서 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항부남 작위를 계승하고, 산음현령에 임명되었다. 원강 9년(299년) 정월, 제만년이 난을 일으켜 저족과 강족이 관농 지방을 어지럽히자, 조정에서는 장수 맹관을 보내 무력으로 진압하고 수괴 제만년을 사로잡았다. 강통은 사방의 오랑캐가 발호하는 상황에 심각성을 느끼고 마땅히 그 싹을 잘라야 한다 생각해, 조정에 「사융론(徙戎論)」을 상소했다. 내용인 즉, 저족, 강족 등의 이민족들을 모두 관중에서 쫓아내고, 병주에 주둔해 있는 유연의 흉노족 무리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2]. 그러나 이때는 조정이 황후 가남풍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혼란한 상황이었고, 혜제 사마충 또한 백치라 강통의 사융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중랑, 선춘현령을 거쳐 태자사밀로 옮겨졌고, 동궁(東宮)에 거쳐하며 황제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태자 사마휼은 부황과 조정을 받들지 않았고, 사치를 부리면서 여러 금기사항들을 어겼다. 이를 우려한 강통이 조정에 상소해 태자의 태도에서 고칠 점들을 나열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영강 원년(300년) 정월, 사마휼이 가남풍의 음모에 당해 태자에서 폐위되고 허창궁(許昌宮)에 유폐되었다. 태자를 섬기던 동궁의 신하들은 그를 배웅했으나, 가남풍이 명을 내려 동궁의 신하들에게 이수(伊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바람에 돌아가야 했다. 폐태자 사마휼이 마지막으로 신하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니, 강통을 비롯한 신하들은 엎드려 구슬프게 흐느꼈다. 그렇게 사마휼과 헤어지고 강통과 신하들은 도관종사 주련(株連)에게 체포되어 명령을 어긴 죄로 하남(河南)과 낙양(洛陽)에 나누어 투옥되었으나, 하남윤 악광(樂廣)과 도관종사 손염(孫琰)의 도움으로 모두 금세 풀려났다.
영강 원년(300년) 3월, 황후 가남풍이 폐태자 사마휼을 살해하고, 그를 광릉왕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했다. 강통은 가남풍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애도를 표하고 비통해 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팔왕의 난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박사, 상서랑, 참대사마를 역임했고, 제왕 사마경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그의 휘하에서 군사 업무를 맡았다. 이후 정위정(廷尉正)으로 옮겨져 주군(州郡)의 복잡한 분쟁 사건을 도맡아 처리했다.
성도왕 사마영의 부름을 받고 기실(記室)이 되어 사마영에게 여러 조언을 바쳤다. 사마영이 부하들의 모함을 믿고 육기 형제를 죽이려 할 때, 강통은 나서서 육기와 육운을 변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육기 형제가 모두 참수되니, 얼마 후 강통은 모친상을 이유로 사직하고 사마영의 곁을 떠났다가, 상을 마치고 사도 하간왕 사마옹의 좌장사로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영가 원년(307년) 12월, 태부 동해왕 사마월이 스스로 연주목에 오르고, 강통을 별사로 삼아 전반적인 주의 업무를 그에게 위임했다. 동해왕 사마월은 강통에게 책서를 보내 이르길,
"과거
왕자사(王子師)가 예주(預州)에 부임할 때, 그는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순자명(荀慈明)을 등용하고, 수레에서 내린 뒤에 그를 공문학(孔文舉)으로 삼았소. 귀관의 주에는 이에 대응할 만한 인재가 있소?"
라 하였다. 강통은 사마월의 기대에 따라 인재를 발굴하여, 고평군 출신
치감을 현량으로 중앙에 천거하고, 진류군 출신 완수(阮脩)를 직언(直言), 제북군 출신 정수(程收)를 정방(方正)에 각각 임명했다. 이후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 황문시랑, 산기상시,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역임했다.영가 4년(310년), 영가의 난을 피해 성고(成皋)로 도망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성고현에서 객사했다. 훗날 진류 사람들은 그를 동선(董宣), 채옹과 묶어서 사당을 세우고 삼현사(三賢祠)라 명명했다. 아들로는 강반과 강돈이 있다. 제양강씨는 강남으로 피난 가서 피난민 출신 귀족이 되었고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도 다시 중원으로 못 돌아오고 객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