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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0:36:14

강유(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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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江逌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도재(道載). 예주 진군 어현 출신. 삼국시대 조위 시기 초군태수를 지낸 강유(江蕤)의 증손자. 서진의 우후현령 강윤(江允)의 손자. 동진의 안동참군 강제(江濟)의 아들.

2. 생애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사촌동생 강관과 같이 살았는데, 둘은 우애가 매우 깊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소준의 난이 일어나고 반란군이 도성 건강(建康)을 장악하자, 강유는 임해(臨海)로 피난가서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서 평생을 은거할 뜻을 품었다. 그래서 주(州)의 종사나 좌저작랑과 같은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시수(試守)를 구해 태말(太末)의 현령으로 출사했다.

태말현은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어, 수많은 망명자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중앙의 통제를 거부하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태말의 백성들이 워낙 강하게 저항했던 탓에 다른 현령은 물론 태수조차도 이를 평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유가 태말에 이르렀을 때, 그 주동자를 초청해 후히 대접하고 더불어 화복을 논하자, 소란은 1개월 만에 가라앉고 현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조정에서도 이 소식에 기뻐하며 강유를 양주(揚州)의 치중(治中)으로 삼았고, 얼마 뒤에는 별가로 옮겼다가 오(吳)의 현령으로 전임시켰다. 이후 명을 받고 중앙으로 가, 정북장군 채모의 휘하에서 참군을 지내다가 표기장군 하충의 공조로 옮겨졌다.

영화 6년(350년) 정월, 중군장군 은호 후조의 혼란을 틈타 북벌을 재추진하면서 강유를 자신의 자의참군으로 배속시켰다가 장사(長史)로 옮겼다. 은호는 훗날 북벌에 성공하게 되면 황폐해졌을 옛 도읍 낙양의 정비를 강유에게 맡길 심산으로 그를 상좌로 삼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강유는 북벌에 종군하면서 은호의 군중에서 각종 서신이나 격문을 쓰는 임무를 전담했다.

영화 9년(353년) 정월, 수춘(壽春)에서 제3차 북벌을 준비하던 은호는 전진으로부터 원릉을 수복한다는 명목으로 70,000 대군을 일으켜 낙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선봉인 강족의 수령 평북장군 요양이 전진과 내통해 반란을 일으키니, 은호의 군사들은 그 소식에 두려워하며 동요했다. 은호의 군대가 작피(芍陂)에 이르렀을 때, 요양이 군대를 거느리고 10리 안팎으로 접근하여 동진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강유는 요양을 치라는 은호의 명을 받고, 병사들을 이끌고 출진해 요양의 군영 앞까지 이르렀다. 이때 강유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의 병사들이 정예가 아닌 것은 아니나, 강족의 무리보다 수가 적다. 또, 적의 참호와 목책 또한 무척 견고하니, 나는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마땅히 계략으로 저들을 격파할 것이다."
그러고는 수백 마리의 닭을 가져와 긴 밧줄로 연결한 뒤 닭에 불을 붙이자, 닭들은 놀라 날뛰다가 불이 붙은 채 요양의 군영 안으로 날아들었다. 군영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혼란에 빠진 요양의 군대는 이내 강유의 습격을 받아 패배했으나, 요양이 재빨리 군대를 수습해 물러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히진 못 했다. 이후 은호의 본대가 산상(山桑)에서 요양의 매복에 당해 군사 10,000명이 전사하면서 다시 동진으로 퇴각했고, 은호의 제3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패하여 귀국한 은호는 환온에 의해 정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했고, 강유 또한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다는 책임으로 면직당했다.

오래지 않아 중서랑에 제수받으면서 복직되었다. 승평 연간(357년 ~ 362년)에는 이부랑으로 승진하고 시중을 겸했다. 목제 사마담이 황궁 뒤뜰의 연못과 각도(閣道)를 공사하려 하자, 강유는 상소를 올려 백성이 고통받고 있음을 들어 공사에 반대했다. 목제 사마담은 강유의 간언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공사를 중지케 한 뒤, 그를 양주대중정(揚州大中正)에 임명했다. 승평 말, 목제 사마담이 강유를 태상으로 삼으려 하자 강유는 거듭 사양했으나, 목제는 그의 사양을 불허했다.

승평 5년(361년) 5월, 목제가 붕어하고 애제 사마비가 즉위했다. 조정에서 목제의 능묘에 장차 각종 보물들을 껴묻거리로 묻으려 했지만, 강유가 예법에 맞지 않다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목제의 뒤를 이은 애제 사마비는 도교에 심취하여 도사들의 말만 맹신하는 암군이었다. 한번은 행성의 어긋난 움직임이 포착되니, 애제는 화를 면하고자 태극전 앞에서 홍사(洪祀)[1]를 지내려 했다. 홍사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제사였기에, 태상 강유는 과거 한나라 시절 홍사를 시행한 전례가 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백성들에게 부담만 되었다며 반대했다. 애제는 홍사를 강행하려 했지만 강유가 물러나지 않고 계속 간언하자, 결국 자신의 뜻을 꺾고 홍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후로도 강유는 재직 중에 간언을 꺼리는 일이 없었고, 〈완적서찬(阮籍序贊)〉, 〈일사잠(逸士箴)〉 등과 같은 시 수십 편도 지었다. 그리고 58세가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로는 강울(江蔚)이 있으며, 관직은 오흥태수에 이르렀다.


[1] 상서》에 나오는 제사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