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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0:49:32

간나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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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감내광.jpg
주 호주 중화민국 대사
한문 甘乃光
한국식 독음 감내광
영문 Gan Naiguang
자명(自明)
출생 1897년
청나라 광서성 잠계현
사망 1956년 9월 30일 (향년 58~59세)
호주 시드니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광저우 영남대학 경제학 학사
시카고 대학교 정치학 석사
직업 관료, 정치가, 외교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산함 사건과 간나이광2.3. 국민혁명 시기2.4. 중일전쟁 시기까지2.5. 말년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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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중국국민당 이론가. 왕징웨이의 개조파의 일원으로 1920년대 후반의 중요한 반장파 정치가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7년 광서성 잠계현에서 태어났다. 초기이력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데 확실한 것은 1922년 광저우의 영남대학 경제과를 졸업했으며 학창 시절에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간나이광은 모교인 영남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2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가르친 인물이 국민당 상민부장 랴오중카이의 딸인 료몽성이었다. 이 인연으로 간나이광은 국민당 지도부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료몽성이 자신의 스승인 간나이광을 랴오중카이에게 소개했고 랴오중카이가 간나이광의 능력을 눈여겨 보고 비서로 발탁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간나이광은 1924년 중국국민당에 입당, 정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24년 6월,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자 간나이광은 7월 초순 영문비서 겸 정치부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당 선전부 편집을 맡았다. 1924년 8월 간나이광은 중앙당부 실업부장 대리, 국민정부 감찰원 설치주비위원회 제1기 위원 겸 월남행정위원, 국민당 기관지 <국민신간>, <민국일보>의 발행인 등을 역임하며 랴오중카이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까지 벌어지는 등 국민당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는데 왕징웨이, 미하일 보로딘을 비롯한 국민당 좌파가 집권하면서 좌파의 대부 랴오중카이가 등용한 간나이광은 계속 승진가도를 밟았다.

2.2. 중산함 사건과 간나이광

1925년 8월 간나이광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료안검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왕징웨이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9월에서 11월에 걸쳐 간나이광은 사판전보국위원회(査瓣電報局委員會), 사판월한철로위원회(査瓣粤漢鐵路委員會), 예산위원회(豫算委員會), 광동성 남로각속 행정위원회(南路各屬行政委員會) 위원, 조사광동대학 대학위원회(調査廣東大學大學委員會) 주석 등을 역임하고 광저우 국민정부의 경제, 사회적 기반을 닦았으며 인재 양성 사업을 맡았다. 1925년 5.30 사건으로 촉발된 영국 보이콧 운동에 있어서 북벌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파업 종결을 결정하고 이를 국민당 중앙을 대표하여 파공위원회에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기 전국대표대회에서 간나이광은 천궁보와 함께 중앙집행위원 겸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당비서 겸 청년부장을 맡았다. 또한 천궁보와 함께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정부 주석이었던 왕징웨이는 공직에서 사퇴하여 프랑스 외유를 떠나게 되었고 간나이광도 초기에는 타격을 입어 청년부장[1],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중앙집행위원 등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허나 그해 5월 15일 국민당 2기 2중전회에서 장제스의 주도로 당무정리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때 간나이광은 당무정리안의 제안자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당무정리안으로 인하여 공산당원들이 부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간나이광은 임조함을 대신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농민부장 겸 농공훈련소장을 겸하게 되었다. 이 시기 간나이광은 국민당 좌파 이론가로서 국민당 농민부 기관지인 <중국농민>을 발간하여 국민당 조직문제, 이념문제, 민중운동문제 등을 논하고 광동대학에서 강연을 행하였다. 또한 <이당치국>, <중국국민당사>, <손문주의의 이론과 실제> 등을 편찬하였는데 이 저서들은 국민당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농민부장 시절 간나이광은 농민을 국민당의 계급적 기초로 지목하면서 이들을 공산당에 빼앗기지 말고 국민당의 기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적극적으로 소작분규 등을 중재하며 농민들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주목할만한 것은 간나이광이 여러 저작을 통해 공산당과 유리된 국민당 좌파의 독자적인 조직과 역량 확보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간나이광은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했으면 국민당의 결의를 존중하거나 결의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다고 국민당을 떠나던가 해야하는데 공산당은 결의를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국민당을 떠나지도 않고 국민당 안에서 공산당 조직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소련 고문관들은 중산함 사건 이후 간나이광이 소련 고문관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으며 그가 우파를 이용해 공산당을 공격하는 이론을 정립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중국 공산당도 초기에 취추바이가 간나이광을 극좌파로 분류하던 견해를 수정하여 우파라고 규정했다.

2.3. 국민혁명 시기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고 국민혁명군은 쾌속 진군, 우한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북벌 시작 초기, 간나이광은 기독교가 서양 제국주의의 첨병이며 기독교의 원죄론은 농민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자기탓으로 돌리게 하여 농민 계급의 혁명성을 박탈하므로 혁명을 위하여 반드시 기독교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 활발한 반기독교 활동을 벌였다. 간나이광은 1927년 1월 "현재의 반기독교, 반문화침투운동은 전처럼 몇몇 학생이 하는 것이 아니고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것이니 일체의 행동은 모두 본당이 결정한 전체적 책략에 따라야 한다."고 발표, 국민당 주도의 조직적 반기독교 운동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천도논쟁 이후 국민정부는 우한 천도를 결정하고 우한으로 이동했는데 간나이광은 우한에 수립된 좌파 중심의 연석회의 합류를 거절하고 광저우에 잔류하여 광동성 당부 집행위원, 광동성 정부위원, 광저우 정치분회위원 등 지방당부의 일을 맡으며 당중앙과 거리를 두었다. 1927년 4월 난징사건과 상하이 점령 이후 장제스에게 합류하여 잠시 그의 밑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4월에 왕징웨이가 프랑스에서 귀국하자 간나이광은 왕징웨이를 따라 우한으로 이동, 9월에 영한합작을 위한 담화회에 우한측 위원으로 참석했다. 영한합작 과정에서 왕징웨이가 배제되자 분노한 왕징웨이는 공직에서 사퇴하고 난징을 떠나버렸는데 이때 간나이광도 왕징웨이를 수행하여 처음에는 탕성즈의 우한 정치분회에 합류했으나 당계전쟁이 일어나 탕성즈가 몰락할 것으로 보이자 광저우에 새로운 당중앙을 만들자는 장파쿠이의 초청에 따라 10월에 광저우로 이동했다.

11월, 장파쿠이 장황사변을 일으키자 간나이광은 광저우시 시정위원장에 추대되었다. 허나 중국공산당이 이틈을 타 광저우 폭동을 일으키고 리지선이 이를 진압하고 광저우를 장악하면서 용공 및 시 예산 횡령 혐의로 탄핵되어 시정위원장에서 추방되었다. 이에 간나이광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 은거하였다. 우징헝, 장런제, 리스쩡 등 난징 국민정부의 우파 세력은 간나이광을 체포하지 않으면 다시는 장제스를 보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나왔고 간나이광은 1928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에서 1년간 정치학을 연구하여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프랑스 등을 유람하며 행정제도를 시찰했다. 1929년에 중국에 귀국한 간나이광은 상하이에 칩거하며 독서와 저술에만 전념하며 왕징웨이, 천궁보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28년 개조동지회가 출범했을 때도 참여를 거절했다.

1928년 1월 31일, 감찰위원회가 중앙집행위윈회 상임위원회에 왕징웨이, 천궁보, 구멍위, 간나이광에 대한 고발을 제출하였고 1928년 8월, 오중전회 개최를 앞두고 오치휘는 이들에 대한 오중전회 출석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는 간나이광을 용공부역의 혐의로 국민당에서 영원히 제명한다고 처분하였다.

2.4. 중일전쟁 시기까지

그러다가 1931년 1월, 국민당 4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복권되었다. 1931년 5월 내정부 정무차장에 임명되었고 옛 동료인 왕징웨이, 천궁보 등이 광저우에서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으나 참여하지 않고 철저히 비정치적인 실무관료의 길을 계속 걷게 된다. 1934년 11월 잠시 내정부장 대리를 맡았다. 1935년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제5처 처장을 맡았고 1935년 11월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자 다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3월에 내정부 금연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어 금연 운동을 전개했고 4월 중앙당부 부비서장에 임명되었다. 이해 6월, 남의사, CC단 등이 통합되어 삼민주의 청년단이 설립되자 이에 참여했다. 7월, 임시중앙이사회 이사가 되었으며 1939년 3월 군사위원회 전지당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방최고위원회가 설립되자 부비서장이 되었으며 중앙설계위원회 부비서장도 겸했다. 1945년 5월, 6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재선출되었으며 8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외교부 정무차장을 맡았다.

2.5. 말년

1947년 행정원 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헌정 실시를 위한 국민대회가 소집되자 국민대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주 호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되어 호주로 파견되었으나 호주에 있는 동안 국민정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였다. 1951년에 대사직을 사임한 후 그대로 호주에 머물렀으며 1956년 시드니에서 사망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호주의 외교적 무관심을 비난하면서 간나이광이 사퇴한 이후 1959년까지 8년 동안 호주 대사를 임명하지 않았다. 이후 1966년, 해럴드 홀트 내각이 집권하자, 호주도 타이베이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대만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으나 1972년 12월 21일, 고프 휘틀럼의 노동당 내각이 집권하면서 얄짤없이 단교당한다.

3. 참고문헌


[1] 후임은 샤오위안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