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06:11:17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409호 410호 411호
부안 백산성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 대구 진천동 입석

{{{#!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410호
<colbgcolor=#315288>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
和順 孝山里와 大薪里 支石墓郡
Dolmens in Hyosan-ri and Daesin-ri\, Hwasun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산68-1번지 외 ,춘양면 대신리외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지석묘
수량/면적 2,474,562㎡
지정일 1998년 9월 17일
소유단체 화순군
관리단체 화순군
링크 세계유산 화순고인돌 유적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Sites de dolmens de Gochang, Hwasun et Ganghwa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전라남도 화순군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977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i)[1] }}}
1. 개요2. 내용3. 사적 제410호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에 위치한 고인돌[2] 군집이다. 수백기의 고인돌이 밀집된 지역으로 고인돌이 많은 한반도에서도 이처럼 많은 고인돌이 소재한 곳은 드문 편이다.

1998년 9월 17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3] 2000년 11월 29일에는 전라북도 고창군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한 고인돌 유적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내용

도곡면 효산리에서 춘양면 대신리로 넘어가는 보성재 양쪽 계곡 지역 청동기 시대 고인돌 596기가 분포하고 있다.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군의 고인돌과 강화군의 고인돌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많은 수량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주변 암석에서 고인돌의 덮개돌을 떼어낸 흔적이 있는 각시바위 채석장 잘 남겨져 있어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주로 기반식 고인돌이 확인되며 그 중에서는 길이 7m, 높이 4m, 무게는 약 200여 톤에 달하는 커다란 덮개돌을 가진 세계 최대 무게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2007년 김해시 구산동에서 무려 350여 톤에 달하는 덮개돌을 가진 고인돌이 발견되어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고인돌 타이틀을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해당 고인돌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훼손되지 않은 고인돌 중에서는 여전히 가장 무거운 무게의 고인돌이 되었다.

3. 사적 제410호

지석묘란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 크고 넓적한 바위를 큰 돌 몇 개로 괴어 놓은 선사시대 무덤을 가리킨다.

화순군 효산리 모산마을에서 월곡제, 춘양면 대신리로 넘어가는 보성재 양쪽 계곡 지역에 청동기시대의 바둑판식(남방식) 고인돌 596기가 분포하고 있다.

조사 결과 고인돌, 돌방무덤(석실분), 독무덤(옹관묘), 돌널무덤(석관묘), 널무덤(토광묘)을 확인하였고, 석기류, 토기류, 청동기류 치레거리(장신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주변의 암벽에서 고인돌의 덮개돌을 떼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 고인돌을 만들었던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대신리 산 중턱에는 길이 7m, 높이 4m, 무게 약 200여 톤이나 되는 커다란 덮개돌이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주변의 자연 경관도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고대 문화와 생활상 비교·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임을 인정받아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순효산리및대신리지석묘군 →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4.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12px 0" <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史蹟
}}}
{{{#!wiki style="margin:0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 14%"
{{{#!folding ⠀[1~100호]⠀
{{{#!wiki style="margin:-10px 0"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 14%"
{{{#!folding ⠀[10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 14%"
{{{#!folding ⠀[20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 14%"
{{{#!folding ⠀[301~4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 14%"
{{{#!folding ⠀[401~5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 14%"
{{{#!folding ⠀[501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

한반도 선사 유적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구석기시대 상원 검은모루동굴유적, 덕천 승리산동굴 유적[1], 만달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2], 공주 석장리 유적[3], 두루봉동굴 유적,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신석기시대 서울 암사동 유적, 울산 반구천 일대 암각화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 ),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청동기시대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대구 진천동 입석, 사월동지석묘군, 속초 조양동 유적,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유적
※ 문서가 있는 경우만 서술.
[ 각주 펼치기 · 접기 ]

[1] 문서에 나오듯 산 이름이 우상화 지명이라서 통일 후 개명 가능성이 높다. [2] 사적 지정, 학설을 뒤집은 유적 [3] 남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며 한강 이남에도 구석기 문화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2] 고인돌을 한자어로 표기하면 지석묘가 된다. [3]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