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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 사적 제237호 | |
<colbgcolor=#315288> 서울 경모궁지 서울 景慕宮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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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28-2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원 | |
면적 | 4,144㎡ | |
지정연도 | 1973년 8월 14일 | |
시대 | 조선 시대 | |
관리단체 | 종로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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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경모궁 배치도인 〈경모궁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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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모궁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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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景慕宮한성부 동부 숭교방 창경궁 맞은 편,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1[1]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이었다. 문화재청에서는 경모궁이 있던 자리를 사적 제237호로 지정했다.
2. 역사
원래 이 자리에는 함춘원(含春苑)이란 정원이 있었다. 성종은 1484년(성종 15년)에 태종(조선)이 상왕이 되어 머물렀던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짓고, 창경궁의 안산인 마두봉(馬頭峰)을 보호하라는 풍수지리에 따라 이 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밖에 별정군을 배치하였고, 담을 성곽처럼 만들었으며 대문을 크게 지었다. 뿐만 아니라 함춘원의 동쪽에 있는 낙산까지 있던 민가를 전부 철거한 뒤 기묘한 화 초를 심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쫓겨난 후 집권한 중종은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했다. 인조 때에는 부지 절반을 궁궐 내 가축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 나눠주었다. 이후 140여 년간 말을 풀어 기르는 목장으로 사용했다.3. 영ㆍ정조 시대
1762년( 영조 38년)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사망하였다. 이후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사당인 수은묘(垂恩廟)가 마련되었다. 2년 뒤 1764년(영조 40년)에 수은묘를 함춘원에 옮겨 지었고, 1776년( 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를 ‘영우원’, 사당을 ‘경모궁’으로 올려 이 때부터 경모궁으로 불렸다. 이후 건물을 고쳐지었으며 직접 편액을 써 달았다. 경모궁 서쪽에 일첨문을, 창경궁 동북쪽에 월근문을 내어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경모궁에 자주 들러 참배했으며 창경궁에는 친아버지의 사당을 바라볼 수 있는 통명전 뒤 언덕에 자경전을 지어 생모 혜경궁 홍씨를 모셨다.[2]1785년( 정조 9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고 1791년(정조 15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과 경모궁 망묘루에 걸어두었다.
4. 이후
정조의 후손들인 후대 왕들도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 해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이 이곳에서 배례를 거행하기도 했다. 1839년( 헌종 5년) 12월에 봉안각(奉安閣)이 소실되었으나 곧 중건되었고 이후 이곳에 순조, 익종, 헌종, 철종의 어진이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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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평락정 현판 |
이렇게 경모궁이 빈 공간이 되자 1900년( 광무 4년) 지금의 충무로 쪽에 있던 어진 봉안소 영희전을 이 곳으로 옮기고 영희전에 봉안했던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영정을 옮겼다. 이 때 제작한 《영희전영건도감의궤》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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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1925년 6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모궁 철거 기사 | <colbgcolor=#bf1400> 현재 경모궁 자리에 들어선 서울대학교병원 |
5. 경모궁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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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경모궁 정문 함춘문 | <colbgcolor=#bf1400> 경모궁 본전. 영희전으로 활용하던 시기에 찍은 사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