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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장릉의 모습 |
1. 개요
莊陵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왕릉. 이전에는 노산군묘(墓)로 불려왔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추존복위됨에 따라 노산군묘에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1970년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5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상세
장릉이라는 능호는 조선왕릉 중에 총 세 군데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장'에 해당하는 부분의 한자는 모두 다르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 조선의 추존왕 원종(인조의 생부)과 추존왕비 인헌왕후(인조의 생모)를 모신 쌍릉. 이 왕릉은 글 장(章)자를 사용한다.
-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인열왕후를 모신 합장릉. 이 왕릉은 길 장(長)자를 사용한다.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을 모신 단릉. 이 왕릉은 장중할 장(莊)자를 사용한다.
단종의 장릉은 조선왕릉 가운데는 유일하게 서울이나 경기도가 아닌 곳에 있는 능이다.[1] 이는 아래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부인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단종이 영월에서 죽게 되고 시신이 영월 동강에 버려지면서 지역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동강에서 그의 시신을 운구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暗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슬퍼런 세조의 눈을 피해 암장했던 만큼 단종의 무덤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후 1541년 중종 때, 노산군의 무덤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영월군수 박충원이 발견하여 묘소를 정비하게 되었고, 1580년 주변에 비석들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이 당시까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상태여서 묘(墓)라는 칭호를 유지해왔다가 1698년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킴에 따라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고 장릉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단종의 시신을 모셨던 엄흥도에게는 공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왕릉 공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던 것을 감안한 셈.
3. 시설
입구에서부터 보면, 단종의 행적을 기리는 단종역사관이 있으며 바로 옆에 엄흥도의 장려비와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특히, 정자각 앞에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 당시 단종을 위해서 죽은 인물들을 정조 대에 배향한 배식단도 존재하는데, 이는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한편, 봉분 주변에는 상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문인석, 석마(石馬) 등도 갖추었는데, 봉분과 정자각이 일직선이 아니라 경사가 꽤 있는 언덕이다. 일반 관람객들은 봉분 앞까지 가서 볼 수 있는데, 정자각에서 바로 올라가지 못한다.
특이점으로는 무인석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종이 무신 세력을 등에 업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조선왕릉 중 망주석에 세호(細虎)[2]가 새겨지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다.
한편, 장릉 주변에는 남양주시에서 가져온 소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단종의 왕후인 정순왕후 송씨가 묻혀있는 사릉에서 가져온 것이다.
4. 일화
단종이 죽고 동네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밤중에 몰래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산에 올랐다.[3] 그러나 급하게 일어난 일인데다가 날씨조차도 눈보라가 쳐서[4] 맨 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산속에 앉아있던 노루 한 마리가 일행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는데 노루가 앉았던 그 자리에는 눈이 녹아서 맨 땅이 드러나 있었다. 이를 보고 엄흥도 일행은 천우신조라 여겨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매장한 후, 식솔을 거느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단종이 정식으로 복권되어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지관을 조정에서 내려보냈는데 그들이 살펴보니 단종이 묻힌 그 자리가 이미 천하의 명당이었기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고쳤다고 한다.단종이 복권되지 않은 시절, 장릉은 봉분도 없어 그냥 평평한 맨땅이었기에 다른 땅과 구분이 가지 않았고 풀도 무성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 중에 그 자리를 밟거나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심지어는 어린아이들도 그 주변에서 놀 때, 그 자리를 향해서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재지가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해도 인근 백성들은 암암리에 알고 있었고 이를 관에 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비슷한 이야기로 단종의 시신과 엄흥도의 식솔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관에서 엄흥도 일가의 행방을 수색했는데 사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숨은 곳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아서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엄흥도는 중인 출신의 지방 아전으로 세조의 눈을 피해 단종의 장사를 지낸 일로 후대에 높게 평가를 받게 된다. 단종이 복위되기 전인 선조 때 이미 그 자손은 노산군의 묘역을 관리하는 대신 병역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고 후에 정조가 단종의 충신들을 정리하여 등급을 결정할 때,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죽은 이들 바로 다음으로 엄흥도를 놓았는데 아무리 절의를 다했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단종과 관련되어 죽은 것이 아닌 이상은 사육신들과 동급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원칙에서 유일하게 예외이자 심지어는 생육신들보다도 더 위였으며, 고종 때에는 아예 정승급의 관직을 추증한다. 죽은 이의 장례를 매우 중히 여겼던 조선 시대에 누구나 억울함을 알지만 감히 장사지낼 생각을 못했던 단종의 시신을 목숨걸고 수습한 공을 높이 산 것이다.
이 외에도 다른 왕릉과 달리 장릉에는 관련된 일화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아무래도 비극적인 단종의 생애와 수도에서도 먼 곳에 방치되어 민간층에서 관리되었던 점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덕분인지 조선왕조의 다른 장릉들과는 달리 가장 존재감이 큰 장릉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마다 영월군에서 주최하는 '단종문화제'에서는 단종 국장 행렬도 진행한다.
5. 기타
- 유일하게 비수도권에 위치한 조선왕릉이라는 특성 때문에 접근하는 방법도 상당히 다르다. 다른 조선왕릉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이면 수도권 전철이나 시내버스, 광역버스 등 대중교통을 통해서 오갈 수 있고, 타 지역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여러 능을 한 번에 관람하는 동선을 짜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그러나 장릉은 혼자서 외딴 곳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영월군 거주민이 아닌 이상 철도나 시외버스 등 시외 교통수단을 활용해서 접근해야 하며, 다른 왕릉과 연계해서 관람 동선을 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신 영월읍내에 단종과 관련된 유적지가 여럿 있어 해당 유적지들과 묶어서 관람하는 편. 동강변에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청령포( 명승)가 있고, 단종이 최후를 맞이한 영월부 관아( 사적) 내 관풍헌과 자규루, 사육신을 배향한 창절사( 보물), 능침 사찰 격인 보덕사 등이 있다. 이들 중 보덕사와 청령포가 비교적 가깝고[5] 그 중에서도 청령포가 더 인지도가 있어서 대부분 장릉과 청령포를 묶어서 관람하는 편이다.
- 궁능유적본부가 관리하고 있지 않은 유이한 조선왕릉으로, 궁능유적본부 대신 영월군이 맡아서 관리하고 있다.[6] 참고로 궁능유적본부가 관리하지 못하는 다른 하나는 정종의 후릉으로, 이쪽은 아예 북한이 실효지배 중인 개성시에 자리해서 관리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 과거 연산군과 광해군 이전까지는 반정으로 인한 폐왕의 묘 또는 폐주의 묘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19대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고 능으로 승격면서 폐왕의 묘는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두 곳으로 넘겨졌다. 또한 조선왕조 최초로 반정으로 인해 축출된 폐왕의 묘로 불렸지만 숙종 때 추존 승격에 따라 최초의 사례는 연산군묘로 넘어갔다.
- 역대 조선왕조 왕들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10대에 요절한 미성년자 임금이 안장된 왕릉이다[7]. 이미 영창대군 같은 어린 왕족들도 묘소가 있지만 모두 재위한 왕이나 추존왕은 아니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어린 나이에 왕릉에 안장된 조선왕조 임금은 왕족 전체를 통틀어서도 단종 한 명 뿐이다[8].
[1]
아무래도 별다른 사연이 없는 한 능은 수도에 비교적 가까우면서 명당자리인 곳에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능이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도 서울 관내나 바로 근처에 있다. 조금 멀리 있다고 해도
파주시,
여주시,
화성시 등 경기도 권역에 들어간다. 심지어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북한이 실효지배 중인 곳에 위치한
정종의
후릉도 분단 전까지
경기도 소속이던
개성시에 있으며, 폭정과 실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조차 묘지가 수도권에 있다. 즉 단종은 조선시대 왕들 중 가장 사후에 대접이 안 좋았던 왕이기도 한 셈이다.
[2]
왕릉이나 고관대작의 무덤 앞에 세우는 망주석에 새기는 상상의 동물. 일단 이름에 호랑이(虎)가 들어가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호랑이라기보다는
도마뱀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으며 정확히 무슨 동물이 모티브인지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는 올라가는 모습, 다른 하나는 내려가는 모습으로 새겨진다.
[3]
이때 사용한 관과 수의는 당시 고령이었던 엄흥도의 노모를 위해서 준비해둔 것이었다고 한다.
[4]
단종은
1457년
11월 7일 사망했는데, 이 때가 음력인 것을 환산하면 적어도 양력 12월로 추정된다.
[5]
보덕사는 장릉 바로 옆에 자리해있으며, 청령포는 30분 정도 걸으면 다다를 수 있다.
[6]
덕분에 평일 월요일에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다. 궁능유적본부가 관리하는 왕릉은 일괄적으로 공휴일이 아닌 경우 월요일을 휴일로 운영중이지만, 영월군이 관리하는 관계로 연중 무휴로 관람할 수 있다.
[7]
최장수 왕은 21대
영조이며 조선왕릉에 안장된 조선왕조 임금들 중 최고령이다(당시 83세).
[8]
역대 조선 임금들은 거의 30대 이후에 승하하였다. 8대
예종과 24대
헌종의 경우 20대에 승하하였지만 미성년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