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릉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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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의 사적 제222호 | |
<colbgcolor=#315288> 경애왕릉 景哀王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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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73-1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 | |
면적 | 2,273㎡ | |
지정연도 | 1971년 4월 28일 | |
건축시기 | 신라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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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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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1. 개요
景哀王陵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신라 55대 왕 경애왕의 무덤이다.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경애왕은 신라 최말기의 왕으로 성은 박씨이고 휘는 위응으로 재위 4년 포석정에 유연할 때 불의에 후백제 왕 견훤의 습격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3]
2. 상세
경주에 만들어진 왕릉 중 마지막 왕릉이다.일생을 마친 포석정에서 가깝다면 가까운 1.5km 정도 거리에 있다. 근처에 박씨 왕들의 왕릉인 배동 삼릉이나 오릉이 있어 경주 시가지 서남부의 이 지역이 박씨 왕조의 능원으로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고 봉토가 일반 묘보다는 크므로 왕릉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릉은 평범한 원형 토분이고 표면에는 아무 시설이 없다. 릉 앞에 석상이 있으나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경애왕의 최후와 당시 신라의 국세가 재기할 수 없을만큼 기울었다는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왕릉으로서는 빈약한 편이다. 어쩌면 견훤이 고의로 저렇게 만들 것을 명령한 것일수도 있다. 자신이 죽인 왕의 무덤을 선대 신라왕급으로 화려하게 만들 경우 견훤 본인의 위상이 그만큼 추락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일성왕릉으로 불리는 일성 이사금의 무덤을 경애왕의 진짜 무덤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신라왕릉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고고학적 지식이 부족하던 조선 시대에 비정된 것이기 때문에 경애왕의 진짜 무덤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다. 삼국사기에서는 경애왕릉이 '해목령 아래'라고 했는데 해목령은 남산(경주)에 지금도 있는, 게의 눈처럼 생긴 바위와 그 바위가 있는 고개를 말한다. 해목령은 경애왕릉보다 일성왕릉 쪽에 훨씬 가깝다. 그리고 일성왕릉은 신라 후기 양식이므로 일단 초기 신라 왕의 무덤일 가능성은 없기도 하다.
경애왕릉에 묘비가 있는데 경애왕릉 입구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