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344c3c> 서울특별시 | 배봉산 보루 · 북한산성[A] · 불암산성[A] · 아차산 일대 보루군[A] · 아차산성 · 탕춘대성 · 호암산성 | ||||
경기도 | 남한산성 · 당항성 · 도기동 목책성 · 독산성 · 문수산성 · 반월성 · 북한산성[B] · 불암산성[B] · 아차산 일대 보루군[B] · 이성산성 · 파사성 · 죽주산성 · 행주산성 · 호로고루 | |||||
인천광역시 | 강화산성 (강화석수문)ㆍ 강화중성 · 강화외성ㆍ 정족산성 · 계양산성 | |||||
충청북도 | 단양 적성 · 덕주산성 · 삼년산성 · 상당산성 · 온달산성 · 장미산성 · 충주산성 | |||||
충청남도 | 공산성 · 부여 가림성 · 부여 나성 · 부소산성 · 영인산성 | |||||
전북특별자치도 | 동고산성 · 미륵산성 · 위봉산성 · 우금산성 | |||||
전라남도 | 자미산성 · 마로산성 · 봉대산성 | |||||
광주광역시 | 무진고성 | |||||
경상북도 | 가산산성 · 가야산 산성 · 금돌성 · 금오산성 · 명활성 · 주산성 | |||||
대구광역시 | 달성 · 용암산성 · 초곡산성 · 팔거산성 | |||||
경상남도 | 고성 만림산 토성 · 분산성 · 우불산성 · 화왕산성 | |||||
부산광역시 | 금정산성 | |||||
울산광역시 | 관문성 | |||||
강원특별자치도 | 영원산성 | |||||
[A]: 경기도와 겹침. [B]: 서울특별시와 겹침. | ||||||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읍성 틀 바로가기 |
}}}}}}}}} |
대한민국의 사적 | ||
관문성 關門城 Gwanmunseong Fortress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산업로 1739-6 울산광역시 북구 달천동, 중산동, 천곡동 및 범서면 (모화리)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991,774㎡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 성덕왕 | |
위치 |
|
<colbgcolor=#344c3c> 관문성 터[1] |
[clearfix]
1. 개요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 천곡동, 매곡동에 걸쳐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사적 제48호.2. 역사
개원(開元) 10년 임술(서기 722)에 비로소 보화군(毛火郡)에 관문(闕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하는데, 일본(日本)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요새였다. 둘레가 6,792보 5자였으며, 동원된 인부는 39,262명으로 감독자는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효성왕[2]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효성왕[2]
관문성은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허물어졌다.
(중략)
임관군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 때에 모화군에 성을 쌓아 일본이 침략해 오는 길을 막았는데, 경덕왕이 임관이라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에 주에 예속시켰다. 석성의 남은 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이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성곽조(城郭條)와 고적조(古跡條).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에 수도
서라벌 남쪽을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모벌군성(毛伐郡城)혹은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 불렸으며 각간 원진이 감독하에 건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대로 경주 외곽을 막는
관문 역할을 했던 성으로 꽤나 유명한 요새였는지 당나라 기록에도 관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중략)
임관군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 때에 모화군에 성을 쌓아 일본이 침략해 오는 길을 막았는데, 경덕왕이 임관이라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에 주에 예속시켰다. 석성의 남은 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이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성곽조(城郭條)와 고적조(古跡條).
그 나라의 산은 수십리씩 연결되어 있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 관문(關門)이라 한다. 신라는 이 곳에 항상 궁사 수천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 신당서》 권220 열전 제145 신라전(원문)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점인 여기는 울산항으로 왜군이 상륙했을 때 지나쳐야 하는 좁은 협곡 지형으로 척 봐도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현 경주 외동읍까지 왕경 경주 범위로 간주되었던 것을 볼 때[3] 이 관문성이 왕경 경주와 지방인 울산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기능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신당서》 권220 열전 제145 신라전(원문)
|
<colbgcolor=#344c3c> 관문성을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소개한 뉴스 영상 |
관문성(關門城)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만리성(萬里城)이라 부른다. 【이상은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했다.】
《 동경잡기》. 1845년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만리성(萬里城)이라 부른다. 【이상은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했다.】
《 동경잡기》. 1845년
|
|
<colbgcolor=#344c3c> 관문성 옛 사진 |
성 안에 여러 성문과 건물터가 있지만 본격적인 복원은 시작되지 않은 상태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관문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문성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관문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관문성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관문성
- 두산백과 : 관문성
4. 사적 제48호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