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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로마노프 가문 Семьи Романов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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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 | 문장[1] | ||
문장[2] | 국장[3] | ||
<colbgcolor=#FFCC33><colcolor=#000> 건립일 | 1613년 2월 21일 | ||
창립자 | 미하일 1세 | ||
現 가주 |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왕자 라이닝겐의 카를 에미히 왕자[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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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러시아 제국 | ||
본가 |
로마노프 가문[5]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표트르 3세 이후)[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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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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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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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3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역대 황제들과 당시 황제•황후•황태자의 초상화 (1913년)[8][]이 그림이 제작되고 고작 4년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한다. 멸망 이후이긴 하지만, 유사품으로 2013년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제작한 로마노프 왕조 400주년 기념 우표가 있다. 물론 이건 역대 차르들 뿐 아니라 차르 황위 요구자들도 포함했다.] |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5년간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 쌍두독수리가 상징이다.
1762년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이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이후의 정식 명칭은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Holstein-Gottorp-Romanow, 러시아어로 골시테인고토르프로마노프(Гольштейн-Готторп-Романов) 왕조이다.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본가는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 왕조와 함께 올덴부르크 왕조의 주요 분가 중 하나다.
2. 명칭
가문의 시조는 독일 올덴부르크[10]의 귀족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로 14세기 무렵, 현재의 프로이센 지역에 위치한 튜튼 기사단국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11] 그러나 이는 족보에 기록된 일종의 시조 전설로 그 시대에도 반쯤 허구로 취급받았으므로 곧이곧대로 믿을만한게 못된다.로마노프 가문 출신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가 이반 뇌제의 황후가 되어 로마노프 가문은 류리크 왕조의 인척이 되었다. 이후 표도르 1세 사후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고, 1598년부터 15년간 이어진 혼란 시대로 돌입했다. 이 와중에 코빌라의 7대손인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가 1613년 러시아의 여러 보야르(귀족)들의 추대로 러시아의 차르(Царь)로 추대받으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성씨의 약사는 다음과 같다.
안드레이 코빌라의 아들은 표도르 안드레이비치 코빌린(Фёдор Андрейвич Кобылин)으로, 그 아들인 이반 표도로비치 코시킨(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은 코시킨으로 '코빌라'를 썼는데, 러시아식으로 성을 차차 바꿔나갔기 때문에 3대의 성이 제각각이다. 이반 대부터 코시킨으로 정착되었는데, 이반의 아들인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Zahari Ivanovich Koshkin)이 무슨 큰 공을 세웠는지 자하리의 아들 유리 자하리예비치 코시킨(Juri Zaharievich Koshkin)이 그의 자녀들 대부터 성씨를 모두 '자하린코시킨(Zaharin-Koshkin)'으로 바꿔버렸다.
하여 유리의 아들인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Roman Jurievich Zaharin-Koshkin)은 가만히 있나 싶었더니 아들인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Nikita Romanovich Zaharin-Juriev)대부터는 아예 '코시킨'을 버리고 자하린유리예프(Zaharin-Juriev)로 성을 또 갈아치운다. 그리고 니키타 로마노비치의 아들인 표도르 때 드디어 로마노비치에서 따 온 로마노프로 성씨를 완전히 굳히고 다시 그 아들 미하일부터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간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 (Андр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 / Andrei Ivanovich Kobyla)
-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코빌린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Кобылин / Fyodor Andreevich Kobylin)
- 이반 표도로비치 코시킨 (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 / Ivan Fyodorovich Koshkin)
-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 (Захарий Иванович Кошкин / Zakhary Ivanovich Koshkin)
- 유리 자하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 (Юрий Захарьевич Захарьин-Кошкин / Yuri zakharyevich Zakharyin-Koshkin)
-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 (Роман Юрьевич Захарьин-Ко́шкин / Roman Yurievich Zakharyin-Koshkin)
-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 (Никита Романович Захарьин-Юрьев / Nikita Romanovich Zakharyin-Yuriev)
-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 (Фёдор Никитич Романов / Fyodor Nikitich Romanov)
-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 Mikhail Fyodorovich Romanov)
남자 친족들은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여자 친족들은 여대공(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칭호를 썼다. 그러다 1886년 알렉산드르 3세 때부터 Великий Князь는 황제의 아들과 친손자,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는 황제의 딸과 친손녀, 그리고 대공의 정식 부인에게만 쓰도록 했다. 그 외의 친족은 그냥 Князь/княгиня.[12] 일본 황실의 친왕/내친왕과 왕/ 여왕의 구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3. 역사
3.1. 로마노프 왕조(1613 ~ 1762)
3.1.1. 초창기 ~ 표트르 대제 시대
초대 황제인 미하일 1세(재위 1613~1645) 이후 표도르 3세(재위 1676~1682)가 죽은 뒤 제위를 놓고 다소의 혼란이 일어나다가, 1682년 유명한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가 즉위하면서 수습된다.표트르 1세는 강력한 황제권을 추구해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기틀을 다졌으며,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체질을 바꿔놓으려 했다. 또한 이를 통해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1700~1721)을 치러 발트해로 나가는 통로와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카렐리아 등을 정복하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했다.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1721년에는 나라 이름을 루스 차르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열강으로서의 러시아의 등장을 알리기도 했다. 이때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그 일대의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 과중한 노동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체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 생겨났다.
3.1.2. 여황제 시대
1725년 표트르 1세가 사망한 뒤 또다시 제위를 놓고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는데, 어린 황제들의 급서로 중간중간마다 많은 여성 황제가 권력을 잡았다.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1727)는 표트르 대제의 아내로서 문맹이었기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안나 이바노브나(재위 1730~1740)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며 러시아 정교회 중심의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후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로 불리던 옐리자베타(재위 1741~1762, 표트르 대제의 딸)가 즉위했다. 그녀의 치세 20년 동안 러시아는 안정을 회복하여 7년 전쟁에서 그 힘을 과시하고 그 다음에 이어진 팽창의 시기를 맞았다. 그러나 옐리자베타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옐리자베타의 두 딸 모두 사생아였기 때문에 옐리자베타의 사망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된다.3.2.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1762 ~ 1918)
3.2.1. 예카테리나 2세 시대
이후 즉위한 옐리자베타 여제의 후계자로서 제위를 계승한 사람은 외조카인 표트르 3세로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출신이다. 표트르 3세의 즉위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되었다. 다만 합스부르크 왕조처럼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라고 불린다.하지만 표트르 3세는 무능하고, 러시아어도 잘 할 줄 모르는 친프로이센 성향의 독일인이었다. 당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자신의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굉장히 집착했는데 당시 표트르 대제의 부계 혈통은 이미 끊겼기 때문에 자신의 외 조카[13]이자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인 표트르 3세를 차기 차르로 지명한 것. 표트르 3세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팬으로, 이긴 전쟁을 중단하고 급히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평화협정을 맺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반역적 행위를 저질렀다.
프리드리히 2세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행운이었지만. 성질도 더러워서 아내를 버리고 공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다가 고작 반년만에 결국 러시아 정교회와 귀족, 특히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아내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1주일 뒤 알렉세이 오를로프라는 자에게 살해되었다.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혹은 방조)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인은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발표되었다.
무능한 남편을 폐위해버리고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다시 러시아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러시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푸가초프의 난(1772~1775) 등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농노제를 강화해 민중을 억압했지만,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14]에 농민을 이주시켜 대규모의 밀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려 농업을 진흥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고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 업적이 있다.
또한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두었다.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1611년 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시켰으며, 남쪽으로도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림 반도와 캅카스를 할양받아 영토를 넓혔다.
3.2.2. 나폴레옹 전쟁
예카테리나 2세가 죽은 뒤 그녀의 아들 파벨 1세(재위 1796~1801)는 서방에서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궁중에서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고, 장남인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가 즉위했다.알렉산드르 1세는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앙숙 관계였던 오스트리아 제국과 손을 잡고 직접 군대를 지휘해 프랑스 제1제국에 대항했는데,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통칭 '삼제三帝회전')에서 참패하여 포로 신세가 될 뻔한 굴욕을 당했다. 이 패배로 러시아에 돌아온 후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대놓고 항의하지도 못하고 영국과 밀무역을 하는 등의 의심을 받다가 1812년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동진해오자 이에 맞서 초토화 전술을 강행하여 프랑스 군대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국의 부도(副都)인 모스크바만 함락하면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한 듯 싶지만, 러시아답게 모스크바 시민을 소개하고 도시를 파괴한 뒤 인근 농가를 초토화시켜 프랑스군이 폐허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그 사이 러시아는 군대를 끌어모았다. 쿠투조프 원수가 지휘한 러시아 군대는 정면대결보다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협상을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소득 없이 철수하거나 수도인 북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는 방안 중에서 선택해야 했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 군대에게 퇴각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이때의 패배는 워털루 전투와 함께 나폴레옹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러시아의 승리는 그때까지 적어도 육상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나폴레옹을 확실히 꺾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러시아는 위대한 '조국전쟁'의 이념을 선전하며 러시아 제국의 위세를 드높였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이때 러시아의 힘을 과대평가한 서방국가들은 모두 러시아를 유럽 세계의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한 몫 끼워주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그 광대한 국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때문에) 서유럽처럼 개혁을 시도하는 데 실패했다. 182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터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젊은 귀족들이 러시아의 문제점과 후진성을 자각하고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강력한 황실의 힘을 누르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가 반동정치를 강화하고 개혁을 거부하였다.
특히 이때까지도 러시아는 농노제를 통한 중세 봉건제 사회를 채택했고 많이 잡으면 전체 인구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농노들에 대한 처우는 좋지 않았다. 심지어 도박판에서 농노를 판돈으로 거는 귀족과 지주가 있었을 정도.
3.2.3. 왕조 말기
러시아의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크림 전쟁(1853~1856) 때였다. 러시아 군대의 후진적인 모습은 다같이 막장이었음에도 두드러져 보였고, 패전 직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더 낫다'며 국가로부터의 개혁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1861년 역사적인 농노 해방령을 내렸다.그러나 농노 해방령은 러시아가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의 준비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시행되었다. 농민들은 더 궁핍해졌고 견디다 못해 다시 농노가 되는 농민도 있을 정도였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러시아의 지식층과 개혁파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러시아 제국은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만 보여주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인민주의 단체의 폭탄 암살으로 사망했다.[15]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1894)는 이를 계기로 반동, 억압정치를 더욱 강화했다.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도 결정되게 되었다.[16]
로마노프 왕조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가정적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성품이었는데, 군주로는 고집불통에 전제군주제를 가부장적 왕권신수설과 결부시켜 전문가의 조언은 전혀 듣지 않고, 독단적이라 신하들의 소통에도 문제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국정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대외 전략이나 내정 개혁 비전도 없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배하기도 했었다.
러일전쟁 도중 발생한 경제난으로 '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제정에 최후의 희망을 가졌던 모든 이들의 기대는 박살났고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은 이것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즉, 1905년 터진 1차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에 격렬히 항의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12년 후의 2차 혁명의 전조였다.
처음에는 민중들의 거센 항의를 무시했던 니콜라이 2세는 저항이 점점 더 커지자 두려운 마음에 개혁을 약속했고, 의회인 두마를 설치하고 사이비로나마 입헌군주제를 표방했다. 차르는 이 요구가 아마 한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러시아 민중은 이제 제정에 희망을 버렸고 전제정에 신물을 내고 있었다. 1914년, 복잡한 동맹관계에 의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이러한 불만과 분노와 증오가 일시에 폭발했다.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 계속되는 전선의 패배 소식 등 모든 것이 제국의 실정(失政)과 무능과 부패를 보여주었다.
1917년, 러시아력 2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빵을 달라는 민중시위는 금세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 마침내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 2월 혁명) 전선에서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선언, 동생에게 양위하였지만 동생 미하일 대공이 거부하여 제정은 붕괴되고 임시정부가 통치하는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선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러시아력 10월에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뒤엎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건국된다. ( 10월 혁명) 1918년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자 유폐되었던 황제 일가는 처형되었으며, 다른 황족들 역시 국외로 망명하거나 피살당하고, 이것으로 300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도 역사 속의 잔재로만 남게 되었다.
3.2.4. 현황
1917년 2월 혁명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며 제위를 잃은 로마노프 왕조는,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이 전부 살해당하여 직계가 단절되었다.[17] 이후 니콜라이 2세의 숙부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18][19] 이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이 되었고 키릴 대공의 사후 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1917~1992) 대공 또한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현재 여러 개의 파벌로 갈라지게 되었다.현재 러시아 제위 요구자(=로마노프 가문의 수장)는 총 3명으로 그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는 당연히 블라디미르 대공의 외동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이다.[20] 그녀의 외아들 게오르기 대공은 현재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으며, 러시아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이는 바로 앤드루 로마노프 공작(Prince Andrew Romanoff/Prince Andrew Andreevich of Russia)[21]이었는데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이 되어 작가이자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앤드루 공작은 2021년 98살에 사망했는데, 문제는 장남 알렉시스(1953년생)는 자녀가 없고 남동생 둘에 조카딸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는 앤드루 공작의 5촌 조카[22]인 로스티슬라브(1985년생, [age(1985-01-01)]살)[23], 니키타(1987년생, [age(1987-01-01)]살) 형제가 있다. 알렉시스 공작 기준으로는 두 형제가 알렉시스 공작의 두 남동생 뒤를 이어 계승순위 3위와 4위가 된다.
마지막 인물은 독일어로는 카를 에미히 추 라이닝겐(Karl Emich Prinz zu Leiningen), 러시아어로는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레이닌겐로마노프(Николай Кириллович Лейнинген-Романов)인 인물로 자신의 5대조가 알렉산드르 2세이고, 그는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이 파벨 1세가 제정한 러시아 제위 계승법에서 규정한 동등결혼(= 통치 가문끼리의 결혼만 동등결혼)을 하지 않았으니[24] 그의 딸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에게 계승권이 없다는 주장을 근거로 자신이 적통 러시아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다.[25] 그는 제7대 라이닝겐 후작[26] 에미히(Emich, Emich Fürst zu Leiningen)의 장남으로 라이닝겐 후작위 후계자였으나 귀천상혼[27][28]을 하는 바람에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안톤 알렉세예비치 바코프(Anton Alexeevich Bakov)라는 사업가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그의 도움을 얻어 로마노프 제국(Romanov Empire)이라는 초소형 국민체를 만든 뒤 자신을 전러시아의 황제(Император Всероссийский)[29] 니콜라이 3세로 칭하며 즉위해버렸다. 이후 그는 로마노프 제국이 초소형 국민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실제 영토를 알아보고 있다고 하고, 실제로 땅을 구입하여 그 곳에 로마노프 제국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게 번번히 저지당했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이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가장 정통성에 가까운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외아들, 게오르기 대공의 아버지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카를 프란츠 공[30]으로[31] 마리아 여대공 사후 게오르기 대공이 어머니의 지위를 계승한다면 가문의 이름이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에서 호엔촐레른로마노프로 바뀔 예정이기 때문에 혹여 러시아에서 왕정 복고가 실현된다고 해도 1차,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이라면 이를 가는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적이던 프로이센 왕가의 성씨를 사용하는, 빌헬름 2세의 직계후손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이다.[32] 물론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역시 공식적으로는 로마노프 왕조라는 이름으로 러시아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 전 사례와 같이 공식적으로는 그냥 로마노프 가문으로 유지될 가능성도 있다.
거기다가 게오르기 대공은 독일에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구사하는 4가지의 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 독일어가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언론에 따르면 게오르기 대공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자신이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이 될 것이라는 것과 표트르 대제의 위대함 및 러시아의 역사를 배우며 자란지라 완벽하게 러시아계 스페인인으로 자랐다고 한다.[33] 게다가 그는 2006년을 시작으로 러시아에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2014년 브뤼셀에 설립한 회사의 이름은 Romanoff & Partners (로마노프 & 파트너스)라고 한다. 즉, 현재까지의 게오르기 대공은 러시아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1년 10월 2일.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장남 게오르기 대공이 레베카 베타리니(Rebecca Virginia Bettarini)라는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성 이사악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로마노프 가문의 결혼식이 러시아 본토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 신부인 레베카 베타리니가 통치 가문, 즉 왕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레베카 베타리니는 러시아 대공비가 아닌 '빅토리아 로마노프 공작 부인 전하(Her Serene Highness Princess Victoria Romanoff)'로 불릴 예정이라고 한다.
4. 역대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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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187, #0039A5 20%, #0039A5 80%, #002187);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류리크 왕조 | 고두노프 왕조 | ||
이반 4세 | 표도르 1세 | 이리나 고두노바 | 보리스 고두노프 | |
고두노프 왕조 | 비왕조 | 슈이스키 왕조 | 바사 왕조 | |
표도르 2세 | 가짜 드미트리 1세 | 바실리 4세 | 블라디슬라프 지기몬토비치 | |
로마노프 왕조 | ||||
미하일 1세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표도르 3세 | 이반 5세 | |
표트르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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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표트르 1세 | 예카테리나 1세 | 표트르 2세 | 안나 이바노브나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반 6세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표트르 3세 | 예카테리나 2세 | |
제9대 | 제10대 | 임시 | 제11대 | |
파벨 1세 | 알렉산드르 1세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 니콜라이 1세 |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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Та же верховная Самодержавная власть принадлежит Государыне Императрице, когда наследство Престола в порядке, для сего установленном, дойдет до лица женского; но супруг Ее не почитается Государем; Он пользуется почестями и преимуществами, наравне с Супругами Государей, кроме титула.
여제(女帝)가 제위를 승계할 때, 여제는 동일한 최고 전제권을 가지지만 국서(國壻)는 군주가 아니다. 국서는 칭호를 제외하고 황후[34]와 동일한 명예와 특권을 누린다.
러시아 제국 헌법 제6조, 1905년
여제(女帝)가 제위를 승계할 때, 여제는 동일한 최고 전제권을 가지지만 국서(國壻)는 군주가 아니다. 국서는 칭호를 제외하고 황후[34]와 동일한 명예와 특권을 누린다.
러시아 제국 헌법 제6조, 1905년
뒤에 붙는 '~비치(남성)'나 '~브나(여성)'의 경우는 누구의 자식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국가에서 시집온 여성들은 정교회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새로 받을 때 대부모 또는 주보성인의 이름을 부칭으로 삼았다. 예컨대 예카테리나 1세, 2세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같은 경우.
대수 | 이름 | 탄생 | 사망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기간 | 비고 |
01 |
미하일 1세 표도르비치 Михаи́л I Фёдорович |
1596.7.12 | 1645.7.13 | 1613.2.21 | 1645.7.12 | 32년 149일 | |
02 |
알렉세이 3세 미하일로비치 Алексей III Михайлович |
1629.3.9 | 1676.1.29 | 1645.7.12 | 1676.1.29 | 20년 208일 | |
03 |
표도르 3세 알렉세예비치 Фёдор III Алексеевич |
1661.6.9 | 1682.5.7 | 1676.1.29 | 1682.5.7 | 6년 100일 | [35] |
04 |
이반 5세 알렉세예비치 Иван V Алексеевич |
1666.8.27 | 1696.2.8 | 1682.5.7 | 1696.2.8 | 13년 280일 | [36] |
04 |
표트르 1세 알렉세예비치 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
1672.6.9 | 1725.2.8 |
1682.5.7 1696.2.8 |
1696.2.8 1725.2.8 |
42년 280일 |
[37] |
여황제 시대 | |||||||
05 |
예카테리나 1세 알렉세예브나 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
1684.4.15 | 1727.5.17 | 1725.2.8 | 1727.5.17 | 2년 98일 | [38] |
06 |
표트르 2세 알렉세예비치 Пётр II Алексеевич |
1715.10.23 | 1730.1.30 | 1727.5.18 | 1730.1.30 | 2년 258일 | [39] |
07 |
안나 이바노브나 А́нна Иоа́нновна |
1693.2.7 | 1740.10.28 | 1730.1.30 | 1740.10.28 | 10년 274일 | [40] |
08 |
이반 6세 안토노비치 Иоанн IV Антонович |
1740.8.23 | 1764.7.16 | 1740.10.28 | 1741.12.6 | 1년 39일 | [41] |
09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 |
1709.12.29 | 1762.2.3 | 1741.12.6 | 1762.1.5 | 20년 30일 | [42] |
10 |
표트르 3세 표도로비치 Пётр III Фёдорович |
1728.2.21 | 1762.7.17 | 1762.1.5 | 1762.7.9 | 185일 | [43] |
11 |
예카테리나 2세 알렉세예브나 Екатерина II Алексеевна |
1729.5.2 | 1796.11.17 | 1762.7.9 | 1796.11.17 | 34년 140일 | [44] |
여제 시대 이후 | |||||||
12 |
파벨 1세 페트로비치 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
1754.10.1 | 1801.3.23 | 1796.11.17 | 1801.5.23 | 4년 187일 | |
13 |
알렉산드르 1세 파블로비치 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
1777.12.23 | 1825.12.1 | 1801.3.24 | 1825.12.1 | 24년 258일 | |
14 |
니콜라이 1세 파블로비치 Николай I Павлович |
1796.7.6 | 1855.3.2 | 1825.12.1 | 1855.3.2 | 29년 98일 | |
15 |
알렉산드르 2세 니콜라예비치 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
1818.4.29 | 1881.3.13 | 1855.3.2 | 1881.3.13 | 26년 11일 | |
16 |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로비치 Александр III Александрович |
1845.3.10 | 1894.11.1 | 1881.3.13 | 1894.11.1 | 13년 236일 | |
17 |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로비치 Николай II Александрович |
1868.5.18 | 1918.7.17 | 1894.11.1 | 1917.3.15 | 22년 139일 | [45] |
5. 현존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46]
노랑색 바탕은 러시아 제국 황제 현재 가주는 굵은 글씨로 표기. 미성년에 죽은 사람들과 여계 계승이 아닌 여자는 생략. 이름 앞의 숫자는 올덴부르크 왕조의 현 종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 본가 당주 계승 순위.5.1. 직계( 알렉산드르 2세의 후손)
니콜라이 1세 |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 | 알렉세이 | |||
미하일 | 게오르기 | ||||||
블라디미르 | 키릴 | 마리야[47] | 에미히[48] | 카를 에미히[49] | 에미히 | ||
블라디미르 | 마리야 | 게오르기[50] | 알렉산드르 | ||||
보리스 | |||||||
안드레이 | 블라디미르 | ||||||
알렉세이 | 알렉세이 | 세르게이 | |||||
세르게이 | |||||||
파벨 | 드미트리 | 파벨 로마노프스키 | 38.디미트리 로마노프스키 | ||||
39.미하일 로마노프스키 |
5.2.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후손[절손]
니콜라이 1세 | 콘스탄틴 | 니콜라이 | 아르테미 | |
알렉산드르 | 키릴 | |||
콘스탄틴 | 이오안 | 베스폴로드 | ||
가브릴 | ||||
콘스탄틴 | ||||
올레그 | ||||
이고르 | ||||
게오르기 | ||||
드미트리 |
5.3.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후손[절손]
니콜라이 1세 | 니콜라이 | 니콜라이 | ||
페테르 | 로만 | 니콜라이 | ||
드미트리 |
5.4.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후손
니콜라이 1세 |
미하일 | 니콜라이 | ||||
미하일 | 미하일 | |||||
게오르기 | ||||||
알렉산드르 | 안드레이 | 미하일 | ||||
안드레이 | 40.알렉시스 | |||||
41.표트르 | ||||||
42.안드레이 | ||||||
표도르 | 미하일 | 미하일 | ||||
니키타 | 니키타 | 표도르 | ||||
드미트리 | ||||||
로스티슬라프 | 로스티슬라프 | 43.로스티슬라프 | 로스티슬라프[53] | |||
44.니키타 | ||||||
니콜라이 | 45.니콜라이 | |||||
46.다닐 | 47.잭슨 다닐 | |||||
바실리 | ||||||
세르게이 | ||||||
알렉세이 |
6. 여담
-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가는 창시자인 표트르 3세와 그의 아들 파벨 1세가 키도 작은 추남이었지만, 19세기 이후에는 미인이 많은 왕가로 정평이 나게 된다. 다름아닌 파벨 1세의 후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가 굉장한 미인으로 그 유전자를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들에게도 제대로 물려줬기 때문이다.[54] 니콜라이 1세로부터 시작되는 미남미녀의 황족 계보는 모두 조피 도로테아의 자녀였다.[55] 그런데 그에 비례해서 경박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황족이 늘어났다. 이런 점 때문에 외모가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로마노프 왕가의 평판은 러시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자신의 딸들이 잘생긴 외사촌들에게 호감을 보이자, 딸들에게 '네 사촌들이 그 잘생긴 얼굴로 문 뒤에서 시녀들과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되면 놀라 뒤집어질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리야의 차녀 빅토리아 멜리타는 기어코 외사촌인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결혼했지만, 말년에 키릴이 다른 여자와 바람피는 걸 보고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었다며 기겁했다.
- 키릴 블라디미로비치까지 갈 것 없이 로마노프 왕조의 사실상 중시조인 니콜라이 1세부터가 수많은 내연녀를 두며 사생아를 낳았던 사람이고,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드르 2세[56],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57],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58]도 화려한 여성편력을 벌이며 수많은 여자와 혼외정사를 하여 사생아를 낳아댔다. 니콜라이 1세의 아들들 중 사생아를 낳거나 내연녀를 들이지 않고 오로지 아내에게만 충실한 사람은 막내아들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뿐이다.
- 참고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모계조상인 로마노프 왕조는 키가 더 큰데, 초대 황제 표트르 1세의 키는 203cm, 조카이자 4대 여제 안나 이바노브나의 키는 189cm, 차녀이자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키는 180cm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구성원들보다 평균키가 훨씬 더 크다.
- 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키는 이렇다.
- 표트르 1세(203cm) - 역대 러시아 황제 중 최장신이자, 역대 러시아의 지도자 중 최장신.
- 알렉산드르 3세(190cm)[59] - 역대 러시아의 지도자 중 2위 장신.
- 안나 이바노브나(189cm) - 역대 러시아의 지도자 중 공동 3위, 역대 러시아의 여성 지도자 중 최장신.
- 니콜라이 1세(189cm) - 역대 러시아의 지도자 중 공동 3위 장신.
- 알렉산드르 2세(186cm) - 역대 러시아 황제 중 4위 장신, 역대 러시아 지도자 중 5위 장신.[60]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180cm) - 역대 러시아 황제 중 5위 장신, 역대 러시아 지도자 중 6위 장신, 역대 러시아 여성 지도자 중 2위 장신.
- 알렉산드르 1세(178cm) - 역대 러시아 황제 중 6위 장신, 역대 러시아 지도자 중 공동 7위 장신.[61]
- 니콜라이 2세(170cm)
- 표트르 3세(170cm)
- 파벨 1세(166cm)
- 예카테리나 2세(157cm)
- 예카테리나 1세(154cm)
-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딸부잣집에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 환자여서 아들 병 고치려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등용했다가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는데 한몫해서(...) 부각이 잘 안되는데 니콜라이 1세 이래로 러시아 황실은 아들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니콜라이 1세가 4남 4녀, 알렉산드르 2세가 6남 2녀(귀천상혼 자녀까지 합하면 8남 4녀), 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들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4남 2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2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 알렉산드르 3세가 4남 2녀, 그 밑에 동생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4남 1녀를 두었다. 그 외에도 콘스탄틴 대공의 차남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이 6남 3녀, 미하일 대공의 4남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사생아를 제외하고 아들을 6남이상 낳은 사람만 4명이다. 그리고 황자들이 황녀보다 2배 이상 더 많았다. 러시아 혁명으로 많은 황족들이 총살당했지만 자손들이 워낙 많아서 현재도 로마노프 가문의 후손들이 많이 있다. 물론 윗 문단에서 보듯 엄격하게 규정된 귀천상혼 문제와 준살리카법 문제로 실제 계승권이 있는 후손은 그렇게 많지 않다.
7. 대중매체에서
- 러시아 왕조라는 내력 탓인지 나타샤 로마노프, 알렉산더 로마노프처럼 러시아인이거나 러시아 혈통의 캐릭터한테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종종 붙는다.
- 명탐정 코난: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는 원래 이들의 소유였던 임페리얼 이스터 에그[62]가 작중 중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니콜라이 2세의 후손과 라스푸틴의 후손이 등장하는 건 덤.
- 야인시대 54화에서 유진산이 짤막하게 언급한다. "오랫동안 국민을 착취하고 유린한 것은 사실"이라고 비판적으로 말한다. 유진산이 이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극렬 반공주의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로마노프 왕조에게 비판적으로 대하는 것은 특이하다.[63]
- < 마지막 차르>라는 넷플릭스 다큐에서는, 이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그에 대비되는 씁쓸한 몰락을 볼 수 있다.
- 한국의 대체역사물 동방의 라스푸틴의 주 배경이 로마노프 왕조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다. 21세기에도 멀쩡히 러시아 제국이 존속하는 만큼 로마노프 왕조도 여전히 제위를 이어가고 있다.[64]
[1]
로마노프 가문의 문장.
[2]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문장. 왼쪽이 로마노프 가문의 문장이며 오른쪽이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문장이다.
[3]
러시아 제국 대형 국장.
[4]
러시아식으로는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레이닌겐로마노프. 자칭 니콜라이 3세.
[5]
표트르 3세의 외가이기도 하다.
[6]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종가다. 본가는
올덴부르크 왕조로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의 왕조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본가이기도 하다.
[7]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파벌 공식 홈페이지.
[8]
이반 5세와
표트르 2세,
이반 6세,
표트르 3세가 빠져있다. 아무래도 왕조 내에서 흑역사라 치부될 차르들은 제외한 듯.
[]
[10]
참고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본가도 이쪽 출신이다.
[11]
이주 경위에 대해서는, 코빌라의 아버지가 튜튼 기사단에 반역을 저지르려다 실패해서 도망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2]
참고로 Великий Князь/Великая княгиня는 영어로 번역할 때 Grand Duke/Duchess로 번역하고 Князь/княгиня는 Prince/Princess로 번역해서 번역이 원어와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Князь가 의미 및 기원상 슬라브어권 고유의 작위에 가까운 것에 기인한다.
[13]
언니의 아들.
[14]
흔히 우리가
흑토라고 부르는 그 천혜의 농토이다.
[15]
첫 테러 때는 무사했으나, 멀쩡히 살아나와 "난 괜찮다"고 하는 순간 대기했던 또다른 암살범이 기다렸다는 듯이 폭탄을 던졌다.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도다…"라는 말을 겨우 했는데,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가서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3세는 업적 또한 많이 쌓아놓아, 그렇게까지 평가가 나쁜 인물은 아니다.
[17]
니콜라이 2세의 넷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다섯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총살 현장에서 살아남아 몰래 빠져나갔다는 루머가 계속 있었다. 실제로 아나스타시야 공주를 사칭한 여성도,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착각한 남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물론 알렉세이 황태자의 경우 남성분은 진짜는 아니지만, 나중에 니콜라이 2세의 유전자와 검사 결과 친족인 것으로 확인되어 혼외자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18]
빅토리아 멜리타의 남편. 1917년 당시 제위 계승 순위 3위였다. 계승 순위 1위였던 황태자 알렉세이와 2위 미하일 대공(니콜라이 2세의 막내 남동생)은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미하일 대공은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그의 외아들에게는 제위 계승권이 없었고 그마저도 21살에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19]
그러나 로마노프 황족들의 항의를 받았는데 키릴 대공은 당시 3순위 계승권자였지만 정교회에서 금지한
사촌간 혼인인
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하면서 계승권이 박탈될 뻔했는데, 니콜라이 2세가 원활한 제위 계승을 위해 그 혼사를 인정해 주었는데도 정작 로마노프 황족들 중에서 가장 먼저 러시아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서 배신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20]
러시아 제국의 제위 계승법은 남자 계승권자가 없는 경우에 한해 딸의 제위 계승을 허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귀천상혼한 후손을 제외한 로마노프 가문의 남계후손이 남아있지 않음을 근거로 본인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있다.(2021년 안드레이 공이 사망함으로써 귀천상혼이 엮이지 않은 로마노프의 남계남자 후손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한편 마리야 여대공의 고모이자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작은누나인 키라 여대공은 현재 프로이센 왕실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할머니이다.
[21]
러시아식으로 안드레이 로마노프. 순수 혈통의 마지막 남계 로마노프 혈통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막내 미하일과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아 여대공의 손자로 크세니아가
크리스티안 9세의 손녀이므로 덴마크 왕실 혈통도 아주 조금은 있다. 1923년생으로 끝내 2021년 11월 28일 사망.
[22]
앤드루 공작의 사촌동생의 아들이므로 역시 니콜라이 1세-미하일의 후손이고, 또한 크세니아 공주의 후손도 된다.
[23]
아내와의 사이에 이미 [age(2013-01-01)]살 된 아들이 있는데, 2021년 9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24]
그는
조지아를 통치했었던 왕가인
바그라티온 왕가 출신 여성과 결혼했는데, 카를 에미히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왕가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이미 주권 가문이 아니었으므로 귀천상혼이라는 것이다.
[25]
상기한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의 장녀 마리아 키릴로브나 여대공의 손자로,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또한 마리아 키릴로브나의 여동생의 손자인, 프로이센 왕실 수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는 6촌간이다.
[26]
슈탄데스헤어 중 하나이다.
[27]
정확히는 사별 후 재혼이 귀천상혼이다. 재혼 상대는
티센 가문 출신의 가브리엘레 레나테 티센이었는데, 귀천상혼까지 해가며 결혼했지만 1998년에 이혼하고 레나테는 바로
이스마일파의 수장 아가 칸 4세와 결혼한다(...) 아가 칸 4세에게도 재혼이었다가 끝내 2014년 또 이혼. 한편 에미히는 2007년에 백작가 딸과 3혼했고, 그 결혼에서 아들 에미히를 봤다.
[28]
재밌는 건 그가 로마노프 수장을 자칭한 주장에 근거하면 자기 자식에게 수장직을 못 물려준다는거다. 재혼 사이에서 난 자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3혼한 백작가 여식과의 결혼은 라이닝겐 가문 기준으로는 동등결혼이지만, 그녀가 통치 가문은 물론
슈탄데스헤어 출신도 아니기 때문에 러시아 제위 계승법 기준으로는
귀천상혼인 것이다. 그래서 영어 위키에서는 그의 후계자를 그의 아들 에미히가 아니라 동생이자 현재 라이닝겐 가문 수장인 안드레아스로 보고 있다. 그는
하노버 가문 수장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의 3녀 알렉산드라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고 있다.
[29]
러시아 제국 시절 황제의 공식 약칭이다.
[30]
카를 프란츠 공은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직계 후손(6남 요아힘 왕자의 손자.)으로, 게오르기 대공은 현재 프로이센 왕실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와는 부계혈통상 8촌 사이이다. 또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할머니 키라 여대공이 마리아 여대공의 고모이므로,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기준으로 하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게오르기 대공은 6촌이 된다.
[31]
즉, 마리아 여대공과 카를 프란츠 공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게오르기 대공이다. 현재는 카를 프란츠 왕자과 마리아 여대공은 이혼한 상태로 게오르기 대공은 어머니와 함께 자랐다고 한다.
[32]
여담으로
빌헬름 2세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프린세스 로얄(Victoria, Princess Royal)이기 때문에 게오르기 대공 역시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
[33]
반대로 그의 아버지인 카를 프란츠 공은 게오르기 대공에게 "너는 러시아 황실의 모계 후손이므로 러시아의 대공이 아닌 프로이센의 게오르크 공(His Royal Highness Prince Georg of Prussia)이다."라고 교육시켰다고 한다.
[34]
남자 황제의 황후를 말함.
[35]
표트르 1세의 이복형.
[36]
공동황제. 표트르 1세의 이복형으로, 정신지체가 있어서 실제 정무는 보지 못했다.
[37]
1696년 2월 8일까지 이복형 이반 5세와 공동황제였다가 그 이후부터는 단독황제가 되었다. 1721년, 러시아 제국을 정식 선포하고 자신을 "임페라토르(황제)"라고 칭함.
[38]
황태자 알렉세이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고문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훗날의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2번째 황후인 예카테리나가 즉위했다. 농민 출신에, 게다가 러시아인도 아니고 독일계였다. 그래서 문맹이었기에, 정무는 귀족들의 추밀원이 맡았다. 표트르 1세가 재위하던 중 제위계승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는 생전에 그녀를 공동통치자로 못박아 놓았었다.
[39]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할아버지 표트르 1세의 개혁 반대자라고 자칭하며 반개혁에 앞장섰으나 결혼식 직전에
천연두로 사망,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 남계가 단절된다.
[40]
이반 5세의 딸. 정권의 반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반 5세 혈통의 안정을 위해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손자 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41]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벨프 가문 출신의 군주. 생후 2개월의 나이에 즉위했다. 섭정은 비론과 어머니 안나 레오폴도브나가 맡았으나, 다음해 일어난 엘리자베타의 쿠데타로 슐레실부르크 요새에 유폐되었다. 이후 육군장교 미로비치가 그를 탈출시키려다가 실패, 23세의 나이로 살해당한다.
[42]
정통 로마노프 왕조의 종식.
[43]
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 왕조 창건. 즉위 6개월 4일만에 폐위되었다가 급사.
[44]
표트르 3세의 아내.
[45]
피의 일요일,
러시아 혁명. 퇴위 후 유배되었다가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총살.
[46]
대공 여대공 등의 호칭은 생략.
[47]
6대 에미닝겐 후작 부인
[48]
7대 에미닝겐 후작
[49]
자칭
[50]
빌헬름 2세의 막내아들인
요아힘 폰 프로이센의 장손.
[절손]
남계는 절손됨.
[절손]
남계는 절손됨.
[53]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계승권이 없음.
[54]
뷔르템베르크의 키크고 잘생긴 유전자를 로마노프에게 물려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피 도로테아의 뷔르템베르크 가문은
비텔스바흐 가문처럼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55]
그나마 파벨 1세의 자녀들도 전부 다 미인은 아니고 어머니를 닮아, 외모가 뛰어난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를 닮아 약간 외모가 딸리는 자녀들도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전자였고 그도 당대 미녀 공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와 결혼하면서, 그 둘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로마노프 왕조에선 정말 장신의 미남미녀들이 많아진다.
[56]
자기 딸보다 어린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사생아를 낳았으며, 황후
헤센의 마리 공녀가 사망한지 얼마 안된 말년에는 돌고루코바와
귀천상혼으로 재혼까지 했다. 정작 돌고루코바는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마자 자식들과 함께 러시아에서 쫒겨났다.
[57]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와 연애결혼을 했지만 발레리나 출신의 내연녀와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야반도주하고 사생아까지 낳으면서 가정을 파탄냈다.
[58]
발레리나 출신의 내연녀와 대놓고 동거하며 사생아까지 낳다가 그 내연녀가 먼저 죽자 미쳐버려서 유폐된 채로 죽었다.
[59]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가 193cm, 사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198cm로 알렉산드르 3세보다 더 크다.
[60]
4위는 187cm의
보리스 옐친.
[61]
다른 한 명은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
[62]
게임에서 떡밥이나 패러디 등을 집어놓은 걸 말하는 이스터 에그가 아니라,
부활절날 러시아 황실에 바쳐지는
보석과
금으로 만든
달걀 모양 장식품이다.
[63]
물론 드라마 내에 반공 성향을 좀 덜어내기 위한 각색일 수도 있으며, 애초에 반공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그나마 민주주의 성향의 정치인으로도 묘사되는 그가 부패한 왕족들을 좋게 볼 이유도 전무하다. 무엇보다 유진산의 말도 잘 들어보면 "공산당이 억울한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냈다."가 아니라 "공산당은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냈으면서 그들보다 잘 하지도 못하고 있다."에 가깝다. 유진산이 공산당을 두고 로마노프 왕조처럼 인민을 착취하고 유린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숙청에 대해 언급하며 개인은 사라지고 누구도 말할 자유를 잃었다며 로마노프 왕조 못지않게 공산당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64]
다만 여러 차례의 법 개정으로 니콜라이 2세의 후손만이 제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했는데, 알렉세이 로마노프가 딸 하나만 남겨놓고 죽는 바람에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의 모계 후손으로 제위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