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9E7AD><colcolor=#000000> 헤센 대공국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대공비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Prinzessin Victoria Melita von Sachsen-Coburg u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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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독일어 |
빅토리아 멜리타 (Victoria Melita) |
러시아어 |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Виктория Фёдоровн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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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6년 11월 25일 | |
영국령 몰타 아타르드 산 안톤 궁전 | ||
사망 | 1936년 3월 2일 (향년 59세) | |
나치 독일 아모르바흐 | ||
배우자 |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1894년 결혼 / 1901년 이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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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1905년 결혼) | ||
자녀 | 엘리자베트, 마리야, 키라, 블라디미르 | |
아버지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알프레드 | |
어머니 |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 |
형제 | 알프레드, 마리, 알렉산드라, 베아트리스 | |
종교 | 성공회 ( 잉글랜드 국교회) → 정교회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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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알프레드의 차녀이자 셋째이며,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다.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의 동생이다. 애칭은 더키.(Ducky)2. 작위
문장 |
- 에든버러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Victoria Melita of Edinburgh (1876년 11월 25일 ~ 1893년 8월 23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Victoria Melita of Saxe-Coburg and Gotha (1893년 8월 23일 ~ 1894년 4월 9일)
- 헤센의 대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1894년 4월 9일 ~ 1901년 12월 21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Victoria Melita of Saxe-Coburg and Gotha (1901년 12월 21일 ~ 1905년 10월 8일)
- 러시아의 대공비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전하 Her Imperial and Royal Highness Grand Duchess Victoria Feodorovna of Russia (1905년 10월 8일 ~ 1936년 3월 2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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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빅토리아 멜리타 |
1876년, 아버지 알프레드가 해군 복무 중에 머물렀던 몰타섬의 산 안톤 궁전에서 태어났다. 두번째 이름인 '멜리타'는 '몰타'에서 따온 것이다.
빅토리아는 몰타 섬과 런던을 오가면서 자랐고, 1893년에 아버지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코부르크에서 마지막 청소년기를 보냈다. 빅토리아는 자신과 한 살 차이나는 언니인 마리와 가장 친했다고 한다. 수줍음이 많으며 예민한 성격의 빅토리아는 보랏빛 눈에 키가 크고 안색이 어두운 소녀였다.
1891년, 14살의 빅토리아는 외숙모 알렉산드라 대공비[1]의 장례식에서 사촌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만났다.[2]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으나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둘의 사이를 반대했다. 마리야는 딸에게 러시아 정교회는 사촌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충고했다. 아직 어렸던 빅토리아는 어머니의 말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3.2. 결혼
이후 빅토리아는 집안으로부터 고종사촌인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 일에는 언니 마리와 관련된 뒷사정이 있었다.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웨일스의 공자 조지는 마리를 사랑해 그녀와 결혼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지의 아버지이자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에드워드 7세, 마리의 아버지이자 당시 에든버러 공작이었던 알프레드, 조지와 마리의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조지의 어머니 웨일스 공비 알렉산드라와 마리의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마리야는 동서지간인 알렉산드라와[3] 시가인 영국을 싫어했기 때문에, 딸을 자신처럼 영국의 왕족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결혼은 무산되고 마리는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했다. 후손의 혼사에 관여하는 걸 좋아하는 빅토리아 여왕은 뜻대로 되지 않은 손녀의 결혼에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다음 차례인 빅토리아 멜리타의 결혼은 빅토리아 여왕의 뜻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딸 영국의 앨리스의 아들인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아들 알프레드의 딸 빅토리아의 결합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며 결혼을 밀어붙였다. 에른스트와 빅토리아는 서로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1894년 4월 19일, 빅토리아 멜리타와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코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에른스트는 헤센의 대공으로서의 의무를 우선시했고 빅토리아는 자신에게 더 다정한 남편을 원했다. 빅토리아는 1895년에 딸 엘리자베트를 낳았지만 부부의 사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부부는 각각 하나뿐인 딸을 매우 사랑했다. 특히 에른스트의 딸 사랑은 유명했는데, 그는 외동딸에게 모든 애정을 퍼부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날이 갈수록 엄마를 빼닮아 갔지만, 에른스트는 아내에게는 무심한 반면에 딸을 너무나 사랑했다. 결국 가정은 부부가 서로에게 냉담하면서 딸의 애정을 경쟁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에른스트와 빅토리아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싸움이 오가곤 했다.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빅토리아는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졌다. 또한 당시 소문에 의하면 외출하고 돌아온 빅토리아가 에른스트와 남자 하인이 동침(!)하는 걸 목격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는 이런 상태를 참을 수 없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맺어준 혼인을 깰 수 없었기 때문에 이혼은 불가능했다.
결국 1901년, 빅토리아 여왕 사후에서야 빅토리아는 집을 나왔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빅토리아는 이혼 후 코부르크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빅토리아 에른스트 부부는 딸 엘리자베트의 양육을 각각 반 년씩 맡기로 했다. 이 이혼은 유럽 왕실에 굉장한 스캔들이었고 빅토리아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오직 전 남편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그의 누나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만이 이혼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딸 엘리자베트마저 어머니를 원망했는데,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한 번은 엘리자베트가 어머니 빅토리아의 집으로 가는 날에 사라지는 소동이 발생했다. 숨어있는 딸을 발견한 에른스트는 왜 숨었는지 물었다. 이에 엘리자베트는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아빠는 절 사랑하는 걸 보여주시잖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4]
1903년에 엘리자베트는 8살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빅토리아는 깊은 슬픔에 빠져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딸이 죽은 후 빅토리아는 사촌인 러시아의 키릴 대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길 원했지만 키릴의 사촌이자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러시아 황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5] 그러나 1905년에 키릴은 러일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결혼이었기에 키릴은 황실에서 쫓겨나 파리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빅토리아는 두 딸인 마리야와 키라를 낳았다. 얼마 후 키릴의 사촌 니콜라이 2세는 키릴을 복권시켰고,[6] 빅토리아도 러시아 황실의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대공비가 되었다.
3.3. 러시아 혁명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황족이었던 빅토리아와 키릴도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핀란드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빅토리아는 외아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7]를 낳았다. 하지만 러시아의 혼란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빅토리아와 키릴 부부는 물자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빅토리아가 자신의 사촌인 스웨덴의 마거릿 왕세자비에게 아기가 먹을 이유식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사촌인 조지 5세에게 러시아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2년 간의 힘겨운 망명 끝에 부부는 빅토리아의 친가인 코부르크로 향했다. 코부르크에서 빅토리아는 반공 성향인 나치당에 관심을 가지고 돈을 기부했다. 당시 나치당은 창당 초기로 그때까지만 해도 큰 세력은 아니었다.이윽고 니콜라이 2세와 알렉세이 황태자,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모두 볼셰비키에게 살해당한 상황에서 로마노프의 수장은 키릴이 되었다. 키릴은 자신이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라고 선포했으나, 이에 대한 로마노프 일족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유는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된 후 가장 먼저 러시아 임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키릴이었으며[8], 니콜라이 2세의 모후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도 멀쩡히 살아있어서 현실적으로 제위를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마노프 일족에게 있어 키릴의 황제 선포는 니콜라이 2세가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황제를 참칭한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병이 난 키릴을 간호해가며 남편의 뜻을 지지했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와 손을 잡은 독일 입장에서 키릴은 황당하면서도 거슬리는 존재였다. 결국 독일 정부의 압박으로 빅토리아와 키릴은 프랑스의 생 브리악으로 이사했다.
3.4. 말년
생 브리악에서 빅토리아는 지역 주민들과 어울리며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빅토리아는 지역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취미 생활을 하며 한적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빅토리아는 키릴이 이따금씩 파리에서 여자들과 놀아난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 어머니가 했던 충고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빅토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였기에 아이들을 위해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1936년 2월에 빅토리아는 아모르바흐에서 손주의 세례식에 참석한 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여러 친구들과 가족들이 병석에 누운 그녀를 보러 왔다. 빅토리아는 반가운 얼굴을 보며 기뻐했지만 남편의 손길에는 진저리를 쳤다. 1936년 3월 2일에 빅토리아는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해는 글로켄베르크 묘지에 묻혔다가 1995년 3월 7일에 남편의 유해와 함께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의 황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빅토리아 멜리타 (Princess Victoria Melita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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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드 왕자 (Prince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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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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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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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즈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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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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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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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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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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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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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 (Nicola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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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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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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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Grand Duke Louis II of Hes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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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헤센의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Ernest Louis, Grand Duke of Hesse) | ||||
1녀 |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Elisabeth of Hesse and by Rhine) |
1895년 3월 11일 | 1903년 11월 16일 | |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Kirill Vladimirovich of Russia) | ||||
1녀 |
라이닝겐 후작부인 마리아 (Maria, Princess of Leiningen) |
1907년 2월 2일 | 1951년 10월 25일 |
제6대 라이닝겐 후작 카를[11] 슬하 4남 3녀 |
2녀 |
프로이센의 왕자비 키라 (Kira, Princess of Prussia) |
1909년 5월 9일 | 1967년 9월 11일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12] 슬하 4남 3녀 |
1남 |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 (Grand Duke Vladimir Kirillovich) |
1917년 8월 30일 | 1992년 4월 21일 |
바그라티온 무크라니의 레오니다 공녀 슬하 1녀[13] |
5. 대중매체에서
대한민국의 대체역사물 웹소설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역사가 변하며 대한제국이 열강에 오르고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노릴 정도로 성장하며 외교의 일환으로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과 결혼한다. 처음에는 유럽이 으레 그랬듯이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정치에 이용된다는 생각에 싫어하여 영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 즈음에는 건강이 상할 정도였지만, 이형이 가꾼 한성의 풍경에 마음을 조금 고쳐먹었고 이강 또한 마음에 들어하며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다만 영국 왕실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어서 영국 왕실이 쿠데타로 인해 식민지로 쫓겨나자 폭풍에 휘말렸으면 좋겠다고 악담을 퍼부었다. 후에 아시아의 세력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호주의 여왕으로 추대된다.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역사대로 키릴 대공과 결혼하고 자신의 남편인 키릴 대공을 러일전쟁에서 구해준 한국 황제 이선에게 감사의 표시로 에드워드 7세에게 소개 시켜준다.
[1]
막내외삼촌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알렉산드르 2세의 6남)의 아내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요르요스 1세의 장녀).
[2]
참고로 키릴 대공은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의 둘째 오빠이며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
독일 제국의 체칠리에 황태자비,
율리아나 여왕이 그의 외사촌들이다.
[3]
마리야는 자신이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이자 러시아의 여대공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컸다. 이 때문에 겨우 덴마크의 공주인 알렉산드라가 자신의 손윗동서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4]
Michael John Sullivan, A Fatal Passion: The Story of the Uncrowned Last Empress of Russia, Random House, 1997, p.217-218
[5]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촌 간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빅토리아의 전 시누이(전 남편 에른스트의 여동생)였던 게 결정적이었다. 알렉산드라의 입장에서는 오빠와 이혼한 전 올케가 자기 남편의 사촌과 재혼하는 거였기 때문에, 빅토리아와 키릴의 혼인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6]
이는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여서
일찍 죽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고 2순위 계승권자인 니콜라이 2세의 동생 미하일 대공은 귀천상혼을 한 탓에 자손들의 황위 계승권이 없어서, 계승법이 변경되지 않는다면 계승서열이 그 다음 순서였던 키릴 대공과 그 자손이 황위를 이어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7]
1917.8.30.~1992.4.21.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소련과 인생을 함께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세상에 등장하기 두 달 전에 태어나
소련이 붕괴한 지 네 달 뒤에 사망했다. 러시아 소련 땅을 밟은 건 1991년 11월이 처음이자 마지막.
마리야의 아버지.
[8]
다른 로마노프 황족들은 이를 두고 황제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9]
조지 3세의 4남이다.
[10]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이다.
[11]
슈탄데스헤어인 라이닝겐 후작가의 가주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 오빠인 제3대 라이닝겐 후작 카를의 증손자. 밑에 동서인 루이 페르디난트와는 9촌이다.
[12]
마지막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둘째 손자이자
빌헬름 황태자의 차남이자 후계자다. 자세한 가계도는
호엔촐레른 가문 참고.
[13]
현재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물론 블라디미르 대공 사후 마리야 여대공의 승계 문제(
파벨 1세 이후 제정된 여성 승계 금지, 다만 마리야 여대공은 귀천상혼한 후손을 제외한 러시아 황실의 남계후손이 없음을 근거로 계승의 적법성을 주장한다.)로 인해, 황실 내에서도 파벌이 갈라져서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고있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