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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00:24:36

호엔촐레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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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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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호엔촐레른 가문 기본 문장.svg
호엔촐레른 가문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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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호엔촐레른 가문
Haus Hohenzollern
파일:독일 제국 국장(1889).svg
건립일 11세기
창립자 부르크하르트 1세
現 수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국가 루마니아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공국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1. 개요2. 분가 이전3. 분가: 슈바벤계(호엔촐레른 후작가)
3.1. 역대 슈바벤계 수장3.2. 루마니아 왕가3.3. 가계도
4. 종가: 프랑켄계(프로이센 왕가)
4.1. 독일의 황실?4.2. 역대 프랑켄계 수장4.3. 가계도
4.3.1. 빌헬름 1세 (1797 ~ 1888)4.3.2. 프리드리히 3세 (1831 ~ 1888)4.3.3. 빌헬름 2세 (1859 ~ 1941)4.3.4. 빌헬름 폰 프로이센 (1882 ~ 1951)4.3.5.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1907 ~ 1994)4.3.6.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1976 ~ )
4.4. 현황
5. 보유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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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호엔촐레른 가문 기본 문장.svg
호엔촐레른 가문의 흑백 방형 분할 문장(紋章)[1]

파일:역대 프로이센 국왕, 독일 황제.jpg
1901년 프로이센 왕국 건국 200주년 기념 역대 프로이센 국왕과 독일 황제.[2]

파일:역대 독일 황제와 황태자.jpg
독일 제국 건국 이후 역대 독일 황제들과 황태자.[3]

루마니아 왕국(슈바벤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공국,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프랑켄계)의 왕조. 본래는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방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

가문의 본관인 호엔촐레른 성(Burg Hohenzollern)은 브란덴부르크 프랑켄 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슈바벤 지방에 있으며 지금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이 소유하고 있다. 정확히는 2/3는 프로이센 왕가 수장, 1/3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작가 수장의 소유다. 역사적인 관광지인만큼 매년 30만명 가까이 되는 관광객들이 방문하며, 관광 수입도 쏠쏠하다.

1191년에 촐레른의 백작인 프리드리히 3세가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뉘른베르크 성백[4] 자리를 얻었는데, 이후 그의 영지는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콘라트는 뉘른베르크 성백직을, 차남 프리드리히 4세는 촐레른 백작령을 물려받았고, 장남 콘라트의 후손이 프랑켄계(프로이센 왕가), 프리드리히 4세의 후손이 슈바벤계(지크마링겐 후작가)다. 덤으로 촐레른 백작령은 이 분할과 함께 1218년 호엔촐레른 백작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엔(Hohen)이 독일어 고어로 "높이다, 올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대(大) 촐레른 백작령 정도의 의미인 것으로 보통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호엔촐레른이라는 외따른 산 위에 호엔촐레른 성이 건설되었기에, 가문의 이름은 이 지명에서 따온 것에 가깝다.

2. 분가 이전

3. 분가: 슈바벤계(호엔촐레른 후작가)

파일:호엔촐레른 가문 기본 문장.svg
호엔촐레른 후국들의 군주 및 루마니아 왕국의 국왕을 배출한 가계이며, 종교는 가톨릭이다.

슈바벤계가 통치하는 독일 남서부의 공국들은 그저그런 작은 영방(領邦) 국가들로 존재하였다. 1576년에 호엔촐레른 백작령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힝겐 백작령으로 분할되었고, 1623년에 이들 백작령은 후국(Fürstentum)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1850년에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힝겐 두 후국은 프로이센 왕국에 흡수되었다. 여기에 약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자면, 프랑스 2월 혁명 이후 1848년 유럽 전역을 시민혁명이 휩쓸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호엔촐레른 공화국이 선포되고 자신들의 지위가 매우 위험해지자, 1849년에 호엔촐레른헤칭겐 후국의 마지막 군주 콘스탄틴[5]과 즉위한 지 1년 정도 되었던 카를 안톤은 스스로 작위를 포기하고 영토를 먼 친척인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넘겼다. 그리고 1862년까지 프로이센 의회의 수상으로 있다가, 말년에는 그 자리에서도 물러나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톨릭 군주로써 의무를 수행하였다. 호엔촐레른헤힝겐 후국의 마지막 군주였던 콘스탄틴이 가계가 절손된 이후 슈바벤계는 전부 이 사람의 후손. 카를 안톤의 큰아들인 레오폴트[6]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원인이 되는 스페인 왕위 계승의 논란인물이었고, 둘째 아들 카를은 밑에서 언급되다시피 루마니아 왕으로 즉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국도 없어지고 프로이센(프랑켄계 호엔촐레른가)에게 합병당했으면서도, 마구 귀천상혼을 한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친척들에 비해 슈바벤계 가주 일족은 의외로 귀천상혼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세대가 점점 내려오면서 현 수장인 카를 프리드리히부터가 결혼은 왕족 대신 귀족[7]하고 한 데다가, 그마저도 이혼하고 2010년 사진작가인 일반인과 재혼했다. 후계자인 알렉산더는 2021년에 미국인과 결혼했다.

3.1. 역대 슈바벤계 수장

3.2. 루마니아 왕가

파일:루마니아 왕국 국장.svg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국의 마지막 군주 카를 안톤의 차남 카를은 1866년에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공작 ' 카롤 1세'로 즉위했다. 이후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을 선언하여 4대 81년 만인 1947년에 정권을 잡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왕정을 폐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루마니아 국왕인 미하이 1세는 1921년생으로 2017년에 붕어하였다.

다만 미하이 1세는 딸만 5명인데, 1948년에 사라진 루마니아 왕 계승법에 따르면 루마니아 왕가는 살리카 법이 적용되므로 딸들은 왕가를 물려받을 수 없다. 이걸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루마니아 왕 계승법은 귀천상혼도 금지하는데 큰 딸인 마르가레타 왕태녀는 왕족/귀족이 아닌 라두 두다와 결혼함으로써 정통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 이전 가주였던 프리드리히 공이 작위(타이틀)가 아니라 이름으로써 호엔촐레른베링겐[11] 왕자를 줬는데[12],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의 현 가주인 카를 프리드리히 공이 이에 반발하여 라두 두다는 호엔촐레른 왕자로 지칭할 수 없다는 요지의 소송을 걸었고, 이에 미하이 1세는 형식상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모든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작위들을 포기하고 성을 로므니에로 갈았다.[13] 그리고 루마니아 왕가는 오직 미하이 1세 본인의 직계손만 물려받을 수 있다, 여성이든 상관없이 큰딸인 마르가레타 왕태녀[14]가 루마니아 왕가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요지의 문서를 공식으로 발표함으로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고 실제로도 미하이 1세 사후 마르가레타 왕태녀가 명목상의 여왕(정확한 명칭은 Custode al Coroanei României)으로 즉위했다.[15]

마르가레타 왕태녀와 앞서 언급한 라두 두다 사이에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다음 계승권은 차녀 엘레나와 그녀의 아들 니콜라에에게로 가게 되었으나, 2015년에 미하이 1세가 니콜라에의 계승권을 박탈해버렸다.[16] 루마니아 왕국 헌법상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사람들에게도 계승권이 있는 모양이지만 정작 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의 수장 카를 프리드리히는 관심없다고 대놓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 외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구성원들은 서서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본가인 호엔촐레른 공국의 영토 전체가 옛 바덴 대공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완전히 병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루마니아가 유럽 국가들 중 왕정 복고에 가장 가깝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7]

3.3. 가계도

굵은 글씨는 각각 슈바벤계 수장과 루마니아 왕가 수장.

4. 종가: 프랑켄계(프로이센 왕가)

파일:독일 제국 국장(1889).svg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공국, 프로이센 왕국의 군주 및 독일 황제를 배출한 가계. 프로테스탄트이다. 흔히 알려진 호엔촐레른 왕조는 프랑켄계를 말한다.

프랑켄계의 콘라트는 프랑켄 지역을 중심으로 뉘른베르크와 쿨름바흐(Kulmbach), 안스바흐를 통치하였다. 뉘른베르크 성백 프리드리히 6세는 오래 전부터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에게 봉사했는데, 그의 독일왕 선출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3남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는 시민 반란으로 뉘른베르크를 상실했지만, 사실상의 장자상속제를 확립하였고, 차남 이하 자식들이 프랑켄 지역 영지를 상속하게 만들었다.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은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손자 요아힘 1세 네스토어 마인츠 대주교로 선출된 알브레히트는 마르틴 루터를 경멸하여 종교 개혁에 반대했으나, 안스바흐 분가 친척들의 영향을 받은 요아힘 2세 헥토어는 1539년, 베를린 근처 슈판다우에서 루터파로 개종했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제국 내에서 공인되자 본격적으로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다. 브란덴부르크의 종교 개혁은 요아힘 2세의 아들 요한 게오르크 대에 마무리되었고, 여러 가톨릭 수도원을 몰수하면서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한편 안스바흐 분가의 경우 1525년, 독일 기사단국 튜튼 기사단장(Hochmeister)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21]이 루터의 권유에 따라 신교로 개종하고[22] 기사단의 영지를 세속화,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인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 됨으로써 가문의 영지를 넓혔다. 안스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1460~1536)[23]의 3남으로 본디 영지 없는 귀족[24]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이로서 하루아침에 프로이센 공국의 지배자로 벼락출세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 가문은 1618년에 단절되었고, 공작위는 맏사위이자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외증손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공국의 공작으로서 폴란드 왕을 계속해서 섬긴다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25]

30년 전쟁은 원래 참전하지 않고 간만 보고 있었는데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이 매부인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끌려다니면서 신교도, 가톨릭에게 더블로 짓밟혔다. 그나마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용의주도한 외교 정책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힌터포메른(Hinterpommern)[26] 마그데부르크, 뮌덴을 겨우 확보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스웨덴 칼 10세 구스타브와 손잡고 대홍수로 정신 못차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선전포고하여 벨라우 조약으로 폴란드와의 종주권을 청산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3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군대를 지원해준 공로로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 프리드리히 1세임을 선언하여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을 다굴빵해 슈테틴을 확보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의 군국주의 정책에 기초하여 18세기 내내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슐레지엔을 합병하였고, 7년 전쟁에서는 칼을 갈고 나온 마리아 테레지아 동맹들을 물리쳐 공식적으로 '프로이센의 왕(König von Preußen)'임을 인정받아 열강 반열에 올라섰다. 이후 제1차 폴란드 분할 서프로이센을 획득하여 호엔촐레른 가문의 오랜 숙원이었던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공국의 육로 연결에 성공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개인적으로는 무능의 끝판왕이었다. 하지만 외교 운은 좋아 프랑켄 지방의 안스바흐 분가가 바이로이트 안스바흐 통치를 포기하면서 그에게 영토를 넘겨주었고, 제2, 3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하여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과 같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완전히 갈라 먹었다. 혁명 프랑스와 일찍 화약을 맺고 물러난 대가로 하노버 선제후국 라인강 우안의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제1제국에 빈번히 패배, 특히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와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잇따라 완패한 뒤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급속히 자각한 민족의식을 이용하여 성공적인 국가 개혁을 달성하였고[27] 최종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 빈 회의를 통해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포젠 및 기타 군소 공국의 영토를 합병하면서 크게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이때 합병한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일대에서 발견된 막대한 양의 철광석과 석탄은 프로이센이 공업화를 추진하게 기반이 되었다.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시대에는 3월 혁명과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영향으로 독일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가운데 오토 폰 비스마르크 대 몰트케의 주도하에 철저한 군국주의 정책으로 군비를 강화하여 강력한 육군국가로 성장했다.[28] 형의 뒤를 이은 빌헬름 1세 치세에 호엔촐레른 왕조는 전성기에 이르러 홀슈타인 전쟁에서 덴마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빼앗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사도바 전투에서 압승, 하노버 왕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들을 합병하여 소(小)독일주의에 입각한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다졌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1870~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어 나폴레옹 3세 제2제정을 붕괴시키고 파리를 점령, 프랑스에 초유의 굴욕을 안겨다 주며 빌헬름 1세가 카이저(Kaiser)로 즉위하여 독일 제국의 막을 열었다.

신생 독일 제국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역량을 잘 발휘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삼국동맹(1882)을 체결하고 비밀리에 삼제동맹(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을 체결하며, 영국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대독일 복수를 내세운 프랑스의 고립을 유도하려고 애썼다. 또 국내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중공업을 일으켜세워 순식간에 독일은 유럽 최대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독일의 이러한 급속한 성장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에게도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비스마르크 치하에서 1878년 베를린 회의를 통한 발칸반도 문제의 조정, 1884~1885년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 조정 등이 이루어졌으며 대체로 평화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유지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고령으로 사망하고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3세도 일찍 죽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다. 빌헬름 2세는 무력을 이용한 팽창주의를 내세워 비스마르크에 대립, 1890년 그를 은퇴시켰으며 3B 정책[29]을 내세워 3C 정책[30]과 충돌하였고 모로코 사건(1905, 1911)을 두 차례나 일으켜 프랑스-영국의 관계가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식민지 확보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놓고 유럽 열강과 점점 마찰이 커져감에 따라 영국은 독일의 팽창을 저지할 목적으로 여러 나라와 협정을 체결, 3국 협상(1907)을 완성함에 따라 3국 동맹의 맹주인 독일을 포위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빌헬름 2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한 일련의 사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강경 대응을 주문하여 전쟁 발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 중 빌헬름 2세는 점차 영향권을 상실해 군부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강력한 권한을 쥐게 되었으며, 결국 1918년 11월 일어난 혁명의 결과 호엔촐레른 왕조는 급속히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여 빌헬름 2세는 퇴위[31], 네덜란드로 망명함에 따라 수백 년을 이어온 호엔촐레른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동시에 독일 제국도 붕괴되었다.

빌헬름 2세는 망명국 네덜란드에서 고국 독일의 혼란의 20년대, 나치의 30년대, 전쟁의 40년대를 두루 목격한 뒤 천수를 누리고 1941년에 사망했다.

4.1. 독일의 황실?

1871년 이후 프로이센 국왕이 독일 황제를 겸하면서 호엔촐레른 왕조는 독일의 황실로 불리게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호엔촐레른 왕조는 프로이센 왕실이었을 뿐, 독일 황실은 아니었다. 물론 사실상 독일 황실이 맞긴 하지만 오직 황제, 황후, 황태후, 황태자, 황태자비 개인만 독일 황제, 독일 황후, 독일 황태후, 독일 황태자, 독일 황태자비라는 칭호로 불릴 수 있었고, 나머지 왕족들의 칭호는 프로이센 왕자, 프로이센 왕녀였다. 독일 전체의 황실을 칭했다면 독일 통일에 협조한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반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자 혹은 친왕이라고 부르는 건 틀린 표현이다.

4.2. 역대 프랑켄계 수장

4.3. 가계도[37]

4.3.1. 빌헬름 1세 (1797 ~ 1888)

4.3.2. 프리드리히 3세 (1831 ~ 1888)

4.3.3. 빌헬름 2세 (1859 ~ 1941)

4.3.4. 빌헬름 폰 프로이센 (1882 ~ 1951)

4.3.5.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1907 ~ 1994)

4.3.6.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1976 ~ )

4.4. 현황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이 나치 독일에게 협력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를 몰수했으며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났다. 1956년 도른 하우스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빌헬름 2세의 묘소도 여전히 도른 하우스에 있으며, 2014년에는 빌헬름 2세의 현손자이자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이 네덜란드 정부에게 도른 하우스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2019년에는 체칠리엔호프 궁전을 비롯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유산들을 돌려달라고 독일 정부 산하 프로이센 문화유산재단에 소송을 걸었지만 기각되었다.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난 이후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 일가는 브레멘으로 이주했다.

오늘날의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은 많은 왕자들이 귀천상혼을 해버려서 1918년 당시보다 규모가 줄었다.[51] 1920년 이후에는 그냥 귀족 직함만 가지고 있는 여성과 결혼하기만 해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랬다.[52] 그래서 빌헬름 황태자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된 루이 페르디난트는 차남이었다. 그리고 루이 페르디난트의 네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같은 이름을 가진 3남은 군복무 중 사고로 사망했는데, 3남의 1남 1녀 중 장남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1976년생)[53]가 현 수장이다. 여담이지만 게오르크는 고조할아버지인 빌헬름 2세와 상당부분, 코와 눈매를 비롯한 얼굴의 외모가 닮았다.

루이 페르디난트의 장남과 차남은 귀천상혼을 해서 수장 자리에 대한 계승자격이 없었는데, 결혼 당시에는 자신들의 계승자격이 박탈되는 걸 인정했다가 조카가 수장 자리에 오르고 난 뒤에 귀천상혼이 인간평등에 어긋나는 위헌이라며 독일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대법원까지 간 끝에 대법원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 왕가의 적법한 수장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재산은 그의 삼촌들에게도 분배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슈탄데스헤어 중 하나인 이젠부르크의 조피 요한나(Sophie Johanna von Isenburg)와 결혼하여, 현재 후계자 카를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3남 1녀를 두고 있다.

한편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현 가문의 수장(논란 있음) 마리야 여대공의 외아들 게오르기[54]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8촌간으로,[55] 그가 수장이 되면 가문 이름이 호엔촐레른로마노프 가문으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호엔촐레른 가문 대표들과 독일의 문화 재단 등은 황실 유산 문제에 관해 2014년부터 비밀리에 과거 빼앗긴 자신들의 보물과 재산을 되돌려줄 것을 독일 정부와 프로이센문화유산재단 등에 요구했지만 2023년 봄에 반환 요구와 소송을 철회했다.

종가 측에서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https://www.preussen.de/) 참고로 사이트 주소가 참 직관적이다. 독일어가 되는 사람이 있거나 독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역사 팬들이라면 접속해 들어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파일:호엔촐레른가와 합스부르크가.jpg
독일 역사에서 라이벌인 이미지와 다르게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즉위를 뉘른베르크 성백 프리드리히 3세가 도운 것도 그렇고, 싸운 기간보다는 오히려 협력한 기간이 더 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호엔촐레른 가문이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 황제선거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은 프리드리히 대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 후보자를 차기 황제로 선출하는데 표를 던졌다. 작센의 베틴 가문, 팔츠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 한 번씩 당해본 제국추방령을 호엔촐레른 가문은 한번도 당해보지 않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1806년 8월 6일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과 함께 남은 나라가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거의 통혼하지 않았는데 모계쪽 조상으로 일부 섞인 정도에 불과하다.[56] 2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1553~1618)의 부인 클레베의 마리 엘레오노르(1573~1608)의 어머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인게 그나마 가까웠으며,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3세가 뉘른베르크 성백 프리드리히 5세의 딸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여 알브레히트 4세를 얻었다. 다만 알브레히트 3세의 가계는 증손자인 오스트리아 공작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57]가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대가 일찍 끊겼다.

5. 보유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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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호엔촐레른 백작의 문장이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가, 루마니아 왕실, 프로이센의 왕실 문장에는 이 문장이 방패 중앙에 그려져 있지만 호엔촐레른헤힝겐 가문은 문장이 방패 오른쪽 위에 그려져 있다. [2] 가운데 당시 재위중이던 빌헬름 2세를 중심으로, 맨 아래 가운데 초대 왕 프리드리히 1세, 위의 3인은 왼쪽부터 2대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3대 왕 프리드리히 대왕, 4대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아래 오른쪽은 5대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아래 왼쪽은 6대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2세 왼쪽은 7대 왕이자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 오른쪽은 8대 왕이자 2대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이다. [3] 독일 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3명 뿐이여서 독일의 모든 황제들과 마지막 황태자가 다함께 찍은 사진이다. 중간에 서 있는 빌헬름 1세가 계단 아래 서 있는 아이인 빌헬름 황태자가 6살이 되는 1888년까지 생존해 있었기에 찍을 수 있었던 사진이다. [4] Burggrafschaft Nürnberg. Burggraf는 성주, 성관백 등으로 번역되며, 간단히 말하면 뉘른베르크에 있는 황제 거성(Kaiserburg Nürnberg)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그렇다고 황제 거성에서 거주한건 아니었고, 뉘른베르크 근처 카돌츠부르크 성(Burg Cadolzburg)이 뉘른베르크 성백 시절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거처였다. [5] 첫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남자 후손은 있었으나 귀천상혼인 까닭에 그가 1869년에 죽자 가계는 절손된다. 그래서 호엔촐레른 가문 수장 타이틀은 먼 친척이자 옆동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국의 후작이었던 카를 안톤이 가져갔다. [6] 루마니아 국왕 타이틀은 동생 카롤 1세가 가져갔지만, 자녀가 없어서 동생 사후 루마니아 왕가 타이틀은 이 사람의 둘째아들인 페르디난드 1세가 가져가게 된다. [7] 백작 가문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친척의 딸이다. [8]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원인이 되는 스페인 왕위 계승의 논란인물이었다. 동생 카를은 밑에서 언급되다시피 루마니아 왕 카롤 1세로 즉위했다. [9] 레오폴드의 장남이자, 숙부 카롤 1세가 자녀가 없게 되자 뒤를 이어 즉위한 페르디난드 1세의 형. [10] 쌍둥이 동생 프란츠 요제프(1891~1964)는 1933년 호엔촐레른-엠덴 가문으로 분가해 나갔다. 하지만 유일한 손자 카를(1970~)이 후손이 없어 단절 예정. [11] 베링겐 백작위는 호엔촐레른 가주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작위들 중 하나다. [12] 어차피 독일이나 루마니아 공화국이므로 왕족/귀족 타이틀은 이름에 불과하다. [13] 어차피 루마니아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빌헬름 2세에게 호적에서 파였다. [14] 이미 1997년에 후계자로 정했다. [15] 혈통상으로 보면 마르가레타 왕태녀가 꿀릴게 없다. 아버지는 루마니아 국왕이고 어머니는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파름 가문의 공녀로, 룩셈부르크 앙리 대공과 6촌간이다. 덧붙여, 현재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이자 불가리아의 전 총리인 시메온 2세와도 6촌간이다. [16] 일설에 따르면 그 이유는 원나잇으로 사생아 딸을 낳았기 때문이라는데, 아버지의 불륜 행각과 사생아 후손 때문에 지금도 골치를 앓고 있는 미하이 1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니콜라에가 미하이 1세의 유일한 외손자고(엄밀히 말하면 미하이 1세의 셋째딸 이리나도 첫번째 남편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지만, 이리나 공주 가족도 도박 혐의 등으로 계승권을 박탈당해서...) 나머지 외손녀들은 루마니아에 별로 관심없는 듯하다. [17] 많은 루마니아인이 옛 왕실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다. 현재 루마니아가 왕정 복고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왕실에는 호의적이면서도 공화정 유지 의견이 더 크기 때문이다. 2016년에 진행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9%가 1989년 혁명 때 공화정이 아니라 군주제를 택했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라가 발전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당장 국민투표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을 때, 응답자의 62%가 공화정 유지, 21%가 왕정복고를 선택했다. [18] 정식 결혼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이복동생 미하이 1세를 포함한 그 누구도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물론 계승권 또한 없다. [A] 일설에는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가 바브루 스티르비(1872 ~ 1946)와 불륜해서 낳은 사생아로 의심된다는 얘기도 있다. 이는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의심된다(rumored)고 나와 있다. [A] [21]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손자로 당시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와 종교 개혁의 원인을 제공한 그 동생 마인츠 선제후 알브레히트와는 사촌이었다. [22] 독일 외부 지역에서 신교로 개종한 최초의 사례였다. [23]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차남 [24] 큰 형 카지미어와 둘째 형 게오르크가 사치에 빠졌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를 몰아내고 둘이서 영지를 다 차지해버려 알브레히트부터는 외부로 나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둘째 형인 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요한, 요한 프리드리히 1세, 헤센 방백 필리프와 더불어 독일 종교 개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제후 중 1명이다. [25] 원칙상으론 봉신국의 대가 끊기면 종주국의 군주가 영지를 회수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프로이센 공국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이자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오촌 조카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가 폴란드의 야드비가 야기엘론카(Jadwiga Jagiellonka 1513~1573)와 재혼하면서 처남이 된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프로이센 공국의 대가 끊기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이 상속받아 통치할 수 있도록 협약을 맺어둔 상태였고, 요아힘 2세의 증손자 요한 지기스문트 대에 프로이센 공국의 대가 끊어지며 동군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폴란드의 종주권은 형식상에 지나지 않았던데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선거왕제 바사 왕조를 거치면서 약화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대홍수'로 인해 연방이 심대한 타격을 입으면서 이 틈을 타 명목상 주종관계를 청산했다. [26] 현재의 폴란드 서포모제주 포모제주에 해당하는 지역.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독일령인 포어포메른(Vorpommern)은 스웨덴으로 편입되었다. 원래 포메른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다 가져가야 하는게 정상이었으나 구스타브 2세가 마지막 포메른 공작이었던 보기슬라프 14세에게 협력하여 포메른 공국을 지켜준 대가로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로 갈라졌다. 오히려 호엔촐레른 가문 입장에서는 구스타브 2세의 갑툭튀 때문에 손해를 본 셈. [27] 사실 본인은 딱히 기여한게 없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같은 철학자나 하인리히 카를 폰 슈타인 남작,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 같은 정치가들이 노력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본인은 말년에 반동주의로 돌아서서 지금껏 해왔던 개혁도 다 말아먹었다. [28] 이때 위에서 언급된 슈바벤계 공국들을 흡수했다. [29]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잇는 경로를 통해 중동과 인도양에 진출하겠다는 독일의 세계 정책 [30] 카이로- 케이프타운- 캘커타를 이어 환(環)인도양 및 아프리카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영국의 세계 정책 [31] 빌헬름 2세 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 영방국가들의 모든 군주들이 다 퇴위했다. [32]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3세. [33] 프리드리히 3세인 이유는 숙부인 프리드리히 2세가 슈바벤계의 시조라 그렇다. 여담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 루돌프 1세 독일왕 즉위에 매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루돌프 1세의 첫 부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와 먼 친척이었기 때문. 이때부터 호엔촐레른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실한 앞잡이 역할을 했지만 후손... [34] 뉘른베르크 성백으로는 프리드리히 6세. [35] 1618년부터 프로이센 공작 겸임. [36]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작위 폐지. 다만 관습적으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작위는 붙였다. [37] 이름 옆 숫자는 수장 계승 순위 [38]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 사이의 장녀. [39] 자세한 가계도는 하노버 왕조 문서 참고. [40] 필립 마운트배튼의 넷째 누나. 소피아에게는 재혼이다. [41] 나폴레옹 전쟁 당시 맹활약했던 명장 아서 웰즐리의 후손이다. [42] 샌드위치의 이름 유례가 된 존 몬태규의 후손이다. [43] 콜롬비아계 미국인으로 억만장자 사업가다. [44] 슈탄데스헤어 중 하나인 라이닝겐 후작 가문의 후계자. 제8대 라이닝겐 후작이자 현 수장인 안드레아스와 하노버 가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의 3녀 알렉산드라의 장남이다. [45] 마리 체칠리에와 이혼한 이후 처남댁인 도나타(루이 페르디난트 주니어의 아내)와 재혼한다. [46] 최초의 슈탄데스헤어 출신인 호엔촐레른 가문 수장의 아내다. [47] 남편과 사별한 이후 아주버니였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올덴부르크 공작(마리 체칠리에의 전 남편)과 재혼한다. [48] 크리스티안 그랑몬타뉴(1944 ~ ) 소생. [49] 슈탄데스헤어 가문 출신. [50] 호엔촐레른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이다. [51]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국가들 상당수가 군주정이 폐지되면서 왕족이나 귀족들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대부분은 귀천상혼을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결혼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52] 그나마 호엔촐레른 가문이 아들들이 매우 많아서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직계인 빌헬름 2세는 6남 1녀, 빌헬름 황태자는 4남 2녀, 루이 페르디난트는 4남 3녀, 루이 페르디난트의 손자이자 현 가문의 수장인 게오르크는 3남 1녀를 두었다. [53] 게오르크의 어머니인 카스텔뤼덴하우젠의 도나타(1950~2015)는 남편이 사망하고 세월이 흘러 올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1936 ~ 2017)와 재혼했는데, 이 사람은 도나타의 시누이 마리체칠레의 전 남편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관계는 근친혼으로 간주되므로 결혼이 불가능하다. [54] 빌헬름 2세의 막내아들 요아힘의 증손이다. [55] 정확히는 8촌이자 6촌이다. 빌헬름 2세 기준으로 부계혈통만 따지면 8촌이지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할머니인 키라 여대공이 마리아 여대공의 고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문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드르 2세의 여계후손이기도 하다. [56] 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이유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보르본 왕가 및 그 분가, 사보이아 왕가 등 가톨릭 국가의 왕가와 주로 통혼하였고, 개신교 국가와의 통혼은 드물었다. 다만,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혼은 종교 개혁 이전에도 거의 없었다. 두 집안 간의 혼담이 논의된 사례가 있긴 한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손녀인 프로이센의 마리아 안나 공주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결혼이 추진되었다가, 마리아 안나가 이미 약혼한 상태라 혼담이 무산된 일이 있었다. [57]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로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도 겸했다. [58] 1604년 쿨름바흐에서 바이로이트로 천도. [59] 정식 명칭은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로 작위명은 프로이센의 총리이자 북독일 연방의 연방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것이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제안된 바 있었던 "독일인의 황제" 칭호는 프랑스 제국의 국가원수를 뜻하는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를 연상시키는 등 민족주의적 성격이 다분했기에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자신은 신을 대행하는 군주이지 국민군주가 아니라고 생각한 빌헬름 1세 본인이 기각시켰다. 빌헬름 1세는 "독일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를 칭하고 싶어했지만 이 칭호는 독일 제국을 구성할 다른 제후국들의 동의를 얻기 힘들었으며, 독일 제국을 넘어 오스트리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다른 게르만권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타협적으로 애매한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가 제시되었고 빌헬름 1세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