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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5-25 18:59:24

형주 공방전/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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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국경선 연장으로 인한 방비 문제3. 손권의 선택은 과연 최선이었나?
3.1. 역사적 사례3.2. 형주 회수의 가치 차이3.3. 손권의 목표3.4. 절호의 기회3.5. 기회를 스스로 버리다
4. 왜 번성 공방전이 중요했나?
4.1. 조조의 반응4.2. 촉한에게 있어서 형주의 가치4.3. 하지만4.4. 의 이득4.5. 판단 미스
5. 서주 논란
5.1. 여몽의 판단5.2. 시야 문제
6. 명분7. 외교 문제
7.1. 촉한 문제7.2. 의 문제7.3. 총합7.4. 손권의 판단 문제
8. 조조 형주만이 상업이 발달했고 풍요로운 것이다?9. 유비 형주 관리를 더 잘했을 것이다?10.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 것은 최선이었나?11. 관우를 누가, 왜 죽였는가?12. 과연 관우의 독단으로 북진을 했는가?13. 타이밍14. 관우에게 혼인을 제의한 것이 그릇된 행동인가?15. 관우가 혼인을 받아들였다면 손권이 뒤치기를 할 일은 없었다?16. 미방이 배신하지 않았다면?17. 상관(湘關)의 미곡문제18. 형주의 상실로 촉한 천하통일은 좌절되었나?19. 형주 소유와 북벌을 누가 더 잘 했는가의 문제

1. 개요

형주 공방전의 논란을 다룬 문서.

2. 국경선 연장으로 인한 방비 문제

여몽은 형주를 점령하면 수비선이 탄탄해진다는것을 손권에게 고했고, 실제 역사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육항 또한 손호에게 이릉[1]을 잃으면 오나라 전체가 위험해진다고 하고 진수 또한 과연 육항이 걱정한 것처럼 되었다며 이 말이 맞음을 인정한다.

실제로 양호가 세운 오나라 정복 계획에서도 형주를 점령한 다음에 거기서부터 배를 타고 내려가서 정복하자고 말하는데 양호가 죽은 후에 두예 왕준이 방법을 사용하자 오나라는 힘도 못 쓰고 녹아버린다. 다만 이건 사실상 자동문에 가깝던 오군의 지휘부가 더 문제라 보는게 타당하다. 일단 1차적으로 이릉 자체가 협곡이라 요새화하기 쉬운것도 있으며, 형주가 아닌 양주 방면 방비로는 2차적으로는 강하 지역이 있다.

일본의 미야자키도 아예 장강 수비 라인은 구축할 수 있었고, 그것이 유일한 획득(성과)이라고 했을 정도로 장강의 중류를 오나라가 차지하면 방어선이 탄탄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여몽의 구상은 실제로 동진의 서부군 방어선과 남송 몽골( 원나라)을 방어할 때 비슷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장강 자체를 방어선으로 삼는다기보다는, 양양을 방어의 중심으로 삼고 장강은 보급로로 삼아서 기동 방어를 한다는 상당히 원대한 구상이다.

물론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해서 촉한이 백제성 - 남군 - 양양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면 오나라의 중심지는 강하를 건너면 바로였기 때문에 건업으로 이사가지 않는 이상 완전히 장강 수로에 노출되어 촉한이 마음만 먹으면 공세를 퍼부을 수 있게 된다. 촉한까지 견제한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촉한은 융중대의 계획에서 보듯 형주 이상을 넘어서 동오 쪽으로 진공을 할 생각도 없었고, 위와의 승부가 1순위인 상황에서 이것을 위한 역량 역시 부족했다.

또한 여몽의 방어선 구상은 미완성으로 끝났는데, 오나라는 진소가 양양(襄陽)을 아주 잠시 동한 정복한 이후 뺏긴 이후로 조위(曹魏)로부터 다시는 빼았지 못해서 장강의 수로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으며 장강 삼협의 입구인 백제성(白帝城)도 촉(蜀)이 점유한 상태로 남았기 때문이다.

결국 오나라의 수비 체계는 장강을 기동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장강의 지형에 기대서 방어하는 형태에 그쳤다. 거기에 유봉이 숙청되고 맹달이 조위에 투항하며 상용, 방릉, 서성까지 조위에 넘어가며 형주에 투사하기 월등히 쉬워졌는데, 이 경우 오히려 조위가 작정하고 형주에 집중한다면 관중 지역과 중원의 역량을 동시에 형주에 투사할 수도 있었다.

손권의 형주 공략이 성공적이라고 평하려면 양양까지 확보했어야 한다. 하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양양에서 남하하는 위의 공세를 강릉의 촉을 몸빵으로 하여 격퇴할 수 있었던 구도에서 오로지 오나라 단독으로만 막아서게 되어버리는 구도로 변화시켰다. 그렇기에 무리한 진출이라고 말할 수밖엔 없다. 그게 아니라면야...

그리고, 남쪽에서 중국 전토를 확보하는 경우가 적다고 볼 순 없다. 물론 서쪽지역을 모두 확보하고 동쪽으로 치고나가는 것(진, 한, 수나라처럼)보다는 적긴 하다. 그런데 그럼 대충 할거하다 대충 망하면 된다는 건데 과연 그게 나아갈 길로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중국 전토까지는 어려워도 황하 이남 대부분을 장악한 적은 적지 않다.

서진 손호 공략은 양양과 파촉에서 강릉으로 동시에 치고 내려왔다. 그리고 동오는 양양에서 수로를 따라 서진해 오는 위군을 전혀 막지 못했다. 즉 양양은 장강 수로의 장악에 필수조건이고, 여기를 확보 못하면 장강을 따라 건업까지 고속도로가 뚫린다. 그 대책으로 강릉에 군사력이 집중되지만, 그건 결국 장강 방어선의 장점인 병력 집중이 가능하게 되는 독점적인 기동력을 상실하는 문제를 가져온다. 남송이 그래서 망했다. 양양까지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는 몽골군 이상의 기동력을 보여주다가 양양이 뚫리자 속수무책으로 임안까지 밀려난다. 그래서 양양을 확보못한 손오의 장강 방어라인은 불완전한 것이라 할 수밖엔 없고.

그리고, 양양이 없으면 강릉은 취약할 수밖엔 없다. 고대의 최고 진격로이자 보급로는 강을 운용할 수 있는 수로이며, 따라서 수로의 확보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양양이 방어에 중요한 것은 양양을 확보하여 장강이라는 중국 남부의 핵심적인 수로에 대한 독점적인 통행권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공자에 대해 월등한 기동력을 손에 넣을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양양이 강남 정권의 손에 없다면? 양양에서 강릉까지는 장강이라는 고속도로가 뚫려있고, 따라서 강릉은 방어에 극히 취약해진다. 강릉을 지키기 위해서는 대규모 전력이 상시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장강 수로를 활용한 방어전선의 장점인 수로를 통한 기동력이 힘을 받지 못한다. 언제나 강릉에 대병력이 있어야 하니까, 이는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는 것이 그 의미를 대폭 상실함을 뜻한다.

손권의 강릉 공략은 그렇기 때문에 성급했고 무리를 둔 셈이었다. 양양이 없는 강릉은 취약하여 많은 방어전력이 필요한 곳이다. 양양까지 확보해야 안정적인 방어라인이 되는 것. 그리고 양양까지 확보 못할 거라면 강릉을 확보하는 것보다는 회수를 확보하는게 낫다. 지방정권으로 할거하다가 대충 망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애당초 관우가 원정을 떠난 형주도 정면으로 뚫지 못했는데 여몽의 계획대로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있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후세 사가들 가운데는 여몽의 계획이 허황되다며 잘못된 기록이 아닌가 의심하는 학자도 있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차라리 관우를 제어할 만한 유일한 사람인 노숙이 더 살아서 명분과 실리로서 계속 관우를 제어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3. 손권의 선택은 과연 최선이었나?

3.1. 역사적 사례

사실 위나라 오나라의 대립구도에서 형주가 주 격전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비는 말할 것도 없고, 유수구 전투 석정 전투 등 두 나라 사이에서 발발한 주요 전투는 대개 회남-양주(楊州) 방면에 집중됐다. 오히려 형주 - 양주 방면에서 발발했던 적벽 대전 같은 경우가 이례적인 경우이며, 이는 형주 세력의 잔당이었던 유기- 유비가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대립상은 남북조 시대의 북조와 남조의 대립구도에서도 나타난다. 전진 동진을 치기 위해 벌인 비수대전 역시 회수 방면에서 벌어졌으며[2], 수나라 진나라(陳)를 멸망시킬 때도 장강을 바로 건너 건강(건업)을 기습하는 루트를 활용했다. 비록 악비 한세충의 활약으로 구사일생하긴 했으나, 남송 초기 남송 금나라에게 속절없이 밀릴 때도 회수 방면에서 금나라 군이 남송의 수도인 임안으로 쳐들어와 송 고종이 임안을 버리고 바다로 도주한 사례도 있다.

남조가 공세를 펼칠 때는 양번을 확보했을 때가 아니라 회수까지 도달했을 때이다. 조적의 북벌, 유유의 북벌, 진경지의 북벌 모두 회수의 수로를 확보하고 그 길을 따라 북벌을 진행했다. 환온의 북벌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의 기록을 보면 분명 북벌인데 군대가 북쪽으로 올라간다기보다는 회남을 중심으로 동진, 서진하는 경향을 띈다. 회수와 거기에 이어진 지류들을 진격로로 삼아 서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갔다가 하니까.

육조시대 남조 정권의 대규모 북벌, 환온의 3차레 북벌과 유유의 북벌, 진경지의 북벌은 모두 회수를 따라 이루어졌다. 환온은 1차 북벌에서 하남을 장악했고, 2차 북벌에서 회수와 그 지류를 따라 낙양 확보 후 무관으로 서진(동시에 한중에서 사마훈이 북상)해 관중까지 장악했으며(이건 이후 전연과의 싸움에서 상실), 3차 북벌에서도 역시 변수, 청수, 황하를 이용해 진격로와 보급선을 확보하면서 낙양을 노렸다.

유우는 회수를 이용, 산동반도 남연을 멸망시키고 다시 회수와 여러 지류들을 이용해 낙양과 장안까지 장악한다. 진경지는 회남 지방(수춘)을 장악하는 것으로 북벌의 신호탄을 끊었다. 낙양까지 치고들어간 것도 어디까지나 하남에서 호뢰관으로 서진, 이를 돌파하고 낙양을 점령한 것이다. 양양은 철수로에 불과했다.

즉 공세로 전환하는 핵심 지역은 양번이 아니라 회수를 활용할 수 있는 회남 지역이다. 여기를 안정적으로 거머쥐면 낙양에서 산동까지 모조리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양번은 어디까지나 장강 수로의 독점적인 운용을 위해 존재하는, 방어적인 의미가 강한 거점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종결낸 수문제의 통일은 강릉이 어디 손에 있느냐와는 무관하다. 전력차도 압도적이었을 뿐더러 회남에서 곧바로 기습적으로 장강을 도하해 경구를 점령한 후 중산으로 나아가 건강을 직격하는 것이었지 강릉에서 수로를 타고 서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패선의 무대책이 아니었으면 시도도 되지 않을 공략에 당한 것이다. 애초에 왕조는 거기까지 버틴 게 놀라운 왕조이다. 건강 인근만 장악한 상태에서 출발해 북주 북제의 공격을 5회나 격퇴하고 장강 하류 인근 완전 장악에다 회수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3.2. 형주 회수의 가치 차이

형주가 강동의 방어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른바 "목줄", 즉 주된 방어 거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손권 관우를 죽이고 이릉대전에서 승리해 형남을 장악하고도 관우를 통해 입증된 번성 - 양양 라인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모르고 손권 본인이 계속 친정하여 합비에 꼴아박은 걸 보면 손권의 주된 관심사는 서주도 형주도 아닌 과거 원술의 근거지였던 합비 - 회남 방면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을 뚫고 중원에 진출하는 것, 혹은 최소 회수 - 회남 방면을 차지해 오의 중심지인 건업( 남경)을 위시한 장강 삼각주를 방어할 완충지대를 확보하려는 게 손권 플랜의 핵심으로 보인다.

이후 육조시대의 왕조들과 후일의 남송을 비롯해서 회수 인근 - 회남을 차지하지 못한 강남江南의 남조 왕조는 가 유일하다. 심지어 동진 이래 육조시대 최약의 왕조였다는 조차도 진욱 시절에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회남 일대를 차지한 적이 있다.

오의 경우에는 사천에서 진격해 형주를 점령하고 장강 중류를 장악해 그 물길을 타고 내려간 서진의 공격에 멸망한 케이스지만, 상술했듯 이건 이릉과 강하에서 제대로 수비를 못한 오나라의 자동문 인선이 문제인 것이다. 본래라면 이릉과 강하에서 잘 막으면 문제가 없고, 이는 적벽 대전에서 주유 유비 조조를 막은 것에서 입증된다.

후일 역사에서 반복되는 전투 양상을 보면 형남과 회남 가운데 어느 지역이 더 강동 방어의 핵심인지는 누가 봐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북조가 남조를 공격하는 주된 루트를 살펴보면 장강 중하류에서 수로를 타고 내려가는 패턴보다 강북에서 곧바로 회수 - 장강을 건너 다이렉트로 강남에 진격하고자 하는 패턴이 더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당장에 삼국시대만 놓고 봐도 조조 적벽 대전 이후 오와 전쟁을 벌일 때는 유수구 전투로 회수에서 장강으로 도하하려고 했고, 군사적으로 무능하다고 평가되는 조비도 이쪽 루트로 밀고 들어가서 전쟁을 벌였다. 즉 삼국시대부터 이미 회수 인근은 북조 대 남조 격전의 전형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장강 삼각주 방어에 있어서 형남 장강 중류 확보보다 회수-장강 사이에 가로 놓인 회남이라는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뜻이다. 대군을 이끌고 바다처럼 장대한 장강 하류를 도하하는 건 만만한 시도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 그 고비를 넘어서기만 하면 곧바로 강남의 중심지가 펼쳐진다.

공격하는 하북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 회남 - 장강 하류를 건너는 최단거리 공격 루트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지사다. 후일 남송 시절에 벌어진 얘기긴 하지만 남송 역시 몽골의 맹공에 사천과 양번을 잃었지만 나라가 곧바로 망하지 않고 중심지인 회수 - 회남 일대는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맹공의 반격으로 이 지역을 모두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일단 화북에서 내려오면 1차적으로는 번성이, 파촉 지역에서 내려온다면 이릉이 막고 있으며 이 두곳이 모두 뚫리더라도 2차적으로 강하에서 수비가 가능하다. 만약에 이곳이 모두 허무하게 뚫린다면 수비를 진짜로 무능하게 했거나 담당자가 공대 내부의 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유수구가 뚫리면 그냥 그대로 남경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을 봐도 1차적인 목표가 어디인지는 확실하다. 즉 촉한의 중심지인 사천평야 방어에 있어서 한중 분지 일대의 확보가 필수적인 것처럼 오나라의 중심지 장강 삼각주의 방어에 있어서 회남 일대의 확보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3.3. 손권의 목표

일반적으로 형주는 손권의 부친 손견의 한이 서린 땅이고 또 실제로 동맹을 배신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남형주를 병합한 탓에 손권이 형주에 무지 집착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조비 즉위 초기의 불안정한 정국을 틈타 불시 기습과 조비의 판단 착오가 겹쳐 일시적이나마 여몽의 플랜인 번성 - 양양 라인을 확보해 놓고도 결국엔 유지가 어렵다며 버리기까지 했다. 위에서도 언급되지만 당시 여몽이 무슨 생각으로 위나라와 한나라를 동시에 상대하며 양번과 영안을 다 먹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건지 의문스럽다.

후일 육손 손권의 명령을 받아 양양을 공격하려다 사전에 들통나자 그냥 포기하기도 했고, 주연이 조중을 비롯해서 이 지역을 자주 찔러보았고 번성까지 포위한 적(작피의 역)도 있지만 작피의 역 당시에도 사마의가 바로 군대를 끌고 오자마자 주연은 한 달만에 그냥 도망갔다.

결론적으로 영안 - 양번 - 이릉 / 강릉이 연결되는 장강 중류 삼각방어 거점을 완성하려고 한 여몽 혹은 익주 - 형주 - 양주를 모두 아우른다는 후일 형성된 남북조 시대 남북구도의 프로토타입인 천하이분지계를 주창한 주유라면 모를까 형주 손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덧붙이자면 주유의 플랜보다 더 넓은 강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유송 유유 회수를 기점으로 동진, 서진해서 북벌에 성공했다. 결국 회수가 있어야 북벌을 하든 말든 할 수 있다는 소리.

이는 형남 정벌 후, 이 지역의 최고 책임자가 자기 직속인 여몽에서 선대 부터 악연이 있던 대호족 오의 사성 육손으로 바뀐 것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비록 육손은 그럼에도 손권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였고 손권 이릉대전 당시 육손에게 전적으로 군권을 위임하는 등 신뢰를 보이나 싶었지만... 여일 사건과 이궁의 변에서 육손이 말려들어 죽은 걸 보면 알다시피 실제 손권의 속내는 이릉대전 이후 명망이 높아진 대호족 육손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두 전선에 대한 손권의 관점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순수하게 병력비만 놓고 보면 형주 전선의 오군이 양주 전선에 투입된 오군보다 훨씬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장 234년 전역 당시 합비에 투입된 오군이 호왈 10만이었던 것에 반해 양양을 공격한 육손 제갈근의 군사는 1만이었다.

이후 형주 쪽 주력이었던 주연에 대항한 위군도 수천 명 이상을 넘지 않았던 것을 보면 1만 단위를 전후로 한 병력이 계속 유지되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심지어 제갈탄의 난 당시에는 왕창이 먼저 강릉 전선에 선공을 걸어 주적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다만 위서 제왕기 주석 간보 진기에 따르면 오나라가 작피의 역 때 5만명을 동원했다고 나온다. 한 달만에 아무것도 못하고 철저히 대파당해 철수하긴 하지만.

결국 목표가 천하통일인지 할거인지도 불분명한 손권에게 있어서 형주는 본인의 마스터 플랜 바깥영역이었던 셈이다.

손권은 반드시 본인 주도 하에 회남 병합을 이루고 싶어서 열심히 합비에 꼴아박았다. 만일 손권 주도로 회남을 장악한다면 손오 본거지인 강동의 방어력도 강화되고 손오 종특의 모래알 조직력 위에 세워진 황권도 제고되기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셈이다. 수춘은 손권의 부친 손견의 상관인 원술의 영지였고 장소, 장굉 등 오나라의 중신 중에서 서주 출신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보면 형남 점령의 궁극적 목적도 이릉 - 강릉 라인의 장강 중류 수로를 확보해서 본인의 근거지인 장강 삼각주의 방어를 강화하려는 다소 소극적인 수준의 문제의식의 발로에 가깝다.

모처럼 기회가 열려있을 때 강대국이라 점령이 어려운 위나라의 회남을 점령하는 게 오나라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일지, 자기들이 익양 대치를 통해 전성기 형주의 1/3 이하로 세력을 깎아버린 동맹국 한나라의 형남을 점령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는 누가 봐도 명약관화다. 이는 실제로 후일 손권 제갈각 등이 다시 재정비가 끝난 합비와 합비신성에 연거푸 꼴아박아서 온몸(...)으로 입증했다.

3.4. 절호의 기회

관우와 싸우고 있을 때 회수를 치는 건 손권 조조를 배신하는 거지만, 관우의 추격전 말미에 손권이 뭔 수작질을 부릴 거라는 위나라의 반응을 보면 알다시피 손권 조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고 조조가 손권을 믿을 거라고는 본인들을 포함해 지나가던 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조 관우를 잡겠다고 회남의 하후돈 장료까지 예비군으로 뺐다.

장료와 청주-서주쪽의 장패가 인솔하는 별군이 관우 때문에 빠진 상황에서 군대가 빠져버린 합비를 오나라가 치는 것은 그렇게 무리한 상황이 아니고, 아무리 호응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나 유비가 장안을 지나 마초의 공격도 막아낸 동관의 험준한 요새를 뚫는 것이나 위나라 에이스 다 투입된 양번의 방어선을 관우가 단시간에 돌파하는 것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주와 회남을 장악한 후 촉보다 먼저 하북에 먼저 진입해서 자리잡으면 오나라 촉한보다 명분이 약할지언정 절대 국력은 더 강해진다. 그리고 지리적 이점으로 허창을 먼저 노릴 수 있으므로 유사시 헌제를 옹립하는데 성공한다면 명분에서도 뒤지지 않을 수 있다.

이건 실패해도 위나라의 회남, 서주 라인을 흔들어 오나라가 위나라의 압력에 맞서 더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니 회남, 서주 라인 공격이 오 입장에서 최선의 수였다. 손권이 회남, 서주로 가면 관우가 양양성을 포위전으로 말려죽였거나 면수를 장악하고 있었으니 최소한 위군 주력을 형북에 끌어들인 채로 전선 대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위군 주력이 형주에 발이 묶인 것을 본 유비는 나중에 제갈량이 시도한 것처럼 옹주 - 양주로 진출해서 관중 지방을 촉한의 영토로 합병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때는 관중이 조위에게 먹힌지 얼마 안 된 데다가 이릉대전 전이라서 2세대 인재풀+물자도 건재하고 결정적으로 유비 측에 마초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촉한이 매우 높은 확률로 관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을 공산이 크다.

관우 조조군 진영의 주군과 형북에서 치고박는 동안 동쪽에서 손권이 회남을 장악, 서주 일대로 치고 올라오는 동안 서쪽에서 유비가 관중으로 올라가 장안을 치고 한실 부흥 명분을 공고히 내세웠다면 합비/관중의 돌파와 관우의 견제로 낙양-허창 라인의 위협+ 조비의 계승권 미약의 시너지로 조조 말년과 조비 치세는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조조 관우의 출전에서 1년 만에 사망한 것과 조비가 군사적으로 무능한 것까지 포함하면 전세역전도 꿈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번성 공방전 시점에서 손권의 선택은 근시안과 조급함의 소산이라는 평을 피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굳이 형남을 빨리 병합하려고 성급한 액션을 때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전 합비 공방전 장료에게 당한 게 많기에 그 후유증으로 당장은 회남으로 북진할 의욕이 안 생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천적인 장료는 양번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니 장료 관우를 막기 위해 합비를 떠났을 때 공백지나 다름없던 합비 - 회남 방면을 기습해 확보하고 제갈량 제갈각의 북벌 노선으로 둘이서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하면 서로 득이 생긴다.

어떻게 해도 형남을 차지하고 싶으면 유비 제갈량이 북진해서 관중과 사예를 손에 넣은 뒤 위 중심지를 공격하고, 관우가 형북을 뚫고 북방으로 치고 올라가서 위를 공격하며 서로 사생결단을 내고 있을 때 형남을 빼앗으면 그때는 촉한도 위와 싸우는 상황인지라 넘어갈 가능성이 높고, 관우는 형주보다 위에서 싸우고 있을 테니 죽일 일도 안 벌어질 것이다.

3.5. 기회를 스스로 버리다

오는 위나 한( 촉한)과 달리 명분과 이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조위 혹은 촉한이 굳이 손오와 극한 대립을 벌여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조위 촉한은 400년 한실이라는 기준점을 두고 정반대의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극한 대립을 피할 수 없는 숙적이지만 오나라는 별 이념이 없는 지방정권이라서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적어도 208년 적벽 대전 이후 조정을 장악한 조조에 항복하자는 의론이 주전파들의 반발로 완전히 꺾인 후 손오 정권은 그렇다. 이후 후한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손권은 조위 상대로 한 때는 굽히고 한 땐 대립하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계속 유지한다.

즉 흔히 단점으로 지적되는 손오의 무이념 노선은 리더가 운용의 묘를 잘 살리기에 따라선 손오가 조위와 촉한 모두에게 소위 캐스팅보터의 역할로 다가가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면모를 일신할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삼국시대 전체라는 큰 틀을 놓고 볼 때 손오가 이런 중간적 입지를 그럭저럭 잘 살린 건 맞지만 번성 공방전이라는 중요한 분기점에서 보여준 모습은 성급한 선택이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점에서 손권이 대국적인 흐름을 잘 살피고 이러한 절묘한 포지션을 좀 더 균형감각 있게 잘 살려 실리를 챙겼다면 삼국지의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것과 완전히 달랐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219년과 220년 한중 공방전 ~ 번성 공방전 시점, 즉 조위 촉한의 대립 구도가 심화되는 시점에 손오는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다. 유비가 한중왕 즉위를 선언한 이상 위왕 조조와 한중왕 유비의 재격돌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조조는 이미 당시 나이가 60대 중후반으로 당시 평균수명을 고려할 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었고 실제로 조조는 219년을 넘기자마자 죽어버렸다. 거기에 위나라 내부에서 여러 문제가 터져나오는 상황이라 분명히 전성기 때보다 약해진 상태였고 조조 사후 혼란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 조비의 위왕 계승 이후 상황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상승세의 촉한이 치고나올 경우 힘들게 싸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촉한 유비 역시 당장은 한중왕 선언 이후 기세를 타고 조위를 몰아붙일 수 있지만 유비도 1세대 군벌 출신인지라 나이 50 평균 시대에 이미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었다. 거기에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은 당시 10대 초중반으로 어린아이였다.

반면 손권은 당시 30대 후반이라서 당시 기준으로 중년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노년은 아니었고, 몸 상태가 심심하면 술판을 열어 말술을 들이붓고 사냥판을 벌여 달려드는 맹수를 튕겨내는(...) 등 팔팔하기 짝이 없었다. 여몽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병이 중병인 걸 알았기에 조바심을 냈겠지만 손권은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형남은 회남을 얻어 강동을 방어한다는 손권의 최우선 플랜에서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위에서 가정한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충분히 숙고하고 주판알을 굴릴 여지가 많았다.

문제는 이 극한 대립이 본격적으로 점화되기 직전에 성급하게 액션을 때려 조위에 고개를 숙이고 동맹을 배신해 관우를 죽이고 형남을 병합하는 바람에 상승세의 촉한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려, 조위와 촉한 사이에서 막 끓어오르던 첨예한 대립구도를 불식시키고 말았다. 덕분에 조비는 조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찬탈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결국엔 다시 촉한과 동맹을 맺고 조위와 대립각을 세우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손권이 진정 얻고 싶었던 회남의 방어력은 다시금 공고화되어 손오는 회남에 아무리 전력을 퍼부어도 그 이상을 나가지 못하는 예전 상태로 회귀하고 말았다. 이런 측면에서 동오의 대국적인 전략이 미진했거나 손권의 선택이 지나치게 조급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손권의 형주 강탈은 단순히 관우라는 눈앞의 적을 제거해준 것 말고도 그때까지 적대해왔던 강동이 알아서 위나라의 그늘 아래 들어와 한중 공방전과 번성 공방전으로 실추된 위 왕실의 권위를 복구하고 조비 찬탈의 기회를 마련해 줬다는 점에서도 조씨에게 있어 크나큰 소득이었다.

4. 왜 번성 공방전이 중요했나?

직설적으로 말해, 적벽대전 이후 천변만화하던 천하 정세가 영구히 정지하게 된 시점이 여몽의 형주 점령 직후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야기가 좀 묘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맹이었던 촉한에게 어그로라는 어그로를 다 끌어서 이릉대전이 발발, 촉한과 동오는 양패구상의 형태로 퇴락해버려 삼국시대는 1강 2약의 구도로 고착화됐다.

4.1. 조조의 반응

관우의 군대가 번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조조의 반응이 어땠던가. 당시 번성을 지키고 있던 조조의 장수는 위나라 최고의 장수라는 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덕, 만총, 조엄 등 충분히 유능한 보좌들이 형북에 포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 조조는 우금 등이 이끄는 7군과 서황에게 배속된 12영을 연속으로 대 관우 전선으로 파병했다.

거기에 조조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으며, 손권과의 교섭이 끝난 이후엔 하후돈과 장료를 중심으로 한 강동 전선의 장수들과 서주-청주에 주둔하던 장패의 군사들까지 소환한다. 앞서 도읍을 옮길 논의까지 있었던 것까지 합쳐 보면, 조조의 반응은 이미 상식적인 선을 넘은 것이 된다. 물론 천도 논의는 사마의 장제가 반대해서 그만두지만.

당시 형주는 주유와 조인의 강릉 쟁탈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청니 대치, 익양 대치 등 여러 차례의 국지전을 겪는 바람에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관우가 여몽을 경계해 예비 병력을 남겼다는 기록까지 감안하면, 관우군의 규모는 기껏해야 4만을 크게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설. 이렇게 보면, 아무리 관우가 만인지적의 용장이자 유비 휘하 최고의 장수라 한들 조조가 그렇게까지 두려워 할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 아무리 용맹이 뛰어나고 군재가 좋다 한들 일단 이끄는 군의 규모가 위협적인 다음에야 크게 대비를 할 일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시각을 좀 더 넓혀 본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번성전을 번성에 국한된 전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기를 잡았던 한중 공방전의 연장선상에 놓고 번성전을 본다면 어떨까.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꺾고, 나아가 한중왕을 자칭한 사건은 피아를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거대한 충격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수십 년이라는 세월, 그 어떤 세력에게도 크게 못 미치던 최약체 방랑 군벌이 불과 수 년의 영토 확장 끝에 최강자라는 조조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의의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물론 조조에게 있어 실리적인 피해량을 따지자면 적벽전보다는 상황이 나았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자면 그게 아니올시다였다는 건데, 적벽전 직후로는 당장 중시해야 할 전선이 합비와 형북 일대뿐이었겠지만, 한중전 직후로는 판도가 변해도 너무 크게 변한 시점이었다.

당장 형주에 관우가 있고, 강동에는 손권이 있다. 사실상 서쪽과 남쪽 전체가 적인 상황에 대전급 규모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그 한 번의 패배로 끝날 일이 아니라 차후 전역에서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예고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형주의 관우는 한중전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 시점에 북진을 개시했다.

이렇게 보면, 조조가 번성 전선에 전력을 다했던 것은 관우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뿐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중에서 이미 한 차례 꺾인 판국이다. 여기에 천에 하나라도 번성이 관우에게 깨진다면, 그리하여 관우에 대한 호응 반란 세력의 준동이 거세질 수 있고 실제로 반란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더하여 기세를 탄 유비와 위에 나온 플랜대로 손권이 각기 서쪽과 동쪽에서 북진을 시도하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위나라 최후의 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조조는 자신이 구축해왔던 세력의 사활을 걸고 각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제갈량은 출사하면서부터 형주와 익주의 동시 공격을 제안했던 바 있고, 손권이 표면적으로는 유비와 동맹 관계였음을 상기한다면, 위나라를 상대로 한 세 방향에서의 대대적인 공세가 결코 허황된 꿈만은 아니다.
여기에 손권이라면 몰라도 유비 입장에서는 그 때가 조조에 대한 최대의 공세로 나갈 수 있었을 마지막 시점이었다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손권은 상대적으로 젊다 쳐도, 조조와 유비는 이미 노인장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던 데다, 관우를 비롯한 휘하의 주력 장수들도 노쇠를 걱정할 때였다.

아직 주력 멤버들이 건재할 때, 자신이 이끄는 세력이 절정기에 다다랐을 그 때가 유비 입장에선 최고의 기회였던 동시에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승세를 탄 시점에서 확실히 조조를 몰아붙이지 못하면, 최소한 중원의 판도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의 상황을 만들어 놓지 못한다면 기회를 날려먹는 거고.

아무리 조조가 적벽과 한중에서 몇 차례 꺾였다 한들, 그의 영토와 장수진과 병력은 여전히 천하 최강이었다. 그 불리하기 짝이 없는 전력비를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관우의 북진이었다고 생각하면, 조조가 번성전에서 펼쳤던 이중 삼중의 대응책은 결코 과민 반응이 아니다. 당장 만총부터가 조인과 제장들을 만류하며 어떤 말을 했던가.

4.2. 촉한에게 있어서 형주의 가치

형주는 촉한 입장에서 절실히 아쉬운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익주와 형주를 확보하고 양방향에서 북진해 천하통일을 이루자는 게 융중의 대계였기 때문에 촉한 입장에서 형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제갈량이나 강유의 북벌이 나름의 치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누가 봐도 눈에 들어오는 뻔한 공격 루트로 갈 수밖에 없기에 몇 번의 강펀치를 날려 위나라의 군세에 상당한 타격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번번이 대군을 등에 업은 위나라의 우주방어에 길이 막혀 일정한 영토를 점유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손권은 형주 뒷치기를 하는 순간 당연히 유비의 보복성 침공을 예상해야 했다. 조조는 천하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고 나머지 절반을 유비 손권이 나눠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 손권이 반목을 하고 전쟁을 벌인다면 과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보나마나다. 조조가 번성 사건에서 1년만에 죽고 조비가 무능해서 오나라가 막은 거지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한나라는 그렇다쳐도 오나라는 순식간에 망했다.

관우의 북진은 서황의 활약으로 장기전이 되었지만 여전히 양양성은 포위 중이었고 면수를 장악해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는 합비 방비를 하던 장료까지 불러들이는 초강수를 두며 전력을 형주쪽에 들이붓고 있었다. 당시 장료는 예비군이기는 했지만 조금만 기다렸다 장료가 합비를 떠나 형주로 갔을 때 합비를 쳐서 합비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합비를 함락시키면 양주 전체를 장악하는 걸 이어서 서주, 예주 진출도 가능해지고 조조의 주력을 분산시켜 힘을 약화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반 조조 세력들이 관우의 지시를 받고 있었으니 손권이 여기에 가세한다면 중원의 혼란을 더 키우는 게 가능하다.

유비 이릉대전 같은 경우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선택이었던 셈. 결과가 안 좋아서 그렇지. 특히 강유같은 경우는 왕경과의 조수 전투를 통해 수만 명을 전사시킴으로써 적장 등애로부터까지 "옹주 전체가 함락 직전에 몰렸으니 후퇴해서 다시 싸우자"라는 평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한뼘의 옹주 - 양주 땅도 얻지 못했으니 강유 촉한 입장에서는 아쉬울 노릇이다. 만약에 위나라의 전선이 적절히 분산돼 옹주 - 양주로 군세가 집중되는 일이 없었다면 옹주 방위군을 궤멸시키고도 옹주 땅을 점유하지 못한 아이러니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4.3. 하지만

그러나 관우가 번성 공략에 실패하고, 손권과 유비의 불안정한 동맹이라는 곪고 곪은 상처가 이릉대전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터지면서 천하 정세의 변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단순히 위나라가 한 위기를 넘기고 끝난 게 아니라, 정세를 뒤집을 만한 전략적 요소의 출현이 완전히 끝장이 나고 만다는 이야기다. 결국 위나라는 여전히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하게 됐고, 내분 끝에 남겨진 오와 촉의 국력은 ...

관우는 양양을 포위하던 도중에 강릉 함락으로 물러나야 했으며, 여몽은 형주를 공격하여 영구히 자국 영토화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비는 이릉대전이라는 초유의 복수전을 감행했지만, 이 또한 곪고 곪았던 양국의 상처가 최악의 형태로 발현된 것일 뿐 위나라를 상대로 하는 합종에 있어선 그 어떤 이익도 주지 못했다. 손해만 잔뜩 안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까지 망하게 할 뻔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 어떻게 수습에 성공하긴 했지만, 결국 촉한은 그 리스크를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로 주저앉게 된다.

4.4. 의 이득

사실 관우의 북진은, 손권에게도 충분히 어느 정도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앞선 선례를 보면, 원소와 조조가 서로를 노려보는 동안 손책은 서주를 공격하고 허창을 급습하려 했고, 주유는 적벽 직후의 조조가 세력 정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양/형/익주를 겸병하고 마초와 손을 잡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손권의 상황도 그에 못잖았다. 익주에 유비가 있고 형주에 관우가 있었으며, 실제로 조조는 엄청난 힘을 기울여 그 둘을 막기 위해 분전하고 있었다. 전략적 여건이라면 손권에게도 분명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손책/주유와 손권의 선택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고 ...

물론 서쪽에선 제갈량이, 동쪽에선 육손과 주연 등이 수 차례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다. 기산에선 사마의가 패배했고, 석정에선 조휴의 위군이 만 단위로 깨지는 등 강한 타격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북진은 위나라의 각 전선에 대한 위협은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제갈량과 주유가 각기 내놓은 대전략이나 마초, 관우의 행동처럼 전략적으로 거대한 변동을 일으킬 만한 요소에는 이르지 못했다.

조조라는 초세의 영웅이 순욱 같은 대전략가/대정치가의 보좌를 받고, 조인 하후연 등 유능한 장수들이 영토 확장에 앞장을 서는 등, 수십 년 넘게 기반을 다진 위나라 ... 그 압도적인 국력 앞에서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세력의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스타트 지점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한들, 전략적인 여건과 각 세력의 합종이 받쳐만 준다면 얼마든지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 차례에 걸쳐 증명된 바 있다. 당장 십만 단위로 조조군을 수장시킨 적벽전만 해도, 근간을 잃고 도주하던 처지의 유비와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의 중소 군벌에 불과했던 손권이 힘을 합쳐 이뤄낸 협동의 결정체가 아니었던가.

나아가 한중전에서의 조조군 격퇴와 관우의 북진, 이에 호응하는 지방의 반란 세력들, 거기에 시점이 어긋난 일이긴 했지만 위풍의 난과 같은 내부 모순들까지 결합된다면, 그러한 세력/국력의 격차를 전략적 구도 위에서 뒤집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나라를 비롯한 숱한 제국 창업의 인과가 그러한 수순을 밟았다. 당장 조조만 해도 맞서는 게 불가능하다는 원소를 꺾고 나라를 세운 예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4.5. 판단 미스

단순히 촉이 좋고 유비가 좋고 관우가 좋아서, 그런 그들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손권과 여몽을 욕하는 건 절대로 잘못된 일임이 확실하다. 손권이 무슨 유비의 아랫사람도 아니고 그 좋을 일만 하라는 논리가 도대체 말이 되나. 더군다나 위나 오나 촉이나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냐의 문제지, 결국 모두가 경쟁자이고 종국에는 적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유비나 손권이나 몰랐을 리도 없고.

다만, 손권과 여몽이 택한 형주 급습을 굳이 비판한다고 하면 저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선택이 낳은 삼국 정립의 형태가, 당장의 세력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라면 이득일 것이되, 천하라는 구도 위에 놓고 평가한다면 어떻게 봐도 오촉 양국에 득이 될 게 없다는 점──천하의 통일을 목표로 하든 세력의 유지를 목표로 하든──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국력의 비율은 고정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고, 위에 대한 두 나라의 공격은 결국 국지전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손권(+여몽) 의 형주 급습에 대한 비판의 핵심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손책의 북진이나 주유의 서진이나, 여몽이 거론했던 서주 공략의 선택지만큼 어려웠을 일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책과 주유는 그 리스크를 알고서도 최선에 도전했고, 여몽은 차선을 선택했다는 것이 전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 형주 영유권 분쟁에서 (그 주체가 유비 손권이었다곤 해도) 살살 관계를 주물러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내버린 쪽은 결국 위였다는 건데, 나름대로의 연횡책이었달까. 연합의 합종을 위해 소진의 역할을 맡을 만한 역량을 지닐 인물로는 첫손에 노숙이 있고 두손에 제갈량이 있었다지만, 전자는 요절했고 후자는 이릉 후에야 외교 전략적 능력을 발휘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서주 논란

5.1. 여몽의 판단

여몽에 부정적인 평가로는 손권이 차라리 방어 병력이 없는 서주를 먹으면 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오나라 내부에서 서주로 진출하는 계획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일단 손책이 한 차례 서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손권 역시 서주목을 칭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아예 없었다면 반대로 여몽이 반박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몽은 서주로 진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여몽은 서주를 공격하면 취할 수 있으나 기병이 잘 다니는 곳이라 7~8만으로도 못 막는다고 확정해 버린다. 강릉을 먹으면 장강 앞에 강릉이라는 보호막이 하나 더 생기고, 형주 남부까지 있으니 협공이 가능하다. 결론은 약한 육군으로 건업 방어를 유지, 강화하고 무모한 침략을 통한 역관광을 피하기 위해서 오의 영토확장은 고작 강릉 방면밖에는 없었다는 것.

여몽의 발언은 '현재로서는 서주를 먹을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후한서 군국지에서 제왕세기의 인용에 따르면 244년 위나라가 파악한 오나라의 병호는 13만 2천, 진양추에 기록된 오나라 멸망시의 병호가 23만이었다. 이 당시 오나라의 총동원 병력은 10만 내외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7~8만이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거의 대부분이다.

즉, 촉에서의 공격은 아예 없다고 가정하고 전 병력을 서주로 돌린 다음에도 유수오에서 매번 조조와 싸워야 했던 여몽은 이를 지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원래 지방세력의 집합체 성격이 강한 오나라의 성격까지 고려해보면 서주를 공격해서 유지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다.

5.2. 시야 문제

다만, 형주 공격이 가져올 여파에 대한 고민이 과연 있었는지는 의문스러운 점이다.

확실히 형주를 손에 넣어 장강 방어선을 확립한다는 것은 오나라의 안정에 중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당시 세력구도는 위라는 절대강자에게 촉과 오가 뒤로는 어떤 관계였든 서로 힘을 합쳐서 견제를 하는 관계였고 그렇게 해도 총 전력으로서는 촉과 오가 밀렸다.

아무리 관우 쪽에서 먼저 여러가지 구실을 제공했고, 막타를 가한 것도 관우가 위나라 번성 포위망을 푼 다음이라지만, 결국 서주 공격을 통한 협력을 안 하고 강릉을 점령한 것은 여몽이었다. 이로써 위나라는 위풍의 난과 각지의 반란 관우의 공격 등으로 천도 논란까지 나오던 곤란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촉과 오를 바꿔 이릉대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나름.

여몽이 일단 형주를 손에 넣고 나면 다시 필요성에 의해 촉과 관계 정상화를 꾀해서 오나라 우위의 삼국정립의 구도를 유지해갈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임자인 주유가 촉과 이런저런 마찰을 겪으면서도 중원 정벌의 대계를 그리며 관계를 유지했고, 노숙 역시 촉과 익양대치를 빼고는 대체로 화평을 유지하며 공명의 천하삼분지계와 비슷한 전망을 가지기도 했던 것을 비교해본다면, 여몽의 전략적인 식견은 다분히 세력유지를 우선시하는 지방세력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몽의 식견은 전술적으로는 탁월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보인다. 좀 더 장기적으로 보자면 당시 촉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조조는 여러모로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촉의 우선순위가 오가 아닌 위인 이상, 이 기세로 단 1년만 기다렸다면 조조가 사망한 이후 촉은 위와 결전을 치루게 될 테고, 촉이 위와 대치하는 틈을 노려 서주든 형주든 어느 쪽으로든 일을 도모하는 쪽이 오히려 더 대업을 진행하기가 수월했을 것이었다. 명장이기는 했지만 그 시각은 천하보다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가처럼 지방세력의 세력온존을 중시하는 목적을 우선시한 것이다. 전임자가 너무 먼치킨들.

한마디로 손권의 배신은 천하통일을 위한 배신이지도 않았거니와 애초에 천하통일의 목표가 아니라면 정작 순망치한의 관계인 대상을 배신때린 결과가 초라할 뿐이다. 결국 최후에 가선 촉이 멸망하고 진나라가 마음먹고 익주에서 내려오자 그냥 파죽지세로 멸망당하는 오나라니 여몽의 자력방어가 가능하기 위한 배신이라는 명분은 허상일 뿐이다. 배신하던, 하지 않던 촉 없이는 오도 없다는 것을 잊은 근시안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쯤되면 무엇을 위한 배신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결과물만 남긴 셈.

6. 명분

유비는 유기의 보호자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손권은 옛날옛적에 아버지 손견이 장사태수로 있었다는 것을 빼면 그런 거 없다. 애시당초 손견은 군벌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조정의 명을 받고 장사태수로 임명된 거라서 장사의 소유권을 주장할수도 없다. 심지어 손견은 18로 제후에 참가하기 위해 임지를 이탈한 바가 있고, 비록 거짓 문서에 낚인 것이라고는 하나 직속 상관인 당시 형주 자사 왕예를 살해한 바도 있다.

물론 유표 또한 조정의 명으로 형주자사로 부임한 것이기는 하나, 손견은 형주의 수 많은 군현 중 하나인 장사군의 태수에 불과했고, 유표는 형주 전체를 관할하는 형주자사였다는 점에서 유비와 손권의 입장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냥 땅 먹고 싶어서 전쟁 건 거라고 봐야 한다. 그나마 옛날 아버지가 태수로 있던 장사땅은 익양대치 이후 손권이 탈취했다. 아버지 손견의 죽음과 관계있는 땅이라고? 원술 명령으로 형주 침공하다가 죽은 것이다.

7. 외교 문제

7.1. 촉한 문제

유비는 손권과의 외교를 소홀히했고 결국 이 때문에 관우의 독단으로 인해 형주를 잃었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로 익주 입성 이후 손권측이 사자를 보낸적은 있어도 유비가 사자를 보낸것은 이릉대전 이후에나 있었던 일이다.

이 일만 보면 유비가 손권과의 외교에서 소홀히 하고 동맹국 군주를 모욕하고 쌀을 멋대로 가져가는 관우를 통제하지 않아 형주를 잃었다고 인식하기 쉽고, 유비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유비의 직신에 가까운 방통 서서가 죽지 않거나 잡히지 않아 관우를 보좌하기라도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유비에게 이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7.2. 의 문제

오도 외교 문제에 있어서 촉한만큼의 실수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적벽대전 이후 정사의 기록으로 볼때 유비는 분명 대위 전선의 사령관의 형태로 직접 싸운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형주 전역의 위의 사령관인 조인을 공략하던 것도 주유 유비, 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진행한 일이었고 이후 유비 자신의 병력으로 형남 4군의 치소를 공략하여 지배한 것도 분명히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3등분된 강하군의 가장 큰 영지를 차지하고 있던 것도 유비였다. 즉 남형주에서 사실상 남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형주 행정은 남군 공방전 기간 동안 유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우선 형주 전역 중 남군 공방전 당시 유비가 사령의 입장에서 군을 지휘하지 않았다면 관우와 악진의 대치, 주유와 장비의 진공 등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주유가 손권에게 유비 억류 후 관우 장비를 자신의 휘하로 두어 전투할 수 있다면 대사를 안정할 수 있다고 한것으로 봐도 알수 있는 일이다.

남군 공방전 당시 주유에게 관우 장비의 지휘를 할 수 있는 명령권이 존재했다면 그냥 관장을 자기 마음대로 동원해도 되나 주유는 그러지 못했고 당시 병력과 장비를 교환하자는 유비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 우리가 볼 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유비의 좌장군 직책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나 손유 동맹 당시 유비가 손권을 거기 장군 영서주목으로 상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양군의 최고 직위는 유비의 것이였다. 세력이 작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관위가 아니었다.

심지어 역사학계 의견 가운데는 아예 '오에게 남군을 대여받았다는 내용도 오측이 낸 날조다' 라는 의견도 있으며 대여가 사실이더라도 형주의 남군만을 대여했던 것이다. 아무리 정사를 확인해도 유비가 지배한 지역 중 남군을 빼고는 오의 병력이 유비를 돕거나 주도적으로 지역을 공략한 부분을 찾기 어렵다.

공안 역시 주유가 주고 싶어서 준 것이 아니라 유비 주유와 함께 남군을 공략했는데 그 전리품이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기에 땅을 떼어서 준 것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후 유비가 공안을 주도로 삼은 이후 주유에게 계속 청하여 결국 노숙에게 남군 전체를 빌려쓰게 되며 이후 익양대치는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오의 행태도 그다지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먼저 관우와 노숙의 대치로 노숙제와 관우뢰가 세워진 이후 관우 노숙의 대화 중 관우가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여 익양 대치가 유비 측의 잘못이다라고 하는 것도 매우 웃기는 부분이다. 정사를 본다면 유비는 분명 자신의 군세로 형남 사군을 공략했고 강하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오에게 실제로 대여한 영토는 남군(강릉)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운데 강하와 형남 4군을 이어주는 주도의 역할로 남군이 지리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손권 역시 조조를 막기 위해서 유비를 이곳에 주둔시키길 원했고 이렇게 서로 간의 이해 관계가 맞아서 대여고 뭐고가 있었지 어디에 노숙 말대로 일방적인 시혜가 있었는가 말이다.

이는 당시 손오 측이 유비군을 동등한 동맹이 아니라 자기 휘하의 용병 부대쯤으로 생각했다는 증거이다. 심지어 당시 병력 동원력에 있어서조차 적벽대전 당시에도 유비 손권에 크게 뒤지지 않았는데 형남 사군을 지배하게 된 유비를 아무리 산하 세력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한다는 것은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다.

또한 대치 전 여몽은 장사, 계양, 영릉을 공략했는데 당시의 내용을 보면 손권이 장사와 영릉과 계양에 태수를 보냈으나 관우가 이들을 쫓아보내니 화를 내어 병사 2만과 여몽, 여대 등에게 형남을 공략하게 했다라고 나온다.

이것도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으로 당시 유비 손권은 분명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형주를 지키는 도독 관우와의 마찰을 유비와 해결하지 않고 바로 군사를 보냈고 결정적으로 그 군대가 관우가 있는 남군, 원래 돌려 받아야 하는 남군이 아닌 유비가 자력으로 쟁취한 형남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즉 인접한 동맹 세력의 제대로 방비되지 않은 국경을 대놓고 침공한 것인데 당시 형남의 태수들만 보더라도 제대로 된 장수 없이 문관들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손권이 얼마나 유비 측의 형주 지배를 우습게 보고 계획적으로 형주를 공격할 작정을 하고 사실상 모두 자기 땅이라고 확신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분명 남군 일부만을 대여했고 노숙 손권은 이를 형주 전역의 대여로 바꿔버렸는데 정작 노숙의 단도부회 발언에서는 왜 남군 대여가 형주 전체 대여가 되었는지는 어디에서도 설명이 없다. 정작 여태까지의 사건 전개와는 전혀 다른 오나라 측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 이래서 노숙 관우의 대치시에 문답으로도 이를 설명할 수 없고 남군의 반환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강하와 다른 지역의 강탈이 되는 상황도 명백하다.

남군을 빌릴 때 유비 손권을 만나 땅을 얻기를 요청하고 주를 관할하겠다고 청했다지만 정작 그때 손권이 빌려준 것, 유비가 얻고자 한 땅은 남군의 일부이고 유비가 제압하거나 가지고 있던 다른 형주 전체가 아니다. 당시 형주목은 명목상으로나 실질상으로나 유비였다. 이는 유비가 남군 공방전에 가담한 것을 거의 기술조차 하지 않으려 든 오나라 쪽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오서 주유전)

손권은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태클을 걸거나 한 바가 없으며 오히려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토지를 유비에게 나누어 주면 안된다는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비에게 남군을 빌려주어 조조와 대적하게 하자는 노숙의 남군 대여를 승인하는 모습을 보였다.(오서 노숙전)

조조와 대적하기 위한 몸빵으로 삼았을 때는 형주 지배권에 대해 별 말이 없더니 유비가 서촉을 얻고 세력이 강대해지자 형주 전체가 자기 것이라고 우긴 것이다. 물론 이는 손권을 속이고 자기가 단독으로 파촉을 꿀꺽 삼킨 유비의 잘못도 크지만, 애당초 손권이 유비를 상대로 동맹으로서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매한가지다.

하물며 유비 손권은 분명 손권의 세력이 강성했으나 호족 연합체의 정권의 모습을 한 오나라보다는 군사적 집중도가 압도적인 유비의 군세가 전투에 좀 더 효과적이었고 그 때문에 적벽대전부터 유비가 앞장서서 싸우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관직은 잡호 장군이었던 손권에 비해 유비는 사방 장군인 좌장군으로 관위도 유비가 더 앞섰고 이후 유비가 손권을 조정에 거기 장군으로 표를 올리는 것으로 세력의 우세를 정리하는 역도 유비가 맡았다.

유비라고 처음부터 손권과의 동맹에서 허술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유비가 처음부터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유비는 손권을 거기 장군 및 서주목으로 조정에 직접 상표하였지만 손권은 한 게 없다. 유비가 영형주목이 된것은 형주의 관원의 추대를 받은 것인데 이 형주의 관원도 전부 유기의 수하였다. 이 부분은 오히려 연의가 제대로 표현했는데 유기 사후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되었다는 부분이 그 부분으로 정사와 연의 전부 유비의 형주목 추대에 손권은 한 것이 없다. 다만 방관을 했을 뿐이다.

어쨌거나 여몽의 형남 공략 성공 이후 유비가 군세 5만을 들어 형주로 내려오자 익양 대치를 끝내고 바로 협상을 하여 형주를 두 개로 나누어 영토 분쟁을 끝내며 오의 영역에 가까운 강하의 지배 영역과 장강 방어선을 위한 장사와 계양은 손권이 원래 형주의 주도였던 무릉과 영릉, 오에게 대여했었던 남군은 유비가 가져가게 되는 것으로 영토 분쟁은 모두 끝난 것이다.

손권 입장에서는 남군을 내주었지만 강하, 장사, 계양 등 원래 자신의 영토가 아닌 지역 세곳을 단숨에 꿀꺽 삼킬 수 있었다. 이런 동맹을 상대로 좋은 말이 쉽게 나온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인 것이다. 익양 대치 이후 형주의 영토 분쟁은 다른 말이 나올 수 없게 일단락이 되지만 정사의 내용만 가지고 볼 때도 손권 유비는 정상적인 동맹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동맹 관계였으며 유비라고 딱히 공명정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으로서의 오의 행태는 정상적인 동맹 세력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뢰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할 수 있다.

문제는 손권 측은 거의 유비를 아랫사람으로 보고 핍박하고 있었다는 것, 삼국지집해에는 대놓고 유비의 본거지 공안에 오나라의 관원, 군사들을 손부인이 다수 데리고 들어와 유비의 성 근처에 성을 쌓고 대치했으며 유비가 항상 이를 두려워했다는 막장 기록이 나오며 이쯤 되면 이건 정략 결혼이 아니라 감시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오의 익주 진공의 경우 유비 주유가 처음 계획을 입안 후 진공 도중 사망할 때까지도 해당 계획을 반대하지 않았다. 유비 본인의 생애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이때는 강릉을 얻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후 손유의 영안 진공시에 반대를 했다고 나오는데 이 반대의 사유를 선주전에서는 신의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강릉을 이미 얻은 상태에서 손유의 3만군으로 영안 돌파가 무리인 상태에서 영안 돌파 실패시 이후의 감당은 온전하게 유비에게 전가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주유의 진공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손유의 진공은 반대한 것도 이런 이유. 물론 손권의 입촉은 막고 유비가 손권의 뒤를 쳐서 촉을 점령했으니 이는 유비의 잘못이다. 하지만 이 당시 손권은 유비 본인의 생애 문서를 봐도 알수 있듯 그렇게 믿을만한 동맹이 이미 아니었던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익양 대치 전 손부인 유선을 볼모로 오에 데려가려고 했던 행위도 사실 말도 안 되는 건데 볼모의 언급도 없이 한 세력의 후계를 이런 식으로 납치하려 한 행태는 그 개막장으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어처구니없는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 측이라고 언제까지나 손권을 좋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감정이 유비 세력의 2인자인 관우라는 인물에 대표되어 집중되어 나타나긴 했지만, 당시 이런 오나라의 행태에 대한 불쾌감은 유비의 최고 책사인 제갈량을 비롯해 유비군 중역 대부분이 공유하는 감정이었다.[3] 이전 손부인의 유선 납치로 유비 휘하의 장수들의 손권에 대한 인식이 바닥인 상태에서 결혼 동맹을 제시했으니 당시 관우의 위치에서 저런 식의 반응은 분명 외교적인 결례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까놓고 손오 측도 노숙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동맹 외교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7.3. 총합

손권이 저렇게 조폭같은 짓을 할 때 유비도 빌린 남군을 돌려주지 않았으니 유비의 잘못도 물론 있다. 그러나 오에 유리하게 적힌 사서에서는 주유가 유비를 의심하여 유비에게 집요한 견제를 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분명히 공안을 주기로 결정한 것은 주유이며 견제 부분도 바꾸어 생각하면 손유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혼인 동맹이나 관우와 장비 대여) 노숙도 손유 동맹의 강화 일환으로 남군 대여를 결정한 것을 보면 유비 견제보다 손유 동맹의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손권이 처음 남군을 빌려줬을 때도 대체 언제까지 남군을 돌려달라고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다짜고짜 아직 유비 세력이 익주를 얻고 정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거의 막무가내식 반환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물론 정확하게 언제 돌려줘야 하는 시기를 잡지 않은건 처음부터 유비의 잘못도 있다.

하지만 그건 손권도 매한가지며 양주를 먹고 적당한 시기에 형주 상여 문제를 제대로 논하겠다는 유비의 답변에 손권은 자기도 제대로 언제까지 돌려달라는 확약은 안했던 주제에 유비가 자길 속였다며 자기가 점령하지 않은 땅에 태수를 보내고 그걸 관우가 내쫒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일으켜 형주 남부 3군을 점령한다. 이걸 처음부터 반환에 대한 제대로 된 협상을 하려는 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일반인 채무자 - 채권자 관계 협상도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가진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익양 대치에서 한쪽만의 책임을 물려면 두 세력 간에 각각의 실수가 비슷한 정도로 발생하거나 한쪽의 실수가 다른 한쪽의 실수를 전부 합친 것만큼 커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전부 손권 유비보다 더 낫다고 할 상황은 어디에도 없다.

손권의 익양 대치 전까지 유비에 대한 대우는 아래와 같다.

1. 결혼 동맹을 빙자, 동맹 세력 본거지 코앞에 병력 주둔
2. 동맹 세력의 후계자의 납치 시도
3. 동맹 세력의 경계 기습
4. 대여한 영토외의 다른 영토까지 넘기라고 요구

유비가 손권에게 저지른 외교적 결례는 다음과 같다.

1. 남군의 반환을 미룸
2. 익주의 공략을 거부함
3. 손권이 파견한 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관우가 쫒아냄

심지어 장사, 영릉, 계양의 경우는 빌린 땅도 아니며 이는 모든 사서에 유비가 자신의 군으로 직접 점령한 땅인 것이 기록되어 있다. 병력이라도 빌렸으면 이해를 하지만 손권 적벽대전 당시 많아야 3만의 병력을 동원했을 때 유비는 최저 2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형주 공방전을 거쳐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대패하여 오의 기존 유비가 지배하던 형주 지역에서의 오의 지배권을 온전히 확보하게 되나 이것도 너무 무리수가 많은 것이었다. 육손이 손권에게 말한 것처럼 유비가 수륙병진으로 나왔더라면 이릉 전역을 패배할 수도 있었으며 이는 단순하게 형주의 상실만이 아닌 오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사안이기도 한 것이다.

7.4. 손권의 판단 문제

손권이 손유 동맹 초기부터 유비 세력의 꾸준한 관리나 형남의 유비 세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견제 등이 없이 유비에게 선전포고 수준의 도발에 가까운 행동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손권의 모습은 이런 관점에서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손권 유비에 대한 호오를 떠나 종속으로 생각하면 군사적 행동의 자유를 철저하게 제한하고 형주가 반드시 필요했으면 유비의 형남 진출도 완전 봉쇄할 수 있었다. 유비 입촉 후 유장과의 분쟁도 유비가 촉을 지배하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면 형주 방면으로 대대적인 군세를 이동시켜 이후 전쟁을 벌이던가 군사적 긴장을 발생시켜 유비를 형주로 돌아오게 만드는 등 선택지들은 많았다.

하지만 당시 손권이 지시한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뿐이다. 당시 손권이 유비의 군사 행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면 유비가 종속 세력이었다는 전제도 성립할 수 없으니 어찌되었던 명확한 동맹 관계라는 게 되는데 이런 상대를 가지고 남군 대여 후 유비가 소유한 형주 전부를 내놓으라는 얼척없는 소리도 전부 말이 안 되는 행동이 되는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면서 이후 유비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명백히 땅을 정확히 둘로 나누어 분쟁을 완전히 종료했음에도 관우의 무례함을 명분으로 삼아 동맹을 배신하고 관우를 죽이고 유비의 형주 영토를 빼았고 이후 형주에 대한 군사행동을 하는 유비에게 우리보다 조비를 공격해라고 서신을 보내자 배송지가 서신에 쓰인 글자가 아깝다고 평할 정도였으니 더 말이 필요할까.

당시 세력의 호오를 떠나 형주 전역에서 보여준 손권의 행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해가 간다면 관우의 무례한 행동에 손권이 분노했다는 것인데 손권은 정작 관우의 무례함에 한번도 그 주군인 유비를 상대로 직접적인 항의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관우 말고 다른 사람으로 도독 교체 요구를 한 적도 없다. 그저 형주 강탈의 명분으로만 이용했는데 진짜 유비를 처음부터 동맹으로 생각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8. 조조 형주만이 상업이 발달했고 풍요로운 것이다?

출처 표기바람.

상용-양양 사이에 상업이 발달했고 조조가 가지고 있는 형북만이 손권 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주보다 풍요로웠다는 의견이 있는데 도저히 출처를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찾아낸 것은 주연전 주석의 조중 땅이 풍요롭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상업의 발달과는 무관하다.

더욱이 풍요롭기 그지 없다는 양양과 번성을 조비 손권이 무섭다며 불태워서 완충지로 삼아 버린다. 이때도 사마의는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라고 표현을 하지만 양양이 풍요롭다던가 상업이 발전했다던가 등의 말은 하지 않는다. 손권이 진소를 보내 점령하자 다시 조인을 시켜 재점령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풍요로운 땅을 불태워서 버릴 수 있을까? 문빙이 점령하고 있던 강하는 치소의 위치도 추정하는 정보가 거의 없는 곳.

만약 남양 땅의 풍요로움을 말하자는 거였다면 장수 조조에게 항복한 이후로 쭉 조위의 땅이었으니 거론할 가치가 없다. 또 형주의 인구가 줄어든 것은 주유 조인이 전쟁하면서 쑥을 재배하고 유비가 열심히 키워놓으려고 했으나 다시 손권이 망쳤기에 그랬다는 말이 있으나 기록 역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그나마 확인 가능한 것이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부분인데 이건 비단 오나 형주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다.

다만 남양-양양-남군 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풍요롭고 개발이 잘 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일단 기본적으로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물을 대기 쉬운 곳, 즉 강을 기점으로 시작된다는 것과[4] 양양 지역은 조조가 침공하기 전까지 유표가 무려 20년 간 형주의 주도로 다스려 왔다는 점,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남양의 인구수는 후한에서 제일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라는 점과 화북과 다이렉트 연결되어 중원 지역의 발달된 농업 기술을 도입하기 쉬웠다는 점을 보았을때 그 바로 옆인 양양의 경우는 개발이 잘 되어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서의 기록 역시 장강 이남 지역의 경우는 남군을 제외하고 기록 자체가 대단히 적다.

참고로 왜 있을 이냐면, 조비의 명을 받고 인이 양양을 불태우던 시점에서는 양양은 이미 황폐화 되어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단 조조가 형주를 침공할 당시 유비가 10만 단위의 군민을 이끌고 신야에서 남하했었으며, 형주 공방전 때는 관우가 번성으로 북상하면서 이 지역은 아예 물에 잠겨버리기 까지 한다. 거기에 다시 오나라가 양양을 다시 점령했다가, 조인 서황이 이 지역을 재탈환했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풍요롭던 지역이라도 쑥밭이 안 되는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장수에게 식읍을 내릴 때도 아직 1천 호를 채우는 사람이 없는데 장소가 처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말이 있으며 장제는 상소를 올려 현재 백성들의 수는 한나라 시대의 커다란 한 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거기다가 진군이 올린 내용 중 일부를 봐도 인구가 예전의 한군과 같다고 하고 있다.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두서의 상소를 봐도 열 개 주가 한 개 주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형주의 인구가 영제 때보다 줄어든 것은 당연하다.[5]

9. 유비 형주 관리를 더 잘했을 것이다?

이 설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무릉만이 문제인데 주요 근거가 촉한 세력은 이민족들과 매우 친했다는 것과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으로끌어들였다는 것과 이릉대전 마량이 비단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사마가를 비롯한 자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것이다.[6] 이에 대해서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만 마량 가장 가까운 군대가 익양에서 유비의 지원군을 막고 있던 보즐.

또한 무릉의 종사였던 번주가 무릉의 이민족과 영합해서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습진도 유비의 이릉 전투에 호응해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스스로 소 계릉 태수를 칭했으나 보즐과 이전에 관우 수하에 있던 부하 중 반준이 당시 이들을 토벌했고 이로 인해 영릉과양의 군대는 유비에게 호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비 퇴각 후 진압되었다고 한다.

즉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했던 형남 4군 중에서 3군이 유비가 진격하자 호응하려고 했다는 의미고 이 지역의 상당수의 무릉만이들이 여기에 호응했다는 정황이 들어난다. 이렇듯 보즐과 반준이 형남 일대에서 대대적인 친촉 반오 세력 봉기에 맞서 군사 활동을 한 정황이 있는데 마량이 후퇴 중 혼란에 죽었다는 것은 맞겠지만 꼭 무릉만에 죽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상황을 보면 유비가 적벽부터 형주 공방전, 이릉대전까지 형주 인심을 오나라보다 더 잘 잡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유비 10만 형주 민간인 남하 사건을 굳이 대지 않더라도 당장 노숙부터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줘야 한다는 명목 중 하나가 이 지역에서 오나라가 민심을 못 잡았다고 대놓고 실토하는 마당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지? 물론 관우 공격 이후 여몽이 남군에서 군율에 엄정하고 관용을 베푸는 통치로 인심을 안정시켰다지만 그 순간에도 육손은 촉 휘하 형주 각지의 저항 진압 및 항복 작업, 호족들이 이끄는 이민족 토벌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유비 통치 시기에 유비가 직접 무릉에 주둔했고 이 시기 무릉만이 촉 상대로 변란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으며 어쨌거나 이릉대전 당시 무릉만이가 촉한 쪽에 호응한 것은 사실이다. 무릉만에 한정하지 않고 이민족들로 범위를 넓히면 남군 공방전 때 관우가 패한 다음에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7]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하는 등 결코 관우도 이민족 통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시당초 남군 위에 있던 고을과 부락이 위나라에 항복하는데 이 근처에 사는 만이들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건 전쟁 중인데 관우의 통치와는 상관없이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다.[8]

관우의 정치에 대해 좋은 말을 찾는다고 하면, 여몽 육손에게 형주를 치기 위한 의도를 설명하면서 했던 짐짓 했던 말인[9]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가 있지만 이 말 하나로 관우의 통치를 세세히 살핀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10] 사대부나 일반 병졸 쪽으로 나가면 장비전에는 관우가 사대부에게는 교만하지만 병졸들에겐 잘해주었다라 되어 있다.

다만 이후 남군성 사람이 처음엔 여몽의 진입에 반발하여 계략을 짜다가 진압당한 장면을 보면 관우의 통치가 민심을 처음부터 이반시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관우가 통치하던 백성들이 여몽이 남군을 점령하고 평소보다 은혜를 후하게 베푸는 정치를 펴 다스리자 병사들에게 이를 말하기까지 한 부분은 그만큼 여몽의 군정이 탁월한 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익양 대치 때는 장사, 계양의 두 군이 여몽의 편지 한 장에 항복한 것을 관우의 통치 문제로 보기도 하나 애시당초 이 두 군이 항복한 것은 편지 한장에 그냥 넘어간 게 아니라 손권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한 상태에서 군을 동원해 편지로 항복시킨 것이므로 통치 문제로 보긴 어렵다.

학보가 여몽의 공갈에 속아 항복했으며 관우가 죽을 때는 사인이 우번의 내응이 있다는 말에 항복하고[11] 미방은 아예 내통하여 형주의 수비가 쉽게 뚫리도록 도움을 주어 이게 형주가 바로 항복하는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부하들의 행보를 보면 인선 쪽에서 부족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나 형주 탈취 당시 저항하거나 촉으로 도주하거나 협조를 거부한 관우의 관리들도 있었고 몇몇 관리는 관우가 죽은 다음에도 저항했으므로 꼭 그렇다고만 볼 순 없다. 그리고 공신 반열에 들고 유비의 인척이었던 미방의 내통을 과연 누가 예상하겠느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거기에 이것에 대해 애초에 이러한 책략은 공격 시작하고 부랴부랴 준비해서는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익양 대치나 관우 공격 때의 신속한 점령은 손권이 미리 형주 일대에 광범위한 정보 공작을 펼쳐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 해두었던 성과를 얻은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미방의 내통이 형주 탈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10.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 것은 최선이었나?

당시 유비군 내에서 관우는 주로 비상시에 최고 사령관인 유비의 별동대 및 대체재로 여겨졌던 정황이 있다. 실제로 유비는 자신이 병력을 이끌지 않을 때에는 대부분 별도의 군을 관우에게 통솔하게 했다. 서주에선 하비에 진수하게 했고 형주에선 별도의 수군을 이끌게 하고 이후에도 형주에 진수시키면서 독자적인 군권을 주었다. 유비가 용인술이 굉장히 뛰어났으며, 한중에서는 한중태수 자리를 장비가 아닌 위연한테 줬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관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서 형주를 맡긴 게 아니라, 관우가 충분히 단독으로 형주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많이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관우는 전성기 형주의 1/3도 안 되는 강릉, 무릉, 영릉 삼군의 병력으로서만 천하를 진동시켰다. 북쪽에선 위가 있고번 동쪽엔 오가 있고 전선이 2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에서는 여몽이 기회를 엿보았고 위도 조인이 번성을 지키고 언제든 서황, 장료등이 치고 내려올지 모르는데다 주요 참모, 장수진은 익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물론 관우가 손권과 외교를 잘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그 동맹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방어하기 유리한 양번에 집착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다면 강릉보다는 막기 쉬울 것이라 판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관우가 전장에서 보여준 능력을 생각하면 정치와 외교 문제만 없었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번성까지 위협하고 면수를 장악해 양양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단계까진 성공하기도 했고.

삼국의 형세가 정립된 이후 한 지역을 진수하는 일개 장수 가운데 세력의 2인자로서 제후급, 준군벌급으로 세력을 갖추고 한 지역을 진수한 장수는 거의 관우 정도이다. 비율로 봤을때 위나라의 수춘에 주둔한 사령관들 역시 만만치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력상의 비율이나 세력내에서의 위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관우는 여기서 홀로 유비의 익주 진공 이후 상대적으로 역량이 떨어지는 2선급 장수들을 수습해서 홀로 뭐든지 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물론 유비 역시 이걸 모르지 않아서 상용을 점거하고 행여나 있을 원군요청에 대비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관우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형주에 누가 오던지 관우라면 막을 수 있다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여몽은 관우가 진수하고 있는 형주지역을 정면으로 뚫어낼 생각을 하지도 못했으며 육손을 이용해서 관우를 안심시키고 진수된 병력들을 북쪽으로 실어오르게 하고, 위나라와 손을 잡고, 배신할 마음을 품은 미방을 몰래 회유하여 방어선을 약하게 하고 나서야 간신히 형주를 뒷치기 할 수 있었고 그나마 남군을 점령하고도 내부적인 저항에 직면에야 했다. 분명 이런 여몽의 계략은 대단한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이 정도의 사전준비와 내부에서의 배신 계획 없이는 관우가 원정나간 형주도 정면에서 함부로 치지 못했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형주 세력은 사실상 유비와 주력 세력이 입촉을 하고 안정화 시키는 과정에서 독립적인 군벌로 남게 되는 거나 다름없는데 이 때 아무리 고려해봐도 관우 말고 그러한 역할로서 형주를 맡을 인물이 없다. 현실의 조직에서는 게임처럼 그냥 능력치 높은 애 맡기면 되는 게 아니라 세력 내 서열이나 정치적인 균형이나 입지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동오와의 동맹 균열은 유비 쪽에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워서 오직 관우 혼자 깽판쳐서 동맹이 깨진 게 아니다. 누가 간다고 오나라랑 친할 수 있을까? 관우가 손권을 개라고 한 것은 연의에 나오는 내용일뿐이고 오나라에게 직접적으로 문제 일으킨건 상관에서 쌀 가져간건데 이때 이미 오나라는 뒤통수 칠 준비하고 있었다.[12] 관우가 양양정복 직전까지 갈 때 관우도 외교적인 결함을 보였지만 손권이 유비 관할 형주도 내놓으라고 우기기 해서 어차피 터질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건 능력보다 신의라고 할 수 있다. 마냥 손권과 친하게 지낼만한 인사를 형주에 박아넣으면, 유비 배신하고 손권에게 붙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촉과 형주는 지형적으로 동 떨어진 곳이고 그런면에서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박아 넣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런 면에서 관우에게 맡긴것이다.

당시 상황에선 관우보다 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조인의 북형주군이 남하 준비 중이었고 북형주군 털리자마자 지체없이 우금의 7군을 모아 내려보내는 거 보면 대대적으로 조위가 형주 공격준비 중이었는데 여기에서 북형주군+우금 7군 족히 10만은 넘을 위군을 제압할 만한 인물이 촉에 또 누가 있었을까? 실상 관우는 오나라에 뒤통수 맞기 직전까지 내내 승전보만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번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서황에게 패해서 포위가 풀렸다고 해도 치명적인 타격이나 이런 건 아니라서 그냥 적당히 물러나서 대치 전선만 세워도 위나라에 엄청난 압박이 가는 상황이었던 것. 이렇게 잘 나가던 상황에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형세가 급변하고 성도에 있는 촉 입장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기기만 한다고 보고 보내오던 장수가 하루아침에 멸망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버린 것이다. 고대 시대의 통신력을 생각해보면 대처할 틈도 없이 지나치게 상황이 급변해 버린 것. 입촉과 한중 공략을 위해서 유비의 주력군이 전부 다 서천 쪽으로 떠난 상황에서 관우는 형주에서 새로이 손수 키워낸 병력들만 가지고서 익양대치 등 오나라의 압박과 조조의 7군을 모은 대규모 공격을 상대로 형주를 방어해내고 되려 7군 수몰 후 번성을 포위하면서 역공을 가하는 상황까지 밀어붙인다. 거기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상황이 바뀌어버린 거라 군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몰락한 것이라는게 더 맞는 설명이다.

나관중의 소설이 원말 명초의 시대적 관점이 많이 들어가서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데 저 시대는 중앙집권 성격이 상당히 약했던 시절이다. 당시의 형주가 그냥 땅도 아니고 3국의 주요 전장무대였는데 지역 군벌, 호족 단속도 해야하고 군사적 성과도 내야 하고 참 어려운 지역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독립하거나 조조에게 붙어버리기 쉬운 지역이기도 했고, 충성도나 짬밥 생각하면 유비 세력 중에선 관우 밖에 적임자가 없었을 것. 그럴듯한 모사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당시로서 인선 자체는 적합했다. 상황 자체도 좋지 않았다. 지원군들은 뭔 군악대로 싸운다고 오질 않고 다른쪽에선 군량을 태워먹고 있고 위군만 후발대까지 합치면 적벽이래 최대군이 남하해고 있고 오나라까지 뒤통수 날리려 오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리고 강릉 주위만 쥐고 있는 촉군이 아무나 강하게 공격한다고 형주의 절반인구를 쥐고 있는 조인을 줘패고 완편시 7군을 괴멸시키는게 가능하겠는가. 애초에 지원군만 제대로 왔거나 최소한 오의 뒤통수만 없어도 양번 중 양양은 취하거나 아니면 후퇴는 가능했다.

또 정치적인 문제가 오로지 관우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남군 영토 대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어물쩍 뭉개고 넘기려고 해서 오나라의 반발을 산 유비, 애초에 대여해준 남군도 아니고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지역까지 내놓으라고 강짜 부리고 어쨌든간 익양대치로 합의해서 북진을 위한 군사거점만 빼고 다 반환받은 상태에서도 뒤치기를 감행한 손권도 촉오 동맹 균열에 큰 잘못이 있다. 형주를 지원하기 위한 최중요 거점이었던 상용에서 유봉과 맹달의 갈등으로 인해 지원군이 출전하지 못함, 익양대치로 이미 합의 끝난 상황에서 끝내 뒤치기를 감행한 오나라, 애초에 동맹에 균열이 가는 단초를 남긴 유비까지 형주 상실은 관우 혼자서 책임을 뒤집어쓰기에는 억울한 상황인것이다.

초반 공격을 강하게 하면 어느 정도 점령이 된다고 한다지만 관우의 형주군이 우금의 7군 격파 이후 사망 및 탈주 빼고 포로로 잡은 병력만 3만이다. 우금의 전체 군 규모가 관우의 형주군보다 훨씬 컸을 거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을것이다. 우금이면 조조군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급의 명장이었는데 병력의 열세에서도 그걸 상대로 그렇게 완파하고 도리어 조인을 번성에 가둬놓고 두들기는 상황까지 몰아넣었는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하튼 세력 내 서열, 정치적 관계, 형주 호족 세력에 대한 제어, 군사적 명성까지 포함해서 유비가 아닌 조조든, 손권이든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관우를 인선했을 것이다.

관우는 결국 조인을 격파하지 못하나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관우가 지니고 있던 형주군의 역량미달 때문의 문제도 만만치 않다. 관우의 후방에 있던 미방과 부사인, 반준은 각각 후방에서 물자를 지원하는 일을 맡거나 치중종사임에도 관우가 만족할만한 보급을 해준바가 없다. 물론 이건 관우의 행정적 보급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단순히 치고 넘어갈수도 있다. 그러나 위나라의 장수들과 비교해보자. 예컨데 장료가 창희를 토벌할때 시간이 지체되자 우금은 군량을 계속 보내주어 마침내 함락시킨다. 양번 당시에도 조인이 수세에 몰리자 조조는 정예 7군과 우금, 방덕, 서황을 보내고 이들이 격파되거나 구원에 실패하자 조조 본인도 증원을 간데다 장료와 하후돈마저 부르기에 이르고 청주-서주에 있는 장패의 군사들까지 동원하였으며 관우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서황에게도 계속 지원병력을 보내고 손권까지 동원해 관우의 뒤를 치려는 계획까지 짠다. 단 한명을 상대하기 위해서 위나라가 이렇게 동원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사례는 후일 촉의 제갈량과 강유, 오의 제갈각 정도를 제외하면 없으며 이들도 관우가 받은 지원보다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위나라를 상대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비가 미리 상용에 진수시켜둔 유봉과 맹달은 서로 군악대 가지고 싸우기만할 뿐 관우의 지원 타이밍을 아예 씹어버린것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상황이다. 보급과 지원에 있어서 관우군과는 완전히 천지차이인 것이다.[13]

조조군의 자잘한 전투성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증원에 힘입어 얻은 승리가 꽤 되며 조조군은 조조의 지휘하에서 지속적으로 물량의 지원을 통한 승리를 거둔바가 꽤나 많다. 번성공방전도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것이다. 당장 위나라 최고위 상장 하후연의 예를 보더라도 단독 전투로는 마초에게 대파당한 적이 있고 조조가 장안에서 밍기적 거리면서 지원이 끊기자 한중공방전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해보았으나 결국 살해당한다. 조조는 그런 그의 군재를 폄하하면서 자신의 책임문제를 은폐하려 했지만 실제로 무도방면을 유비가 차지하지 못한건 전쟁 초기, 한중군 총사령관 하후연의 신속한 전술적 조치 덕분이었고 장합이 수많은 병력을 장비에게 날려먹어 한중군 전력이 약화된 와중에도 유비의 총력전에 수개월 이상 버티며 조조가 그나마 한중에서 유비와 싸울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이런 마당에 관우가 결국 번성을 얻지못하고 서황에게 뚫린걸 단순히 장수의 역량문제로 국한 될 수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동맹과의 마찰이 예상되는, 상관의 쌀을 털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더 말할게 없을 것이다.

11. 관우를 누가, 왜 죽였는가?

관우전 주석에 기록된 촉기에서는 손권이 그를 살려주어 조조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좌우에서 '범의 새끼는 기를 수 없다'며 만류하여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일화가 있다.[14]

배송지는 이를 두고 "임저에서 강릉까지(여몽과 손권이) 2-3백리 거리인데 어찌 때에 맞춰 관우를 죽이지 않고 바야흐로 그 생사를 의논할 여유가 있었겠는가?"라며 사실성에 의문을 표했고 반장전 등에서는 단순히 참수되었다고 나온다. 다만 여범전에는 주석이 아닌 본문에 손권이 물시계와 해시계를 가져다 두고 관우가 붙잡혀 오기를 기다리니 여범의 예측대로 붙잡혀 왔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여기서 배송지의 평등을 따라 관우 여몽이 독단적으로 죽였다고 하면 '몸값이 비싼 포로'라는 교섭카드를 왜 스스로 버렸을까? 일단 누가 됐던 관우를 참한 것이라면 관우를 수하에 두고 쓴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일단 제쳐놓고 관우의 오만함과 더불어 유비가 형주에서의 세력을 재수복하려고 침공할 명분을 주지 않고, 그에 대한 볼모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인질을 왜 죽였냐는 의문이 남는다.

일단 정말 손권이 참수를 명령했는지는 둘째치고 정말 여몽의 지휘 하에 참한 것이라면 여몽이 당시 풍습대로 포로를 죽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수준의 인물이었거나, 자기 이름 한번 날려보고자 나라에 짐을 떠넘긴 여대 꼴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관우가 생포된 당시 치명상을 입어서 회생의 가능성이 없었다거나, 관우가 볼모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했다는 식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다.

'동맹국의 장수'를 급습해서 죽인다는 것이 어떤 관점에서 보건 굉장히 껄끄러운 일이기에, 당시 오나라의 군가를 참조하면 당시 동오에서는 이것을 한오(漢吳) 동맹국 간의 분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 관우가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둘러댄 내부적으로 수습하는 명분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대처는 이릉대전을 촉발시켰다. 관우의 죽음이 사실상 가장 큰 실책.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동맹국의 개국공신에 유력장수인데 생포하여 협상할 생각은커녕 사로잡자마자 바로 처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만 죽지 않았더라도 촉한은 형주수복의 명분이 줄어드니 결국 역사보다 10여년 정도 빨리 양주를 흡수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했을 공산이 크다. 이러면 촉나라는 한중공방 당시의 전력을 보존한 상태에서 여전히 위군을 압박할 수 있고 오군은 형주를 얻으면서 오나라에게 좀 더 유리하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컸다. 관우가 살았다면 양자에게 모두 이득이 가는 형태로 갈 수도 있었다는 것.

12. 과연 관우의 독단으로 북진을 했는가?

결과적으로 이는 뒤에 오나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북진을 하여 실패가 되었기에 번성을 공격한 것이 관우의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형주에서의 북진이 제갈량의 융중대에 포함된 촉의 국가전략인 만큼 관우를 평가하고 사건의 전후 관계를 완전히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북진을 꾀했는지 사서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당시 유비 한중 공방전을 승리해서 기세가 좋은 상태였고, 조조는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만약에 관우의 북진이 성공한다면 형주의 방어선을 강화함과 동시에 관중과 형북 양면에서 조조를 압박해서 수월하게 대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다 해도 조조가 형북을 신경쓰는 틈을 타서 관중으로 밀고 들어가도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판단을 유비가 내렸는지 관우가 내렸는지다.

만약 유비가 지시했거나 사전에 협의가 있었다면 관우의 북진과 함께 유비 또한 관중으로 북진하는 움직임을 보였어야 하는데, 유비가 군을 북진시키거나 북진을 준비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유비가 형주로 군대를 보내서 관우를 지원하는 방법도 있고 실제로 상용에 유봉 맹달을 보내 그곳을 점령함으로서 관우를 지원할수는 있게 되었으나 문제는 이 두 사람이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

관우의 진격과 후퇴는 불과 몇 달 만에 발생한 일이라 한중에 있던 유비가 한중을 정비하느냐고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시간이 짧아서 미처 지원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비는 관우의 북진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조조와의 전면전을 시작하는 것은 관우가 독단적으로 시작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군사 활동이다. 관우가 독자적으로 조조와의 전면전을 시작한다면 내부에서도 상당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유비로서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인데, 형주 내부에서도 관우를 개인적으로 원망한 사람들이 있을 뿐 북진을 반대하는 인사와의 갈등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유비의 반응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 부분은 유비가 사전에 알았건 몰랐건 조용히 있을 상황이 아닌데 유비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없기 때문에, 유비가 명령했다고 해석하건 관우의 독단이라고 해석하건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건 독단인지, 유비가 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이건 삼국지 집해 등에 수록된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그러한데,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을 제시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문제다.

어찌됐던 간에 실패한 전략인지라 이걸 관우의 독단이라면 관우를 까내리게 되고 독단이 아니면 유비를 까야하니 촉빠들끼리 싸우는 모습도 볼 수 있는 부분(…) 결국 여기에 대해 제갈량이 관우를 죽였다는 음모론까지 나오게 되지만 해당 설은 밑에 고우영 삼국지 문단을 보도록 하자.

이에 대해 이중톈 교수는 장쭤야오의 유비평전의 " 관우 유비 제갈량의 뜻을 받아" 일으킨 것이라는 말과 허쯔취안의 삼국사(三國史)의 "관우는 양양과 번성을 공격하는 문제를 유비 제갈량과 협의하지 않았다"는 두 가지를 소개하지만 당시 관우는 아무런 명령을 받았다는 말이 없었기에 독단으로 행동했을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유비도 말리지 않았기에 유비 또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제갈량은 당시 직함은 군사 장군, 직무는 서좌장군부사로 군사와는 관계가 없기에 제갈량의 책임은 없다고 하였다.

또 뤄지푸의 경우는 유비가 군사 명령을 내릴때는 항상 견遣, 별견別遣, 령令, 유留, 사使와 같은 사역형 동사를 썼지만 양번 전투에선 관련 사역동사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독 작전이라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관우의 출병 목적이 본격적인 북진이라기보다는, 형북 일대의 영토를 조금 넓히려는 소규모 작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 마디로 관우가 출병한 것은 본디 형북쪽에 대한 단순한 견제나 기선 제압 정도의 의미인데 7군 수몰 + 번성 함락 직전이란 엄청난 호기가 갑자기 닥쳐오자 관우가 무리를 했다는 의견이다. 갑작스레 닥쳐온 호기에 관우 손권이 형주 땅을 노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를 했고 초전의 엄청난 승리가 결과적으론 관우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관우 유비가 한중왕으로 등극한 후 조인을 공격할 때[15] '가절(仮節)'을 받고 있어 어느 정도의 독자 행동이 용인되는 상태였다는 주장이다. # 이렇게 보면 관우 유비와의 사전 협의 없이 갑자기 군사 작전을 벌였다는 해석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가절은 그 정도로 강력한 권한이 아니며, 관우의 관직은 형주 지역의 도독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유봉전에서 관우가 상용의 유봉, 맹달에게 구원을 올 것을 명령하고, 유봉과 맹달이 거절하자 유비가 이를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면 유비 역시 관우의 움직임을 상당 부분 묵인했거나 동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관우가 구원을 명령했다는 언급이 있고,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비는 유봉과 맹달을 심히 원망했으며 유봉은 상용을 잃은 다음 직접 유비에게 왜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상용을 잃고 맹달을 잃은 죄를 추궁받아 죽어야만 했다. 군법만 적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유비는 이 문제로 유봉에게 책임을 지울 생각이 만만이었던 것. 다만 이건 촉한의 후계자 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살짝 애매한 문제이긴 하다. 맹달까지 두려워서 위나라로 도망갔다는 점에선 개연성이 높지만 말이다.

형주 내에서 국지전이라고 해도 사방팔방 일어난 위나라 반란 세력의 봉기 배후에 관우의 존재가 있었던걸 보면 관우는 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전역을 최대한 이용해 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형주군의 역량으로만 위군 전부를 상대하는건 무리고 따라서 최대한 위군이 신경쓰지 못하도록 사방팔방 반란을 부추겨 판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이게 위나라 멸망 전까지 비유된 건 관우의 이런 공작 때문이라는 것.

관우가 최후까지 면수 지역을 놓치지 않고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관우는 7군 수몰 이후 최소 양양까지는 확보해둔다는 마음 가짐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용의 공략 자체가 관우의 관할인 자귀현(秭歸縣)에서 관우의 휘하에 있던 맹달이 북진하면서 상용을 유봉과 함께 탈취한 만큼, 이런 예방 전쟁을 치루는 관우를 지원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정황은 다분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선주전 주석에 보면 유비 한중 공방전 종료 이후 익주 전역과 한중에 이르는 지역에 역참과 군사 기지를 연이어 줄줄이 세웠다는 기록이 발견되는데 이 부분은 유비가 다음 전쟁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며 관우가 북진을 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혹은 관우가 면수에서 계속 고착 상태로 위군을 끌어들일 블랙홀로 만든다면 융중대의 기획안처럼 익주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옹양주 방면으로 뛰쳐나올 생각이었을 공산도 다분하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번성 공방전 당시 유비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16][17]

한편 유비 관우가 형주 일대를 뒤흔들어주기를 원했고 그렇게 명령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중에서의 전쟁을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이끌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 의견에선 관우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뿐이라고 본다. #

13. 타이밍

조조가 죽고 조비가 후한을 찬탈한 220년이 북벌의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조조가 죽고나서 북벌은 우리가 알고있는 북벌보다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타이밍은 결과론의 일부다. 북벌을 알고 있는 우리야 넓은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기는 말 그대로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말마따나 배신당한 거 다 빼고 가정하면 완 근방의 남양까지 압박했을 테고 허창을 목전에 두면 한실 해방의 기치를 실현한다는 대의도 직접 천하만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위치 상 그렇게 되면 조조도 항우가 그랬듯 옹양주를 신경쓸 수 없게 되는 구도가 나온다. 전선 넓이에 따라서 솔직히 묘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조조가 언제 죽을지는 후세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 당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후세인의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야 관우 북진 이후에 여몽이 죽고 조조가 죽은 걸 안 거지 그 당시에 그걸 알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을 보면 한중 공방전에서 촉이 승리하고 상용까지 집어삼키고 유비가 한중왕에 정식으로 등극하였고 여기에 남양에서 후음의 반란까지 일어난 상황이다. 이걸 그냥 지켜만 보는 게 더 이상하다. 그 당시로만 보면 최적의 진격이다.

타이밍이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다. 익주가 한중 공방전으로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 치고나간 것은 잘못이며 힘을 비축해 수년 후에 치고나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한중공방전과 번성공방전은 거의 동 타이밍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양측에서 치고 나가 어느 한 전선에만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위나라는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만큼 관우가 치고 나가기 충분했다. 오히려 위나라가 반란을 진압하고 안정기에 들어서면 언제 치고 나갈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반란 세력과 연계해 위나라를 끊임없이 혼란하게 하고, 그 사이 숨을 가다듬은 익주가 치고 나간다면 융중대의 완성이다. 관우의 북벌의 문제는 관우가 우금의 7군을 수몰시켜 포로로 삼고 대장마저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양번을 점령하는 전과 확대에 실패함에 있지, 관우와 유비 사이의 교감이나 익주의 지원이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관우가 급변하는 전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유비가 대처하지 못한 것이지 유비가 관망한 것은 아니다.

오를 냅두고 왜 북상했느냐면 이건 간단하다. 설마 동맹을 파기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촉에서 오의 배신을 예측한 인물이 과연 몇 명이었을까? 기껏해야 도발이나 대치 정도는 연례행사에 가깝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익양대치가 결과론적으로 동맹파기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으나 어쨌든 영토는 분할했다. 단 관우 본인은 오나라의 배신을 염두에 두어 여몽을 견제했고 형주에서 봉화로 알리면 바로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문제는 내부와 외부의 태만과 배신이었다.

관우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북상을 한 것이다. 한중 공방전으로 세가 꺾였던데다 후음의 난이 있었으니까. 홍수를 전략적으로 쓸수 있다는 것도 호재고, 하지만 상용에서 유봉이 뭘 하고 있는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상용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원군만 요청한 것이다. 유봉이 상용에서 한참 똥을 싸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체....

결론은 상대방이 약해져 있으니 공격을 나갈 타이밍이라고 했는데 관우가 알지 못했던 사실은 아군도 문제였다는것. 관우 주변의 모든 이들이 관우를 배신한 전쟁이다. 유봉이 똥싸고 있는 상용군, 본거지인 남군, 동맹인 오 이렇게 세트로 작정하고 배신하는데 안 죽고는 못 배기는 상황인 것이다.

14. 관우에게 혼인을 제의한 것이 그릇된 행동인가?

먼저 이것이 겹사돈 부류에 들어가기에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게 아닌 것이 일단 관우는 좋게 봐줘야 의형제고 조조 손권 같은 경우는 손씨 - 조씨 결혼을 세 번을[18] 했기에 겹사돈이라고 안 맞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것은 관우의 딸을 인질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인데, 이건 말 그대로 관우를 엄청난 딸바보로 만들어서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행위다. 간단하게 손씨와 조씨도 서로 결혼으로 상대쪽에 친척이 있었지만 싸움을 해댔는데 말이다.

이로 인해 파생된 결혼으로 유비 관우를 의심하게 만들 계획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또한 유비를 너무 낮춰보는 행위다. 손권만 하더라도 제갈근을 의심하지 않았고 위정 반준 장완이 이형 관계라며 무고했을 때도 오히려 위정의 관직을 삭탈했는데 하물며 유비 관우의 관계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하나는 관우가 이리 예측할 줄 알고 손권이 일부러 개전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이리 했다는 설이 있다. 이건 사서에도 그냥 한 줄로 관우한테 서로 결혼하자고 했더니 거부당했다를 가지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상관의 쌀을 멋대로 취한 것처럼 사서에 개전 명분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육손이 관우를 방심하게 만드는 것처럼 계획하고 행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사실 애시당초 그냥 관우의 성격 문제와 손권에 대한 불신으로 손권의 결혼 동맹 자체에 나쁜 감정을 가져서 부정적으로 바라봤다고 한다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우는 오측 인물들이 자신의 사기와 힘을 믿고 거꾸로 뒤엎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손권과의 결혼 동맹은 이미 유비와 손부인의 결혼을 통해 유비 측 인사들이 위협적으로 봤고 결국 손부인이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던 것을 조운 제갈량이 저지한 적이 있으며 관우는 당시 형주에 있으면서 무례하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손권 측이 혼인 관계를 청산한 상황을 똑똑히 지켜본 사람이다. 애시당초 유비 측 인사들이 손부인을 보면서 손권과의 결혼 동맹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니 딱히 추측거리라고 볼 여지도 없고 이 시기 관우는 오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봉수대를 쌓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권이 갑자기 이제는 촉의 2인자인 자신과 사돈이 되자고 하자고 나온 것이다. 관우의 입장에서는 대놓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손권의 이런 행동이 표리부동하며 자신이 어찌 나올지 시험하려 든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는 셈.

손권 관우에게 혼담을 청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이 무렵 손권은 서주자사(徐州刺史) 행 거기장군(行 車騎將軍) 이었으므로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르기 전에는 아무래도 혼인 동맹을 요청하기에는 관우와 손권의 격이 걸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고 관우가 전장군(前將軍)에 배수된 이후인 219년 가을 이후로 보인다.

15. 관우가 혼인을 받아들였다면 손권이 뒤치기를 할 일은 없었다?

사실 이 부분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상관 군량 유용이나 혼인거부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나 이미 오래 전부터 손유동맹은 익양대치 등으로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는 데다가 애시당초 정사 여몽전에 대놓고 여몽이 관우는 믿고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칭하면서 형주를 얻어 방어선을 더 굳게 만들 것을 청하는 등 처음부터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고 겉으로만 관우를 방심시키기 위해 친근하게 대했다고 나왔다. 손권과 여몽은 노숙이 죽은 이후 처음부터 관우를 치려고 계책을 짰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관우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우가 봉화대 등을 준비해 오에 대해서 대비한 것이나 오의 형주 진공이 말 그대로 전광석화에 뒤처리까지 깔끔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손권이 한 번 무시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즉흥적으로 결정내렸다고 볼 수는 없는 셈이다. 애시당초 당시 촉-오 동맹은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 있었으니 이런 계책이 나왔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었고 겉으로 관우와 우호를 맺으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저 혼인 건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관우가 우호적으로 나오는가 적대적으로 나오는가 역시 동오 입장에서 동맹을 유지할 것인지 깰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고려사항인 것은 당연하다. 손권 측이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는 이유로 관우가 손권을 모욕하건 존중하건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관우는 손권이 노리는 형주를 점거하고 있는 동시에 조조 세력과의 완충지대인 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조와 관우를 비교하는데 있어서 관우가 오에 공공연하게 적대적이라는 점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손권 측이 형주를 노리고 있다는 점은 익양대치 이래로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유비측이 그걸 몰라서 손유동맹이 불안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혼동맹이란 것도 깨면 그만이기는 하다. 북연, 성왕도 그러다 깨졌다. 결혼동맹이 있었다고 해서 손권이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물론 오나라 입장에선 침략에 빌미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관우의 실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6. 미방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여몽전과 동소전, 서황전을 대충 조합해 보면
1)손권이 은밀하게 "나 기습할거임 이거 관우에겐 비밀임" 편지 보내고
2)동소가 "이거 관우에게도 알려주면 우리가 이득" 조언하고
3)서황이 그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에게 쏘아보내고
4)관우는 주저하면서 돌아가지 않고
5)이후 서상과 여건 등이 합류한 서황이 관우의 포위를 풀어버리는
순서로 보인다. 그러니 서황에게 패하기 전에도 손권이 올 거란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미방의 배반까지는 몰랐겠지만.

그리고 관우나 손권의 뒤통수를 치는 대신 어부지리를 노리며 관망하자고 동소가 조언했고, 또한 이후 조조의 행적을 보더라도 관우가 퇴각한다 해서 굳이 뒤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강릉성은 애초에 유-손 연합군이 포위공격을 했을 때조차 1년이나 버텼던 곳으로 합비만 못하더라도 요새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관우가 워낙에 물자와 병사들을 죄다 빼 갔지만 그래도 기본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미방이 충성을 다해 버텼더라면, 관우가 결국 번성의 포위를 풀고 남하했을 것이고, 그러면 강릉에서 동오와 결착냈을 것이며 조조는 촉한과 동오의 군대가 싸우는 틈을 타 어부지리를 보기 위해 기다렸을 것이다.

문제는 조조가 220년 1월에 죽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조의 죽음으로 위나라는 빠지고, 유비가 지원군을 이끌었다면 성패는 모르는 일이었으리라.

17. 상관(湘關)의 미곡문제

흔히 한국에서 정사 삼국지가 처음 알려졌을 무렵엔 상관은 오나라의 관문으로 관우가 우금의 3만 포로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멋대로 오나라 땅을 침범해 쌀을 가져갔기에 손권이 진공 명분이 되었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이 상관이라는 곳 자체가 '정말 오나라만의 땅이 맞느냐?'는 의문점이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상관은 익양대치 당시 손권이 가져간 땅인 계양, 장사, 강하에 속하는 땅이 아닌 유비가 가져간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천릉현 바로 옆이다. 또 자치통감 호삼성 주석에 따르면 '오와 촉이 형주를 나누며, 상수를 경계로 삼았기에, 관을 설치했다.'라고 한다. 또 청나라 시대 학자 조일청이 말하길 '방여기요 75권에 오, 촉이 형주를 나눠,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으며 81권에 상구관(湘口關)은 영주부(永州府) 북쪽 10리에 있어, 소, 상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상관은 유비측 지역인 영릉에 속하고 최대한 많이 봐주면 촉-오 양측 상수 경계에서 양측 통행인을 관리하는 관문이지 이게 순수 오나라의 땅이라는 얘기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 아무리도 못해도 해당관은 촉한과 손오의 경계 지역, 혹은 완충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촉한 강역이라고 되어 있는 영릉에 속한 곳이 꼭 오나라 땅 맞긴 한가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상관의 쌀을 관우가 마음대로 가져갔다는 측면을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오나라의 지분이 없는 땅이라고 아예 할 순 없다. 자치통감에도 이 부분에서 '( 관우가) 식량이 떨어지자 손권의 상관미를 마음대로 취하였다(糧食乏絕,擅取權湘關米)라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이전에 정사 삼국지가 처음 알려지던 시기에 오나라 팬들의 주장마냥 '관우가 순수하게 오나라 영역이었던 곳을 침범하여 쌀을 탈취했다'가 아니라 '촉한에도 권리가 있는 지역의 쌀을 동맹인 오나라 사전 협의 없이 가져간 것을 문제삼았거나, 관우의 식량사정을 파악한 오나라가 통수의 기회로 삼은 것이 진짜 사건의 진상이 아니었느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자치통감이나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남겨진 학자들의 기록에서도 상관은 분명 양쪽 경계에서 어느 한쪽만이 아닌 양측의 통행인을 관리하던 곳임에는 분명하고 촉한만 아니라 손오에도 둘 다 서로 지분이 있을 만하다고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사 삼국지나 자치통감이나 관우의 이 행위에 대해서 탈취, 약취 같은 단어가 아닌 '마음대로 가져갔다, 멋대로 가져갔다'(擅取)라고 되어 있는데 서로 간의 사전협약을 무시하고 관우측이 그냥 가져갔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또 당시 관우가 상관의 쌀을 갖다 쓴 건 우금과 3만 군사를 포로로 수용함으로서 생긴 식량 부족이 문제였고 촉나라 영역인 영릉군 위에 있는 상관에 비축한 곡물을 가져오는 거 자체는 당연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수송로. 당시 번성을 두들기고 있던 관우 입장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식량 보충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 이동시키는 건 그만큼 지연 문제가 컸을 것이고 그럼 남은 곳은 상수를 통한 수로 이용뿐이다. 강하군에서부터 남쪽 창오군까지 내려오는 물길이 하나 있고, 그 물길이 장사군에서 영릉군까지 다이렉트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부분은 당연히 손오의 영역이다. 즉, 손권이 내세운 명분으로 보아 관우가 사전협의 없이 쌀을 가져갔고 거기에 자기네들 물길을 사전에 얘기도 않고 수송로로 사용했다는 의미로 나중에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손권이 겉으로나마 관우에게 협력을 약속했고 여기에 이전에 여몽을 대신해 새로 부임한 육손이 '관우에게 전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속없이 좋은 말로 언플을 날렸다는 전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데 이 문제를 단순하세 관우가 제멋대로 남의 쌀을 탈취해 마음대로 했었다라는 시각으로만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만 관우가 손권에 적대했다는 건 확실히 형주공격에 대한 불을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18. 형주의 상실로 촉한 천하통일은 좌절되었나?

결과적으로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제갈량의 융중대 관우의 죽음과 형주 상실로 깨지고 이후 촉한의 천하통일이 좌절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다. 워낙 형주가 그만큼 중요한 땅이었기에 제기되는 이야기로 확실히 이로 인해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던 촉한의 대전략은 처음으로 좌초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아직까지 촉한의 천하통일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촉한에게는 두 가지 선택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후일 제갈량의 북벌처럼 한중에서 진천(양주-옹주)으로 진격하여 북벌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주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비 본인은 형제와 같았던 최측근 장수 관우의 복수라는 명분이나 사섭을 통한 남만 자극이나 유장의 아들 유천의 익주자사 임명 건 등 손권의 도발 때문에 열받아서 후자에 더 집착했고, 조운 같은 다른 중신들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형주는 어쩔수 없으니 북벌을 시행하자는 입장으로 갈렸는데 사실 여기까지는 어느 쪽을 선택하던 딱히 문제가 없고 황제인 유비의 입장에 따라서 후자를 실행했을 뿐이다.

이렇게 이릉대전은 시작되었고, 시작은 좋았다. 무릉의 이민족들도 포섭했고, 옛 형주 지역에서 관우의 잔당들의 호응까지 있었으며, 여몽 사후 다른 오나라의 장수들은 유비에게 격파되고 있었다. 다만 하필 이 당시 오나라의 총사령관이 육손이었고 그가 시행한 계책이 촉한 원정군에 치명타를 입히는 바람에 차라리 이 병력을 북쪽으로 돌린 것만도 못하게 된 상황이 되어서 그렇지(...)

촉한은 이 이릉대전의 패배로 북벌을 위해 준비한 많은 물자, 병력, 인적 손실을 겪어야 했으며 건국군주 유비마저 이 전투의 패배로 마음의 병을 얻어 얼마후 승하하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 면에서라면 확실히 촉한의 천하통일 가능성을 낮춘 건 단순히 형주의 상실 때문이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촉발된 이릉대전의 실패 때문이 더 크다.

만약 여기서 5년을 더 기다려 이 자원들로 남만을 평정하고 황제 유비의 친정으로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말아먹고 5년간 뼈빠지게 재건한 촉한의 군세로도 촉한의 북벌은 순식간에 관중을 진동시킬 수 있었다. 유비가 남긴 유산들과 제갈량의 천재적인 소질로 나라를 5년만에 최대한 재건시켜 놓은 덕분이었다.

하물며 유비가 이 자원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제갈량을 대동하고 직접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하면 그 파급력이 어땠겠는가? 물론 당시 유비의 나이가 묫자리나 셀 나이인 환갑이 넘었다는 게 문제지만 이릉대전이 없었다면 남만평정-북벌까지의 시간이 단축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물론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으므로 IF에 불과한 시나리오지만, 향후 제갈량부터 시작해 강유에 이르기까지 촉한의 눈물나는 북벌사(...)를 생각하면 이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손해를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지, 형주의 상실로 인한 피해가 작다는 것이 아니다. 당장 제갈량의 융중대는 하북과 중원을 장악해 하나로 만듬으로서 천하의 대부분을 장악한 [19]를 상대하기 위해 익주에서 장안으로, 형주에서 완성을 넘어 낙양으로 진격해 양한의 수도를 동시에 석권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비록 적벽대전과 익양대치로 위와 오에게 야금야금 빼앗겨 관우의 북정 당시에는 원래 형주의 삼분지일만 남았지만, 이전부터 나중에 있을 북벌의 핵심 공격루트로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던 곳이었다. 이러한 형주 지역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촉한의 대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구상하게 만든 큰 피해다.[20] 유비가 중신들의 만류에도 동정을 시행한 건 이런 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21] 제갈량 역시 이를 알았기에 얼마 전 죽은 법정의 부재를 한탄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후일 융중대 붕괴 이후 제갈량의 북벌 한고조의 고사에만 따라 기습으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동맹인 오와의 연계하거나 강족, 족, 선비 족등 이민족과의 연계를 생각하면서 진행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촉한은 형주의 상실로 첫 번째 타격을 입었으며, 이릉대전으로 그 타격이 더욱 공고화되고 서서히 국운이 기울어져 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도 촉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서까지 발버둥쳤지만, 결국 대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19. 형주 소유와 북벌을 누가 더 잘 했는가의 문제

촉빠들과 오빠들의 논쟁거리 중 하나로 형주를 가지고 있었던 두 나라 중 누가 더 형주를 가지고, 나아가 북벌자체를 누가 더 잘했는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오나라팬들의 입장은 이렇다. '관우의 북벌 역시 양번공략을 실패했고 오나라는 육손, 제갈근, 주연등이 형주에서 열심히 북벌에 매진하였지만 결국 실패한것은 매한가지다. 누가 가지고 있었던지 형주 북벌은 둘 다 실패했으며 나아가 양주를 가지고 있던 오나라나 익주를 가지고 있던 촉한 역시 각각 양주와 익주를 이용한 북벌엔 실패했으니 북벌을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오나라가 북벌횟수가 많으니 삼국의 형세로 보면 오나라가 촉한보다 더 강했다.'

이에 대한 촉한팬들의 입장은 이렇다. '우선 유비부터 북벌로 한중을 빼앗았으며 관우의 북벌은 단 한번의 호기를 잡아 7군수몰을 이용해 대승을 거두었고 적어도 손권의 뒤치기 전까지는 양양을 굳건히 포위하는 등 그 기세를 잃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형주 문제를 논하면서 촉한의 북벌 자체를 폄하하는데 제갈량의 북벌은 적어도 사마의, 장합, 조진, 곽회, 비요등의 위군 무장들을 격파하며 무도, 음평을 얻기라도 했고 수번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강유의 북벌 역시 단곡의 패배 이전까지 수만명의 위나라 군세를 공세의 입장에서 처부수는 등의 성과가 있어 양주를 거의 손에 넣을 뻔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따져서 촉이나 오나 북벌을 실패한건 사실이나 이쪽도 할말은 있다.'

결국 양쪽 모두 한 번도 위에게 큰 승기를 잡지 못하였다. 형주 공방전의 치킨게임스런 결말이나 삼국정립의 한계를 방증하는 셈이다.


[1] 손권이 이릉을 서릉으로 개명했다. 대략 강릉 서쪽에 위치한다. [2] 물론 거대한 전역인 만큼 모용수를 통한 형주 방면의 부공과 요장의 촉에서 출발하는 진공 역시 존재했으나 전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쪽은 회수 쪽의 주공이었다. 당장 부공을 이끈 요장과 모용수는 부견의 패배 이후 부견을 배신하고 자기네들 나라인 후진 후연을 세운다. [3] 손오와의 동맹을 그 누구보다 중시한 제갈량조차도 법정 상대로 손부인에 이런 행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을 정도다. [4] 아메리카 마야 문명이나 아즈텍 제국처럼 아닌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그랬다. [5] 물론 배송지는 이렇게 한 주 수준으로 인구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으나 어차피 이들이 욕하는 것은 후한서 군국지와 비교해서 형주 인구가 떨어졌다고 욕하는 것이다. 즉, 배송지 말대로 해당 사료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게 되면 인구가 줄었다고 욕하는 비교 자체가 잘못된 것. [6] 자치통감에서 이릉 대전의 기사 뒤에 마량도 오계만에서 죽었다고 표기하고 있다. [7] 무릉만 보다는 면중만일 가능성이 높기에 따로 서술 [8] 유비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황개가 무릉만이를 물리치는 등 유비가 그들을 건드린 기록은 없지만 이미 무릉만이들은 통치 세력에 반발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것은 당시 무릉이 손권 땅이라고 하거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215년 이후 기록이라고 하면 해결된다. [9] 이 부분에 대해 자치통감 호삼성의 주석에선 둘러댔다는 설을 지지한다. [10] 사실 여몽 관우는 용맹하다던가, 학문을 좋아하고 강직하고 웅대하고 남에 위에 서길 좋아한다던가, 매섭고 빼어난 장수라고 판단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관우에 대해서 고평가한 적은 전에도 있었다. 관우를 상대로 겉으로나마 우호를 닦아 기회를 엿본 것도 이런 관우가 다스리는 형주에서 오를 철저히 경계하고 방비하니 이를 방심시키기 위함이었다. [11] 그러나 사인은 오서 측 기록해보면 분명 성을 처음엔 지켰다고 되어 있다. 분명 관우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이었긴 하나 무조건 배신자로 몰기엔 무리가 있다. [12] 중국 역사를 보면 군량문제 때문에 항복병들 그냥 생매장 하는일이 발생하는데 그래도 관우는 인성은 좋은 사람이어서 우금의 항복병들을 받아줘서 군량 압박을 받았다. 어찌보면 관우가 인정이 많아서 일을 망친거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13] 물론 3만명의 포로를 잡아 그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미방의 경우 전쟁 이전에도 본인이 관리하는 남군성의 군수물자를 태운 화재에 책임이 있었고 손권, 여몽과 내통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관우전에도 남군의 미방과 공안의 사인이 애당초 관우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14] 연의에서는 그 좌우에 있던 장수가 좌함이라 적고 있다. [15] 화양국지에 이때라고 기록해두고 있다. [16] 당시 유비는 한중 일대를 수습하고 한중과 익주의 연결을 굳건히 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기지 설치와 역참의 배치를 일으키고 있었다. 즉, 유비가 진두 지휘하면서 익주와 한중을 연결하는 작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와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의 대군을 상대할 만한 군사를 즉각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시기상으로 어렵다고 보여진다. 특히 10월까지 조조는 장안에서 머물렀는데 유비는 비상시 장안에 머무르고 있는 조조의 재침공을 견제하고 여차하면 치고 나갈 준비도 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우금 군의 수몰은 분명 촉의 찬스가 맞다만, 조조가 장안에 눌러 앉아서 유비가 한중에서 기어나오지 않도록 견제하고 있었고 재침공도 대비해야 하는 포지션에 있었다. [17] 수경주에 따르면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라고 되어 있다. 여몽전에도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다고 했는데 이는 관우가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시간을 끌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관우 서황에게 패하고 양양을 굳건히 포위하다가 강릉 함락 소식을 듣고 10월에 맥성에 곧바로 주둔한 게 아니라 시간을 끌면서 강릉에 먼저 도착하였고 강릉을 함락시킬 수 없자 맥성으로 간 것이다. 이런 정황상의 증거를 보건데 관우가 맥성에 주둔한것은 11월 ~ 12월 경쯤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관우가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기엔 이미 사방이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다. 관우의 소식을 유비가 마지막으로 받아본 것은 10월경으로 추정되고 이후에는 오나라에 포위되어 전령을 보낼 상황이 안 되었을 공산이 크다. [18] 손광, 손분, 유수구 전투 후에 한 번 더. [19] 위의 인구 수와 그에 따른 생산력이 동오와 촉한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학자들 중에는 천하의 7~8할을 가졌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 [20] 그렇기에 성공 가능성이 확 떨어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후 촉한의 북벌 루트는 누가 봐도 눈에 들어오는 뻔한 공격루트인 장안-양옹주 방향으로 제한되었고, 그 루트는 다른데 신경 안 쓰고 그곳에만 집중한 위에 의해 철저히 요새화되어 결국 번번히 막혀버리게 된다. 위를 흔들 수 있을 제2전선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북벌 중 1차 북벌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고 하는 이유는 기습의 이점도 있지만, 맹달을 회유해서 얻은 상용을 통해 양면 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21] 그 외에도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관우를 비롯해 장비, 황충, 법정 등 뛰어난 장수와 모사들이 연이어 세상을 떴고 자신도 많이 늙었다. 여러가지로 후계인 유선을 생각해서라도 꺾인 분위기의 환기와 안정된 기반을 남겨야 한다는 일념 역시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