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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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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폭탄을 투하하는 미국 폭격기 목표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B-29 폭격기
1. 개요2. 전개
2.1. 개전과 정밀폭격2.2. 무차별폭격2.3. 초토화정책2.4. 항공압력전략
3. 의의와 한계
3.1. 전술적 승리: 북한의 독자적 전쟁 수행 능력 상실3.2. 전략적 한계: 국경 너머에서의 군수보급 차단 실패
4. 지역별 피해
4.1. 서울/경기/인천 지역4.2. 충청/강원 지역4.3. 전라 지역4.4. 경상 지역4.5. 북한 지역
4.5.1. 도시 및 마을 폭격
4.5.1.1. 1950년4.5.1.2. 1951년4.5.1.3. 1952년4.5.1.4. 1953년
4.5.2. 기반시설 폭격
4.6. 중국 국경지역
5. 각국의 반응
5.1. 미국5.2. 대한민국
5.2.1. 폭격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
5.3. 북한
6. 출처7. 관련 문서

1. 개요

이 문서는 6.25 전쟁 당시 미군 한반도에서 수행한 전략 폭격을 정리한 문서다.

6.25 전쟁 당시 미군 북한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전략 폭격을 시행하였다. 미군은 압도적인 제공권을 바탕으로 북한의 후방군수기지를 직접 타격하여 조선인민군의 보급선을 끊고자 하였고, 폭격 개시 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하나를 제외한 모든 전략폭격 목표를 파괴함으로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완수하였다.[1] 그러나 미국의 자신감과 미군 사령부의 의도[2]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북한 지역에 많은 인명 및 재산피해를 내기도 했다.

한국전쟁기 미군은 북한 지역에 무려 635,00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이는 태평양 전쟁시기 연합군이 태평양 전역에 투하했던 600,000톤의 폭탄을 상회하며, 일본 제국 본토에 투하된 160,000톤의 4배에 달한다. 또한,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전역 전체에 투하되었던 1,600,000톤의 폭탄의 40%에 달하는 수치이기도 하다.[3] 이러한 극단적인 폭격은 북한 지역의 산업역량의 80%를 파괴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북한 지역에서 기형적인 수준의 반미주의가 깊게 뿌리내리는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권력을 본의아니게 강화하였다.[4]

2. 전개

1950년 여름 미국은 공산주의를 봉쇄한 성공적인 전쟁에서 남한이 스스로를 지키도록 도왔고, 이어서 1950~51년의 지독한 겨울에는 북한으로 밀고 들어가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국전쟁은 오래 지속되면서 1968년 즈음의 베트남 전쟁만큼이나 인기가 떨어졌고, 해리 트루먼은 1951년 12월 23%의 지지율을 기록하여 미국 역사상 어느 대통령보다도 더 큰 미움을 받았다(조지 W. 부시가 그를 능가할 때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인이 잘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미국이 3년 동안 민간인 희생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북한에 융단폭격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이에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훨씬 더 적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이 그 전쟁에 관해 처음 듣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공습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소이탄 투하부터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 전쟁 막바지에 북한의 큰 댐들을 파괴한 것까지 다양했다. 북한이 전쟁 발발 며칠 만에 미국에 제공권을 잃은 제3세계의 작은 나라였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북한 공습은 일본과 독일에 맞선 공중전을 더 정교히 다듬어 응용한 것이었다.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커밍스의 한국전쟁,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213~214쪽.

2.1. 개전과 정밀폭격

2.2. 무차별폭격

"귀관들은 관할 지역에서 모든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할 완벽한 권한을 가진다. 아울러 그들에 대해 발사 및 폭격의 권한을 가진다."
미8군 사령부의 명령문 'CX 10025' (1951년 1월 3일)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유엔군은 공중폭격 정책을 과감히 수정하여 기존과는 완연히 다른 노선을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그렇게 된 것이 초토화 정책에 기반한 무차별 폭격이다.

2.3. 초토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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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팜탄 폭격 (1951년 5월 10일) 네이팜탄에 의해 다친 사람들 (1951년 4월 수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네이팜탄 사용량

2.4. 항공압력전략

3. 의의와 한계

3.1. 전술적 승리: 북한의 독자적 전쟁 수행 능력 상실

전장에서의 전술적인 작전은 전장 너머 근거지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차단·파괴 공작 없이는 완전한 효율을 낼 수 없습니다. 공군력을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은 적의 근거지에서 모든 종류의 탄약, 총기, 장비 운송 흐름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It is axiomatic that tactical operations on the battlefield cannot be fully effective unless there is a simultaneous interdiction and destruction of sources behind the battlefield. The proper way to use air power is initially to stop the flow of supplies and ammunition, guns, equipment of all types, at its source.
호이트 반덴버그 장군,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에게 보낸 1950년 7월 3일 편지에서[5]
미합중국 공군 극동사령부는 당신과 당신 지휘부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랑스러워 할 만한 새로운 역사를 썼다.
The FEAF Bomber Command, new as it is in the annals of the United States Air Force, has made history for which you and every member of your command can be justly proud.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 에밋 오도넬 주니어 장군에게 쓴 편지에서[6]

미군은 전략폭격을 통해 북한의 군수 생산능력 파괴라는 당초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전략폭격을 개시한 지 한 달만에 북한 전역이 초토화되었으며, 전쟁 지속에 필요한 공업 능력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원산 폭격으로 원산의 대규모 석유 정제소의 가동이 멈추고 라진항의 해상 연료저장고가 신형 전략폭격기 B-29에 의해 파괴되면서, 조선인민군 제2차 세계 대전 후기 독일 국방군처럼 만성적인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평양에서는 소형 무기, 탄약, 돌격소총 등을 생산하는 병기창이 파괴되었으며, 중국 소련으로 텅스텐과 고품질 강철을 수출하던 공장 역시 문을 닫아야 했다. 평양에서 동해안까지 이어져 북한군의 전략적 재배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철도 역시 파괴되었다.

한 예로 1950년 7월 30일에 미 제22 및 제92 폭격전대의 B-29 중폭격기 47대가 흥남의 조선 질소화학공장에 약 50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시설의 30%를 완전 파괴하고 40%의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전략폭격의 유용성을 확인하고 2개의 중폭격기 전대를 추가로 지원하여 나머지 북한의 산업시설에 대한 폭격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다.[7]

그러나 유엔군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공군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1.4 후퇴가 벌어졌다. 신생국이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미국에 비하면 자체적인 공군은 미약했으나, 미 공군은 이제 북한만이 아니라 소련군의 지원을 받는 중공군 혹은 소련군 조종사가 위장 탑승한 미그기에 맞서야 했다. 게다가 북한 지역의 전략목표는 이미 개전 초 한두달 사이에 초토화된 상황이었고, 만주 혹은 북중 국경지대를 폭격하는 것은 정치적인 위험을 동반했다. 때문에 중공군의 참전 이후 전황이 안정화되기까지 수 개월 동안에는 미 공군 역시 F-80 슈팅스타이나 F-84 썬더제트 전투기 전력을 확충하며 제공권 확보를 우선시했고, 후방 보급기지에 대한 전략폭격 대신 전선을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한 근접항공지원 및 전장지원에 주력했다.

1951년 초에 접어들며 전황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미군은 다시 전략폭격에 눈을 돌린다. 한국 전쟁 초반과는 달리 중공군은 이제 적군이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함경도 근처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자 강계 청진 지역의 다리나 터널[8], 레이더 기지 등 주요 전략거점을 파괴할 것을 명령한다.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B-26 B-29 함흥 등 주요 거점을 공격했고, 해당 지역에 주둔해 있던 중공군의 공세 준비를 무력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북중 접경지대는 몰라도 확전 우려 때문에 중국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없다는 제약은 여전했고, 전쟁 초기와는 달리 공군력만으로는 중공군의 전쟁 수행능력을 원천 무력화시킬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중공군은 오랜 게릴라전 경험으로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전력을 온존하며 기동하는 것에는 도가 튼 정예병들이었고, 한반도의 험준한 산지 역시 여기에 한몫했다. 때문에 미 공군은 중국 본토의 생산력에는 타격을 입히지 못하더라도 보급과 작전수행능력만큼은 저해하기 위해 북한 본토의 인프라를 철저하게 파괴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군수보급로, 철로, 공항, 군용 통신선 등이 우선 파괴순위가 되었다. 한편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기술발전으로 폭격의 정밀도 역시 향상되었다.

1952년에 이르면 전선은 다시 휴전선 부근에 고착화되었고, 물밑에서는 정전협상이 진행되었다. 한국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북진통일과 휴전협정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었으나, 미군은 이미 예상을 뛰어넘어버린 한국 전쟁에서 굳이 타국의 미래를 위해 무리한 희생을 치를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전쟁 후반기 미 공군은 평양 등 북한의 수도를 폭격하면서 심리전 효과[9]를 노리고 장기적으로는 정전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5월 13일 클라크 장군은 "불필요한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make every effort to avoid needless civilian causalities)"을 주문하면서도 평양 도심 및 근교에 위치한 "적군의 모든 지휘통제소를 파괴하기 위한 대규모 폭격 작전"을 승인했다. 폭격 전야인 7월 4일과 7월 8일에만 각기 70대, 84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압록강변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을 파괴하였다. "압력펌프 작전(Operation pressure pump)"가 개시된 7월 11일에는 미 공군 극동사령부에 속한 거의 모든 항공기들이 날아올라[10] 적국의 심장인 평양을 타격했으며, 촘촘한 방공망에도 불구하고 1,500여개의 건물을 파괴하고 400~500여 명의 공산군 요인들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6.25 전쟁에서 미합중국 공군은 720,980 소티, 미합중국 해군은 167,552 소티, 미합중국 해병대는 107,303 소티를 기록하였으며, 지상발진기지에서 통제권을 넘겨받은 우호국 항공기까지 합쳐 총 1,040,708 소티를 기록하였다. 임무 별 분류에서 전략폭격이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지는 않으나[11], '기타'의 대부분이 전략폭격이라고 추정한다면 대략 전체 소티의 30% 정도가 전략폭격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월 26일에서 1953년 7월 27일 사이에 미국과 미 동맹국 공군은 전략폭격으로 기관차 963대, 기차 10,407대, 다리 1,153개, 건물 118,231개, 벙커 8,839개, 석유저장고 16곳을 파괴하고, 철로 거점 28,621곳을 무력화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북한은 침략전쟁의 대가로 광복 직후 한국보다 비교우위를 가졌던 공업단지가 완전히 파괴되는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고, 이후 대한민국이 사회적 혼란을 이겨내며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동안 다시는 재침공을 감행할 만큼의 군수공업력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3.2. 전략적 한계: 국경 너머에서의 군수보급 차단 실패

미군 파일럿들은 두 가지 정책에 따라야 했다: 중국 소련과의 접경지에 대한 폭격을 피해야 했고, 군사 목표에 직접적으로 한정된 "정밀타격"을 수행해야 했다. 정치적인 고려 - 정책결정자들의 확전 가능성에 대한 우려 - 가 첫 번째 결정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정립된 미 공군의 군사교리와 여론의 불만에 대한 고려가 두 번째 결정을 좌우했다.
<LIMITED WAR, UNLIMITED TARETS>, Taewoo Kim, p. 472
1950년 7월 기준으로 북한 조선인민군 보급의 상당수(major proportion)는 한반도 후방에 위치한 공업단지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미 공군은 적진 깊숙한 곳까지 전략폭격을 가할 역량이 없었다. (...)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북한 조선인민군의 보급은 대체로 국경 너머의 근거지에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전략폭격은 남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지상전에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힘은 없었다.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p.198

4. 지역별 피해

아직은 한국인으로 태어날 때가 아니다.
미국 특파원 케이스 비치[12]
사람들은 왜 미군이 적이 없는 마을을 불태우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중략) 집들을 불태워 이미 8천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노인, 장애인, 어린아이들입니다. 이 작전이 가져올 끔찍한 영향과 비교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빈약합니다.
바 7사단장이 알몬드 10군단장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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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으로 희생된 북한 아이들[13] 폭격으로 파괴된 집 앞의 어머니와 아기
"한국에는 더 이상의 폭격 목표가 없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14]
미 극동권 공군사령관 에멋 오도넬의 1951년 증언
"우리는 한국의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우리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15]
커티스 르메이
"미군은 매일 500대에서 1천500대의 폭격기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개전 후 1953년 4월 말까지 미국은 26만 발의 중·대형 폭탄, 2억여 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 발의 네이팜탄을 사용하였다."[16]
미군의 한국전쟁기 무기 사용에 대한 통계

4.1. 서울/경기/인천 지역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배럿(G. Barrett)은 1951년 초 경기도 안양 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 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을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 벌의 옷을 부여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들은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 있었다.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30쪽.
1950년 서울 수복 직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은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지역 지역별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를 조사하고, 그 원인들을 공포·총포·화재·피살·행방불명 등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공보처의 분석 결과 공중폭격이 4,250명이었으며[17], 따라서 한국전쟁 초기 서울시민 전쟁피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더불어 용산구가 전체 폭격 사망자 수가 2,706명이었는데,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587명으로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했다.[18]

2021년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을 보면 서울 미군 폭격 희생자 유족인 주은봉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거의 매일하다시피 폭격했어요. 한강 철교 이쪽에 폭격이 오면, 저 영등포 쪽에서 콩알만 한 게 막 내려온다고. 그리고 그게 쏴 하다가 그냥 푸당푸당 하면 말이에요. 멀리서 보면 새까만게 한 40~50개가. 그때 때린다는 게 서울역 그 원효로 입구에 있는 주물공장 이런 거 때린다는 게 잘못 때려갖고, 주택가를 맞아가지고 주택이 많이 손상이 됐지.
뉴스타파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2016년에 개봉했던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이전에 미공군이 월미도에 있는 인민군의 군사시설을 폭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상에선 마치 미군이 공습한 월미도는 인민군 군사시설만 있던 것처럼 묘사됐는데,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950년 9월 10일 미 해병대항공단 제15 항모전단 전폭기가 작전상 전략지였던 월미도에 네이팜탄 95발을 투하해 최소 100명 이상의 주민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인천 시민단체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역사 왜곡" 2021년 국내 언론사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에서 인터뷰한 피해자 정지은씨(당시 7세)의 얘기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여기에 오셔가지고, 집터가 바로 여기예요. 시신이 전부 다 알아볼 수 없게 탔으니까, 근데 치아를 보고 아, 이게 네 아버지구나. 거적때기라고 하죠? 가마니 두 쪽 얻어다가 그 집터에 가매장을 하신 거예요. 만삭의 몸으로 여자 한 분이 그 시신을 가매장 하시는 게 보통 사람은 못 했을 겁니다. 그거! 지금도 이 자리에 어디에는 우리 아버지 유골이 묻혀있단 말입니다. 유골도 못 찾았어요. 아직까지! 저는 월미도 땅을 걸으면 죄송스러워요. 우리 아버지가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제가 미군이나 우리 군인들한테도 섭섭한 게 뭐냐면 그렇게 시신이 있으면 한 군데라도 가매장을 해주셨으면 이런 한은 안 맺힐 거 아닙니까?
뉴스타파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4.2. 충청/강원 지역

4.3. 전라 지역

1950년 8월 3일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인근 해상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피난선을 미군기가 기총 사격해 승선자 250명 중 다수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피난선이 부산에서 출발해 통영과 욕지도를 거쳐 8월 2일 여수시 남면 이야포 포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3일 아침 미군 폭격기 4대가 나타나 태극기를 단 피난선에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해 1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을 입는 아비규환 현장으로 돌변했다. 이후 폭격을 받은 피난선은 총에 맞아 산더미 처럼 쌓인 시신에 기름을 부어 3일 밤낮으로 불타 바다에 수장되고, 일부는 산에 매장됐다고 기재돼 있다. 미군 폭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8월 9일에는 남면 횡간도 앞바다 두룩여 해상에서 조기잡이 하는 100여척의 어선들을 폭격해 수십 명이 다치고 사망하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다.[19]

4.4. 경상 지역

1950년 8월 16일 미군 전투기 및 폭격기가 왜관에 있는 마을을 폭격해서 민간인 200명을 죽였다. 왜관지역 폭격은 해당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하는 작전이었다. 미 공군은 225KG 폭탄을 왜관에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낙동강 부근의 논밭과 숲, 촌락이 본래의 형태조차 상실했으며, 왜관지역에서 북한군과 대치했던 백선엽마져도 낙동강 서쪽 약목과 구미 사이 가로 5.6킬로미터, 세로 12킬로미터의 직사각형 구역이 쑥밭이 됐다고 이후 회상했을 정도다. 이 왜관 폭격에만 98대의 B-29 폭격기를 동원하여 3,084발의 225kg 파괴폭탄과 150개의 450kg의 파괴폭탄을 이 구역에 투하했는데, 놀랍게도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래 최대 폭격작전이었다.

1950년 9월 2일 B-29기 25대가 김천, 고창, 진주에 225kg의 폭탄 803발을 투하했고, 9월 3일에는 35대의 B-29기들이 안동, 성주, 의성, 합천, 고령, 상주, 영동, 제천 전선 부근의 병력과 장비를 공격했다.

1950년 8월 초 경남 함안의 남산벌판에 모여 있던 피난민들이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사건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난민들은 전투를 피해, 혹은 당국의 소개조치에 따라 마을을 떠났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넓은 벌판에 흰옷을 입고 모여 있었다. 오히려 흰옷을 입은 채, 전투기를 향해 수건을 흔들었지만, 전폭기는 이에 상관없이 폭격을 지속했다고 한다. 1950년 8월 16일 포항 흥안리 곡강천변에서도 민간인이 집단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과장되었다고 의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폭격 피해자 김OO씨는 당시 곡강천변에 수천명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고 증언했다.[20][21]

1950년 8월 29일 포항 철포리에서 네이팜탄을 실은 미군 전투기 4대가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미군 보고서를 보면 정찰기가 폭격결과에 대해 매우 만족했고, 죽천동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을 대부분을 파괴했다는 평가도 남겼으며, 오후 늦게 폭격을 다시 개시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날 폭격으로 칠포리에서만 주민 30명 이상이 사망했다. 미공군은 전쟁 초기 인민군이 점령한 포항지역에 폭격을 가했고, 최소 5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22] 아래는 당시 생존자의 증언이다.
칠포 어촌에 네이팜탄, 그걸 써서 출어 준비하던 사람이 여자 남자 한 10명 이상 그냥 돌아가셨고, 집에 불이 나고 오전에 불바다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오도리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세간살이 정리하고 개울물 떠다가 불을 끄고 그랬어요.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포항유족회에 따르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6·25전쟁 당시 포항에서는 13개 마을에서 550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89명이다. 성별로는 남성 81명·여성 108명으로 여성이 57.1%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0∼20세(희생 당시 나이 기준)가 86명(47%)을 차지했고, 청장년층인 21∼40세 54명(29.5%), 41∼60세 27명(14.8%), 노년층인 61세 이상 16명(8.7%)이다. 미성년자와 노년층이 총 102명으로 전체 55.7%에 달한다. 또 일가족 내 2인 희생사례는 44건이며, 이 중 한 가족에서 7명이 희생된 사례도 있었다. 포항유족회 관계자는 "미군 폭격 사건이 발생한 전국 21개 지역의 희생자들 중 진실이 규명된 희생자 1천109명 중 포항지역 희생자는 모두 141명으로 전국에서 셋째로 희생자가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23]

1951년 1월에는 미군이 산성동을 폭격하여 13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심지어 한국군이 이를 조사해서 보고할 정도였다. 자세한 문서는 산성동 폭격 사건을 참고하라.

4.5. 북한 지역

북한 지역을 공습하는 B-29
"서 있었던 것은 남김없이 쓰러졌다. 탈 수 있는 것은 남김없이 타버렸다. 남은 것은 바위와 돌뿐이다. 초가집 한 채 남지 않았다. 북한은 이제 석기시대로 돌아갔다."[24]
커티스 르메이
"우리는 충분히 보았다.(We had seen enough)" 조사위원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들은 신의주의 전쟁피해 현황과 지역민들의 열악한 일상에 대한 상당한 정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돌아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폐허의 패턴은 단조로웠고, 시민들의 주거환경과 식생활도 최악의 상황의 일정한 반복에 불과했다.
냉전의 마녀들 154쪽
북한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군사적 표적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종종 기관총 세례를 받았는데, 그 조종사들은 표적에 발포하기를 즐겼다.
매러이 티보르의 증언[25]
미군이 참전한 이래 가장 무서운 공격은 비행기 폭격이었다.

미군 비행기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밤낮으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폭격하기 시작하면서, 인민군 점령지역에도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미군기는 밤이 되면 공중에 내내 떠있다가, 불빚이 조금이라도 흘러나오는 곳은 번개처럼 무차별 기총소사하고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흡사 들판에서 놀고있는 햇병아리 한마리를 보고 수십마리의 독수리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꼴이었다.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 현장문학사, 1990, 100쪽.
전쟁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1-6에 달하는 50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중국군과 유엔군을 합치면 600만 명에 이른다. 한국전쟁의 비극성은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거나 다친 데서 확인된다. 남한의 경우 전체 사상의 50%인 100만 명이 민간인 사상자였고, 북한은 무려 전체 사상자의 80%인 25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 북에서 이토록 민간인 피해가 심했던 것은 일본의 군사기지에서 출격한 미군의 무차별적 융단폭격 때문이었다. 평양에는 43만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북한 전역에 1평방킬로미터당 평균 18개의 폭탄이 퍼부어졌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군이 사용한 양보다 더 많은 폭탄이 한국전쟁 기간에 한반도, 특히 북한에 투하되었다. 경제적인 피해도 막심했다. 8,700개의 공장과 기업소들이 파괴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도 공업생산은 1949년의 64%에 불과했다. 농업생산의 피해도 컸다. 폭격으로 관개 시설과 제방, 저수지들이 파괴되었다. 37만 정보의 논밭이 피해를 입었으며 경지면적은 9만 정보가 줄었다. 1953년의 농업생산은 1949년의 76% 수준이었다. 주택과 학교, 병원, 극장, 도서관 등도 파괴를 피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미국이 조선은 앞으로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호언할 정도였을까? 전쟁을 일으킨 대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속에서 북한 주민이 겪은 고통은 처참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158쪽.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기념관이나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나 <매시>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처럼,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이 군인 대 군인의 군사적 충돌로 묘사된다. 그러나 북조선 인민들에게 전쟁은 폭탄과 대포에 의해 모든 도시와 거의 모든 마을들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의미했다.


나는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최기옥에게 공포스런 경험을 직접 물었다. 평양에서 미국의 네이팜탄 공중폭격으로 근처에 잇던 수십 명이 사망했고, 그녀는 알아볼 수도 없게 된 시체들을 수습해야 했다. 끔찍한 파괴로 전쟁의 폭격이 멈추자 평양 전체에서 건물이 제대로 서 있는 곳은 겨우 두 블록 밖에 되지 않았다. 북한의 거의 모든 주요 주거지는 폭탄과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됐고, 4명 중 약 1명꼴로 죽었다. 미국은 60만 톤의 무기를 사용했고 제2차 세계대전 전 기간 동안 사용했던 것의 5배나 되는 네이팜탄을 한국에서 사용했다. 미군은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를 배치했고 댐과 제방을 폭격했다. 이는 미국이 뉘른베르크에서 나치들을 재판하면서 전쟁범죄로 간주했던 행위였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역), 『한국의 민중봉기, 민중을 주인공으로 다시 쓴 남한의 사회운동사 1894년 농민전쟁~2008 촛불시위』, 오월의봄, 2015, 207쪽.
한국전쟁은 19세기 중반 이래 서방 세력과 동아시아 세력이 재래식 무기로 싸운 유일한 지상전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항복한 후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인 한국전쟁은 발발과 함께 국가 간 협력의 평화로운 새 시대를 향한 희망을 닫아버렸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일제를 무장해제시킨 후로는 가장 잔혹하게 싸운 전쟁으로 남았고, 미군 사상자만 베트남 전쟁의 4배를 넘겼다. 다양한 증언들에 따르면, 파괴를 초래한 양상이나 저지른 만행의 정도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이나 태평양 지역의 어느 전장도 능가하는 참상이었다. 주한 미군과 유엔군의 최고사령관이자 미군 극동 사령관으로서 일제에 맞서 전쟁을 이끌었던 맥아더 장군은 코리아에서 그 전쟁을 직접 목격한 다음 이렇게 증언했다. 그런 참화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나는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 많은 죽음과 참화를 경험했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전쟁을 직접 겪으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전쟁을 인류 역사상 들어본 적 없는 살육이라고 불렀다. 두 전쟁을 모두 직접 목격한 미국 지도부 내 수많은 명망가들도 비슷한 느낌을 공유했다.


전쟁 중 북한이 입은 손실은 역사상 비교 대상이 없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사망자가 인구의 20%에 이르렀고, 혹자는 30%로 추산한다. 현대사에서 다른 어떤 나라가 겪은 전시 피해 수준도 능가했다. 북한에 투하된 폭탄이 총 50만 3,000톤이었던 것에 견주어볼 수 있다. 폭격작전이 어느 정도로 격렬했는지 보자면, 미국이 12만㎢에 불과한 작은 나라에 3년간 쏟아부은 폭탄이 300만㎢가 넘는 일본에 4년에 걸쳐 투하된 폭탄의 양보다 더 많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을 포함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베트남 전쟁에 투하된 폭탄보다는 적은 양이었다고 하지만, 국토가 훨씬 더 작았고 기간도 더 짧았으며 주요 주거지마다 인구 밀집도가 훨씬 높았다는 점에서 북한에 대한 폭격을 세계 전쟁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것으로 추산하는 평가를 낳았다.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94~95쪽.
미군의 폭격은 근래 역사에서 오늘날까지도 전례 없는 규모로 북한 주민들을 대거 몰살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주민 300~400만 명 중 대다수가 공중 작전에 의한 것이었다. 서방 학자들에 의한 일부 추정치는 북한의 전시 사망자를 인구의 약 30%로 보았다. 공군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북한 폭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3년가량의 기간 동안 우리는 그 나라 인구의 20%를 살해했다. 이 숫자는 폭격과 전투에서 부상을 입거나 불구가 된 수백만 명까지는 아니라 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수십만 명, 또는 그 나라가 입은 경제적 손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르메이 장군의 더 보수적인 추정으로도 인구 규모 대비 북한이 입은 손실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어떤 나라가 겪은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이런 사망자 수는 인구의 백분율로는 물론이고 절대적 수치로도 기이할 정도로 높다.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182~183쪽.
완전히 융단폭격으로 인해서 초토화시켰다고 봐야죠. 평양과 원산은 멀쩡한 건물이 두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원산폭격이라는 말도 나온 것처럼 도시는 완전히 다 폭파되었다고 보면 되죠. 적어도 군인, 민간인 포함해서 100만은 훨씬 넘는 사람들이 폭격에 사망했다고 봐야 되겠죠. 그러니까 북한이 6.25전쟁 때 폭격으로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김동춘 교수[26]
미군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않은 초반부터 정전협정 효과가 발효되기 직전까지 북한 지역에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다. 공습은 군사시설, 주민거주시설, 기반시설을 가리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북한 지역에 투하된 폭탄은 총 47만 6000톤에 달한다. 이것은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각 나라에 투하한 폭탄량과 맞먹으며,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독일에 투하된 폭탄 수를 훨씬 초과하는 양이었다.[27] 또한 북한의 면적을 고려했을 때 1㎢당 18개의 폭탄이 투하된 셈이었다.[28] 말 그대로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대량 살상이 벌어졌으며, 못해도 수십만 명[29] 이상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사실상 민간인 학살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1950년 11월 8일 미공군은 신의주를 폭격했었는데, 당시 미군 소속 항공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 폭격했다. 이 폭격은 신의주를 향한 최초의 공중폭격이었는데, 당일 폭격으로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됐다. 또한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되었다. 11월 8일에 있던 폭격으로 최소 5,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고, 그중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30]

북한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미 공군 폭격기들이 북한 민간지역만을 무차별 폭격했다고 국제사회를 향해 수차례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던 박헌영은 1950년 7월 1일, 8월 5일, 8월 29일, 9월 7일, 9월 16일, 12월 7일 등 수 차례에 걸쳐 미 공군의 폭격에 의한 민간인 피해 상황을 유엔에 통보했다. 유엔총회 의장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앞으로 발송된 이 서한들은 북한 지역 민간인들의 폭격피해만을 다룬 것이었으며, 이 같은 박헌영의 폭격피해 관련 성명은 당시 미 공군의 군사목표 정밀폭격정책과 정면으로 상반된 내용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

북한에서 낸 폭격 피해에 관한 집계에 분명 신뢰할 수 있는 출처인가?'를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격』의 저자 김태우 교수는 "북한은 최소한 자신들의 집계를 과장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책에서 주장했다. 물론 북한 측 폭격 관련 신문기사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하 조국전선)의 보고서는 대부분 미군의 '만행'을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작성되었지만, 폭격양상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지 않았다. 북한이 그러했던 이유 중 하나는 대외적 선전뿐만 아니라 대내적 사기도 고려해 그 공격 및 피해 상황에 대한 설명 시 필요 이상의 과장은 자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32][33] 대표적으로 북한은 1950년 8월 7일 33대의 B-29 폭격기가 평양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미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의 출격보고에는 당일 평양 폭격에 참가한 B-29 폭격기의 수는 49대였다. 즉 북한이 16대나 적게 추산한 셈이다.[34]

미 공군의 폭격 피해에 대한 북한 정권의 과장되지 않은 보도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다. 예컨데 원산지역 폭격과 관련하여 당대 미 공군 자료에 등장하는 B-29기 출격 수치는 7월 13일 56대(폭탄 500톤 투하), 7월 22일 1대, 8월 7일 10대, 8월 9일 24대, 8월 10일 46대 등임에 반해, 북한은 7월 13일 폭탄 500톤 투하, 8월 9일 9대(폭탄 77발 투하), 8월 10일 31대(폭탄 120발 투하) 등을 주장했다. 오히려 북한은 비행기수와 폭격의 강도 부분에서 미 공군의 실제 공격수치보다 적게 집계하거나 매우 유사하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 같은 경향은 평양, 흥남, 함흥, 청진, 성진 등의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35]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 18개 도시는 최소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던 것 보다 높은 수치다. 북한 도시의 파괴율의 일부를 보자면 아래의 표와 같다.
북한의 도시 파괴율[36]
도시이름 파괴율
평양 75%
청진 65%
함흥 80%
흥남 85%
사리원 95%
신의주 100%
원산 80%

4.5.1. 도시 및 마을 폭격

※ 폭격에 의한 북한 도시의 파괴율 : 보기 / 접기
||<-2> [37] ||
도시 파괴율
남포시 80%
청진시 65%
정주시 60%
해주시 75%
함흥시 80%
흥남시 85%
황주군 97%
강계시 60%
군우리 100%
겸이포 80%
평양시 75%
사리원시 95%
신안주 100%
신의주시 50%
성진시 50%
순안구역 90%
선천군 60%
원산시 80%

1950년 9월 16일, 원산시 1950년 12월 16일, 강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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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으로 파괴된 민간인 주택 폭격 직후 불타는 거리와 피난하는 여인
4.5.1.1. 1950년
김일성(조선 로동당 수상): 당초 전략에 큰 차질을 빛고 말았소. 동부전선에서 상당한 시일이 지체됐고. 남조선 군대의 한강 방어선을 끝내 허용하고 말았소.


허가이(조선 로동당 당 비서): 부수상 (박헌영)동지께서 장담하지 않으셨습네까? 우리 공화국 군대가 내려가면,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하고. 대대적으로 환영할 꺼라고. 헌데, 지금 어디서도 그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지 않습네까?


박헌영(조선 로동당 부수상): 수상 (김일성)동지. 욕심이 과한 것 아닙니까?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지금 이시각에도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소이다. 서울 인민들 또한 자발적으로 임시 인민위원회 내에 가입하고 있소이다.


갑자기 폭탄이 투하되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김일성(조선 로동당 수상): 미군 폭격기가 여기 평양까지 올라와 폭격을 해대고 있어. 우리가 우세한 건 이 지상전 뿐이란 말이오!!!!
드라마 서울 1945 52화에서
세계 최강의 미 공군은 북한 공군을 순식간에 궤멸시키고 거의 모든 보급수송로를 차단해버렸다. 미 공군의 폭격은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항공대는 아무런 군사적 대상물도 없는 한반도의 무방비 도시들과 산업지대들을 공습해 주택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몰살시켰다. 평양은 제일의 폭격 대상이었다. 개전 직후부터 시작된 평양 공습으로 한 달 새에 2,000호 이상의 주택이 파괴되고 인민병원과 공업대학이 파괴되었으며, 700명이 죽고 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원산을 비롯해 흥남, 남포 등 북한의 공업도시에 대한 폭격도 극심했다. 이들 도시들은 공장은 물론 가옥, 병원, 학교 등 모든 건물까지 완파되어 끔찍한 폐허가 되고 말았다. 북쪽 도시들만이 아니었다.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과 원주, 홍천, 평택 등 남한의 모든 도시들도 미 공군의 융단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9, 524-525쪽.

위의 인용문은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에서 나왔던 대사다. 드라마에서 김일성 허가이 그리고 박헌영간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미군의 폭격은 전쟁 시작단계부터 존재했다. 북한을 대상으로한 미공군의 폭격은 트루먼 행정부가 한반도에 즉각적인 군사개입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기 1일 전인 6월 27일 미 극동군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미공군의 즉각적인 북한군 공습을 주장했으며, 2일 뒤 미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이 시점부터 미공군의 폭격은 시작됐다. 서울함락 1일 뒤인 6월 29일 오후 미공군의 폭격기 대대는 평양 비행장을 폭격했다.

1950년 7월 6일 9대의 B-29 9대가 원산정유공장을 공격하였고, 다음날인 7월 7일에는 B-29 11대가 항만시설을 중심으로 폭격에 돌입했다. 1950년 7월 13일에는 전략공군 산하의 비행기들이 합류하면서 더 많은 비행기가 폭격에 합류하였다. 당시 폭격기사령부 소속 B-29 57기 중 56기가 동원되었다.[38] 목표는 원산선착장과 그 주변의 저장시설이었다. 폭격 이후 미군 부대 소속의 사진분석관들은 목표구역의 50%가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주변의 광범위한 구역도 역시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이날의 폭격으로 민간인 주택지역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고, 1,24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이후인 7월 22일 B-29 1대가 원산을 다시 폭격했고, 8월 7일에는 B-29 10대가 동일 지역을 폭격했다. 8월 9일에는 B-29 24대가 동원되어 8대는 원산정유공장을, 4대는 원산조차장을. 12대는 도로와 교량을 각각 폭격해 파괴하였다. 다음날인 8월 10일에는 B-29 46대가 동원되어 정유공장과 원산조차장을 재차 공격하였다. 북한은 이날의 폭격에 대해 31대의 미군 폭격기들이 120발의 폭탄을 투하하여 노동자 주택 67호를 파괴했다고 보도하였다.[39]

평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가 되었다는 점에서 폭격을 피할 수가 없는 도시였다. 게다가 북한의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였다. 7월 22일 B-29 6기가 출격하여 평양조차장을 폭격하였다. 북한은 이날의 폭격에 대해 70여발의 폭탄이 투하되어 일반주민의 주택 100여호가 파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다음날에도 B-29 18대가 평양조차장을 폭격하였다. 북한은 이날의 폭격에 대해 6시간의 폭격으로 평양공업대학, 서평양의 제1인민병원, 연화리교회, 박구리교회 등이 파괴되었고, 주택지구에는 162개의 폭탄이 투하되어 민간인 439명이 살상되었다고 보도했다. 7월 28일에도 B-29 7대가 평양조차장에 폭격을 감행했다. 북한은 이날의 폭격에 대해 7대의 비행기가 시내 주택지구에 500킬로 폭탄 75대를 투하하여 229호의 주민가옥이 파괴되었다고 보도했다. 8월 7일은 미군의 초기 폭격이 절정에 달한 날로 B-29 49대가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 북한은 이날의 폭격에 대해 33대의 비행기가 450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528호의 일반 주민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도했다.[40][41] 김태우 교수는 북한 지역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 초기 B-29기는 단연 북한지역에서 압도적인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B-29기의 대량폭격은 평양, 원산, 흥남, 청진 등의 군사 산업시설뿐만 아니라 인구밀집지역 상당부분을 동시에 허물어뜨렸다. 북한의 상공을 제 안방 드나들듯이 비행하는 B-29기 편대는 그 존재만으로도 북한지도부와 주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229쪽.

아무튼 1950년 7월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이남에서 조선인민군이 신속하게 진격을 게시하던 것과는 달리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B-29 폭격기들이 북한의 주요 교통 및 산업 중심지에 대량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950년 7월 20일 경 미 공군은 이미 한반도 내 북한 공군을 완벽히 제압했다고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다.[42] 전쟁 초기 현장에서 직접 전쟁피해 양상을 조사했던 조국전선 조사위원회는 1950년 8월 18일에 이르러 피해조사보고서 제1호를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로동신문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8월 5일까지의 전쟁피해를 종합한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8월 5일까지 폭격과 함포사격에 의해 1만 5,200여호의 민간인 주택이 파괴되었고, 4천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으며, 5,200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43]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던 박헌영은 8월 5일부터 시작해 줄기차게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래는 안재성 작가의 저작 『박헌영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헌영은 8월 5일부터 시작해 줄기차게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내는 성명에서 그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수많은 폭격 사례들을 나열하고, 맥아더 사령부가 매일 조선의 도시와 촌락에 수백 톤의 폭탄을 투하해놓고 짐승같이 뻔뻔스럽게도 이를 조선인에 대한 커다란 선행이라고 내세우고 있다며 분개했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9, 525쪽

1950년 8월 19일 폭격기사령부는 북한 청진시에 대한 최초의 폭격을 실행했다. 63대의 B-29 폭격기가 동원된 대규모 폭격 작전이었으며, 주택지구에 1,012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맹폭결과 2,626호의 주택이 완전파괴 또는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측 기록에 따르면 8월 19일 청진에 나타난 B-29 폭격기들은 청진시의 90%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 결과 청진시민 1,034명(그중 393명은 여성)이 즉사했으며, 2347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10일 뒤인 8월 29일에도 또 다시 23대의 B-29기가 출격하여 청진조차장을 폭격했고, 이날 폭격으로 열차공장 구역 내 선로의 90%가 절단되었다. 대형 수리건물 2채가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소형 건물 5채와 소형 수리공장 2채가 파괴되었다. 총 97대의 열차와 2대의 기관차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는데, 이들 중 70대는 이전의 폭격에 의해 파괴된 것들이었다고 한다.[44]

1950년 8월 12일 미군 항공폭격사령부는 나진을 폭격했다. 해군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류 저장시설과 철도시설을 갖춘 나진시를 괴멸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같은 날 B-29기 폭격기 5대가 동원돼 함흥조차장도 공격했다. 8월 27일과 28일에는 황해도 겸이포와 함경북도 성진(지금의 김책시)의 제철공장이 폭격당했다. 겸이포의 제철공장은 한국 최대의 강철생산공장이었다. 8월 27일 미군 폭격기 25대는 겸이포 제철공장의 40%를 파괴했다. 8월 28일 47대의 B-29기들이 성진을 폭격했다. 미군기들의 공중폭격으로 성진제철소와 주변지역이 초토화되었다. 성진제철소의 90%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해당 지역의 전면적 파괴를 의미했다. 미공군기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제철소 중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폭격 전후 제철소 인근의 모습을 통해 폭격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폭격 후 사진에는 뼈대만 앙상히 남은 중심건물과 잔해조차 볼 수 없는 주변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폭탄구멍만 보였다.[45]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황은 한미 연합군 쪽으로 기울여졌다. 한국군과 미군이 북진을 한 이후에도 맥아더 사령부는 전략폭격 정책을 고수하며 대기 상태에 놓였다. 대기 상태에 놓여있던 이유는 북한 측 후방지역이 축소되면서 B-29 폭격기들이 더 이상 전략폭격 목표를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어서 맥아더는 폭격기사령부 산하의 2개 전대를 본토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즉, 크리스마스가 되면 승리할 것이라는 맥아더의 믿음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10월 말 마오쩌둥이 한반도에 병력을 파병하면서 상황이 바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를 포함한 미 극동공군 주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급변하는 전황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미 공군 폭격작전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46]
이제부터 북한 지역의 모든 건물과 시설 마을은 군사 전술적 목표물로 간주한다. 유일한 예외는 만주 국경과 한반도 내에 위치한 수력발전소뿐이다.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 314쪽.

말 그대로 맥아더는 북한의 도시와 농촌 자체를 주요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하라고 지시한 셈이다. 맥아더는 민간인 거주 지역 내의 특정 군사시설에 대한 파괴가 아닌 민간지역 자체에 대한 파괴를 명령했다. 도시나 농촌지역 내 적 병력과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더 이상 폭격작전 수행 여부의 기준이 되지 않게 됐다. 이렇게 해서 북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이 게시됐다. 이에 따라 강계, 신의주, 삭주, 북청, 청진, 의주 등이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특히나 신의주의 경우 피해가 아주 극심했다.

북한의 최북단인 신의주 폭격은 1950년 11월 8일에 있었다. 1950년 11월 8일 유엔군 소속의 비행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폭격하여,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되었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는데, 그 중 80%인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단 하루의 폭격으로 5,000명이 참혹하게 죽었고, 3,155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17개의 초등학교 가운데 16개가 파괴되었고, 15개 중등학교 가운데 12개의 학교 역시 소이탄에 의해 불살라졌다. 17개의 교회 가운데 2개만이 남았고, 2개의 시립병원은 지붕 위의 커다란 적십자 표시에도 불구하고 소이탄에 의해 파괴됐다. 쉽게 말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것. 사실 신의주 폭격 당시 신의주 인민위원회 대표들은 100대의 비행기가 상공을 덮쳤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미공군은 B-29기 78대와 87대의 전폭기를 동원했다. 미공군이 신의주를 폭격하기 위해 동원한 항공기는 총 165대인 셈. 하루동안의 폭격으로 신의주에는 총 640톤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8만 5,000발의 소이탄이 투하되었으며, 신의주시 184만 제곱미터 중 약 110만 4,000제곱미터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1만 4,000호 가옥과 12만 6,000명의 시민이 거주하는 신의주에 11월 8일 하루 동안 건물 1채당 평균 6.07발, 사람 1명당 평균 0.67발에 달하는 소이탄이 투하된 것이다.[47]

신의주 폭격으로 병원에 있던 환자들은 침상에서 소이탄 공격을 받고 불에 타 죽었다. 그 공격은 소이탄으로 시작한 다음 폭발탄이 이어지고 다시 소이탄과 시한폭탄의 조합이 뒤따랐는데, 희생자를 최돼화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보였다. 그 결과 산채로 파묻힌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한 접근이 불가능해지면서 질식사를 피할 수 없었던 사례도 있었다. 또한, 신의주에서는 소이탄 공격 후 기총소사 공격이 뒤따랐는데, 미군기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탈출하거나 불을 끄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향해 아래로 총을 쏘는 방식이었다. 어린이들 역시 이런 식으로 표적이 됐다.[48]

맥아더 사령부의 무차별 폭격 정책이 결정됨에 따라 1950년 11월 5일 B-29 폭격기 22대가 강계를 폭격했고,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소각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1월 8일에는 B-29기 69대의 신의주 폭격이 있었고, 9일에는 B-29기 13대가 삭주, 북청 그리고 청진을 폭격했다. 다음 날인 10일에는 B-29기 33대가 청진과 의주를 폭격했다. 당시 미 공군 자체 평가에 의하면, 1950년 11월 공중폭격으로 인한 북한 지역 도시파괴 정도는 만포진 95%, 고인동 90%, 삭주 75%, 초산 85%, 신의주 60%, 강계 75%, 회천 75%, 남시 90%, 의주 20%, 회령 90%에 이르렀다. 1950년 11월 초에 있던 북 중 국경지역의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은 인민군과 중공군의 남하와 더불어 북한 지역 전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49]

1950년 11월 17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주한미대사 무초에게 공군활동 내용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불행히도 이 구역은 사막화될 것입니다.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 318쪽.

이러한 폭격에 대해 박헌영은 1950년이 끝나가던 12월에도 미군 폭격에 대한 항의를 지속했다. 1950년 12월 7일 박헌영은 유엔총회 의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미군 항공기들이 북한 지역의 7,000개소 이상의 농촌과 도시를 파괴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아래에 있는 당시 박헌영의 보고를 보자.
미국 항공기들은 조선의 도시들과 농촌들을 폭격하기 위하여 날마다 1,000회 이상이나 출격하고 있다. 미국 항공기들은 초토전술을 사용하면서 아무런 군사적 시설도 없는 도시들과 농촌들에 허다한 소이탄과 류산탄들을 투하하고 있다. 11월에 이르러 미군 항공기들은 강계·의주·진천·구성·태천·초산·북진·고산·만포·중강진·회령 및 기타 도시들을 폭격하여 폐허로 만들었다. 강계시에서는 8,000여 호 중 500여 호에 도달하지 못하는 가옥들이 남아 있을 뿐이며 신의주에는 12,000호 중 약 1,000호가 남아 있으며, 만포에는 1,500호 중 약 200호가 남아 있을 뿐이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9, 538~539쪽.
4.5.1.2. 1951년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위탁에 의하여서와 또한 전체 조선 인민의 명의로써 무장한 미제의 야수들이 조선 인민에 대하여 감행한 새로운 만행에 관하여 유엔과 전 세계 인민과 전 세계의 여론 앞에 통고하는 바이다. 금년 1월 3일 오전 10시 30분 82대의 B-29는 죽음의 짐을 평양에 내려부었다. 미합중국 군인의 옷을 입었으며 유엔의 깃발로써 자기들의 범죄적 행동을 은폐하려는 악독한 강도놈들은 주밀한 계획 밑에 평화적 평양시 주민들에 대하여 살인귀와 같이 유혈적 만행을 감행했다. 놈들은 수백 톤의 폭탄과 소이탄을 일시에 도시의 전체 지역에 투하하여 초토적 화재를 일으켰다. 미국 야만인들은 소화를 방해할 목적으로 도시의 전체 지역에 시계폭탄을 투여한 결과 폭탄은 하루 종일 폭발했으며 주민들은 거리에 나올 수 없었다. 벌써 이틀 동안이나 도시 전체가 불덩어리가 되어 연소하고 있다. 이미 하루 동안에 7,812개의 시민의 가옥이 소각되어버렸다.


미국인들은 평양시에 아무런 군사적 목표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공장, 제조소, 교량, 변전소, 행정기관, 건물, 병원, 학교 및 기타 대 건물은 이미 오래전에 미제의 육군과 공군에 의해 파괴되어 있다. 평양시에는 조선 인민군 부대들도 군 기관들도 주둔하지 않았다. 시내에서 파괴를 면한 조그마한 주택들에는 평화적 주민들, 즉 집을 잃어버린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미국 초원에서 자라난 이 야만족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조선 인민이 이미 흘린 피에 만족치 못하여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이러한 유혈적 만행을 또 다시 감행했던 것이다. 폭탄 파편에 살상되었으며 불에 타 죽었으며 연기에 질식해 절명한 평양 시민들의 희생자 수는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일일이 계산할 수 없다. 평양시 인구가 전쟁 전에 50만 명이었다면 지금에 와서는 겨우 5만여 명이 남았을 뿐이다.


월가의 지배층들이 전 세계 인민들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미국 문명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타국에 수출하려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진정한 면모는 바로 이러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약탈자로 전환한 미국 강도배들의 질서인 것이다. 전 세계 인민들은 세계 제패의 야망에 날뛰는 미제국주의자들이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오는가를 똑똑히 알고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평화적 주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는 미국 무력 간섭자들의 조선에서의 범죄적 행동에 대하여 전체 조선 인민들은 불타오르는 분노와 격분으로써 항의하는 바이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9, 539~541쪽.
위의 인용문은 1951년 미 공군이 평양을 폭격하자, 북한의 부수상 박헌영이 했던 연설이다.

1950년 12월 북한군과 중공군이 다시 평양을 재탈환하자, 맥아더 사령부는 평양에 대한 폭격을 다시 했다.[50] 그렇게 해서 1951년 1월 3일 평양을 다시 폭격하기에 이른다. 1951년 1월 3일 평양에 가한 폭격으로 당시 엄청난 불길과 건물 잔해 아래에서 산 채로 파묻혀 죽거나 질식해 죽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1950~1951년 겨울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실제 자신의 거주지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던 소이탄 폭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일순간에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한줌의 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공포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생존을 위한 피난'을 감행하기도 했다.[51]

1951년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 이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리지웨이 또한 극동공군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폭격을 지속했다. 당시 극동공군의 여러 보고서들은 1951년 6월에서 1952년 6월까지 공격작전의 핵심이 철도 및 도로교통 차단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전회담을 위한 첫 연락장교 준비회담이 있었던 1951년 7월 8일 13대의 B-29기가 순안, 순천, 풍동의 조차장에 약 92톤의 고성능폭탄을 투하했다. 7월 10일에는 7대의 B-29기가 225kg 폭탄 70톤을 신포에 투하했고, 7월 11일과 13일에는 13대의 B-29기가 황주와 흥남 조차장에 225kg GP 폭탄 110톤을 투하했다. 7월 13일 또 다른 13대의 B-29기 또한 오파리와 순천에 130톤의 고성능폭탄을 투하했다.[52]

1951년 7월 13일 리지웨이는 개성 정전회담에서 공산 측의 강경한 태도를 접한 이후 "현 교섭기간 중 한국에 와 있는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모든 공군력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라"고 명령했다. 극동공군사령관 웨일랜드는 즉시 제5공군에 긴급 전문을 발송하여, 적의 부대, 보급품, 시설 같은 목표를 향한 전폭기, 경폭기의 활동을 한층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극동공군은 일주일도 안 되어 적의 병력과 보급품 증강을 뿌리뽑고 북한정권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평양폭격계획을 수립했고, 7월 30일 전폭기 354대를 투입하여 평양을 공격했다.[53]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가 쓴 책에 따르면, 공중폭격은 전쟁과 휴전회담의 진행에 영향을 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1951년 7월과 8월에 평양 공습이 고조되자 회담이 결렬되기도 했다. 미군의 폭격이 다시 가속화 되면서, 평양시의 인구는 전쟁 전의 50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줄어 들었다. 당시 이를 묘사한 공식적인 미 해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54]
사실상, 공군의 임무란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한반도를 가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반도를 도려내면서 해상봉쇄와 함께 적의 보급선을 파괴하고 후퇴를 촉진시켜 그들을 패배시키고자 실시하였던 계속적인 폭격의 장으로 주민들을 몰아넣으려 한 것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지음, 차성수·양동준 옮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도서출판 태암, 1989, 174쪽.

북한의 『로동신문』은 1951년을 조선 인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시련의 해라고 불렀다. 북한의 통계를 보면, 전쟁은 공장 8,700개, 학교 5,000개, 병원 1,000개, 집 60만 호를 파괴했다. 모든 공장, 학교, 병원이 지하로 옮겨졌고, 농부들은 논밭이 기총소사 공격의 빈번한 표적이 되자, 낮 동안에는 종종 지하로 숨고 밤을 틈타 곡식을 돌봐야 했다. 가축들이 파괴되고 농기구들에서부터 비료에 이르는 모든 것이 부족해지면서 농업 생산량은 겨우 연명 가능한 수준으로 급감했다. 산업과 농업이 기본적으로 기능을 멈추면서 사람들은 거의 기근 상태로 내몰렸으며, 식량 공급에 한층 더 부담을 주기 위해, 미 해군 엘리트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은 북한의 물고기 잡는 그물을 파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고기잡이배들도 미군 항공기의 표적이 됐다.[55]
4.5.1.3. 1952년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 나무위키 문서 중국지역 폭격에 언급된 내용이기는 하나,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에 따르면 1952년 6월 23일 미국 항공기가 북한의 가장 중요한 4개의 댐과 발전소를 폭격한 것으로 확인된다. 폭격당한 댐들 중 하나는 압록강에 위치한 거대한 수풍댐이었고, 이 수풍댐은 북한의 전체 전력의 약 90%와 10%의 중국 북동부쪽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 공습은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단일 폭격 중 가장 커다란 규모였고 500대 이상의 미군 항공기들이 동원됐다. 이에 따라 2주 동안 북한 전지역에서 등화관제가 실시됐다.[56] 폭격 당시 F-84기 79대와 F-80기 45대가 수풍발전소에 145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수풍발전소 공격 직후 제5공군 F-51기들이 부전의 제3호와 4호 발전소를 공격했다. 제1해병비행단은 장진의 제3호와 4호 발전소를 공격했다. 해군 함재기들은 부전의 제1호와 2호 발전소와 허천 발전소를 공격했다. 이후 제5공군은 4일간의 공격에서 730회의 전폭기 출격과 238회의 요격 출격을 기록했는데, 북한 측의 반격에 의한 희생이 전혀 없었다.

1952년 당시 북한지역 폭격의 피해를 가장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아마도 7월 11일에서 7월 12일에 있던 평양 폭격이다. 이때 한국전쟁 발발 이래 최대인 1,254대의 전폭기와 폭격기가 평양폭격에 투입됐는데, 극동공군은 이 작전의 이름을 프래셔펌프 작전(Operation Pressure Pump)라고 불렀다. 단 하루동안의 폭격으로 1만여 통의 네이팜탄과 62,000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고, 하루에만 평양시민 6,000~7,000여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북한측 보도에 따르면, 첫 번째 공습으로 민간인 2,000명이 사망했고, 4,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100명 이상의 유엔군 포로들도 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당시 2일간의 폭격으로 평양시민 6,000명이 사망했다고 북한은 보고했고, 영국의 런던 타임즈에 따르면, 폭격기의 시야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인 15분간 공습 경보가 울렸다고. 이 공습에서 총 697톤의 폭탄이 투하되고 6만 2천 발의 탄약이 기총사격으로 소진됐으며, 1만 리터의 네이팜탄이 투하되었다.[57]

1952년 여름 미국은 북한의 78개 도시와 읍, 주요 군사시설을 ‘지도위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기 위한’작전을 세웠다. 이렇게 진행된 ‘프래셔펌프 작전’첫날 무려 1,254회의 폭격과 2만3천 갤런의 네이팜탄이 평양을 비롯한 인구 밀집지역에 의도적으로 퍼부어졌다. 8월 29일은 전쟁 기간 중 최대의 폭격이 이뤄졌는데 그날 하루 동안 평양은 1,403회의 폭격과 700톤의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58]

이러한 무차별적인 폭격 덕분에 평양에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세간에서는 온전한 건물이 단 세 채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평양에 있었던 김진계씨는 “평양시내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부서져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평양시민들은 오갈 데가 없이 부서진 집 속에 토굴 비슷하게 파놓고 살아가는데 마치 원시인들 같았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빈민 소굴이요 난민 소굴이었다. 식량도 동이 날 대로 나버렸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집조차도 없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하나 둘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보다 죽어 나자빠진 시체가 더 흔했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도 반쯤은 죽어 있었다”라고 증언했을 정도다. 다른 곳이라고 나을 게 없었다. 김진계씨는 “전쟁 후 원산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도 평양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평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 미군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가라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굶주린 개가 고기를 본 듯이 공격을 했다고 말했을 정도다.”[59] 아래 김진계가 수기에 쓴 내용을 보도록 하자.
1952년 초 물자를 인수하러 원산에 갔을 때였다. 차량을 은폐지에 숨기고 쉬고 있는데 멀리서 엿장수가 엿을 팔기 위해 길을 가는 것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엿을 파는구나 하고 감탄하던 차에 하늘 저편에서 미군기가 나타났다. 미군기는 곧 로켓탄을 퍼붙고 기총사격을 가했다. 비행기가 사라진 후 달려가 보니 엿목판은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가고 그는 팔과 다리가 사방으로 흩어진 채 끔찍하게 죽어 있었다.


안주 옆의 문덕군을 지날 때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다.


모내기 하려고 논에서 소를 몰며 씨래질하던 농부에게 미군기가 날아 오더니 기총사격을 가해 농부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놀란 소가 씨래를 달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미군기는 소마저 쫓아가면서 기총사격을 가해 기어코 농부와 같이 벌집을 만들어 놓았다.


아무튼 내가 전쟁이 끝난 후 북한에서 살면서 느낀 점 중에 첫번째는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북한 주민들이 대량 살상되었던 까닭에 북한 주민들은 미국이라면 치를 떨며 증오한다는 사실이었다.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 현장문학사, 1990, 184~185쪽.

1952년 8월 29일에도 평양지역 폭격이 있었는데, 폭격 작전에 참여했던 한국인 조종사 이창실은 평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군 지역을 지나자 황폐한 들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폭격당한 자리만이 보이는 적지가 눈 아래로 들어왔다. 우리는 드디어 평양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는 푸른색이고 평양 시가는 조용하며 평화스러웠다. 폭격 후 평양 시가를 뒤돌아보니 온통 불바다에 연기로 덮여 있었고, 수분 전에 그렇게도 맑았던 하늘이 검은 포연으로 모자를 쓴 것 같이 보였다. 수백대의 연합 전폭기가 일시에 폭탄을 투하하였으니 그 위력은 가히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공군본부, 『6.25전쟁 증언록』, 2002, 466~467면.
4.5.1.4. 1953년
[ 잔혹함 주의 ]
||미군은 군사시설 뿐만 아니라 민가라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굶주린 개가 고기를 본 듯이 공격했는데 나도 그런 일을 당해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1953년 2월 중순경이었다.

내가 속한 부대는 성문리 탄광 부근에 있었다. 전선에서 매일 밤 고생하다가 후방에 오니 따뜻한 온돌방에서 푹 자고 싶은 게 소원이었는데, 마침 그날따라 날씨도 추웠고 해서 핑계 삼아 민가에 찾아갔다.

이집 저집 찾아 다니다가 마침 남편이 탄광에 밤일 나가고 주인 아주머니하고 세 살짜리 여자애와 두 살짜리 남자 아이만 있는 기와집에 들어갔다.

염치불구하고 안방에 누워 여자 어린애와 함께 초저녁부터 골아 떨어져 자고 있었는데 잠결인지 꿈결인즈 우우-웅, 하고 B-29 폭격기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이런, 옆집에서 누군가 초롱불을 끄는 걸 깜박 잊고 잤는지 희미한 불빛이 창호지문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불 꺼요, 불꺼!

급히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쏴아-앙, 하늘에서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쿠궁, 폭탄이 터지면서 집 용마루가 우지끈 하고 부러졌다. 벽이 허물어졌다.

콰르릉-쾅! 쾅! 쿠궁!

정신없이 마을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 천지가 송두리채 뒤집어지는 듯 폭탄 터지는 소리로 요란했다.

언덕에 올라 살았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여자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나왔던 것이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를 달래며 내려다 본 마을은 온통 불바다였다.

미군 폭격기는 4대가 편대를 이뤄 마을 상공을 빙빙 돌면서 줄줄이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장면이 마치 큰 독수리가 엄청난 량의 물똥을 싸는 것 같았다. 말이 물똥이지 물똥치고는 무시무시한 물똥이었다. 한방울만 떨어져도 온통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저주스런 것이었다.

동산에 요행으로 살아난 몇몇 사람이 올라왔다.

폭격은 동쪽에서 아침해가 뜰 무렵까지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었다. 날이 훤히 밝고 폭격기들이 떠나간 후 마을에 내려갔다. 400여 호 되는 마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 창자가 빠져나온 시체, 형체를 알 수 없는 송장들 뿐만 아니라 소나 돼지가 고기덩어리가 되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부락민들은 피칠갑된 시체나 식구를 안고 울고 있었다. 집집마다 불이 꺼지지 않아, 아직 초가지붕과 이엉에 붙은 파란 불혀가 널름널름 지붕을 핥으며 번지고 있었다.

문득, 내가 자던 집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웠다.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고 머리가 반쯤 깨어져 순두부 같은 뇌장이 물컥 나온 채 마당에 죽어 있었다. 온몸에 힘이 쪼옥 빠진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이노무 양키새끼들, 모조리 죽여버리겠슴매!

실성해버린 어느 할아버지가 시퍼런 낫을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길모퉁이 한쪽에서는 새파란 청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마니, 오마니!하면서 어린애처럼 울음을 떠뜨리고 있었다.

알아 듣지 못할 비명소리가 휘날리고, 온 천지가 부서진 잔해 위에 인육의 핏덩어리로 널려 있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이 부락은 탄광촌으로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데 이렇게 무차별 폭격을 하다니 참으로 치가 떨리고 분노가 솟아났다. 정말로 미군 비행사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다.

이 선량한 주민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리도 처참하게 죽이느냐! 미군 비행사들아, 우리 한국인들이 개 돼지만도 못한 짐승으로 보였느냐! 이토록 비참한 상황은 북한 도처에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나는 일이었다.[60]||

1953년 1월부터 7월까지 미군 폭격기사령부는 보급품 집적소를 향한 폭탄의 투하량을 전체 폭탄 투하량의 46.4%까지 상승시켰고, 한국전쟁 전시기에 걸쳐 약 22.6%의 폭탄을 집중시켰던 도로·철도·교량에 대해서는 1953년 전체 투하량의 4.4%만을 쏟아부었다. 미국 공군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1953년 5월 13일 F-84 선더제트(Thunderjet) 59대가 덕산저수지의 높은 댐을 터뜨렸을 때, 큰물이 쏟아져 나와 철도 6마일(약 9.6킬로미터)과 교량 5개, 간선도로 2마일, 논 5제곱마일을 파괴했다고 한다. 정전협상 막바지인 1953년 5~7월 북한의 『로동신문』은 저수지폭격 보도와 함께, 한국전쟁 3년 내내 거의 보기 드문 특정한 성격의 공중폭격 피해를 반복적으로 기사화했다. 기사에 따르면, 미 공군이 의도적으로 농가의 농업경영을 방해하기 위해 농경지를 파괴했다.

1953년 6월 1일 평안남도 일대에 등장한 미 공군 폭격들이 민가와 토굴을 대규모로 파괴하여 민간인을 대거 살상했다고 북한 측 신문기사는 주장했으며, "이 폭격으로 인하여 이앙과 파종이 끝난 수정보의 논밭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1953년 7월 1일자 『로동신문』에 따르면 정전회담에서 난관에 봉착한 미국이 "평화적 주민지대와 농경지들에 대한 야수적 폭격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최근 수일간에 미제항공기들은 이앙과 파종이 끝난 논밭을 폭격하여 농작물들에 피해를 주며 작업중의 농촌 부녀자들을 무참하게 살육하는 만행을 계획적으로 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북한과 중국 협상단을 더 압박하기 위해 그리고 주민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할 목적으로 1953년에 압록강 관개용 댐을 폭격했다. 이로 인해 읍면들이 모두 침수되고 이미 영양 부족 상태인 주민들이 연명하는 데 필요했던 북한의 벼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저수지 5개가 폭격당해 농지 수천 에이커가 침수됐고, 관개용 댐은 그 나라 벼농사 75%를 가능하게 했지만 미 공군은 이 기간 시설을 공격함으로써 미곡 25만 톤을 파괴한다는 구상을 했다. 이를 시행한 다음 작성된 미군 보고서를 보면, 이 같은 주식 작물의 손실이 아시아인들에게 갖는 엄청난 의미를 서방인들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나온다. 북한이 기근으로 인한 대량 사망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소련의 식량 원조가 증가했기 때문이었지만, 당연히 미군 항공기들은 이 공급을 차단하고자 함으로써 노력의 효과를 지속적으로 훼손했다.[61]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발효되는 시점인 오후 10시까지 미공군의 폭격은 지속됐다. 미공군은 한국전쟁 마지막 7일 동안 100여대의 B-29기를 동원하여 북한 내 8곳의 비행장을 완벽히 파괴했다. 북한은 개전 4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까지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은 셈이다. 3년이 넘는 세월동안 북한은 미 공군의 폭격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북한 전역은 말 그대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달의 표면에 가까울 정도로 도시와 마을이 파괴됐다.

4.5.2. 기반시설 폭격

※ 미군의 북한 수력발전소 폭격일지 : 보기 / 접기
||<-3> [62][63] ||
날짜 장소 비고
1952.6.23-7.8 수풍댐 10만 kw 변압기 2대 파손
6만 kw 변압기 3대 파손
제6, 제7 발전
66V 조절장치 완파
220V 조절장치 70% 파손
공기개폐기 6대 완파
충전배터리 70% 파손
1952.6.23 부전 제3·4호 발전소 제5공국 F-51기 출격
1952.6.23 장진 제3·4호 발전소 제1해병비행단 출격
1952.6.23 부전 제1·2호 발전소
허천발전소
해군 함재기 출격
1952.9.12 수풍댐 B-29 31대 출격
1953.6.7 수풍댐

※ 미군의 북한 저수지 폭격일지 : 보기 / 접기
||<-3> [64][65][66] ||
날짜 장소 비고
1953.5.13 독산저수지 계곡 아래 43km 완전 침수
경의선 주요 구간 침수
홍수 발생
평양시 건물 700채 파손
1953.5.13~14 견룡저수지
1953.5.15~16 자모저수지[67] 처음에는 주민들이 복구
24대 폭격기로 재폭격
61미터 정도의 균열
제방 2,050피트 붕괴
하류 철교 3개 유실
도로와 논 대거 손실
대동강 범람
1953.5.21~22 용원저수지[68] 적지 않은 농경지 침수
1953.6.13~14, 18 귀성저수지
1953.6.14, 18 봉천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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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저수지 폭격 이후 물이 마을을 덮치는 모습[69]

4.6. 중국 국경지역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한국전쟁기 미공군은 중국이 항미원조라는 구호 아래 참전했던 시점부터, 중국 국경지대와 일부 인근 도시들에도 폭격을 가했었다.[70] 1950년 11월 8일 이미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공군은 중공군이 들어오는 압록강 철교와 그 넘어에 있는 단동과 심양같은 중국의 일부 도시들에도 일부 공습을 가했다. 1952년 6월 23일 북한의 수풍발전소를 목표로 했던 폭격에서는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중국 영토를 침범하여 공습을 하기도 했다.[71]

5. 각국의 반응

5.1. 미국

5.2. 대한민국

"한국민들이 자기 집이 파괴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나 그들은 그것을 묵묵히 참고 차라리 가옥이 파괴될지언정 적에게 나라를 뺏기어 독립된 국가에서 자유민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원치 않는다."[72]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미국 전투기가 적의 주요시설을 강타하고 대단히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 전투기가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73]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5.2.1. 폭격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

미군 폭격 진상조사 규명 결과[74]
발생일 사건명 사망확인/사망추정
1950.7.11. 이리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91명
사망추정 300명 이상
1950.7.-9. 서울·경기지역 미군 관련 희생 사건 사망 12명
사망추정 4,200명 이상
1950.7.-1951.1. 강원지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30명
사망추정 1,000명 이상
1950.7.24.-1952.9.3. 호남지역 미군 관련 희생 사건 사망 46명
사망추정 200명 이상
1950.7.29.-9.26. 경남 미군폭격 사건 사망 191명
1950.8.10.-8.22. 의령 미군폭격 사건 사망 49명
사망추정 69명 이상
1950.8.14. 경 경주 기계천 미군폭격 사건 사망 31명
사망추정 35명
1950.7.30.-1951.2.4. 경북지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95명
1950.8.16. 포항 북송리 미군폭격 사건 사망 53명
사망추정 100명 이상
1950.8.16. 포항 흥안리 미군폭격 사건 사망 18명
사망추정 100명
1950.8.23.-9.23. 포항지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67명
사망추정 100명 이상
1950.8.-9. 경남 함안지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200명
1950.8.-1951.1. 김천·단양지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20명
1950.7.-1951.1 충청지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127명
1950.9.10.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사망 10명
사망추정 100명 이상
1951.1.12.-1.19. 단양지역 미군 관련 희생 사건 사망 58명
사망추정 106명
1951.1.19. 예천 산성동 미군폭격 사건 사망 51명
1951.1.19. 예천 진평리 미군폭격 사건 사망 26명
1951.1.20. 단양 곡계굴 미군폭격 사건 사망 167명
사망추정 200명
1951.1.-2. 경기지역 미군폭격 사건 사망 47명

미군의 폭격이 낳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 많은 자료가 기밀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고, 남북한 양측에서 심도 있는 조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탓도 있다. 하지만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조금씩 이 문제가 보고되기 시작하였고,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부터 미군 폭격의 민간인 피해 또한 조사 대상으로 넣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기 위원회 활동 조사 기간 동안 접수된 미군 폭격 관련 사건은 530건[75]이었다. 하지만 이중 진실규명된 경우는 120건으로 규명률은 22.6%에 불과하다. 이는 다른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의 규명률에 비하면 가장 낮은 것이다.[76]

2021년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에서 나온 내용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나레이션: 제1기 진실화해조사위원회에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규명해달라는 신청이 모두 172건 접수됐다. 이 가운데 미군 공중폭격 관련 사건이 120건으로 70%나 됐다. 희생자 수로 보면, 전체 사건 중에 90%가 미군 폭격관련이다. 하지만 이것도 빙산의 일각이다.


안병욱[77]: 6.25때 수많은 희생자들 가운데 신청자는 예컨대 제가 당시 조사해본 결과로는 5~10% 정도로 신청했습니다. 나머지 90%는 신청이 안 돼서 조사할 기회가 없었던 거죠. 함포 사격이나 아니면 공중 폭격을 통해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전쟁이 야기하고 있는 야만적인 행태를 그 과정 속에서 희생되었던 민간인들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게 되면, 이런 부분들을 전쟁이란 측면에서 용인하게 지나가게 되면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뉴스타파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5.3.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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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철도 폭격과 이를 피하는 노무자들 지하에 건설된 공장
"계속해서 김일성은 사방에서 그에게 전화를 해서 미 공군의 폭격과 대규모 파괴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폭격에 의해 철도 분기점이 파괴되었으며 함흥지역에서는 철교가 매우 더디게 복구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일성과의 만남에서 본인은 김일성이 몹시 화가 나있으며 매우 허둥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78]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시티코프(Terenty F. Shtykov)가 보낸 1950년 7월 7일자 보고 中
"적은 그들의 복구작업에 방대한 인적자원을 계속 투입했다. (중략) 적은 주요 복구작업을 해질녘에 시작하며, 통상 6~8시간 내에 파괴된 철도수리를 마친다. 모든 복구활동이 동시에 수행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철로는 자정부터 일출 때까지 활용될 수 있다. 예컨대 적은 신안주와 평양 사이에 철도감시원을 두고 차단된 철로를 찾아, 민간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폭격 이후에 가능한 한 빨리 폭탄구멍을 메우는 작업을 실시하도록 했다. 밤이 되면 숙련된 군의 복구요원들이 재료와 장비를 지니고 철도를 수리하기 시작했다."[79]
미공군 정보보고서에 보고된 북한의 철도복구작업
폭격이 시작되자 북한은 말그대로 '뒤집어졌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조선로동당의 하급 관료들과 당일꾼들 그리고 평범한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북한인들이 공포에 떨었다. 무차별적인 폭격은 이들에게 생존이냐 죽음이냐의 공포를 직면케 하였다. 실제로 폭격 대상 지역의 당 간부들이 가장 먼저 대피한 것을 이유로 제명당하거나 징계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공장이나 학교에서는 저조한 출석률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거나 지하로 들어갔다. 토굴을 파서 그 안에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동굴 등에서 생활을 영위하기도 했다. 폭격으로 공장과 기반시설이 파괴되자 기계설비들도 지하로 들어갔다. 당조직과 군사조직도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폭격으로 의식주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되자 많은 주민들이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농사의 경우에는 밖에서 계속 지어야 했기에 농민들은 폭격의 위협을 무릅쓰고 밖에 나가 농사를 계속할 수밖엔 없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 시기 일반적인 북한 사람들이 겪은 폭격의 공포는 김일성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김일성은 1951년 1월 4일부터 정전 때까지 평안남도 강동군 시정면 곤지리(현 평양시 용성구역 명호동)의 전선사령부에서 지냈다. 이 곳에서 김일성은 두 차례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1951년 7월 29일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김일성이 앉아 있던 곳에서 불과 1m 지점에 총알이 박혔고, 그 해 8월 4일에는 사령부 뒤뜰에 500kg짜리 폭탄이 떨어졌다. 떨어진 폭탄이 불발탄이어서 김일성은 운 좋게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김일성이 전선사령부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 투하된 폭탄은 무려 149개였다.[80]

북한 당국은 폭격으로 인해 파괴된 철도나 교량을 복구하기 위한 작업에 즉시 돌입했다. 이들을 복구하지 않으면 향후의 전쟁 전개에 있어서 심각한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폭격 직후에 노무자들이 동원되어 공사 작업에 들어갔다. 공사 작업은 안전과 시간을 고려하여 주로 야간에 이뤄졌다. 때때로 주간에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폭격이 이뤄져 노무자들이 급히 피하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81] 북한 주민들은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일하는 식으로 노무활동에 임하였다. 중국도 항미원조의 기치 아래 노무자들을 공급해줘 북을 도왔다.

미군 폭격으로 인한 죽음에는 전쟁 당시 북한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이른바 국군포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국군포로로써 미군의 폭격으로 25명의 한국군 장교가 희생되는 것을 본 박진홍의 증언을 보자.
강동 제8포로수용소는 큰 강당을 비롯해 부대시설이 잘 되어있었다. 큰 강당 옥상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PW라고 크게 쓰여진 대공표지판이 붙어있었다. B-26 쌍발 야간 폭격기는 일렬횡대로 날아가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폭탄을 떨어뜨렸다.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머리 위에서 나면 위험했지만, 멀리서 볼 때는 이런 폭격방법도 있나 싶을 정도로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이 폭격 장면을 우리는 줄 폭탄 폭격이라고 불렀다. 목표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 이 줄 폭탄이 강동 제8포로수용소 장교숙소에 직격으로 떨어졌다. 25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희생자 중에는 7사단 모연대 부연대장도 있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 후로 우리는 밤에 비행기 소리가 나면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신철, 「북의 통일정책과 월·납북인의 통일운동 (1948~1961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118~119쪽.
북한 당국은 미군 폭격의 비인간성과 비도덕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북한 지역의 전쟁피해 조사를 호소하거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51년 5월 국제민주여성연맹 소속의 18개국 20명 대표와 1명의 참관인이 북한 지역을 방문하였다.[82] 또한 몇몇 외신 기자들도 북한 지역을 방문하여 폭격의 참상을 다룬 기사를 작성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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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월 폐허가 된 평양 인근 지역 죽은 어머니의 관을 부여 잡고 우는 북한 여성 (북한 원산)
"미국측 분석에 의하면 미 공군의 폭격으로 북한의 공업 및 주거시설의 2/3에서 3/4이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도 주변시설의 부족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북한 주민들은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으며 '미제의 잔인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게 파괴되고 전 인구의 약 3분의 1이 죽거나 다친 나라의 사람들이 한(恨)에 사무친 반미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것이다."[83]
미군의 폭격과 북한의 반미의식의 연관성
"한국에서 지나가는 비행기만 봐도 어린 시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어린 시절부터 미국놈들에 대한 극단적 증오로 살아온 것이죠. (중략) 반미주의는 학교 교육에서 배운 것도 있지만 내 자신의 경험에서 더 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84]
11세의 나이에 미국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70세 북한이탈주민의 증언
"그들은 미국과 미국인을 증오했습니다. 미군의 폭격과 잔혹 행위 때문입니다."[85]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미군이 참전한 이래 가장 무서운 공격은 비행기 폭격이었다.

미군 비행기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밤낮으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폭격하기 시작하면서, 인민군 점령지역에도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미군기는 밤이 되면 공중에 내내 떠있다가, 불빚이 조금이라도 흘러나오는 곳은 번개처럼 무차별 기총소사하고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흡사 들판에서 놀고있는 햇병아리 한마리를 보고 수십마리의 독수리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꼴이었다.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 현장문학사, 1990, 100쪽.
머리가 깨지고, 손이 잘리고, 턱이 날라가고, 창자가 빠져나온 목불인견의 참상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쳤다. 그때마다 나는 미국에 대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이 땅에 와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앞세워 조선인민을 죽이고 있고 개지랄을 떨고 있는지, 저 쌕쌕이를, 저 네이팜탄을 이 땅에서 영원히 몰아낼 수 없는것인지.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 현장문학사, 1990, 171쪽.
알려진 대로 당시 미군은 핵 폭격도 공언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따르면 B-29 폭격기가 1951년 9월부터 두 달간 핵무기 모의폭격을 실시했다. 북한 지도부는 떨어지는 폭탄이 핵무기인지 재래식 폭탄인지 분간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북한의 핵 개발 집착은 공중폭격으로 형성된 ‘트라우마’와도 무관치 않다.[86]
무엇보다도 가장 큰 피해자는 북한 주민들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미군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다. 몇 년 동안의 공습으로 건물들은 전부 파괴되었으며, 가족을 잃기도 하였다. 또한 공장과 기반시설 등의 파괴로 기초적인 의식주조차 영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 주민들이 미국에 대한 크나큰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87]

사실 북한이 위치한 북부 지방은 지난날의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반미와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다. 예를 들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알려질 정도로 평양은 기독교의 세가 강한 곳이었다. 이는 비단 평양만의 상황은 아닌지라 평안도 황해도를 비롯한 서북부 지방은 성공적인 선교지역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헌데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교회는 사람들을 지켜주었지만, 미군의 폭격에서 교회는 그저 눈에 잘 띄는 폭격대상이었을 뿐이었다.[88][89] 그런 식으로 3년 내내 이어진 폭격 속에서 북한 지역이 반미적 공간으로 변모하는 건 시간문제였던 것이다.[90]

게다가 이렇게 전쟁을 겪은 세대에 내재화된 반미 성향은 북한의 사회상과 교육정책 등과 맞물리면서 점차 다음 세대에로 계승되어 갔다. 북한이탈주민들에 따르면 ' 미제 승냥이'라는 단어는 심각한 욕설로 쓰이는가 하면, 미국을 비난하고 적대화하는 방식의 훈계나 놀이가 아이들한테 새겨졌다.[91]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에서 박정희를 죽이기위해 무장공비로 내려왔던 김신조 또한 북한군에 입대한 이유가 어린 시절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는 곳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다 보니까 적에 대한 불타오르는 적개심이 생겨서였다고 한다.[92] 아래의 인용문은 재미교포인 신은미가 북한에 방문했을 당시, 한 할머니와 나눈 대화다. 현재 북한 사람들이 미군 폭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피양(평양)에 아직도 예배당이 남아있나? 조국해방전쟁(6.25) 때 미국놈들이 비행기루 죄다 폭격해 버렸는데. 나는 미국놈들이라면 이가 갈려. 건물이건 집이건 죄다 폭격을 하는데 피할 데가 없어. 미국사람들은 구리스도(그리스도)를 믿어 예배당은 폭격을 안 한다 기래가지구 기리루 가는데 예배당이구 뭐구 막 폭격을 해, 가다말구 나무 밑에 들어가 겨우 살았어."

"비행기가 얼마나 낮게 떠다니는지 내는(나는) 비행사 얼굴도 봤어. 나도 기때 예배당으로 들어갔으면 죽었을 기야. 미국놈들이 피양에 들어왔을 때는 밤마다 마을에 내려와 여자들을 잡아가는 바람에 우리 오마니구 뭐구 모두 숨어다니구 기랬지. 기때 생각만 하면 티(치)가 떨려."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
즉, 한국전쟁 딩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그로 인한 파괴는 현재 북한이라는 사회와 반미 성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인 셈. 아무튼 세대를 거치며 경험으로 가지게 된 반미주의가 어느 덧 북한 주민의 일상 깊숙히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았고, 현재까지도 북한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6. 출처

7. 관련 문서



[1]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Ch. 6. THE STRATEGIC BOMBING CAMPAIGN, d. Evaluation of the Strategic Air Campaign, p.195 [2] 미국 제2차 세계 대전의 여러 전략폭격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기지에만 정밀 폭격을 집중시킬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도 도심지 폭격을 피하고 폭격 전에 삐라를 뿌리는 등 나름대로 부수적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긴 했다. [3] 한반도의 절반이 일본 본토 면적의 25%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대비 면적당 무려 16배의 폭격을 받은 셈이다. [4] 출처 Armstrong, Charles K. (20 December 2010). "The Destruction and Reconstruction of North Korea, 1950-1960" [5] Msg. TS-1814, CofS USAF to CG FEAF, 3 July 1950; 82d Cong. 1st Sess., Military Situation in the Far East, p. 1382 [6] Ltr. Stratemeyer to O'Donnell, subj: Letter of Commendation, 15 Sept. 1950 [7] 정길헌, 『미국의 6.25 전쟁사』, 북코리아, 2015, 66쪽. [8] 대표적인 사례가 소어석터널(어시굴)폭격 사건이다. [9]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통해 일본 제국 군부 무조건 항복을 압박했던 것과 비슷하다. [10] 1,254 소티를 기록했다. 배틀 오브 브리튼에서 주요 전투가 벌어졌을 때 독일 국방군 루프트바페가 1,000~1,500 소티를, 영국 왕립 공군이 700~1,000 소티를 기록했으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1] 미 공군 보고서에서는 '근접항공지원', '화물수송', '요격', '제공권', '기타' 등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12] John Holiday, 「Anti-Communism and the Korean War(1950-1953)」, 『The Socialism Register』, Ralph Miliband et al eds.(London: Merlin, 1984), p.155. [13] 이 사진에는 폭격에 희생된 김두원 가족의 어린이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14]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1권』, 인물과사상사, 2004, 154쪽. [15] 아라이 신이치, 『공습의 역사-끝나지 않는 대량학살』, 이와나미 신서, 190쪽. [16] 권영진, 「'6.25 살상' 다시 본다」, 『역사비평』 제8호(1990년 봄), 302쪽. [17] 총갹 및 포격은 2,378명, 피살 1,721명, 화재 445명 [18]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249쪽 [19] 참고 자료는 여수 남면 이야포 미군폭격사건…72주년 희생자 추모제 미군 폭격으로 250여명 희생 당한 ‘여수 이야포’의 비극 아시나요? [20]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225-228쪽. [21] 이때 함안에 소재되어있는 소어석터널도 폭격피해 받았다. [22]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23]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6) 6·25전쟁 당시 포항 미군폭격 사건…미군, 100가구 민가 무차별 폭격…1천여명 피란처엔 함포사격 [24] 리영희, 『반세기의 신화 :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 삼인, 1999, 34쪽. [25] 헝가리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파견된 기자였고, 1956년 헝가리 반소봉기때 부다페스트를 떠나 파리로 간 인물이다. [26] 출처는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27] 김성보·기광서·이신철,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14, 116쪽. [28] 정해구, 「한국전쟁과 북한 사회주의」, 『한국전쟁연구』, 태암, 1990, 245쪽. [29] 많게는 100만 명에서 150만 명까지도 추산한다. [30]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136쪽. [31]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 311쪽. [32]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17쪽. [33] 이는 마치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의 만행을 과장할 필요가 없던 것과 같은 이치다. [34] 4.27시대연구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도서출판 4.27시대, 2021, 94쪽. [35]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 311~312쪽. [36]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227쪽. [37] 아라이 신이치, 『폭격의 역사-끝나지 않는 대량 학살』, 어문학사, 2015, 215쪽. [38]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09-110쪽. 하지만 '레이더폭격'이라는 폭격방식은 그당시 무차별적인 맹목폭격(blind bombing)와 다를 바가 없었다. 레이더도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구름 등으로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폭탄을 대규모로 투하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이런 폭격방식이 도심에 적용되었을 때는 민간인 희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1950년 7월의 서울폭격과 1950년 11월 압록강 인근의 폭격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육안폭격(눈으로 직접 보고 하는 폭격)'을 명령할 정도였다. [39]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08-120쪽. [40] 북한은 또한 이날의 폭격으로 농림성, 평양남도 인민위원회, 남평양내무서, 평양남구인민위원회, 남구검찰소, 역전 리인민위원회, 동흥리 인민위원회, 철도, 우편국 등의 국가기관, 공업대학, 2개의 신문사, 평양 제10인민학교, 국립교육도서출판사, 교통성, 중앙병원, 중아 결핵진료소 등이 파괴되었다고 보도했다. [41]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20-127쪽. [42]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 304~305쪽. [43]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56-158쪽. [44]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33-136쪽. [45]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2)-미공군의 북한지역 공중폭격과 초토화 [46]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 314쪽. [47]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136~142쪽. [48]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170쪽. [49]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 316~317쪽. [50] 참고로 평양시민들은 미군이 평양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고 사전에 퇴거하면서 시내의 건물 80%를 계획적인 방화에 의해 소각했다고 주장했다. [51]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21-326쪽. [52]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48쪽. [53]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35쪽. [54] 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지음, 차성수·양동준 옮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도서출판 태암, 1989, 174쪽. [55]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178쪽. [56] 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지음, 차성수·양동준 옮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도서출판 태암, 1989, 189쪽. [57] 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지음, 차성수·양동준 옮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도서출판 태암, 1989, 190~191쪽. [58]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2)-미공군의 북한지역 공중폭격과 초토화와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67-369쪽을 참조함. [59]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2)-미공군의 북한지역 공중폭격과 초토화 [60]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 현장문학사, 1990, 182~184쪽. [61]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180~182쪽. [62] 국사편찬위원회, 제7장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군지원부대에서 소련군사고문 및 전문가들의 활동」, 『해외사료총서 제11권 :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1953』, 271쪽. # [63]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자료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64,366쪽. [64] 김성보·기광서·이신철,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14, 115쪽. [65]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35) - 정전회담과 미군의 무차별적 북폭 [66]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35-336, 374-376쪽. [67] 미국 측 문서에는 '자산저수지' 혹은 '차산저수지'로 되어 있다. [68] 미국 측 자료에는 '구원가저수지'로 되어 있다. [69] 사진에 표시된 알파벳은 다음과 같다. A는 마을, B는 열차 전철기, C는 참호 내 보급품. [70] 참고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베트남의 인접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폭격했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폭격한 셈. [7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국의 6.25 참전'과 김성보·기광서·이신철,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4 p.93을 참고함 [72] 「물론입북진격, 대통령 육개질문에 답변」, 『동아일보』, 1951.3.16. [73] 다큐멘터리,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 in Color) [7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1기 조사보고서 종합. [75] 접수건수 1건당 피해자 1명. [76] 참고로 예비검속 대구 10.1 사건은 100%,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98.9%, 부역혐의 학살은 87.5%, 군인·경찰에 의한 학살은 80.1%,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은 80.3%, 여순사건은 75%,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45.9%의 규명률을 보였다. # [77] 제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전 위원장 [78] 국사편찬위원회, 제2장 「한반도에서의 전투행동 개시 이래 조선인민군에 대한 소련의 군사원조」, 『해외사료총서 제11권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76-78쪽. [79]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44쪽. [80] 이신철 ,『북한 민족주의 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2008, 198~199쪽. [81]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43쪽. 1951년 4월 7일 평양 서북쪽 지역에서 미군이 찍은 사진에는 B-26 폭격기를 피하는 북한 주민들이 나와 있다. 미군 문서는 이 주민들을 철도수리요원(rail repair crew)라고 표현하였다. [82]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은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7일까지 북한 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벌였다. 조사단의 구성원은 출신국가도 정치성향도 다양하였다. 총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으로 구성된 이들의 국적은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 등과 같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대륙 즉 국적과 인종을 초월했다. 그리고 이 여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반파시즘 투쟁이나 반식민지 투쟁과 관계를 맺은 이들도 많았으며, 기본적으로 반식민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이 조직은 다양한 정치성향의 인사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덴마크에서 온 이다 바크만(Ida Bachmann)은 조사위원들 중 가장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여성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쟁정보국에서 일했던 미군 고위급 장교였다. 쉽게 말해 미군 장교였던 보수적인 인사가 한국전쟁 그것도 북한의 침략전쟁이라 서방세계에서 비판하는 이 전쟁에서 미군의 학살 및 범죄를 조사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의 보고서는 북한 지역에서 벌어진 폭격의 참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사단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창비, 2021)을 참고하라. [83]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2권』, 인물과사상사, 2004, 49쪽. [84] 강진웅, 「북한의 국가권력에 대한 미시적 접근: 호전적 민족주의와 주민들의 삶」, 『한국사회학』 44권 2호, 2010, 170면. [85] 푸른 눈의 평양 시민, 2006년작 [86] ‘평양 폭격’ 사진 공개 [87] 기자 에드거 스노우 충칭 대공습을 목격하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공습은 급강하 폭격기를 피하기 위해 지하실에 처박히고 들판에 얼굴을 파묻어 본 적이 없거나, 혹은 자기 아들의 떨어진 머리를 찾고 있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거나, 불에 타버린 학생들의 고약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일으킨다." 이는 한국전쟁기 북한 주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역사학자 김태우는 당대 북한의 사진과 문헌들에서 그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가 쉽게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88]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195-197쪽. 이런 상황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상당한 배신감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국제여성민주연맹 조사단원이자 영국 노동당 출신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은 '김상영'이라는 이름의 노년의 남성을 만난다. 아들과 며느리가 학살당했다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인들이 신사라고 생각했어! 미국인들은 기독교도이고, 따라서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그런 짓을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지." 펠턴이 기독교도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세번째로 물었을 때 그가 답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지.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어.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89]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203-204쪽. 물론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조사위원들은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 체험으로 기독교에 대한 신념을 상실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음을 알았다. 그들을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허나 그들조차도 기독교 국가에서 온 사람들의 폭력적 행위와 자신의 기독교적 신념 사이의 모순으로 인해 큰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조사단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한 여성의 항의가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우리가 당신네 서양인들에게 어쨌기에…… 우리를 다 파괴하려고 이 나라에 왔소? 우리가 당신들에게 무슨 해를 끼친 거요? 말해보시오! 우리가 당신들한테 뭘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 방식으로 우리 삶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달라는 것 외에 뭘 원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네들한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90]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은 한국전쟁』, 창비, 2013, 386-388쪽. [91] 강진웅, 「북한의 국가권력에 대한 미시적 접근: 호전적 민족주의와 주민들의 삶」, 『한국사회학』 44권 2호, 2010, 170-171면. [92] I Was a North Korean Spy Sent To Kill South Korea's President Bad Blood [93]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피난 행렬에게 미군 전투기가 기총소사 및 폭탄투하를 감행했다. 이에 따라 최소 3일간의 학살기간 동안 300명 많게는 600명이 학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