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 업체였던 하이텔의 이미지이다.[1] |
1. 개요
전화 인터넷 접속(Dial-up Internet access)[2]을 이용해 PC 간 통신을 하는 프로그램. 미국에서는 1973년에 BBS가 개발되었다. 전화선과 모뎀이 필요했고 개인(일반인)이 운영하는 곳은 BBS라 불렀고, 인터넷 사업자 운영하는 곳은 Online Service라고 불렀다. Online Service 생기기 전에 초창기 BBS는 아이피 주소를 알아야 접속할 수 있었기에 서로 아는 사이거나 대학 연구실 같은 곳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1979년 CompuServe가 최초로 Online Services를 상용화 했고 #, 이후 AOL, Prodigy, GEnie 등이 나왔다. 이처럼 Online Service가 나옴과 동시에 많은 사설 BBS가 생겨 인기가 많던 곳들도 있었다. PC통신 이라는 용어는 자생적으로 생긴 용어가 아니고, "PC"+"통신"이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용어이다. 용어의 주창자는 한국 최초의 기명 컴퓨터 칼럼니스트이며, 전 한글과컴퓨터의 부사장이자 드림위즈의 부사장을 지낸 박순백이다. 이 PC통신이란 단어는 1988년에 데이콤의 초청(초청자 유경희 연구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H-Mail의 사용자 모임인 엠팔(EMPAL, 후에 멀티유저 게시판 시스템인 EMPAL BBS를 만든 클럽, 초대회장 박순백)과의 미팅에 참석했던 일본 네트워킹디자인연구소장 이즈미(A. Izumi)에 의해 전파되어 일본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인으로서는 상당히 영어에 능통했던 이즈미는 이를 "pasocom tsuusin"(영역: personal computer communications)이란 단어로 일본에 도입했고, 이를 일본에서는 '파소콘 통신(パソコン通信)'으로 표기했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서 이를 네트워킹 혹은 단순히 컴퓨터 통신으로 호칭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에서도 'PC통신'이란 용어와 함께 '컴퓨터통신'이라 불렀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 2000년대 초반이 황금기였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일례로 MBC 음악방송(1995/09/29) 당시 2020년대의 방송에서 SNS나 인터넷 댓글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듯이 PC통신 네티즌들의 실시간 댓글을 화면에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삐삐밴드의 가사 중 "지금 사람들은 1995년~"이라는 부분에서(영상 1분 20초)[3] "지금TIME=>[19:18.16]", "지금TIME=>[19:18.19]" 댓글이 연속으로 올라오거나 머리에 폭탄 맞았냐는 등 필터링 없는[4] 90년대 PC통신 유저(실명제)들의 댓글들을 엿볼 수 있다.
[5]
2. 상세
사전적 의미로 따져 보자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인터넷도 PC통신이라고 할 수가 있으나, 실생활에서 'PC통신'이라는 단어는 '전화망을 이용하여 제공되는 비디오텍스, BBS 등의 서비스'를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기술적으로는 망에 연결만 됐다 하면 별다른 제약 없이 개방되어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는 어떠한 컴퓨터라도 연결 가능한 인터넷과 다르게 PC통신은 고정된 전용 망 또는 일반 유선 공중전화망(PSTN)과 모뎀을 통해 연결되며, 연결되는 반대편에서 사전에 정해진 사업자 또는 개인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폐쇄적인 형태였다. 이 시대에 'PC통신'을 사용해본 사람들에게 'PC통신'이라 하면 텍스트만 냅다 줄줄이 나오는 화면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이때 쓰던 것은 VT, 지금 쓰는 것은 1989년에 발표된 WWW이다.PC통신 자체는 일종의 PC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이라 할 수 있지만 PC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 자체[6]는 PC통신[7]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1984년 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이 그 시초로, 1985년 생활정보 DB, 1986년 화상정보 서비스였던 천리안[8], 1987년 한글전자사서함(H-mail)까지 # 여기저기 서비스되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80~90년대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여기에 대한 추억이 많다. 옛날 사람들에게 PC통신에 대해 말들을 하면 꼭 뻔한 말들을 하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 모뎀에서 다이얼업 버튼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잠시 기다리면 들리는 삐리리~ 취이익~ 하는 특유의 독특한 소리를 내는데 # 이 소리야 말로 PC통신은 물론 초기 인터넷 시대를 상징하는 것 그 자체였다. 이를 노래에 활용한 사례도 있다.[9][10]
-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면 게시판 주소로 들어가 게시물 번호를 타이핑해야 한다. 물론 검색 기능도 있었으므로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았다. 게다가 PC통신이 활성화된 1990년대 후반으로 가게 되면 대부분의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이야기나 새롬 등)이 마우스로 게시물 번호를 클릭하면 게시물로 들어갈 수 있게끔 지원되고, 각 PC통신 업체에서 아이콘 클릭 위주로 동작하는 전용 에뮬레이터들을 선보이면서 이 부분에 대한 불편함의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어차피 대부분의 PC통신 유저들은 go serial, go ani 23 같은 명령어를 더 편하게 생각하기도 했다.[11]
- 머드 게임에 중독되어 밤을 새는 사람들의 문제가 뉴스가 된 적이 많았다. 막대한 전화요금과 이용요금을 내는 것은 덤.
- 한달 전화요금이 10만 원 이상 나온다. 거기에 정보이용료까지 더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 나온다. 원조인 미국이나 동시대의 프랑스도 매한가지로 전화요금이 비싸게 나와서 화들짝 놀라거나 혼나는 일이 많았었다. # 특히 인포샵 같은 곳에서 서비스되던 사설 BBS의 정보이용료는 분당 20원 같은 나름 양심적인 요금제도 있었으나 kbyte 당 2~3원 같은 괴악한 요금을 매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곳에서 자료를 받을 경우 전화요금 폭탄 맞기 십상.[13] 모뎀 샀다고 좋아하다가 20~30만 원 폭탄이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참고로 1990년대의 20~30만원은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1달치 법정 최저임금에 해당되거나 맞먹는 금액이었다. 즉, 당대의 저임금노동자나 알바생들은 저 정도의 임금을 받고 먹고살았다는 뜻으로, 이 때문에 멋 모르고 PC통신하던 학생들은 부모님에게 죽을 정도로 맞는 경우가 속출했다. 특히나 머드에 중독되어 잉여인간이 된 어떤 이는 총 이용 요금이 100만 원 넘게 찍히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당시에는 월 100만원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직장인들의 1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으니 호적 파여도 할말이 없었을 정도다. 물론 당시 한국통신은 전화요금을 왕창 받아먹으면서 상당한 이익을 챙겼고, 하이텔로도 부가수입을 챙겨갔기 때문에 당대 PC통신을 하는 네티즌들로부터 욕을 왕창 먹었다.
- 물론 하이텔 매출액 자체는 1990년대 중후반 기준으로 매년 수백억 수준이라 2020년대 네이버나 카카오가 벌어들이는 매출액에 비하면 참 적지만 네이버와 카카오가 얻는 수입은 광고료 등이 주 기반인데 반해 하이텔의 수입은 이용자로부터 걷어들이는 수입이 대부분인지라 욕을 먹기에 충분한 수치였다. 보통 저 '전화요금 10만 원 나왔다' 에피소드는 대개 PC통신 초보들이 첫달에 전화요금 무서운 줄 모르고 실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대부분의 대학생이나 중학생/고등학생들은 자기 주머니 사정에 맞게 아껴가며 적응했고, 머드 게임 폐인들은 아예 집에 ISDN을 설치해버렸다. 물론 ISDN 요금이 흉악하긴 했으나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었거니와 확실한 건 전화선보다 빠르면서도 10만원 20만원 전화비보단 훨씬 쌌기 때문이다. 물론 ISDN 설치가 가능한 곳은 전화국[14]에 광통신이 들어와 있는 지역 한정이라, 일부 지역은 광역시급인데도 ISDN을 못 쓰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지역은 군 산하 면 단위 깡촌임에도 통신망을 집에 깔았다는 후문이 있다.[15]
- 참고로 이 이야기는 아주 초고대 시절부터 PC통신을 이용해 온 일부 유저들에게는 후반기 에피소드 취급을 당한다. 원래 케텔이나 PC-serve 시절 전화요금은 종량제가 아니라 1도수(통화 1건)당 요금이 부과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즉, 하루종일 PC통신에 접속해도 전화료 30원. 게다가 그 시기는 PC통신 초창기여서 전문 DB가 아닌 채팅이나 동호회 등(즉, 이후 PC통신의 주류 서비스인)은 사용료 무료라서 당시 PC통신의 사용료는 공짜나 다름 없었는데 이게 1990년 1월 1일부터 분당 몇십 원으로 청구되는 종량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걸 기억하는 유저라면 거의 한국 네티즌의 선사시대 유물 확정이다.[16]
198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온 PC통신의 시기를 흔히 '낭만기'라고 부르며 이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이 시기에 대한 향수 같은게 으레 남아있기 마련이다. 80년대 사설BBS 엠팔을 다룬 당시 취재프로그램[17]
하이텔 단말기
여담으로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통신(현 KT)에서 PC통신의 인기가 높아지자 01410 접속만 가능한, 즉 채팅이나 정보 검색만 가능하고 파일 다운로드 따위는 안 되는, 브라운관에 키보드만 달랑 달려있는 단말기를 무상으로 대여해주기도 했다. 내장되었던 모뎀의 속도는 2400bps. 그런데 막상 한국통신에서는 사람들에게 대여해 준 후 회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이후에도 이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존재한다. 옥션 같은 곳에서 골동품 전문 업자들이 판매하기도 한다.
하이텔 단말기는 전화국에서 대여해주었고, 1990년대 초에는 전자전시회 한 켠에 요즘 PC방처럼 부스를 차려놓고 사람들이 PC통신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컴퓨터 보급율이 올라가면서 기능면에서 떨어지는 터미널은 인기가 없어졌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장부상 감가상각이 끝났는지 무료로 가져갈 수 있도록 조치한 전화국도 있었다. (자진반납 하라고만 통지하고 굳이 회수 안 해 간 이유도 그 때문인 듯.) 이 기계가 시리얼 터미널이라서 리눅스머신에 연결하면 그대로 한글 되는 텍스트 터미널이 되었다. 당시까지는 리눅스 시작 화면은 텍스트 화면이었고 X는 따로 띄우던 때라 다중사용하는 용도로 쓴다는 무용담도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리고 접속하는 대상이 다이얼업 모뎀 방식에 터미널 환경을 지원한다면 아직도 사용할 수 있다. 2017년까지는 01410 등의 번호로도 접속 가능했지만 2017년 8월 31일에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기본적인 텍스트 에디터를 내장하고 있어서 오프라인에서 미리 글을 써놓고 온라인에 한번에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 당시 통화 시분제 때문에 필요했던 기능인데 긴 글을 쓸 때 모뎀이 연결 상태라면 계속 요금이 올라가기 때문. 물론 도중에 연결이 끊어지면 쓰던 글이 다 날라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vi처럼 익숙해지면 상당히 편리한 기능인데 텍스트 베이스 에디터 특성 상 진입 장벽이 좀 높은 편이었던 게 단점이며 그리고 역시 임대였지만 전용 프린터도 제공했다. 내장 RS-232C 포트에 꽂아 쓰는 잉크젯 방식 흑백 프린터인데, 잉크 카트리지가 용량이 너무 적은데다 비싸고 인쇄 속도 느리고 프린트 품질이 안 좋아서 잉크가 떨어지면 안 쓰거나 반납해 버린 사용자가 다수다.
이 하이텔 단말기로 디시인사이드 컴본갤에 접속한 사람의 글이 힛갤에 가기도 하였다. 원리는 위의 리눅스 텍스트 터미널과 동일하다. 리눅스를 설치한 라즈베리 파이와 시리얼 연결해서 접속을 한 것이다.
좀 큰 도시는 전화국 내에 지금의 PC방처럼 PC통신실을 설치해서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곳도 있었다. 이용요금은 무료였지만 1인당 1~2시간 정도로 시간제한이 있었고, 당연히 정보이용료가 나올 만한 서비스는 접속 불가. 엄밀히 말하면 전화선이 아니라 인터넷 전용선이었기 때문에 이 단락에서 말하는 PC통신과는 다르지만, 당시에는 WWW 사용법을 아는 사람들도 극소수였기 때문에 결국 VT통신으로 채팅이나 무료 머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3. 요소 기술
4. PC통신 환경
4.1. 요금
PC통신 태동기였던 1987~1989년까지만 해도 전화요금이 도수제로[18], 시내통화는 한 통화에 25원이었다.[19] 한 번 걸면 통화시간에 관계없이 전화 끊길 때까지 무조건 25원이었기 때문에, 이 때만 해도 전화요금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시분제(시간단위 종량제)로 바뀐 것은 1990년으로, 3분당 25원의 요금을 매기게 되었다. 이 때부터 전화요금 10만 원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이 시절을 살아온 세대들은 인터넷 종량제를 가장 격렬히 반대한다.[20]당시에는 컴퓨터가 부유층의 상징이었던 1980년대 초중반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컴퓨터는 가격대가 당시 웬만한 직장인의 몇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상당히 고가의 가전제품이었고[21], 급속한 성능향상이 이루어졌던지라 몇년 못가 고물이나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22] 거기에다가 당대 직장인들의 봉급수준을 감안하면 1달 전화요금과 PC통신 이용료 몇만 원은 결코 싼 값이 아니었고, 아무리 적게 쓰려고 노력을 해도 보통 3만 원은 나왔는데, 이것도 당대 소득과 물가수준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1993년 이전에는 최저시급이 1,000원도 채 되지 않았고, 야간정액제가 도입되기 직전인 1996년도의 최저시급이 1,400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싼 요금인지 알 수 있다.[23][24]
거기에 더해서 한국통신(현 KT)은 "전화요금 현실화"라는 명목으로 요금을 허구헌날 올려댔다. 3분당 25원이었던 요금은 1993년에 30원, 1994년에 40원, 1997년에 45원, 1999년에 50원을 찍었다. 9년 동안 무려 200%가 오른 것. 더군다나 PC통신 접속에 실패하더라도[25] 전화요금을 그대로 물어야 되었으니, 말 그대로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이러다 보니 같은 시간에 말 한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들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축약형 통신어체(ex: 걍, 방가방가 등)가 발달했다. 지금의 통신체의 밑바탕이 되는 어휘들은 이 때 거의 다 생겨났다. 오늘날엔 초딩으로 주로 쓰이는 ~딩 형식의 조어도 여기서 만들어졌다. 고등학생 유저를 고등어라 부르던 게 시작형으로 그 후 고딩으로 변형, 정착된다. 요샌 ~딩이 비속어 내지는 멸칭에 가깝게 쓰이지만, 원래는 애칭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래서 읽고 싶은 글을 보면, 읽기보다 갈무리를 먼저 하고, 나중에 PC통신을 종료한 다음 갈무리한 것을 불러내서 천천히 읽던 게 당시의 풍경.[26]
원래는 지역별로 전화번호라는 게 있어서, 접속 에뮬레이터[27]에 전화번호를 입력해서 접속하는 방식으로, 각 동네별로 접속 전화번호가 다 달랐다. 설상가상으로 접속 전화번호가 없는 지역의 경우에는 다른 지역의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데, 그러면 당연히 시외전화로 분류돼서 몇십만 원 수준의 전화요금을 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28] 그나마 1990년대 초반부터는 01410 등과 같은 전용 번호를 입력하면 될 정도로 많이 편해지기도 했다. 이 전용번호는 전화요금 30% 할인도 적용되었다.
한편 지나치게 비싼 가격 탓에 전용 번호에 한해서 정액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1997년 4월 1일에 시작된 야간정액제는 014XY로 접속되는 전용망의 경우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적용되며 한국통신기준으로 월 2만 원,[29] 하나로통신은 1만 7천원으로 보통 월정액 2만원 안팎. 지금으로 따지면 무려 LTE 무제한 요금보다 비싸다.
그리고 PC통신과 일반전화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아예 PC통신 전용으로 전화선을 따로 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수능 등이 끝난 수험생들에게 보증금을 받지 않고 싼 값에 전화를 놔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이것을 이용해서 전화선을 집에 하나 더 설치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참고로 전화에 보증금이 왜 붙었나 하면, 1980년대 이전에는 전화기를 가지는 집안은 부유층으로 쳐줄 정도로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전화 놓을 때 전화요금을 못 낼 경우를 대비해서 받아 두는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세집 빌릴 때의 보증금과 같은 개념으로, 해지시에는 돌려준다. 2001년 4월 15일에 전화 가입방법이 변경됨에 따라 폐지되었고, 기존 가입자들에게는 보증금을 돌려주고 있다. 단,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굳이 찾을 필요는 없는데, 이런 설비비부담형 전화는 요즘 사용하는 집전화에 비해 기본료가 2,000원 정도 저렴하다. 연간 24,000원 정도 차이라는 소린데, 보증금은 보통 17~20만 원 정도. 저 돈 찾아서 어디 은행에 넣어도 저만큼 이자가 안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자로 따지면 연 10%는 가볍게 넘는 상당힌 고금리이다.
도수형 요금제도 있었지만 위의 야간/할인시간정액제의 임팩트가 커서 잘 알려지진 않았다.
4.2. 회선 환경과 속도
지금이야 전용선이나 100 Mbps급을 넘어서 기가인터넷이니 뭐니 하지만, 예전에는 전용선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모조리 전화선을 통해서 통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전화선을 이용한 만큼, PC통신 도중에는 전화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방에서 모뎀으로 접속하던 중에 누군가가 전화기를 들면 전화기에서는 "치이이이익~~~"하는 굉음이 쏟아지고, 동시에 PC 측에서는 접속이 끊기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무언가 다운로드라도 받던 중이었다면 이어받기 정도는 되지만 순간은 경악하기 마련이다.한 개의 회선으로는 전화와 PC통신(인터넷)을 동시에 할 수가 없었다. 1993년에 전화와 인터넷이 동시에 가능하면서 당대 기준으로는 꿈의 속도를 자랑한 ISDN이 출시되었고 이후 CO-LAN이나 TT[뜻]선같은 서비스를 통해 전화와 PC통신을 1회선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당시 ISDN용 장비가 고가인 데다가 이용료도 매우 비쌌고, (저화질) 동영상을 볼 정도의 속도를 즐기려면 2회선을 써야 하는데 요금도 두 배로 내야했다. 그러니 잘 사는 사람들이나 전문가용, 사무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면 좀체 이용하기가 힘들었고, 나머지는 가격은 정액제였지만 서비스가 지역에 따라 제한되는 등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는 머나먼 당신이었다.
PC통신 속도는 1980년대에는 1200 bps와 2400 bps가 주류였고[31], 1990년대 초 9600 bps를 거쳐 1990년대 중반 14.4 kbps, 28.8 kbps, 33.6 kbps를 차례로 거쳐,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에는 56 kbps까지 향상됐다. 하지만 저 속도는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속도였고, 실제 속도는 회선 상황에 따라 대략 30~40 kbps 정도밖에 안 나왔다. 이런 속도가 감이 안 잡힌다면 2400 bps는 1초에 2400비트를 전송받는 속도니까, 초당 약 240바이트.[32] 1 MB 전송받는 데 얼추 58분 정도가 걸렸고, 나무위키의 본 문서(PC통신) 자체의 크기도 13 kB 정도이므로 이 문서의 텍스트만 받는 데 43초 정도가 걸린다(...). 이게 어떤 속도냐면, 2400 bps 이하로 접속했을 때에는 텍스트 나오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느리며 9600 bps 정도는 돼야 속도가 맞는다. 당연히 2400 bps 시절에는 자료실은 거의 있으나마나 했고(그나마 자료 자체도 거의 없었다) 게시판이나 채팅 정도가 주 용도였다. 그래서, 백그라운드로 다운로드받으면서 게시판 글을 읽는다든가, 사진과 음악파일을 받으면서 재생하는 기능이 유행했다.
1990년대 후반에 56 kbps 시절까지 오게 되면 그래도 이미지 정도는 1분 이하(!)면 다운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33], 동영상은 여전히 시궁창이라 겨우 애니 한 편 찾아서 받으려면 저화질이어도 반나절은 넘겼다.[34] 방송사에서 VOD 서비스를 시작할 때가 1990년대 후반을 전후한 시기인데, 당시 PC통신 속도를 감안하여 28k, 56k급의 초 저화질 영상도 같이 서비스는 하고 있어서 저화질 영상도 일단 볼 수는 있었다만 당연히 화질이 엄청나게 낮았고[35], 300k 이상의 고화질 영상을 보려면 버퍼링이 말 그대로 매우 심각했다.[36]
재미있는 것은, 그 시절의 음성/동영상 클립을 가져다 현대의 코덱으로 비슷한 화질로 재인코딩해 보면 용량이 상당히 줄어든다. 코덱의 압축 기술이 그 동안 크게 발전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고압축 코덱은 필연적으로 높은 계산량을 요구하므로 용량은 줄어든다고 해도 그 당시 컴퓨터로 가져간다면 사용은 어렵다.
4.3. 사용 방법
먼저 준비를 갖춰야 한다. 컴퓨터 혹은 하이텔 단말기를 같은 것을 준비한 다음, 컴퓨터는 모뎀을 사다가 달고 전화기를 달듯이 전화선을 모뎀이나 단말기에 연결한다.컴퓨터에서는 이야기 같은 PC통신용 터미널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명령어와 전화번호를 치면 자신이 가입해 있는 PC통신 서비스 회사를 찾아서 통신 터미널 프로그램으로 다이얼을 건다. 이 때 모뎀에 달린 스피커에서 기괴한(…) 소리[37]가 난다.
접속이 된 다음은 ID와 패스워드를 입력하여 해당 서비스에 로그인을 한다.
접속되면 VT에서는 텍스트로서 기본 매뉴를 전달해주는데 각 메뉴별로 앞에 번호가 써있다. 하지만 PC통신에는 다양한 서비스와 게시판이 존재하고, 번호를 일일이 쳐서 들어가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므로 불편하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일일이 클릭해서 들어가는 것보다 좀 더 번거롭다고 보면 된다.
이를 위해서 있는 것이 go 명령어이다. go는 지정된 키워드로 서비스를 곧바로 찾아가는 명령어로서, 예를 들어서, go humor라고 치면 유머 게시판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서비스 별로 매우 다양한 명령어들이 있으며, 이는 서비스 제공사마다 달랐다.
그런데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 에듀넷은 대부분 명령어가 비슷했다. 이는 원래부터 하이텔의 014XY망이 국가 양대기간망 중 하나였기 때문인데, 01410 번호로 접속하면 하이텔로 바로 접속되는 게 아니라 일단 메인 서비스 화면이 뜬 후 별도의 서비스인 하이텔로 접속하여야 했기 때문. 당연히 나우누리, 에듀넷, 유니텔은 하이텔 접속화면에서 접속할 수 있었다.
반면 천리안은 그런 거 없이 바로 01420이라는 전용번호로 접속했는데 이는 천리안의 전신이 KT(당시 한국통신) 기반이 아닌 '한국데이터통신'이라는 별도 기관망이었기 때문. 그래서 명령어체계가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자유게시판
운영체제가 유닉스나 리눅스 같이 유닉스 계열 OS일 경우에는 PC통신용 프로그램이 필요가 없었다. 그냥 CUI 창에서 telnet 명령어[39]와 IP/도메인을 쳐서 들어가면 그대로 PC통신 화면이 떴다. 이것은 PC 통신 화면이 바로 유닉스의 CUI 환경인 "터미널(Terminal)"이기 때문이다. PC통신 화면을 지칭하는 VT가 가상 터미널(Virtual Terminal)의 약자다. DOS나 윈도우는 이 유닉스 CUI 환경과 호환이 안 되었기에 PC통신 프로그램에서 이걸 흉내내서 접속하는 방법을 쓴다. PC통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이름이 터미널 에뮬레이터(Terminal Emulator)인 이유도 이것.
5. 현황
1994년에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었지만 인터넷 속도가 PC통신과 마찬가지로 느려터지고 전화요금을 왕창 받아먹었던 건 같았던 데다가 PC통신 쪽이 월등히 자료가 많았고, 이때 인터넷 사용을 하는 데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한동안 PC통신과 인터넷을 같이 하는 것이 대세였고 인터넷을 한다 하더라도 PC통신을 시작페이지로 설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넷츠고나 채널아이처럼 웹 기반으로 서비스하는 PC통신을 서비스하는 업체가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하지만 1999년 3월 말 ADSL 기반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고 7개월 후인 10월 말에 국민PC가 국가 주도 하에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초고속 인터넷과 PC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따로 요금을 내지 않고도 가입할 수 있는 다음과 야후 코리아, 라이코스 코리아 등 무료 포털 사이트[40]들이 흥하기 시작하자 PC통신은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유료서비스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아서 처절하게 밀려버렸다.[41] 그리하여 각 가정마다 초고속 인터넷에게 처참히 발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전멸했다.[42] 대부분의 PC통신 사업자들이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긴 있으나 유니텔과 천리안은 기능이 한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파란(하이텔)과 나우누리는 아예 망했다.
1999년 초고속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PC통신은 빠르게 쇠퇴했지만, 바로 소멸한 것은 아니었고 PC통신의 쇠락으로 인해 PC통신의 태동에 힘입어 고속성장을 했던 관련 기술주들이 일제히 침몰한 닷컴 버블 시기인 2000~2002년 사이에도 나름 인터넷과 공존을 이루면서 버텼다. 물론 대중적인 전성기는 1990년대 후반이 끝이었지만, 방송가에서는 여전히 PC통신을 홍보수단으로 안내하였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나우누리 내 유머/정치 게시판 등이 나름 활발하게 움직였다.
PC통신이 완전히 몰락하게 된 건 닷컴 버블의 붕괴가 끝난 직후인 2003년으로, 하이텔이 기존의 VT 기반 서비스와 완전 단절된 포털 사이트로 거듭나겠다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미 초고속 인터넷으로 이용층이 옮겨간 상황에서 PC통신과 포털을 병행하던 업체들도 더 이상 VT 서비스에서 이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이텔의 개편 선언 이후 나우누리와 천리안도 PC통신 서비스가 아닌 포털 서비스로 사업영역을 넓혔고, 넷츠고는 라이코스 코리아와 합병하여 네이트로 들어갔다. 같은 해 하반기부터 싸이월드 등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포털의 영향력이 커지며 PC통신은 완전한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이용자가 거의 남지 않게 되었고, 2004년 천리안을 시작으로 2007년 하이텔, 2013년 1월 나우누리까지 모두 PC통신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2017년 8월 31일에는 014XY 번호의 서비스도 종료되었다.
2022년 6월에는 유니텔의 서비스가 종료되었으며, 2024년 10월에는 천리안마저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PC통신이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금도 일부 사이트 기사는 그때의 향수를 잊지 못해 디자인을 PC통신 특유의 진한 파란색 바탕에 고정폭 폰트의 하얀색 글자로 해 놓기도 하고 있다. 정확히는 PC통신용 에뮬레이터, 지금으로 치자면 Internet Explorer나 파이어폭스에 해당하는 '이야기'나 '새롬 데이터맨' 같은 프로그램의 기본 설정값이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였다. 물론 설정에서 바꿀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이 이 기본값을 고수했다. 그리고 하이텔의 직계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은 2009년 만우절 이벤트로 파란 화면을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채우기도 했었다. 알지롱 역시 파란 화면에 하얀 글씨를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다.
현재 추억삼아 HoneyJar BBS같은 사설 BBS도 운영되고 있다. 방문자수가 시망이지만 운영자가 답글을 달아주는 등 한번쯤 들어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또한 PC통신이 활발했을 당시 출시된 이야기와 같은 에뮬레이터들은 시각 장애인용 텔넷으로 용도가 변했다고 한다.
2012년 4월 1일 만우절 당시 엔하위키 미러가 PC통신 VT 시절 화면을 재현한 ' 1995년 버전'을 개발했고, 2024년 4월 1일 만우절에 나무위키의 대문 화면에서 PC통신 특유의 VT 화면을 재현했다. 나름 고증(?)을 하여 여러 메뉴를 만들어 놨기에 정말 저 메뉴로 들어가면 1990년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듯하게 구성해 놨다. 이렇게 해서 1990년대 사람들과 소통을 하게 된다면 신기한 일일텐데,[43] 실제로 낡은 아마추어 무선을 통해 1979년을 사는 여자와 2000년을 사는 남자가 교신한다는 판타지 멜로 스토리의 히트한 한국 영화가 바로 PC통신 시절에 만들어진 ' 동감'이다.
6. 인터넷에 남긴 유산
이렇게 PC통신 업체들은 포털사이트에 밀리며 사라졌지만, 각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PC통신에 기사를 제공하면서 인터넷 신문의 기본적인 형태를 선보였고, 온라인 게임, 인터넷 소설, 인터넷 커뮤니티 등이 PC통신을 통해서 태동되었다. 컴퓨터를 통한 전자상거래나 쌍방향 통신, 온라인 강의, 정보제공, 관광서 업무 처리등이 PC통신을 통해 먼저 이루어졌으며 기존 지하에서 운동하는 방식과는 다르면서도 신문과 방송, 잡지 등 주류매체가 이야기하는 방향과 다른 방식의 사회운동 역시 PC통신을 통해 선보였다는 점에서 있어서 비록 속도와 비용문제. 폐쇄적인 환경으로 한계는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당연시되는 것들을 몇 발 앞서서 체험할 수 있었고, 또한 PC통신 사용자들이 그대로 인터넷을 쓰면서 인터넷 시대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유산은 크다. 물론 불법복제가 성행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안 좋은 면을 몇 발 앞서서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도 비슷하기는 했다.우선 유명인 가운데서 PC통신을 통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거나, 커뮤니티 사이트들이나 단체들도 PC통신을 통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이우혁은 퇴마록[44]을, 이영도는 드래곤 라자를, 전민희는 세월의 돌, 김경진은 데프콘을 하이텔에서 연재하면서 판타지 소설을 시작했으며, 커그도 나우누리 SF게시판에 활동하던 판타지 작가들이 연합하여 만든 커뮤니티이다. 소프트맥스는 PC통신 동호회에서 출발했고, 대한민국 힙합의 태동은 귀국파 + PC통신파였다. 사실 귀국파들도 영어 랩에는 능통하지만 한국 가사를 만드는 데는 좀 부족해서 라이벌이기도 하며 또 주요 고객층이기도 한 PC통신에 무지하게 신경 썼다는 걸 생각하면 영향이 크다. 국내 인디/모던락의 성장을 이끌던 것도 PC통신이었다. 2017년까지 활동했던 언니네 이발관은 하이텔의 모던록 소모임이었던 "모소모" 회원이었던 이석원이 당시 지인들과 만든 밴드였고, 로다운30을 이끄는 윤병주는 모소모의 시샵이었다. 무엇보다 국내 인디의 전설이 아닌 레전드 델리스파이스는 모소모에서 회원들이 결성한 밴드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한지? 이 나이대의 인디 1세대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 PC통신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사람들은 매우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초창기 게임 멀티플레이 역시 PC통신 게임동호회[45]를 통해 시작되었고 바람의 나라나 스타크래프트까지 이어져 프로게이머와 e스포츠의 효시가 되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도 나우누리 유머게시판에서 '견우74'란 아이디의 유저가 연재하던 것이다.[46]
인터넷에서 요즘도 흔하게 쓰는 은어, 줄임말도 상당수 PC통신에서 온 것들이 많다. 고등학생을 부르는 은어인 고딩은 원래 PC통신에서 '고등어'라고 부르다 고딩으로 줄어들어 인터넷으로 넘어왔고 훗날 초딩으로 파생되었다.[47] 그밖에 동호회 정기 모임을 뜻하는 정모 라던가 소규모 인원들이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고 만나는 번개 또한 PC통신이 시초. 공동구매 문화도 컴퓨터 관련 PC통신 동호회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하드웨어 관련 커뮤니티에서 업체 제휴로 하는 공동구매나 리뷰 이벤트와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때도 대한축구협회 욕하고, 축구 게시판에 뜬금없는 종범드립, 축구 져서 헤엄쳐서 오라는 것이나, 야짤 달리는 글은 게시물 중에서 조회수가 가장 높다. 이러한 점은 예나 지금과 똑같다.
명탐정 코난은 한국에서 잡지로 1996년부터 연재되었는데, 1995년 PC통신 게시판에 한 이용자가 만화 소감을 남겼다. # 아마 일본 여행을 가서 읽고 온듯하다.
디시인사이드 창립자 김유식은 1995년 당시 PC통신에서 '동경 유학생 정보센터' 라는 포럼(?)을 운영하고 있었다. 말이 포럼이지 그냥 일본 물건 사다가 국내에 되파는 보따리 장사(...)였던 곳. 당시는 일본문화가 개방되어 있지 않았지만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 일본 만화나 시티팝이나 아이돌 등 J-POP 수요도 PC통신을 이용하던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 위주로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만화책이나 음반을 사다가 PC통신을 통해 판매했다. (물론 세금을 안 냈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이를테면 이들을 노린 해외직구 사업체의 원조격. #
카페, 디시인사이드 같은 사이트의 게시판의 형태도 PC통신의 유산이다. 맨 위의 스크린샷을 보면 알겠지만 PC통신 게시판의 번호, 제목, 아이디/이름, 조회수, 추천수 등이 나오는 형태는 순서만 다를 뿐 현재 국내에서 쓰이고 있는 인터넷 게시판의 형태와 똑같다. 이것은 PC통신 대중화 시절에 수많은 인터넷 게시판 프로그램이 나왔고, 이들 프로그램이 거의 대부분 PC통신의 게시판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2020년대인 현재도 인터넷 게시판이 이와 같이 발전하여 자리잡은 곳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고, 이것은 외국에서 개발된 포럼형 게시판이 국내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당시 PC통신에 설립됐던 동호회들은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의 모태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 전화접속 서비스를 시도한 외국 BBS도 있었지만 전부 묻혔다.
이미지 파일 포맷인 GIF도 PC통신의 산물이다. 미국의 PC통신 서비스인 컴퓨서브에서 자사의 이미지 서비스를 위해 개발한 포맷이기 때문이다. 통신망에 최적화된 포맷[48]이기 때문에 인터넷 시대에서도 JPG, PNG와 더불어 널리 쓰이는 이미지 포맷이 되었다. 2020년 현재는 당시 인터넷 환경, 컴퓨터 사양 문제로 인해 존재했던 256색 제한과 낮은 압축률이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체 표준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GIF를 대체하기 위해 나온 포맷들이 하나같이 GIF보다 먼저 망했거나, 개발 측에서 표준 승인을 거부하거나, 호환성이 시궁창인 등 이래저래 나사가 빠져있어서 아직도 이렇다 할 차세대 표준이 자리잡지 못했다.
인터넷에서의 강제 줄 바꿈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 중 회신생활을 오래 한 경우, PC통신 시절부터 해온 사람일 가능성도 있는데, 글자 깨짐 문제의 임시 해결책으로 쓰던 습관이 지금으로 남아있어서 그렇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7. 서비스 목록
- 하이텔 - 전신은 한국경제신문사 케텔(KETEL) 및 한국통신 하이텔이었다. 1991년 ' 한국PC통신' 설립 후 1992년 통합되었고, 2004년 한미르와 합쳐져 파란으로 넘어갔다가 2012년 6월 폐쇄.
- 천리안 - 데이콤 PC-Serve가 전신인 서비스. 2002년부터 사업부가 신규법인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현 미디어로그)에 이관됨. 2024년 10월 31일 서비스 종료.
- 나우누리 - 나우콤 운영. 2013년 1월 31일 서비스 종료.
- 유니텔 - 삼성SDS에서 운영. 2000년 유니텔(주), 2001년 UDS(유니텔네트웍스)를 거쳐 2007년 다우기술에 합쳐져 포탈 사이트로 변경. 그리고 플래티넘 회원만 전용 클라이언트 서비스를 여전히 지원하였다.[49] 2022년 6월 30일 서비스 종료.
- 넷츠고 - SK텔레콤에서 운영. 2000년 독립법인으로 분사됐다가 네이트로 흡수됨.
- 신비로 - 전신은 현대전자 시절 동사에서 근무하던 김택진 씨가 1995년에 만든 국내최초 인터넷 기반 PC통신 서비스인 '아미넷'이었다. 이후 1996년에 현대정보기술로 이관되면서 '신비로'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 모기업인 현대그룹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온세통신으로 서비스가 넘어갔다.
- 엘림네트 - ISP서비스도 윈도우95가 판매되던 1996년경에 제공하였는데, 국내에서 사운드 블라스터 사운드카드를 유통하는 제이씨현 시스템과 연계하여 엘림네트 인터넷 ISP 접속 프로그램을 중소 조립 컴퓨터 초기 설치시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 트윈텔 - LG미디어에서 운영, 1996년 6월 일반인 대상 무료 시범서비스를 시작하였으나 동년 12월에 사업성 없음으로 사업포기를 선언 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달인 1997년 1월에 LG전자와 LG소프트(구 LG미디어)가 다시 사업포기를 철회하고 다시 지원하기로 하였지만 1년 넘게 서버가 열려만 있을뿐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일부 머드게임을 제외하고는 사용자가 적어 슬그머니 잊혀졌다.[50]
- 채널아이 - LG인터넷 운영. 2000년 데이콤의 신규 자회사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데이콤MI)으로 넘어갔다가 2001년 천리안과 합병됐다.
- 에듀넷 - 당시 에듀넷에서도 PC통신망을 구축하였으나, 21세기 초에 사라졌다. 교육용을 표방하며 저속 인터넷 전화접속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저속 인터넷이어서 인기가 없기도 하였으나 에듀넷의 공짜 ISP는 에듀넷에 비해 인지도가 극히 낮았고, 접속 회선이 항상 폭주 상황이어서 몇십번을 시도해도 겨우 인터넷이 연결될까말까였다.
- 미니넷
- 키텔 - 당시 잘 없던 무료 PC통신. 강원도를 주축으로 한 통신망이었다. 인터넷전화 붐이 일 때 갑자기 VoIP 업체로 갑툭튀하더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 KIS -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던 무료 PC통신.
- KIDS - 한국통신의 인터넷 IPS인 KORNET에서 운영했던 서비스.
- A+ - 중앙교육진흥연구소[51]의 학습지 A+ 회원들을 위한 PC통신 서비스.
- 사설 BBS
8. 검열의 흑역사
요즘 세대들은 아예 모르는 사실인데, PC통신도 요즘의 인터넷 검열 못지않게 검열이 만연했다. 사실 당연할 수밖에 없던것이 PC통신이 한창 이용이 확산되기 직전이었을 때만 해도 안기부나 경찰로부터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이 일어나거나 공권력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거나 방송사에 친정부 인사를 임원으로 내정해서 논조를 정하는 일이 만연해있던 만큼 당연히 PC통신 업계로써 눈치보기 경향이 심했을수밖에 없었고, PC통신에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많이 이용하다보니까 안기부나 기무사, 검찰 공안통들 입장에서 PC통신 게시물들을 실적잡기 용도로 사용하기에도 용이했었기도 했다. 더군다나 당시 이용약관 조항 중에 '사회의 안녕질서 혹은 미풍양속에 저해된다'는 식의 구체적 기준이 모호한 내용이 있고 서비스업자에 유리한 내용이 많아서 사측의 자의적 판단만으로도 게시글을 검열할 수 있었다.그 예시가 바로 1990년대부터 2002년 위헌 판정 이전까지 온라인망 최대 악법으로 통했던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의 단속)[52] 과 동법 시행령 제16조(불온통신)였다. 이러한 법 조항의 문제점은 1990년대 초~중반경 PC통신의 대중화로 인한 이용자 급증에 따라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 법으로 인해 정치나 시사 관련해서 민감한 게시글을 쓴 사람들이 정보통신부 명령에 의해 아이디 정지부터 게시판 폐쇄까지 당하거나 더러는 수사기관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98 사이버 권리 백서> 머릿말에서 정보운동가인 김영식 씨의 말에 의하면 PC통신 게시글은 아래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얘기했다.
첫 번째 단계:
검찰,
경찰,
안기부,
기무사 두 번째 단계: 정통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세 번째 단계: 상업통신망의 모니터링 요원 네 번째 단계: 통신인들의 여론 재판 다섯 번째 단계: 동호회 시삽 여섯 번째 단계: 자기검열 |
대표적으로 1993년에 사노맹재건위의 선언문을 올리다 게시판이 이틀간 닫히고 운영자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 사건을 비롯해 1994년 현철동 <공산당 선언> 게시 사건, 희망터 김일성 신년사 게시 사건, 청와대 큰마당 자유게시판 폐쇄 사건, 1995년 하이텔 한국통신 노동조합 CUG 폐쇄, 1996년 총선관련 통신 단속, 나우누리 한총련 CUG 폐쇄[53], <그들이 무장간첩인가> 게시글 사건, 1997년 한총련 관련자 ID 및 게시글 무단 단속사태, 대선관련 통신 단속 등이 있었고, 그 외에도 디시인사이드의 대표 김유식은 이 일로 인해 보안분실까지 끌려갔던 전력이 있다. #
특히 1997년 8월 26일부터 9월 13일까지 통신검열 철폐를 위한 시민연대(이하 통신연대)에서 실시된 '통신연대 97년 검열백서 설문조사팀'이 실시한 설문조사 중 '정부기관과 통신업체의 검열에 대한 설문' 결과에서 응답자의 30%(29.8)가 검열이 있다고 응답했고, 다른 사람이 올린 글이 제재받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느냐는 문항에서는 73%(73.6)가 있다고 응답했다. 결국 10명 중 3명이 직접 정부나 통신서비스 업체에 의해 제재를 받았으며 7명이 간접적으로 검열을 실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주로 정치/사회 이슈분야가 많았다. 이것이 PC통신망에서도 검열이 횡행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해당 조항은 2002년 6월 24일에 위헌 판정을 받고 그해 12월부터 '불법통신'이란 명칭으로 바뀌었고 시행령 제16조는 2003년에 제15조의 2(불법통신의 취급정지명령 등의 요청)로 바뀌었으며, 2007년 1월에 제53조의 경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옮겨지는 형식으로 폐지되었으며, 시행령 제15조의 2는 동년 7월에 폐지되었다.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 (불온통신의 단속) ①전기통신을 이용하는 자는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량속을 해하는 내용의 통신을 하여서는 아니된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한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량속을 해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통신의 대상등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③정보통신부장관은 제2항의 규정에 의한 통신에 대하여는 전기통신사업자로 하여금 그 취급을 거부·정지 또는 제한하도록 명할 수 있다. <개정 1996·12·30> |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제16조 (불온통신) 법 제53조제2항의 규정에 의한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전기통신은 다음 각호와 같다. 1. 범죄행위를 목적으로 하거나 범죄행위를 교사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2. 반국가적 행위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3.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해하는 내용의 전기통신 |
- 관련 자료
1996년 당시 PC통신 업체들의 이용약관
김영삼 대통령 시기의 온라인망 검열 역사
'96 정보통신 검열백서(진보네트워크센터 게재.)
'97 정보통신 검열백서(진보네트워크센터 게재.)
1999년 불온통신 금지 사건(한국어 위키백과)
9. 해외의 PC통신
일본에서도 PC통신(パソコン通信)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애칭은 파소츠(パソ通). 한국통신이나 데이콤 등 통신회사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던 한국의 PC통신과는 달리, NEC나 후지쯔 같은 컴퓨터 제조회사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다. 유명한 PC통신 서비스로는 아스키의 ASCIInet, NEC의 PC-VAN, 닛쇼이와이[54]와 후지쯔가 합자한 NIFTY-Serve 등이 있었다.다만 이쪽은 한국 PC통신보다 몰락이 빨랐다. 일반인들에게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1995년경부터 이미 쇠퇴기를 걷고 있었으며, PC통신을 운영하는 회사들도 빠르게 ISP로 주력 사업을 변경하게 되었다. 결국 ASCIInet은 1997년에, PC-VAN은 2001년에, NIFTY-Serve는 2006년에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한편으로 PC통신과 별개로 캡틴 시스템이라는게 있는데 프랑스의 미니텔과 비슷한 형태이며 이쪽은 사무용으로 주로 쓰였다. 어쨌든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2002년에 서비스 종료.
일본의 PC통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만화를 읽어볼 만하다. PC통신 입문서와 러브 코미디를 섞어놓은 듯한 물건.
대만에서는 국립타이완대학을 서버로 둔 PTT가 유명하다. 엄밀히 말하면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사설 BBS라지만 사실상 PC통신을 넘어서서 대만의 대형 커뮤니티 레벨이다. 지금은 웹 기반으로 전환하였지만 여전히 텔넷 스타일의 인터페이스를 고수하고있다. 한편 PTT는 텔넷 서비스도 여전히 현역이라는듯 하다. 실제로도 PTT에서 이슈가 된 게시글이 대만 현지 뉴스에서 보도자료로 심심찮게 올라오곤 한다.
프랑스에서는 미니텔이라는 이름의 PC통신이 2012년까지 영업하였다. 이쪽은 갈라파고스화의 한 예로 거론된다. 해당 문서 참조.
미국에서는 대형 PC통신으로 CompuServe #와 AOL이 존재했었다. 현재는 두 회사(라기보단 이미 AOL이 CompuServe를 인수한 지 오래지만) 모두 인터넷 위주로 서비스를 재편한 상태. 그리고 미국은 사설 BBS 문화가 많이 발달된 편.
MSN은 처음 서비스 시작 당시에는 PC통신 형태의 서비스였다. 하지만 1년도 안 돼서 ISP 및 포털 사이트 체제로 변경. 마이크로소프트의 실패 사례로 남아 있다.
당연하겠지만 PC통신 자체의 역사는 한국보다 많이 빨랐다. 한국의 PC 사정상 PC 자체의 보급은 198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지만 주변기기의 보급은 많이 늦게 시작되었다. 미국, 일본만 해도 1980년대 중반이면 300bps 모뎀은 물론 음향커플러[55]를 이용한 PC통신, BBS가 대유행했다. 당연 한국에서 PC통신을 할 때쯤이면 300bps 모뎀은 이미 단종되었다.
10. 에뮬레이터
10.1. 범용 에뮬레이터
범용 에뮬레이터는 PC통신사에 상관없이 쓸 수 있었다. 초기에는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작동하는 방식이었으나 윈도우 등장 이후로는 명령어를 안 쳐도 텍스트를 클릭해도 되도록 변했다. 화면 자체는 그대로였지만.- 이야기 : DOS 시절 가장 유명했던 프로그램.
- 새롬 데이타맨 : 윈도우즈 등장 이후 가장 유명했던 프로그램.
- KSC : 1994년경 DOS용 통신 에뮬레이터로 강용희(당시 창원대 메카트로닉스 학생)씨 제작한 공개 프로그램.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상용 프로그램인 이야기 6,0 이나 6.1에 비해 훨씬 가볍고 기능이 뛰어나 아는 사람들은 KSC만 사용했다. 다만 곧 윈도우즈의 시대가 와서 오래가지는 못했다. 개발자 강용희는 나중에 KMPlayer와 팟플레이어를 제작했다.
- 신세대 : DOS 시절 말기에 나와서 잠깐 인기를 끈 프로그램이다. 이야기가 6,0부터 유료화되고 무료 버전의 버전업이 멈췄기 때문. 기능이 이야기 무료버전보다 좋은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거 쓰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후 PC 환경이 윈도우로 넘어가면서 사라졌다. 한때 이야기의 기본 콘솔모드에서 프로그램을 강제로 프리징시키는 다운안시(DOWN ANSI)가 유행했었는데 신세대의 VT220 모드에서 다운안시가 먹히지 않는 걸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당시 이야기는 기본 VT모드를 확장하여 여러 자체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이야기 전용 VT모드가 있었는데, 다운안시는 이 모드의 버그를 이용하는 것이라서 이야기 외의 다른 PC통신 프로그램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 따르릉 :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가 학생때 만들었다.
- 하이콤 : 한국통신(현 KT)에서 만든 프로그램. 하이텔 가입자 늘린다고 공짜로 배포했기 때문에 이거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쓰다가 이야기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았지만.
- 하이퍼터미널 : 윈도우 95부터 지원. 윈도우 자체에 내장된 PC통신 에뮬레이터.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실 이쪽은 PC통신 에뮬레이터보다는 통신 장비에 접속하기 위한 시리얼 콘솔 접속도구로 인기가 더 많았다.[56]
- 한네트 : 아래아 한글에 포함된 프로그램. 윈도우 전용이며 3.0부터 97까지 수록되었다.
- 잠들지 않는 시간 : 윈도우용 프로그램으로 새롬 데이타맨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프로그램이었다. 참고로 이걸 만든 회사는 훗날 엑스키퍼를 만들었다.
- 동그라미 : 초롱테크에서 만들어서 각종 공개자료실 등에 무료로 배포했던 프로그램. #
-
전화 건 후 터미널- 이건 SLiP접속을 위해 있는 거지 PC통신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Windows 98부터 Me까지의 온라인 서비스 폴더에는 인터넷 연결 마법사로 연결되어 있는 PC통신 바로가기가 있었는데 바로 PC통신업체에서 제공하는 웹 페이지에 접속하는 용도이다.[57] - 데이콤링크 - (주)한국데이터통신(현 LG 유플러스)에서 만든 프로그램. 천리안/PC-Serve 사용자를 대상으로 제작하여 무상배포하였고, 천리안을 통하여 서비스했던 학습프로그램은 이걸로 다운로드해야 구동이 가능하였다. 나중에 데이콤링크2(DL2)도 출시하였다.
10.2. 전용 에뮬레이터
각 통신사에서 제공했던 특정 통신사 전용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설정을 조금 손보면 타 통신사도 접속은 가능했다. 범용 에뮬레이터로 해당 통신사에 접속 시 현재의 인터넷 환경과 비슷하게 예쁘게 꾸민 아이콘과 화면을 클릭하는 방식으로 이용이 가능했지만 이 경우 속도가 좀 떨어졌다.[58]- 이지링크 - 하이텔 전용 에뮬레이터. 다른 전용 에뮬레이터에 비해 개발이 늦은 데다 기능이 떨어져서 쓰는 사람이 적었다. 후에 하이텔99, 하이텔99 플러스, 하이텔2000으로 발전했다.
- 매직콜 - 천리안 전용 에뮬레이터. 이것도 개발이 조금 늦었지만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서는 기능도 괜찮고 버그도 적어 쓰는 사람이 있었다. 후에 천리안97, 천리안98을 거쳐 천리안2000, 천리안 6.0으로 버전업되었다.
- 나우로 - 나우누리 전용 에뮬레이터. 나우누리 오픈과 함께 나왔기 때문에 쓰는 사람이 많았다. 버그도 적은 편이고 여러모로 안정적이었다. 버전 3.0에서 웹 브라우저와 통합하여 나우로 웹프리로 발전했지만, 버그가 쩔어줬기 때문에 결국 도태되고 만다. 이후 2000년 나우로 블루로 업그레이드되었다.
- 유니윈 - 유니텔 전용 에뮬레이터. 다른 PC통신과 달리 유니텔은 전용 에뮬레이터가 아닌 경우 기능이 많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걸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프로그램 구성은 다른 전용 에뮬레이터보다 좋고 버그도 적었기 때문에 큰 불만없이 쓰였다. 후에 유니윈 스페셜 에디션까지 버전업되었다.
- 넷츠고 브라우저 / 채널뷰 - 각각 넷츠고, 채널아이 전용으로, 모두 2.0 버전까지 나왔다. Internet Explorer( 트라이던트) 기반 전용 에뮬레이터(?)로 이쪽이 AOL에 가깝다.
11. 용어
- 모뎀
- 통신체
- ANSI
- 갈무리
- 머드
- 무닉
- 번개
- 글꼴
- 미니텔
- 호스팅 프로그램
- 호롱불
- 곰주인
- 등대
- 시삽(sysop) - '시스템 오퍼레이터(System Operater)'의 약자로, 특정 그룹의 운영자를 뜻하는 용어였다. 인터넷 초창기에도 쓰이다 현재는 관리자, 운영자 등의 표현으로 교체되었다.
- 통신인 - PC통신 유저를 이르는 말.
- 통장 - '통신장애'의 줄임말.
11.1. 게시판
- BBS
- PC통신 유머게시판
- 큰마을 (하이텔)
- TE31 (하이텔 - 일명 서당)
- 소모임(PC 통신)[59]
- CUG(Closed User Group) : '폐쇄이용자그룹'의 영어 약자. 주로 폐쇄적인 동아리들이나 진보/재야단체, 노동조합 등이 이용했다.
[1]
글 내용상 하이텔이 사라지기 얼마 전인 2006년 말의 이미지로 보인다.
[2]
검색하면 모뎀 사진이 나온다. PC통신 뿐만이 아니라 초창기 인터넷(인터넷 브라우저)도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요즘은 랜선을 사용한다.
[3]
1990년대에는
2020 우주의 원더키디 등이 방영되는 등 발전된 먼 미래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품는 영화나 만화 등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새천년
밀레니엄(2000년)조차 멀게 느껴지던 시절에 2020년이면 까마득히 먼 미래처럼 느껴졌을 텐데, 정작 2020년대에는 방송사에서 고전 K-POP 자료들을 올리고 댓글에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저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등 오히려 1990년대를 환상처럼 동경하는 댓글들도 적잖이 볼 수 있게 됐다. 물론 1990년대에 정말 좋았던 작품이나 음악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개중에는
좋았던 옛날 편향이 있을 수도 있다.
[4]
당대에야 필터링이 없다고 논할 수 있겠지만 부모 욕설, 외모 욕설, 인종차별 등의 온갖 쌍욕이 난무할 정도로 댓글 분위기가 시궁창이 된 지 오래인 2020년대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건전한 축에 속한다.
[5]
후반부 후렴구인 "나는 누군가가 정말 필요해. 내일 우리같이
여행을 떠나볼까"란 가사가 삭제된 쇼트 버전이다.
[6]
1970년에 생긴 Network Control Program(NCP)이다. 이건
아파넷의 통신이라 군용이다. 대학교나 연구실에서 사용했다. 1983년에는
TCP/IP를 사용해서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7]
PC통신은 BBS방식을 사용했다.
[8]
1990년대의 천리안과는 다르지만 전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9]
feed me의 dialup days에서 맨 처음 도입부에 나오고,
서태지의
인터넷 전쟁 또한 도입부에 이 사운드를 샘플링하여 삽입하였다.
[10]
참고로 저 모뎀 접속 소리도 PC통신의 원조 미국에서는 아주아주아주 후대의 일처럼 여겨진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는 모뎀이 아닌 더욱 원시적인 통신 방식을 썼는데, 바로 '음향 커플러'란 녀석이었다. 모뎀은 그래도 최소한 전화선을 기계에 바로 꽂지만, 음향 커플러는 '음향을 동기화한다'는 뜻풀이에서 보듯, 컴퓨터가 스피커로 전기 신호를 내보내고 스피커가 내는 소리를 전화기의 음성통화로 소리를 보내는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레딧에 올라온 실물 사진 즉 PC스피커 위에 전화기를 얹어놓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방식이었던 것.[60]
[11]
하이텔 기준으로 각각 소설 연재 게시판(
드래곤 라자 등 상당수 1세대 판타지가 이 곳에서 연재되었다.),
애니메이트 동호회 잡담 게시판으로 바로 이동하는 명령어이다.
[12]
기본적으로는 접속 중에 전화가 오면 그냥 통화중으로 처리가 되었지만, 전화국에 통화중대기 서비스를 신청한 경우에는 통화중 전화가 걸려올 때 뚜-뚜- 소리가 들리게 되는데 PC통신 중에는 잡음으로 인식되고, 결국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장시간의 PC통신 이용중 전화통화를 할 수 없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이를 이용하는 PC통신 이용자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자식이 PC통신을 너무 오래 쓰지 못하도록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 끊어버리는 부모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13]
014XY 접속종료시 접속중의 정보이용료 표시기능이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이것이 0원으로 표시되는 버그도 있었다.
[14]
현재의 KT 지사.
[15]
이게 가능했던 건 여기가 운좋게도 한국전기통신공사(KT)가 1980년대부터 매설한 광랜 망이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16]
하필이면 그 1990년 1월 1일부터 PC서브가 유료화한다. 종량제+유료화로 몰락했다. 여담으로 시외전화는 1980년대에도 종량제였고 지금보다도 더 비쌌기 때문에 도수제 에피소드는
서울 및
경기도 일부(즉,
지역번호 02 사용)지역 거주자에 한한다.
[17]
엠파스의 메일시스템과는 동명이적이다.
[18]
사실 처음 도수제가 도입되었을 때는 당시 서민들 입장에서 전화요금이 많이 비쌌는데, 물가상승폭에 비해서 통신비가 덜 오르면서 1980년대 즈음이 되면 크게 부담이 없어졌다. 여담으로 도수제가 도입된 이유는 1960년대 이전만 해도 전화는 정말 권력층이나 부유층 아니면 사업장에나 놓는 수준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전화 놓는 비용이 과장 좀 보태서 변두리 집값에, 신청해도 한 1~2년은 대기해야 나올 지경이었으며, 그 시간을 기다리기 힘든 경우(주로 사업장) 아파트 1채 값 정도의 프리미엄을 내고 다른 사람이 개통한 전화를 명의이전(소위 백색전화)해야만 했었다. 이런 비싼 비용은 차차 줄어들었지만 전화 신청 후 1~2년 대기하는 상황은 1980년대 초반까지도 당연했었다. 그러니 그 비싼 전화개통비용에 비해 통화요금은 껌값일 수밖에.
[19]
단,
공중전화는 20원이었다. 당시 1원이나 5원짜리 동전은 거의 쓰이지 않았고, 공중전화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거기다 10원짜리 딱 2개만 들어가는 주황색 공중전화가 아직 있었을 때라서 집전화만 올린 것이다.
[20]
게다가 그때는 PC통신 초창기라 여러 업체들이 이른바 시범서비스라는 것을 했었던 시기라서 사용료도 무료였다. 즉, PC통신을 즐기는 비용이 월 사용료 무료+1통화 20원이었다는 것. 1990년이 되자 하나 둘씩 월사용료를 받기 시작했다. 즉 90년대 PC통신 비용은 월 사용료 1만원 + 언급된 엄청난 통화요금이였던 것.
[21]
티코나
프라이드 한 대 값과 컴퓨터의 가격은 얼추 비슷했다. 90년대 중반 들어 가격 하락이 빨라지기 시작해 97년쯤 와서는 그래도 티코 한 대 값이면 컴퓨터 두 대는 살 수 있었다.
[22]
특히 286~펜티엄 II 때 이러한 성능 향상이 극에 달해 2년이면 중고로 팔기도 힘들 수준이었다. 펜티엄 III를 기점으로 점차 완화되어 90년대 말에 나온 투알라틴 펜티엄 III 정도면 2000년대 중반까지 가벼운 웹서핑과 문서 작성에도 문제가 없었고, 펜티엄 4 노스우드를 기점으로 적당히 고성능으로 맞추면 RAM 용량 증가 등 자잘한 업그레이드만으로 5년 정도는 성능에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코어 2 출시 이후로는 전체적으로 컴퓨터의 가격이 이전보다 저렴해짐과 동시에(펜티엄 4까지만 해도 하이엔드가 아닌 메인스트림 사양에서 약간 높은 사양이 180만원이었다. 셀러론을 쓰는 보급형 PC도 80~100만원 선이었고 그 밑으로 맞추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PC의 성능 수명이 크게 상승해 보급형 사양이라도 저사양 게임과 웹서핑, 문서 작성용으로만 쓸 거라면 10년까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23]
다만 당대 최저시급은 물가와 비교해도 너무 터무니없이 낮아서 고용주들도 기본적으로 최저시급의 최소 1.5배는 주던 시기였다. 물론 이마저도 적은 돈이라 일손이 급한 데라면 기본급을 2배까지도 주는 경우가 있었을 정도.
[24]
물론 당대에 PC통신을 하는 개인은 꽤 부유층이긴 했다. 1980년대는 물론 1990년까지만 해도 국내에 보급된 PC는 아직 8비트 PC가 많았을 때인데, 8비트 PC용 한글 에뮬레이터가 전혀 없고 해당 PC용 모뎀 또한 국내 정발품이 전혀 없는 관계로, PC통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비싼 16비트 IBM 호환기 + 아직는 낮설어서 비싼 외장형 모뎀, 이렇게 장착해야 가능했다. 그시절 PC통신 유저들은 절대 다수가 회사나 대학 등에서 접속했다고 보면 된다. 이런 상황은 1991~92년쯤 되어야 16비트 PC 대중화 + 저렴한 내장형 모뎀 출시 등으로 개선된다.
[25]
통화중이라 연결이 아예 안 되었다면 요금이 부과되지 않지만, 당시 통신환경의 열악함으로 인하여 연결이 되고 나서 곧바로 끊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이런 경우에도 통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여 요금이 부과된다.
[26]
물론 이것 또한 14,400bps 이상의 모뎀이 대중화된 이후의 이야기이다. 2,400bps 등 저속 모뎀 쓸 시절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화면에 글 나오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느렸으니.
[27]
이야기 등
[28]
이때는 아예 시나 군 단위로 지역번호가 나가던 시점이라, 군 경계 하나만 넘어도 시외전화로 분류되었다. 시외전화 지역번호가 지금처럼 광역시나 도 단위로 개편된 것은 2000년 7월부터였고, 이때는 이미 모뎀이 사양화되고 초고속 인터넷 전용선이 보급되던 시점이었다.
[29]
월 4만 원짜리인 할인시간요금제는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공휴일은 전일에 별도 과금 없이 접속되었었다. 참고로 1999년 8월 15일에 요금을 각각 18,000원/30,000원으로 인하하였다. 1998년부터 적용 시간이 변경되었으며 야간은 23~8시에서 22~9시로 변경되었으며 할인시간은 21~8시에서 20~9시로 변경되었으며 중식시간(12~13시)이 추가되었다. 2000년 5월 1일에 한번 더 인하하기까지 했다. 각각 15,000원/25,000원으로 인하되었다. 물론 이때는 ADSL이 안 깔리는 지역를 제외하면 메리트는 없었다.
[뜻]
Telephone to Telephone
[31]
BBS 초기 개척자들은 300 bps부터 사용했다. 그 중에는 애플에서 발매한 콘센트형 300 bps 모뎀을 해외에서 직접 공수해 쓰는 사람도 있었다.
[32]
2400비트는 300바이트지만 1바이트(8비트)마다 패리티와 스톱비트가 1비트씩 들어가므로 1바이트 전송시 10비트를 사용한다. 패리티를 생략하면 9비트.
[33]
그 당시엔 이미지 자체가 작았다. 1.4 MB에 크기는 10 cm 가량이 넘어가는
플로피디스크가 PC통신이 망할 때까지 꿀리지 않는 저장매체로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림 한 장에 몇십 MB 따위는 이 시절엔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야기였다.
[34]
당시 평균적인 PC 성능상 고화질은 다운받더라도 재생이 힘들었다...
SD 화질의 절반밖에 안 되는 240p 해상도의 동영상도 전용 MPEG 가속 카드가 필요하네 마네 하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2022년 현재는 펜티엄급 보급형 CPU로도 1080p FHD 영상의 실시간 디코딩이 가능하다.
[35]
이때의 잔재가 2010년대까지도 남아있어서
KBS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도 56k급의 저화질 영상도 올렸다. 56k 다시보기는 2018년 7월 중단되었고, 현재는 2000년대 중반 이전의 시사프로그램과 뉴스프로그램 다시보기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36]
하지만 당대의 컴퓨터 용량 사정 상 이 정도 속도에 만족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용량이 큰 자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잘 해봤자 MP3 정도나 동영상 클립 정도가 자료실에 있는 가장 큰 자료였다. 쉽게 말해 1.2 MB 또는 1.44 MB 플로피디스켓 1개에 들어갈 정도의 자료가 아주 큰 용량의 자료였고, 당시 주로 쓰이던 386 또는 486 컴퓨터를 사용하는 대다수는 하드디스크가 1 GB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37]
이 소리는 0과 1에 해당되는 아날로그 소리 신호이다.
자기테이프 참조. 전화선을 통해 소리로 변환된 데이터를 컴퓨터에 들려주어 그 값을 읽어들이고 다시 소리로 보내는 방식이다. 즉 PC통신 말그대로 통신으로 컴퓨터끼리 전화로 수신,송신 이다.
[38]
DuckDuckGo에서는 '!'(!Bang) 기능이 있어서 '!namu'를 입력하면 나무위키로 이동된다.
구글에서는 사이트 이름을 치고 검색 버튼 대신 I'm feeling lucky 버튼을 누르면 바로 사이트로 이동한다. 다만 이름대로 운이 나쁘면 다른데로 간다.
[39]
모뎀은 atdt (접속번호)
[40]
2019년 기준 야후와 라이코스는
네이버와
다음 그리고
구글에 밀려 국내에서 철수하였다. 그야말로 격세지감.
[41]
그나마 선전한 경우가
넷츠고였는데 2002년에
네이트로 합병되면서 PC통신 서비스가 종료되었고, 나머지 업체들은 말 그대로 말아먹었다.
하이텔의 운영사였던
KTH는
한미르-
파란을 운영했지만 처절하게 발려먹었고,
천리안은 2002년
데이콤에서 자회사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현 미디어로그)로 이관됐지만 말 그대로 근근히 운영되는 수준이고,
나우누리의 모회사인 나우콤도 본진인 나우누리는 말아먹고
클럽박스도 2019년 3월 6일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아프리카TV만으로 먹고 사는 수준이다.
[42]
2007년 2월 28일에 하이텔, 동년 12월 27일에 천리안이 종료되었으며, 2013년 1월 31일에는 나우누리도 서비스를 종료했다. 유니텔은 가장 오랫동안 버텼지만 2022년 6월 30일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43]
당장 1990년대에는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도 꿈만 같이 멀게 느껴지던 시절일텐데('21세기 폭스'사도 있었는데, 21세기 월드컵은 다른 차원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자칭 미래에서 온 예언가인
존 티토 마냥 한국이 4강에 진출한다고 하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1990년대까지는 16강조차 한번도 못가봤었으니까.
[44]
작중에서 하이텔을 하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기도 했다.
[45]
대표적으로
하이텔의 개오동,
나우누리의 나모모. 특히 나모모는 동호회명부터가 나우누리 모뎀 플레이 모임 정도의 약칭이다.
[46]
이 당시 유머게시판의 글이 많이 출판되었다.
[47]
PC통신 초창기엔 이용자 연령층이 주로 20대 이상이라 미성년자가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가끔 고등학생 이용자가 나타나면 특별대우를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고등어도 그 일환에서 만들어진 별명같은 것이다.
[48]
최대 256색이고, LZH 압축알고리즘 사용으로 용량이 작으며, 전체 파일이 다 받아지기 전에 개략적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모뎀으로 GIF 파일을 받아본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다운로드를 시작하면 전체 모습이 아주 큰 픽셀로 거칠게 나오고, 다운로드가 진행될수록 그림이 세밀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9]
다만 신규 회원은 받지 않고, 기존 회원에 한해서 서비스 중이다.
[50]
실제로 LG에서 PC통신을 운영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포털에서 LG 트윈텔만 검색하면 엘지의 오피스텔 건물만 나온다. PC통신 트윈텔로 검색해야 일부 트윈털 서비스 개시와 사업종료에 대한 뉴스기사가 소수 나온다. 이후 LG에서 채널아이를 운영하였지만 채널아이 역시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고 서비스 종료하였다.
[51]
1세대 교육기업으로 유명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 몰락하다가
2011년 부도로 인해 사라졌다.
[52]
사실 해당 조항 자체는 전보와 전화가 주 통신수단이던 시절인 1961년에 제정된 '전기통신법' 제6조가 전신이며, 이후 1984년에 구 전기통신법이 폐지되고 신설된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이관되어 제80조로 바뀌었다가 1991년에 '전기통신사업법'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제53조로 바뀌었다.
[53]
특히 이 사건의 경우 방배동 단우빌딩의 나우누리 본사 사무실에 압수수색영장을 지참한 경찰이 들이닥쳐 "여기 한총련 방이 몇호실이야!?"라고 물어보았다는 전설적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기준으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웃기고 멍청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밖에 없겠지만, 이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데이터 통신 네트워크상의 가상 공간과 그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 이 당시에 컴퓨터가 작업실이나 가정에서 상당수 보급되었기는 했지만, 업무용이나 교육용, 게임용으로 쓰던게 다반사로, PC통신 이용자 수는 1996년 기준으로 300만명 안팍으로 총 인구의 10%에도 못미쳤다. 따라서 PC통신과 인연이 없는 경찰관들은 <나우누리에 한총련 폐쇄사용자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당연히 특정한 건물(이 경우 나우누리 본사가 입주한 빌딩)에 그 모임이 이뤄지는 방이 있고, 그 방에서 한총련 구성원들이 모인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사실 PC통신이나 인터넷의 보급 등 소위
정보화 혁명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속도가 유래없이 급속했던 만큼 그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 지체 현상 역시 현저히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으로 인터넷의 엄청난 파급력이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지고, 그 후 수년이 더 지나 인터넷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충분히 침투한 시점에 일어났던
2008년 촛불집회 당시에도 집회 참가자에게 "
다음 아고라에서 나왔느냐"고 질문한 경찰이 있었다고 할 정도. 아고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해당 커뮤니티의 분위기와 성향을 선호하는 불특정한 이용자 집단이 '머무름으로써' 형성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풍조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형태의 집단, 즉 '명확히 구별되는 구성원을 가지고, 일관된 내부 통제력을 발휘하는 집단'에 대입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
[54]
닛쇼이와이는 북미의 콘솔용 주변기기를 통한 콘솔 멀티플레이어 중개서비스인 XBAND를 제휴해서 일본에 서비스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소지츠상사에 합병.
[55]
전화기 송수화기에 연결하여 삐~ 하는 신호음을 직접 만드는 장치. 당연히 속도는 300~1200bps가 한계. 국내에는 통신 관련 업체를 제외하고 일반인들에게 보급된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간혹 198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지금이 30대~50대 컴덕들 중에는 '직접 실물은 본 적 없지만 익숙한 물건'중 하나다. 왜냐면 그 당시 학습만화백과 시리즈물에는 21세기(...)를 대비한 컴퓨터 관련 섹션이 하나쯤은 있었고, 대부분 일본만화를 베껴 그리고 또 그 일본은 미국의 기술을 소개하던 때였기 때문에 음향 커플러가 무슨 첨단 통신(그 때는 첨단이 맞았다)마냥 그려졌기 때문. 그럼 광통신은? 무슨 세기의 혁명 취급...
[56]
해외에서는 PC통신 접속용도로 그럭저럭 쓰이긴 해서 마소공식 미니텔용 폰트 패치도 있었다.
[57]
물론 IE를 실행하는거라서 다른 웹 페이지로 이동할 수 있다.
[58]
뭘 따라했는지 다들 아시겠지만..
[59]
디씨로 치면
마이너 갤러리에 상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