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프랜시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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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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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드션 프랜시스 Steven D'Shawn Franc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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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7년 2월 21일 ([age(1977-02-21)]세) |
메릴랜드주 타코마 파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메릴랜드 대학교 |
신장 | 191cm (6' 3") |
체중 | 95kg (210 lbs) |
윙스팬 | 198cm (6' 6") |
포지션 | 포인트 가드 |
드래프트 |
1999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밴쿠버 그리즐리스 지명 |
소속 팀 |
휴스턴 로키츠 (1999~2004) 올랜도 매직 (2004~2006) 뉴욕 닉스 (2006~2007) 휴스턴 로키츠 (2007~2008) 베이징 덕스 (2010) |
등번호 |
3번 - 휴스턴 / 올랜도 1번 - 뉴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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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농구 선수. 전성기에는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서부에서 올스타 가드 붙박이였던, 현대 공격형 듀얼가드의 프로토타입격인 선수.2. 선수 경력
2.1. 프로 입단 전
메릴랜드 타코마 파크 출신으로 1995년에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농구를 관뒀으며 할머니가 그를 키웠다. 아버지는 은행 절도 혐의로 연방 교도소에서 20년형을 복역했다. 어렸을 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푸드 스탬프를 받았으며 한 집에서 18명이 살았다고 한다. 10대때부터 마약 장사를 했고 무려 6개의 고등학교를 옮겨다녔으며 모친상 이후 고교를 중퇴했다.고교 중퇴 후 인근 공원과 소방서 지하의 농구코트에서 실력을 뽐냈다.
농구 실력은 인정받았는지 대학농구계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GED(미국의 검정고시)를 치러 합격했다. San Jacinto College(1996~97), Allegany College of Maryland(1997~98)을 거쳐 1998년에 메릴랜드 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슈팅가드 포지션에서 활약하며 게임당 평균 17득점, 4.5 어시스트, 2.8 가로채기를 기록했고 팀은 그해 28승 6패, 전미 랭킹 5위에 올랐다. 4학년을 다니는 대신 NBA 진출을 선언했다.
2.2. NBA
1999년 NBA 드래프트에서 시카고 불스의 엘튼 브랜드에 이어 1라운드 2순위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에 지명되었으나 계약을 거부했다. 드래프트 전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시카고와 3순위 지명권을 가진 샬럿에만 방문하고 2순위 지명권을 가진 밴쿠버에는 가지도 않았다. 그는 대놓고 밴쿠버에서 뛰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로 메릴랜드 집에서 너무 멀고, 세금, 신의 뜻(...)을 들었다. 밴쿠버 합류를 잠시 고려했지만 계약 협상, 그리고 밴쿠버 공항 직원의 무례했던 질문 때문에 합류를 단념한다.결국 3개팀, 11명의 선수, 드래프트 지명권 등이 포함된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휴스턴 로케츠에서 NBA 데뷔를 하게 된다. 2002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받은 야오밍과 함께 2003년 올스타 게임에도 출전했지만 데뷔 후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에서 제프 밴 건디 감독으로 교체된다. 팀은 1999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프랜시스 개인 성적은 전년도 대비 하락했고 팀 공격의 중심을 야오밍으로 가져가려 하자 감독과 불화를 빚는다. 휴스턴 시절 게임당 평균 19.3 득점, 6.4 어시스트, 6.1 리바운드, 1.63 가로채기를 기록했다(374경기 출전, 372경기 주전).
2004-05 시즌을 앞두고 올랜도 매직으로의 트레이드[1]를 프랜시스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팀에 금방 적응하며 이적 첫해 게임당 평균 21.3 득점, 5.8 리바운드, 7.0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 중반 휴스턴에 같이 이적한 커티노 모블리가 새크라멘토 킹스로 트레이드되자 불만을 가졌고 그 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에서 팀 자체 징계(2게임 출장정지)를 받았고 타 팀과의 트레이드 소문이 계속 나오는 등 다사다난한 시즌을 보냈다.
뉴욕 닉스(2006~07)로 트레이드됐고 닉스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됐다. 포틀랜드가 그를 방출하며 여러 팀들의 영입 제안을 받았고 휴스턴 로케츠(2007~08) 입단을 택했다. 2008~09시즌을 앞두고 15파운드(6킬로)를 감량하는 등 준비에 철저했지만 부상과 재활로 인해 컴백시기가 늦춰졌다. 결국 2008년 12월 24일 그를 처음 택했던 그리즐리스(그 당시 멤피스로 연고지를 이전함)로 트레이드됐지만 2009년 1월 27일 방출됐다.
2010년 11~12월 중국프로농구팀 베이징 덕스에서 4경기 14분 출장 0.5득점 0.7리바운드의 성적만을 남겼다.
정식 농구 경험[2]은 짧으나 화려한 드리블과 폭발적인 운동능력으로 신인왕을 수상하고 올스타 가드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불안한 멘탈 등으로 인해 급격한 하락세를 겪었고 결국 10년도 안돼 NBA 선수생활을 접었다.
3. 플레이 스타일
길거리 농구 경험에서 나오는 화려한 드리블이 강점이었던 공격형 포인트가드. 웨스트브룩 이전 역대 최고의 포인트가드 덩커로 꼽힐만큼 운동능력도 좋았다.4. 여담
- 전태풍이 조지아텍 재학 시절 프랜시스와 매치업을 했다가 트리플 더블을 허용하며 처절하게 발린 적이 있다고 한다. ##
- 2001년 토네이도가 메릴랜드 대학교 칼리지 파크 캠퍼스를 강타하면서 2명의 학생이 죽고 7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기숙사를 떠나야 했던 당시 학생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지원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나를 도와줬던 대학교 사람들을 모두 기억한다. 이건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을 위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조그마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 메니에르병을 앓았다.
- 그의 배번호 23번은 2002년에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영구결번 처리됐다.
- 바락 오바마 지지자다.
- 창업가 기질이 다분하여 건설회사, 복싱 프로모션, 이발소, 의류회사, 힙합 레코드 레이블 사업에 관여했다.
- 농구계를 떠난 후 그의 양아버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알콜중독에 빠졌다. 그 외에도 소소한 사고를 치며 경찰 체포, 벌금 납부 소식이 종종 들려왔다.
- 2002년 시즌 당시 극심한 편두통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왼쪽 청력이 안좋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프랜시스의 동료였던 야오밍도 8살 때 먹은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왼쪽 귀가 안들렸다는 것. 이로 인해 로키츠는 수신호를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1]
토론토에서의 2인자 신세를 벗어나 올랜도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한 트레이디 맥그래이디를 포함한 3대4 트레이드
[2]
정식 농구 경험이 고등학교때 1년, njcaa 2년,ncaa 1년이며 고등학교땐 고작 2경기 뛴게 끝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