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전한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의 《 사기》 표(表)에 나오는 10개의 연표 중 여섯 번째.2. 설명
한고제 유방이 천하를 쟁패할 때 도운 143명이 후로 봉해지고, 봉국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사항을 기록한 연표다. 여러 봉지의 명칭를 국명(國名)으로 표시하고 수봉된 자들의 주요 공훈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해당 제후가 재위한 기간을 숫자로 표시해 두었다. 후제(侯第)라고 하여 제후들의 등급도 기록하고 있다.[1][2]이러한 제후들의 봉국은 숫자가 엄청나긴 하지만 대부분은 후대로 가면서 죄를 짓거나 대가 끊어져 후국이 폐지되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오초칠국의 난을 거치며 중국이 군현제도를 확립하면서 사라지게 된 것. 이는 황제들이 여후의 천하를 용인했던 신하들에게 보복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부분에서 원죄가 없는 건 육가 한명 뿐이다. 하지만 공신들의 추대로 제위에 오르면서도 여후의 죽음을 기뻐하긴 커녕 역으로 공신들을 두려워한 한문제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여후치세의 보복보단 황명을 날조하고 황제조차 지들 입맛대로 갈아끼우는 공신들의 힘이 위험했기에 숙청했을 가능성도 높다. 실제로 여후 생전에는 공신세력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한문제 이후부터 별에별 트집을 잡아 하나씩 숙청하기 시작했기 때문. 한무제 시대에 이르면 건국공신들의 후손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한무제의 시기에 이르면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기에, 아무래도 과거의 개국 공신들의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던 점도 있다. 어지간한 시대라면 개국공신들은 최고의 영웅이지만 이미 그 당시에 곽거병이나 위청 같은 인물들이 날뛰고 있었던 판이니……
사마천은 이런 후국들이 멸망해 버린 원인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는데, 첫 번째는 최고 통치자의 주도면밀하지 못한 법 체제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 자신 역시 행동을 똑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확실한 죄명도 없이 봉작을 박탈당한 제후들에게 동정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사마천이 봉분제에 가진 나름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확인하려면 사기의 표를 봐야 하는데, 국내에서 사기의 표를 번역한 판본은 김원중 판과 정범진 판, 신동준 판이 있다. 이 중에서 김원중, 신동준 판은 표 전체를 번역했으며, 정범진 판은 표의 서문만 번역했다. 김원중 스스로 말하기를 '표'를 번역하는 작업이 사기 번역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라고 한다. '표' 가 단순한 연표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본기에는 기록된 일이 표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던가, 거꾸로 본기나 열전에서는 언급이 없는 일이 표에서는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 서로 대조하며 확인할 필요가 있다.
《 한서》의 제16권 고혜고후문공신표는 고제 · 혜제 · 여태후 · 문제 시대에 후로 봉해진 사람들을 다루는데, 대부분 고제의 공신들이라 결국은 이 표와 비슷한 내용을 다루며, 상충하거나 상보적인 부분도 있어 같이 볼 필요가 있다. 다만 한서는 황실은 왕자후표, 외척은 외척은택후표에 기술했기 때문에 고혜고후문공신표 말고 그쪽에서 겹치는 쪽도 좀 있다.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옛날에 다른 사람의 신하 된 자의 공적에는 다섯 등급이 있었으니, 덕행으로 종묘(宗廟)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을 '훈(勳)' 이라 하고, 언론을 세우는 것을 '노(勞)' 라고 하였으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공(功)' 이라 하였으며, 그 공적의 등급을 밝히는 것을 '벌(伐)' 이라 하였으며, 오랜 기간 동안 정무를 맡아 보는 것을 '열(閱)'이라 하였다. 분봉(分封)하고 작위를 내릴 때 서약하는 말은 이렇다. "황하를 허리띠처럼, 태산을 숫돌처럼 만들리라. 나라가 영원토록 편안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이어지게 하리라." 처음에 내릴 때 일찍이 그 근본을 굳건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그 후손에 이르러 점차 없어지거나 쇠미하게 되었다.
나는 고조(高祖)가 공신들에게 분봉한 자료를 읽으면서 그들이 처음 분봉한 이후에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를 살펴보고는 말했다. "다르구나, 내가 들은 것이여!" 『상서』에 말하기를 "온 나라를 서로 화목하게 하라" 라고 하였는데 (요순 시대부터) 하와 상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우는 수천 년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주나라는 제후 팔백 명을 봉하였는데 유왕(幽王)과 여왕(厲王) 이후의 사적은 『춘추』(春秋) 에 보인다. 상서에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이 봉한 후백은 하상주 삼대의 천여 년을 지나 오면서 스스로를 온전히 함으로써 천자를 보위 하는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인의를 돈독히 하고 황상의 법도를 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 공신들 중에 분봉 받은 자가 백여 명이 되었다. 그 당시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므로 큰 성읍과 이름난 도읍의 백성들이 흩어져 망명하여 호구 중에서 셀 수 있는 경우는 열 가운데 두세 호구였으니 큰 제후는 일만 호구를 넘지 않았고 작은 제후는 오륙백 호구였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이 모두 고향 마을로 돌아오자 호구 수는 나날히 늘어나서 소하(蕭何), 조참(曹參), 주발(周勃), 관영(灌嬰)과 같은 무리들 중 어떤 이는 봉읍이 사만에 이르고, 소후도 봉읍이 배가 되니, 그들의 부도 그처럼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의 자손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자신의 선조들의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음란해지고 사악해져 갔다. 태초 백년 사이에 후작을 보존한 자는 다섯뿐이고 나머지들은 법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거나 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말았다. 법망이 또한 덜 촘촘해진 점도 있지만, 모두가 당시의 금령에 삼가고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에 처해 있으면서 옛날의 이치를 기록하는 것은 스스로 거울로 삼으려는 이유지만, 반드시 옛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제왕들이 저마다 예법을 달리하고 정무를 달리하지만 성공하는 것으로써 계통과 벼리로 삼은 것이니 어찌 같은 것만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제후 왕이 존중되고 총애를 받을 수 있는 것과 버림받고 모욕을 받는 것 또한 당대에도 얻거나 잃을 만한 사례가 숲처럼 많거늘, 어찌 반드시 옛 견문에서만 보아야 하는가?
그래서 그들의 처음과 끝을 삼가 기록하고 그들의 문사를 표로써 정리하였는데 자못 상당히 본말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곳도 있다. 그 분명한 것을 드러내어 기록하고 의심나는 것은 빈칸으로 두었다. 훗날 군자가 있어서 추론하여 그들을 배열하려고 한다면, 이 표를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 다른 사람의 신하 된 자의 공적에는 다섯 등급이 있었으니, 덕행으로 종묘(宗廟)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을 '훈(勳)' 이라 하고, 언론을 세우는 것을 '노(勞)' 라고 하였으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공(功)' 이라 하였으며, 그 공적의 등급을 밝히는 것을 '벌(伐)' 이라 하였으며, 오랜 기간 동안 정무를 맡아 보는 것을 '열(閱)'이라 하였다. 분봉(分封)하고 작위를 내릴 때 서약하는 말은 이렇다. "황하를 허리띠처럼, 태산을 숫돌처럼 만들리라. 나라가 영원토록 편안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이어지게 하리라." 처음에 내릴 때 일찍이 그 근본을 굳건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그 후손에 이르러 점차 없어지거나 쇠미하게 되었다.
나는 고조(高祖)가 공신들에게 분봉한 자료를 읽으면서 그들이 처음 분봉한 이후에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를 살펴보고는 말했다. "다르구나, 내가 들은 것이여!" 『상서』에 말하기를 "온 나라를 서로 화목하게 하라" 라고 하였는데 (요순 시대부터) 하와 상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우는 수천 년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주나라는 제후 팔백 명을 봉하였는데 유왕(幽王)과 여왕(厲王) 이후의 사적은 『춘추』(春秋) 에 보인다. 상서에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이 봉한 후백은 하상주 삼대의 천여 년을 지나 오면서 스스로를 온전히 함으로써 천자를 보위 하는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인의를 돈독히 하고 황상의 법도를 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 공신들 중에 분봉 받은 자가 백여 명이 되었다. 그 당시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므로 큰 성읍과 이름난 도읍의 백성들이 흩어져 망명하여 호구 중에서 셀 수 있는 경우는 열 가운데 두세 호구였으니 큰 제후는 일만 호구를 넘지 않았고 작은 제후는 오륙백 호구였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이 모두 고향 마을로 돌아오자 호구 수는 나날히 늘어나서 소하(蕭何), 조참(曹參), 주발(周勃), 관영(灌嬰)과 같은 무리들 중 어떤 이는 봉읍이 사만에 이르고, 소후도 봉읍이 배가 되니, 그들의 부도 그처럼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의 자손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자신의 선조들의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음란해지고 사악해져 갔다. 태초 백년 사이에 후작을 보존한 자는 다섯뿐이고 나머지들은 법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거나 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말았다. 법망이 또한 덜 촘촘해진 점도 있지만, 모두가 당시의 금령에 삼가고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에 처해 있으면서 옛날의 이치를 기록하는 것은 스스로 거울로 삼으려는 이유지만, 반드시 옛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제왕들이 저마다 예법을 달리하고 정무를 달리하지만 성공하는 것으로써 계통과 벼리로 삼은 것이니 어찌 같은 것만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제후 왕이 존중되고 총애를 받을 수 있는 것과 버림받고 모욕을 받는 것 또한 당대에도 얻거나 잃을 만한 사례가 숲처럼 많거늘, 어찌 반드시 옛 견문에서만 보아야 하는가?
그래서 그들의 처음과 끝을 삼가 기록하고 그들의 문사를 표로써 정리하였는데 자못 상당히 본말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곳도 있다. 그 분명한 것을 드러내어 기록하고 의심나는 것은 빈칸으로 두었다. 훗날 군자가 있어서 추론하여 그들을 배열하려고 한다면, 이 표를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3. 연표
1위 차후(酇侯)
소하 2위 평양후(平陽侯) 조참 3위 선평후(宣平侯) 장오 4위 강후(絳侯) 주발 5위 무양후(舞陽侯) 번쾌 6위 곡주후(曲周侯) 역상 7위 노후(魯侯) 해연 8위 여음후(汝陰侯) 하후영 9위 영음후(潁陰侯) 관영 10위 양릉후(陽陵侯) 부관 |
11위 신무후(信武侯)
근흡 12위 안국후(安國侯) 왕릉 13위 극포후(棘蒲侯) 시무 14위 청양후(清陽侯) 왕흡 15위 광평후(廣平侯) 설구 16위 분음후(汾陰侯) 주창 17위 양도후(陽都侯) 정복 18위 곡성후(曲城侯) 고봉 19위 박양후(博陽侯) 진비 20위 양추후(梁鄒侯) 무유 |
21위 또는 22위 괴성후(蒯成侯)
주설 23위 도창후(都昌侯) 주진 24위 염차후(厭次侯) 원경 25위 성경후(成敬侯) 동설 26위 고성후(故城侯) 윤회 27위 하릉후(阿陵侯) 곽정 28위 광엄후(廣嚴侯) 소구 29위 하양후(河陽侯) 진연 30위 요이후(蓼夷侯) 공취 |
31위 비어후(費圉侯)
진하 32위 평도후 패가 33위 무강장후 장불식 34위 여려 애후 주조 35위 대정후 대야 36위 세제후 여(박) 37위 해양제신후 요무여 38위 망후 이소[3] 39위 유구제후 융사 40위 척구의후 당려 |
41위 동무정후 곽몽 41위 고원제후 병청 42위 악성절후 정례 43위 선곡제후 정의 44위 위기장후 주정 45위 창무정신후 선녕 46위 강양제후 화무해 47위 곡역헌후 진평 48위 동모경후 유쇠 48위 균장후 장평 49위 복양강후 진서 50위 의씨경후 진속 |
51위 기곡후 증하 52위 언릉장후 주비 53위 박양절후 주취 54위 평정경후(平定敬侯) 제수 55위 경불후 염택적 56위 57위 십방숙후 옹치 58위 백지정후 허온 59위 벽양후(辟陽侯) 심이기 60위 고경후(高景侯) 주가 |
61위 안평경후 악천추 62위 유문성후 장량[4] 63위 남안장후 선호 64위 평극의후 임지 65위 북평문후 장창 66위 비여경후 채인 66위 고량경후 역개 67위 안구의후 장열 68위 69위 조양제후 화기 70위 팽간후 진동 |
71위 청간후 공중 72위 강간후 류승 73위 영릉이후 여신 74위 축아효후 고읍 75위 자조정후 적 76위 ?[5] 77위 당양애후 손적 78위 영장후 위선 79위 장절후 모택 80위 기신광후 진창 |
81위 신양호후 여청 81위 극양장후 두득신 82위 고호후 진부걸 83위 양하제후 기석 84위 용경후 진서 85위 하상장후 냉이 86위 당읍안후 진영 87위 양신호후 여청 88위 영릉후 유택 89위 광아의후 임오 90위 척어후 계필 |
91위 순경후 온개 92위 역간후 정흑 92위 고릉어후 왕주 93위 무원정후 위거 94위 오방장후 양무 95위 번장후 강첨 96위 분양(장)후 근강 97위 98위 심택제후 조장야 99위 송자혜후 허치 100위 알지절후 풍해감 |
101위 중수장후
여마동 102위 두연장후 왕예 103위 적천장후 양희 104위 열양장후 여승 105위 곡릉정후 풍계 106위 감천장후 (왕)경 107위 수창후(須昌侯) 조연 108위 장수평후 두염 109위 창어후 노경 110위 성양정후 해의 |
111위 평주공후 소섭도미 112위 토군후 선의 112위 장경후 허천 113위 기장후 황극중 114위 공장후 노파사 115위 개봉민후 도사 116위 임원견후 척새 116위 대경후 (추)팽조 117위 화성효후 공손이 118위 동양무후 장상여 119위 양의정후 영상 120위 ? [6] |
121위 평고후 유타 122위 토군후 선의 123위 급종후 공상불해 124위 고후 진조 125위 중모공후 선보성 126위 127위 덕애후 유광 128위 129위 130위 연후 적후 |
131위 신양후 난열 132위 기사강후 비혁 133위 134위 의릉후 오정 135위 도안후 유양 136위 137위 육량후 수무 |
열외 주여영무후 여택 열외 건성강후 여석지 열외 사양후 항전 열외 비위후 진하 열외 양가후 진희 열외 망후 이척 열외 회음후 한신[7] 열외 임후 장월 열외 극구후 양 열외 갱갈후 유신 열외 합양후 유중 열외 양평후 기통 열외 이후 등약 열외 패후 유비 열외 강읍후 조요 |
[1]
여기서 등급이 공의 크기로 바로 연결되면 안된다. 이미 세력을 지니고 있었거나 혈육이 공을 이루었으나 초한쟁패기 시절에 죽어버려 같이 받은 이들은 공에 비하여 등급이 높다. 전자의 경우에는 산상왕 장이의 아들인 장오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역이기의 동생이자 맹장이었던 역상이 대표적이다.[8]
[2]
제후보다 높은 이성왕으로 봉해졌던 이들은 표에서 제외되어 있고, 공은 크지만 스스로 몸을 낮춘 이들도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한신으로 군공으로 따지면 가장 높은 순위였겠지만 분봉 당시 이성왕(제왕 -> 초왕)의 신분이었던지라 열외되었고(이후
회음후로 강등됨),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장량으로 유방이 가장 많은 식읍을 주려고 했지만 장량 본인이 사양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참조.
[3]
이척의 아들.사기에서는 이소라고되어있지만 한서에서는 아버지 이척의 이름이 적혀있다.
[4]
오타가 아니라 정말로
한삼걸 중 한 명인 장량이다. 왜 장량이 겨우 62위에 그쳤는지는
해당항목 참조
[5]
한서 기준 오제후 양성연
[6]
한서 기준 대후 이창
[7]
공신 책봉 당시에는 이성왕(제왕 -> 초왕)의 신분이라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회음후로 강등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