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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9:53:29

중일전쟁/오해와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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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장제스의 개혁3. 중국군의 분투와 악조건4. 오해와 반박
4.1. 장제스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고도 잘 싸우지 않았다?
4.1.1. 미국이 원조에 소홀했던 사정
4.2. 스틸웰은 유능한데 중국군이 무능해서 패한 것이다?4.3. 중국군은 일본군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다?4.4. 중국군은 오합지졸이고 국민당은 전쟁에 도움이 된 것이 없다?4.5. 중국군은 반자이 어택보다 더 개막장 닥돌 전술을 사용했다?4.6. 중국군의 전사자는 일본군의 몇십 배, 몇백 배 된다?4.7. 항일은 공산당 중심이었다?
4.7.1. 반론
4.8. 중국군은 청룡도를 사용했다?
5. 관련 문서

1. 개요

중일전쟁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장제스 중국국민당의 무능함이 과장되어 '잔인한 일본군과 무능한 장제스 사이의 지루한 소모전'이란 표현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관제 혁명사관과 중공 정권 공고화 이후 마오쩌둥의 성공에 과도하게 주목한 일본, 서구의 낡은 사관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여 형성된 것이다.

최종 승리자인 중국 공산당의 시각에서 바라본 기존의 혹평 일색은 21세기에 들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장제스의 중일전쟁 초기 공훈을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장제스는 2차 상해 사변 등에서 무능한 면모를 드러냈지만 전쟁 승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국민혁명군 장교 출신으로 국공내전 이후 미국에 와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중국사 교수를 지낸 레이 황(黄仁宇) 컬럼비아대 교수도 장제스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청조 멸망 이후 반식민지 상태에 군벌 시대로 접어든 농업 국가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한 점, 화폐 개혁으로 인한 은본위제 폐지 등을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재 중국도 과거의 마오쩌둥 찬양 일색이던 시절과는 달리 중국이 일본에 승리한 것에 대한 장제스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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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제스의 개혁

당시 중국군( 국민혁명군, 홍군, 군벌 모두)이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다. 무기는 고사하고 군복도 통일하지 못한 오합지졸에 상시적/잠재적 마적떼 수백만 명이 우글거렸다. 병기 숙련도와 참모진의 능력, 규율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순전히 장제스와 중화민국 정부만의 잘못으로 매도할 순 없다.[1]

또한, 장제스가 이런 상황에서 앉아서 논 것도 아니다. 열강들의 지원을 받으며 막스 바우어,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바실리 블류헤르, 바실리 추이코프, 안드레이 블라소프 등의 군사고문들을 초빙하고 경제 건설과 공업화, 농업정책, 외교 교섭을 통해서 어떻게든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대규모 프로젝트 역시 진행중이었는데, 1938년까지 이어지는 독일식 정예 중앙군 양성 프로젝트와 1942년까지의 중공업 개발을 추진 중이었다. 1927년 국민혁명부터 1937년 중일전쟁까지의 10년 동안 국민정부는 최소한 난징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직할령에선 꽤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이른바 '황금 10년(黃金十年)'.[2][3]

하지만 중국이 제구실을 하기 전에 일본군이 칼 들고 몰려왔고 그나마 발전시킨 중국 동부 해안을 먹어치우면서 중국의 국력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3. 중국군의 분투와 악조건

그나마 기존에 꾸린 병력으로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군은 강렬한 항일 의지를 가지고 일본군에 제법 타격을 주었다. 장쉐량 만주 화북의 지배권을 놓고 우물쭈물하다 만주를 통째로 날려먹은 전례에 비하면 엄청나게 양반이다. 전쟁 중 중국군은 거의 매 전투마다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고 폄하하는 의견들도 있지만, 그 전의 중국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지도 못할 정도로 조직력이 떨어지는 군대였다. 좀 두들기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군대가 국민당의 노력과 항일 의지 덕분에 녹아내릴 때까지 버티고 싸우는 군대 수준으로 올라간 것이다. 변변찮은 저항 한번 안하고 적을 보자마자 적전도주 하는 것과, 전투중인 부대가 섬멸, 전멸당한다 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피해를 적에게 입히고, 그로 말미암아 후속 부대의 승리, 더 나아가 전쟁을 승리하게 만드는 것은 엄연히 군대의 수준을 가르는 명백한 차이다.

물론 숫자만 많지 기량이 엉망진창인 국민당군의 분투는 한계가 있었으며, 그나마 방어선을 꾸리면 자신의 기반에 집착하려는 군벌들이 적전도주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베이핑 톈진의 손실만 해도 베이핑의 지배자인 쑹저위안이 베이핑 지배권에 집착하다가 망한 거고 이후 화북 지역의 싸움에서도 군벌들이 심심하면 적전도주를 하는 바람에 방어선이 무너져 잘 싸우던 전황을 말아먹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에 분개한 장제스가 적전도주를 일삼은 군벌 30여 명을 불러 모조리 총살해 버리기도 했다.

일본군과 싸우라고 팔로군에 넣어준 중국공산당은 평형관과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4] 대개는 같은 국민당 유격대를 공격하는 등 세력확장에만 몰두하여 4만 5천명[5]에 불과하던 세력을 전쟁 말에는 120만으로 불렸다.[6]

4. 오해와 반박

4.1. 장제스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고도 잘 싸우지 않았다?

최소한의 지원으로 중국을 최대한 이용하려 한 미국은 이러한 모순적인 정책을 결합시켜 오히려 역효과를 키웠다. 스틸웰은 길을 트기 위해 미얀마에 거의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그곳에 배치된 국민당군 사단에 재군비 및 훈련 프로그램을 집중시키면서, 정작 중국 본토에 들어온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장제스의 군대에는 거의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장제스의 군대가 아무리 좋은 무기를 받아도 영양 부족으로 병사들의 체력이 너무 약해 싸울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미군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이 처음부터 일본 열도 등을 폭격함으로써 일본의 대응을 유발한 면도 있기 때문에 미군의 항공대 기지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중국군에 떠넘기는 것은 불공평했다. 그리고 루스벨트 B-29 폭격기들을 일본 본토 폭격에서 빼내어 중국 지상군을 돕고 싶어하지 않았다. 11월과 12월 B-29 슈퍼 포트리스가 우한에 있는 일본군 보급고를 초토화시킨 것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 앤서니 비버의 대륙타통작전 당시 미국의 태도에 대한 평가

중일전쟁 당시 미국이 중국에게 지원해 준 물자는 이 정도다.[7]

무기대여법을 통해 중국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물자라곤 고작 16억 달러 정도였다. 동기간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313억 달러[8], 소련은 110억 달러 상당의 물자를 지원받았으며, 망명 정부이자 규모 면에서 중국군의 상대도 안 됐던 자유 프랑스는 중국의 딱 갑절인 32억 달러 상당의 지원을 받았다. 장제스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오히려 국공내전 기간동안 국제사회에서 받은 게 40억 ~ 60억 달러 어치였으니 중일전쟁 때에 비하면 화수분급 지원인 셈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에 대해 이런 악의적인 선전을 했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관점이 상당한 동의를 얻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거의 받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기사회생한 영국과 소련에 비하면 중국이 받은 지원은 그야말로 병아리 모이급에 그나마도 제대로 분배도 안 됐다.

사실 미국 또한 중국에게 지원이 더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해안선을 전부 점령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버마까지 함락시키면서 물자를 수송해줄 루트 자체가 없었다.[9]

중국군은 중일전쟁 초기에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원래도 중국은 가난한 농업국가였는데, 그나마 공업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업지대가 동부 해안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에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일본군의 수중에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만주 장쉐량의 병크로 일본에 내준 거야 그렇다 쳐도 황금 10년 동안 직할령에 기껏 가꾸어 놓은 공업지대를 전쟁 발발 6개월도 안 돼서 죄다 날려먹었으니... 국민당 정부도 눈 뜨고 공장을 적에게 순순히 넘겨줄 바보는 절대로 아니라서 공장 및 기계의 철수 및 소개 전략을 시행했으나, 자본가들의 반발로 인해 독소전쟁 발발 즉시 죄다 뜯어서 우랄 산맥 너머로 옮겨버린 소련과는 대조적으로 얼마 건지지도 못했다. 일례로 상하이 전투 당시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에 배치했던 공업력의 2.75%만을 건졌는데 그나마도 군수 공업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핵심 공업력은 다 날아간 상태였다. 더군다나 주요 항구들이 다 점령당하면서 물자 수입의 길까지 거의 끊겼고, 1938년 10월, 국민당 정부가 육성한 마지막 남은 대규모 군수공업기지인 우한과 물자 수입의 80%를 담당하던 광저우마저 함락당할 당시에 중국은 관세 수입의 91%, 공업의 94%, 전력의 96%, 방직 공업의 75%를 상실해버렸다. 이제 중국에게 남은 물자 수입통로들이라곤 오로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는 하노이 루트와 영국령 버마를 통한 버마 루트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물자를 제공하는 것은 소련, 나치 독일과 유럽 식민지 뿐이었다. 일본은 하이난 섬을 점령하고 영국, 프랑스를 압박하여 하노이 루트와 버마 루트를 끊으려 했지만 일본의 무리한 확장에 열받은 영불은 오히려 일본의 눈치를 봐서 두었던 무기 거래 제한을 풀어버렸다.

하지만 중국에게 남은 영토는 임시수도 충칭을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 뿐이었다. 충칭이 직할시로 승격할 정도의 대도시이긴 하나, 생산력으로 따졌을 때는 동부의 대도시들에게 밀리는 2선급 도시였기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던 것은 여전했다. 거기에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충칭의 인구만 3배 이상으로 늘어난 시점이라 기근까지 겹쳤다.

흔히 미국이 지원한 그나마 있는 무기들마저 장제스 직계군에게 흘러갔다거나 장제스가 그걸 안 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무기들은 실제로는 조지프 스틸웰이 지휘하는 중국군에게 흘러갔으며, 심지어 스틸웰은 미 공군[10]에게도 이 물자들을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다. 장제스조차 손수 굴릴 무기가 없는 마당에 무기를 군벌들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 이 중에서 장제스가 받은 무기는 곡사포 60문과 바주카포 506문, 대공포 몇 대가 고작으로, 그나마도 대륙타통작전으로 난리가 난 상황에서 스틸웰이 마지못해 양도한 것이다.

중국으로 지원되었다는 물자의 대부분은 중국 주둔 미 공군용 물자이며, 나머지 물량들조차 인도 및 버마 전선으로 파견된 중국군에게 거의 다 전용되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국민당군을 탈탈 터는 동안에도 장제스는 스틸웰의 무리한 요구로 인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최정예 부대인 X군과 Y군을 버마 전선에다 돌리고 있었다. 그마저도 통제권은 스틸웰에게 있었고, 연합군은 그들을 그저 소모품 취급할 뿐이었다. 장제스 군대에게 스튜어트가 충분했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장제스가 2차 대전 때 받은 스튜어트 전차는 기껏해야 100대 정도였고, 그나마도 위에도 적혀 있듯이 버마 주둔군에게 다 몰려 있었다.

게다가 스튜어트가 경전차라 한들 분명히 전차다.[11] 그걸 1940년대 수송기로 히말라야를 넘어 수송할 수 없다. 전차 같은 중장비의 수송은 해로 아니면 육로로만 가능하고, 해로는 개전 이래 쭈욱, 육로는 1942년 버마를 빼앗긴 이후 차단되어 있었다. 전차를 부품으로 분해해서 현지 재조립할 생각이 아닌 이상 중국에게 전차 등 중장비를 지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1944년부터는 공로 완성 및 버마 탈환으로 가능해지긴 하는데, 이때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로 유럽 전선에서 전차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다. 다른 경장비류나 일반 물자라면 지원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차 등 중장비는 마땅히 줄 방법이 없었다.

장제스나 플라잉 타이거스 지휘관 클레어 셰놀트 준장 등의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조지프 스틸웰 때문에 지원이 형편없었다는 증언에 대해 국공내전의 사례를 들면서 부정하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스틸웰의 성향이 어쨌거니를 떠나서 중국은 연합국에서 찬밥 대우였고, 위에 수치로 나와 있지만 미국은 중일전쟁 때 중국에게 정말로 물자를 얼마 안 줬다. 랜드리스에 중국 몫으로 책정된 물자는 고작 2%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스틸웰이 쟁여놓질 않나, 영국군이 중간에서 착복하질 않나... 오히려 중일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새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해 줬다.

4.1.1. 미국이 원조에 소홀했던 사정

우선 미국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과 싸우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일본군과도 전세계의 모든 육지보다도 더 거대한 태평양의 서쪽 절반을 무대로 하여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원조에는 소홀했다.

그리고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규모 물자를 보내주고 싶어도 루트 상의 문제로 인해 보내주지 못한 것도 있었다. 영국이야 영국 해군만으로도 제해권이 장악이 가능한 대서양만 건너면 되고[12], 소련은 북대서양 항로를 통해 무르만스크로 가는 루트와 북태평양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루트[13], 베링 해협을 지나는 루트, 페르시아 만( 이란에서 아제르바이잔을 통한 루트)으로 건네주는 루트 등 많았는데, 중국에는 물자를 보내줄만 한 루트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에 물자를 보내주기 위해선 미국의 수송선단이 서태평양까지 와야 하는데 서태평양은 일본 해군이 이미 장악하고 있었고, 여기에 수송선단을 보내면 어떻게 될지는 말 할 필요도 없다. 또한 중국의 해안도시와 대만은 모두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선단을 보내도 하역할 만한 항구도 없었다. 이란에 물자를 하역한 후 이란과 소련 땅 중앙아시아, 신장 성, 간쑤 성을 거쳐 물자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지만 하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육로로 빙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따라서 유일한 루트는 대서양을 건너고 인도양을 가로질러 영국령 인도에 물자를 하역한 후 거기서 육로를 통해 중국까지 보내는 방법 뿐이었는데, 인도양도 일본군의 공습을 받는데다가 독일 잠수함의 활동지였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14] 거기다 버마를 통한 육로 수송도 남방작전으로 1942년에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하면서 차단되었다. 그 이후로 미국이 중국에게 물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인도에 물자를 보낸 다음 수송기로 히말라야산맥을 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일부 항공기는 추락한 비행기들의 잔해를 따라서 항로를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운반할 수 있는 물자의 양도 적고 항공기용 연료의 경우 운반하는 수송기가 운반 중 사용하는 양이 심하면 50%에 육박하는 등 낭비도 심했다. 물론 버마 루트가 버마 탈환 이후 재개통되긴 했는데 그땐 이미 전쟁 끝나가던 시점인지라...

게다가 미국은 중국에 대한 지원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중국의 능력 자체를 의심했기 때문에 중국이 원조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도 난색을 표했고 중국에 이미 할당된 물자를 영국이 횡령하는 문제도 모른 척 하는 등[15] 매우 차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최대 지원국은 미국이 아닌 소련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해당 기사에서도 소련이 대인배라서가 아니라 일본 견제용으로 지원했다고 원인을 밝힌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면 소련은 독일과 일본의 협동 공격을 받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16]

4.2. 스틸웰은 유능한데 중국군이 무능해서 패한 것이다?

한국에서 스틸웰은 명장이고 무능한 중국군이 스틸웰의 지휘를 따르지 못해 진 것이며 장제스는 오만하여 미국인 고문들의 현명한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꽤 퍼져 있지만 이 또한 스틸웰의 일방적 주장을 답습한 오류이다.

스틸웰은 분명 당시 서양에는 드문 친중론자였다. 상하이 국제조계에서 한평생을 머문 서양인들조차 중국어를 공부하지 않던 시대에 태어나 스스로 관화를 배우고 시장 한바닥에서 하층민들과 어울리는 경험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었다. 게다가 대공황 시기에 장성까지 진급할 정도 인물인만큼 중국에 파견되기에는 무리가 없엇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중국과 미국을 정치군인이 아니라 야전사령관이 되기를 원했고, 그는 "전(全) 중국군의 지휘권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문제는 장제스는 소련에서 보내준 바실리 블류헤르나 독일이 보내준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같은 고문을 원했지 자기 자신이 직접 지휘하려드는 장군을 원한 게 아니었다. 이러니 둘의 사이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스틸웰은 중국군이 일본군과의 오랜 전투를 통해 터득한 지구전과 소모전에 대해선 중국인들은 용병술도 모른다고 격하하다가 정작 자신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을 데리고 버마에서 일본군과 맞섰을 때는 장제스의 충고도 무시한 졸렬한 지휘 때문에 개박살났다. 이미 영국군은 버마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다 빠지고 있었고 철수하는 인도군과 영국군, 민간인을 보호한 건 스틸웰이 그렇게 폄하하던 중국군이었다. 그래놓고 '이게 다 무능한 중국군 탓이다!'를 시전하면서 중국군 장성들을 모두 총살해 마땅하다는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정작 중국군과 같이 싸운 영국군의 슬림 중장은 중국군이 노련한 베테랑으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자신의 최정예 부대를 말아먹은 스틸웰에 대해서 장제스는 엄청난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플라잉 타이거스의 셰놀트 준장 역시 스틸웰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지휘관이며 만약 그가 미군이 아니라 중국군 소속이었다면 진작에 총살시켰을 것이라며 뼈저리게 혐오했다.

그리고 요구는 많아서 버마 전투에서 중국군 3개군을 뺐고 다시 30만 대군을 버마 탈환을 위해 뺐고도 중국이 무능하다는 말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스틸웰은 300개 사단, 400만에 달하는 중국군을 90개 사단으로 감축하고 소수 정예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러기 위한 물자는 하나도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장제스가 이 상황에서 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미국은 장제스의 지상군 파병 요청도 지원 확대 요청도 다 씹었다. 미국은 태평양과는 달리 중국에선 그저 일본군을 묶어두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예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바랬던 장제스는 속이 터졌다. 장제스는 미국이 주는 것도 없이 내정간섭에 월권을 하려 든다고 이를 갈았다. 특히 장제스는 여러 번 반란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스틸웰이 자신의 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군대를 축소하려 드는 것을 아예 미국인들의 반란 음모 정도로 받아들였다. 허나 스틸웰은 이런 중국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고 "중국인들이 하는 것도 없이 요구만 많다"고 비아냥거렸다.

스틸웰은 바이충시를 비롯한 일부를 빼곤 장제스 이하 대부분의 중국 장군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는 상하이 전투에서 삽질을 벌이기는 했어도 그 이후엔 상하이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화북 등지에서 향상된 철수와 유격전, 소모전을 병행했고 일본이 우한을 점령한 이후 공세종말점에 다다르자 난닝, 난창, 우한 등지에서 여러차례 반격을 감행해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특히 진주만 직후의 3차 창사 방어전에서는 영국까지도 진주만 이후 연합국이 드디어 승리를 거뒀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스틸웰은 장제스의 지구전이나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 유도 전략을 비웃으며 화력을 모아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까는 행보를 보였고 나중엔 " 이게 다 중국군 때문이다" 시전으로 일관했다. 스틸웰이 무능하다고 까댄 두위밍 장군만 해도 일본군 상대로 여러번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스틸웰은 그를 매우 폄하하여 한국에도 그가 무능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버마 전투도 무능한 중국군 때문에 스틸웰이 졌다고 스틸웰의 일방적 주장만 알려져 있는데 실상을 까보면 다르다. 이미 버마 포기를 결정한 영국군이 지독할 정도로 비협조적으로 굴며 중국군 뒤통수를 치고 달아나 버렸으며, 스틸웰 본인이 "일본군은 전차도 대포도 없다"고 무작정 깔보고 무장도 제대로 안된 중국군을 무리하게 내세우는 졸렬한 지휘를 한 탓이었다. 정작 쑨리런 장군이 지휘하던 중국군은 영국군 7,000명과 500명의 민간인, 17 인도사단을 구출하는 성공적인 전과를 올렸고 스틸웰 본인도 쑨리런을 동양의 에르빈 롬멜이라고 칭찬했다. 그러곤 동양의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는 창더 전투 직전엔 무리한 버마 탈환을 위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 30만 명을 빼돌려놓곤 병력 파견 조건으로 약속했던 물자도 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창더 전투에서 중국군이 고전하자 중국군은 무능하다고 비웃었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한 건 둘째치고, 상덕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긴 했지만 치열한 저항과 축차적인 소모전으로 일본군에 적잖은 타격을 줬음에도 말이다.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중장은 이 타격에 작전을 조기 종결하고 퇴각했다.)

이치고 작전, 즉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질 무렵에도 멍청한 짓은 이어졌다. 장제스가 조만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자 스틸웰은 "형편없는 일본군 따위가 무슨 공세를 취하겠냐"고 그의 말을 싹 다 무시하고 장제스의 유일한 전략예비대인 Y군을 장제스를 협박하여 빼앗아 버마로 보냈다. 본국 정부에도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내놓지 않는다고 모함했는데, 말 그대로 루스벨트와 장제스를 최대한 이간질한 셈이다. 루스벨트는 스틸웰의 말을 듣고 당연히 장제스에게 "X군을 내놓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했고 장제스는 피토하는 심정으로 최정예 예비대를 내놓아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치고 작전이 터져서 일본군 50만명이 뤄양, 난닝, 창사, 헝양을 잇달아 점령했다. 중국군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미친듯이 싸워 일본군에게 무려 10만명의 피해를 안겨줘서 일본군이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중국군이 아니라 미군인가 하고 당황할 정도였지만 결국 중국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화중을 모두 잃고 중요한 곡창지대들을 상실했다. 스틸웰은 이런 상황에서도 장제스의 지원 요청을 모두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이 중국군을 지휘해야 한다고 떠들었으며 일기에는 건방진 장제스는 골탕을 좀 먹어야 한다고 고소해하는 행태를 보였다. 일찍이 그는 장제스 암살을 기도한 바도 있었다.

결국 장제스는 폭발하여 루스벨트에게 스틸웰을 자를 것을 요구했다. 얼마나 장제스가 초강수를 뒀는지 "스틸웰을 자르지 않을 거면 걍 관계 끊자. 너네가 준 물자 다 가져가라!"라고 루스벨트에게 직통으로 통첩을 날렸을 정도였다. 미국 대선을 앞선 시점이었기에, 루스벨트는 여기에 굴복하여 결국 스틸웰은 1944년 10월 19일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중국에 부임한 웨드마이어가 한 첫번째 일이 허물어지는 중국군 방어선을 보강하기위해 스틸웰이 살윈강에 묶어둔 중국군 2개 사단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낸 일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동맹인 중국을 깔보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군도 깔봤는데 상기했듯이 창더 전투, 이치고 작전에서 일본군 따위가 무슨 반격을 하냐고 계속 방심하다가 중국군만 엿먹였으며 1942년 버마 방어전을 맡았을 때도 일본군을 얕보다가 대패하여 100명의 일행과 함께 걸어서 버마를 탈출했다. 그리고 1944년의 버마 탈환전 때도 장제스가 버마의 일본군이 아직 녹록지 않다고 경고해줬음에도 장제스의 모든 조언을 간섭이자 멍청한 소리로 비난하며 씹고 X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다 자신이 주장한 것보다 세배나 되는 일본군과 맞닥뜨려 또 고생했다. 스틸웰은 버마 전체에 일본군 5개 사단 밖에 없으며 자신이 공격하는 버마 북부엔 1개 사단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버마 전역에만 8개 사단이 있었고 스틸웰이 버마 북부에서 맞닥뜨린 15군은 3개 사단 병력이었다. 거기에 2개 사단이 더 오는 중이었다.

그의 버마 탈환 계획에서도 영국, 미국, 중국이 모두 불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 악을 써서 관철시킨 것이고 영국과 미국이 반대하자 스틸웰은 미국, 영국의 협조 없이 중국군만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한 장제스를 비난했고 보다 못한 셰놀트가 스틸웰이 설욕에 눈이 멀어 사리분별을 못 한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결국 그의 버마 탈환전은 무능한 하나야 타다시, 가와베 마사카즈등의 자폭으로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무타구치 렌야의 전설적인 임팔 작전과 맞물렸고 결국 버마 탈환에 관심이 없던 영국까지 가세하여 랑군까지 밀어버렸다.

물론 처음에는 그가 아닌, 대군을 운용해본 휴 드럼이 스틸웰의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으나 그는 미국이 중국에 지원을 해줄 생각이 없음을 알고 중국에 대대적인 지원을 해준다는 조건을 붙여서 짤렸다. 그 대신 중국어 실력 때문에 스틸웰이 임명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거기에 정치적 능력은 매우 떨어졌다. 일례로 그는 중국에 부임한 이후 다짜고짜 장제스 휘하 직계군의 지휘권을 요구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된다고 판단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중국군의 고위 미국인 장교의 그의 업무는 분명히 충칭과 워싱턴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고 장제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편견으로 중일관계를 멋대로 재단했으며 정말로 필요한 지원들은 자기 생각에 필요없단 이유로 끊어버리고[17] 장제스의 비현실적인 요구는 장제스를 망신주기 위해서 가감없이 워싱턴에 전달하면서 중국인들은 너무 멍청하여 우리가 이걸 다 들어주리라고 생각한다는 개인적 소견을 첨부하기도 했다. 장제스의 북벌 시기에 중국에 왔던 소련 고문들이나 중일전쟁 개전 전후의 나치 고문들의 세련된 행보에 비하면 그의 행동은 그가 과연 동맹국 무관인지도 의심스럽다고 할 만 하다. 다른 미국인 참모인 클레어 셰놀트의 행보와 비교해도 스틸웰의 정치적 막장성은 두드러진다.

버마 전선 이후에 장제스와 투닥대다가 미 정부에 칭얼대자, 미 정부에서 스틸웰에게만 비밀 전문으로 '당신이 중국군 통수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라는 내용을 전달했는데 경솔하게도 스틸웰은 그걸 갖다가 장제스 방으로 쳐들어가서 장제스 얼굴에 들이미는 짓을 했다. 이러한 행각과 대륙타통작전에서의 자폭이 겹치면서 결국 장제스의 중국과 스틸웰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강력한 반발로 미 정부는 중국이 등돌릴까봐 스틸웰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스틸웰은 마지막까지 사고를 치니 자신이 잘렸다는 사실에 빡친 나머지 후임인 웨드마이어 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인도로 떠나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웨드마이어는 스틸웰의 이러한 행태를 회고록에서 비판했다.

장제스와 중국인들만 스틸웰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스틸웰은 버마 탈환전 중에서는 영국군의 전과들을 자신의 전과인 것처럼 발표하고 봤다가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18]의 격노를 사기도 했으며 버마 탈환 준비 과정에서도 무리한 요구를 해서 런던과 워싱턴의 나쁜 시선을 동시에 받았다. 게다가 같은 미국인 셰놀트는 스틸웰에 대해 아예 이를 갈았고 스틸웰 휘하에 배속된 윙게이트 병단을 본떠 창설된 메릴 부대도 스틸웰의 지휘권 행사에 대해서 크게 반발하곤 했다.

4.3. 중국군은 일본군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다?

만주사변, 열하사변 시기까지만 놓고 말한다면 사실이지만, 중일전쟁 때는 그렇지 않았다.

중일전쟁 초기 중국군의 최대 문제는 군벌들의 이기심이었다. 베이핑, 톈진의 중국군이 일본군을 압도하는데도 황당하게 패배한 것도 베이핑의 지배자였던 쑹저위안이 자신의 지배권이 약화될까봐 거의 직무태만에 가까운 행보를 일삼았고, 장제스가 즉각적으로 지원해준 중앙군조차도 베이핑에 오지 못하게 막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몰려오는데도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고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쑹저위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세가 일본군 쪽으로 완전히 기운 후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1년의 만주사변도 장쉐량이 일본군에게 빌미가 되지 않기 위해 반격하지 말것을 명령[19], 1만 5천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털린 탓이었다.

이후 화북 지역의 전투에서도 지역 군벌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탈영, 적전도주를 일삼았고 옌시산, 리쭝런 등은 꽤 그럴듯한 방어선을 갖추어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하다가 타 군벌들의 도주에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화북을 황당하게 다 내주어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평형관, 타이얼좡에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이후 광저우 전투에서도 광둥 군벌들이 직무유기를 일삼고 멋대로 철수해서 광저우가 날아갔고, 결국 폭발한 장제스는 도주를 일삼던 군벌 30여명을 소환하여 모조리 총살했다. 그럼에도 광둥 군벌들의 위세는 너무 커서 화북 군벌들과는 다르게 목을 따진 못했다.

충칭으로 천도한 후에도 군벌의 이반이 문제가 되어서, 장제스는 전쟁 중에도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쓰촨 군벌들과 지역 행정권을 둘러싸고 쓸데없는 정치적 다툼이나 벌여야 했다. 원래 군벌 자체가 장제스와 심하면 적, 우호적이라도 동급 위치를 차지했던 사람들이라 서로 동지로 보는 의식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다. 반장전쟁처럼 장제스의 자리를 노리고 대놓고 장제스를 거슬러 정면 대결하기도 했고, 산서성 군벌 옌시산은 이런 소모전과 공산당의 계속되는 통수에 결국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영역에 틀어박혀 단독으로 베이핑의 일본군 사령부와 평화 협상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임시 수도인 충칭을 중심으로 쓰촨성과 윈난성 지역의 지방 군벌들과 장제스의 알력 다툼은 극심했다. 이는 중일전쟁 이후에도 이어지며 장제스의 중앙 정부와 협력하지 못하고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집중하다가 깔끔하게 다 같이 망해버렸다.

그러나 왕징웨이가 일본의 편에 붙었을 때 왕징웨이를 따라서 일본에 붙은 군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일본의 회유 시도도 있었지만, 당시 일제가 중국에서 잔악한 짓을 벌여 중화민족주의와 반일사상이 팽배해 다들 실패했고[20] 심지어 우페이푸는 "일본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죽였다."라는 설까지 돌 정도였다.[21] 장제스의 장자만 들어도 치를 떨던 룽윈이나 장파쿠이 같은 반장 군벌들조차도 친일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고, 기껏해야 한푸쥐의 적전도주나 옌시산이 궁지에 몰리자 단독강화를 한 정도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동포에게 총부리를 돌린 자들은 없고, 중일전쟁을 영도하던 장제스의 권위를 위협한 자들도 전혀 없었다.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리쭝런, 바이충시도 장제스의 명령에 절대복종, 타이얼좡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항일이라는 대의 아래에 군벌들은 대체로 협조적이었다. 누구도 장제스를 일본 제국보다 우선 순위로 제거하려는 미친 짓은 저지르지 않았고, 중국군은 일부 적전도주(그나마도 전쟁 초반에 몰려 있다.)를 제외하면 내분이 없었다. 굳이 예외를 따지자면 국민당과 공산당이 팀킬을 일삼던 환남사변 정도.

오히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중국 침략은 그 이전만 하더라도 공산당을 비롯한 외부의 적도 많으며, 국민당 내에서도 계속 장제스의 권위와 지도력에 도전하던 기타 군벌, 서산회의파 같은 당 내 반장세력 모두 고개 숙이고 형식적으로나마 국민당과 장제스의 절대적인 권위와 국가지도자로서 지위를 인정하며 항일에 협조하게 만드는 역설적으로 중국 내부 권력 안정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군벌 출신 한간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치셰위안 같이 1930년대 기점으론 이미 끝발도 영향력도 거의 안 남았던 쩌리들 밖에 없었고, 옌시산, 바이충시, 리쭝런, 펑위샹, 장파쿠이 같이 1930년대까지 독자적 군사력을 유지하며 장제스의 권위에 공공연하게 도전하고 군사반란까지 일으키던 메이저 군벌들은 한 명도 일본에 붙지 않고 장제스에게 충성맹세를 하며 표면적으로나마 국민당이 전쟁 이전엔 한 번도 이루어 본 적이 없는 수준의 내부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22] 물론 이런 항일의 명분 아래 일시적으로 표면적으로 이룬 정치적 통합이 실질적인 장제스의 절대적인 국가통제력 확장으로 직결되진 못해서 중일전쟁 기간 도중에도 군벌과의 관계 조율 실패, 내부 반목으로 인해 군사적 실패는 숱하게 있었지만, 아예 대놓고 장제스의 난징 정부에 도전하는 또다른 국민당 대립 정부가 하루가 멀다고 광저우, 우한 등지에 생겨나던 전쟁 이전에 비하면 국민당과 중국의 내부 통합은 엄청난 약진을 이룬 것이었다.

당장 본격적인 중일전쟁 격화 이전에는 중국 내 친일 세력의 필두이자 관동군과 일본의 시다바리라 욕먹었던 장쭤린& 장쉐량 부자만 하더라도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 자체에 눈독을 들이자 일본과 손절하려다가 결국 장쭤린은 황고둔 사건이란 폭거로 제거당했고, 이에 아들 장쉐량은 동북역치로 화답했다. 중국 내 친일 세력의 대표주자였던 봉천군벌만 하더라도 일본의 의도가 그들을 통한 이득보기 정도가 아니라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자 이를 거부하고 명목상으로나마 국민당에게 합류하게 된 건 전간기 중국이 전근대 왕조교체기에 비교할 만한 춘추전국시대에 빠진 건 사실이었지만, 본격적인 외세의 침략에 적극 가담하는 건 거부할만큼의 민족주의적 공감대는 여전히 존재했다는 걸 반증한다. 단순히 중국이 분열된 것만 보고 침략해들어간 일본은 결국 중국의 분열상을 통해 이득을 보기는 커녕 오히려 역설적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중국이 내부적으로 더 단결하게 만드는 거대한 역효과만 초래했다. 오히려 장제스가 염원했던 유일무일하고 언터쳐블한 국민당과 중국의 지도자로서 지위와 권위는 일본이 전쟁을 통해 만들어주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영영 반복되지 않았다.

장제스의 중앙군의 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자 무능한 군벌군의 능력을 중국군의 무능으로 연결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1939년 대공세나 창사 공방전, 창더 전투 등 중일전쟁 대부분이 군벌군이 주력이었고, 그들의 전과 역시 우수하다. 물론 주요 전투의 경우 그때마다 장제스가 중앙군을 파견해 보조하긴 했다.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 편이나 한국 웹상에서 떠도는, 장제스가 직속군을 후방에 놀려두며 군벌군, 공산군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반대로 전쟁 초기에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자신의 직속 정예부대인 5군과 6군 30만 대군을 전선에 투입했고, 오송 크리크 공방전이나 타이얼좡 전투에서도 직계군이 맹활약하였다. 요약하자면, 장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하지만 스틸웰이 장제스 직속군을 죄다 미얀마로 보내 말아먹는 바람에 전쟁 후반에 정제스 직속군은 상대적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장제스 직속 군대 10만 명이 1942년 스틸웰의 무능 때문에 버마에서 전멸당하는 사건이나 전략 예비대인 X군, Y군이 버마 전선으로 보내지지만 않았으면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의 향방이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장제스의 반격 작전은 빠르면 43년 말, 늦어도 44년 정도에는 실행될 예정이었는데, 병력 여유가 생기면 스틸웰이 훼방을 놓는 통에 45년 말로 미뤄졌고 끝내 시행되지도 못했다. 또한 중국군 공세 작전의 실패도 중국의 재공세를 늦추는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에서도 기존의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식 사관을 탈피하여 중일전쟁 중에 일본군에 맞선 장제스의 노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4.4. 중국군은 오합지졸이고 국민당은 전쟁에 도움이 된 것이 없다?

전쟁 중 중국군 장교단의 질은 군사교육의 열악함으로 인해 상당히 낮아서, 장제스가 군단장급 장군들에게 대놓고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지 너희들 능력이 그 자리에 어울려서 앉은 것이 아니야! 군단장이라는 네놈들의 실제 실력은 일본군의 대대장급도 과분해!"라고 까댈 정도였다. 이는 중국군 80만 대군이 상하이에서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일본군에게 자칫하면 포위 섬멸당할 뻔 했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다만]

군의 기강도 심히 개판이어서 주둔 지역 민간인들의 식량이나 재산을 강제로 약탈, 강간하는 등의 범죄가 들끓었고, 게다가 징병을 위해 마을을 공격(!)하는 사태도 종종 벌어졌다. 이러한 탓에 각 마을 주민들은 국민당군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고 자경단을 결성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중국의 이러한 전과는 여러 단락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당시 중국이 사분오열된 전근대적 농업국가였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보다 베트콩이 더 많이 죽었다고 해서 베트남 전쟁을 실질적으로 미국이 이긴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중국군의 기강과 사기, 훈련도, 무장도 빈약하고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제대로 된 중앙정부라고 할 것도 없는 중국에서 양질의 군사적 엘리트를 양성하고 최신 무기를 수입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국민혁명으로 중국이 형식적으로 통일된 이후 장제스의 공업화 정책 및 군 현대화 사업 덕분에 (과거에 비해서는) 강력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것으로도 커버해줄 수 없는 문제라면 똥별들의 부패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다는 것 정도이다.

게다가 징병 문제도 절박했던 당시 중국의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중국 서부의 농민들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은 안타깝고 잔인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 했다간 중국은 순식간에 멸망해버렸을지도 모를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국민당과 군벌 대신에 들어올 일본이 적어도 저들보다 수탈을 안 하는 착한 이들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강압적으로나마 항전 수행을 지속할 여력을 마련하지 않았으면 진작에 초인플레이션과 인적 고갈로 중국은 일본군 총칼 앞에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징병 문제에 대한 저항은 당시 중국에 근대적 내셔널리즘이 제대로 고취되지 않은 상황임도 감안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중국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에서 외세 침략자들에 대해 광범위한 현지인들의 협력이 있었음을 주목한다. 게다가 장제스와 당시 중국 정부의 징병제가 마냥 강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장제스는 앞으로 중국을 영도할 학생들에게는 군역을 면제해 앞으로 중국을 이끌어갈 학생 엘리트들을 보호했으며, 군대에 입대하겠다고 자원한 학생들도 입대를 거절하고 모두 돌려보냈다. 40년대 말에 병역면제 학생들을 상대로 모병제가 실시된 바가 있는데, 이에 호응한 사람이 14만으로 목표인 10만을 가뿐히 넘었다.

또 장제스가 자신들의 적인 쓰촨 군벌들과의 동거를 했음에도 장제스 정권이 약해지긴 커녕 오히려 장제스의 권위가 증대되었다. 장제스에 대해 3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광서파에다 일본이나 왕징웨이가 틀림없이 장제스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 판단한 사천이나 운남 군벌들조차도 중일전쟁 시기에는 장제스에게 절대 복종했다. 반면 과거 대군벌 우페이푸, 장쭤린, 장쉐량 등은 자신들의 기반을 잃고 밀려났을 때 예외없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런데도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은 정적들 사이에서도 권위가 유지되었다. 노래처럼 불러지는 '부패하고 무능하기만 국민당 정권'이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중국군은 문제가 많긴 했지만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에 비해서는 상당히 선방한 편이며 불과 몇 년전인 만주사변, 열하사변에 비해서도 매우 발전된 모습을 보였고, 구 군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범국민적 지지를 확보한 상태였다. 장제스와 허구한 날 싸워대던 군벌들조차도 일본과의 협조를 거부하고 장제스에게 붙을 정도였다. 이런 이들은 장제스도 잘 했다며 상을 주었다. 일본이 자기네가 세운 괴뢰정권의 중국 관료들에게서조차도 환영받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뛰어났다.

또한 8년 항전의 기반은 국민당 정권이 국방건설과 근대화를 통해 쌓아온 것인데, 이 역시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다. 차후에 중일전쟁/배경 문서나 국방건설 문서가 작성되어 이에 대해 설명할 계획.

일본군/문제점에서 보듯 1937년까지만 해도 4~5%대를 유지하던 일제의 GDP대비 총군사비가 1938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20%대로 4배나 급증한다. 원본 데이터. 만일 중국이 일제와 싸우지 않고 강화했다면 일제는 남는 예산으로 군사력을 강화해서 태평양전쟁 초기에 더욱 큰 피해를 미국에게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본군 군사비에는 약간의 허점이 있다. 일본은 70%의 군비를 해군에 투입하고 남은 육군 군사비에서도 절반 이상이 관동군에게 할양될 만큼 지나파견군에 대한 지원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된 중일전쟁 이후에 해군에 대한 지원이 대폭 늘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걸 다 집어치우더라도 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장제스의 항일 업적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5. 중국군은 반자이 어택보다 더 개막장 닥돌 전술을 사용했다?

중국군이 반자이 어택급 개막장 닥돌 전술을 했다는 어떠한 문헌적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물론 중국군이 반자이 어택처럼 화력 지원 없는 보병 돌격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훗날 국공내전에서도 비뢰포 따위의 물건이 쓰이듯 당시 중국군에는 제대로 된 화력이 없는 상황이었고, 중국군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화력 지원을 해줬다. 무엇보다 최소한 초창기 미군에게 당황과 공포심이라도 유발 가능했던 태평양 전선과 달리 당시 일본군과 중국군의 능력 격차는 닥돌 정도로 해결되지 않았고, 중국도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4.6. 중국군의 전사자는 일본군의 몇십 배, 몇백 배 된다?

일단 양측의 사상자 숫자는 중국군이 3~4배 정도 더 많이 죽거나 다친게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수십, 수백배는 아니었는데 이는 자료가 잘못되어서 생긴 오해이다. 중국군은 편제와 무장이 3, 4개 사단을 합쳐야 겨우 일본군 1개 사단에 맞먹는 수준이라[24] 단순한 사단 수로 가져다 놓았을 때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확한 전력 비율을 눈치챌 수 없다.

충분한 지원을 받은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오히려 우세한 전과를 올렸는데 장제스가 아끼고 아꼈던 독일식 사단과 중앙군은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했고[25] 허망하게 무너진 것으로 알려진 난징 공방전도 독가스 살포 이전까지는 중국군이 선전했다. 우한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만 명 단위의 출혈을 강요받았고 전쟁 초반에서 평형관 전투, 태아장 전투 등 굵직한 승리가 있었다. 대륙타통작전 당시에 팡셴줴 장군이 지휘한 헝양 전투에선 일본군이 더 많이 죽었고 항복하는 팡셴줴 장군에게 일본군 지휘관들이 " 천황 폐하가 당신의 분투에 감동받으셨다"고 치하할 정도로 존중을 보여줬다. 전쟁 말기에 미군의 지원을 받았던 중국군은 윈난 성 지역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무찌르고 대륙타통작전으로 잃었던 화남 지역을 대거 탈환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기간 일본군 사망자는, 후생성 발표를 근거로 하는 40만 여명이 공식 자료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실종자로 분류된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로 재검토에 들어갔고 현재는 약 50만 명~70만면 정도로 보는게 정설인데, 이 수치에는 왕징웨이 정권 만주국, 몽강자치연합정부 등의 일본 괴뢰 정권의 전사자 숫자가 빠져있고, 왕징웨이 정권, 몽강국, 만주국의 전사자 숫자도 최소 70만은 넘을 것임이 정설이다. 추가로 중국 측의 사망자 수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데, 공식적인 군인 사망자 수는 국공 양측을 합해서 15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중국 역시 한 역사왜곡 하는 국가인지라역사왜곡국가vs역사왜곡국가 상당한 논란이 있고 최소 300만 이상 사망이라는 주장도 있다. 관련해서는 중일전쟁 문서의 관련 문단으로.

4.7. 항일은 공산당 중심이었다?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七二一方針: 七分發展、二分應付、一分抗日)
1937년 9월 26일 8로군 중대장 이상 모든 간부들을 모아서 실시한 마오쩌둥의 훈시.
"팔로군은 지역에서나 관심을 가질 법한 느슨한 방어전에나 제한적으로 나섰다. 적이 쳐들어와 싸움이 시작되기만 하면 팔로군은 산으로 뒷걸음질쳐 충돌을 피했다."
TASS 통신[26]의 특파원 블라디미로프의 회고.
"특수 지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회의가 군부대에서 수행되고 있는 유일한 작업입니다. 여름에는 여기에 농산물 비축 작업이 약간 추가됩니다."
TASS 통신
"(팔로군 부총사령관)팽덕회는 우리 편이 아니다. 백단대전(百團大戰)은 국민당을 도와 일본을 물리쳤던 것인데 이는 장개석군(軍)의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애국이 아니다. 일부 동지들은 처음에 일본이 영토를 적게 점령할수록 좋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나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일본이 영토를 많이 점령하게 해야 우리측에 유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장개석의 나라를 애국하는 꼴이 된다. 나라중에 나라 만들고 장개석, 일본, 우리(공산당) 삼자가 각축을 벌리는 ‘삼국지 형국’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리루이(李銳), 로산(廬山)회의 실록
내가 천진을 떠나 태행산 국군에 입대했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민간인들이 국군에 파는 양곡들을 태행산에 있던 팔로군들이 어떻게 방해했다는 거며, 어떻게 약탈해 간다는 사실, '멸식대(滅食隊)를 조직하여 민가를 돌아다니며 양식을 보는대로 다 착취해 버리는 것을 이들의 주목적으로 일삼는다는 것이며, 소위 구국금(救國金), 또는 장병 위로금, 등등의 명칭을 내세워서는 어려운 농민들에게 기금하여 줄 것을 강요 했다는 것, 그러다가 눈에 거슬리면 공연히 어진 백성들에게 <친일파>라는 죄명을 씌워서 죽인다는 사실, 종래에는 일본 놈들 군복을 입고 일본군으로 가장하여 우리 국군을 습격 했다는 사실, 이면으론 엉뚱한 흉계를 꾸미면서도 태연스럽게 '웃음 외교'를 한다는 사실, 우리 국군은 일선에서 일본군과 홍협군을 대항하여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놈들은 뒤에서 우리 국군의 병력을 소멸시키는 데에만 주력했다는 사실!, 나는 태행산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샅샅이 말했다.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극도로 흥분되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내 자신이 팔로군에게 총을 맞고 산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구사일생으로 어떤 친구의 보호를 받아 황하를 건너오게 되었다는 사실과 팔로군이 쏜 총알이 아직도 내 오른쪽 어깨에 박혀 있다는 등 사실을 전부 말했다.

"오늘 저는 이론을 따지려고 이 곳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회장이 평소에 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우의 말을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비방해 버렸지만, 그 학우의 말은 백퍼센트 정확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비린내나는 산역사의 것입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서, 또 민간에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서, 팔로군에게 이렇다할 말 한 마디도 없었지만, 우리 국군에겐 억울한줄 알면서도 우리들의 총지휘관을 파면시켰었던 사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하북 대평원에서도 생겨, 열렬한 반일 전우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사실이 내 머리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께서 들어 두어야 되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민국 이십칠년 말부터 팔로군들은 신하에서 하북 백성과 군인들의 마음을 감언이설로 설복시킨 다음 이십팔년 초에는 류보청, 하룡, 여정조 들과 합세하여, 왕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복마장에서 당건사를 포위하여 하북의 민간인과 군인 사존 중학교 학생들을 기습했던 것입니다. 이 때 그들에게 맞아죽은 학생들의 수만 무려 오백여명에 달했으며,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삼백여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때 잡혔었던 포로들은 전부 삼민주의 청년단원들이었기 때문에 무참하게 참살당했던 것입니다. 팔로군들은 이 기습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하여 평한로 사방에 있는 하북 지방의 군민들을 추격하는 한편, 형대, 사하, 자무에서도 반일 국군을 습격케 했으며, 그 후 무안에서는 제일 전투 지역 이십일 분대인 이광의 부대를 해산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연이여 융평, 요산, 속진 등지에서 반일 보안단을 전부 해산시켜 버렸으며, 후에 석가장 부근에서는 우리 국군을 인솔하여 산해관 동북 방면으로 유격전을 하러 가는 이들을 기습하여 지휘관인 조동을 죽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고 계실줄 믿습니다만 이 조동이야 말로 우리가 늘 존경해 오며, 유격대의 어머니라고 부르던 조씨 노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공산당들은 이 두 모자가 반일분자가 아니라는 억측 밑에서 참살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어느 한 분도 이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믿으실 분이 안 계시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생생한 사실들은 공산당의 신사군들이 하북 지방에서 얼마나 비행을 저질렀나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일선에서 우리 국군들을 참패시켜 놓고, 지방 백성들의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반면, 반일 전쟁을 거절하며 강소성 정부를 소멸시키는 등, 이 모든 비행이 전부 이들 팔로군들의 스스로 저지른 반역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일단 말을 멈췄다. 단 밑에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며 울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걸 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조금 전에 몇몇 학우들께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청년들로서 현실에 불만을 품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들 이 현실에 만족을 느끼고 있는줄 아십니까?제가 태행산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때 겪은 그 모든 고난과 위험을 후방에서 세상 모르고 향리에만 도취되어 살아가는 일부 특권층에 비교해 본다면 과연 일선은 출생입사며, 후방은 취생몽사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듯 아픕니다.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아직 취생몽사 속에서 사는 사람의 수가 역시 적으며, 대다수의 우리 백성들은 갖은 고생 속에서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취생몽사의 인간과 별 차이 없는 또 하나의 기막힌 현실들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우리들 눈앞에 공공연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학생들이 어느 야심가의 선동과 유혹에 사로잡혀 덩달아 교련 장교를 배척하며, 교내 군사 훈련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전수업까지 휴학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까지 저 함락 구역에서 망국노들이 걷고 있는 그들의 생활을 맛보지 못했을줄 압니다. 비록 맛은 못봤다 하지만, 여러분은 망국노의 수치와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을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조국의 품안에서 군사 예비 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 것은, 다름아닌 우리 청년들 하나 하나가 후세에 올 우리들의 자손에게 영원히 망국노로 안 만드는 신성한 책임을 지워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군사 훈련을 무용지물로 생각하며, 심지어 파괴까지 하려는 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그것이 취생몽사와 다를게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더 무서운 취생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정부에서 그들을 해산시킨 것도 양민을 괴롭히기만 일삼아 오던 이들의 비행을 처음엔 참아오다가 드디어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이러한 결정을 내려 단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정부에 책임 추궁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책임추궁할 것이 있다면 그건 왜 진작 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는가를 추궁할 것 밖에 없습니다. 만약 정부에서 이를 좀 더 일찍 결정하고 실천했다면, 그동안 억울하게 희생당한 반일 국군과 우리들의 선량한 동포의 피해가 적었을 것이며, 희생도 덜 당했을 것입니다. 정부를 추궁하고, 지금 와서는 다시 신사군을 회복하자는 맹랑한 조건을 내세우며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민간인을 해치며 항전을 파괴키시던 반란군들의 난동이 다시금 이 나라에 나타나고 있으니 우리는 진심으로 이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까? 정부에서 신사군을 해산 처분한 것도 단순히 군의 기강을 위반한 군인에 한해서였지, 그들이 공산당 부대라고 무조건 처리한 것은 아닙니다. 한푸쥐, 스여우싼, 이복은 전부 국민당원이었지만, 그들이 반일 명령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법재판에 의해 총살당한 사실도 있습니다. 정부 당국에서 군대의 군기를 일관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단행한 이 처사를 옳다고 보십니까? 그르다고 보십니까? 저는 이걸 여러분들에게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복지, 석삼우, 이복이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정부를 추궁할 사람이 계십니까? 신사군들의 반란 행위는 이들 한,석,이, 세 사람의 반란 행위보다 몇천배 몇만배 더 엄청나게 큰 사건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모르고, 이러한 반란군들을 지지한다면 자각을 못하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취생몽사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것 역시, 더 무서운 취생몽사인 것입니다. 저도 반일 군인이었습니다만은 여지껏 아무런 정당에도 가입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삼년동안이나 정치과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고금을 통해 어떤 국가든지 일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 이념에 위배되는 개인의 무력과 사상의 존재를 허락, 또는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은 책에서나 교수님들의 강의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력으로 마음대로 어느 지역을 점령 하여선 제 멋대로 특수한 정부를 세워서, 중앙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천고의 기문이라 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국회가 있어 정부 시책의 잘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부를 비평하고 추궁할 대로 했습니다. 이것보다 더한 혹평을 가하고 한층 더 추궁해도 저는 찬성합니다. 왜? 그것은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건 민주 국가의 집정자로선 의당 받아야할 편책이기도 합니다. 만약 집권당의 집정이 좋지 못하면 헌법에 의해 정식으로 공포한 다음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의지에 비추어 우리가 원하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기만과 유혹과 공포 등 이러한 수단으로 국민을 협박, 공갈해 가며 심지어 살해해 가면서 나라를 소란시키는 것은 저로선 결사 반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희망하고 믿으며 자기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를 결사 반대할 것입니다."

이윽고 나는 결론을 맺었다.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고막을 울려왔다. 나는 벌겋게 흥분된 입술로, 이 우레같은 박수 소리에 콧등이 시큰하며 감격하고 있었다. 아직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고 있는데, 꼬마와 정미장이 웃으면서 단 위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감격적인 얼굴이 마음에 아무런 간적도 없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내가 연사였다는 것 조차 망각해 버렸다. 나는 그들에 부축되어 단 위를 서서히 내려갔다.

왕람(王藍) <람여흑(藍與黑)> [27][28]

전혀 아니다. 당시 마오쩌둥이 정한 공산당의 기본 방침은 일본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며 세력을 팽창시키고, 중일전쟁 이후의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홍군은 일본군과의 변변한 교전 기록이랄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자군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항일전쟁의 중심이던 국민당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역사책들에는 공산당 중심 서술들이 많았으나, 200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의 역사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뀌며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국민정부의 항일을 분명히 서술하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2000년대 이전 중화인민공화국의 사료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중일전쟁 시기 국민당 정권이 항일에 소극적이었다고 다뤄지기도 했으나, 최근의 인식은 많이 바뀌어 가고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의 영화나 서적 등의 대중적인 매체에서는 여전히 공산당의 영향력을 실제 역사보다 높게 평가하며, 국민당의 기여가 인정받는다고는 해도 여전히 부수적인 위치에 그치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항일이 자국 정부의 정통성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반면 대만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중일전쟁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학술적으로 논할 때는 당연히 국민당의 기여를 앞에 두고 평가한다.

중일전쟁 항전의 중심 세력이었던 국민당 중앙 직계군의 경우 수십 만~수백 만 명 단위의 군인들이 동원된 정규전을 수없이 치른 반면, 중국 공산당은 주로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운 소규모 게릴라전 위주로 활동하였으며 그나마도 항일에 전력을 다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단적으로 중일전쟁 내내 중국 공산당측의 장성급 전사자는 5명이고, 그나마도 팔로군 참모장 줘치안 한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넷은 국부군과의 충돌로 사망했다. 반면 국민정부군에서는 상장(대장급) 10명을 포함해 집단군 사령관 2명, 군단장 7명, 사단장 22명 등 거의 200여명에 달하는 장성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실 중일전쟁 시작 시점에서 공산당의 병력은 4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반면 국민당은 300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국민당이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자,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복종하는 대신 중일 양국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곳곳에 해방구를 확보하며 급격히 세를 불렸다. 본래 국민당은 공산군을 제8로군으로 편입시키면서 담당 구역을 지정해 주었으나, 공산당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역을 확장하였고, 심지어 이미 활동중인 국민당 유격대를 공격하여 해방구를 빼앗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은 백단대전에서 펑더화이가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두고 공산당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며 비판하였고, 이런 기조에 반발하여 항일을 촉구하는 당내 반대파들을 대거 우경 영합주의자로 몰아 숙청하였다. 이처럼 전쟁 기간 내내 마오쩌둥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항일에 올인하기보다는 국민당과 일제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시도하였고, 장제스도 바보는 아닌지라 당연히 이런 공산당을 끊임없이 견제하였다. 결국 1940년 즈음에 이르면 국민당은 "공산당의 신4군이 계속 중앙의 지령을 거부하며 담당 구역을 지키지 않을 경우 공산군을 먼저 제거하겠다"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날렸고, 공산당 역시 이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공산당 신4군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안전 보장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아 괴멸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1941년 1월 창강에서 발생한 신4군 사건( 환남사변)이다. 사건의 원인은 장제스가 국민당의 지도에 반하려는 세력에게 본보기를 보여 준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며, 일설처럼 현지 국민당 반공 장성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쳐도 안전 보장을 지키지 못한 도의적인 책임은 있다. 그러나 공산군 역시 협상을 통해 국민당 우위를 인정하고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혼란을 유도했던 것을 보면,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공산당이 전후를 보고 국민당을 견제했던 것처럼, 장제스 입장에서도 공산당은 항일에 별로 도움도 안 되는 내부의 적인데다 국민당의 당수로서 반드시 없애야 할 숙적이기도 했으니. 누가 원인을 제공했든 간에 환난사변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파기하고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중국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당시 공산당과 국민당의 역량 차이가 현저하고, 또한 국민당과의 충돌을 대비해야하기 때문에 국민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공산당 옹호는 당시 중국 정치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만 있어도 나올 수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제 2차 국공합작의 정식명칭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인데 이것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복종한다는 말이지 '양당이 동등한 관계로 합작한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 공산당은 삼민주의 수용,지주의 토지몰수 중단, 홍군의 국민혁명군 개편 등을 발표했고 실제로 명목상 당시 중국 공산당은 옌시산 관할하에 있었다. 당초에 193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공산당은 지하조직 등을 통해서 국민당은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을 우선시하라고 주장했다. 즉 애시당초 항일에 나서라고 부추긴건 공산당인데 그런 공산당이 역량이 되지 않아서 항일을 못한다는 말은 중국 역사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오늘날 중국 공산당이 욕을 먹는 것에 대한 요점은, 중일전쟁 때 제대로 싸웠느냐 안 싸웠느냐보다도 현재 중공의 행보에 대한 비판이라고 봐야한다. 중국 분열의 원흉이었던 군벌들조차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만은 같은 편끼리 싸움을 중단하고 국민당 아래 항일 투쟁을 했는데, 중일전쟁 때 일본군과 제대로 싸우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하나의 중국이니 중화민족주의 중화사상이니 백년국치니 할 자격이 있냐는 것이다. 저런 가치들이 옳든 그르든 둘째치고, 적어도 국민당은 실제로 하나의 중국, 중화민족주의, 중화사상을 강조하면서 자기들부터 행동으로 옳겼으니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강조해도 맥락이 그나마 맞지만, 중공은 정작 과거 역사에서 본인들은 제대로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적인 투지같은 건 하나도 보여준 적 없으면서 중화민족의 단결과 하나의 중국을 강요하고 이를 어기는 국가나 세력에게 훼방을 놓는 행보가 크게 비판받는 부분인 것이다.[29][30]

4.7.1. 반론

물론 공산당 역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산당도 "중국이 망하든 말든 우리만 잘살면 그만이지!" 정도까지 막장으로 군 것까진 아니었고 이들도 항일이 당장은 최우선 과제라는 것은 확실히 인식하였으며 점령지의 지나친 공산화 및 정치적 장악을 시도하진 않았다.[31]
소위 '태업행위'에 관해서도 변명할 만한 여지는 있다. 사실 공산당의 입장으로서는 국민당이 항일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을 사이 세력을 불리는 것이 (도의적인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했다. 항일이 보기엔 좋겠지만 그렇다고 얼마 안 되는 역량을 거기에 들이부었다가 일본군에게 몰살당하기 or 항일에 힘을 소모하는 바람에 전후에 국민당에게 몰살당하기를 고를 리는 없지 않은가(...). 국민당도 항일 전쟁만 끝나면 바로 공산당 씨를 말려버리려고 벼르는 상황이었으니. 아니 그 전에 이 둘은 국공합작이 이뤄지기 전부터 박 터지게 싸우던 관계로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산당 입장에서 보면) 살려면 일단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소련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이미 마오쩌둥은 이념적 차이로 인해 친소 세력을 배척했기 때문에 소련과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진 상태였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항일에 집중하는 사이에 국민당이 일본과 협상하여 자신의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의심하였고 이는 로스 테릴의 마오쩌둥 평전이나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 근현대사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다. 공산당을 못 믿는 것은 장제스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는 공산당에 주기로 했던 지원을 얼마 안 가서 끊어버렸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악연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의심이 없을 수 없었을 터, 따라서 마오쩌둥은 기회가 있을 때 국민당에게 맞설 수 있을 만한 체급을 빨리 구축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전쟁 중에 보인 '교전 회피'와 '해방구 확산 전략'이었던 것이다.

또한 해방구 늘리기와 적극적인 교전 회피는 사실 게릴라전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군대가 정규군을 상대로 할 때 정석인 전술이었다.[32] 게릴라군의 주요 전법은 적의 주력 부대와의 싸움을 회피하면서 해방구를 늘려 점령군을 고립시키는 전술로 철도 등 보급로를 향한 사보타주하거나 후방을 위협하여 적군에게 혼란을 걸고 적군의 점령비용을 비롯한 물자 소모를 늘려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식이기 때문이다. 난징 함락 이후 국민당군도 일본군과의 정면 교전을 하는 것 보다는 유격전을 펼치는 식으로 전술이 수렴진화했고, 이후 3세계에서 게릴라들에 의해 식민지군이나 냉전기 미군이나 소련군이 지속적인 출혈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던 사례가 나온 것을 생각하면[33] '군사적으로는' 옳은 판단을 한 것이었다.

게다가 마오가 일본군과의 정면 교전을 피했다고 해서 공산군이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작전을 안했다거나 일본군이 공산군을 공격 안한 것은 아니어서 홍군은 마오까지도 중일전쟁 중에 폭격 등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겨야만 했다. 나무위키 중일전쟁 메인 페이지의 전황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만 마오쩌둥이 있던 공산군 본군의 근거지는 일본군 바로 서쪽이었으며, 공산당의 해방구 상당수가 회수 이북의 일본군 점령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만 봐도 공산군이 일본군과의 싸움은 도외시하고 세력 늘리기에만 골몰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당장 일본군이 직예와 산동 일대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도 결과적으로는 도시와 철도라는 점과 선만 연결하는 점령 형태가 된 것을 보아도 공산군의 전과가 미비하다고 평가할지언정 윗 문단에서의 평가처럼 전력을 다하지 않았거나, 전략적으로 의미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비판 쪽에서는 대장정 당시 생존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박살이 난 공산당의 규모와 역량, 당시 공산당보다는 몇 십배나 사정이 좋았던 국민당군조차 일본군과 정면에서 싸워서 자력으로 승리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서 전술을 바꿔야 했던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 공산당의 대규모 전투 수행 전적이 부족하고 국민당과 갈등을 빚었던 것과는 별개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는 평가는 공산당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고 볼 수가 없다. 만약 비판 쪽에서 주장하는 대로 공산군이 일본과의 싸움에 소극적이라고 당대 중국인들이 인식했다면 왕징웨이 같은 한간 취급을 받고 지지기반을 잃지 어떻게 중국을 통일할 정도로 여론을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해방구 확대를 비롯한 게릴라 유격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점령지 주민들에게 위협이던 회유던 어떤 식으로든 동의와 지지를 받지 않으면 실행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소한 일본군 주력과의 교전을 회피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방해해야 하는 테러나 기습과 같은 군사적 행동은 필요하기 때문이다.[34]

또한 공산군과 국민군이 하나로 단결하지 않았다는 것이 반일 의지에 문제가 있었다는 분석조차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상황에 비교했을 때 올바른 비판이 아니다. 수많은 식민지 독립 전쟁들만 봐도 독립 운동 세력들은 식민 모국의 탄압에 저항하면서도 계속 서로 분열되어서 싸웠고, 결과적으로 이런 갈등이 사라진 건 아이러니하게도 식민 모국이 영향력을 잃고 쫓겨난 후 상호 간 내전으로 한쪽을 굴복시키거나 아예 다른 한 쪽이 분리되어 독립을 해 나가는 극단적인 결말로 가는 경우가 흔했다. 해방 후 인도도 힌두교계 독립운동세력과 이슬람계 독립운동세력의 갈등은 식민지 시절부터 봉합이 안 되어서 결국 인도 파키스탄으로 쪼개졌고 베트남 베트민이 다른 파벌들까지 전부 숙청하고 미국까지 몰아낸 뒤에야 통일을 달성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당시 공산군과 국민군이 서로 단결하지 않고 서로의 통수를 노리면서 동시에 일본과 싸우던 중국의 상황도 세계적인 상황으로 봤을 때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이 과정에서 홍군을 지휘하던 마오가 진짜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지나치게 군사적인 효율을 중시한 나머지 일본군 점령지와 해방구의 중국 민간인들의 보호를 사실상 포기했던 것이였다.[35]

어쨌든 국민당이 항일에 적극 나선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어서인지, 현재 중국 공산당의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평가도 많이 바뀌어 심지어 역사교과서에서도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을 명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장제스를 띄워줄수록 그 장제스를 이긴 마오쩌둥도 덩달아 띄워지는 효과가 있는 데다가 범록연맹 견제 차원도 있다고 하다만...[36]

4.8. 중국군은 청룡도를 사용했다?

실제로는 대도를 사용했다.

이러한 오해는 대도에 큰 인상을 받아서 생겨난 오해다.

자세한 사항은 항일대도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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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당초 국민혁명이 1928년에, 중원대전이 1930년에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1937년 개전 시점의 중화민국은 통일국가로서 수립된 지 10년도 되지 않았다. 전근대 왕조 시대가 끝나고 수십년간 내전이 일어나다가, 이제 막 간신히 개국 10년도 안 된 나라에게 열강에 준하는 국가 인프라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인프라들조차 상위 20~40개 선진국 정도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일진대, 근대세계에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국가꼴을 갖춘 국가라고는 열강들뿐이었고, 가장 근대화가 빨랐다는 일본 제국조차 대정봉환부터 열강 진입( 러일전쟁 승리)까지 40여년 가까이 걸렸다. 오히려 중화민국은 개혁과 근대화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된 편이다. [2] 이 때문에 후일 공산당 집권 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아작나자 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 [3] 당시 중국은 일본에 비해서는 못 미쳤지만 전체적으로 유럽의 네덜란드, 벨기에 등 약세열강에 비하면 철강, 석탄 등 전략자원에서 명백히 우위를 점하는 생산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일례로 중국의 동북 장쉐량이 갖춘 공장에서는 1년에 대포 150문, 포탄 20만 발, 중기관총 1천 정, 소총 6만 정, 탄약 1억 발을 생산했다. 일본의 1개 함대에 필적하는 해군도 있었고 300여 기의 복엽기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도 성냥과 철강은 물론, 트럭, 야전포, 함정에 항공기까지 곳곳에서 자력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출처: 권성욱,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2014 [4] 그나마도 백단대전 이후에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서 이 전투를 왜 벌였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5] 일단 이것은 편제상 숫자이며, 실제 숫자는 3만~8만으로 논란이 있다. [6] 이건 소련군의 만주 점령과 물자 지원이 가장 컸다. [7] 주요 물자로 이것 말고도 일부 주긴 했지만 의미 있는 양이 아니었다. 셔먼 전차도 일부 받긴 했다. 단지 주나 마나 한 양이라서 그렇지. [8] 물론 영국 역시 지불해야 할 대가는 컸다. 미국에게 산업적, 경제적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카리브해의 군항들과 캐나다의 군사기지, 더 나아가 전 세계 대영제국의 해군기지들을 미국에 전부 이양하였다. [9] 항공기로 수송하는 방안이 있긴 했지만 아주 소량의 물자만 수송 가능한데다 파일럿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험했다. [10] 참고로 미 공군(USAF)은 1947년에 창설되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미 공군은 진짜 공군 소속이라는 게 물론 아니고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소속의 중국항공임무군(China Air Task Force - CATF)과 그 후신인 14항공군(14AF)을 말한다. [11] 사실 미국같이 전차강국 독일과 싸우는 입장에서나 경전차지, 당시 유럽 전선 정도의 대규모 전차전을 경험해본 적 없었던 아시아 보편의 기준에서 스튜어트는 절대 경전차가 아니었다. 아시아 최강의 육군력을 자랑하던 일본 제국조차 스튜어트는 막강한 중(中)전차인 줄 알았고 실제로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은 스튜어트를 중전차처럼 써먹었다. 당연한 것이, 스튜어트와 일본 제국의 중전차 치하의 중량은 엇비슷했고, 개량형인 M5 스튜어트의 중량은 15.6톤으로 치하 개량형(14.8톤)보다도 더 무거워졌다. [12] 사실 이쪽도 말이 좋아 제해권 장악이지, 1942~1943년 동안은 망할 놈의 늑대 떼 때문에 쉴새없이 정신없이 30%에 육박하는 수송선이 두드려 맞고 가라앉았다. [13] 소련과 일본이 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소련의 화물선만 이쪽으로 다녔고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전투물자는 제외되었다. 운송량으로는 이 루트가 가장 많았다. 일본은 소련과 가능한 중립관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안전한 편이었으나 미국의 잠수함이 피아식별을 잘못해서 소련 화물선을 격침한 일도 있었고, 일본 잠수함 I-180이 소련 화물선을 격침한 일도 있었다. [14] 당시 인도양에도 다수의 독일군 잠수함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연합군 수송선들을 격침하고 다녔다. 인용 바람. [15] 1942년 롬멜이 카이로로 진격하자 중국으로 향하던 물자들이 죄다 영국으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전투기는 무기대여법과 별개의 차관으로 받은 전투기였다! [16]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독일과 편먹고 자국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하였는데 일본을 막으라고 배치해둔 병력 40만 역시도 이 때문에 극동에만 묵혀있다가 겨우 소련 스파이가 일본은 절대 소련을 공격 안 한다고 보내고서야 모스크바로 옮겨 배치했다. [17] 대표적인 것이 장제스가 미국에 요구했던 항공기 지원인데 장제스가 500대의 항공기를 요구하자 스틸웰은 그걸 씹어버렸고 장제스 부부가 강력히 반발하자 루스벨트는 265대의 항공기를 보내주었다. [18]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이며 외조카가 필립 마운트배튼이다. 1943년부터 동남아시아 전선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있었기에 인도-버마 전선의 모든 연합군 작전과 태평양 지역에서 영연방군이 벌인 모든 전투에는 이 사람의 기획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1943년 이전에는 지중해 전선과 노르웨이 침공 작전에 참가하는 등, 혈통에 걸맞지 않게 최전선에서 자주 뛴 편. [19] 장쉐량 본인은 후에 인터뷰에서 자신이 내린 이 명령을 후회하기도 했다. [20] 북양정부 시절에는 그래도 일본과 친하게 지냈던 돤치루이조차 거절은 물론이요 아예 친일파들에게 일본에게 절대로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덕분인지 장제스에게 애국명사 대접받으며 배려받고 그와 3차례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후에 그가 사망하자 국장을 치러주고 전국에 조기를 게양했다. [21] 이는 현재에는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지만, 일단 우페이푸가 항일한 것은 사실이어서 장제스는 1940년, 그에게 일급상장 자리를 추서하고 유족들에게는 20만 위안을 하사했고, 전후에는 아예 국가 주도로 장례식까지 치러줬다. [22] 의외로 중일전쟁기 한간 중에는 직예계를 포함한 구 군벌출신들보다 당장 그 왕징웨이 부부를 필두로 천궁보, 저우포하이, 딩모춘 같은 국민당계 반장 인사들이 그것도 좌우파 골고루 많았다. [다만] 낏해야 전군을 통틀어서 15cm 야포 10여문에 소총과 박격포 정도만 장비하던 국부군과 달리 제해권, 제공권이 일본군에게 있었던 터라 함포, 항공폭격은 물론 독가스 같은 화학무기까지 중국 측이 보복할 역량이 없었기에 눈치 안 보고 아낌 없이(...) 투시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24] 사실 일본군의 사단이 대전기 국가들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게 큰 사단인 것도 한몫 한다. 일본군의 완편된 사단은 병력이 2~3만에 차량, 포병 등이 거의 각각 5~10개 대대의 규모에 이르러, 영미권 근대 군대 편제 기준으로는 웬만한 군단급에 맞먹었고, 대전기 동구권 군대 편제 기준으로는 거의 2개 군단급이었다. [25] 단순히 엄청난 피해를 강요한 정도가 아니고 글자 그대로 양적, 질적 측면 모두에서 일본군을 완전무결하게 압도했다. [26] 소비에트 연방의 국영 통신사 [27] 왕람(王藍)은 1947년에 허베이 성 구역대표제 선거구에서 당선한 행헌(行憲) 국민대회 외성인 국회의원이자 1967년에 한국을 방문한 중화민국 소설가로서 유명한 참전용사다. 그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배경으로 1958년에 출판한 소설 <람여흑(藍與黑)>에 작중 중일전쟁 당시 팔로군과 신사군의 만행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장성아(張醒亞)도 팔로군의 습격으로 총을 맞고 하마터면 죽을뻔 했었다. 위에 인용된 장면은 군에서 제대한 후 국립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주인공이, 국민당 정부의 신사군 해체에 불만을 품고 동맹 휴학을 추진하는 공산당원 학생들에 맞서서 반공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왕람은 중일전쟁에 직접 참전한 사람이고, 함께 참전한 그의 친구는 중일전쟁 도중에 전사했다고 한다. [28] 전쟁 이후 왕람은 자신이 겪은 전쟁을 소재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는데, <람여흑>은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여러 차례 드라마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대만에서는 왕람(王藍)의 람여흑(藍與黑), 반인목(潘人木)의 련의표매(蓮漪表妹), 기강(紀剛)의 곤곤료하(滾滾遼河), 서종패(徐鍾珮)의 여음(餘音)을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출판했으며, 중일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네 작품들을 사대항일소설로 꼽는다. 국내에서도 1967년에 왕람의 한국 방문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람여흑)을 삼일각에서 번역하면서 2권(上권과 下권)으로 출판했다. 번역의 질은 대체적으로 우수한 편이지만, 세로본이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게 옥의 티.... 그리고 출판 년도가 오래된 만큼 절판이 되었고,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다. 대신에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서 열람이 가능하긴 하다. 위에 인용된 내용에서도 보듯이 중일전쟁 국공내전의 정세에 대해 매우 상세히 몰입감 있게 자세히 잘 설명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중국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지식이 없이도 충분히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고증이 잘 된 편이다. 물론 소설이 발표된 시기가 시기인만큼 과도한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공산당 악의 축으로 표현한 건 사실이지만[37], 실제 역사에서의 공산당과 팔로군 역시 소설의 묘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다. [29] 국민당과 공산당 간 타협이 불가능했다면, 공산당은 한국전쟁 참전 대신 대만을 침략해서 국민당을 완전히 없애버렸어야 했다. 그래야 공산당이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강조해도 같은 주장을 외칠만한 적당한 정치세력이 없어서 뒷말이 없었을테니까. 실제로는 그러지도 않았으니 국민당은 2024년까지 멀쩡히 살아남았고, 공산당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면서 중일전쟁에 대해 뒷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0]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체는 중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존재하는 현상이기에, 그게 옳고 그른지는 충분히 의견이 나뉠 수 있다. 문제는 중공이 하나의 중국, 중화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일국양제 같은 어정쩡한 통일 방안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통일이라는건 하나로 통합한다는 의미인데, 저런 식의 통일은 그냥 국가연합이나 다름없다. 말만 통일일 뿐. 체제가 2개인데 무슨 단일국가란 말인가? 하나의 중국, 중화민족주의를 지키라고 강요할꺼면 구체적인 통일계획이라도 내놔야 하는데 중공은 이도 저도 아닌 주장을 하고있고 자기 주장에 토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식으로 반응하니 상대국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당연히 납득이 힘들 수 밖에 없다. [31] 물론 이는 지나치게 급격한 혁명화를 시도했다가 5차 초공작전 때 피를 본 것에 대한 학습효과이기도 했다. [32] 현대적 게릴라전의 예시에서 마오쩌둥이 언급되는 것도 이런 게릴라전을 가장 교과서적으로 수행한 게 마오이기 때문이다. [33] 사실 베트남군도 디엔비엔푸 전투를 뺴면 유격전으로 프랑스군의 소모를 늘리는 것에 집중했고, 아프리카 국가들도 군사적으로는 유럽 식민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전부 분쇄되었지만 지속적인 소모전을 강요해서 전쟁 수행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만든 것이었다. [34] 이 부분의 이해가 어렵다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과 탈레반이 전쟁을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리면 된다. [35] 마오쩌둥의 이런 군사적 작전에서의 비정한 면모는 마지막 국공내전에서 주요 대도시에 포위된 국민당군을 섬멸하기 위해 도시가 아사하든 말든 계속 포위망을 유지하고 인도적 퇴각을 위한 퇴로를 열어주는 걸 거부하는 식으로 표출되었다. [36] 물론 그러면서 국민당이 통일을 주장하면 그건 또 거부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니 범록연맹 견제효과가 제대로 나타날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