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顧品珍 (정체) | 顾品珍 (간체) | 고품진 |
영문 | Gù Pǐnzhēn |
출생 | 1883년 |
청나라 운남성 쿤밍 | |
사망 | 1922년 3월 20일 (향년 38~39세) |
자 | 소재(筱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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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전계군벌로 한때 탕지야오를 몰아내고 운남성의 주인이 되었으나 1922년 암살당했다.2. 생애
1883년 운남성 쿤밍에서 태어났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졸업했으며 귀국하여 운남강무당 교관에 임명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쿤밍에서 봉기하였고 운남군 제1사단장, 운남강무당 당장을 역임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차이어를 따라 호국군에 입대, 사천성에서 북양군벌과 교전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리위안훙이 계임하오 구국회와 약법을 복구하자 운남군 제1군 군장, 동방독판에 임명되었다.이후 나패금, 이근원 등과 함께 탕지야오의 밑에 있으면서 그가 호국전쟁, 호법전쟁 중 장악한 사천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주천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1920년, 사천군벌들의 공격으로 패퇴하게 되자 탕지야오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1921년 사천군벌 슝커우의 지원을 받아 탕지야오를 몰아내고 운남성을 장악하고 쑨원의 2차 호법운동에 동참했다. 이에 쑨원은 구핀전을 운남북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구핀전은 1922년 의량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쑨원의 북벌에 호응하여 북방으로 진군하려 했으나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던 탕지야오가 광서와 광동의 병력을 규합하는 한편 운남성의 반란을 사주하여 반격했다. 구핀전은 부하들의 습격을 받아 1922년 3월 20일 피살되었다.
그가 살해된 후 주천전군의 부총지휘였던 장개유와 2여단장 김한정은 잔여부대를 5개 여단으로 편성하고 귀주를 거쳐 쑨원에게 합류하려 했는데 광서에서 여단장들이 난을 일으켜 장개유를 축출하고 양시민을 새로운 수령으로 삼아 범석생, 양여헌, 양지생 등을 이끌고 쑨원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쑨원이 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 하자 양시민은 계계군벌 유진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다.
3. 참고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