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6가를 중심으로 흥인지문 및 청계천 지역에 밀집한 의류 도매시장.동대문 시장은 크게 도매시장과 소매시장으로, 그리고 젊은 세대 타겟 시장과 중장년층 이상 타겟 시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젊은 세대 타겟 시장은 두타(두산타워)를 비롯한 쇼핑몰로, 대개 1990년대 중후반 이후에 지어진 곳이다.[1] 중장년층 이상 세대 타겟시장은 평화시장을 필두로 한, 이름에 ‘평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장들이다. 그리고 이 ‘평화’ 시장군이 현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 초기 성장의 원조이자 주역이다.
2. 역사
한국 전쟁을 계기로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은 서울 청계천 근처에 거주하면서 의류를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억척스럽기로 소문났던 실향민들은 시장에 내다 팔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의 물건이라도 팔고자 했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복과 담요를 활용한 옷도 만들어서 팔았다.당시 청계천 주변은 무허가 건물과 노점이 즐비했으며, 이곳으로 배출된 오수와 쓰레기로 서울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서울시는 청계천 주변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958년 청계천 위로 콘크리트를 덮어서 도로로 만드는 복개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 공사로 인해 무허가 건물과 노점 상태로 있던 청계천 재래시장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상인들은 서울시에 생존권 보상 등을 요구하며 집단 대응했고 그 대가로 서울시로부터 부지를 제공받아 청계천 바로 옆 서울운동장 북쪽 편에 3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평화시장 건물이다.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깔끔해 보이지만 2020년대 기준으로 환갑을 넘긴 건물이다.
시장 명칭에 '평화'라는 이름이 명명된 것은 이 시장의 상인 다수가 실향민이었고 그들이 평화 통일의 염원을 담긴 이름을 상가에 담고자 했기 때문이다. 평화시장으로 명명된 새 시장은 1962년에 문을 열었다. 평화시장이 성장하자 주변에 생산과 판매가 혼합된 의류상가들이 들어서 동신시장(1962), 통일상가(1968), 동화시장(1969)이 차례로 개발됐다.
현재의 평화시장은 전 층이 상점으로 쓰이고 공장들은 주변의 창신동, 신당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1층은 상점, 2~3층에는 봉제공장이 있었다. 이런 구조는 18~19세기 유럽 산업도시 건물에서도 나타난다. 원재료를 건물의 맨 위층(일종의 재료 창고)에 저장한 후, 밑에 층에서 이를 활용해 제품을 만든 후 1층 상점에서 판매하는 구조였다. 생산과 판매가 공간적으로 단일 건물 안에서 수직적 프로세스를 따라 발생하는 것이 18~19세기 유럽과 20세기 중후반 서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과 지역에서 나타난 것이다.
당시 부유층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옷감을 떼다 옷을 만들어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 기성복이 등장하자 대중에게 큰 인기를 누리면서 평화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하던 동대문 상권은 1960~70년대 대한민국 의류 생산의 주축을 담당하면서 빠르게 성장했지만 초고속 성장 뒤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열악하기 짝이 없던 노동자들의 현실이었다. 1970년대 평화시장 내부에는 옷감을 직접 재단하고 재봉해서 옷으로 만든 뒤 이를 판매하는 영세 업체들이 많았다. 이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과 일용직 노동자, 가난을 피하기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든 소녀 노동자(여공)들이었는데 이들이 직면했던 노동 현장의 여건과 노동자들의 대우 조건은 열악했다.
하루 평균 15~16시간 근무하면서 밥 한 끼조차도 제대로 때우기 어려운 수준의 매우 적은 월급을 받았다. 이 당시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50원 정도였는데 믹스커피 한잔이 30원, 설렁탕 한 그릇이 6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하루 꼬박 15~16시간을 일해도 설렁탕 한 그릇도 못 사먹을 수준의 대우를 받았던 셈이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휴일은 그림의 떡이었고 무려 500명의 노동자들이 1개의 화장실을 나눠 써야 했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단순 작업을 주로 하는 시다(보조)의 평균 연령은 15세에 불과했고 3m 높이의 한 층을 1.5m씩 복층으로 나눠 공장을 가동했으며 창문이나 환풍기조차도 없는 환경에서 1평당 4~5명의 노동자들이 끼어앉아 있다시피하며 일을 했기 때문에 노동 환경의 수준은 심각하게 나빴다. 실제로 1975년 청계피복노동조합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한 공장의 평균 노동자 수는 17.2명이었는데 이는 현재 동대문 패션클러스터의 생산축 역할을 하는 창신동 소재 공장(약 2~5명)에 비하면 세 배 이상 많은 수다.
이같은 노동 환경 악화를 타파하기 위해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근무하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들의 노동 여건 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1970년 11월 13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끝에 세상을 떠났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일시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는 근로 조건을 규정한 근로기준법 해설 책자를 1년이나 탐독한 후 직공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돌려 평화시장의 근로기준법 위반 실태를 파악했다. 전태일은 이를 노동청에[2] 호소하며 시정해 줄 것을 여러차례 요구했으나 자본의 편에 서있던 당국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노동자들의 단합된 목소리에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의 벽과 마주한 전태일이 오랜 결심과 고민 끝에 분신자살이라는 행위를 단행한 것이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곧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고 급기야는 정치 문제로 번져 당국으로 하여금 노동 행정을 재검토케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현재는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전태일 다리) 근처 실제 전태일이 사망한 곳에 전태일의 흉상이 있다. 이후 이곳은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를 중심으로 한국 노조 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다만 전태일의 동상이 하필이면 하반신이 잘려 땅에 파묻힌(?) 기묘한 비주얼로 나와서 고인 비하 논란이 있었다. 매년 겨울 무렵이면 사람들 혹은 관련 재단에서 동상에 목도리를 씌워준 것을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동대문 성곽 외곽지역, 즉 청계6가 사거리 동쪽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1972년 신평화시장이 개발된 후, 1983년 청평화시장이 오픈했다. 이들은 평화시장의 브랜드 효과 덕을 보고자, 평화라는 이름을 고수하는데, 신평화, 동평화, 청평화, 남평화, 제일평화시장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평화시장이 가파르게 상권으로 성장하면서 1975년 이후 2층과 3층 공장들은 지대가 싼 주변의 창신동, 숭인동, 충신동, 신당동으로 이주했다. 여기에는 열악한 작업환경의 공장은 철거하겠다는 서울시의 방침도 일조했다. 서울시는 위험작업장 종합안전진단을 실시하여, ‘극히 불량한 것은 모두 철거한다’는 방침을 천명하기도 했었다. #
과거 삼풍백화점을 지은 삼풍건설산업의 등기상 본사가 청평화시장에 있었다.[3]
3. 사건·사고
2019년 9월 22일 0시 38분 제일평화시장 건물에서 불이 났다. 지상 7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의 3층 의류매장에서 시작된 불은 1시간여 만인 오전 1시 41분에 큰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시장 내 원단과 의류 속에 남아 있는 잔불이 많아 화재 발생 16시간을 넘겨서 완진되었다. #1 #2 #3 상가 건물이 3층까지만 허가되어 있는데 7층으로 불법 증축한 데다 외벽에 철판까지 둘러져 있어 진화 작업이 더뎌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 9월 25일 경찰과 소방당국이 화재에 대한 2차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경찰은 전담팀을 구성해 자세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면서 위법 여부 등에 대한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4. 교통
4.1. 버스
- 종로5가 정류장: 이곳 참조
- 청계5가.방산시장 정류장: 173
- 광장시장 정류장: 100(용산구청), 104(서울역), 140(AT센터)
- 혜화경찰서 정류장: 273(홍대입구역), 종로12
4.2. 도시철도
-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에서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