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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장쭤린 한 사람만 제거하면 소위 봉천파 장령들은 모두 흩어질 것입니다. 우두머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 방법 이외에는 만몽 문제의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장쭤린을 없애야 합니다.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1. 개요
1928년 6월 4일,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쭤린이 고모토 다이사쿠를 비롯한 관동군 장교들의 음모로 암살된 사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수장이 되며 봉천군벌은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정부에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중국식 음차인 황구툰 사건, 장쭤린 폭살 사건, 남만주 폭파 사건이라고도 한다.2. 배경
2.1. 일본의 만몽신오로협약(滿蒙新五路協約) 이행 요구
1928년 5월 24일, 자신의 관저에 있는 장쭤린 |
1928년 4월,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국민당의 2차 북벌을 거행함에 따라 장쭤린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장쭤린은 정예부대인 3,4방면군을 아들 장쉐량과 최측근 양위팅에게 맡겨 펑위샹과 옌시산을 먼저 섬멸하고 장제스의 공격은 방어로 일관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산동을 지키던 쑨촨팡이 말을 듣지 않았는데다가 산동의 공격이 거세 결국 전선이 붕괴되고 베이징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 제국은 중국 침탈의 야욕을 노리고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의 제국주의적 침투를 행하고 있었다. 일찍이 일본은 궈쑹링의 반봉사건 때 궁지에 몰린 장쭤린을 원조하는 대가로 장쭤린과 거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장쭤린은 그 전부터 일본과 미쓰야 협정을 맺는 등 일본과의 연계가 강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심복이었던 궈쑹링 등으로부터 친일 매국노란 오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일본의 지지는 얻으려 했어도 일본에 맹목적으로 굴종하면서 그들의 모든 편의를 들어주는 인물은 아니었고 만주의 타통철로 부설을 놓고 대원수가 된 이후로 일본과 지속적으로 충돌해왔다. 일본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개시되고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타서 다시 침투하기 시작했다. 우선 혁명적인 국민당을 싫어했던 일본은 제남 사건을 일으켜 국민당을 압박하고 북벌을 방해했으며 장쭤린이 궁지에 몰린 틈을 타서 5개 철도 건설 등을 요구했다. 이는 지난 1927년부터 만철에서 장쭤린에게 요구했던 것으로, 장쭤린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만철 노선 확장과 지선을 위해 북만주에 길회선( 길림- 회령), 연해선(길림-해림), 길오선(길림-오상), 장대선( 장춘-대뢰), 조색선(조남-색륜) 등 5개 철로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러면 일본의 만주 진출이 매우 용이해진다. 장쭤린은 이에 대해 폭탄을 안는 것과 같다며 반감을 표했으나 일본은 장쭤린이 이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장제스를 지지하겠다고 위협했다. 장쭤린은 큰 위기를 느끼고 이 논의를 최종결정이 아닌 예비회담으로 할 것이며 발표를 미루자고 했다. 이러자 만철 총재 야마모토 조타로는 직접 담판을 짓기 위해 베이징으로 장쭤린을 찾아왔다. 장쭤린의 심복 양위팅이 5개 철로 건설안은 대원수라도 혼자 독단할 수 없는 일이라며 무르려 했고 장쭤린은 발뺌할 여지를 남기기 위해 일본이 제출한 만몽신오로협약에 서명 대신에 읽었단 뜻의 열(閱)만 써넣었다.
이후 장쭤린은 온갖 구실로 만몽신오로협약을 이행하지 않았는데 일본이 장쭤린의 약점을 잡아 이행을 요구한 것이다. 일본은 만약 장쭤린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장쭤린의 철수에 남만주 철도를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장쭤린 이하 길림성 독판 장쭤샹, 길림성 교섭서장 종육 등은 모두 이를 거부했다. 장쭤린은 5월 14일 길림 의회에 보낸 전문에서 상황을 설명했다.
길회선 등의 노선은 본래
돤치루이 정부에서 외국인이 건설하는 것을 허락한 바 있는데 현재 일본 측이 지난 일을 다시 들추어내고 있다. 그동안 다방면으로 입이 닳도록 재촉하고 다그쳐 바로 교섭을 하자고 하는데 많은 부분의 취소와 일부분의 취소를 희망하고 있다.
결국 장쭤린은 굴복해 5월 13일~15일 사이에 4개 노선에 관해 조인했다. 일본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자 동북군을 만주로 불러들여 국민당으로부터 만주를 지키려 했다.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전 육군대신 야마나시 한조를 파견하여 장쭤린에게 동북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장쭤린은 "나는 일본을 위해 일부러 베이징까지 와서 국민혁명군과 싸우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돌아오라니 무슨 소리냐?"라고 이를 묵살했다. 이에 5월 18일 일본은 장쭤린과 장제스 쌍방에 각서를 제출하여 위협했다. 이른바 5.18 각서란 것이었다.
전란이 경진 지방으로 진전하고 그 화란이 만주에 미치려 하는 경우에 제국 정부로서는 만주의 치안유지를 위해 적당하고도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의 '적당하고도 유효한 조치'는 5월 16일 각의에서 통과된 '만주지방의 치안유지에 관한 조치'로 국민혁명군이 경진지구에 도착하기 전에 봉천군이 철수하는 것은 인정하나 국민혁명군의 베이징 입성은 저지하며,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이 경진지구에서 교전하거나 두드러지게 가까워진 상황에서 봉천군이 퇴각을 결정하였을 때는 일본군이 개입하여 양군의 무장을 해제한단 것이었다. 주중공사 요시자와가 이 각서를 장쭤린에게 제출하여 조기철수를 설득했으나 장쭤린은 승패는 하늘에 달렸으며 자신이 철수하면 중국은 적화될 것이라고 거부했다.
내가 공산주의를 토벌하는데 만일 실패한다면 중국은 장차 적화가 될 것이다. 중국의 적화는 일본과 관계가 없을 것 같은가?
이에 요시자와는 장쭝창의 병사들이 제남에서 일본 군병을 살해했으니 책임을 지라면서 만몽의 추가적인 권익을 요구했다. 격노한 장쭤린은 자신의 담뱃대를 집어던졌고 담뱃대는 두조각으로 부러졌다. 장쭤린은 요시자와에 보고도 없었고 조사도 없었던 일이라며 자자손손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강력히 거부했다. 그리고 요시자와를 버리고 접견실을 나가버렸다. 요시자와는 몇시간이나 장쭤린 설득을 시도했으나 장쭤린은 거부했다.
5월 18일,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야다 시치타로가 국민정부의 외교부장 황부에게 장쭤린에게 전해준 것과 같은 각서를 전달했다.
일본은 동삼성의 특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장제스가 이기든 지든, 남군이 산해관을 넘는 것을 불허합니다. 장제스가 만일 출관하고 싶다면 실력으로 나와야 합니다.
2.2. 장쭤린의 밀약 거부와 관동군의 음모
장쭤린만 죽여 없애면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잘 풀릴 것입니다. 장쭤린을 하야시키고 그 후임자가 모든 정책을 바꾸어 나간다고 누가 보증하겠습니까? 만약 더 다루기 힘들다면? 장쭤린을 죽여 없애면 그 아들 장쉐량이 반드시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며 그 부하들 역시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치안 유지 명분을 이유로 삼아서 봉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거에 만주를 점령한 다음 다른 사람을 찾아 우리 군대의 보호 아래 정부를 조직한다면 만주 문제는 한번의 수고로 영원함을 얻는 길이 될 것입니다.
1928년 5월 18일 고모토[1] 다이사쿠의 주장.
1928년 5월 18일 고모토[1] 다이사쿠의 주장.
사건의 주역인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 |
한편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는 '적당하고도 유효한 조치'의 준비에 착수, 극비리에 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봉천에 집결시켰다.[2] 그 목적은 병력을 금주에 파병하여 동북에 들어오는 중국군은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을 막론하고 무장해제하기 위해서였다.
1.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각 부대는 봉천으로 즉시 이동한다. 2. 지난에서 철수하여 다롄으로 가는 여단은 봉천으로 가도록 한다. 3. 만주의 일본군 주력은 봉천으로 집중한다. 4. 금주, 의주, 산해관, 조양진 등에 나가 있는 봉천 정예 부대를 경계토록 한다. 5. 신민둔과 신가둔의 치안을 잘 유지토록 한다. |
이에 중화민국 외교부장 황푸(황부)가 "중국 내정에 간섭하고 국제 공법상의 영토주권의 상호존중에 분명히 반하는, 이러한 종류의 행위를 국민정부는 절대로 승인할 수 없다." 비난했고 5월 19일 미국 국무장관 켈로그도 일본 대사를 불러 동북의 행정주권이 중국에 속한다고 비판했다. 미국 상원의원 외교위원회 의장 포라는 '대담한 행동'이라고 하였고 영국도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무라오카 조타로는 병력을 금주에 보내는 한편, 관동군 사령부를 봉천으로 옮기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외무성은 이 조치가 포츠머스 조약의 범위를 뛰어넘는다고 반대했고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국제정세를 의식하여 만주에서 치안 혼란이 오지 않는다면 봉천군대의 만주 후퇴를 용인하며 무장해제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관동군에게 전보를 보내 아직 서두를 필요 없다면서 장쭤린의 지위를 유보한다고 전해왔고 관동군은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관동군은 이렇게 물러날 자들이 아니었다.
5월 23일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베이징의 외교 사절들이 모여 경진지구에 전쟁이 파급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요시자와 공사가 비상경계안을 제출, 의화단 사건 때 8국 연합의 대응을 본받아 각국 군대가 경진선, 경봉선 철로의 관내 전 구간과 철로 연변 20리 이내에서의 남북 군대가 절대 작전을 하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각국 공사들은 이가 자위를 넘는 조치라 반대했으나 일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1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5월 25일 북양정부 외교부가 5.18 각서를 비난했다.
동삼성 및 베이징과 텐진은 중국의 영토다. 일본은 베이징과 톈진에서의 난동 행위가 동삼성에 영향을 끼친다면 부득불 적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본 정부는 단연코 이를 승인할 수 없다.
5월 29일에 난징 국민정부도 승인 불가를 표시했다.
이때 교통총장 창인화이(상음괴)를 대리하여 협정에 서명한 항정사장 조진의 회고에 따르면 장쭤린은 일본이 차관 500만 원을 억지로 쥐어주자 길돈선 종점을 연장해 도문강까지 연장하는 한 구간만 허락했으나 일본이 길회선 건설까지 막무가내로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쭤린이 만주로 철수를 결정하자 아예 차관이 필요없다면서 차관을 물리고 길돈철로 연장 및 차관계약을 파기하려고까지 했다 한다. 장쭤린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일본 고문 고노는 이를 관동군에 알렸고 장쭤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관동군은 장쭤린을 죽여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마침, 5월 30일 장쭤린은 야간 군정부 수뇌회의에서 총퇴각을 결정하였고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6월 2일 요시자와가 장쭤린을 방문, 만약 일본에 협조하면 장제스를 물리쳐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장강을 사이에 두고 국민당과 천하를 반분하라면서 그 조건으로 길회선 접궤 허가, 호로도항 건설 중지, 타통선 개축 공사를 요구했다. 장쭤린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것은 우리 국내 문제인데 귀국이 어째서? 내가 비록 남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해도 귀국의 도움을 빌려 나의 이 정부를 유지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요시자와는 집요하게 서명을 요구했으나 장쭤린은 거듭 핑계를 대며 거절했고, 6월 2일 오후 4시 중난하이에서의 접견에서는 장쭤린이 폭발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일본인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남의 집이 위급할 때 목을 조르니 말이다! 나 장쭤린은 정말 이런 방법은 싫다! 나는 동북인이다. 동북은 나의 고향이고 조상과 부모의 묘소가 다 여기에 있다. 내가 동북을 팔아먹을 것 같은가. 나, 장쭤린이 매국노 욕을 먹으란 말인가. 난 두려울 것도 없다. 빌어먹을, 다 필요 없다!
장쭤린은 비서 겸 일본어 통역인 진경운에게 한뭉치의 서류를 주어 요시자와에게 전달하게 한 다음, 바빠서 만날 수 없단 핑계를 대게 했다. 공사관에 돌아온 요시자와가 이 문서를 읽어보니 문서는 엉뚱한 1925년 협정에 관한 것이고 서명은 없고 읽었단 '열'만 적혀 있었다. 요시자와는 속았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 와중에 관동군 내부에선 장쭤린 암살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관동군 참모장 사이토 히사시의 일기를 보면 만철 부사장 마츠오카 등과 함께 장쭤린 암살을 논하는 내용이 남아 있으며 고모토 다이사쿠의 불온한 움직임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무라오카 사령관, 만철 사장 야마모토, 부사장 마츠오카, 봉천 특무기관장 하다신지, 주중공사 요시자와, 봉천 총영사 하야시, 장쭤린의 고문 마치노 등이 모두 장쭤린 암살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이 당시 고모토를 비롯한 관동군 과격파가 노리는 것은, 장쭤린을 제거하고 더 고분고분한 인물을 내세우는 것에서부터 아예 장쭤린 사후의 혼란을 구실로 출병하여 만주를 통째로 병탄하는 것에 이르렀다. 후지와라 아키라 교수는 고모토의 목표를 만주사변의 프로토타입이라 평했다.
원래는 무라오카가 다케시타 요시하루 소좌를 시켜 베이징에서 장쭤린을 암살하려 했으나 갑자기 베이징에 가려는 다케시타를 수상쩍게 여긴 고모토가 그에게 술을 먹여 그가 장쭤린을 죽이러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모토는 그런 일은 정부가 아니라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면서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제안했다. 고모토는 다케다, 긴다 등의 심복들과 지도를 펼쳐놓고 논의한 끝에 철로 위에서 장쭤린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맨 처음의 목표는 봉천 서쪽 40킬로미터의 거류하였으나 그쪽은 중국의 감시가 엄중하여 황고둔이 장소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때 특공대를 보내 열차를 습격하는 것과 열차를 폭발시키는 안에 대립했는데 특공대를 보내는 것은 너무 흔적이 많이 남아 은폐가 어렵다고 생각되었으므로 기각되었고, 다만 열차가 폭발하지 않으면 특공대를 보내 살해하기로 하였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철도대신 오가와 헤이키치가 대륙낭인 구도 데쓰사부로에게 받은 편지에 따르면, 고모토 다이사쿠가 어떻게 음모를 꾸몄는지가 나와 있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이토 겐지로란 민간인에게 다리 아래에 폭탄을 설치하여 장쭤린을 암살한 준비를 한 다음에, 예비 행위로 남군 편의대로 속일 수 있는 '있으나 마나한' 중국 민간인 세 사람을 끌어들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토 겐지로는 즉각 다른 대륙낭인인 안도 다카나리와 접촉하여 중국인 세명의 포섭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고모토는 독립수비대 2대대 4중대장 도미야 가네오를 포섭하였고 또한 용산에 주둔한 공병 20연대가 봉천으로 자주 지원을 오는 것을 이용하여 이들도 끌어들였다. 그리고 관동군 병력을 동원하여 장쭤린의 행선을 감시하게 하였다. 이후 공병대가 6시간의 작업 끝에 폭탄을 설치했다.
3. 전개
3.1. 장쭤린의 봉천행
관동군이 장쭤린을 암살하려 한단 풍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장쭤린은 이를 듣고 반신반의하였다. 처음에 장쭤린은 승용차를 타고 동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했으나 길이 좋지 않아 차가 몹시 흔들릴 것이라 여겨 난색을 표했다. 이에 기차를 타기로 결정, 장쭤샹이 베이징-유관까지의 안전을, 우쥔성이 유관-심양까지의 안전을 책임지고 연도에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군대를 동원해 지키기로 하였다. 이때 봉천 헌병대 사령관 제은명은 일본 수비대가 황고둔 역의 노도구와 삼동교 주위에 보초를 세워 행인의 출입을 통제시키는 것을 포착, 이를 수상쩍게 여겨 장쭤린에게 비밀 전보를 쳐서 돌아서 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장쭤린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장쭤린도 불안한 것이 있어 봉천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6월 1일로 발표한 다음에 경봉철로에 전용 열차를 대기시켰다가 돌연 6월 2일로 연기했다. 하지만 6월 2일의 차량에는 장쭤린의 다섯번째 부인과 고용인들이 탑승했다. 6월 3일 오전 1시, 장쭤린은 대원수 정장을 입고 베이징 순승왕부 자택을 출발해 정양문 동역에서 봉천행 특별열차에 탑승했다. 군악대가 대원수를 송별하는 군악을 연주했고 국무총리 판푸, 심복 모더후이, 유철, 일본인 군사고문 마치노 다케마 대좌, 기가 세이야 등이 동행했다.새벽 1시 10분, 장쭤린이 출발 시간을 대폭 앞당겨 대원수 제복을 입고 단검을 찬 채로 역에 나타났다. 베이징 원로들, 명사들, 실업계 대표, 외교관들로 구성된 환송 인파가 역을 메웠고 장쉐량, 양위팅, 포육린, 진흥아 등 봉천군벌의 거물들이 배웅했다. 1시 15분에 열차가 움직였고 진윈펑, 판푸, 모더후이, 우국한, 염택부, 유철 등 심복들이 동승했다. 그리고 장쭤린의 여섯째 부인 마씨와 셋째 아들 장학증, 주치의 두택선도 있었다. 일본 고문 마치노와 키가도 있었는데 이중 마치노는 담력 때문에 장쭤린과 잘 통하던 사이었는데 1923년에 예편한 이후로 장쭤린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장쭤린 암살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자청해서 동행한 인물이었으나 <만주군벌 장작림>에 따르면 강경하게 장쭤린 제거를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여러 수행원들은 불안한 정세 때문에 개인적인 구급약과 과자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열차엔 이 외에 1개 중대의 병력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통치자금으로 쓰일 금괴와 여러 가재도구도 있었다.
장쭤린이 탄 열차는 총 20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관차 1량, 철갑차 1량, 3등차 3량, 2등차 2량, 특등차 7량, 2등차 2량, 1등차 1량, 철갑차 1량, 화차 1량으로 구성된 이 열차에서 장쭤린은 10번째 칸에 타고 있었다. 이는 원래 서태후 전용 열차로 매우 호화스러운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차량 내부엔 큰 객실과 침대칸이 있었고 소파와 마작을 위한 탁자를 두었다. 6시 30분에 기차가 톈진에 도착했고 저옥박이 당관둔에서 톈진으로 나와 대원수를 영접했다. 이때 판푸, 마치노가 덕주에 있는 장쭝창을 만나러 간다는 구실로 하차했다.[3] 장쭤린의 사돈이자 전 국무총리 진윈펑도 진윈펑의 부관이 일본 영사관에서 9시에 사카니시 리하치로와 함께 상담할 것이 있다고 하여 하차하여 톈진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친일 성향이 강했던 진윈펑을 살려두기 위한 일본의 조치였다. 반면 창인화이는 이때부터 장쭤린을 수행했다. 오후 4시, 열차는 산해관에 도착했고 장쭤린은 매우 호화스러운 저녁을 먹었다. 장쭤린의 요리사 박풍전은 조연벽과 함께 고기와 가지 볶음, 삶은 콩요리, 채소 고기 채볶음, 조기구이, 시금치 새우 볶음, 매운 닭찜, 배춧국을 준비하여 올렸다. 식사가 끝난 후 장쭤린의 부인인 마씨가 "내일 아침밥은 집에서 먹을 수 있겠네요."라고 말하자 장쭤린이 양치를 하며 "기차 위에선 뭘 먹어도 맛이 별로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한다.
만찬 이후, 흑룡강성 독군 우쥔성이 장쭤린과 담소를 나누었고 이후 모더후이, 창인화이, 유철, 장쭤린이 마작을 하였다. 밤 11시, 열차는 금주에 다다랐고 신민역에 도착했을 때는 낡이 밝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이미 보초들이 가득하여 10여보마다 초소를 두고 열차를 지키고 있었다. 6월 4일 새벽에 열차를 황고둔 역에 도착했고 장징후이가 마중을 나와 집안 식구와 문무관원들이 봉천 신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황고둔 역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엔 노도구-삼동교가 있었는데 이는 일본이 관리하는 남만철로와 경봉철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일본인들이 관리했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봉천 도착을 앞둔 장쭤린은 전망칸으로 옮겨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장쭤린, 우쥔성, 교위처장 온수선 등 3명만 있었다. 우쥔성이 날씨가 추우니 옷을 더 입을 것을 권하자 장쭤린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후 곧 봉천에 도착할 것이니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가 새벽 5시였다.
3.2. 폭발
그 검은 연기와 폭발음에 나 역시 놀랐다. 나는 장쭤린의 머리 역시 하늘로 높이 솟아 날아간 것으로 여겼다.
-고모토 다이사쿠
-고모토 다이사쿠
폭발 직후의 삼동교 |
장쭤린이 우쥔성과 말하는 사이인 새벽 5시 23분, 열차는 삼동교를 지나고 있었고 그 순간 두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관동군이 매설한 600킬로그램의 폭약이 장쭤린이 타고 있던 특별전망차와 식당칸 사이에서 터진 것이다. 구도 데쓰사부로의 서술에 따르면, 고모토의 지시를 받은 공병 중위 후지이 데이쥬가 육교 아래 오른쪽에 두개의 폭탄을, 왼쪽에 한개의 폭탄을 설치한 다음에 만철 전망대까지 전선을 연장하여 그곳에서 상황을 주시하였고, 열차가 다가오자 스위치를 눌러 터트렸다 한다.
장쭤린이 탄 차량은 산산조각이 나서 10미터 솟아올랐고 바퀴 두개 빼고 남은 것이 없었다. 우쥔성은 머리에 쇳조각이 박혀 즉사했고 온수선도 부상을 입었다. 마 부인도 다리에 경상을 입었다. 이외에 농공총장 모더후이가 머리부상을, 육군총장 장징후이가 목 부상을 입었으며 유철, 우국한도 여러 부상을 입었고 일본인 고문 키가 세이야도 얼굴과 손에 경상을 입었다. 영문판 시사신보에 따르면 사망자가 20명, 부상자가 53명이었다 한다. 온수선이 장쭤린에게 다가가보니 옷이 너덜너덜해졌으나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목에 깊은 구멍이 나고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온수선이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동여매고 장학증을 불러 장쭤린을 제은명이 탄 칸으로 옮겼다. 부관 왕헌무가 장쭤린을 안아 눕혔고 장학증과 두택선이 장쭤린을 20분만에 차를 구해서 원수부로 긴급히 옮겼다.[4] 원수부 동원 소청루에 도착하여 거실에 모셔진 장쭤린을 위해 소하연의 성경시의원에서 원장인 영국인 의사를 불러오게 했다. 그가 장뇌주사를 놓았지만 이미 상처가 너무 심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9시, 장쭤린이 유언을 남겼다.
내가 상처가 너무 심하다. 잘못될 염려가 있으니 쉐량이를 빨리 봉천으로 오도록 해라.[5]
그리고 이내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54세였다. 하지만 봉천성장 짱스이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저 부상이라고 발표하고 장쉐량을 봉천으로 불러들였다. 폭발 30분 후, 봉천 교섭총서 일본과 과장 관경택이 봉천 주재 부영사 고노에게 전화하여 이 사건은 일본인의 소행이라고 항의했다. 고노가 증거가 있냐고 불만스럽게 되묻자 관경택은 증거는 더 조사해야하지만 일본인의 관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받아쳤다. 고노는 이 사실을 하야시 규지로 신임 총영사에게 보고했고 일본이 관여한 걸 알고 있던 하야시는 아침 8시, 관경택과 합동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우치다 영사가 중국 측 요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동 남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편의대원 두 명이 있었는데 수비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같이 가서 현장 검증을 해봅시다.
우치다를 따라 조사단이 남쪽으로 가보자 손에 소련제 폭탄을 쥐고 혁명군 복장을 한 두 사람의 건장한 시신을 발견되었다. 나이는 30세 전후고 머리는 빡빡 민 상태였으며 흉부에 서너방의 총을 맞아 숨져 있었다. 시체 옆에는 봉천 밀짚모자 2개와 신발 한짝이 있었고 소지품 검사 결과 편지 두통이 나왔다. 안휘성에서 생산되는 고급 편지지 위에는 '국민혁명 관동 초무사 용지'라는 글이 씌어 있었고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동지여 노력을 경주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우치다는 이 시신이 바로 장제스의 편의대 소속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실은 이들은 그저 동네 모르핀 중독자들로 일본인들의 꾀임에 희생된 것 뿐이었다.
현장의 우치다 영사는 관경택에게 사건을, 장제스의 편의대가 폭탄을 투척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결론짓자고 했으나 폭탄의 규모를 보아서 절대로 투척이 아니었음이 분명하였고 관경택은 크게 반발했다. 6월 5일 오전 9시, 봉천 총영사 하야시가 특무기관장 하다신치, 고모토 다이사쿠, 봉천 헌병대장 미나미, 경찰서장 와다 등 관련자들을 모아 문제의 중국인들을 살해한 것을 4일 새벽으로 입을 맞추었다.
6월 10일, 우치다는 남방 편의대 소행임을 주장하는 합동 보고서를 발표할 것을 강요했고 관경택이 이럴거면 공동 조사서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항의하자 우치다는 당신이 서명하지 않으면 일본군대가 당신을 겨냥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관경택은 장 대원수같은 사람도 다쳤는데 자신의 목숨이 대수겠냐고 뻗대어 우치다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치다는 6월 11일에도 교섭서로 찾아가 중국의 서명을 강요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장제스는 6월 5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어젯밤, 장쭤린이 봉천 황고둔에서 일본의 관동군이 매설한 지뢰의 폭발로 부상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봉천에서는 일본인이 저질렀다고 의심하고 있지만 일본인은 아직도 우리 편의대의 행위라고 우기고 있다. 일본인의 음모는 이와 같이 악랄하다. 동북의 국방을 공고히 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한편 6월 5일엔 중국 단독 조사가 행해졌는데, 봉천 공병창이 러시아 기술자 로미도프와 다얼니를 보내 기술자들이 정교하게 대량의 폭탄을 설치했음을 밝혀냈다. 관경택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장쭤린 대원수가 탄 열차는 총 20량이고 폭발 지점은 열차의 중간 지점인 제9량, 12량이었다. 제9량의 천장과 창문이 모두 돌덩이의 피해를 입었고 침목이 훼손되고 특히 뒷부분이 심했다. 제10량 긴칸이 바로 대원수와 우쥔성이 탄 칸이었다. 차체가 완전히 훼손되어 뒤의 문틀만 남았다. 뒷바퀴가 빠져 우측으로 차체가 기울어졌고 불탄 흔적이 있었다, 11번째 칸은 식당차였는데 파괴가 제일 심했다. 모든 열차 바퀴가 파손되었고 역시 불에 탔다. 이 모든 것을 볼때 폭발 시간은 정확히 일본인들이 조종한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
소위 편의대원이라 하는 자들의 정체에 대해서, 관경택은 상처 부위를 칼로 오려낸 흔적과 모르핀 주사 바늘 자국이 많을 것을 보아 정상인이 아니며 편의대원이라 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 '편의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곧 밝혀졌다. 이들은 위에 언급한 안도 다카나리의 사주를 받은 실직 군인 유대명[6]이 6월 3일 포섭한 오귀생과 장문재란 사람으로, 유대명은 이들을 만철 부속지의 목욕탕인 복개천에 데려가 씻기고 이발하여 혁명군의 복장을 입혔다. 원래 사대명이란 사람도 포섭되었으나[7] 사대명은 겁을 먹고 어둠을 틈타 달아났지만 나머지 둘은 일본군에게 죽은 것이었다. 관동군은 은폐를 위해 이들에게 혁명군 신분증을 주었으며 국민혁명 관동 초무사 용지란 글씨와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동지여 노력을 경주하자."라고 쓰인 밀서를 넣었다. 한편 살아남은 사대명은 이러한 전말을 장쉐량의 부하에게 고해바쳤고 복개천의 사장도 편의대원의 시신을 구경하러 갔다가 이들이 자신의 가게에 왔던 자들임을 알아보고 이를 제보했다. 일본 민정당의 조사 끝에 소련제 폭탄이란 것도 봉천 고물상에서 일본 헌병대장이 산 것임이 밝혀졌다.
3.3. 일본의 반응과 내부사정
사건을 전해들은 만철의 야마모토 총재와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장쭤린을 이용하여 만주에 권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장쭤린의 죽음에 큰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6월 4일, 하야시 규지로 총영사는 "범인:이번 폭파 사건은 그 결과에 비춰 판단하건대 규모가 상당히 크고 게다가 충분한 준비를 거쳐 실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하고 <장쭤린 폭살 사건 임시 조서>란 제목의 전보를 보냄으로 관동군의 범행임을 의심하는 암시를 넣었다. 봉천 영사관 쪽도 현장을 둘러보고 이것이 관동군의 소행이란 심증을 굳혔다.
하지만 관동군은 장제스를 핑계대며 발뺌했다. 6월 4일 사이토 히사시 참모장은 육군차관 하타 에이타로에게 "본일 5시 30분경 장쭤린이 탄 것으로 보이는 열차가 황고둔 역을 지나 남만선 교차 지점을 통과할 무렵, 남방파 편의대로 보이는 자들이 운행 중인 열차를 폭격하여 장쭤린과 우쥔성 등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그 외 몇명의 사상자가 있었다. 한편 지나위대(관동군)는 같은 장소 부근으로 가 편의대로 보이는 이들에게 사격을 가했지만 아군과는 하등의 사고를 낳지 않았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같은 날 보낸 극비전문에서 사이토 참모장은 '편의대로 보이는 이들'을 어느새 편의대로 단정하였다. 육군성은 이를 바탕으로 오전 10시 30분 "어떤 사람이 심양역과 봉천역 사이의 교차점에서 장쭤린이 탄 열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장쭤린과 우쥔성은 경상을 입었고 몇 사람이 사망하였다. 경비대가 즉시 출동하여 현장에서 도주하던 편의대원을 사살하였다.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는 그 어떤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란 성명을 발표했다.
오후 5시 24분, 사이토는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 도이하라 겐지 대좌를 보내 장쭤린을 문병했다는 거짓 전문까지 보냈다. 사이토 히사시 참모장은 또한 장쭤린의 비서인 도상명을 만나 남방 간첩들의 행위임을 주장했고 이후에 일본은 이 주장을 고수하면서 잡아뗐다. 한편 일본 내부에서도 장쭤린의 암살이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유력신문들이 호외를 발행했고 장쭤린에 대해서 그가 일본에 우호적인 지도자였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6월 7일 전문에서 관동군은 여전히 장제스 아니면 장쭤린의 심복의 소행이라 주장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 수뇌부가 고모토 다이사쿠를 도쿄로 소환하여 심문했을때, 고모토 다이사쿠는 사이토와 같은 주장을 펼치며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육군 수뇌부는 고모토를 더 추궁해서 만약 일본의 소행이라고 밝혀지면 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고모토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다나카 총리에겐 고모토의 주장을 기반으로 쓴 보고서를 올렸다.
이렇듯 일본 육군 상층부가 내막을 숨기려 애썼으나 헌병대 사령관 미네 유키마쓰의 조사와 입헌민정당의 추궁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도 차차 이 사건이 관동군의 소행이란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9~10월이 되면 다나카 총리와 시라카와 육군대신을 비롯한 일본 정부도 내막을 알게 되었다. 다나카는 범인을 벌하여 규율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으나 각료와 육군이 반대했다. 시라카와 육군대신과 오가와 헤이키치 철도대신은 다나카를 공박하며 사건을 공표하는 것이 황실에 해롭고 중일관계의 악화를 가져와 일본의 이익에 손해라고 주장했다. 다나카는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지지를 받아 일을 추진하였다. 다나카는 12월 24일에 위의 내용을 상주하여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와 소수인원이 저지른 일이라며 범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육군을 숙정하며 규율을 바로잡을 것이라 했다. 12월 25일, 다나카는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와 진다 스테미(珍田捨巳)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 여겨 그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각료들은 군법회의에 반대하며 군행정상의 사건으로의 처리를 요구했다. 12월 28일, 시라카와가 육군이 조사하겠다고 상주했으나 군법회의는 언급하지 않았다.
1929년 56차 제국회의에서 사건을 짐작하던 입헌민정당은 군의 의향을 알아차리고 사건에 대한 해명을 정부에 추궁하지 않았다.[8] 1929년 1월 17일, 히로히토 천황은 시라카와에게 사건을 조사하도록 조사했고 1월 19일에 다나카에서 의회 대책 방침을 물었다. 2월 2일, 히로히토 천황은 다나카에게 조사 진행을 물었고 다나카는 내각이 장쭤린 암살 사건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결국 히로히토 천황은 다나카에 대한 신임을 거두어 버렸고, 다나카는 궁지에 몰려 결국 자신이 양보해 육군을 돕는 것만이 살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내각은 사건을 은폐하여 행정문제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3월 27일 시라카와가 내각의 결정을 히로히토 천황에게 보고하여 무라오카 조타로와 고모토 다이사쿠가 죄를 지었으나 사실을 공표하고 책임을 물어 엄벌에 처하면 국익이 침해된다고 보고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이에 동의했다. 허버트 빅스는 이 결정이, 히로히토 천황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침략을 꾀하려는 세력을 부추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다나카 기이치는 무척이나 완화된 처벌 결과에 대해 히로히토 천황에게 상주하며 이를 무마하겠다고 했는데 이때 쇼와 덴노가 분노하여 다나카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입헌정우회 내각은 붕괴되고 다나카는 쫓겨났다. 이로서 입헌민정당 정권 하마구치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이후 히로히토 천황은 독백록에서 이를 젊은 혈기의 소치라 변명했지만 허버트 빅스는 이를 구차한 핑계로 치부하며 다나카가 쫓겨난 것에서 장쭤린 암살은 구실에 불과하고 다나카가 쫓겨난 이유는 다나카가 무능해보였으며 천황을 우습게 알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3.3.1. 히로히토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와 의지
이 사건의 중요성 중 하나는 히로히토 천황의 정치력 영향력 행사와 의지가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이다.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히로히토 천황은 독백록이란 문서를 작성한다. 독백록은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중이던 1946년 6월에 문서화됐고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이 죽은 직후 『쇼와 천황독백록』으로 공개되었다. 독백록은 “천황이 전쟁 지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천황은 전쟁에서의 무력한 희생자였다는 것을 변명하는 기록”한 문서였고 작성의 목적은 “천황을 도쿄재판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9]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독백록은 오히려 히로히토 천황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관여했다는 증거라고 평가한다. 독백록을 읽어보면 당시 천황은 내외의 정세에 통달하고 있었으며, 내각의 인사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10] 그 독백록에서 히로히토는 관동군 참모장교 고모토 다이사쿠가 저지른 1928년 만주군벌 장작림 폭살사건에 관련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히로히토는 당시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내각을 총사직하게 했었다. 이에 대해 히로히토 천황이 자신의 ‘젊은 혈기’로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질타하여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내각총사퇴한 점을 반성하고 이후 내각이 천황에게 상주(上奏)하면 그것이 설령 자신의 의견과 달라도 재가하기로 했다고 술회했다.[11]
앤드루 고든은 『현대일본의 역사』에서 당시 폭살사건을 설명하며 히토히토가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의지와 영향력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1928년 6월, 관동군 참모장교
고모토 다이사쿠가 중국 군벌
장쭤린이 타고 있던 열차를 폭파하고, 그것을
장쭤린과 대립하는 중국인 라이벌들의 짓인양 위장했다.…관동군 모략자들은 그의 폭살이 계기가 되어, 다나카 총리가 만주에서 더욱 강경한 정책을 지지하게 되기를 기대했다.…
다나카는 관동군 지도자들이 바라고 있던 과격한 방침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쭤린 폭살이 실제로는 관동군의 짓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자, 천황으로부터 다나카 내각에게 군부가 안팎으로 체면을 잃지 않게 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다나카의 사건처리에 대해 히로히토 천황이 불만의 뜻을 표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천황이 위기의 순간에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의지와 영향력을 갖추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12]
3.4. 극동국제군사재판
사건의 진상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였다. 이때 다나카 류키치가 증인으로 출석하여 사케트 검찰관의 독촉에 대답했다. 다나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장쭤린의 죽음은 당시 관동군 고위급 참모 고모토 대좌의 계획에 따라 실행된 것입니다. (...) 만주국을 안거낙업의 땅으로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고모토 대좌는 장쭤린을 제거하고 장쉐량을 내세워 전과 다름없이 그 목적을 실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1921년[13] 6월 3일, 베이징을 출발한 열차를 남만 철도와 경봉 철도의 교차점에서 폭발했고 장쭤린은 다음날 사망했습니다. 열차를 폭파한 것은 당시 조선에서 경성으로 와 있던 조선 경성의 공병 제20연대 소속 일부 장교 및 부사관과 병사입니다.
다나카는 이것을 1935년 신경에서 고모토에게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후로도 다나카는 거침없이 일본 육군의 음모에 대해서 폭로했는데 이 때문에 다른 피고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으며 도조 히데키는 참으로 의외였다면서 불쾌감을 표했다.
4. 결말
관동군의 소행으로 장쭤린이 사망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때까지 일본 정부는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아주 놓아버린 상황은 아니어서 그 후속조치에 해당되는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지와라 아키라는 만약 이때 정부가 군에 대해 통제하지 않았으면 만주사변은 3년 일찍 일어났을 것이라 평했다.장제스를 막기 위해 양위팅, 장쭤샹, 쑨촨팡과 함께 군사를 지휘하던 장쉐량은 산해관 너머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장쭝창에겐 장제스에게 투항할 것을 설득하는 한편 나머지 봉천군 3만명을 데리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6월 17일 봉천으로 돌아왔다. 장쉐량이 봉천으로 돌아와 봉천성 독판이 되어 장쭤린을 승계하기 위해 움직이고 나서인 6월 21일에야 봉천독판공서 명의로 장쭤린의 죽음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이후 봉천군벌의 수장 자리를 두고 정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장쭤린의 자리는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계승하였다.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단행하여 국민정부에 합류하였고 이로 인하여 중국은 위안스카이 사후 10여 년 만에 통일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2년만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이 일어나게 된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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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육군>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장쭤린 폭살에 참가했던 독립수비대 제2대대 4중대와 공병 20연대의 생존자들 중에서 이 사건에 가담한 자들의 증언을 얻기 위해 노력해보았으나 얻은 것이 없었다 한다. 다만 중일전쟁 중 전사했던 도미야 가네오가 1928년 말에 남긴 일기엔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었다.
추억이 많은 1928년이었다. 중대장으로서 중대의 통솔 및 수비 근무는 예년에 비해 성적 양호, 유쾌하게 생각할 만하다. 특히 동북 삼성 시국의 중심에 서서 마음껏 활동하고 봉천 수비대의 명성을 드높였다. 사실 만주는 우리 중대의 독무대였다. 공적 조사에서도 하사와 병졸은 대대 안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중대장으로서 아마도 올해가 내 황금시대일 것이다.
마치노 다케마(町野武馬)의 모습
- 장쭤린과 톈진까지 동행했던 육사 10기 출신의 예비역 대좌 마치노 다케마(1875~1968)는 아이즈 출신으로 반조슈파벌 인물이었다. 장쭤린 죽음에 개입했단 의심을 받던 그는 전후에 정계 자문위원으로써 우익 정치가로 활동했고 작가 야마모토 유조에게[14] 장쭤린 암살 사건에 관한 자신이 아는 전말에 대해 털어놓았으며, 이 내용은 그가 희망한대로 그가 사망한 후 30년이 지나서 공개되었으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별 내용이 없었다.
- 한편 현대 일본의 미카사 공원에서는 이 사건에 관련된 전시에서 폭탄 투척 내용을 누락한 채 코민테른의 소행이라는 역사왜곡성 주장을 펼치고 있다. [15]
5.1. 고모토 다이사쿠
한편 고모토는 참모본부에 진술을 하기 위해 도쿄를 갔을때 자신을 마중나온 작전부장 아라키 사다오와 작전과장 오바타 도시로에게 이번 사건이 관동군의 소행임을 비밀리에 알려주었다. 이런 식으로 고모토가 흘린 진실을 알게 된 일본 육군 내부의 만몽 병탄을 주장하던 '후타바카이' 모임의 장교들은 고모토를 지킬 것을 천명하며 고모토를 찾아가 격려하며 그의 뜻을 잇겠다고 외쳐댔고 급기야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집무실에 쳐들어가서 "관동군은 관련이 없다!" 하고 소리 지르며 상급자인 육군대신을 윽박질러댔다.(...) 이러한 황당한 행패에 대해서 호사카 마사야스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모토로 대표되는 군인들의 '대의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심정과 행동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의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후 고모토 다이사쿠는 중일전쟁이 패전하면서 옌시산의 포로가 된 이후 그에게 반공의 대의를 내세워 그에게 충성했지만 옌시산이 마오쩌둥에 밀려 난징으로 달아나자 이번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향을 거부하고 옥사했다.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한다.
5.2. 장쉐량의 회고
1991년 12월 10일, NHK와의 인터뷰에서 장쉐량은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 부하는 아버지가 부상을 당해 봉천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주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나는 당시 북벌에 대비하기 위해 베이징에 있었고, 군을 이끌 책임이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즉시 봉천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부하가 아버지의 죽음을 처음부터 알려주었더라면 나는 곧바로 봉천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 꼭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일본군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때 일본이 아버지 다음으로 나를 죽였다 해도 제2, 제3의 장쉐량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일본이 선택한 암살이라는 수단은 정치적으로 결코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즉각 관동군의 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건 당시 현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라곤 일본 군인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일본은 이 사건을 획책하기 위해 남만주 철도를 멈춰 세웠습니다. 이는 열차를 일본이 폭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 물론 대단히 불쾌했습니다. 일본은 아버지의 원수이자 내 나라의 적이 된 것입니다. 당시 내가 일본에 품고 있던 감정, 그것은 다음과 같은 속담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는 하늘의 원수보다 더 증오스럽다.'"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정작 장쉐량은 만주의 지배자로 있는 동안 그렇게 적극적인 반일정책을 펼친 바가 없다.6. 참고문헌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일본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7. 관련 문서
7.1. 사건
7.1.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7.1.2. 반장전쟁~ 만주사변
- 편견회의(1929.1.1~1929.12.15)
- 호남 사건(1929.2.21)
- 1차 장계전쟁(1929.3.26~1929.6.27)
- 1차 장풍전쟁(1929.5.~1929.7)
- 중동로 사건(1929.7.10)
- 봉소전쟁(1929.7.20~1929.12.22)
- 2차 장계전쟁(1929.9.7~1929.12.19)
- 2차 장풍전쟁(1929.10.11~1929.11.20)
- 장당전쟁(1929.12.5~1930.1.14)
- 중원대전(1930.4.5~1930.11.4)
- 탕산 사건(1931.2.28)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만주사변(1931.9.18~1932.3.1)
7.2. 인물
[1]
가와모토로 번역되는 곳도 종종 확인된다.
[2]
만주군벌 장작림에선 이 조치가 도쿄의 참모본부의 지시였다고 하고 서문당 다큐멘터리 현대사에선 관동군의 독단적 조치라 적고 있다. 자세한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서술하겠다.
[3]
1961년에 나온 마치노 평전 격인 아이즈사혼풍운록에 따르면, 이 것은 장쭤린의 지시였다고 한다.
[4]
여담으로 이때 장쭤린을 옮길 때 썼던 차량은 어느 신혼부부가 타고 있던 결혼식용 차량이었는데 장쭤린을 옮기기 위해 이들을 무리하게 쫓아내고 차를 뺏었단 말이 있다. 장제스 평전에는 이 차가 봉천 방직공장에서 구한 포드 자동차라고 적혀 있다.
[5]
"쇼와 육군"에 따르면, 장쉐량의 이름이 아니라 여섯째 아들을 불러오라고 표현.
[6]
유재명이라고 쓴 곳도 확인되는데 장쭤린에게 원한이 있었다 한다.
[7]
쇼와 육군이나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현대사 등에는 왕씨라고 적혀 있다.
[8]
하지만 정부를 비판하는 데에는 쓰인 것으로 보인다.
[9]
박진우, 『천황의 전쟁 책임 : 봉인·망각과 왜곡·미화의 역사인식』(서울 : 제이앤씨, 2013), p.23-24
[10]
박진우, 『천황의 전쟁 책임 : 봉인·망각과 왜곡·미화의 역사인식』(서울 : 제이앤씨, 2013), p.27
[11]
박진우, 『천황의 전쟁 책임』,p.26
[12]
앤드루 고든, 『현대일본의 역사 : 도쿠가와 시대에서 현대까지. 2』, 문현숙, 김우영 옮김 (서울 : 이산, 2015), p.421
[13]
오타가 아니라 다나카 류키치가 1928년과 1921년을 혼동했다.
[14]
<쇼와 육군에는 이 시기가 1971년으로 나오는데 정작 마치노는 1968년에 죽은 후였다. 오타이거나 작가의 실수이거나 야마모토 유조가 그 내용을 정리한 때가 1971년이 아닌가 추정한다.
[15]
해당 주장은 우익적인 성향이 짙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신빙성이 적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 내의 소수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