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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5:18:44

이만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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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의 헐크 이만수.jpg

1. 개요2. 1982~1990년3. 전성기 이후4. 수비 능력에 관한 논란5. 은퇴6.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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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1982~1990년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수상자 (1983~1987)
파일:이만수 VS 김봉연.jpg
프로야구 초창기 통산 100호 홈런 선착 경쟁을 벌인 이만수와 김봉연

대구상고, 한양대를 졸업하고 1982년 삼성에 입단했다. 한국프로야구 원년 멤버 중 한 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선수로 16시즌 동안 활동했다. 프로 원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 선수이다. 별명은 헐크. 등번호는 22번으로,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KBO 영구결번이다. 현재 삼성의 영구 결번인 양준혁의 10번도 다른 선수들이 단 적이 있었고[1] 삼성의 또 다른 영구 결번 번호인 이승엽의 36번도 그 이전의 선수들이 단 적은 있지만 이만수의 22번 만큼은 은퇴한 후에도 아무도 단 사람이 없어서 삼성 라이온즈 역사에서 유일하게 22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되었다.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한국프로야구 1호 홈런을 때려내는 이만수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이다.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서 팀의 4번 타자 겸 주전 포수로 출전하여 1회에 2루타를 치며 타점[2]을 기록했으며, 5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참고로 이만수는 이날 프로 출범 1호 타점과 1호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등나무 가구 세트를 받았다.

삼성의 초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첫 전국구 스타라고 할 수 있다. 장효조&이만수- 양준혁- 이승엽으로 시작되는 본좌 계보의 시작이었으며. 삼성의 역사는 이만수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삼성 본좌 라인 중 유일한 우타자이지만 삼성에서의 우승 경험은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룬 1985년 뿐,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었다.
파일:최초 통산 100호 홈런을 달성한 이만수.jpg
1986년 9월 2일 대구 빙그레전에서 KBO 최초 100호 홈런을 달성한 뒤 부상으로 받은 대우자동차 르망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만수

히스토리 13 이만수 vs 김봉연 '최초 100호 홈런 전쟁'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포지션은 포수.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 다양한 타이틀 및 통산 기록으로 대한민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실성과 노력으로 대표되는 선수로 1985년 삼성이 플로리다로 훈련을 갔을 때, 정규 훈련+야간 개인 연습+새벽 개인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 현지인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6시즌 동안 1449게임에 출장, 5034타석에서 타율 .296, 타점 861, 홈런 252, OPS .907을 기록했다.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하나로, 포지션이 무려 포수였기에 당연히 KBO 포수 역사상 최고의 타격을 보여준 포수이다.[3] 동시에, 1980-90년대 최고의 타자로 평가받는다. 16시즌동안 3할 타율을 6번, OPS 9할 이상을 9번이나 달성하였으며, 이때 세이버메트릭스나 WAR같은 개념이 한국 야구에는 아예 없었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별 의미가 없으나 1983-2003년 약 20년간 스탯티즈 기준 통산 타격 WAR 1위 자리를 유지했다.[4] 통산 OPS+가 155인데, 양준혁 이승엽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다. 더군다나 비교대상인 선수들이 1루수/지명타자인 것과 다르게 이만수는 포수였다! 역대 홈런왕 3번,[5] 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한 대선수다.

통산 wRC+가 159.0으로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뛴 양준혁에 이어 역대 2위.[6] 참고로 상술한 기록을 이만수는 포수로서 세웠다. 21세기 들어 KBO의 리그 평균 포수 wRC+는 단 한해도 100을 넘긴 적이 없으며, 전 시즌 평균하였을때 약 90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포수 포지션에서, 단 한 해만 wRC+ 159를 기록했다면 MVP 후보감인데, 이만수는 통산 기록으로 159를 찍었고 80년대 평균하여 170을 넘겼으며, 최전성기 기준으로는 무려 200을 넘겼다.[7] KBO 역대 최고의 포수를 넘어 역대 최고의 우타자로 부를 만한 선수이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그의 볼넷:삼진 비율. 통산 4,310타수 672볼넷 490삼진으로 10타수당 삼진 1개에 지나지 않을 만큼 까다로우면서도 파워를 겸비한 타자였다.

여기에 1982~1990년, 즉 이만수의 전성기로 한정지어 계산하면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9년 평균 타 출 장이 .310 .399 .554에 OPS가 .953으로 동기간에 OPS가 0.9를 넘는 선수는 오직 이만수 뿐이며, wRC+는 무려 173.2에 9년 합계 sWAR은 49.77이나 된다![8] 누적홈런은 183개로 당연히 1위, 그러면서도 BB/K가 1.19나[9] 되는, 단순한 홈런왕을 넘어서 타격 부문의 지배자라고 불릴 수준이었다. 당시 리그에서 알버트 푸홀스 미겔 카브레라, 마이크 트라웃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타자였음이 명백하다.

역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던 정상급 우타자 이대호와 비교해보아도 통산 wRC+는 이만수가 159, 이대호가 141이고[10][11], 누적 sWAR은 5034타석을 소화한 이만수가 65.29이고 7072타석을 소화한 이대호가 56.71로 둘 다 이만수가 우위다. 여기에 144게임으로 환산하여 비교하였을때, 최전성기 기준으로도 (각각 가중출루율, wRC+, sWAR/144G)84 이만수가 0.467, 204.6, 9.00이고, 10이대호가 0.482, 192.4, 9.55이다. 이만수는 프로선수 통산 wRC+ 200 이상을 두번이나 기록했는데 반해 이대호는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물론 이만수가 뛰던 때는 외국인 선수가 없었고 경기수도 적었으며 비율스탯 이런 거 다 떠나서 80년대 선수 이만수랑 21세기 선수 이대호를 비교하면 절대적인 기량은 이대호가 낫겠지만, 절대적인 기량 비교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야구선수 각자가 현역이었던 시절에 한 리그에서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플레이를 했는가, 얼마나 지배적인 선수였는가 비교하는 게 wRC+, WAR 등 야구의 스탯이며, 그런 스탯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현역 시절 이만수가 현역 시절 이대호보다 지배적인 타자라는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다. 100년 전에 뛰었던 베이브 루스 월터 존슨도 당시 MLB의 수준, 흑인 선수가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21세기 현대 야구에서는 아무리 잘 잡아봐야 한 팀의 주전급 멤버 수준이지만 각각 투타에서 사상 최고 대접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각자 동등한 조건에서 겨루면서 다른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한 시대의 리그를 압도했던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만수도 그런 격이다.[12]

거기다 KBO 리그에서의 성적은 이대호보다 확실히 우위로 평가받는 이승엽의 전성기인 1995-2003년으로만 한정해도 이만수의 전성기와 동급이다. 9년 평균 이승엽의 wRC+는 170.9, 이만수는 173.2. sWAR로 비교하면 이승엽이 5005타석을 들어서고 56.83승을 기록했는데 이만수가 3200여 타석을 들어서고 49.77승을 기록했다. 포수로써 수비 보정이 이루어졌더라도 타석수가 2000타석 가까이 차이나고 7승 더 기록했다면, 물론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동급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수치이다. 물론 이승엽 역시 이대호처럼 전성기에 NPB에 나가 있었던 시기가 존재하고, NPB에서도 부상 등으로 부진하기 시작한 2008년 이전까지 시기 (2004년~2007년) 중 적응기인 2004년을 제외하고는 1인분 이상은 하는 타자였기에 wRC+ 면에서 다소 손해를 보긴 했다. 95~96 시즌 이승엽은 홈런타자로 각성하기 전이라 wRC+가 그다지 우수하지 않다. 물론 WAR로 따져보면 그 당시 이승엽도 좋은 타자였던 건 맞지만 95~96시즌 이승엽보다는 04~05 시즌 이승엽이 월등하게 좋은 타자였다.

현재까지도 이만수의 선수 시절 수준의 타격 성적을 냈거나 앞으로 비슷한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보이는 포수는 나오지 않았다. 타고투저가 우세한 현재의 KBO 리그와 달리 이만수는 프로 선수 생활 1982~1997년까지 거의 15년 이상을 투고타저 시대에 뛰었던 선수였다. 게다가 막바지인 1993~1997년에는 포수로 뛴 경기가 단 5경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외하고 순수 포수로서의 성적을 보면 통산 성적보다 훨씬 더 좋다. 통산 타율이 .296인데 포수 시절인 1982~1992년까지의 성적만 가져오면 통산 타율이 무려 .304에 달한다. 알다시피 포수로서의 성적으로 본다면 현재 KBO 리그에서 최고 포수로 인정받는 양의지가 본격적으로 타격에서 정상급 성적을 내기 시작한 2018년 이전, 2,000타수 이상의 KBO리그 선수 중 포수로 뛴 경기를 기준으로 할 때 타율 3할을 을 넘긴 포수는 이만수, 단 한 명 뿐이었다.

21세기에 강민호 양의지가 타자로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지만, 포수 기준 OPS 1.0을 넘기는 대활약을 한 것은 양의지도 프로 14년차인 2018년에야 처음 기록한 것이며, 강민호 역시 2015년 한 번뿐이다. 강민호가 2015시즌에 이만수를 제치고 포수 단일시즌 OPS 역대 1위를 기록했지만 이때는 타고투저 시즌인걸 감안해야한다. OPS 0.900 이상을 기준으로 잡아도 양의지는 2018년을 포함할 경우 3시즌, 역시 강민호도 3시즌 뿐이다. 반면에 이만수는 OPS 1.000 이상 시즌이 2시즌, .900 이상 시즌은 10시즌이다. 그것도 포수로서 뛰었던 1982~1992년 사이에 모두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만수의 통산기록을 넘기려면 양의지나 강민호나 각자의 최고성적을 앞으로도 5년 정도는 지속해야 한다. 또한 타고투저로 인해 같은 OPS라도 wRC+, WAR 등에서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성적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려야 비교가 된다. 그리고 이만수는 대졸 + 1년 유급으로 인해 프로야구 기준 통산 성적에서 전성기 2년 정도를 손해를 본 데다가 당시 경기수도 현재 144경기에 비하면 훨씬 적은 80~126경기 정도였기 때문에 그만큼 경기수, 타수에서 크게 모자란데도 저 성적이다.[13] 타격 성적만 보면 이만수는 다른 선수와는 아직까지 비교가 불가능한, 그 정도로 압도적이다. 최근 양의지가 2018~2020년 모두 OPS 1.000 이상, wOBA .430 이상을 기록하면서 이만수의 기록을 노리고 있다만, 2021년 한국 나이 35세가 되는 양의지가 비율 기록으로써 통산 wRC+ 134.5를 15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은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경기숫자 차이 덕분에 누적 기록으로는 박경완과 이만수를 모두 넘어설 가능성이 크지만.

위대한 타자이지만,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나마 1번의 우승이라도 있으니[14] 그걸로 위안을 삼자. 하지만 삼성은 1985년 통합우승의 경우 공식적인 우승이지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못했고 이만수를 보유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0회 우승, 6회 준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선수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우승은 마침내 2005년에 월드시리즈에서 코치로 재직중이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우승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이만수가 뛰던 당시 삼성이 새가슴 팀이었다고 이만수 또한 새가슴으로 몰아가면 곤란한 것이, 이만수의 포스트시즌 성적을 보면 그는 절대 새가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통산 포스트시즌 타격 WAR은 스탯티즈 기준 1.88인데 이는 역대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든 삼성 야수 중 1위에 해당한다. 참고로 바로 뒤가 1.85의 이승엽이다. 타율 .257은 포스트시즌이면 괜찮은 타율이고, 53안타는 팀내 역대 7위, 홈런은 7개로 2위, 33타점은 4위에 해당하며 그의 앞에는 이승엽, 박한이, 양준혁 등 왕조 시기의 후배들뿐이다. 즉 1980년대 포스트시즌에 참가했던 삼성 선수들 중 가장 좋은 포스트시즌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은퇴하는 1997년까지 이만수는 포스트시즌 안타, 홈런, 타점, 득점 등 주요 지표에서 1위를 마크했으며, 이만수에 이은 팀내 PS 타격 WAR 2위는 장효조였는데 1.22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다만 병살도 7개로 1위였고[15], OPS 같은 지표가 좀 떨어졌다는 건 특기할 점이다. 그리고 이만수의 포지션이 포수인 걸 생각하면 수비 기여도 및 클러치 상황까지 합한다면 총합 포스트시즌 WAR 또한 팀내에서 손꼽힐 수준이었을 것이다. 다만 투수들까지 합산한다면 투수들에게 밀린다.[16]

선수 시절 최악의 흑역사라면, 1984년의 트리플 크라운 달성 과정일 것이다. 당시 김영덕 감독이 이만수의 타율 1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홍문종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내는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강행하여 트리플 크라운의 가치가 빛을 잃었고, 그 대가로 시즌 MVP도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으로 맹활약한 롯데 최동원에게 내어주는 흑역사가 있었다. 뭐, 이만수는 이미 1년 전인 1983년 시즌에 MVP를 수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만수는 훗날 인터뷰에서 "83년도는 본인이 받지 말아야 할것을 받아 의아했고, 84년은 당당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아 불만"이라고 말했다.

3. 전성기 이후

기량이 떨어진 1990년대 중반에는 주전으로 거의 나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며 경기가 끝나가면 팬들은 이기건 지건 대타 이만수를 외쳤고 이만수가 나오면 병살을 치든 삼진을 당하든 홈런을 치든 팬들에게 환호성을 받았다.

그 옛날 에스에스패션(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위크엔드[17]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바로 아래 동영상을 참고하자.

이 때만 해도 이만수는 어린이들에게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당시 야구 선수가 이런 광고에 나올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초창기 크보의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말년에 대타로 2루타라도 때려내면 상대팀 응원석에서도 기립박수를 쳐주기도. 삼진을 당하면 다들 만수바보~ 만수바보하고 관중들이 놀렸는데 그게 비웃는게 아니고 정말 동네 친한 바보형(..)을 놀리듯이 한것으로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한편, 1996년 6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 쌍방울 경기에서 박진석과 빈볼시비로 추격전까지 벌였는데,[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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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험악해야 정상인 상황인데 어째서인지 둘의 표정이 훈훈하다. 그래서 관중들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이 때 박진석의 발이 너무 빨라서 쫓아가던 이만수가 제풀에 지쳤다고... 그런데 더 웃긴건 이만수가 추격을 하면서 삼성 후배선수들한테 "저거 잡는 사람 내가 빵사준다"라고 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박진석과 이만수의 술회

참고로 이만수를 말리러 뛰어가는 이광길 코치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이만수 수석코치와 SK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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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현역 선수 시절.[19]

선수 말년 시절, 삼성 구단은 이만수에게 은퇴 제의를 몇 차례 했지만 이만수는 이를 계속 거절했고, 결국 1997년 시즌 후 자유계약선수로 방출당하며 은퇴식도 치르지 못한 채 결국 은퇴했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던 슈퍼 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방출이라는 결말로 끝을 맺으면서 상당히 초라하게 은퇴한 셈. 이만수가 은퇴하면서 KBO 출범 원년 멤버들은 모두 현역에서 은퇴하게 됐다. 은퇴 후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다.

한편 선수 시절에 팬들에게 캔 투척을 했다는 웃지 못할 흑역사가 있었다. 1990년 5월 29일 해태와의 3연 전 중 2패를 하고 병살타를 친 뒤에 관중석에 날아온 맥주 캔을 맞았는데, 분에 못 이겨 이것을 다시 던졌던 것. 설상가상으로 당시 이만수가 던진 캔은 한 관중의 안경테를 맞추어 부러뜨렸고, 이로 인해 대구 구장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결국 이만수는 관중들 앞에서 마이크 들고 직접 사죄를 했고, KBO로부터 벌금 및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날 알려진 사실은 당시 그의 장남의 담임선생님을 초대한 자리 앞에서 보인 터라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밝혔다. 장남은 그래서 한동안 아빠인 이만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만수 입장에서도 백 번이고 할 말이 없었다고..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cateid=1028&newsid=20110711130650603&p=SpoChosun

4. 수비 능력에 관한 논란

다만 수비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영덕, 김응룡, 심지어는 백인천 등의 감독들은 팀의 공격력을 믿고 이만수가 1이닝이라도 더 수비를 하게 하려고 투수에게 배팅볼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김성근 역시 이만수를 보고 "이만수의 경우에는 단순하고 착한 친구다"라고 평했다. 단순해서 상대팀 감독으로서 상대하기 편했다고.

김성근 감독은 강연을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이 OB 코치 시절, 이만수 팔뚝에 힘줄 바뀌는 것만 보고도, 구질을 다 알아내서 써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상식선에서만 봐도 이만수 깎아내리기의 일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는데도 뒤를 보면서 이만수 팔뚝을 보고 사인은 읽었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포수 이만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발언이라는 평가가 있다.[20]

그리고 김성근의 OB감독 시절, 즉 84~88 5시즌 동안 OB는 한번도 삼성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으며, 상대전적도 56승 1무 39패로 삼성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게다가 86년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패했다. 김성근이 삼성 외 다른팀의 감독을 맡은 시절과 이만수가 현역이었던 시절, 김성근의 팀이 삼성보다 윗자리에 있었던 경우는 3번인데 89년 태평양과 96,97의 쌍방울이었다. 96,97년도에는 이만수가 은퇴를 앞둔 시기에다 포수로서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한 대타 상태였다. 그렇다면 김성근의 팀이 포수 이만수가 이끄는 삼성을 제대로 누른건 89년 태평양 감독 시절 준플레이오프가 유일하다. 그걸 두고두고 사골처럼 우려먹는다고 보면 될 듯.

이만수의 수비 능력을 깎아내리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는데 바로 1990년 한국시리즈 3차전 당시에 백인천 감독이 일부러 홈런을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다. 당시 LG가 3-0으로 앞선 9회말 상황에서 백인천 LG 감독이 자기팀 배터리에게 직구 승부를 지시하였고 이만수는 3-2 추격 홈런을 때렸었다. 후일 이 사건에 대해서 백인천 감독은 이만수를 다음 경기의 선발 포수로 출전 시키기 위한 볼배합이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만수가 그만큼 만만했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시리즈라는 우승을 가리는 경기에서, 1점차로 추격하는 홈런을 일부러 맞아줬다는 말이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배짱이 아닐수 없다. 다만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당시 홈런을 때렸든 말든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이며 백업과 넘사벽의 차이를 보이던 포수를 영향력이 큰지도 의문인 포수 리드 하나 대문에 상식적으로 다음 경기에 뺄리 없다는 점, 홈런 더비에서도 몇개 못치는 홈런을 무슨 수로 의도했냐며 예지안이라도 있었냐는 점, 한국시리즈에서 일부러 1점차로 추격을 허용하라는 감독이 실존하면 그거야말로 정상이 아닐 거라는 점을 들어, 그냥 백인천 감독의 자기 변명성 발언 및 승자의 여유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당시 백인천 감독 말에 따르면 홈런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안타 한 방 맞아주려는 의미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며, 다른 포수인 박정환의 경기 운영에 LG 타자들이 어려워해서 이만수를 계속 내도록 정삼흠에게 '바깥쪽 낮은 직구'를 던지도록 했다고 밝혔다. 즉, 이만수의 수비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백업 포수인 박정환의 볼배합을 LG 타자들이 낯설어해 오히려 더 힘들어했다는 투의 발언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만수의 수비 능력이 뛰어 났다는 주장과 기록도 많고, 같이 뛰었던 김시진 롯데 자이언츠감독에게 그의 수비 실력에 대해 묻자, 김시진과 배터리를 이뤘을 때 가끔 포수와의 사인 없이 던지는 노 사인 변화구들을 모두 다 받아낼 정도로 좋은 수비 실력을 지녔었다고 하였다. 실제 이만수의 현역 시절 수비스탯을 비교해 보았을 때[21] 1990년대 이후 최정상급 포수로 인정받는 박경완과도 큰 차이가 없고 도리어 수비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1류에 위치해 있었다. 바보 만수로 대표되는 희화화 이미지+4번타자 포수+당시 일선 지도자들의 짠 평가가 이미지를 왜곡시킨 것에 가깝다. 당시 리그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현역 시절의 포수 이만수는 공격, 수비 모두 흠잡을 곳 없는 완성형 포수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포수 리드(게임콜링)에 대해서는 특출난 장점이 없었다고 하지만 일단 이선희, 김일융, 김시진 등 80년대 삼성의 투수들은 당시 리그 초일류 투수들이었기 때문에 이만수가 포수 리드를 잘한다고 티가 나지도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만수의 수비력은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이 다소 있다. 이만수의 현역 시절 공격력이 거의 푸홀스급이다 보니 수비력에서 다소 저평가 당하는 편이다. 이러한 수비 문제는 박경완과의 비교 시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지금도 이만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격은 역대급, 수비는 테러급'일 정도이니... "이만수의 어깨가 약하다 ,물어깨다." 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야구팬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 있지만 사실 이만수의 통산 도루저지율은 0.380로 박경완의 도루저지율인 0.383이랑 별 차이가 안나는 수준이다. 다만 선수들의 도루성공률이 형편 없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저정도 도루저지율이면 준수하다는 소리를 들었지, 물어깨라고 욕먹을 정도는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이만수의 게임당 에러율(포수 포지션)은 0.047로 박경완의 0.057, 진갑용의 0.069보다도 낮다고 하나 여기에는 헛점이 있는데 박경완, 진갑용하고 이만수하고 경기수 차이가 2배 이상난다. 물론 경기 수 차이가 크지만, 수비가 좋은 선수들의 게임당 에러율이 전성기 시절 이만수 선수의 게임당 에러율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이만수 vs 박경완 논쟁이 개싸움으로 변질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SK 와이번스 팬덤 삼성 라이온즈 팬덤 의 충돌과 관련이 깊다. SK 감독으로서 논란을 야기해왔던 이만수와 SK의 레전드로 여겨지는 박경완의 비교이기 때문에 이만수의 평판이 바닥까지 추락하기 좋은 비교 환경이 되어버리게 된 것도 원인이다. 사실 선수 시절에도 과도한 리액션 등등으로 야구계에서 적을 많이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폄하당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 상황에 삼성의 레전드인 이만수 선수를 비호하는 삼성 라이온즈 팬덤 또한 수가 많고, 이러한 문제로 삼성 팬덤과 SK 팬덤 간에 충돌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결론적으로 이만수의 수비 능력은, 일부 지도자들의 비현실적인 자기과시성 무용담[22] 정도가 남아있을 뿐 수치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박경완과 비교할 경우 우위도 열위도 증명할 수 없다.

다만 노쇠화로 인해 90년대 중반에 들어서 타격에서 여전히 경쟁력이 있음에도 포수를 보기 힘들어 겨우 부상에서 돌아온 백인천을 다시 병원으로 보내버린 분조차 밀어내지 못했던 건 사실이나, 선수 수명이 길어야 30대 중반이던 8~90년대에 30대 중후반 선수가 주전 포수로 있기는 애초 불가능하니...

5. 은퇴

삼성 라이온즈의 전설적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끝내 우승을 못했다는 것[23]이 한으로 남았고, 선수의 성적과 결과만 보고 가차없이 결정하던 삼성그룹 특유의 방식때문에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은퇴식도 없이 1997 시즌 후 방출당했고,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은퇴를 당했다.[24] 당시 삼성 팬들의 어마어마한 반발은 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선수였음에도 초라하게 선수 생활을 마감했던 대표 사례격으로, 제아무리 초특급선수라도 나이먹고 노쇠하면 구단도 처치곤란인데 발이 느린데다가 나이를 먹은 후 포수 수비가 불가능하게 되면 다른 포지션으로 전업하지 않는한 지명타자외에는 자리가 없는데도 이만수는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포지션 전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은퇴할 당시 이만수의 나이는 만 39세였다. 반면 팬들의 지지가 여전히 두터웠고, 현역 연장 욕심이 있었던 이만수의 입장과 달리 뛸 수 있는 상황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대타 외에는 보직을 제대로 줄 수 없는 감독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1999년 시즌까지 뛰고 야구계로 현역 은퇴 당시 만 41세)

그러나 이 부분이 주장이 좀 틀린것은 이만수가 다른 포지션으로 전업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나오는데...93년이후 1루수와 대타로 포지션을 옮겼다. 94년엔 2경기 포수수비를 보긴 했지만, 이후론 포수로 단 한경기도 출전하지 않는다. 대타로는 여전히 가치가 있었으나 은퇴시점의 기록은 그렇다기엔 아쉬웠다. 또한 노장이 자리 차지하면 신인급의 성장에 방해되는건 사실이니 그런 면이라면 몰라도 포지션 전업을 안해서 문제였다는건 억지 주장이다.

다만 기용상황이 한정되었다는 것 자체는 맞는 말. 이만수가 1루수로 전업했을 때 1루수 요원은 이만수 말고도 이승엽 양준혁이 있었다.그리고 훗날 셋이 사이좋게 KBO 영구결번 양준혁은 그래도 외야수도 볼 수 있었던 반면 이만수는 외야수를 볼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승엽의 1루 수비가 썩 괜찮았던지라, 당시 이만수는 주로 지명타자 및 1루 대타 등으로써 활용되었다. 거기에 95년 신인왕이었던 이동수 역시 원래는 1루 요원이었던지라, 이동수가 3루 주전에서 빠진 1996년에는 이들을 최대한 활용해 보고자 이승엽을 외야수로, 이만수와 이동수를 각각 지명타자/1루수로 기용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동수가 성장하지 못하면서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위에서 1990년대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라 언급했지만, 실제로 주전 포수 자리를 내놓은 건 1993 시즌부터이고 사실상 대타 외에 기용이 어려웠음에도 1993~1996년 4년 동안 대타로 총 777타수를 기록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타석에서의 기회는 상당히 많이 받은 셈. 또한 wRC+에서 각각 133.1-111.4-135.0-92.7을 기록하여,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면 전성기보다 못할 뿐 괜찮은 전력으로 활동했다.

1997년의 경우 무릎 부상 악화로 선수 생활 자체가 어려운 가운데 치른 시즌이라 52타수에 불과. 그리고 삼성은 재계약을 포기한다.

은퇴식을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이만수가 떠나고 2년 후에 은퇴한 유격수 류중일. 은퇴 경기를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양준혁.[25] 이만수의 탈단과정과 이로인한 연고팬들의 반발 & KBO 레전드에 대한 KBO 구단들의 예우에 대한 야구팬들의 반발이 공론화되면서 한때 우승에 눈먼 토사구팽구단 이라는 악명까지 있던 삼성 라이온즈[26]도 이러한 악습이 많이 시정되었고 2003년에 22번을 이만수의 KBO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삼성 구단의 레전드 푸대접의 안타까운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많은 삼성 팬들은 한 동안 '이만수 감독 복귀' 설을 꾸준히 밀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3년 삼성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가 이만수가 귀국 준비까지 다 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계약을 파기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그냥 그들만의 꿈일 듯.[27] 사실 이 때문에 당시 삼성에서는 김응용 - 선동열 라인이 매우 건재했었다. 2010년 시즌 후 준우승 감독인 선동열을 갑자기 내치긴 했으나 후속 감독은 이만수가 아닌, 삼성의 또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류중일이 맡게 되었고, 4년 연속 우승까지 안겨주게 되어 프런트나 팬들에게도 신임이 두터워져 이래저래 이만수의 삼성 복귀는 힘들 듯 하다.이후 류중일이 팀을 떠나고 삼성 감독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그에 대한 얘기는 잘 안 나오고 있다.[28]

양준혁, 이종범에 이어 무릎팍도사 출연이 확정, 2010년 3월 3, 10일에 2편으로 나뉘어 방영되었다.

해당 자료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삼성 78 270 .289 78 16 1 13
(공동 4위)
51
(공동 5위)
46 6 50
(3위)
.500 .400
1983 98 357 .294 105 12 0 27
(1위)
74
(1위)
53
(4위)
0 49
(5위)
.555
(2위)
.379
1984 89 300 .340
(1위)
102 17 1 23
(1위)
80
(1위)
45 3 38 .633
(1위)
.414
(3위)
1985 103 357 .322
(5위)
115
(5위)
19 2 22
(1위)
87
(1위)
63
(5위)
7 56
(4위)
.571
(2위)
.414
(2위)
1986 59 212 .321 68 8 0 16
(3위)
39 31 1 27 .585 .367
1987 85 299 .344
(2위)
103 14 1 18
(2위)
76
(1위)
56 6 51 .579
(1위)
.431
(2위)
1988 86 285 .323 92 13 0 18
(3위)
58
(4위)
47 6 48 .558
(2위)
.419
(3위)
1989 110 359 .284 102 11 0 20
(3위)
64
(4위)
55 4 52 .482
(4위)
.373
1990 110 359 .287 103 13 0 26
(2위)
57 50 3 59 .540
(2위)
.386
1991 118 378 .317
(5위)
102 18 0 17 74 51 6 64 .500 .413
(4위)
1992 93 305 .289 88 11 0 22 70 50 7 60 .541 .402
1993 78 193 .207 40 3 1 5 20 21 0 24 .311 .294
1994 109 233 .253 59 14 0 12 37 24 0 33 .468 .343
1995 97 158 .215 34 10 0 5 27 17 1 32 .373 .344
1996 97 193 .285 55 12 1 6 38 14 2 24 .451 .359
1997 39 52 .231 12 2 0 2 9 2 0 5 .385 .298
KBO 통산
(16시즌)
1449 4310 .296 1276 193 7 252 861 625 52 672 .519 .388

[1] 허규옥, 장효조, 정성룡, 김기태, 김주찬, 김승권 등 무려 7명이나 있다 삼성 선배인 장효조에 대한 일대기를 다룬 다큐에 마지막에서 양준혁은 자신이 10번으로 영구결번하였지만 그 10번은 사실상 장효조의 것이라고 말하였고, 이후로도 영구결번 관련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면 어김 없이 장효조 선배의 10번도 공동 결번되면 좋겠다고 말을 하고 있다. 팬덤도 사실상 비공식 공동 영구결번 취급하고 있다. [2] 그 전 주자인 함학수는 상대 수비 실책으로 출루, 안타가 아니다. [3] 보통 이 뒤에는 2018-2023년 양의지도 거론이 되나, 일반적으로 이만수가 한 클래스 이상 더 좋은 타격을 보여주었다 여겨진다. 이만수의 1983-1988년 wRC+는 대부분 170을 넘으며 그의 통산 wRC+가 159인데, 양의지는 본인의 타격 전성기인 2018-2023년 한정으로 이 정도 성적을 냈고 이마저도 지명타자로 자주 출장했다. WAR상으로 비슷한 성적을 올린 박경완이나 강민호는 임팩트 면에서 이만수에게 크게 밀린다. 그나마 박경완이 몇 시즌 정도를 이만수에 비견되는 훌륭한 타격 생산성을 보여주었으나 강민호는 거의 전 경기 포수 출장하며 대부분의 시즌을 wRC+ 130-140 정도를 치며 꾸준하게 성적을 올렸다. [4] 그의 기록을 넘은 것은 팀 후배 양준혁이며, 그 역시 20년 가까이 1위 자리를 유지하다 2023시즌 최정에게 통산 타격 WAR 1위 자리를 빼앗겼다. [5] 그것도 83~85 3년연속으로 달성했다. 이는 장종훈 이승엽, 그리고 박병호만이 기록했다. [6] wRC+,WAR은 리그 평균 스탯과 개인스탯으로 계산한 수치이고, 이 당시엔 용병도 없고 경기수도 적었으니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한다. [7] 베이징 세대 이후로 가장 뛰어난 포수로 극찬 받은 박경완의 wRC+가 이만수의 통산 wRC+보다 높았던 단일 시즌은 단 3회(97, 00, 04)뿐이고, 2010년대 가장 훌륭한 포수로 평가받는 양의지(18, 19, 21시즌은 지명타자)와 강민호(15)는 더 적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타자가 포수로 거의 전 경기를 출장해내기까지 한다는, 야구 만화에나 나올법한 선수였던 것. 여기에, 2020시즌에 이만수의 통산 wRC+보다 높은 단일시즌 기록을 낸 타자는 멜 로하스 주니어 최형우 단 둘 뿐이다. [8] 당연히 동 기간 sWAR, wRC+, OPS 모두 1위인데, 이게 KBO 역사에서 얼마나 위대한 성적인지 실감이 안 난다면, 2010년대와 비교해보면 된다. 14시즌 이후 19년도 단 한해를 제외하고 항상 타고투저였던 2010년대 KBO에도 이만수의 .953보다 높은 누적 OPS를 기록한 선수는 박병호, 최형우, 김태균, 그리고 최정 단 4명 뿐... 1980년대는 참로 심각한 투고타저였다. 경기수가 133경기(11, 12), 128경기(13, 14), 144경기(15~)로 확대되었음에도 이만수보다 높은 누적 sWAR을 기록한 선수는 최정 최형우 단 두명 뿐이다! 2010년대에 3,000타석 이상을 들어선 선수들만 놓고 비교한 비율 기록을 살펴본다면, 이만수보다 높은 누적 wRC+를 기록한 선수는 단 한명도 없고, wOBA를 기준으로 해도 박병호 뿐이다. 그나마 1시즌이라도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들까지 합쳐서 계산한다면 2시즌여를 뛴 윌린 로사리오와 3시즌을 뛴 에릭 테임즈가 포함될 뿐이다. [9] 삼진을 불명예로 여기던 시절이므로 의외로 순위는 22위지만, 이만수보다 볼삼비가 좋은 선수들 중 김봉연을 제외하면 타석 대비 홈런비율이 3%를 넘는 선수도 한명 없다. [10] 다만 이대호는 해외에 나가있던 2012~2016의 기간이 빠진 수치다. [11] 이대호의 NPB 통산 wRC+는 151, MLB는 102이다. KBO 통산 wRC+보다 NPB 통산 wRC+가 더 높다. [12] 이대호가 뛰었던 2000년대~2010년대 KBO는 이만수가 뛰었던 1980년대 KBO와는 다르게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되어 양학이 힘든 리그였으니 wRC+ 200 이상을 찍는 건 힘들지 않았겠냐는 의견도 있지만 15시즌의 에릭 테임즈가 wRC+ 222.3을 찍었으니 메이저 리그에서 주전급으로 뛸 만한 기량을 갖춘 선수라면 2010년대 이후 KBO에서 wRC+ 200을 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여간 이대호가 wRC+ 200을 넘겨보지 못한 건 wRC+ 200이라는 수치가 4할 타자나 0점대 방어율 선발 투수처럼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그 MLB에서도 애런 저지가 2022시즌에 wRC+ 200을 넘겼다.) 전성기 이대호의 기량이 17~19시즌 테임즈처럼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뛸 만한 급이 아니어서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풀시즌 주전으로 뛸 급의 선수라면 굳이 KBO에서 뛰지는 않을 테니 wRC+ 200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13] 강민호는 고졸 + 병역 혜택 등 더 많은 경기를 소화하는 환경이 되어 불과 13시즌만에 이만수의 17시즌 타수 기록을 뛰어넘었다. [14] 이만수는 1985년 통합우승, 장종훈은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15] 현재 삼성 포스트시즌 병살 1위는 진갑용과 양준혁이 8개로 공동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6] 투수 WAR 1위가 김상엽의 3.0이다. [17] 후일 라피도, SS311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2007년 판매 부진을 이유로 없어졌다. 이후 후부가 제일모직 스포츠 브랜드 중 유일하게 남아 있었으나 역시 2013년에 판매 부진을 이유로 없어졌다. 현재 삼성물산에는 빈폴이 스포츠는 아니지만 아웃도어 상품을 출시하고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를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18] 이만수가 2회와 4회, 박진석에게 2타석 연속으로 볼넷을 맞았다. 그래서 뛰어간것. 뉴스라이브러리 [19] 이만수의 왼손에 끼워진 미트를 보면 알겠지만 1루수로 뛰던 시절이다. 후술하겠지만 포수로서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한 삼성 코칭스태프는 1993년부터 이만수를 포수로 기용하지 않았고 1루수나 대타 요원으로 출전시켰다. 이마저도 삼성 1루수 자리에 이동수 양준혁, 이승엽 등 젊은 선수들이 꿰차면서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게 된다. 만약 외야수라도 볼줄 알았으면 그의 입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 막상 본인이 언급한 그 경기를 보면 이만수는 긴팔을 입고 있었다. [21] 이만수 선수는 포수로 1216경기를 뛰었으나, 비교하는 선수들은 모두 2000경기 이상 뛰었다. 평균 스탯인 도루저지율로 단순하게 수비능력을 비교하기엔 두개의 사례의 표본수 크기가 다르다. 다만, 수비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의 평균적인 수비능력에 비해 전성기 시절 이만수 선수의 수비능력이 떨어지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다. [22] 예시: 나는 이만수 팔뚝을 보고 구질을 맞췄다, 이만수에게 홈런을 맞은 건 나의 계략이었다. [23] 1985년도 엄연한 공식 우승이라 이만수의 우승 경력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현재도 그렇고 특히 과거에는 한국시리즈 없는 우승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은 분위기가 강했다. [24] 동기생 김성한은 1995 시즌에 광주 무등구장 홈경기에서 팬들의 축하를 받으며 은퇴식을 가졌다. 이만수가 양복을 입고 광주 구장을 방문하여 김성한에게 직접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전설의 타이거즈채널에 당시 영상이 있다. [25] 양준혁 이후 은퇴경기를 치른 선수는 다름 아닌 이승엽 선수다. 참고로 이승엽은 2017년 마지막 경기에서 은퇴경기를 치렀다. [26] 물론, 90년대 프로야구판에서 은퇴선수 예우하는 팀은 단 한 팀도 없었다. 레전드 예우로 나름 좋은 평을 받는 한화 이글스도 안 알려진 8~90년대 레전드의 소리소문없는 은퇴사례가 적지 않고(대표적으로 악바리 이정훈), 우승을 이끈 99년 이후에야 장종훈, 송진우등의 선수의 은퇴를 예우하면서 좋아진 케이스. 사실 그마저도 일종의 으리에 가까운 케이스다. [27] 사실 통수 이미지 씌운건 이 사건이 제일 컸다. [28] 다만 이것은 이만수 본인이 현장 복귀 대신 재능기부와 봉사로 방향을 잡은 것이 가장 크다. 이러나 저러나 큰 경기를 여러 차례 경험했을 정도면 여전히 경쟁력이 있으며 실제로도 오퍼가 여러 차례 들어왔으나 본인이 전부 사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