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연평도 포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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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0년 연평도 포격전으로 인한 각계의 반응을 모아놓은 문서이다.2. 반응
2.1. 대한민국
6.25 전쟁 이후 최초의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거주 지역 공격 사례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꼈으며 당시 군필자인 20~30대 예비군 연령층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런 식으로 당할 순 없다, 북한군에 철저하게 보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2.1.1. 정치권 반응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논평을 냈는데 진보신당 논평은 상식적인 논평이지만 문제는 민주노동당 논평.[1] 안 그래도 김정은의 3대 세습에 대해서 신경 끄자는 논평으로 논란을 일으킨 민노당의 NLPDR 노선은 여기서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두 논평을 비교해보면 민노당이 얼마나 미묘하게 북한을 옹호하는지 표현이나 내용의 온도차가 느껴진다. 덧붙여서 진보신당은 연평도 사태 관련 긴급상황실을 편성하겠다고 밝혀 민노당이 범접 못할 개념성을 인정받았다.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대북 규탄 결의안이 통과되었는데 송영선 의원은 "이것도 북한의 도발에 비하면 너무나 낮은 수위라 가치가 없다."며 기권했다. 또한 당시 진보신당의 조승수 의원은 "북한의 행위는 명백히 규탄 받아야 마땅하나 무력 사용 위주의 결의안 내용에는 찬성할 수 없다."며 유일하게 반대 표를 던져 눈길을 끌었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전부 기권해 대놓고 반대표 던지기는 눈치가 보이니 치사하게 기권하며 도망가는 거냐며 오히려 반대 표를 던진 조승수 의원보다 더 까였다. #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 북한에서 민간시설에 폭격을 가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북규탄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이어 북한의 포격에 대한 우리 측 응사가 북한군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 것과 여당에서 제기한 햇볕정책 책임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됐는지 북한 방사포 진지에는 하나도 안 떨어지게 대응했다", "3년 전에 자기들이 스스로 폐기했던 햇볕정책을 들면서 책임을 돌렸는데, 우리가 연평 서해교전 때 북한 함정을 어떻게 침몰시키고 어떻게 밀어냈는가"라고 지적했다. # 북한이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회담을 제안한 것에 대해서는 "민간인을 사상케 한 무차별한 도발을 한 북한이 적십자회담을 하자, 금강산 얘기를 하자고 하는 것은 좀 성급하고 염치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
이회창 前대표는 연평도 포격 도발 대응과 관련하여 “초기 대응은 아주 낙제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일어난 뒤에 대통령과 정부는 강력응징을 다짐했습니다. 그래놓고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제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 연평도에 직접 가서 보고는 기가 막혔습니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에는 반격을 못 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연평도 포격전 때에는 즉각 반격해서, 공격원점을 초토화하는 강력 대응을 했더라면 아마 초기에 상당한 사건의 진전이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비판하였다. #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담화문에서 "이제는 북한 스스로 군사적 모험주의와 핵을 포기하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부분과 관련해 "정말 이명박 정권이 그런 식의 생각을 기조(基調)로 해서 대북정책을 해왔다면 그것이 결국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오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하며 "북한은 스스로 변하는 게 아니고 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분명한 대북정책의 기조가 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도 " 천안함 사태 때에도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했다"며 "하지만 한 번 당하고 46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당했는데 그후에 전혀 변한 게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 2016년에는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에 이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연평도, 천안함 사태 때 대북정책이 다 실패한 것"이라며 "그런데 인정을 안 한다"고 비판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북한과 중국은 믿을 수 없다며 불 같은 성격답게 확 저질러 버리고 싶다고 얘기했다.
또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다시 한 번 군의 긴급 대응능력에 의문을 품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29일 오전 10시에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는데, 내용에 대해 호불호가 갈렸다. 30일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 MBC 보도진이 연평도 주둔 해병대의 복지시설인 충민회관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고성방가를 하다가 해병대원들의 제지를 받았다"는 보도를 했다. #1 #2 #3 MBC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지난 아이티 지진 때 벌인 병크 때문에 신뢰감이 없다. 게다가 군 통제지역이라고 말하면서 카메라를 막아서는 군인의 손을 치우는 기자의 행동으로 지탄을 받았다.
2.1.2. 한국 네티즌의 반응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이후 한국의 주요 포털 사이트, 커뮤니티 등지에서 대부분의 여론은 군사적 행동에 대응할 수 없는 민간인들에게 생사 따위 무시하고 포격을 행한 것에 대하여 북한의 무개념성을 비판하며 격앙된 분위기를 보였다. 일부는 진흙탕 싸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이 와중에도 몇몇 커뮤니티에서는 일부 정부를 겨냥한 음모론과 종북성 발언이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전쟁나면 정부를 뒤집어 엎어버리자'는 정줄 놓은 발언도 보였다. 그런가 하면 희생자들의 거주지나 경제환경에 대한 고인드립도 나타나는 등 이래저래 개념없는 발언도 보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후에도 자칭 반북 진보단체인 다함께에서는 "연평도 상호포격이라는 망발을 내뱉었다.
또한 트위터 이용자들과 미투데이 이용자 중에 고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이들도 목격되어 네티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
이 사태 이후 디시인사이드는 기본 화면의 타이틀바를 "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로 바꾸고 사건이 터진 지 3시간도 안 되어 연평도 북괴도발 갤러리를 신설했다. 일부 사람들이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바그다드 위성사진을 연평도인 것마냥 올렸는데 이것이 트위터를 타면서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걸 믿은 한국 방송사를 거쳐 세계구급으로 보도되었다. 그 낚인 방송사 중에는 CNN도 있었다. # 그런데 이 사진 낚시와 관련해 2010년 12월 19일 MBC 보도에서는 워싱턴주에서 근무하는 현역 미 육군 이병이 올린 사진이라고 보도했다. #
이 사태는 이전의 전투나 포격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사례가 앞으로도 발발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정말 아무도 모르게 된다. 도발이 거듭될수록 대응은 더욱 단호하게 될 것이며, 유화책이든 강경책이든 북한의 다음 도발을 예방할 확신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연평도 주민들은 관계의 격화를 불안해했있다. #
공식적으로 인천광역시 근방의 민방위만 소집되었다. 실제로 예비군 소집을 위장한 문자를 보낸 2명이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었다.
사실 전쟁 발발의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돌발행동이나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를 했다가는 적의 도발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정부에서도 사이버테러나 온라인을 통한 전쟁 조장 행위를 체크하고 있으니 처신에 신중하도록 하자. 위에서 언급한 음모론, 고인드립, 종북성 선동글 역시 걸리면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으니 극단적인 반응은 국가는 물론 개인의 신상을 위해서도 자제하는 편이 좋다. 실제로 이 사건을 가지고 남한의 도발이란 음모론의 글을 올렸다가 불구속 입건이 된 경우도 있다. #
게다가 11월 26일,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의 발언이 기사화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인기검색어 순위에 오르기도 하고 대중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연평도 주민들이 피신한 방공호는 새마을운동 때 지어진 것이라 화약냄새가 새들어오고 바닥은 플라스틱 + 냉골방에 물자는 식수밖에 없고 보조 발전기도 별로 못 돌려서 양초를 켜서 지낼 정도였다.
여담으로 연평도에 피난민들이 두고 온 애완동물( 개, 고양이 등)에 대한 사연으로 애견, 애묘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연평도의 개와 고양이를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피난민들이 미처 자신의 반려동물들을 데려갈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사료를 남겨두고 줄을 풀어주는 등 안타까운 조치를 하고 떠났다. TV 뉴스에서는 주인을 알아보는 고양이를 두고 떠나는 할머니의 모습이 나와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2] 네티즌 제보에 의해 동물보호단체들이 연평도 동물에 대한 실태 파악을 하려 시도했다고 한다. 다행히 파악을 하고 보호조치에 들어갔다고 한다. # 포털 사이트 다음 메인에서는 어린 강아지가 주인이 두고 간 틈에 다른 성견들에게 공격을 받아서[3] 죽은 강아지를 위로하는 부상당한 개의 모습이 나와서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위협에는 약한 동물들도 피해를 입는다.
한편 이 사태가 일어났을 때 국회의원 연봉이 5% 올랐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국민들은 이럴 시국에도 니들 밥그릇은 챙기냐며 분노했다. 예전에 국회의원 연금 특혜 입법 때에도 불거진 사안이지만 이런 것만은 좌우고 이념이고 당파고 다 초월해 대동단결한 것 같다.
그날 의무경찰 중대에서 구타사건이 같이 나오자 당시 육해공군에서 근무 중인 이들이 분개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안상수와 송영길이 문제의 보온병과 폭탄주 드립을 쳤다.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은 언론사들의 포커싱 차이를 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다만 이 사건을 당시의 정치적 사안과 무리하게 연관짓는 바람에 비판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겨레의 만평. 워낙 비판을 많이 받아 수정하였는데, 수정한 것조차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북한 측이 무자비한 보복이라고 하는데, 보복이라면 남한 측에서 뭔가 먼저 잘못을 했고 그에 타당한 반격을 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몇 일을 거쳐 설득할 정도로 강경하고 신속하게 북한의 만행에 대하여 보복 및 응징을 계획하던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을 해당 사건과 관련 없는 일들과 엮어서 악의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수정 전 | 수정 후 |
2.1.2.1. 네티즌들의 반격
자세한 내용은 우리민족끼리 테러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2.1.3. 당시 군 부대 내 분위기
포격전 이후 대부분의 군 부대는 말 그대로 '전쟁 준비 태세' 분위기였다. 해당 시기에 전방부대에서 복무했던 이들의 증언으로는 뉴스 속보가 나가기 이전부터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었다고 한다.연평도 포격전이 터진 날 각군 본부에서 긴급 공문을 통해 말년 휴가, 신병위로휴가, 이미 출발한 휴가를 제외한 모든 휴가, 외박을 일시에 전면 중지, 취소시켰다. 이에 따라 연평도 포격전 다음 날에 휴가 출발 예정이었던 사람은 낭패였다. 당시 인사행정병(인사계원)들은 미리 휴가 인사명령으로 올라간 미출발 휴가들을 취소시키기 위한 공문을 올리느라 진땀을 뺐다. 전역을 앞둔 말년병장들은 쌓아둔 포상 휴가가 다 날아갔으며, 연가로 보장되는 정기휴가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서부전선 일선 부대들은 연가로 보장되는 정기휴가도 사태 이후 열흘 가까이 제한되어 있었다. 사태 후 약 2주가 지난 시점에서 제한적으로 전역 임박자의 정기휴가와 신병위로외박에 한하여 제한을 해제한 부대가 있었는데 제한 해제 당일 급격한 출타자 숫자에 놀란 지휘부에서 반나절 만에 제한 해제를 취소하여 전역 예정자들의 희비가 엇갈린 부대도 있다. 그리고 기 휴가 출발자나 말년휴가자, 신병위로외박자에 대해서는 부대에서 해당 출타자의 동선을 더 꼼꼼하게 확인하는 차원에 그쳤던 부대(주로 후방 비전투부대)도 있었고 신병위로외박자를 포함한 기 휴가 출타자들에게도 복귀명령을 내린 부대(일부 전방부대)도 있었다.
이처럼 연평도 포격전은 당시 현역병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1988년~1991년생 남성들에게 상당한 분노와 트라우마를 안겨줬다. 이들 세대가 당시 다른 젊은 세대와 다르게 국가안보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스탠스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중 특히 10년 초반 군번( 공군은 09년 후반 군번까지)은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전, 김정일 사망이라는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들을 군생활 동안 온 몸으로 겪은 군번이다.
2.1.3.1. 대한민국 해병대 / 대한민국 해군
해병대는 추가적인 도발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24시간 어느 순간에나 바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병기를 포함해 단독무장 상태의 생활 및 과업 지시를 각 부대에 전파했으며 수시로 도발 상황을 가정한 전투배치 및 대피 훈련을 했다. 또한 포격 당일을 포함해 최소 3일 동안 전화와 인터넷을 금하여 장병들의 가족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치했고 언론이 무질서한 오보를 양산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서북도서에 위치한 부대들은 5분전투대기부대의 경우 차량 탑승이 아닌 인근 해군 함정 혹은 상륙정에 탑승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우리 해병대원 두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해병대 및 해군 각 부대에선 모든 장병이 분노했으며 응분의 보복을 다짐했다.해병대 및 해군 실무자들은 북한이 21세기 들어 해군과 해병대를 겨냥한 도발을 지속적으로 감행한 것에 의해 북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히 높으며 서해에서 일어났던 많은 교전 때문에 걸핏하면 NLL을 침범하려는 북한 배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격퇴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2.1.3.2. 대한민국 공군
공군부대의 경우 실질적으로 국지전을 자주 겪는 해군 함정 그리고 육군의 DMZ 인근의 강원도 경기도 전방부대들, 아니 이것을 떠나 육군의 경우 대다수가 전투병과이기 때문에 몸으로 체감하는 전시위협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이게 되려 연평도, 천안함 사태 때 긴장감이 배로 다가왔다고 한다. 평소에 군장도 차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실제 상황이라고 군장차라고 명령이 떨어지고 경계근무에 들어갔다.[4][5] 한반도 내 공군 최후방인 사천기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6] 평소 헌병 장구를 차고 근무하던 후임들이 말년휴가 복귀하는 날 군장을 차고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하필 복귀하는 날이 연평도 사태가 발발한 날이었던 것. 공군 군사경찰이 군장을 차고 근무를 하는 경우는 특수한 훈련을 제외하고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거의 전시상황에 준하는 훈련을 할 때였다. 대한민국 최전방부터 최후방까지 준전시상황이었다는 말이다.비행단 전투비행대대는 말 그대로 즉시 출격준비를 한 상태로 대기했다. 조종사가 숙식을 제외하고는 즉시 출격하기 위해 전투기 조종석에 상시 앉아 있었다.
공군의 경우 휴가체계가 타군과는 달리 말년휴가를 연차, 위로휴가, 포상휴가 등을 붙여서 짧게는 10일, 길게는 40~50일까지도[7] 나가기도 하는데 이 당시 전역 한 달 내지 두세 달 정도 앞둔 이들의 말년 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된 연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날아갔기에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당시 공군 예하부대에 공문으로 하달된 휴가 관련 지시사항은 별도 지시 이전까지 휴가 및 외출 금지, 말년휴가자를 제외한 전 휴가자 복귀였다.[8] 다행히 말년휴가 중인 병장들은 휴가를 누릴 수 있었지만 말년휴가 개념이 없는 전역을 앞둔 영외자들은 모두 휴가에서 복귀하였다. #
그리고 휴가 및 외출금지 해제 후에도 추가적인 조치가 있었다. 바로 전투복 차림으로 휴가 및 외출을 보낸 것이다. 육군 출신은 이해가 힘들지몰라 덧붙히면 공군의 경우 신형전투복 보급 전에는 외출, 외박시 약복 차림이 원칙이였다. 그런데 연평도포격 후 얼마간 육군처럼 전투복 차림으로 휴가, 외출을 공군도 했다는 것이다. 일부가 아닌 지침을 내려 공군 전부대로 확대하려고 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는 처음이었다고 하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지표다.[9]
2.1.3.3. 대한민국 육군
포격전 당시 미사일사령부에서 현무를 대기시켰다고 한다.육군 전방부대 역시 출신 전역자들이 들려준 후일담에 의하면[10] 하필 호국 훈련 기간이었기 때문에 사격도중, 전투축구대회 도중, 심지어는 집중정신교육 도중에 연평도 포격 도발 소식을 전파받고 훈련 상태에서 계속 군장 메고 전투대기하거나 기존에 하던 사격 및 행사를 즉각 취소하고 막사로 달려가 군장을 쌌다고 한다. 군장을 싸는데 비장미가 느껴지고 시신을 대신하여 국립묘지 안장용으로 쓸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채집한 부대도 있었고 유서를 작성케하는 곳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분위기는 정말 살벌 그 자체였다.[11]
대한민국 육군본부( 계룡대), 군수사령부, 한미연합사 등 극히 일부 후방 상급 행정부대를 제외한 모든 육군 부대는 전후방을 막론하고[12]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십 주 동안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했으며 몇몇의 전방부대 경우 오전 기상부터 오후 취침 전까지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는 부대가 있었고 전투복에 단독군장으로 취침했다고 한다.[13] 대부분의 육군 부대에서는 사지방, 공중전화, PX 이용이 통제되었다고 한다.[14] 아까 언급한 군수사와 인접한 제53군수지원단조차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으니 그 분위기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시 최전방에 속하는 사단이 속한 군단 예하의 포병대가 최전방으로 긴급히 전진배치되는 것이 그냥 도로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보였다. 실제로 당시 전방부대 포병대대들 중 전진배치가 필요없을 정도로 주둔지 자체가 전방이었던 대대들은 상황이 터진 그 시점부터 예정되어 있던 모든 일과와 훈련을 취소하고 여차하면 바로 갈겨 버릴 수 있도록 대대 전체가 포상 대기에 들어갔으며 야간에는 잠은 자야 하므로 포대별로 돌아가며 포상에서 대기하였다.
백골부대로 유명한 3사단은 당시 사단장이었던 신원식 예비역 중장이 직접 대적관구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건 후 1주일 뒤, 즉 11월 30일에 입대한 장병들은 모 부대 신병교육대에서 모 정훈장교가 대적관 교육을 단 한마디로 끝냈다.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리고 당시 전의경의 후임병 폭행사건이 같이 뉴스를 타게 되자 이 때문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전의경들은 전부 북괴군 취급을 당했다. 원래부터 유달리 이들을 쓰레기 취급하던 육군 제3보병사단 부대원들 사이에서는 아예 죽여 버리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2.2. 북한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최고사령부 보도를 인용하여 "남조선 괴뢰들이 우리 측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먼저 연평도의 북한 측 영해에 사격을 가해 군사적 도발을 해왔다."[15], "우리 혁명 무력은 괴뢰들의 군사적 도발에 즉시적이고 강력한 물리적 타격으로 대응하는 단호한 군사적 조치를 취했다.", "남조선 괴뢰들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우리 혁명 무력의 엄숙한 경고를 똑똑히 새겨들어야 한다.", "앞으로 조선 서해에는 오직 우리가 설정한 해상군사분계선만 존재할 것." 등 적반하장으로 점철된 발언을 늘어놓았다.기본적으로 북한 체제에서 이 정도 규모의 강도 높은 군사행동이 김정일의 지시 없이 행해질 수 없다. 여러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군에 대한 통제가 강력한 북한에서는 실탄사격 한 번 멋대로 했다가 숙청되는 일이 흔하다. 특히 보도의 주체가 최고사령부란 점에서, 전문가들은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청해전(2009.11.10) → 천안함 피격 사건(2010.3.26) → 재처리 시설 공개 → 연평도 포격(2010.11.23)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1년 조금 지난 수준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도발이 자주, 더 높은 강도로 일어나 북한 내부에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실제 속보가 진행되는 도중에 해외 언론 기자들 사이에서 한때 김정일 사망 소식이 돌기도 했다는 언급이 나왔으나 유언비어였다. 천안함과 동일하게 3대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6]
과거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권력세습을 하는 과정에서도 강도 높은 도발이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김정일과 김정은의 권력 세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포격을 가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외신들은 김정은의 업적 쌓기로 추측했다.
북한 주민들은 철저한 언론 통제 속에서도
11월 27일 저녁 조선 중앙 통신을 통해 "민간인 사망이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스럽다"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민간인을 군부대 내에 배치해 인간 방패로 삼은 남측 잘못이라면서 적반하장 드립을 날렸다. 북한의 이런 시인은 중국의 압력이 있은 것이지 자의로 한 말이 아닐 거라고 하는 의견도 있었다.
북한에서는 이렇게 본다 카더라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자기들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2.3. 제3국
전쟁 발발 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지역인 한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에서 발생한 교전 상황이기에 전 세계의 언론에서도 이 사태가 일어나자 정규방송을 끊고 속보를 내보내거나 정규 방송 중에 자막으로 특보부터 내보내고 정규 뉴스 시간에도 상세하게 다루는 등 관심을 집중하였고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이 유심히 보도했다.주요 서방 국가들은 하나같이 북한을 강력히 비판하며 정전 협정 준수를 촉구했다. 특히 천안함 피격 사건 때와 비교하여도 유례 없이 신속하고 단호한 어조로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는 해상 무력충돌과 시설(특히 군 주둔지와 민가를 포함한)에 대한 직접공격이라는 사태의 중대함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신냉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섞였다.
2.3.1. 북아메리카
2.3.1.1. 미국
백악관의 빌 버튼 대변인에 의하면 새벽 3시에 사태를 보고받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격노(outraged)하였다고 한다. 현지시간으로 이른 새벽에 백악관 대변인이 특별 논평까지 내 가며 북한에게 엄중 경고하였다. 또한 6자회담 당사국들에게 이 일에 대해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에서의 대규모 보복 공격 계획을 막아서는 등 확전을 막으려는 태도도 보였다.
중국의 반발로 참여하지 못한 미국의 니미츠급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함이 훈련 참가를 위해 출항했다. 중국은 당연히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으나, 결국 훈련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런 경고마저 날렸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도발 자체는 1회성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2.3.1.2. 캐나다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해 북한을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인도주의적인 구호활동이나 자국의 안전에 필요한 교류를 제외한 모든 정부 차원의 교류를 끊었다.2.3.2. 아시아
2.3.2.1. 대만
중국의 대북감정과는 별개로 대만 지도부는 28일부터 시행되는 서해 한미 합동훈련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시아, 태평양 안보에 중요한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똑같은 화약고인 대만해협을 끼고 있는 입장이라 중국을 은근히 압박해 주길 바란 것 같다.사실 비슷한 상황이 6.25 전쟁 당시에도 있었다. 중국이 계획했던 대만 침공이 6.25 전쟁 때문에 무산되었는데 당시 대만 해협에 항모가 왔었다고. 대만은 1954년과 1958년의 진먼 포격전 등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
2.3.2.2. 중국
반면 중국은 일단 사건을 규탄하면서도 그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재개가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돌발행동에 당황하여 신속히 통일된 입장이 수립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7]
CCTV와 같은 언론에서는 북한의 보도를 바탕으로 적당히 물타기를 한 "한국의 주장처럼 북한이 선제공격을 한 것은 아니며 누가 먼저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포격이 오고 갔다. 그런데 한국이 군사 훈련 중이었다."라며 옹호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하필 사건 발생 당일인 11월 23일엔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이 진행 중이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도중에는 남오세티야 전쟁이 발발하더니 중국도 참 타이밍 맞춰 잔치 분위기 깨지는 게 전통으로 자리잡을 판이다. 그것도 이번에는 터트린게 자기네 '동맹국'이니 원.[18] 심지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19]에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터졌다.
CCTV는 관영 언론인 데다 중국 체제의 특성상 중국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CCTV의 보도 상황을 볼 때 중국은 유일한 북한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물론 이건 일상적인 중국의 저열한 수준의 북한 옹호 발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걸 가지고 중국 정부가 북한의 공격을 용인했을 거라는 건 과도한 발상이다. 정부의 직접 성명도 그렇고 CCTV의 보도 역시 문제를 적당히 호도한 다음 재빨리 북한을 불러 협상하는 것을 노리는 분위기였다.
또한 각종 언론과 포털사이트의 뉴스란에서도 사건 다음 날 메인을 장식하는 헤드라인은 대부분 미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해 합동군사훈련을 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부각되었다.[20] 또한 소극적인 면을 보이며 양제츠 외교부장 방한이 연기되었다. 일정상의 문제라고 하지만 추측에 따르면 부담돼서. 또 이 것을 보면 중국도 북한을 다룰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사실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 당시 이례적으로 북한을 비난함으로써 그 전까지 조금이나마 유지하고 있던 대북영향력을 완전히 소진하는 쓰라린 경험이 있어 북한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기 어려운 상태였다. 중국 외교부가 아예 북한 대사를 불러서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 전쟁 분위기는 부담스러운지 28일 급하게 다이빙궈 국무위원을 특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또한 언론에서도 북한이 이 이상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를 해 봤자 좋을 것이 없으며 칼자루는 한국이 쥐고 있으니 유연하게 대처를 하길 바란다는 뉘앙스의 보도를 했다. 또한 북의 최태복 최고인민회의장을 베이징에 소환한 것을 볼 때 중국은 한국을 달래면서 더 이상 북한이 무력도발하는 것을 막는 방향으로 중재한 듯하다.
참고 기사 그리고 11월 27일 정오경 중국은 다이빙궈의 방한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28일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한 이후 다이빙궈가 귀국하자 오후 5시 40분경 중대발표라며 왕자루이를 북한으로 보낸다는 것과 '12월 초 베이징에서 6자회담 개최제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청와대를 비롯한 일본과 미국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심지어 북한까지도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일방적인 방한통보 이후 발생한 외교적 결례가 구설수에 올랐다. 다이빙궈의 무례한 '1박 2일' 중국이 힘이 강해지면 대한민국이 어떤 수모를 당할 지 예상되는 부분이었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중국이 계속된 북한의 돌출적인 행동과 유아적인 행동에 강한 염증을 느끼고 있다고. 그리고 이제는 슬슬 포기하고 싶은 듯.[21]
2.3.2.3. 일본
총리실 직속의 정보 연락부를 설치했고 한국 여행 주의보를 발령했다.일본 정부는 미국, EU, 러시아가 발표한 뒤 7시간이라는 늦은 시간이 지나서야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 내에 일본 전역이 포함되는 등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신중한 대응을 했다는 일본 언론의 추측.[22] NHK 등 주요 방송들은 공휴일(11월 23일 근로자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정규방송을 중단한 뒤 긴급속보를 내보내는 등 민감하게 대응했다. 또한 나리타 발 인천행 항공기가 30여분 간 나리타에서 이륙이 유보되기도 했다. 일본 여야는 일시적으로 휴전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주변사태법'의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는 예측도 나왔다.[23] 일각에서는 일본의 재무장을 경계했다. 심지어 산케이 신문은 "한국군 별것 아니잖아?" 하는 근거없는 망언을 쏟아냈다. 그리고 이 사태로 대외정보수집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일본은 정보전 능력을 늘리기 위한 명목으로 국정원이나 CIA 같은 정보기관을 신설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흔히 '조선'이라는 어감 때문에 북한 국적이라고 도매금으로 싸잡히는 일본 내의 조선적 교포 3, 4세대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학교 학비경감 정책이 무효화되었다. 다만 일본 내 조총련은 북한 자금책으로도 활동한다고 하니 한국 내 자국민이 위협받는 사태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입장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2.3.2.4. 이스라엘
외무장관 성명을 통해 이번사건은 " 미친 체제를 저지하고 쓰러뜨려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케 한다"며 원색적인 표현까지 사용해 강도 높게 비난했으며 "그들의 무기 확산과 도발 행위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밝혔다.이스라엘은 북한과 이란, 시리아가 서로 연계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인 데다 수시로 헤즈볼라 등의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에 의한 기습포격을 당하는 입장으로서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낀 듯하다.
이스라엘의 한 일간지는 한국의 무기력한 대응은 북한이 핵을 소유했기 때문이고, 우리 이스라엘은 이란을 그 지경으로 놔두어 한국과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인 것이 북한이 핵을 소유해서 한국이 보복을 못 한 게 아니라 미국이 막아서 못 한 것이기 때문으로, 이스라엘 역시 이란의 핵협상을 미국이 주도하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3.2.5.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일간지 자카르타 포스트는 "이제 북한에게 남은 것은 채찍뿐이다!"라는 생각보다 강경한 표현을 썼다. 그렇지만 남북한의 사이가 험악한 것은 이익이 없는지, 6자회담으로 해결하라는 공식발언이 있었다.2.3.3. 유럽
2.3.3.1. 러시아
러시아 외무부는 공식 성명에서 무력 사용의 주체를 구체적으로 북한이라고 표기하지 않는 대신 '국가 간의 어떠한 무력 사용도 강하게 비난한다'고 밝혔다. 또 '남북한 양측이 인내와 책임감 있는 태도로 한반도 내 군사적 대결의 악화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을 삼가라'고 촉구하였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연평도에 대한 포격을 주도한 자들은 분명히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하여 공식 성명과는 조금 차이를 보였다.[24]하지만 역시 미국이 자국 근처에서 무력시위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은 좀 거슬리는 듯, 6자회담 재개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 사태의 안보리 회부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귀환했다. 또 러시아 정부 주지의 논평을 내 북한을 다시금 강하게 비판했다.
2.3.3.2. 유럽연합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논평을 그다지 내놓지 않던 유럽연합조차도 이 사건에 대해 신속하게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다. 독일 외무부에서는 따로 홍창일 북한 대사를 소환해 항의를 했다고. 이 일로 인해 영국에서는 군비 감축으로 인한 항모 퇴역이 경솔했다는 소리까지 나왔다.2.3.4. 네티즌
해당 사태는 트위터를 중심으로 그야말로 삽시간에 전세계 네티즌에게 퍼져나갔다. 최초 포격 이후 약 20분 만에 해시태그 #KoreaPeace와 #PrayForKorea가 생성되어 1시간 만에 트위터의 Top Trend 1, 2위에 랭크되었으며, 그 밖에 North Korea, Korean 등의 태그도 Top 10 안에 일시적으로 포함되었다. 비영어권 지역에 관련한 해쉬태그가 Top Trend에 이 정도로 급속히 등록된 것은 이란의 '트위터 혁명' 이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참고로 '#prayforkorea' 태그를 쓰자고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많은 팔로워를 갖고 있는 다름아닌 파울로 코엘료였다.덕분에 트위터에 접속한 전 세계 모든 네티즌들에게 해당 태그가 노출되었고 따로 뉴스를 접하지 않은 네티즌들도 사태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그리고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영어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언어로 초당 수십 건의 트윗들이 올라왔다.
Scandinavia and the World의 작가는 세계가 한반도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덴마크의 뉴스에는 눈 얘기밖에 안 했다며 깠다. #[25]
2.4. 유엔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어떠한 의견 충돌이든 대화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하지만 실제로 유엔이 북한에 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 대부분의 의견이다. 그런데 중국 다음으로 북한에 가까운 러시아가 안보리 회부에 발벗고 나서 의외로 안보리 회부가 강한 억지력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허나 천안함 때에도 안보리가 힘을 못 쓴 일이 있었으니 경과를 지켜봐야 할 듯했다.
2.5. 국제형사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는 2010년 12월 초 한국 시민단체인 반인도범죄조사위원회 등이 천안함 피격 사건과 관련하여 이 사건을 제소하자 예비 조사에 들어갔으며 이 사건이 전쟁범죄임이 틀림없다는 잠정결론을 내렸고, 본조사를 시작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결국 2014년에 ICC 검찰부는 23일 "지난 3년 6개월간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ICC가 관할하는 전쟁범죄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1차적으로 광범위한 정보 수집에 주력했다"면서 "정확한 사실 관계 및 법적 판단을 위해서 북한에 정보 제공을 요청했으나 북한이 이를 철저히 무시함에 따라 법적 판단하기에 충분한 조사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ICC는 이어 "북한을 상대로 강제로 조사할 권한도 없어서 앞으로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가 발견될 경우 조사를 재개키로 하고 현 단계에서 예비 조사를 종결했다"고 밝혔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국제형사재판소가 연평도 포격을 전쟁범죄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현재로서는 북측이 조사에 응하지 않아 조사를 보류한다는 의미다.
[1]
마치 일본 극우들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코멘트하는 태도와 흡사한 톤이다. 일본 극우를 민노당,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입하면 완벽하게 일치한다.
[2]
여담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영국에서는 폭격 중에 자신의
반려동물을 데려가려고 폭격당하는 곳으로 다시 돌아와 변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해 개와 고양이 등을
안락사시켰다고 한다. 위협이나 전쟁에는 이렇게 동물들도 피해를 보는 것이다.
[3]
먹을 게 부족하니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사료를 주는 곳으로 개들이 모이게 되고 약한 개들을 공격해서 쫓아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4]
공군 병들은 방공포병과 항공관제, 항공운항 빼고는 모두 비전투병이다. 운항병과 관제병들은 전투병이긴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고 운항병 중 일부는
버드 스트라이크를 막으려 새 쫒느라 공포탄을 넣은 샷건만 들고 업무를 본다. 기지방어 담당이라 총 잡을 일이 많은 군사경찰들도 사실은 기술병과다.
[5]
사실 조그만 부대의 경우 군사경찰이 해야 할 일에 타병과가 섞여 들어가기도 하니까 생각보다 자주 찰 수 있다. 공군 장병이 군장을 하고 총력전의 채비를 마친다는 건 적군이 인근의 우리 지상군 병력을 전멸시키고 공군기지 코앞까지 온, 말 그대로 전세를 뒤집기 힘든 상황까지 왔다는 뜻이다.
[6]
공군기지의 전·후방 기준은 지리상의 위치가 아니라 하는 임무에 따라 나뉜다. 사천기지는 조종사 훈련이 목적이기 때문에 후방 부대로 분류된다. 반면 같은 위도에 있는
김해기지는 국군의 공중 수송·보급을 총괄하기 때문에 오히려 최전방 부대로 분류된다. 여튼 지리상으로나 기능상으로나 후방 중의 후방인 사천기지도 이렇게 반응할 정도로 당시 상황이 심각했다는 뜻이다.
[7]
2016년 이전까지는 6주 외박제에서 언제 휴가를 나갈 수 있는지, 연가를 모을지 여부 등이 임의적이라서 이게 가능했지만 특수한 사정으로 연가를 못 쓰고 전역 후 법정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6주텀 강제+가급적 연가를 다 쓰는 것이 강제되었고 그럼에도 연가 모으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허용되는 분위기였다가 군생활 감축 후에는 완전히 씨가 말랐다고 알려져 있다.
[8]
그 당시 말년휴가자로서 행정반 최선임 후임, 담당보직 간부, 중대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휴가는 즐기되 상황이 상황이니 전화는 유지하고 가족과 지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군은 휴가 시 확인전화를 잘 안 하는 편이다.
[9]
물론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전투복 차림으로 휴가를 갔던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부대장 재량이라 일부 부대만 전투복을 입고 외출하였다. 즉 처음은 아니지만 공군 전부대 착용 지침이 내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10]
이건 인터넷 검색해 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1]
어떤 부대는 하필 그 주간이 집중정신교육주간이었는데 사건이 터지기 전날에 유서 쓰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부대원들의 유서가 진짜 유서가 되지는 않았다.
[12]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엔 후방 부대는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13]
전방부대뿐만이 아니라 각
비행단 후방부대도
단독군장으로 취침하고 침상 아래에 기타
군장을 뒀고 병기를 꺼내기 위한 자물쇠도 항시 개방되어 있었다.
[14]
아까 언급한 일부 상급부대인
대한민국 육군본부(
계룡대),
군수사령부,
한미연합사는 PX, 사지방, 공중전화 이용 통제는 없었다.
[15]
북한이 이 따위 개소리를 하는 것은
북방한계선 문제와 관련 있다. 현재 북한은 북방한계선을 무시하고 자신들 임의로 해상경계선을 설정하여 북한의 영해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 국군은 북한의 영해에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다. 훈련도 연례적이고 일상적인 수준이다. 게다가 북쪽이 아닌 남쪽을 향해 사격훈련을 했다.
[16]
김정일은 이 사건 1년 뒤에 죽었다.
[17]
뒤에 지도에는 북한이 주장하는 경계선이 그어져있다.
[18]
북한은
2002 한일 월드컵 도중
제2연평해전을 일으키고
2006년 독일 월드컵 도중에는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여 국제 경기대회 분위기를 험악케 한 전력이 있다.
[19]
정확히는 패럴림픽 기간. 물론 이때까지 공식적으로 전쟁이 금지되어있다.
[20]
다만 댓글의 분위기들은 우방인 '조선'을 유사시 돕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전체주의 문제집단인 김씨 왕조를 이제는 중국도 포기하자는 의견도 상당했다.
[21]
사실 이러한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은 중국의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국제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킬수록 중국에게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중국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을 포기할 의향이 없다. 단지 그러면서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 편을 드는 척하는 것이다. 북한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당장 북한에 무상 공급 중인 식량과 원유를 끊는다면 북한은 정말 버티지 못할 것이지만 중국은 이러한 제재를 가할 생각조차 없다. 기껏해야 하는 거라곤 중국 내 북한 대사관을 불러 항의하는 수준이다. 다만 중국 정부와 달리 중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계속 미쳐 날뛰는 북한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22]
이 사건이 일어날 때쯤에 민주당 정권이 하도 미국에게 삽질해서 미국이 뭐라고 하기전에 설레발치다가 돌이킬수 없게 되지 않기 위해 미국의 발표를 기다렸다는 얘기가 있다.
[23]
일본이 직접적인 무력공격을 받을 상황이 생겨 일본내의 평화와 안보에 영향을 주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며 만약 한국 내의 일본인이 피해를 입는다면 자위대가 구출수송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24]
참고로 이때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전쟁을 치른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25]
참고로 작가는 덴마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