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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베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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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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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폴 베를렌
Paul Verlaine
파일:Paul_Verlaine_colorisé.jpg
본명 폴-마리 베를렌
Paul-Marie Verlaine
출생 1844년 3월 30일
그랑테스트 메스
사망 1896년 1월 8일 ( 향년 51세)
일드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시인
파트너 아르튀르 랭보 (1871년 – 1875년)
종교 가톨릭[1]
서명 파일:Paul_Verlaine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결혼과 복무2.3. 아르튀르 랭보와의 스캔들2.4. 말년
3.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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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시인. 시(詩)에서 가장 위대한 팽 드 시에클(Fin de siècle, 세기말이라는 뜻)의 대표자 중 한 명이다. '시인의 왕'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들뜨고 떨리는 호흡과 섬세하고 선정적인 감각을 현실에 녹여 순수하게 표현한 언어의 마술사다. 이런 베를렌의 언어는 인상파 화가들뿐 아니라 포레·드뷔시와 같은 고전 음악가들[2], 그리고 샹송가수 세르주 갱스부르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베를렌은 프랑스 북동부 메스에서 쁘띠 부르주아지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851년 파리로 이사 오면서였다. 여기서 헬렌 가의 어느 사립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1853년 랑드리 사립 초등학교, 리세 앵페리알[3] 보나파르트를 졸업하고 대학입학자격고시에 합격한다. 1862년 그는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가세가 기울자 대학을 중퇴했고 보험회사에 근무하다가 시청에 취직했다. 직장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베를렌은 몽마르트르의 문학서클과 고답파 시인들을 찾아다녔다. 이때 샤를 보들레르 테오필 고티에, 방빌을 만났다. 베를렌은 특히 보들레르에게 매료됐다.

고답파 운동과 그 선봉인 르콩트 드 릴의 영향을 받았다. 1863년 시인 루이자비에 드 리카르도가 창간한 출판물 《라 르뷔 뒤 프로그레》에서 시를 최초로 출판했다. 부르주아지를 풍자한 ‘미스터 프뤼돔’. 베를렌은 그가 그 당시의 특출난 예술가들인 아나톨 프랑스, 에마뉘엘 샤브리에, 샤를 크로 등과 교류하던, 루이자비에 드 리카르도의 어머니인 리카르도 후작 부인이 운영하는 살롱과 그외 다른 사교 장소의 단골이었다.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스물두 살 때 ‘사트루누스의 시들’을 모아 <우수 시집>을 발간하면서였다. 이는 그를 장래성과 독창성을 가진 시인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3년 뒤 18세기 앙뚜완 와또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우아한 축제’를 발간해 큰 주목을 받았다. 베를렌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이미 자신의 독특한 운율을 선보이고 있었다.

2.2. 결혼과 복무

베를렌의 어머니 엘리자-스테파니는 외동아들이 시인의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베를렌이 파리의 보헤미안들과 어울리지 않게 하려고 26살 때인 1870년 8월 마틸드 모테를 중매해 결혼시켰으나 베를렌은 시인의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년 후(1870년) 출간할 <고운 노래>에 실릴 시편들을 쓰기 시작했고 1869년 <사랑 축제>를 출간한다. 마틸드를 향한 그의 사랑을 시작으로 베를렌의 사생활은 그의 작품에 흘러들어갔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과 프랑스 제3공화국 선포로 국민위병에 가담했고, 1871년 3월 18일에 코뮌 지지자가 되었다. 베를렌은 파리 코뮌의 중앙 위윈회 홍보국 국장이 되었으나 5월 하순 "피의 일주일"로 알려진 시가전에서 코뮌은 진압되었고, 이때 탈출하여 파드칼레주로 피신했다. 이때 임신 4개월인 아내를 달랑 혼자서, 시가전이 날뛰는 파리 시내를 거쳐 어머니를 데려오도록 보냈다고 한다.

2.3. 아르튀르 랭보와의 스캔들

1871년 8월 파리로 돌아온 베를렌은 9월에 아르튀르 랭보가 보낸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그의 천재성에 매료되었다. 랭보와 만난 베를렌은 랭보를 집에 들인다. 이때 처가살이 중이었는데 아내와 처부모들이 랭보의 방약무인한 행동에 뜨악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평소 순종적이던 마틸드가 불평하자 임신 중으로 당시 만삭이던 그녀를 밀쳐 집어던지는 짓까지 했다. 급기야 베를렌은 랭보와 애인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문제는 베를렌이 이미 유부남이었고, 심지어 10살 연하인 랭보가 아직 미성년자였다는 것이다.[4] 불륜에 빠져 마틸드에게 흥미를 잃고 아내와 아들 조르주(Georges)를 방치하다보니, 안 그래도 술만 마셨다 하면 날뛰는 베를렌의 폭력적 주사로 인해 위기 상태였던 가정은 결국 파탄 상태가 난다. 폭풍같은 사랑에 눈먼 베를렌은 1872년 랭보와 함께 아예 집을 나가버린다. 심지어 마틸드가 앓아누워 베를렌이 의사를 부르러 나왔다가 랭보를 만나면서 그냥 길을 떠나버린 것이다.(...) 런던으로 떠나고, 다시 브뤼셀로 가며 유럽을 여행한다. 마틸드는 남편을 찾으러 브뤼셀까지 왔으나 끝내 그를 데려가지 못하고, 결국 법원에 법적 별거 신청을 한다. 랭보도 병에 걸린 베를렌을 런던에 놔두고 귀국해버린다.

그러나 1873년 랭보는 다시 런던에 오고, 베를렌은 병에서 회복한 뒤 두 시인은 대륙으로 돌아온다. 5월에 재회한 두 사람은 다시 런던으로 떠났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마틸드와 재결합할 결심을 하고 랭보를 런던에 두고 떠난다. 브뤼셀에 가서 랭보를 다시 불렀으나, 여러 번 다투었고 7월에는 랭보가 베를렌을 떠나겠다고 위협하자 베를렌은 술에 취해 질투로 인한 분노로 랭보에게 2발의 총알을 쏘고 만다. 그 중 1발이 랭보의 왼쪽 손목을 상처입혔다. 랭보의 상처는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베를렌은 체포되어 몽스에서 2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옥중에서 아내가 낸 별거 청원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듣고 베를렌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이는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랭보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받게 되었다.

1874년 출간한 《말 없는 연가》에 수록된 시는 마틸드와의 생활에 대한 향수에 젖은 기억과 한편으로는 랭보와의 혼란스러운 일탈에 대한 스케치에 영감을 받아 1872년과 1873년 사이에 쓰여졌으며, 베를렌이 감옥에 있는 동안 출판되었다. 1975년 1월 16일 감옥에서 출소한 후 베를렌은 가정교사를 하는 랭보를 보러 슈투트가르트로 갔고 이때의 만남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다시 영국으로 여행을 갔으며, 링컨셔 스티크니에서 몇 년 동안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1877년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르텔의 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중 뤼시앵 레티누아와 사랑에 빠진다. 랭보에 이어 이번에도 다소 부적절한 관계였는데, 그는 베를렌의 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뤼시앵은 베를렌에게 시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베를린은 뤼시앵이 발진티푸스로 죽자 큰 충격을 받았다.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25편의 시가 담긴 시집 ‘아무르(사랑)’를 집필해 새로운 명성을 얻었다.

베를렌은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는 쥐니빌의 농장에 머물기 위해 정처 없이 아르덴 지방으로 떠났다. 아르덴 입구에 있는 쥐니빌은 레텔에서 15km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5] 라 르투룬 천이 흐르고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져 살기 좋고 문화재가 많다. 베를렌은 1880년부터 1882년까지 이곳에 집 한 채를 얻어 살았다. 리옹도르 여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집으로 여기에서 그는 시를 쓰고 요리를 했다. 여기서 그는 시집 《예지》(‘지혜’로도 번역)를 완성했다.

베를렌의 추억이 가득 담긴 리옹도르 여관은 지금은 베를렌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저명한 사람들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나는 쥐니빌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기지개를 켰다. 나는 여기에 내 운명의 조각들을 남기고 오래 살았다.”는 베를렌의 말이 남아 있다.

1884년에는 쿨롬에서 방랑생활을 하면서 <저주받은 시인들>을 출간한다. 여기엔 랭보와 스테판 말라르메, 트리스탕 코르비에르의 시들이 들어 있다. 이 모음집 서문에서 베를렌은 랭보를 잊지 못하고 ‘시인 중의 거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같은 해 <옛날에, 최근에>를 출간한다.
1885년 파리로 돌아왔는데, 이때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려고 했다가 부지예 교도소에서 한 달간 투옥되었다. 이듬해 어머니는 사망한다.

2.4. 말년

베를렌의 말년은 약물 중독, 알코올 의존증, 빈곤에 시달리는 등 한 마디로 몰락이었다. 슬럼과 공공 병원을 전전하며 살았으며, 파리 카페에서 압생트를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도 프랑스인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그에 대한 지원을 부활시켜 베를렌에게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초기 작품은 재발견되었고, 생활 방식과 군중 앞에서의 이상한 행동은 감탄을 이끌어냈다. 1884년 그의 동료들은 그를 "시인의 왕"으로 뽑았다. 이후로도 <평행으로>(1889년), <헌정시집>(1890년), <이들과 저들>, <행복>, <그녀를 위한 노래>(이상 1891년), <내밀의 전례>(1892년), <비가>,<그녀를 위한 오드>(이상 1893년), <임보에서>, <풍자시집>(이상 1894년) 등 시집들을 계속 출간했다.

그의 시는 존경을 받았고 혁신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작곡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가브리엘 포레는 연작 가곡인 《베니스의 다섯 노래》, 《우아한 노래》 같은, 베를렌의 시에 곡을 붙인 다수의 가곡을 작곡했다. 클로드 드뷔시는 《우아한 축제》에서 6개의 시에 곡을 붙인 《클레르 드 륀》을 작곡했다.

1896년 1월 8일에 파리 데카르트 가에서 51세로 죽었으며, 심티에르 데 바티뇰에 묻혔다.

3. 매체



[1] Kim Willsher, “ How 555 nights in jail helped to make Paul Verlaine a ‘prince of poets’ 더 가디언, 2015년 10월 18일. [2] 드뷔시의 대표작 '달빛'은 베를렌의 <하얀 달(La Lune Blanche)>에서 영감을 받았다. [3] 중고등학교 [4] 다만 나이 자체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내 마틸드도 9살 연하로 랭보보다 겨우 1살 많을 뿐이었기 때문. [5] 랭보의 고향 샤를르 메지에르에서 그리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