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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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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 레기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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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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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에디트 피아프 Édith Pia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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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 Édith Giovanna Gassion |
예명 |
작은 참새 La Môme Piaf | The Little Sparrow |
출생 | 1915년 12월 19일 |
프랑스 공화국 파리 벨빌 | |
사망 | 1963년 10월 10일 (향년 47세) |
프랑스 알프마리팀 주 그라스 | |
국적 | [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
직업 | 가수, 배우 |
장르 | 샹송, 카바렛, 토치송[1], 뮤지컬 |
활동 | 1935년 ~ 1963년 |
자녀 | 딸 마르셀 피아프 (1933 ~ 1935) |
신체 | 142cm |
종교 | 가톨릭 → 정교회[2] |
링크 | 공식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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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가수. 샹송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국민가수[3]이며 프랑스의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최고의 가수로 불리기도 한다.2. 생애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Édith Giovanna Gassion)은 가난한 서커스 단원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서커스단 단원으로 한 몸 건사하기조차 벅차했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포주였던 자신의 어머니(즉, 에디트에게는 할머니)에게 에디트를 맡겼다. 어린 나이에 백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를 겪다가 7살 무렵에야 간신히 회복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키는 142cm에 불과했고, 이것이 피아프(piaf), 참새라는 뜻의 그의 별명의 유래가 되었다.14살 때부터 어린 에디트 피아프는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를 유랑하면서 노래하며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훈련도, 타고난 미성도 얻지 못했던 그였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는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유랑생활이 다 그렇듯이 벌이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간혹 돈이 다 떨어질 때면 그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시절로 회귀해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또한 열일곱에 첫아이인 딸 마르셀(Marcelle)을 출산했지만 아이는 2살의 나이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4]
에디트 피아프의 소문을 들은 클럽 르 제르니의 대표 루이 루플레라는 인물이 그에게 주급이 보장되는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가 얼마 뒤 살해당하면서 관계자였던 피아프는 졸지에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진범이 잡혔고, 풀려나온 그는 어느 새 퍼진 명성을 바탕으로 노래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잔인하게도 불행이 끊임없이 뒤를 따라다녔다.
성공한 뒤에도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겪었고, 평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다. 에디트의 연인인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 1916-1949)은[5] 뉴욕에 있는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1949년 10월 28일 포르투갈 인근의 아조레스 제도에서의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에디트 피아프는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 후술하는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는 바로 이 사고를 계기로 발표한 노래이다.[6] 이후 만난 어떤 애인은 연예계 경쟁자로 변모하고, 어떤 애인과는 폭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었다.
에디트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그리스계 가수인 테오 사라포(Theo sarapo. 본명은 Theophanis Lamboukas). 1936년생으로 에디트 피아프와는 20살 차이였다. 에디트 피아프의 두 번째 남편이었으며 에디트와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1962년 결혼하였고 다음 해인 1963년에 에디트가 사망해서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게다가 에디트가 사망한 뒤 약 700만 프랑의 채무를 지게 되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테오 사라포는 197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으며 에디트의 무덤 옆에 장례를 치렀다.
말년의 에디트 피아프는 관절염과 불면증으로 수년간 다량의 약물과 알콜을 남용하여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또한 교통사고의 후유증도 있었다. 1951년에 교통사고로 팔과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후 모르핀과 알콜 중독에 빠졌고 중독 때문에 또 고생하였다. 이후에도 심한 자동차 사고를 몇 번 더 겪어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재활치료에 들어갔으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1959년에는 위궤양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다. 간이 급격히 나빠졌고 수혈도 필요했다. 체중도 심각히 줄어 1963년에는 30kg밖에 되지 않았다. 수개월간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결국 1963년 10월 10일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Grasse)에 있는 그녀의 빌라에서 간부전으로 인한 동맥류로 47세에 사망하였다. 시신은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2.1. 나치 스파이 의혹
프랑스 국영 채널 다큐멘터리 《의혹의 그림자》(L'Ombre d'un Doute)에서 에디트 피아프가 나치의 스파이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필 그녀의 최대 히트곡인 <사랑의 찬가>에 '당신을 위해서라면 조국도 친구도 버리겠다'는 가사가 있어 의혹이 더해진 듯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선 코코 샤넬, 모리스 슈발리에 등 유명인사들의 나치 의혹을 다뤘다.3. 음악
창법은 프랑스 고전 샹송의 전형으로서 격정적이고 때로는 극적이며, 폭넓고 빠른 떨림의 비브라토로 가사의 마지막 하나까지도 심금을 울리게 한다. 링크[7] 'La vie en rose', 'Non, je ne regrette rien' 등의 r (ʁ, 구개수음)을 보통 프랑스인들과는 다르게 치경 전동음 (r)으로 발음했다.그녀의 노래는 비극적인 삶이 반영되었고, 특기인 심금을 울리는 발라드는 애끓는 목소리로 가창되었다. 주요곡으로는 "Les Trois Cloches"(골짜기에 울리는 세 개의 종, 1946),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1946),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 1949), "Milord"(신사, 1959),[8]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1960) 등이 있다.
3.1. Les Trois Cloches(골짜기에 울리는 세 개의 종) (1946年)
Les Trois Cloches(골짜기에 울리는 세 개의 종) (1946年) |
3.2.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Live (1946年)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Live (1946年) |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1946年) |
3.3.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 (1949年)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 (1949年) |
3.4.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1960年)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1960年) |
이후 파리의 빈민가에 대해 다룬 영화 《 증오(La Haine, 1995)》에서 미국의 힙합 그룹 N.W.A의 곡 Fuck Tha Police와 매쉬업한 버전이 삽입되기도 했고,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를 다룬 영화 《 라비앙 로즈(La Mome, The Passionate Life of Edith Piaf, 2007)》와 《 인셉션 (Inception, 2010)》에도 삽입되었다.[10] 그리고 2017년 기아 스팅어 차량 광고음악으로도 쓰였고, 2021년 《 펜트하우스 II》에도 삽입되기도 하였다.
4. 매체
2003 Ver. | 2022 Ver. |
- Hymne à l'amour: 대한민국의 펑크 록 밴드 검엑스의 일본 메이저 데뷔 앨범 6번 트랙에 리메이크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 KT: Padam Padam이 "빠름 빠름 빠름 LTE WARP"라는 가사로 한국 KT 광고에 쓰였다.
- 라 몸(La Môme): 올리비에 다앙이 감독을 맡았으며 에디트 피아프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2007년 2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피아프 역을 맡은 마리옹 코티야르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영문, 국내 개봉명은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이다.
- 루미너스 위치스: 엘레오노르 지오바나 가시옹의 모티브가 되었다.
- 빠담빠담: 영혼기병 라젠카의 기획 시나리오였던 마술피리의 작가 원종우, 정경아 부부가 만든 만화. 제목인 빠담빠담[11]이 에디트 피아프의 히트곡 중 하나에서 따왔다. 에디트 피아프의 삶 전체를 다룰 예정이었으나[12] 첫딸과 첫 남자와의 이별을 다룬 4권을 끝으로 연재 중단되었다.
5. 여담
-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즉, 양성애자였다.
- 프란시스 풀랑크의 즉흥곡 15번이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오마주했다.
-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셀린 디온이 에디트 피아프의 곡인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을 열창했다. 또한 2024 파리 패럴림픽에서 영화 인셉션에 나온 것으로 유명한 에디트 피아프의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가 아니요 전혀(Non rien de rein)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어 크리스틴 앤 더 퀸즈가 부르고, 앙상블 마테우스가 연주를 맡았다.
[1]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극적인 사랑노래 정도.
[2]
Anastasia Parkhomchik, "
Edith Piaf: Miraculous Healing and Conversion to Orthodoxy", catalog.obitel-minsk.com, 2020.11.5.
[3]
에디트가 프랑스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은 미국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이클 잭슨, 영국에서의
비틀즈, 일본에서의
미소라 히바리나 한국에서의
조용필과 같다고 보면 편하다. 문자 그대로 국민가수.
[4]
하나뿐인 딸을 잃고 크게 충격을 받고 자신은 부모 자격이 없다며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5]
본래 알제리 출신의 권투선수로, 일용 노동자 출신 아버지에게서 나서 미들웨이트급 세계챔피언에 올라 프랑스의 유명인이 되었다. 자식이 셋인 유부남이었으나 1948년 여름부터 에디트 피아프와 연인관계가 되었다.
[6]
당시 이 비행기에는 천재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지네트 느뵈(Ginette Neveu)도 피아노 반주자인 오빠 쟝(Jean Neveu)과 미국으로의 연주 여행을 위해 탑승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출국 직전에 이들 - 마르셀 세르당, 지네트 & 쟝 느뵈 - 이 담소를 나누며 찍은
마지막 모습이 남아 있다.
[7]
죽고난 몇 년 후에 미레유 마티외가 비슷한 창법으로 명성을 얻어 제2의 피아프라는 별명을 갖기도 하였다.
[8]
이탈리아의 유로 팝가수
In-Grid가 이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덧붙여서 앨범 이름부터가 La vie en rose.
[9]
노래 자체가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셀린 디온의 투병 이후 복귀 무대라는 점까지 더해져 개막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는 평이 다수.
[10]
인셉션의 경우 단순한 삽입곡 수준이 아니라,
한스 짐머가 OST 중 상당수의 곡을 Non, Je ne Regrette Rien을 느리게 한 것을 기반으로 작곡했다.
[11]
padam padam
[12]
프롤로그부터가 죽은 에디트 피아프가 자신을 추모하기 위해 몰려든 참배객들을 바라보며 회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