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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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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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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녀
※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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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청 제3대 황제
순치제 | 順治帝
파일:清_佚名_《清世祖顺治皇帝朝服像》.jpg
출생 1638년 3월 15일
성경 선양고궁
(現 랴오닝성 선양시 위홍구)
사망 1661년 2월 5일 (향년 22세)
북경 자금성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능묘 효릉(孝陵)
재위기간 제3대 황제
1643년 10월 8일 ~ 1661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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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중국식 : 푸린(福臨)
만주어 : 풀린(ᡶᡠᠯᡳᠨ)
한국식 독음 : 복림
부모 부황 태종 문황제
모후 효장문황후
형제자매 11남 14녀 중 9남
배우자 정후 - 폐후 박이제길특씨
계후 - 효혜장황후 박이제길특씨
후궁
35명 [ 펼치기 · 접기 ]
효강장황후 동가씨, 효헌황후 동악씨, 정비 동악씨
숙혜비 박이제길특씨, 공정비 박이제길특씨
단순비 박이제길특씨, 영각비 동악씨, 각비 석씨
도비 박이제길특씨, 서비 진씨, 서비 왕씨, 서비 양씨
서비 오소씨, 서비 납라씨, 서복진 파씨, 서복진 당씨
서복진 뉴씨, 서복진 목극도씨, 경급격격, 날급니격격
색옥격격, 매급니격격, 액음주격격, 액륜주격격
매격격, 난격격, 명주격격, 호야격격, 포삼주격격
아모파편오격격, 아기편오격격, 단저격격, 추격격
서격격, 주내격격
자녀 8남 6녀
신장 170cm[1]
한호 만주어 : 이지스훤 다산 한
(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ᡥᠠᠨ)
칸호 몽골어 : Эеэр засагч хаан
(ᠡᠶᠡᠷᠡᠷᠢ ᠵᠠᠰᠠᠭᠴᠢ ᠬᠠᠭᠠᠨ)
묘호 세조(世祖)
시호 중국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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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만주어 : 얼덤부허 황디(ᡝᠯᡩᡝᠮᠪᡠᡥᡝ ᡥᡡᠸᠠᠩᡩᡳ)
연호 1644년 ~ 1661년
중국식 : 순치(順治)
만주어 : 이지스훤 다산(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섭정 섭정왕 도르곤 (성종) (1643년 ~ 16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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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
3.1. 조상3.2. 비 및 후궁, 자녀
4. 창작물에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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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제3대 황제. 청태종의 9번째 아들. 강희제의 아버지.

5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치세 초기 7년 동안은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多爾袞)이 섭정왕이 되어 청나라를 다스렸다. 즉, 이시기 순치제의 치적 대부분은 사실상 황부섭정왕 도르곤에 의해 이루어졌고, 오늘날 교과서에 쓰여진 순치제의 업적도 모두 도르곤의 업적이었다.

이때 이룬 청의 대표적인 업적이 순나라 멸망과 베이징 정복. 즉, 도르곤은 순치제가 후세에 존재감을 남길 수 있게 해준 존재였으나, 어린 순치제는 황권을 위협하는 도르곤을 매우 증오하여 1650년 도르곤이 사망한 이후 그를 부관참시했다.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순치제 입장에서 도르곤은 황제를 깔고 뭉갠 권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 생애

1638년, 청나라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효장문황후. 푸린(복림)이라는 이름은 모친인 효장문황후가 당시 거주하던 ‘영복궁’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부황인 홍타이지는 당시 총애하던 신비 해란주(효장문황후의 언니이자 푸린의 이모이기도 하다) 소생의 아들이 요절해서 상심한 나머지 푸린의 이름을 대충 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당시 만주족의 작명 풍습을 몰라서 나오는 말이다. 당시 만주족은 이름을 의미 있게 짓지 않았다다. 예를 들어 누르하치의 이름은 멧돼지 가죽이고, 도르곤의 이름은 오소리다.

1643년 부황인 숭덕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팔기 회의에서 황제로 선출되었다. 홍타이지 사망 당시 청 황실 최고의 실세는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예친왕 도르곤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유력했던 이는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호오거였다.[2] 세력은 동생 도도와 함께 거느린 양백기, 정백기에다 요토가 생전 거느렸던 양홍기까지 아우를 수 있는 도르곤의 세력이 더 강했으나, 호오거와 지르가랑의 정람기와 양람기를 쉽게 압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였다. 그러나 이 후계자 싸움에 황기[3] 무장 이백여명들이 홍타이지의 황자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황기 장병들을 이끌고 숭정전을 둘러싸면서 상황이 달라진다.[4] 이런 살벌할 분위기 속에서 의정왕대신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누르하치의 14남 도르곤의 동복 형제들은 도르곤의 황위 계승을 지지했으나 도르곤이 황기 무장들의 눈치를 봐서 머뭇거렸고, 황기 무장들은 홍타의지의 서장자 호오거를 황제로, 홍타이지의 정실인 숭덕오궁의 황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푸린을 태자로 밀었다. 후계자 갈등을 조절하고자 했던 의정회의의장이자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도 호오거가 이를 받아들이기 바랐으나 호오거는 황기 무장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회의 중간에 나가버렸다. 회의가 진행될수록 친왕들이 황기 무장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퇴장했고, 도르곤, 그의 친동생 도도, 지르갈랑만이 회의장에 남았다. 홍타이지의 황자가 황위를 잇지 못하면 황기 대신들이 전부 죽일 기세였기에 도르곤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순치제를 보좌하기로 맹세하며 지르갈랑과 함께 섭정왕이 된다.

여섯 살의 푸린이 황제에 오르고,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愛新覺羅 舒爾哈齊)의 6남인 정친왕 지르가랑(濟爾哈郞)이 좌우 섭정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르가랑은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에 오른 도르곤이 거의 혼자서 다 행사했다.

순치제가 황제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명나라에서 이자성의 농민 반군이 북경을 점령했고, 숭정제가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며 귀순해오자 도르곤은 누르하치 이래 존버를 거듭한 팔기군의 원기옥(!!!)을 터뜨려 산해관을 돌파하고 명나라를 총공격하여 이자성군을 내쫓고 북경을 접수한다. 이어 도르곤은 청나라가 천명을 상실한 주씨의 명나라를 계승하는 황제국임을 천하에 선포하고 전란으로 파괴된 북경을 복원하며 자금성으로 순치제를 모셔 새로이 즉위식을 열었다. 다음해 이자성은 쫓기던 중 살해당한다. 이로서 도르곤은 아버지 누르하치와 이복형 홍타이지도 이루지 못한 최대 숙원 사업인 중원 통일을 완수하였다.[5]

도르곤은 1650년에 죽기 전까지 사실상의 황제로서 청을 통치했다. 옥새도 도르곤이 가지고 있었을 정도.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르곤이 사망한 후 친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12세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다.

도르곤의 섭정은 순치제 개인에게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순치제의 적모인 효단문황후는 황태후로 불렸으나 존호가 없었고, 생모인 효장문황후는 도르곤의 방해로 아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으며 도르곤 사후에 정식으로 성모황태후가 되었다. 도르곤은 6부의 권한과 병권을 쥐고 있었고, 순치 4년 12월엔 황제에게 배알하는 예를 그만두었으며, 순치 5년 11월엔 황부섭정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의 웃어른으로서의 지위를 과시했으며, 도르곤의 측근들은 순치제를 어린애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기 전까지 후견인인 숙부에게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자란 어린 아이이자 권신에게 눌려 권위가 실추된 황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도르곤은 섭정 당시 순치제에게 제왕학, 경전 등의 학문과 정무를 가르치지 않아 순치제는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동시에 정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 때문에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은 후에도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고집을 부리거나 격정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언행을 자주 보인다.

순치제는 마음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삼촌이 죽자 존호를 추탈해버리고(실제로 도르곤이 기주로 있던 정백기 장수, 측근들이 친형인 아지거를 섭정왕으로 만들려 했다가 순치제와 섭정왕 자리를 잃은 지르가랑에게 걸려서 아지거는 자결했고 장수들은 숙청당했다.) 유골까지 훼손해버렸다.

관습에 따라 청나라 황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를 맞았는데[6] 순치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7] 심지어 첫 황후는 질투가 심하고 자신의 정한 게 아니라 도르곤이 선택한 황후라며 폐출시키기까지 하였다.[8] 어린 시절 억압받았던 것의 반작용인지 순치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자신이 정한 혼사에 집착했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몽골 출신 비들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후궁들을 좋아했다. 황태자가 된 3황자 히오완예이(훗날의 강희제)의 생모 효강장황후 퉁기야씨도 순치제의 후궁이었고, 그중에서도 순치제가 가장 총애한 후궁은 현비 동오씨다.[9]

효장태후와 순치제의 갈등은 몽골 출신 황후들 외에도 복잡한 사정이 있다. 친정 후, 순치제는 이전까지 그를 비호하던 황기 대신들과 많은 갈등에 부딪혔다.[10]
순치제는 뒤늦게 학업을 시작하면서 한시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11] 오보이 등의 만주 원로 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한족 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고, 순치제의 아들인 강희제에게도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어린 황제가 등극하고 도르곤이 섭정하면서 의정회의의 권한이 강해지고 홍타이지가 구축한 중앙집권체제가 와해되자 순치제는 중앙집권체제를 재구축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인을 등용했다.[12] 만주 기인들은 학문 성취가 떨어지고 민정 사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3] 순치제는 황실 최고 어른인 효장태후가 내무부를 쥐고 있어[14] 황궁 안에 자신의 측근이 되어 줄 신하가 없자, 자신의 황권을 회복하기 위해 황제 직속 기구인 내십삼아문을 세워 환관을 등용했다. 명나라가 환관 정치로 얼마나 망가졌는지 잘 알고 있는 만주 대신들과 효장태후는 이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15] 또한, 순치제는 도르곤을 따르던 정백기에서 도르곤의 최측근을 처벌하는 동시에 정백기인들을 포섭하고자 황실 직속으로 편성했으며, 정백기인 동악비를 총애했다.[16] 순치제로서는 황권을 회복하고 팔기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였지만 수년 동안 정백기와 싸워온 황기 대신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17] 효장태후와 몽골세력도 황기 대신들에게 동조하며 순치제의 정책을 비판했다. 제왕학 교육을 늦게 받은데다 도르곤에게 억압받고 자란 순치제는 이들을 잘 달래지 못했고 감정적으로 대응했다.[18]

이런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인지 순치 14년부터 순치제는 불교에 관심을 가지며 궁에 승려를 자주 부르고는 했다. 현비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순치제는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으며, 4개월 후인 1661년, 천연두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제위를 황태자 히오완예이에게 물려주고 붕어하였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국정은 선정이었다. 친정 직후 황족 출신 왕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으로 황권을 강화하였다.[19] 1659년 남명을 윈난성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변발과 만주 복식을 강요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대학살을 일으켜 많은 한족들을 죽였다. 영상 단, 난을 어느 정도 평정한 후 한족에 대한 융화 정책도 병용해서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다만 한족 출신 공신인 오삼계 등의 3번 세력들의 세력은 무척 커져 강희제 때 삼번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순치제는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을 매우 총애했다. 아담 샬은 명나라 때부터 베이징에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로, 소현세자가 베이징에 있을 때 만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 역법에 능해[20] 도르곤 때부터 인정받았지만 순치제가 친정을 선포하면서 더욱 대박을 치게 된다. 입관 직후 통의대부, 태복시경, 태상시경에 임명되고 정 3품이 된다. 순치제는 심지어 삼궤구고의 예마저 종교를 감안하여 면제해준다. 몇 년 후에는 광록대부의 봉호를 받고, 조상 3대가 은전을 받는다. 1656~1657년까지는 순치제가 두 해 동안 24번이나 집에 직접 왕림하였다. 샬은 순치제에게 충고도 여러 가지 하였는데, 궁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황제 스스로 자신을 질책하고 회개하라고 충고하여 아담샬이 '섭정왕'이란 조롱투의 기록까지 있다. 덕분에 예수회가 청나라를 조종하였다는 음모론이 나도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야사에서는 현비가 죽었을때 신하들이 황후 추서에 반대하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를 물린 후 오대산으로 출가를 했고, 1669년(강희 8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심지어는 손자인 옹정제 초기까지 살고 입적하였다고는 한다. 이는 김용 무협소설 녹정기라거나 얼웨허의 역사 소설 제왕삼부곡 등에도 차용된 이야기인데, 물론 야사는 야사일 뿐, 믿지는 말자.

순치 18년(1661년)에 제위를 황태자인 3황자 히오완예이에게 물려주고 23세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사후 청나라 황실의 능구 두 곳 중 하나인 청동릉의 효릉(孝陵)에 안장되었다. 야사에는 효릉 안에 순치제가 생전에 신던 신발 한 켤레와 부채 한 자루만 부장품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졌고, 이 때문인지 1928년 쑨뎬잉이 청동릉에 난입해 강희제의 경릉(景陵), 건륭제의 유릉(裕陵), 함풍제의 정릉(定陵), 동치제의 혜릉(惠陵) 등 네 황제의 능을 도굴해 보물이 약탈당하고 유해가 훼손될 때도 무사할 수 있었다.

순치제의 치세 기간(1643년~1661년) 조선의 왕은 인조(仁祖, 1623년~1649년), 효종(孝宗, 1649년~1659년), 현종(顯宗, 1659년~1674년)이 재위했다. 일본은 에도 막부 시절이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徳川家光 1623년~1651년),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 (徳川家綱 1651년~1680년) 재위기랑 일치하다.

3. 가족

3.1. 조상

3.2. 비 및 후궁, 자녀

순치제는 정말 많은 부인을 두었다. 역사에 기록된 수만 37명이다. 4명의 황후, 7명의 측비, 5명의 서비, 4명의 서복진, 17명의 격격을 두었다. 격격이란 황족이나 귀족의 첩실의 존칭이다.

순치제의 부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순치제는 부인들 사이에서 8남 6녀의 친자녀를 낳았고, 양녀 3명을 들였다. 순치제의 친딸들 중에 황2녀인 화석공각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10살이 채 되지 않아 요절하였다. 순치제의 자녀 목록은 다음과 같다.

4. 창작물에서

대체로 창작물이 묘사하는 시기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청의 입관 이전과 직후를 주로 다루는 '대청풍운' 등의 여러 작품에서는 보통 처음에는 아역으로 시작하며 존재감이 없다가 성장할수록 어머니를 좋아하는 삼촌을 질색하는 사춘기 아이로 그려지고, 청년 시기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동고비와의 로맨스와 사별 후의 슬픔과 상실감, 동고비에 정신 팔린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공부(집안일과 나랏일)는 뒷전이고 첫사랑에 환장한 고딩[22]과 그런 아들한테 잔소리하는 엄마랄까. 정사와 별개로 야사를 따라 죽음을 가장하고 출가한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나, 어찌되었든 제위에 있는 동안엔 명청교체기의 다른 주요 인물들과 달리 수염을 풍성하게 기를 정도의 성숙한 어른으로 묘사되는 일은 거의 없다.[23]

5. 둘러보기

청사고(淸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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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태조기(太祖紀)」 2·3권 「태종기(太宗紀)」 4·5권 「세조기(世祖紀)」
애신각라 노이합적 애신각라 황태극 애신각라 복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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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신각라 현엽 애신각라 윤진 애신각라 홍력
16권 「인종기(仁宗紀)」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0권 「문종기(文宗紀)」
애신각라 옹염 애신각라 민녕 애신각라 혁저
21·22권 「목종기(穆宗紀)」 23·24권 덕종기(德宗紀)」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애신각라 재순 애신각라 재첨 애신각라 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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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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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bgcolor=#fecd21><tablewidth=100%> 215·216·217·218·219·220·221권 「제왕전(諸王傳)」 ||
애신각라 예돈 · 애신각라 액이곤 · 애신각라 재감 · 애신각라 탑찰편고 · 애신각라 막이합제 · 애신각라 서이합제 · 애신각라 아이합제 · 애신각라 파아랍 · 애신각라 저영 · 애신각라 대선 · 애신각라 아배 · 애신각라 탕고대 · 애신각라 망이고태 · 애신각라 탑배 · 애신각라 아파태 · 애신각라 파포태 · 애신각라 덕격류 · 애신각라 파포해 · 애신각라 아제격 · 애신각라 뇌모포 · 애신각라 다이곤 · 애신각라 다탁 · 애신각라 비양과 · 애신각라 호격 · 애신각라 엽포서 · 애신각라 석새 · 애신각라 고새 · 애신각라 상서 · 애신각라 도새 ·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 애신각라 복전 · 영친왕 · 애신각라 상녕 · 애신각라 융희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잉 · 애신각라 윤지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우 · 애신각라 윤사 · 애신각라 윤당 · 애신각라 윤아 · 애신각라 윤도 · 애신각라 윤상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파 · 애신각라 윤례 · 애신각라 윤의 · 애신각라 윤희 · 애신각라 윤호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비 · 애신각라 홍주 · 애신각라 홍휘 · 애신각라 영황 · 애신각라 영련 · 애신각라 영장 · 애신각라 영기(永琪) · 애신각라 영종 · 애신각라 영선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기(永璂)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린 · 애신각라 면개 · 애신각라 면흔 · 애신각라 면유 · 애신각라 혁위 · 애신각라 혁강 · 애신각라 혁계 · 애신각라 혁흔 · 애신각라 혁환 · 애신각라 혁합 · 애신각라 혁혜 · 민군왕
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 호이간 맹가포록 대산 오이고대, · 청길노 · 양길노 , 납림포록 금태석 포한 포양고 포이항고, 포점태 · 배음달리
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장황언 , 나륜 장명진 왕익, · 정성공 ,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 삭해 왜흑, · 하화례 ,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색액도등전(索額圖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색액도 · 명주 ,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273권 「이솔태등전(李率泰等傳)」
이솔태 · 조정신 · 낭정좌 · 동봉채 · 마륵길 · 시유한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영보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7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8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 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457권 「장동재등전(蔣東才等傳)」
장동재 · 이남화 · 동리고 · 동전승 · 우사한 · 조덕경 · 마복진 · 정문병 · 방요 · 등안방
458권 「서연욱등전(徐延旭等傳)」
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459권 「풍자재등전(馮子材等傳)」
풍자재 · 왕효기 · 진가 · 장종한 · 소원춘 · 마성치 · 왕덕방 · 장춘발 · 소득룡 · 마유기 · 오영안 · 손개화 · 소득승 · 장고원 · 구양이견
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 진시림, · 요문섭 , 황정린, · 낙종린 ,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 장극억 가박, · 소사요 ,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 유후, · 장기 , 석가소, · 유형 ,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만사대 · 호위 · 모기령 · 염약거 · 혜주역 · 진후요 · 장림 · 임계운 · 전조망 · 심융 · 강영 · 저인량 · 노문서 · 전대흔 · 왕명성 · 대진 · 단옥재 · 손지조 · 유대공 · 공광삼 · 소진함 · 왕염손 · 왕중 · 무억 · 장술조 · 척학표 · 정걸 · 손성연 · 왕빙진 · 능정감 · 계복 · 강성 · 전대소 · 허강좌 · 공음식 · 육기 · 광계
484·485·486권 「문원전(文苑傳)」
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497·498·499권 「효의전(孝義傳)」
주용순 · 오번창 오겸목 · 주정 · 적요 · 이경염 · 왕호 · 황농 · 조형 · 황가장 · 정명윤 · 유종수 · 하복한 · 허계각
500·501권 「유일전(遺逸傳)」
502·503·504·505권 「예술전(藝術傳)」
506 · 507권 「주인전(疇人傳)」
설봉조 · 공사연 · 왕석천 · 방중통 · 매문정 · 명안도 · 유상규 · 왕문계 · 주홍 · 박계 · 허여란 · 이황 · 왕래 · 진걸 · 시왈순 · 이예 · 낙등봉 · 항명달 · 정취충 · 사가화 · 오가선 · 나사림 · 고관광 · 좌잠 · 증기홍 · 하란상 · 추백기 · 이선란 · 화형방
508·509·510·511권 「열녀전(列女傳)」
518·519·520·521·522·523·524·525권 「번부전(藩部傳)」
526·527·528·529권 「속국전(屬國傳)」
조선 · 유구 · 월남 · 면전 · 섬라 · 남장 · 소록 · 구르카 · 호한 · 보노특 · 합살극 · 안집연 · 마이갈랑 · 나목간 · 탑십간 · 바다흐샨 · 박라이 · 아부한 · 감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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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2] 이로부터 7년 전인 병자호란 때 홍타이지가 이끌며 압록강을 건너온 우익군과 별개로 좌익군을 이끌며 함경도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두 지휘관이기도 하다. 각종 스캔들로 계급 강등과 감봉을 거듭하던 사고뭉치 형제와 조카들은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했지만 이 둘은 홍타이지가 가장 신임하는 팔기군의 에이스들이었다. [3] 홍타이지 직속 기인 양황기와 정황기 [4] 친왕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장병들은 얼마 되지 않았던데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선 부르기도 어려워서 황기 무장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5] 다만 이것은 중원에 입성( 입관)했다는 정도이지 여전히 남쪽에는 남명세력이 잔존했으며 대만을 차지한 정성공 동녕 왕국과 추후 삼번의 난을 일으키는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왕들이 존재했기에 완전한 통일은 강희제때이다. [6] 청나라 초반 때 몽골칸위+동맹으로 후방 위험제거를 위해서였으며 아버지인 홍타이지도 적모이자 고모할머니인 저르저르, 생모인 붐부타이, 이모 하이란주와 정략결혼했다. 보다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누르하치는 처음 자신의 주변 부족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비교적 가까운 위치의 차하르부 몽골족과 동맹관계를 구성하여야 했다. 이에 따라서 홍타이지의 정실 저르저르가 시집을 왔는데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자기 부족의 이익을 위하여 조카 붐부타이를 후궁으로 들였지만 붐부타이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이후 순치제를 낳긴 했지만), 홍타이지의 의지에 따라서 붐부타이의 언니이자 기혼녀였던 하이란주도 후궁으로 들어왔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푸진(부인)으로 인정받은 5비들은 모두 몽골 출신인데, 저르저르과 하이란주, 붐부타이, 이외에 나므정과 바트맛주는 차하르부 링단 칸의 푸진(부인)들로 몽골 여성들이였다. [7] 황후들은 모두 어머니인 효장문황후의 조카(첫번째 황후)와 조카손녀(두번째 황후)였다. [8] 순치제는 동악비의 행장에 두 황후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한다. 첫황후 정비는 아름답고 영민하지만 질투가 심하며 사치스럽다고 비판했고, 계후는 동악비와 비교하며 어디가 부족한지 조목조목 깎아내린다. [9] 아래에 서술된 순치제가 총애한 아담 샬 역시 순치제가 현비 동오씨에 대해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현비 동오씨를 얼마나 총애했으면 아직 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황후 바로 밑의 지위이자 후궁 중에선 가장 존귀한 자리인 황귀비의 자리에 올릴 정도였다. [10] 다만 정황기의 혁사리 색니, 마가 도해, 진명하 같은 문신들은 순치제를 지지했다. [11] 도르곤 섭정 중에는 순치제가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2] 그러나 한인관료들이 만주대신들과 맞서려고 하면 엄격히 막았다. 청나라에서 한인들은 조정 내에서 직접 의견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만주대신들의 의견에 동참하는 식이었다. [13] 홍타이지가 행정과 학문에 뛰어난 만주 기인을 양성하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공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며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게 더 많은 보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14] 몽골 코르친부의 후비들에 대한 냉대와 폐위는 순치제 개인의 애정 문제만이 아니라 효장태후의 황궁 장악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략적 시도이기도 했다. [15] 순치제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아서 환관의 품계에 제한을 두었다. [16] 순치제의 후비들 중에 만주 양황기나 정황기 출신은 한 명도 없다. [17] 특히 정백기에 대한 양황기의 적대감은 대단했다. 강희연간에는 양황기의 원로 대신 오보이가 정백기로부터 빼앗긴 양황기의 땅을 돌려달라고 주청한 적도 있으며 (청나라는 입관부터 멸망까지 팔기의 재정 문제와 땅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백기의 원로 대신 소극살합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18] 순치제의 뒤를 이은 강희제는 아버지보다 능숙하게 대응했고, 효장태후는 나이가 든 뒤 황기 대신들과 거리를 두고 손자를 옹호했다. [19] 황권을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제2의 도르곤을 막기 위해서였을지도. [20] 역법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화약 기술은 강희제가 삼번의 난에서 많이 써먹었다. [21] 청초기 정실로 인정받는 동서궁황비 이상의 예우를 받았다. [22] 시청자들의 흥미를 위해 첫사랑만 강조되는거지만 사실 순치제는 세조라는 격조 높은 묘호가 도르곤 덕분이라며 저평가받는다고는 해도 명청교체기 황제로서 어지간한 명나라 명군들 앞에 명함을 내밀어볼 정도로 평타 이상의 수완을 내는 황제였다. 그것도 10대의 나이에 친정을 하며 한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팔기제를 정비하며 남명의 영력제 정권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급이었는데, 강희제조차도 그 나이에는 삼번의 난 앞에 멘붕하여 갈팡질팡하던걸 감안하면 더욱 높이 평가할만 하다. 단지 첫사랑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서 명민한 황제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 유달리 강렬하게 기억될 뿐이다. [23] 어진에 제법 멋들어지게 그려진 콧수염은 과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소년 황제였던 동치제, 광서제의 어진에는 수염이 거의 묘사되지 않았고, 광서제 역시 꼭두각시로나마 30대까지 살긴 했지만 수염은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순치제의 어진은 콧수염을 진하게 강조하느라 소년 황제의 이미지에 맞지 않게 노안으로까지 보이는데(사실 순치제 정도는 적당하다 싶을만큼 청나라 초창기의 황족들 초상화가 심하게 노안으로 그려진 예가 좀 있다. 도르곤처럼 30대 후반에 죽은 호오거는 무슨 일흔 넘게 장수한 강희제급의 노인으로 그려졌을 정도.), 실제로 콧수염을 길게 길렀대도 갓난아기라고 자신을 무시하던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이고자 신경 쓰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동고비한테 멋있어보이려고 열심히 관리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