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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어젯밤 이야기/그녀에게 전해주오 (1987.04.20) |
2집 소방차 제2집 (1988.00.00) |
3집 SOBANGCHA 3 (1989.08.01) |
비정규 소방차 캐롤송 메들리/유열 캐롤송 (1989.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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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집 AGAIN (1995.00.00) |
5집 Sobangcha 96 Forever (1996.00.00) |
6집 05 Man's Life (2005.04.08) |
- [ 역대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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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 1기 이상원 • 정원관 • 김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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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 2기 정원관 • 도건우 • 김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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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 Sobangcha |
}}} | |
<colbgcolor=#000><colcolor=#fff> 그룹명 | 소방차 | |||
Sobangcha(영어) | ||||
장르 | 댄스( 아크로바틱), 락, 트로트, 시티팝 | |||
리더 | 김태형 | |||
멤버 |
1기:
이상원,
정원관,
김태형 2기: 김태형, 정원관, 도건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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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 | 한밭기획 | |||
팬클럽명 | 부래나라, 긴급출동, SBC, 소방대원, 적색 전선, B By Too [1] | |||
활동 기간 |
1집:
1987년 ~
1988년 (1기) 2집: 1988년 ~ 1989년 (1기 → 2기) 3집: 1989년 ~ 1990년 (2기) 4집: 1995년 (1기) 5집: 1996년 (1기) 6집: 2005년 ( 김태형, 이상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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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
1987년
4월 20일[2] 정규 1집 그녀에게 전해주오 (데뷔일로부터 [dday(1987-01-01)]일째) |
[clearfix]
1. 개요
소방차 선배님들은 워낙에 제가 가수가 되기 전부터 굉장한 스타셨고, 제가 댄서로 있던 시절에도 그분들의 공연을 많이 봤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죠. 저하고는 활동 시기가 겹치지 않아서 다행히…. 맞물렸으면 제가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했겠죠.
현진영[A]
현진영[A]
대한민국의 3인조 댄스 그룹. 1987년 '그녀에게 전해 주오'로 데뷔한 이후 ' 어젯밤 이야기', '연애 편지', '사랑하고 싶어', '하얀 바람', '통화중', 'G카페', 'Bye Bye', '추남 시대' 같은 히트곡을 내놓으며 인기를 끌었다.[7]
소방차는 한밭기획 양승국 회장과[8] 훗날 DSP 사장이 되는 이호연이 주요 멤버가 되어 제작했다.[9] 그래서 소방차를 소위 한국의 0세대 아이돌로 국내 최초의 아이돌 댄스 그룹으로 평가한다.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방송가에서는 90, 00, 1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방차를 최초의 아이돌 그룹으로 평가해왔고 방송가에서의 이런 평가가 딱히 뒤바뀐 기색은 없다. 물론 소방차는 현재의 KPOP 아이돌과 많이 상이하긴 하나 아이돌이라는 큰 의미에서 봤을 때 소방차 역시 충분히 아이돌 댄스 그룹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소방차가 한국 아이돌의 효시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단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시스템이 바뀐 것이다.[10]
2.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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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 정원관 | 도건우 | 이상원 |
1962. 11. 6. ([age(1962-11-06)]세) 리더 보컬 |
1963. 3. 2. ([age(1963-03-02)]세) 보컬 |
1964. 12. 25. ([age(1964-12-25)]세) 보컬 |
1963. 2. 13. ([age(1963-02-13)]세) [11] 보컬 |
3. 활동
활동 당시 국내에는 생소했던 퍼포먼스와 댄스를 메인으로 하였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여전히 서구권의 댄스 음악보다는 트로트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어, 대중음악사적으로는 과도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쉬운 멜로디와 사랑에 대한 현실적이면서 솔직한 노랫말, 그리고 아크로바틱을 기반으로 한 동작이 큰 안무를 내세웠다. 그 당시 학생들에게 '정원관 머리'가 대유행했으며, 소방차 책받침 하나 정도는 필수품이었다. 삼일제약의 부루펜 시럽, 코니카필름, 금성사 미니카세트 아하를 비롯해서 수많은 광고 모델로도 활약하고 인지도가 워낙 있다 보니 신문수의 대표 만화인 로봇 찌빠에서 불이 나서 "소방차 불러와!" 이래서 노래 부르던 이 소방차 셋을 데려 온다든지 하는 썰렁 개그도 나온 적이 있다. 그룹 이름을 소방차로 지은 이유도 원래 하려던 이름이 너무 길었던 탓이라고 얘기했었다. 참조. 당시 연예관련 기사들에서는 소방차가 불을 지르고 다닌다라고 표현되었다. 왕성한 활동을 벌여 10대들의 원조 오빠들이었다. 특히나 퍼포먼스는 거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수준이었는데, 댄스라고 선보였던 게 공중제비였으니,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생략될 지경이었다.[12]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가요 프로그램에서 단 한번도 1위를 한 적이 없다. 이선희의 '나 항상 그대를', 김흥국의 '호랑나비', 이상은의 '담다디'가 상대였던 것 정도가 객관적인 이유. 하지만 사실 단 한 번도 1위를 못했던 것은 방송국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또 한 가지 설로는, 소방차의 팬들이 없으면 관객석이 텅 비기 때문에 관객을 채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2위만 10~15주를 줬다는 후문이 있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아이돌 그룹의 마케팅을 한국식으로 어레인지하여 사용한 덕에 소년대와 같은 일본 아이돌 그룹의 느낌이 강하다. 애당초에 소방차라는 그룹명도 소년대에서 따온 이름이다.[13] 특히 정원관 포지션인 뚱보 멤버 하나가 껴 있는 기믹은 80년대 초중반 일본 보이밴드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한국에서는 소방차 이전에는 없었던 기믹이었다. 이후 서울 시스터즈에서 방실이도 처음에는 이 기믹으로 인지도를 쌓았지만 방실이가 워낙에 출중한 보컬리스트라 뚱보 기믹에서 벗어났다.[14] 이후에는 슈퍼주니어의 신동이 뚱보 멤버 기믹을 이어받았다가 슈주 활동이 계속되면서 기믹에서 벗어났다.
국내 최초로 3인조 댄스 그룹이 인기를 끌고 소녀팬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에서 아이돌 그룹의 시초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15] 소방차가 아이돌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논쟁이 있고 과도기적 그룹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말하자면 KPOP 아이돌 그룹이라고 한정해야지 소방차 역시 충분히 아이돌 그룹이다. 또한 1세대라고 불리는 그룹들도 사실 어떻게 보면 2, 3, 4세대 그룹들과 상이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굳이 소방차만 따로 볼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는 않다.
KPOP 아이돌의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은 있으나 한국 아이돌의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충분하다. 청소년 지향, 무대에서의 댄스와 퍼포먼스, 쉬운 사랑노래 등 과거의 한국 그룹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물론 국보자매니 희자매니 바니걸스니 하는 과거의 그룹들과 일일이 차별점을 두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전의 그룹들이 성인 타겟으로 나왔다면 소방차는 청소년 타겟으로 나온 점, 이전의 그룹들이 아이돌 느낌을 띄고 있는 미국의 보컬그룹 등을 모티브로 삼고 나왔다면 소방차는 그냥 아이돌 그룹을 모티브로 삼고 나왔다는 점 등에서 그 전의 그룹들과는 충분한 차별점이 있다.
80년대 후반 이전으로 말하자면 뚜와에무와 등으로 대표할 수 있는 포크 그룹도 아이돌 성향이 있긴 하지만 이런 포크그룹들은 상당히 사변적이고 문학적인 가사를 구사했다. 희자매 등 댄스 퍼포먼스가 당시 기준으로 상당했던 그룹도 있으나 청소년 지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까고 말해서 꽤 멍청한 가사였다.[16] 그리고 단어선택을 봐도 어젯밤 파티가 외로웠다며 대놓고 파티라는 외래어를 쓰고 있는데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대중적인 단어는 생일잔치지 생일파티는 아니었는데 외래어인 파티를 쓰는 이런 디테일들을 소방차가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노리고 나온 그룹답게 이전과는 차별성이 크다.
비슷하게 댄스풍 트로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박남정도 비슷한 입지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 소방차의 음악성이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아이돌 그룹으로는 트로트와 댄스를 접목시킨 '뽕댄스'의 '영턱스 클럽', 이호연이 제작한 '젝스키스'[17], 그리고 아크로바틱 댄스가 장기였던 'NRG'가 있었으나, 현재는 이런 스타일의 그룹이 없으므로 맥이 끊긴 상태이다.
사실 가수에 대한 열광은 60년대부터 있었기에 어느 가수건 당시 정상급의 자리를 차지한 가수들을 아이돌이라 부를 수 있다는 건 일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그 풍조가 사뭇 소위 말하는 아이돌 가수로 가까워졌음은 당시의 신문 잡지에서 지적되는 바이다. 박남정, 김완선, 이선희, 박혜성 등 당시의 젊은 인기 가수 중 자기가 팬인 단 한 명 혹은 한 팀을 보기 위해 방송국과 공연장에 몰리는 팬들, 그리고 그들끼리의 패싸움과 비방 중상 등이 보기 흉하게 격화되었음은 신문지상에 가끔 나오던 주제였다.
이 이유는 결국 90년대의 아이돌 부흥이 일어나기 전의 전조로 봐야 하고, 그 조건으로 꼽히는 경제발달, 문화발달, TV 등 매체의 보급이 90년대 한순간에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당연한 이유라고 봐야 한다. 또한 그를 뒷받침하는 세계화, 자유화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80년대까지는 군부독재였다가 90년대부터 민주화가 시작되었다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으나 조건 자체는 이미 80년대부터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고 전조현상은 나타나고 있었다.
80년대와 90년대는 꽤 단절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 어젯밤 이야기의 87년과 난 알아요의 92년의 5년차는 그렇게 차이가 나는 시기는 아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본격적인 아이돌의 시작으로 보는 게 맞지만, HOT 등의 1세대 아이돌들이 서태지의 모든 것을 따라한 것은 아니다.[18][19][20] 물론 소방차 스타일의 맥이 DSP 등의 하락세 등으로 현재는 단절되기는 하였으나 상술되었듯이 젝키, NRG 등 1세대를 대표하는 굵직한 아이돌을 비롯해 많이 영향이 있었던 만큼 소방차를 굳이 인정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최초 멤버는 KBS2 젊음의 행진 백댄서팀 '짝꿍들' 출신인 김태형, 정원관, 이상원이었으며, 2집 앨범 타이틀곡인 통화중으로 활동한지 얼마 안 된 1988년에 이상원이 탈퇴해 한밭기획에서 그룹을 해체시켰다. # 해체 후 12일 만에 장혜리의 백업댄서팀이었던 '에레스테' 출신인 도건우를 영입해 음반 녹음을 다시 한 뒤에 그룹 활동을 재개했다. # 이에 대해 이상원은 당시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고 하며 사장님이 뭉칫돈 주면서 좀 쉬고 오라고 권했는데 거절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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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소방차 강제 해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김태형 (2012년 6월 26일 KBS 승승장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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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멤버인 도건우 영입 후 12일 만에 활동을 재개한 소방차 (1988년 8월 15일 기사) |
1994년, 초기 멤버(김태형, 정원관, 이상원)로 재결성, 4집 활동을 시작하다 이듬해인 1996년 5집 추남 시대 활동 이후 활동을 중지했다. 2001년 80년대 젊음의 행진 멤버들의 옴니버스 앨범인 대팔회 앨범에서 위선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2005년, 계약 문제로 합류를 거부한 정원관을 제외한 김태형과 이상원이 소방차 6집 앨범 Man's Life를 발표했다. Man's Life 앨범은 표면적으론 1~5집의 대표곡을 리메이크한 리메이크 앨범이었는데, 신곡도 4곡 포함되어 있다. 2016년에 응답하라 1988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팀으로서 활동을 이따금 하고 있다.
해체와 재결성, 완전 해체와 리메이크 앨범의 발표로 이어지는 굴곡 많은 활동 경력을 가지고 있어 공식적인 정확한 활동 시기를 이야기하기 어려운 그룹이다. 일단 공식 활동 기간은 1987년 ~ 1990년과 1994년 ~ 1996년이다. 중도에 멤버 교체도 있었고, 재결성 당시에도 합류를 거부한 멤버가 있어서 순서가 좀 뒤죽박죽이다.
4. 활동 역사
자세한 내용은 소방차(아이돌)/활동 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5. 음반
자세한 내용은 소방차(아이돌)/음반 문서 참고하십시오.6. 방송
자세한 내용은 소방차(아이돌)/방송 문서 참고하십시오.7. 광고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FFFFFF><rowbgcolor=#000000><rowcolor=#fff> 기업명 || 브랜드명 || 분류 || 출연 멤버 || 링크 ||
1987년 | ||||
오예스 | 식품 |
이상원 정원관 김태형 |
||
1988년 | ||||
아하 | 전자기기 |
이상원 정원관 김태형 |
||
1989년 | ||||
코니카필름 | 필름 |
김태형 정원관 도건우 |
||
대한화성 | 썬비 | 의류 |
김태형 정원관 도건우 |
|
도신산업 | 코보트 | 완구 |
김태형 정원관 도건우 |
|
동원냉동식품 |
양반만두 순살돈까스 옥수수고로케 |
식품 |
김태형 정원관 도건우 |
|
1990년 | ||||
허리케인[21] | 식품 |
김태형 정원관 도건우 |
|
|
주식회사 제제 | 제제 | 의류 |
김태형 정원관 도건우 |
|
1997년 | ||||
부루펜 | 의약품 |
이상원 정원관 김태형 |
8. 수상
수상 |
|||
<rowcolor=#fff> 날짜 | 시상식 | 수상부문 | 비고 |
1988년 | |||
12월 25일[22] | 골든디스크상 | 롯데파이오니아상 | 통화중 |
12월 30일 | 1988 KBS 가요대상 | 올해의 가수상 | 일급비밀 |
1989년 | |||
12월 30일 | 1989 KBS 가요대상 | 올해의 가수상 | 사랑하고 싶어 |
9. 그 외
-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멤버 중 이상원이 성폭행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된 적이 있었으며 이후 무혐의로 밝혀졌다고 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포털에서 '이상원 무혐의'란 키워드로 뉴스 검색을 해보면, 이 기사 말고도 다른 매체의 기사도 검색되긴 하는데, 링크가 깨진 탓에 기사 전문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상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또한 병크라고 보아야 할 지도. 사실 과거 사례를 보면 나중에 무혐의가 밝혀진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넘어가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 80년대 말엽, 연재하던 신문수 화백의 로봇 찌빠에서 불나서 빨리 소방차 불러와!라고 하자 찌빠가 진짜로 노래부르던 소방차 3명을 데려와 다들 멘붕시킨다. 당사자들은 '대체 뭐야?? 갑자기 로봇이 나타나서 공연 한창 중인 우리들을 여기로 데려왔는데?' 어이없어 하고 팔팔이가 불났는데 왜 이 사람들을 데려와!?라고 버럭거려 찌빠가 '소방차 부르라고 하기에 방송에 이 사람들 나와서 이 사람들인지 알았어' 무안해하며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당연히 원래대로 공연하던 곳으로 데려다준다. 이 밖에 허영만 화백의 날아라 슈퍼보드에도 깜짝 등장한 바 있는데, 불이 나서 소방차를 부르자 이들이 나타나 '사랑하고 싶어'를 부르며 오줌으로 불을 끄는 다소 엄한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다.
-
의외로
일본에서도 인지도가 있는데,
일본의 개그맨 유니트인
다운타운이 당 그룹의 어젯밤 이야기를 커버한 것이다. 한글 가사도 똑같이 커버했는데,
일본어발음 구조상의 한계인지 가사 첫마디인 '어젯밤에'를 표기한 오쟈파멘(オジャパメン)이라는 제목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본 쇼프로에서 한국 관련 소재로 이따금 언급되기도 한다.
소방차를 모르는 세대도 '오쟈파멘'은 알 정도애초에 소방차는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의 인기가 있어서[24], 그 당시 일본에서 한국어로 라이브 공연을 한 적도 있다. 실제로 다운타운하고 소방차하고 같이 공연한 영상도 있다. 가끔씩 이 영상을 뒤늦게 본 넷우익들이 한류가 어쩌고 하는 음모론을 내세우기도 하는데, 한류라는 단어는 그냥 존재하지도 않을 시기이다. 한류라는 말은 2000년 H.O.T.의 중국 콘서트에서 중국 언론이 처음 사용한 단어다. 다운타운이 당시에 방송에서 이런 식으로 한국 노래를 몇몇곡 부르기도 했다. 니코동에 보컬로이드 합창 커버까지 존재한다고 한다. # 당시의 이러한 일본에서의 인기 소식이 한국에까지 전해지며 여세를 몰아서 소방차는 무려 6년만에 새 앨범을 내 놓는다.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인 'G Cafe'를 당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신인 작곡가가 만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노래의 표절 논란이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표절이 아닌 것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이 여파로 소방차의 제2의 전성기는 한일 양국에서 모두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25]
-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짝퉁 소방차를 연기한 배우가 하필 이름이 '이상원'인 바람에 실제 소방차 이상원이 카메오 출연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다른 이상원이다.
https://ent.sbs.co.kr/news/article.do?article_id=E10009596677. 극중 나이트클럽에서 박창우(
김성균)는 밤무대 출연가수로 소방차를 부른다면서 어디서 이미테이션 댄스팀을 데려온 후 섭외비를 삥땅쳤는데, 그 사실을 알고 같이 숟가락 얹으려는 김서방(
마동석)과 싸우다 맥주병으로 김서방 머리를 후려갈겨 뻗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거 똑같구만, 붕붕 날라싸코!
- 94년 4집 활동 이전 93년 7월경에 소방차2 라는 타이틀을 달고 3인조 그룹의 음반이 발매 되었으며 기존 소방차의 2집곡인 통화중의 후속곡 등이 수록 되어 있다.
[1]
소방차의 팬클럽은 프로덕션이 운영하지 않고 팬들이 자체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전국에 약 30여개가 있다. (출처: <Music Life> 1990년 3월호)
[2]
앨범 발매일 기준
[A]
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제작팀, Legend 100 artist : 대한민국 음악의 발견(서울:한권의책, 2013), 361.
[A]
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제작팀, Legend 100 artist : 대한민국 음악의 발견(서울:한권의책, 2013), 361.
[A]
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제작팀, Legend 100 artist : 대한민국 음악의 발견(서울:한권의책, 2013), 361.
[A]
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제작팀, Legend 100 artist : 대한민국 음악의 발견(서울:한권의책, 2013), 361.
[7]
다만 후술되어있듯 정작 가요프로 1위는 달성한 기록이 없다.
[8]
태진아,
심신,
전유나,
구창모를 키웠다.
[9]
그래서 혹자는 DSP의 1호 가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따지면 이땐 DSP가 있지도 않은 시절이라 맞는 말은 아니다. 소방차의 소속사는 엄연히 한밭기획이었다. 여하튼 이호연은 소방차의 성공을 본 이후, 한국에도 아이돌 그룹이 뜰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서 살던 집을 털어 1991년 DSP(당시 이름은 대성기획)를 창업한다.
[10]
80년대 영미권 아이돌 그룹이 KPOP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돌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KPOP 아이돌 공식에 따르지 않는다고 아이돌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다른 부분에 집중해서 그렇지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큰 틀은 소방차도 다를 게 없다. 물론 소방차를 현재의 KPOP 아이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1]
2007년 10월 12일자 <이재용 정선희의 기분 좋은 날>에서 이상원과 정원관은 동갑이라고 하였다.
[12]
이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는 소방차 멤버
김태형이 프로듀싱한
NRG가 이어갔고, 그 이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2000년대 후반되어
2PM이 다시 가지고 나온다. (이들의) 같은 소속사 후배 그룹인
갓세븐도 마찬가지. 하지만 위험성 때문인지 두 그룹 다 데뷔 초에만 선보였고 이후부턴 보여주지 않는다. 최근
언더나인틴의
전도염이 퍼포먼스팀의 경연곡인 ‘We are young’에서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13]
소방차의 전매 특허 같은 백 텀블링 같은 아크로바틱 스타일의 안무는 사실
쟈니스의 전매 특허다.
SMAP도 데뷔 초기에는
백 텀블링하던 그룹이었고(특히 백 덤블링은
쿠사나기 츠요시가 잘했다.)
TOKIO도 밴드이지만 데뷔 전에는 댄스무대도 자주 가졌고,
히카루GENJI와 SMAP의 무대에서 백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당시에는 멤버들 모두 백 텀블링이 가능했다.
아라시와
KinKi Kids 역시
쟈니스 주니어 시절과 데뷔 초기에는 덤블링을 했다. 아라시에서는 특히
오노 사토시가 아크로바틱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소년대의 백업댄서를 하기도 했다. 참고로 쟈니스에서는 68년에 데뷔한 포 리브스가 최초로 백 텀블링을 선보였고,
룰라의 천상유애 사건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닌자 역시 아크로바틱을 이용한 안무를 자주 선보였으며, 후배조 중 하나인
A.B.C-Z의 뜻은 아크로바틱 보이즈 클럽의 약자이다.
[14]
하지만 이 이후로 건강이 악화되어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15]
트로트를 템포만 빠르게 했다고 하는 얘기도 있으나 이건 좀 심한 폄하다. 훗날의 트로트곡들이야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익숙해졌으니 비슷한 사운드를 내겠지만 당시의 트로트곡에서는 이러한 사운드를 내지 않았다. 중간에 전자음이 나오는데 당시의 트로트는 이런 사운드가 없었다. 또 드럼비트만 봐도 절대 트로트라고 할 수 없고 그나마 소위 말하는 70년대 말 80 초의 락뽕에 가깝다면 그런가 싶은 수준이다. 즉 락뽕 특유의 스타일, 멜로디와 창법은 트로트삘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좋아하는 락그룹을 섞어서 만드는 그 느낌을 락이 아니라 댄스로 바꾼 것이지 당시의 트로트라고 볼 수는 없다. 김명곤, 송홍섭, 유영선 등 소방차 1집의 작곡가들을 봐도 락계열에 가깝지 절대 트로트 계열이 아니다. 컨셉에서 소년대 좀 따라했다고 폄하가 너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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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87년에 나온 젊은 댄스가수인 김완선의 나홀로 뜰앞에서와 비교해 봐도 좀 멍청했다. 김완선은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말없이 슬픈 발자국 남기고 떠나갔네 등 꽤 문학적인 구절이 있으나 소방차는 어젯밤에 난 네가 미워졌어 어젯밤에 난 네가 싫어졌어 같은 매우 멍청한 가사를 구사하고 있다. 전체적인 가사내용도 당시의 조류를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어서 그나마 최소한의 내용과 기승전결이 있는 정도다. 심지어 난 알아요보다 가사의 수준이 낮다. 즉 옛날 영미 아이돌들이 저연령대를 노린 멍청한 가사 수준으로 욕 먹을 때와 같은 종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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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긴 정확히 일치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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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긴데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가 나왔다고 해서 그와 별로 시간차이도 나지 않는 1세대 아이돌 작곡가들이 다 흑인음악으로 장르변경해서 활동했을 리가 없다. 당장 서태지부터가 흑인음악과 락의 결합이었다. 1세대 아이돌들 노래에 랩은 다 들어갔지만 굉장히 수준이하였고, 흑인음악 성향이 별로 짙지 않았다. 대중들의 취향도 흑인음악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즈투멘이나 머라이어 캐리처럼 아예 가창력으로 때려박는 R&B 거장들에게는 호의적이었으나 힙합은 영 아니었다. 회상해 보면 2세대 아이돌들도 힙합색이 그렇게 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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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본토힙합조차도 황금기는 86년부터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90년대 중반이 동부 서부의 대립이라는 심볼을 내세워서 가장 대중적으로 불타오른 시기다. 이 시기의 두 아이콘인 비기는 94년에 데뷔 앨범이 나왔고 투팍도 91년에 데뷔해 동서부 대립세를 등에 업고 95년에서야 앨범이 1위를 차지한다. 나스, 우탱클랜, 제이지, 스눕독, 닥터드레 등 그 외 힙합황금기의 대표적 인물들도 대체로 93년 정도를 전후해서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는 당시 한국 환경을 고려하면 1세대 아이돌들이 활동할 시기에 기성 작곡가들이 갑자기 자신의 기존 성향을 뒤엎고 힙합색을 발휘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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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당시 대중들은 미국 대중문화에 관해 힙스터적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말고는 힙합에 별 관심도 없었으며 호의적일 이유도 없었고 듣는다 해도 뭐가 좋은지도 몰랐고 특히 당시의 아이돌 수요층하고는 아예 겹치지도 않았다. 그러니 상업적으로 아이돌을 제작하는 입장에서 힙합은 크게 고려되지 않거나 어그로용으로 사용하는 정도였다. 당시의 이런 상황을 방증할 만한 사건이 힙합으로 어그로를 끈다고 화나서 막말을 뱉던 이하늘 - 베이비복스 논쟁이다. 즉, 널리 알려진 아이돌 계보 썰과는 상이하게도 실제로 1세대 아이돌들은 소속사건 작곡가건 가수건 팬이건, 그 가운데 누군가는 좀 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겠지만 나온 결과물을 봤을 때 힙합과는 큰 관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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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성 플래시맨을 패러디했다. 당시 플래시맨이 한국 특촬팬덤에 끼친 영향력을 엿볼수 있는 흔적이기도 하였다. 다만 슈트 소품 자체는 초신성 플래시맨의
knock-off작품인 <영웅 후뢰시>에 사용된 슈트를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웅후뢰시에 나온 슈트 색깔 구성이 이 CM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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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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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조용필도 그렇고 김완선도 일본의 아침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이 당시에도 일본에서 한국 가수들이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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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방송에서 말하기로는 멤버들이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그 작곡가를 밤중에 한강 고수부지로 끌고 가서 '지금 악보를 그려 봐' 라고 윽박을 질렀다고 한다.